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항해 - 감정 이론, 감정사史, 프랑스혁명
월리엄 M. 레디 지음, 김학이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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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인류학 관련 묵직한 저작. 오스틴의 화행론을 변형한 이모티브 이론으로 구성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저자의 의도가 돋보이지만, 구사되는 개념들은 아직은 헐거운 수준. 그래도 프랑스 혁명사를 감정사적으로 읽어내려는 시도는 흥미로웠다. 재판기록에 주목한 것 역시 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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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티 코뮌 - 동아시아 이방인이 듣고 쓰는 마을의 시공간 아프꼼총서 4
신지영 지음 / 갈무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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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쳐든 지 사흘이 지나서야 비로소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었다. 중간 중간 강의도 있었고, 다른 일도 있었지만, 아침 9시부터 늦은 저녁까지 책상에 앉아서 일하는 지식 노동자의 평소 작업속도에 비춰본다 해도 꽤 많은 시간이 걸린 셈이다. 물론 540여 페이지에 이르는 책의 볼륨도 만만치 않았지만, 무엇보다 7년여라는 긴 시간 동안 낯선 타지에서 이방인의 시선으로 가까이서 그리고 멀리서경계를 넘나들면서 관찰하며 기록한 이 노작을 가볍게 독파할 수는 없었다.

책장을 넘기노라면 자신이 지나치는 거리의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에너지를 느끼면서그 느낌들을 섬세히 기록하는 저자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그 생생한 이미지야말로 무엇보다 이 책의 지닌 가장 큰 미덕이다. 이 책이 단순한 여행기와 구분되는 이유는, 이방인stranger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철저한 자각 때문일 것이다. 예전 짐멜G. Simmel이 말했던 것처럼 이방인은 기본적으로 오늘 와서 내일 가는 그런 방랑자가 아니라, 오늘 와서 내일 머무는 그러한 방랑자”, 더 이상 이동하지는 않지만 오는 것과 가는 것의 분리를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한불완전한 존재다. 하지만 이러한 불완전성이 오히려 그에게 현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제공해준다. 그것은 한 사회가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관습들, 통념들을 낯설게 하고, 거기에 균열을 만들어내는 눈이다.

 

이 책이 다루는 2009년부터 2015년까지의 일본사회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스테레오타입의 일본, 즉 고요하고 정적인 균질한 공동체 사회가 아니다. 그곳은 점점 자신들의 생존권을 압박해가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야숙자들이, 여성과 퀴어들이, 자이니치(在日)들이, 오키나와인들이,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에 공감하는 일본인들이 서로 모이고, 이야기를 나누고 거리에 나서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외치는 공간이다. 물론 그러한 소란스러움이야말로 공동체라고 불리는 사회의 본연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다만 공동체’, 혹은 사회라는 이름으로 그 목소리들을 죽이면서, 없는 척 하는 것일 뿐.

 

