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아비춤
조정래 지음 / 문학의문학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고개를 숙이다

최근에 친척의 결혼식이 있어 삼성동의 인터콘티넨탈 호텔을 간 적이 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주변에 백화점이 있어 주말엔 늘 차량이 붐비는 곳이었다. 오후가 되어 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유달리 차가 빠지지 않자 사람들은 차량밖으로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호텔입구에서 부터 검은색 외제 승용차 십 여대가 일렬로 장관을 이루며 한 개의 차선을 독점하고 있었고 그 차량을 엄호하고 다른 차량을 막아서는 깔끔한 양복차림의 경호원들이 차량댓수만큼 당당하게 주변교통을 차단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는 약속이나 한 듯이 암묵적 합의에 의해 자발적으로 다시 차안으로 들어갔는데 나중에 확인해보니 같은 호텔에서 모그룹의 행사가 있었다고 차량은 회장과 임원들의 차였다고 한다. 어떤 면에서 그 광경은 영화속의 한 장면처럼 참 멋지기도 했는데 아무도 화를 내거나 욕을 하는 사람들은 없어보였기로 새까만 썬팅으로 전혀 차량내부를 식별할 수 없는 외제차의 외관이, 그들이 무사히 빠져 나갈 때까지 두말없이 꼼짝을 않고 있던 우리들의 인내가 오늘 새삼 신기하게 생각된다. 책을 덮고는 그때 일반차량의 행렬에 끼여 위압적으로 보이던 그 양반들의 차를 한없이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내 모습이 떠올라 씁쓸히도 한숨지었다. 과연 춤으로 본다면 어느 쪽이 더 허수아비를 연상케 하였을까. 가을벌판에 소매자락을 나부끼며 너울춤을 추고 있는 텅빈 헛개비들...혹시 그들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은 아니었을까.

그랬다. 한국의 도시에서 제 정신인 시민으로 살아가기 그럭저럭 수월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제대로 된 시민으로 의무와 권력을 행사하며 살아가고 있지 못하고 있음을 자각하기엔 우리 늘 바쁘고 피곤하다. 왜 기다려야 하는 지에 대한 의문보다 기다림을 잊게 해주는 근사함에 눈이 번쩍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 재벌비리를 통렬하게 손가락질 하고 있는 것 같아도 손가락의 향방은 결국 우리를 가리키고 있는 것 아닌가. 그들을 비웃고 비난하다 갸우뚱 해보니 영 기분이 좋지만은 않은 것이다. 나는 올 한해 젊은 작가들의 더 없이 모호하고 불안한 주제의 작품들을 많이 만나왔기에 이러한 화법이 낯설기까지 하다. 이미 올해의 현실은 소설을 너머 충분히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현실보다 더한 상상력이라고 한들 간혹 '불안'과 '우울'의 미덕으로 포장되는 듯 보였을 뿐이다. 차라리 소설속의 불안에 오늘사는 내 불안을 기대고 있었다는 헛헛함이 더욱 자명해진다. 그런데 이 책을 덮고 마지막이 이토록 긴장감으로 신경이 곤두서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느 아침 거울을 들여다보니 안보이던 두어 개의 주름과 처진 볼살을 새삼 확인이라도 하듯 가슴이 조여오는 위기감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걸까. 이 책이 섬칫하고 마음이 편치 않은 건 아마도 소설이 전혀 소설같지 않은 이유가 아닐까. 설마하는 거짓말이 모두 확실한 진실로 들리는 이유가 아닐까. 또한 진실에 전혀 한마디의 반문을 제기할 수 없는 까닭은 아닐까.

