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국가 -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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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너무 반가웠다..

세월호 <사건>을 바라보며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잠수함의 토끼>, <탄광의 카나리아>라는 연약하지만, 그럼에도 너무나 소중한 문인들의 역할을 해준 것이..

고마웠다..

 

한 때 좋아했던 <세월이 가면>이라는 노래를 이제는 못부를 것 같다..

<세월>이 너무나 빨리 지나가고 있어서..

그리고 너무나 빨리 <세월>을 잊으라고 해서..

 

황정은 작가는 글의 말미에 <누구든 응답하라>, <이내 답신을 달라>는 SOS를 타진했다..

얼마 전, 나 역시 컴컴한 바다 밑으로 가라앉은 그들의 목소리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라는 물음을 던진 적이 있다... 여기저기 메아리처럼 반향되는 그 응답들이 계속되고 있는 망각에의 의지에 대한 저항의 한 몸짓이 될 수 있기를..

 

 

세월호 이후에도 변화의 모습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직접적인 책임을 져야 할 선원들과 회사 관계자들은 재판에서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나마 한 가닥 기대를 걸었던 국정조사는 역시나 여야 의원들의 당쟁과 유가족에 대한 무시로 점철된 파행으로 치달은 채 끝이 났다. 특별법은 변질되어 본래의 의도와는 점점 멀어지고 있고, 심지어 유가족이나 생존자들은 특례입학이니, 보상금이니 하는 근거 없는 루머에 시달리고 있다. 심지어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것도 아닌데 (거리로 나선 유족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악의 섞인 목소리도 들린다. 그리고 그 한 마디 한 마디 말이 비수처럼 생존자와 유가족들의 가슴에 꽂힌다. 왜 이 사회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어린 학생들과 아직 제대로 상을 치르지도 못한 유가족들을 다시 거리로 내몰고 있는가. 왜 이 사회는 언제나 가해자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데 피해자들에게만 외로운 싸움을 강요하는 부조리가 되풀이되는가. 이것이 국가인지 묻기 전에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과연 이것이 사회인가!”

 

악몽 같던 4월의 어느 날, 착잡한 마음에 학생들과 함께 봤던 구로사와 아키라黒澤明 감독의 영화 <꿈>(1990)의 한 장면이 계속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한 에피소드에서 구로사와는 지난 아시아-태평양 전쟁에서 살아남은 한 일본군 장교가 어두운 산 속에서 전멸한 자신 휘하의 소대의 혼령들과 마주하는 인상 깊은 장면을 만들어냈다. 자신의 죽음을 납득하지 못하는 병사, 또 죽어서도 군인의 임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이승을 떠도는 병사들의 혼령 앞에서 절규하며 혼자 살아남은 죄책감을 토로하는 장교의 모습은, -과연 그의 고백이 죽은 자들에게 납득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죽은 자들에 대한 산 자들의 책임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 자들의 책임이란 죽은 자들을 애도하며, 그들이 왜 그런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는지, 죽은 그들에게 납득시켜줌으로써, 그들을 편안히 저 세상으로 보내주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본 후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나는 엄습하는 자괴감에 말을 잇지 못했다. “우리 아직 안 죽었어요. 우리가 왜 죽어요?”라고 묻는 그들에게, “나는 꿈이 있는데, 난 살고 싶은데, 나는 하고 싶은게 너무 많은데라는 마지막 절규를 핸드폰에 남긴 채 가라앉은 어린 학생에게 과연 나는, 아니 우리 사회는 과연 그들이 왜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납득시킬 수 있을까. 아직 이 사회에 <책임>과 <의무>를 지기 이전에 당연히 누려야 할 <즐거움>도 <권리>도 채 누려보지 못한 그들이 왜 차가운 바다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야 했는지 우리는 어떻게 그들에게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 그런 그들 앞에서 기존의 관습적인 애도는 사실상 불가능한지도 모르겠다. 어설픈 위로의 말을 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멜랑콜리의 어두운 심연 한가운데에서 침잠한 채, 구조되지 못하고 결국 가라앉은 이들the drowned의 목소리에 계속 귀를 기울이며 그들의 말에 성실하게 응답해야 한다. 그것은 살아남은 우리가 짊어져야 할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의무이다.

 

 

나는 그것을 듣고 비로소 내 절망을 돌아볼 수 있었다. 얼마나 쉽게 그렇게 했는가. 유가족들의 일상, 매일 습격해오는 고통을 품고 되새겨야 하는 결심, 단식, 행진, 그 비통한 싸움에 비해 세상이 이미 망해버렸다고 말하는 것, 무언가를 믿는 것이 이제는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그러나 다 같이 망하고 있으므로 질문해도 소용없다고 내가 생각해버린 그 세상에 대고, 유가족들이 있는 힘을 다해 질문을 하고 있었떤 것이다. 그 공간, 그 세월이라는 장소에 모인 사람들을, 말하자면 내가 이미 믿음을 거둬버린 세계의 어느 구석을 믿어보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제 내가 뭘 할까. 응답해야 하지 않을까. 세계와 꼭 같은 정도로 내가 망해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응답해야 하지 않을까. 이 글의 처음에 신뢰를 잃었다고 나는 썼으나 이제 그 문장 역시 수정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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