따라서 이 웅성거림들은 어느 순간(어느 임계점에 도달하면) 큰 목소리로 터져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일본 사회에서 그 가장 커다란 계기는 아마도 20113.11 대참사(지진+쓰나미+방사능 누출이라는 복합재해)였을 것이다. 특히 방사능이라는, 자신들이 이전에 결코 대면해보지 못한, 눈에 보이지 않고, 냄새도 맡을 수 없지만 사람들의 몸속에 들어가 치명적인 해를 일으키는 이 어마어마한 위험물질의 확산은 일본 사회를 불안과 공포에 빠트리고 있다. 하지만 바로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이 떨림과 불안이, 전통적인 정치 운동에서 결여된 부분들을 드러낼 수 있으며”, 그러므로 불안은 새로운 형태의 분노가 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쓴다. 실제로 3.11 이후 일본 각지에서 전개된 탈원전 데모에서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풍경은 불안과 공포, 그리고 분노()였다. 2011년 여름과 가을, ‘60년 안보투쟁이후 가장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던 이유도 방사능에 대한 불안, 그리고 3.11 이후 아무런 수습도 하지 못한 채, 사람들을 기만하면서 심지어 원전을 재가동하려고 하는 정부, 도쿄전력, 그리고 미디어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파국은 반드시 혁명적 상황만이 아닌 또 다른 반동의 힘들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아마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라는 슬로건 아래 결집되는 힘일 것이다. 동북(東北)대지진은 어느새 동일본(東日本)대지진으로 명칭이 바뀐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차별의 대상이었던 동북’, 도호쿠 지방에 왜 도쿄전력의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가 라는 지속되는 차별의 구조는 은폐되며, 대신 일본 곳곳에는 힘내라 닛뽄이라는 구호가 울려 퍼진다. 더구나 방사능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고 당장 그로 인한 피해가 나타나지 않는, 그리고 없애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어찌해볼 수 없는적과의 싸움에서 점차 피로와 무력감에 빠지는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경제부흥’, ‘강한 일본이라는 유혹의 목소리가 침투해 들어간다. 20113.11 이후 저자가 도쿄의 거리를 걸으면서, 그리고 집회현장에서 확인했던 것도 바로 그러한 모순된 정동들의 충돌이었으리라.

 

물론 지금 쓰고 있는 이 서평이 다루고 있는 부분은 이 방대한 저작의 극히 일부분이다. 어찌 A4 1-2페이지로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씌어진 낯선 여행의 기록의 전모를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는 자이니치’, ‘오키나와’, 야숙자, 재특회에 반대하는 시민들(‘내 친구에게 손대지마라’), 그리고 뉴욕의 반인종주의 모임들까지 다양한 마을’(코뮌)들과 마주치면서 저자가 예민한 감수성으로 보고 듣고 느낀 많은 사유들이 촘촘히 짜여져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일반적인 사회과학이 취하는 ‘~문제의 구성과 같은 입장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구도는 도미야마 이치로冨山一郎가 지적한 것처럼 아픔과 관련한 경험을 한정된 사람들에게 숙명처럼 떠맡기고는 양심이나 연민에 근거해서 혹은 때로 정치적 슬로건과 함께 아픔을 이야기하는방식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도를 회피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연루에 대한 자각이다. 저자가 이 마을들에 대한 기록을 통해서 의도했던 것은 코뮌에 대한 학문적인 문화기술지라기보다는, 연루에 대한 자각을 통해 그 다양한 마을들을 접속하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이 책 역시 거의 모든 책들의 운명처럼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이 책에 나오는 개개 코뮌들에 대한 기술들을 보면, 엄밀한 의미에서의 객관성이 결여된 대목들이 종종 발견된다. 또한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일본에서 다시 학위를 밟고 있는 여성 연구자라는 저자의 계급적/젠더적 정체성역시, 그가 접속하는 사람들의 폭을 제한하고 좁힌다. 실제로 이 책에 언급되는 소수자 코뮌의 목소리들은 어떤 점에서 본다면, 여전히 상당한 정도의 고학력 여성들의 목소리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이러한 범위의 제한이 이 책의 한계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저자는 이미 이러한 입장 지어진 주체’positioned subject로서의 자각을 전제로 하면서, 때로는 아주 솔직히 그 한계를 토로해가면서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여성성에 대한 자각이 기존의 코뮌의 남성주의적 한계를 짚어내고, 공통적인 것commons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종종 저질러지는 특수성에 대한 억압을 예리하게 포착해내는 감각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이 책의 관점은 매우 소중하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매력적인 글은 에필로그, 끝나며 시작하는 글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에필로그는 나중에 덧붙이는 말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지금을 기록하는 것은 뒤늦은 후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은 늘 뒤늦게 덧붙이는 것이지만, 늘 어긋나 버리는 시간 감각 속에서 이후를 시작하고 상상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기에, ‘은 항상 끝나며 시작하는 운명을 가지게 된다.”라는 이 문장은, 우리 사회, 아니 동아시아, 세계 전반에서 작동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그리고 그로 인한 소외, 빈부격차, 배외주의, 새로운 인종주의가 만연해 있는 이 사회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잿빛 우울함과 무력감에 젖어 있는 글 쓰는 노동자들이 다시 펜을 들어야 하는 이유를 간명하게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이 증언할 수 없는 타자들의 목소리”, “침묵과도 같고 웅성거림과도 같고 파열음과도 같은, 소리 소문들의 비밀스러운 공명 장치이자 현재적 아카이빙이 되기를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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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제 유토피아 - 정부, 기업, 대학, 일상에 만연한 제도와 규제에 관하여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김영배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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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적인 서문과 1장에 비해 2장으로 갈수록 힘이 조금 떨어지는 것이 아쉽다. 그래도 월가 점령운동에 대한 참여적 실천 속에서 구조적 폭력과 불평등한 상상력의 구조, 그리고 관료제의 문제점을 풀어내고자 하는 시도는 지금 우리 학계의 무능력과 빈곤의 지점을 짚어낸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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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 - 사육 외 2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1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승애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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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집이라 훨씬 믿음이 가는 컬렉션. 또 여기 실린 많은 단편들이 그의 연작소설의 일부라는 점에서 오에 월드로 들어가는 플랫폼 역할을 해줄 수도. 6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로 하여금 지치지 않고 읽고 쓰게 만들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삼가 고개를 숙인다. 이제는 전집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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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의 문화 인문과학 코스모스 4
이로카와 다이키치 지음, 박진우 옮김 / 삼천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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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이란 간사한지라, 책을 주문했을 때의 마음과 책이 도착했을 때의 마음이 다르다..