지난 가을 반가운 마음에 황급히 책을 덮고 다시 두어 달 만에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때 거짓말처럼 '하늘의 별따기'라는 재벌그룹의 임원인사에 그룹총수의 자녀들이 나란히 승진되었다는 기사를 접했다. 연말을 앞두고 이제 바야흐로 재벌 3세의 경영의 닻이 오른 것이며 본격적인 한국식 세습경영체제가 개막된 것이다. 해외언론에선 북한의 세습체제는 안되는 것이고 한국의 재벌세습체제는 되는 것이냐는 식의 비판의 목소리가 다분하지만 어쩐지 우리 언론과 국민은 이미 알고 있었던 일에 대한 자포자기적 심경으로 오히려 국제적 안목과 탁월한 재능을 겸비한 그들에게 이 나라의 미래를 슬며시 기대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렇기에 재벌 3세와 같은 세대인 나는 이 소설을 덮으면서 더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끼며 내가 과연 작가가 콕 집어 가르쳐준 '불매운동'과 '시민단체'라는 모법단안을 작성할 수 있을지에 회의감이 들고 만다. 아니 그러한 의식있는 시민이 될 자격이 있는지를 점검해보기 이전에 과연 의식을 가질 필요조차 있는 것인지, 혹시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라면 나와 생각이 같기는 할 지에 대해 허탈한 의구심만 가득해진다. 일개 독자에 불과한 소시민인 내가 책을 덮자마자 보란 듯이 TV에 화려하게 등장하는 저들의 나라에서 저들이 만들어낸 제품에 하루를 의지하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말이다. 연평도 폭격이후 이 나라의 젊은이는 해병대 지원이 늘었다고 하는데 나는 전에 없이 9시 뉴스가 부담스러워 드라마로 채널을 돌리고 마는 매정한 시청자가 아니던가.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이 책은 나로 하여금 당신은 지금 무엇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똑바로 질문하는 것만 같다. 언제나 우리 민족의 역사와 당면한 현실앞에서 국민으로서의 진지한 성찰을 요구해온 대작가의 저력이야 알고 있었지만 이번엔 더 날카롭고 더 직접적이어서 한번 꺽이고만 고개는 여간 다시 들어 올릴 수가 없는 것이다.


회초리를 들다

이 책은 그가 언급했듯이 'history'가 'his story'의 줄임말이 되는 이유를 말하는 소설이다. 즉, 역사라는 이야기가 실은 수컷이 만든 이야기임을 강조하는 철저히 수컷본능, 수컷중심, 수컷역할의 이야기를 수컷답게(?) 펼치신 이야기이다. 등장인물만 보아도 이름과 직위, 업무중심의 수직적 서사를 그 핵심으로 하고 있으며 여성이라고 해봤자 이름과 얼굴조차 구분이 가지 않는 그들의 아내 두어 명에 불과하다. 대기업의 비리와 탐욕을 서사의 근간으로 하는 작품에 여성이 개입되는 모종의 음모나 일말의 희미한 로맨스조차 기대할 수 없는 지극히 건조하기 짝이 없는 남성소설인 것이다. 작품의 재미나 서사의 긴박감, 자극적 사건의 개연성이 줄어들 수 밖에 없는 소설구성상 한계가 따르는 배경은 물론이고 소설의 주요 독자인 이삼십대 여성들이 결코 호감을 가질 리 만무한 그야말로 '그들(남성)만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렇다고 어찌 보면 고집스러울 정도로 수컷을 비난하는 격조의 이 소설을 젊고 나이듦에 상관없이 남성들이 반길 것인가에도 그다지 자신은 없다. 여성인 내가 서운하듯 같은 이유로 서운한 남성들이 존재하는 다시 말하면 이 시대의 소설읽는 독자들이라면 썩 집어들고 싶지 않은 류의 작품이라 말하고 싶어진다. 이것은 역으로 조정래 작가가 한국문단에서 상징하는 존재이유를 방증하는 훌륭한 근거가 되지 않을까. 이토록 직접적인 삿대질을 할 만한 작가도 없지만 또 당했다고 의아해 할 국민도 없는 이 역학적 관계는 적어도 독서하는 순간만큼은 그의 이야기에 '자발적 복종'을 행사하게 되는 우리만의 예정된 룰이기도 하다. 정치인이 잘못하면 국민이 회초리를 들어야 하듯 독자가 우매할 땐 작가도 회초리를 들 수 있는 것. 나는 오늘 그의 회초리가 조금은 아팠다고 엄살을 떨고 싶다. 당신도 나처럼 아팠는 지 묻고 싶어진다.

