사랑은 왜 아픈가 - 사랑의 사회학
에바 일루즈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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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의 방법론을 구사함에 있어 엄밀성이 떨어지고 중복 서술이 많은 것이 조금 아쉽지만(압축본을 만들어도 될 듯), 현대사회의 성과 사랑에 대한 분명히 통찰력 있는 지적. 심각한 오역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난해한 책도 아니고 이 두터운 책을 `편하게` 읽게 해준 역자의 노고를 치하하는 게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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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대 사상사
구노 오사무 외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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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이 책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묻혀버린 점이 너무나 아쉬울 뿐이다. 흙 속의 진주를 캐내는 심정으로 글을 쓴다. 특히 일본의 초국가주의를 설명하는 장은 압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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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의 밤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우석균 옮김, 알베르토 모랄레스 아후벨 그림 / 열린책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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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의 밤>(로베르토 볼라뇨, 2010, 우석균 역, 열린책들)을 읽으면서, 칠레라는 나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떠올려 보았다.. 파블로 네루다, 살바도르 아옌데와 이사벨 아옌데, 아리엘 도르프만과 그의 강렬한 희곡, <죽음과 소녀>, 아, 그리고 최근에 죽은 피노체트까지.. 막상 적어보니 꽤나 많은 이름들이 나온다.. 워낙에나 유명한 몇몇 나라를 제외한다면 이 정도 이름들을 떠올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칠레는 꽤 친숙한 나라인 셈이다.. 남한에 거주하는 라틴 아메리카 비전공자(사실 문외한에 가까울텐데)가 이 길쭉한 나라에 대해 이 정도 알고 있는 것은 역시 두 나라의 현대사의 겹쳐지는 비극 때문인가..

비교적 짧은 분량의 소설이긴 하지만, 장 구분도 없이, 계속 주인공인 한 신부의 독백과 그의 기억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과의 대화로 일관하는 작품을 읽는 것은 그리 녹녹치 않았다.. 아직까지도 소설은 <이동 중>에 읽어야 하는 장르여야 한다는, 다시 말하면 책상에서 읽으면 왠지 안 될 것 같은 <강박관념>을 갖게 만드는 장에 속해 있는 신분으로서, 이런 작품은 내심 <부담스러운> 것이다..볼라뇨는 결코 독자에게 친절한 작가가 아니다..

불문율을 깨고(물론 최근 들어 종종 깨지고 있지만) 책상에 앉아 읽는다.. 전반부의 느긋하던 템포가 중반부로 넘어서면서 갑자기 빨라지기 시작한다.. 왠지 <구린> 냄새가 나는 강요된 유럽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사회주의를 향한 칠레의 길>을 내건 아옌데의 집권, 희망과 혼란, 그리고 짧은 기간의 사회주의 실험을 종식시킨 군부 쿠데타와 뒤를 이은 독재자 피노체트의 집권이다.. 하지만 칠레가 들썩들썩하던 이 시기, 그는 철저히 <책 속의 세계>로 숨는다.. 아옌데 집권기인 만 3년 동안 그는 호메로스로부터 시작해서 투키디데스, 플라톤으로 이어지는 그리스 작가들의 책을 읽는 데 전념할 뿐이다.. 그리고 대통령궁 폭격과 아옌데의 자살로 귀결되는 피노체트 집권 초기, 그가 했던 일은 (강요에 의해서이긴 하지만) 피노체트를 필두로 한 쿠데타의 주역들에게 <속성>으로 2주일에 걸쳐 마르크스주의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물론, 그는 <비단 그뿐만 아니라, 칠레를 떠나지 못한 많은 지식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그다지 없었다>며 자신의 행위를 변호한다....