그 며칠 사이에, 혹은 몇주 사이에 다른 일상이, 또 다른 관심이 끼어들면서, 처음 그 책을 주문했을 때의 절실함이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책은 때가 되어야 읽는 이에게 말을 거는 것일까..

두 달 전 주문했던 이로카와의 책을 꺼내 읽으면서, 왜 이 책을 주문했는지, 그 때의 마음이 되살아났다..

예전 일본의 도서관에서 근대사 관련 리뷰를 하면서, 목록 1순위에 뽑아두었던 역사가..

하지만 그 묵직하고 값나가는 <메이지 정신사>를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공짜 복사카드로 열심히 돌렸던 기억이 난다.. 박스 어딘가에 잘 보관되어 있겠지만, 복사된 책이란 한 번 박스에 들어가면 좀처럼 나오기 힘든 법이다..

 

일본 민중사학, 특히 민중사상사 분야에서 이로카와 다이키치라는 이름은 보통명사로 통한다.. 주저인 <메이지 정신사>가 함께 소개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메이지의 문화>라는 이 책만 보더라도-특히, 자유민권운동을 다루는 3, 4, 5장은 압권이다- 100여년이나 떨어진 과거, 지방 민중의 세계에 도달하고자 하는 저자의 각고의 노력이 잘 드러난다.. 그 세계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좀처럼 찾기 힘든 사료를 찾아 몸소 지방의 여기저기를 뛰어야 하고, 운좋게 발견된 소수의 사료를 정밀하게 읽고, 또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여기에 역사적/문화적 상상력을 더하는 노력이 요구된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을 통해 조금씩 드러나는 민중의 세계는 결코 <진보>라는 이름의 사관으로 일관되게 정리될 수 있는 그런 공간이 아니다.. 그 공간에는 다양하고 모순적이면서 굴절된 가치관, 심성, 그리고 주의들이 충돌한다.... 서양의 한 정치사가는 이를 농민의 <도덕경제>라는 아주 훌륭한 개념어로 포착해냈다.. 물론 개념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한 차원 위의 수준이다.. 하지만 개념을 통한 정제된 논의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정도의 논의는 이미 60년대 이로카와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통속도덕>이라는, 아직은 서술적인 개념을 통해, 근대 일본의 민중봉기는 통속도덕의 충실한 실천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쓰고 있다. 통속도덕이란 소생산자가 사회적 격동을 견디며 살아가는데 어울리는 생활원리를 말한다. 하지만 경제적 불황과 과중한 세금수탈로 사회가 파탄지경에 이르면서 이들은 막다른 길에 봉착하게 된다. 봉기는 이러한 통속도덕에 입각해서 합법의 계단을 올라가던 이들이 합법의 틀을 넘어서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결코 어떤 <-주의>, <-사상>의 성숙이라고 정리될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봉기가 어떤 <매개>를 통해 일어나는가이다.. 여기에 민중봉기가 갖는 다양한 측면들이 또 한계들이 존재한다..