소설은 내가 지긋이 바라본 6억이 넘는다는 그 외제차가 어느 후미진 야산길을 달리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재계 2위인 일광그룹의 강기준이 자신의 선배이면서 태봉그룹의 1급첩보원인 박재우를 스카우트하라는 지시를 받고 의전용 차량을 과시한 것이었다. 박재우를 시작으로 장소를 바꾸어가며 이루어지는 스카우트 릴레이는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진진했다. 지목된 스카우트 대상자는 한결같이 처음엔 오만방자한 태도를 보이다가 결국엔 돈앞에 무너지는 양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일광그룹이 선망하는 태봉그룹의 박재우도 그랬고 수사관 출신의 정보담당 김동석 실장도 신태하 검사도 정민용 서기관도 예외는 없었다. 하지만 감히 누가 그들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들은 모두 현재의 위치가 불만족스러웠다기 보다는 한 단계 더 높은 신분상승을 원했기에 어떤 비난을 감수하더라도 제의를 수락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더 많은 금전이나 향후의 출세가 보장되는 경력, 대외적인 과시로 충분한 위치를 계산하여 길게 보아 남는 장사를 선택한 것이다. 이들이 모여 하는 일은 자신들의 태생이 상징하듯 재벌의 재산권과 경영상속권을 강화하는 업무였다. 이들이 분에 넘치는 돈을 받고 혹하여 조직에 몸담았듯 똑같이 도를 넘기는 돈을 주며 사람과 권력을 매수하는 일, 돈으로 놀고 돈으로 놀아나는 세상을 만드는 것에 누구보다 앞장서는 일이었다. 작가는 마지막에 이 조직의 핵심이 된 강기준이 늘 스카우트 하는 입장에서 마침내 다른 경쟁그룹으로 스카우트 된 것을 암시하며 붓을 내려놓았다. 소설은 막을 내렸지만 스카우트 릴레이는 계속됨을 잊지 말라는 마지막 한마디였다. 그가 바통을 이어 명함을 바꾸듯 우린 앉아서 주인공이 바뀐 다른 그룹의 비리 이야기를 계속 관람할 수 있다는 안내로 느껴졌다. 당신들의 관람의 자격이야 늘 충분하지만 계속 구경하고 싶느냐는 질문으로도 들렸다. 아마 혹시 구경하기 싫더라도 연극 무대는 당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될 것이라고 친절히 경고하는 것으로도 들렸다. 안녕히 가시라는 그의 인사가 왜 자꾸만 뒷덜미를 잡는 것일까.