우리는 권태에 찌들어 있었다. 우리는 책을 읽었고, 권태를 느꼈다. 지식인들이란. 밤이고 낮이고 책만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밤이고 낮이고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앞을 못 보는 티탄도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다. 요즈음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칠레 문인과 예술가들은 가능하면 쾌적한 장소에서 똑똑한 사람들과 만나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었다. 주로 정치적 성격이라기보다 개인적 성격의 문제들 때문에 많은 친구들이 칠레를 떠나버렸다는 무시할 수 없는 상황 말고도 통금이 문제였다. 밤 10시에 다 문을 닫아 버리니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대체 어디서 만날 수 있겠는가? 다들 알고 있듯이 밤이란 만남을 가지고, 속을 털어놓고, 비슷한 사람들 사이에 대화를 하기에 적절한 시간이거늘.

그런 답답한 상황에서 당시 그가 가끔씩 찾아간(회상은 항상 자신에게 유리하게 흘러가는 법이다.. 그는 흥청망청한 분위기에 거리를 두며 가끔씩 그 곳을 들를 뿐이었다고 미리 말해둔다) 곳이 <마리아 카날레스>라는 한 여류 작가의 저택(살롱)이었다.. 나무가 울창한 정원에 둘러싸인 커다란 집, 쾌적한 응접실과 벽난로와 좋은 위스키와 코냑이 있는 집. 그리고 교양있는 전형적인 미국인처럼 보이는 그녀의 남편 <지미>와 당시는 아이였던 두 아들.. <신의 손길에서 버림받은 이 나라에 남아 있는 극소수의 교양 있는> 사람들에게 그 곳은 안식처와 같았다..
그러던 어느날 이상한 소문이 들리기 시작한다.. 초대받은 한 손님이 화장실을 찾다가 우연히 그 저택의 지하에 있는 한 방에 들어간다.. 그리고 거기서 철제 침대 위에 손발이 묶인 벌거벗은 남자, <상처, 습진 비슷한 피고름, 마구 다루어진 신체 부위들, 여러 군데 뼈가 부러진 듯 험하게 부어오른>, 모진 고문을 받은 흔적이 역력한 한 남자를 보았다는 이야기다..하지만 당시 그 손님은 소리없이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연회로 시끌법썩한 연회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응접실에 도달했을 때 그는 위스키를 한 잔 또 한 잔 청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그 소문이 퍼진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 즉 칠레의 봄이 찾아온 후였고, 그 때까지도 매주 두 세 차례, 그 화려한 연회는 계속 되었다는 것을 덧붙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모든 칠레인이 화해해야만 했던 순간이 찾아왔을 때>, 사실 그녀의 남편 지미는 칠레 국가정보국의 핵심인사이고, 그 저택의 지하실은 반체제 인사들을 심문하고 고문하던 장소임이 밝혀진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 저택의 야회를 드나들던 모든 이들은 그녀로부터 등을 돌린다.. 그녀는 혼자가 되었다.. 남편은 미국으로 가버린다.. 불야성을 이루던 저택은 폐허가 된다.. 그런 이야기다.. 실제 당시 칠레에서 있었던 실화에 토대를 두었다는 이 이야기에 왠지모를 <친연성>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리고 얼마 후 홀로 남겨진 여인이 살고 있는 그 저택을 주인공이 찾아간다.. 주인공의 눈에 비친 저택의 쇠락한 풍경, 그리고 여인과의 대화는 이 소설의 <절정>이다..

집을 부술 겁니다. 지하실을 허물 거예요. 이곳에서 지미의 부하가 스페인인 유네스코 직원을 죽였죠. 이곳에서 지미가 세시리아 산체스 포블레테를 죽였어요. 가끔 아이들과 같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 전기가 잠깐씩 나가곤 했어요. 비명 소리는 전혀 들린 적이 없고, 전기만 갑자기 나갔다가 조금 후 다시 들어오곤 했어요. 지하실을 보러 가고 싶으신가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예전에 조국의 문인들과 예술가들과 문화인들이 모이던 응접실을 몇 발자국 걸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만 가겠습니다, 마리아, 가봐야 해요. 그녀는 자지러지게 웃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저 내가 상상력을 발휘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현관에 다다랐을 때(천천히 밤이 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저주 받은 집에 다시 홀로 남게 되는 것이 갑자기 두려운 듯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손을 꽉 쥐어 주고 기도하라고 권했다. 나는 너무 지쳐 있었고 내 말에는 확신이 없었다. 더는 할 수 없을 만큼 많이 기도 했답니다, 그녀의 대답이었다. 기도하세요, 마리아, 기도하세요, 자식들을 위해서요.