 

아주 간략히 이로카와의 방법론을 정리해보았지만, 이건 방법론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들의 세계를 복원해낸다는 것은 실증주의적인 작업을 넘어, 벤야민의 말처럼 어떤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과 같은 어던 기억을 붙잡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그는 이미 습기가 차서 읽기도 어려운 예전 문서들을 일일이 읽어나가면서, 지금의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전통의 세계에 갇혀 있는 그들의 정신에서, 봉기로 이어지는 계기들을, 그 도주선을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은 결코 어떤 논리-소위 '진보'-에 입각해서 그들의 움직임을 짜맞추는 작업이 아니다.. 다만 면면히 흐르는 지하수와 같은 그 생동력에서 가능성을 확인하는 것.. 그리고 그에게 자신의 역사적 작업은 1960년대, 내부로부터 변혁의 열기가 들끓어오르기 시작하던 일본 사회에서, 이 사회를 바꿔내기 위한 하나의 무기를 제공해주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에게도 민중사학의 시대는 있었다.. 저 신화처럼 이야기되는 80년대의 경험이 진보적 민중사학을 만들어냈고, 그 흐름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한국의 민중사학적 관점으로 씌어진 글들을 볼 때마다 드는 의문은 도대체 저자가 생각하는 <민중>이란 무엇일까 하는 것이었다.. 민중의 세계로 다가서려는 최소한의 학문적 고민도 없이, 민중이 (저자가 꿈꾸는) 역사의 원동력으로 호명되는 모습을 아마 한 번씩은 경험했을 것이다..

 

하지만, 또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리에게는 저 바다 건너 이로카와가 딛고 서 있는 땅과는 비교가 안 되는 거대한 민중 봉기의 경험이 있지 않은가.. 1894년 갑오농민전쟁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농민들은 왜 그 전쟁에 참가했을까.. 그들은 그 봉기의 과정에서 어떻게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전통의 세계관을 다시금 돌이켜보고, 또 이를 변형시키고, 또 파괴해가면서, 자신들이 결코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로 들어섰던 것일까..

 

섣불리 1894년과 1945년과 1980년 광주를 연결시키기 전에, 해야만 하는 많은 작업들을 우리는 스스로 방기해왔다.. 그리고 시대는 다시 수상해지고 있다..

 

과거로부터 희망의 불꽃을 점화할 수 있는 재능이 주어진 사람은 오로지, 죽은 사람들까지도 적으로부터 안전하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투철하게 인식하고 있는 특정한 역사가뿐이다. 그런데 이들 적은 승리를 거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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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 2017-09-22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1970년에 적혔을 우레 소리를 들으면서 떠나보낸 동지들을 이야기하는 저자의 짧은 후기를 보면서 현실의 혁명적 정세 속에서 단계적 진보로서의 과정이 아닌 역사의 순간 속의 인간을 살려내려고 하는 시도가 참 감동적으로 다가왔었습니다. 참 이 책을 읽으면서 한국 역사학의 저서 중에 이런 시도가 있는지 제가 과문해서 모르는건지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생쥐스뜨 2017-09-25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이니치의 역사학까지 한국 역사학 안에 포함할 수 있다면, 조경달의 <이단의 민중반란>이 그나마 맞닿아 있는 시도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많은 논의의 여지가 있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