작품 속에 등장하는 수컷들은 누가 누구를 욕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히 속물적이었다. 살아있는 황제 일광그룹의 남회장은 비록 얼굴은 맹꽁이상이지만 꿈틀거리는 구룡이 아로새겨진 금박소파와 구각의 안경테를 쓰고 앉아 황금빛 용상을 연출해 낸다. 고급임원을 깔보고 직원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놀이를 즐기고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을 더 할 수 없이 억울해 하며 노조나 분배같은 단어에는 천불이 나는 우리 사회 기업총수로서 전형적인 탐욕의 화신을 표상한다. 하지만 신문사의 광고줄을 쥐고서 숨통을 흔들고 비자금을 은닉하기 위해 차명계좌를 개설하고 세뱃돈 주듯 임원에게 스톡옵션을 하사하는 대기업의 총수에 사실 우린 무감한 지 오래되었다. 그들의 그 어떤 사회환원과 기부에 감동하지도 않듯 어떤 비리에도 덤덤하지 않았던가. 차라리 하급 공무원의 이삿짐을 날라주고 마당에 꽃심고 애들 말태워 주고 신발장 청소해주며 회장의 특급충견자리에 오른 총본부장 윤실장이 애틋하고 눈물겹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따온 공채 1등 강기준, 그런 윤실장을 늘 경멸하면서도 그의 권력에서 오는 위세당당함을 부러워하고 그가 선물한 넥타이에 감동받는 그래도 인간됨이 짠하면서 씁쓸하다. 남편이 벼락승진을 하니 첫키스 이후 최고의 열도로 키스세례를 퍼붓던 그의 아내가 부럽기만 하다. 몸으로 무한감동로비를 펼친 상사를 조롱하며 미국에서 받은 박사학위를 미끼로 7급 공무원의 자식에게 추천서를 써주겠다는 그의 비열함이 목메인다. 돈은 귀신도 부린다며 까짓 사람쯤이야를 강조하는 박재우 기획총장의 목소리가 더 교훈같고 정신이 버쩍 든다. 휴가한철 아내몰래 비자금을 타러오는 신문사 기자들이 딱하고 가엾다. 강기준, 윤실장, 박재우 이들 세 명이 절대 서로를 신뢰하지 않으면서 회장으로부터 인정받고 보상을 받기 위해 보여주는 짓거리들에 전혀 놀라지 않는 우리들은 과연 다이아가 송송 박힌 1억원짜리 시계는 어느 브랜드일까가 더 궁금한 속세의 중생들인 것이다.

이들 세 명은 극 초반부에 '문화개척센터'라는 우스꽝스런 조직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한자리에서 학연, 지연, 혈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로비의 원칙을 이야기하고 극 후반부에 똑같이 모여 그 성과에 자축하며 자신들의 과업을 합리화하는 수미쌍관의 행보를 보여준다. 작가는 주로 이들간의 역겨운 대화를 전면에 배치하고 그들의 구린 속내를 방백으로 처리하며 배경을 부연설명하는 방식의 문체를 적절히 믹스하고 있는데 마치 걸쭉한 한 편의 마당극을 보는 듯 이야기꾼으로서의 풍자와 재치가 읽는 재미에 가속을 더하고 있었다. 그렇게 바람에 춤을 추는 허수아비의 춤사위처럼 출렁이다가도 건설업체의 공기 단축효과나 비자금 조성방법, 검사의 상명하복과 검사동일체 정신등의 비판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시선을 돌려 회초리를 든 훈장님처럼 똑바로 우리를 향해 목소리를 드높이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킬킬 대다가 흠칫하며 허리를 세우고 정신을 차리기도 했으니 소설의 영향력이 문학의 힘이 새삼 여느 교육보다 낫구나 싶어지기도 했다.


삿대질이 아프다

이 작품은 그렇게 사람에 대한 실망을 강요하는 부담이 있었지만 그 실망이 아직 절망스러운 건 아니라 말하는 뼈아픈 조언도 있었다. 바로 작가의 대리인으로 인식되는 양심검사 전인욱과 양심교수 허민이 그들일 것이다. 이들의 모습이 극중에서 다소 패배적으로 느껴지며 부질없어 보이는 경향은 있었지만 이미 그들에게서 우릴 대신해 어떤 영웅적인 행보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위선이며 그릇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오히려 연민의 슬픔이 더했던 건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라면 그들만큼도 못하지 싶은 못난 죄송이며 그들을 앞세울 수 없는 송구함이다. 특히 운동권 출신의 전인욱 검사가 태봉그룹의 1조원 비자금 사건이 터진 후 검사회식자리에서 사건처리향방을 놓고 의견통일을 다짐하는 그들과는 다르게 철저한 수사를 대답하는 모습에선 오히려 그러한 정의자체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으니 말이다. 같은 시절 학보사 기자였지만 위로와 응원으로 변호사를 권유한 아내의 미덕을 이해하기 보다는 상명하복의 부당함에 굴복을 충고하던 선배검사를 더 이해하고 싶은 우리는 이 세계의 살아있는 생물, 돈의 논리에 너무나 길들여진 그래서 자발적 복종이 제살처럼 익숙해진 시민은 아닐까. 시민단체와 불매운동을 조언하며 경제민주화를 외치던 경제학 교수 허민의 재임용 탈락 소식이 당연하게 들리는 이유는 그동안 큰 기업이 잘되어야 우리도 잘산다는 논리에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착하디 착한 신봉자들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재벌 총수를 우상화하는 것에 불감하고 그들의 세습체제에 무심하고 그들로 인해 좌천된 검사와 교수에 무정한 우리가 정말 돈의 노예가 아닌 그들의 노예가 되버린 탓은 아닐까.