아이들과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 가끔 전기가 나가던 그 시간이, 지하실에서 <전기고문>이 벌어지던 시간이었다.. 그녀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물론 알았을 것이다.. 직장에서는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무서운 친위대원이지만, 집에 돌아오면 손을 씻고 그 손으로 아이를 안아주는 자상한 아빠.. 2차대전 시기, 아니 그 전부터 만들어진 <악마성>은 이렇게 계속해서 진화한다.. 끔찍한 전기고문이 벌어지는 지하실(아.. 얼마 전 유명을 달리한 김근태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은...)과 아이들과 같이 텔레비전을 보는 따뜻한 1층 거실의 대조는 이 작품이 그려낸 가장 처절하면서도 값진 수확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악마가 아니다.. 이미 그녀의 내면은 파괴되어버렸다.. 그리고 그녀뿐이겠는가.. 지하실의 소문을 알면서도 뻔질나게 그 집을 드나들었던 대다수의 문인들 역시 <연루>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마지막 결말의 여운은 다음으로 남겨두기로 한다..아마 그것은 이런 이야기를 쓰는 것, 즉 <문학>이란(비단 <문학>만일까.. 그건 <재현representation>을 업으로 하는 모든 학문이 다 마찬가지가 아닐까) 도대체 무엇이란 말이냐에 대한 작가의 <잠정적인> 대답일 것이다.. ,

산티아고로 차를 몰고 돌아오면서 그녀의 말을 생각했다. 칠레에서는 이렇게 문학을 하지. 하지만 어디 칠레에서만 그런가. 아르헨티나, 멕시코, 과테말라, 우루과이, 스페인, 프랑스, 독일, 푸르른 영국과 즐거운 이탈리아에서도 그런걸. 문학은 이렇게 하는 거라고. 아니 우리가, 시궁창에 처박히기 싫어서,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렇게들 한다고. 이윽고 나는 다시 유다의 나무, 유다의 나무를 흥얼거렸고, 내 자동차는 다시금 시간의 터널 속으로, 시간의 속살을 갈아부수는 거대한 기계 속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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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쥐스뜨 2014-04-06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스타 가브라스의 영화 <실종>과 같이 보아도 좋을 듯..
 
향수 (양장)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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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라면 아마 이 책을 읽고 냄새와 대공포라는 장을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나, 피에르 리비에르>와 겹쳐 읽어도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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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양장)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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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를 읽다..
무슨 철지난 <쥐스킨트>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고 말할 지도 모른다.. 한 때 유행했던, 그것도 다른 소설(<좀머씨 이야기>)이 유명세를 타면서 덩달아 읽혔던 책 아닌가..
그런 줄 알았고, 또 그렇게 대충 읽었다.. 94년 정도의 일이었다.. 이번에 다시 꼼꼼이 읽으면서 만만치 않은 작품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세미나>란 여전히 유용한 자기 훈육-장치다.. 그리고 역시 (밥맛!이긴 하지만-정말?) <아는 만큼 보인다>..

