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의 노래 - 가토 슈이치 자서전
가토 슈이치 지음, 이목 옮김 / 글항아리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주말동안 가토 슈이치의 자서전 <양의 노래>를 읽었다..

가토 슈이치의 저작은 한국에서도 꽤 많은 번역본이 나왔지만, 솔직히 그닥 <이거다>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것은 번역이 소개되는 방식의 문제이기도 했고, 딜레탕티즘을 고집하는 가토 자신의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전문화를 폐기하고, 나아가 비전문화의 전문가가 되기를> 지향한 가토의 모색 자체에는 아무런 이의가 없다.. 그것이야말로 과거 한 시대를 지배했던 知의 존재방식이기도 했고, 에드워드 사이드가 강조했던 지식인의 한 전형(사회 안에서 사고하고 고민하는 인간=아마추어)이기도 하고, 또 그래서 현대 우리 사회에 가장 부족한 부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름 세분화된 전문가들만이 넘쳐나는, 그래서 사회전반의 문제에 대해 제대로 된 발언을 하지 못하는, 또 너무나 이 시대를 걱정하셔서 자신의 목소리만이 진리라고 부르짖는 소수의 학자들이 준동하는 현재의 학계를 떠올린다면 더욱 그렇다..

 

가토 슈이치의 목소리가 차지하는 위치를 잘 보여주는 것이 <양의 노래 그 후>에서 그가 남긴 발언이다..

나는 무엇을 하지 않았던가. 첫째, 재산을 모으지 않았다. 문필업 수입과 대학 급료로 내 호구지책을 삼는 정도에 만족했고 그 이상은 바라지 않았다. 둘째,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어떤 정다이나 그 외 다른 어떤 정치적 조직에도 속하지 않았고, 선거 때 투표는 했지만 선거운동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가두의 대중집회나 시가행진에 가담했던 적도 없다. 적극적인 정치저 행동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 성벽과는 맞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돈도 없고 권력도 없고 또 어떤 조직에도 소속되지 않은 나는, 개인으로서 한 시민으로서 늘 일본 사회의 주변에 머물렀다..

 

가토의 저작에서는 마루야마 마사오나, 다케우치 요시미, 오에 겐자부로, 혹은 후지타 쇼조와 같은 전후 일본의 지식인들이 보여주었던 명쾌한 분석, 명징한 언어를 찾기 어렵다.. 아마 나 역시 <양의 노래> 이후 다시 가토의 다른 저작을 찾아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보여주는 사유의 깊이나 분석의 정확성은 위에 언급한 <대가>들에 비하면 당연히 떨어진다.. 일본의 전쟁책임에 대한 성찰도 그다지 철저하지 않고, <제 3세계>에 대한 인식 역시 그다지 깊이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결여>가 <양의 노래>가 던지는 메시지의 중요성을 폄하시키지는 않는다.. <양의 노래>가 보여주는 것은 일본이라는 한 사회에서 만들어지는 교양의 한 정수를 보여준다.. -서경식 선생은 <일본에는 드문 '저항하는 휴머니즘'>이라고 소개했지만,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나로서는 그나마 <일본에서는 소수나마 발견할 수 있는, 하지만 한국에서는 좀처럼 드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목소리는 방향감을 상실하고 앞으로 질주하는 사회 내부에서 고독하게, 항상 주변인의 시선으로, 지금 이 사회가 가는 방향성이 옳은 걸까 하는 자문을 던지게 한다.. 다시 말하면 가토가 우리에게 던지는 시사점은 그의 <발언내용>이 아니라, 그의 <발화위치>에 있다.. <양의 노래>는 그러한 <발화위치>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 자신이 살아온 전 삶을 성찰하면서 담담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흡사 짐멜이 강조했던 <이방인>이라는 존재의 필요성을 다시금 상기시켜주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말 그대로 <주변인>이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일본의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나 구제고교와 최고학부인 제대 의학부를 졸업한 그를 <주변인>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 주변성이란 <교양으로서의 지>가 갖는 위치성, 다시 말하면 문학에 대한 권위는 문학박사에게, 경제에 대한 권위는 <경제학박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시를 쓰고, 누구나 경제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의미의 교양이 갖는 위치성이다.. 그 자리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도 그다지 빛깔이 나지 않고, 또 커다란 힘을 발휘할 수 없는, 희미하지만 그래서 더욱 없어서는 안 되는 자리이다.. 가토가 간 길은 그 자리를 스스로 감내해나가는 길이었다..   

 

한국사회에서든, 일본사회에서든 그러한 교양을 찾기는 이제 힘들어졌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야말로 이러한 발화위치가 더욱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양의 노래는 결코 아름다운 시대에 자연발생적으로 울려퍼진 것이 아니다.. 가토의 삶이 보여주듯 그가 선택한 자리가 단순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끝없는 <결단>-때로는 많은 것을 포기하는-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그러한 <양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날은 언제쯤이나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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