현실은 자본주의고 자본주의는 돈이 왕이고 돈을 이길 수 있는 힘은 그 어떤 것도 없는 것일까. 불행히도 나는 없다거나 있다는 대답이 아닌 굳이 이길 필요가 있느냐에 의문을 둔 무정한 독자임을 고백한다. 이 작품에서 그러한 내 의문을 가장 잘 설명하는 장면은 곧 내 얼굴이 가장 화끈거리기도 한 순간이었다. 나는 남회장이 세 명의 충신들에게 그동안 수고한 대가라며 스톡옵션의 금액을 30억, 40억, 50억이라고 쓴 종이를 유치원생 쪽지 건네듯 넘겨줄 때 나도 모르게 소리내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곤 곧 사나운 동물의 쓸개즙이라도 마신 듯 목이 아프도록 씁쓸한 비린내로 소름이 끼치었다. 우스워도 부러운 종이라도 만져 보고픈 웃지 못할 심정임에 틀림없었다. 종이에 금액을 적어가며 현찰을 발행하는 그 뿌듯한 놀이를 어린 시절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아마도 일치감치 돈의 실제 위력을 알아버린 사람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실명이 '이백원'인지라 평생 모멸감을 안고 살아가야 했던 어떤 사람이 개명한 이름은 '이백억'이었다는 웃지 못할 유머도 떠올랐고 평생 내가 가늠하고 세어보는 돈의 단위는 과연 어디까지일까...하는 자괴감 때문에 가슴 한켠이 저릿했고 또 한편 알면서도 순간 부럽기도 한 내 자신을 참을 수 없기도 했던 남회장의 쪽지는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내가 너무나 좋아하던 故 이청준 작가의 중편 <조만득>의 한 장면도 오버랩 되었다. 훗날 '배꼽춤 추는 허수아비'라는 연극으로도 공연된 변두리 이발소 조만득씨는 자신이 재벌회사 회장이라며 백지에다 종이수표를 마구 발행하는 정신병에 걸린 사람이었다. 여기서도 등장하는 허수아비...그때 그냥 춤도 아니고 배꼽춤으로 그려진 허수아비의 정체성은 소시민의 슬픈 망상이었다. 남회장의 쪽지는 우리같은 보통의 시민들에겐 영원한 망상의 카드가 아니겠는가. 망상의 절정부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은 불행히도 장난에 그치지 않고 망상 건너 이쪽 편의 현실을 정확하게 조준하면서 깔깔대는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망상은 그곳에 푹신하게 빠져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자기 현실로부터 훨훨 탈출하여 자유로운 망상과 해방감에 도취되어 현실에선 평생 이루지 못할 꿈을 마음껏 펼쳐볼 수 있다면 그야말로 허수아비춤의 근사한 공연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작가는 혹시 세 명의 충신들을 통해 환상을 좇아 몽상을 꾸다가 급기야는 망상에 걸려버린 우리들을 마음껏 비웃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작품속의 주인공들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풍자하는 것이 실은 망상을 지향하고 오늘을 달려가는 수많은 허수아비들을 향해 당신들도 이에 다름없다고 이것은 당신들의 모습이니 웃을 것 하나 없다고 두눈 부릅뜨고 말해주는 것 같아 내심 허를 찔린 기분이었던 것은 나만의 일인 것일까.