세미나의 어떤 한 분은 이 소설이 정확히 서유럽 사회에서 만들어진 <성자전>의 한 패러디였고, 그래서 많은 유럽인 독자들에게 친숙하게 다가왔다고 했다.. <그렇겠구나> 생각하면서도 내 눈을 끌었던 대목은, 사실 소설의 첫 부분이었다..
18세기 프랑스에 한 남자가 살고 있었다.. 이 시대에는 혐오스러운 천재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는 그중에서도 가장 천재적이면서 가장 혐오스러운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이 책은 바로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사드나 생-쥐스트, 푸셰나 보나파르트 등의 다른 기이한 천재들의 이름과는 달리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라는 그의 이름은 오늘날 잊혀져 버렸다. 물론 그것은 오만, 인간에 대한 혐오, 비도덕성 등 한 마디로 사악함의 정도에 있어 그르누이가 그 악명 높은 인물들에 뒤떨어지기 때문은 아니다. 단지 그의 천재성과 명예욕이 발휘된 분야가 역사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않는 냄새라는 덧없는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18세기의 천재들의 삶에 대해서는, 저명한 전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붓에 의해 대부분 평정되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특히 그의 <푸셰,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을 읽어보라.. 한 시대의 천재들의 삶을 입체적으로 그려내는 그의 솜씨는 거의 예술에 가깝다-- 이미 대가에 의해 평정된 그 지대에 쥐스킨트는 왜뛰어들었을까(더구나 이 작품은 그의 처녀작이다).. 역시 방점은 <천재>가 아니라 <냄새>에 찍혀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시 말하면 <왜 냄새가 그토록 중요했는가>라는 물음이다..  

미셀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18세기 중엽의 대공포(grand peur)에 대해 다음과 같은 흥미있는 주석을 달고 있다..
18세기 중엽의 몇 해 사이에 갑자기 공포가 솟아오른다. 의학용어로 표명되지만 근본을 헤아려보면 도덕적 신화에 의해 고조되는 공포가 그것이다. 수용시설에서 퍼져나가 이윽고 도시를 위협하려는 몹시 불가사의한 병을 '누구나' 두려워한다. 감옥 열병이 이야기되기도 하고, 유죄선고를 받은 사람들의 호송 수레, 쇠사슬로 줄줄이 묶여 도시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병의 원인을 흘린다고 하며, 괴혈병의 전염이 상상되기도 할 뿐만 아니라, 병으로 인해 탁해진 공기가 주거 구역을 오염시킬 것이라 추측되기도 한다. 그리고 중세에 퍼졌던 커다란 공포의 이미지가 새롭게 대두되면서, 격렬한 공포의 은유를 통해 제 2의 공황을 촉발시킨다..

18세기 중엽은 다름 아닌 앙시앙 레짐의 절정기, 즉, <혁명 전야>이다.. 누군가는 이 텍스트에서 혁명 전야의 <대공포>를 연상할 지도 모르지만(이미 푸코 이전에, 빛나는 혁명사가 알베르 소불은 <1789년의 대공포>라는 책을 썼다.. 물론 그가 말하는 <대공포>는 푸코의 그것과는 종류가 조금 다르지만..) <대공포>라는 당시의 혼란이 푸코에게 중요했던 것은 그것이 바로 수용시설에 대한 새로운 <관리>의 출현, 나아가 <비이성>에 대한 <이성>의 무자비한 개입이 이루어지는 한 전환점이었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는 뭐 누구나 어렵지 않게 이해하고 있는 내용일텐데, <향기>를 읽고 있노라니, <광기의 역사>의 그 다음 구절이 상당히 흥미롭게 읽혔다는 것이다..
18세기 후반기에 전개될 개혁운동의 첫번째 기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불순물과 독기를 걷어내고 그러한 발효현상을 모두 완화시킴으로써 오염을 줄이며 해악과 병이 공기를 탁하게 하고 도시의 대기로 전염되는 것을 막는 데 있다. 구빈원, 형무소, 모든 수용의 장소는 더 확연하게 고립되고 더 맑은 공기로 둘러싸여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18세기 중엽의 광기/비이성과의 전쟁은 동시에 냄새와의 전쟁이기도 했다는 것.. 그리고 <향수>산업의 발전이 도시를 뒤덮고있는 냄새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 공포들을 진정시키기 위한 고래로부터의 한 비책이었다면, 18세기라는 시기는 일반의 향수로도 그 냄새의 공포를 억누르지 못하는, 다시 말하면 하나의 한계점에 도달한 시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르누이는 이 묵시록적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출현한 <사도>가 되는 것이다..

아.. 계속 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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