배우를 마치다

조정래 작가는 이제 자신이 걸어온 인생과 한평생 바쳐온 문학의 대장정 길에서 다음 세대를 위해 과연 무엇을 남기고 가야 할 것인지, 자신이 정해놓은 마지막 일감을 차근차근 수행해 나가는 그 첫걸음을 시작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가 지금까지 집필해온 작품들만 해도 그 문학사적 가치와 후대를 위한 진심만큼은 충분해보이고 되려 넘치기까지 한다. 그런데도 그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태어난 원죄와 문학인이라는 숙명적 책임을 단 한순간도 외면하거나 방기, 중단하지 않고 가장 조정래적으로 수행하려는 대가의 지속적인 면모를 질기게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번 역시 소설을 쓸 때에는 소설에 집중하기 위해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으며 일요일에도 새벽 여섯시에 일어나 매일 원고지에 글을 적었다는 작가의 엄숙함과 순고한 정신세계에 조용히 고개숙인다. 언젠가 태백산맥 문학관에 전시된 사람키보다 더 높은 그의 육필원고 앞에서 나도 모르게 숙연해지던 그 순간이 환기되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문학이라는 예술적 산물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신성불가침의 종교적 성채라는 느낌을 받는다. 소명을 다하려는 작가의 태도와 정갈한 자세까지 작품에서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작가의 대단한 능력이고 독자를 향한 강직한 염원을 의미하지 않을까. 그것은 곧 불의와 반사회적인 부정을 보고도 좀처럼 분노와 증오가 느껴지지 않는 이 시대 무심한 독자들을 향한 소리없는 꾸짖음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 책은 그 꾸짖음으로 우리 부모님 세대가 더 큰 기업 더 강한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열심히 일해서 우리 세대를 편하게 해주었듯 우리 역시 우리 다음 세대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케 한다.

눈을 감고 노란 가을들판에 세워진 허수아비를 떠올리며 그가 춤을 추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허수아비는 과연 누구인가. 그는 왜 춤을 추었던가. 원래 인간에 대한 희생을 목적으로 거기 서있던 허수아비를 바라보며 정작 허수아비는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 처음으로 생각해 보았다. 아...나는 비로소 허수아비보다 못한 허수아비아닌 허수아비들을 딱하게 바라보는 그들의 심정을 헤아리며 결과적으로 인간이면서 인간의 춤이 아닌 허수아비의 춤을 추고 있는 우리의 슬프고도 우스꽝스런 자화상을 풍경화로 발견하고 말았다. 지난 가을그가 그려놓은 우리 하늘은 야속하게 높고도 푸르렀다.

그렇다. 허수아비는 원래부터 춤을 출 의도는 없었다. 하지만 허수아비라는 역할때문에 춤을 출 수 밖에 없었고 춤을 추는 것으로 보여진 것이다. 더불어 허수아비라는 타고난 외양적 특성 때문에 춤을 추는 행위는 그 몰골을 더욱 허수아비스럽게 만들어 가장 허수아비다운 외모를 극대화 하는 자신의 특기이자 치명적 약점이었던 것이다. 허수아비가 자신을 가장 허수아비답게 하는 행위가 가장 큰 약점이 되는 허수아비의 슬픈 정체성은 허수아비가 최초 탄생될 때 인간도 아니면서 실은 인간의 모습을 흉내 낸 자체 생산목적에 기인한다. 즉, 허수아비의 부가가치는 가장 인간을 잘 흉내낼 때 있는 것이며 정작 허수아비 자신 같을 땐 그 가치를 상실하고 만다는 것이 허수아비의 이율배반적 운명인 것이다. 그렇다면 허수아비의 춤은 허수아비로서 자신을 가학함으로써 자신을 되찾는 가장 자기파괴적 행위인 것이다. 불행하게도 가장 자신을 파괴해야 가장 자신으로 분명할 수 있는 허수아비가 바로 여기 있었다. 그들은 한 명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은 애석하게도 허수아비가 아닌 인간이었기에 허수아비된 죄가 있었다. 그리고 끝까지 서로가 허수아비가 되었는지 알아 채지 못하는 특별한 가중죄도 있었다.

진짜 허수아비가 춤을 춘 것은 허수아비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것은 철저히 허수아비를 바라보고 이용하는 인간이라는 타자의 입장에서 관망된 결과일 뿐이었다. 허수아비는 자신이 한 일이 춤을 춘 것인지 춤을 추었다면 그것이 어떠한 광경으로 보인 것인지 그리고 그 광경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인지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과 다를 수 없음이다. 그러니 허수아비춤을 추고 있던 허수아비에게는 안 된 말이지만 허수아비는 열심히 살수록 기껏해야 인간들에게는 허망한 짓거리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충분했다는 것이다. 이는 허수아비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은 허수아비가 아닌 인간이었기에 혹시 훗날 허수아비의 자화상을 발견할 날이 오더라도 그때 가서 울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억울함이 아닌 허수아비의 춤사위가 결국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비로소 잘 알게 된 인간들로서 고개들 수 없는 창피함이어야 할 것이다.

이 작품은 풍자와 해학이 가득한 허수아비춤이라는 마당놀이의 대본이었다. 그리고 그 춤사위를 그려내던 많은 주인공들은 저들이기도 했지만 또 우리들 자신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소설을 통해 앞으로 관객이 될 것인지 배우가 될 것인지 질문하는 작품이기도 했다. 허수아비의 자식이름은 허수라는 우스개 소리에 더 이상 웃지 못할 시간이 도래 한 것이었다. 허수아비의 자식도, 허수아비의 친구도 허수아비와 다름없는 똑같은 허수아비 였음을 그리고 그것은 돈에 승복하였다고 정신마저 굴복당한 정신이 빠져버린 진정한 허수아비꼴을 하고 다니는 오늘날의 많은 우리들의 리얼하고도 충격적인 실상이었음을 알아야 하겠다. 세상의 모든 영화와 연극은 모두 일어 날수 있는 일이며 현실 역시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없다. 허수아비의 춤사위를 서로서로 구경하고 나온 관객들의 지친 기색은 아마도 자신들이 가장 극적인 배우였음을 통렬하게 인지하는 클라이막스에 기인했을 것이다. 막을 내린 후 다행히 배우와 관객이 일심동체가 된 것만이 공평하게 남았다. 무대를 내려와 우리가 내딛어야 할 다음 걸음 역시 지극히 달라진 것 하나 없는 공평한 한국땅일 것이다. 그땐, 진정으로 허수아비가 아닌 인간이기로 하자. 놀아나는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 그들이어야 하지 않겠나. 그땐 오곡백과가 풍성한 가을들판의 진짜 허수아비가 그리울 지 모르겠다.

우린 그렇게 영원한 관객으로 남아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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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을 위로해줘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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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눈이 쌓인 만큼 겨울을 보낸 만큼


그애와 내가 기다리던 첫눈은 바로 이런 폭설이었다.
함께 보낸 여름과 가을과 겨울 중에 겨울이 가장 길 것이라고
늘 우리는 생각했었다.

책을 덮었을 때 아직도 세상은 폭설과 강추위로 덮여 있었다. 누군가는 이 한겨울을 힘겹게 견디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아파트 앞 나무에 쌓인 눈이 유난히도 버거워 보였다. 저 눈이 다 녹고 나면 봄이 올까. 아니 내게도 새봄은 도착할까. 아니다, 이번엔 겨울을 곱게 보낼 준비를 하였던가. 이 겨울이 가고 나면 얼마나 지난 계절을 아쉬워 할 것이며 그렇지만 또 염치없이 다음의 꽃을 기다릴 텐지 나는 알고 있다. 이미 눈앞에 가득한 눈을 보고도 다음의 첫눈을 기다리는 무모함으로 이렇게 어른이 되어버린 까닭에, 말이다.

이토록 확연한 겨울 속에서 그들의 소년됨을 읽어가는 일은 아주 오래전에 첫눈이 내렸다고 하늘을 보았던 순간을 천천히 떠올리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내리었던 여러 번의 첫눈이 많이도 쌓여버린 지난 겨울들이 지금의 내 어른됨 이었음을 깨닫는 일이었다. 첫눈이 온 만큼이 결국 내 나이였다니 왜 이리 눈물이 맺히던지... 아마도 꽁꽁 언 채로 얼음이 되었다가 또 흔적도 없이 녹았다가 그렇게 두 번째도 세 번째도 아닌 매번 첫눈이 내리곤 했을 것이다. 온몸으로 눈을 지고 있는 나무가 안스러워 보였던 건 그동안 내가 쌓아올린 첫눈의 무게때문 이었을까. ’이 무거운 것들, 좀 벗어도 되겠죠?’ 하고 내게 허락이라도 바라는 듯 나무는 내 앞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꼭 지난 여름 폭풍이 몰아치던 어느 새벽, 나뭇가지가 베란다 창문을 세차게 때리면서 마치 몸통이 꺽어지기라도 할 듯 요동을 멈추지 못하던 그 때 그 나무였다. 가을엔 눈부신 금빛이나 화려한 붉음으로 변신치 못하고 그 후유증으로 노화마저 중단한 나무가 아니던가. 그 메말라온 가지들이 짊어지고 견뎌내는 흰 눈이었다. 해서, 나는 거울을 보듯 눈쌓인 나무를 향해 말없이 울어주었다. 그것은 곧 그대로도 괜찮다는, 너인 채로 멋지다는 그를 향한 억지이자 위로였는지 모르겠다. 이 책이 지금껏 겨울을 지나왔지만 또 겨울을 견뎌야 하는 한 명의 나이든 불혹의 소년을 위로하고 있었던 것처럼.








#2. 소풍을 다녀오듯 소년을 찾아가듯


기척도 없이 흘러 지나가고 있는 이 시간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다 줄까.

내가 스물넷에 아이를 낳았다면 연우같은 아들을 볼 수 있었을까. 여덟 살 연하의 멋진 남자친구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 연우와 나이가 같은 자식은 둘 수 있었겠다. ...가슴 벅차게 부러웠다. 그들 모자의 친구같은 관계, 쿨해 보이던 생활패턴, 나름 있어 보이는 그들의 직업, 하지만 그런 것들 보다 제일 가슴이 뛰었던 건 열일곱의 연우가 마흔 하나된 엄마를 청순 글래머의 여배우와 같은 이름, ’신민아씨’라고 호칭한다는 것이었다. 이번 이야기에서 엄마의 이름은 아들과 친구의 이름만큼이나 많이 불리워 졌는데 나는 연우가 그녀를 말할 때, 태수의 전화번호가 ’민아씨 남친’으로 저장될 때 그렇게 가슴이 두근거릴 수가 없었다. 내 나이가 공교롭게도 연우 엄마와 같은 나이여서 그런지 나는 작품속 그 누구보다 ’신민아씨’가 사랑스러웠고 ’신민아씨’가 되어보고 싶었음이다. 아니 이미 나는 연우였던 나와 신민아씨인 내가 그들의 도토리와 함께 티격태격 동거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연우가 엄마를 어엿한 한 명의 이름으로 객관화, 동격화 하는 덕에 나는 자연스레 그들의 소년시대에 어렵지 않게 동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아마도 누구나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소년性을 등장인물 모두에게 동등하게 부여하고자 한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그들은 나이와 성별, 직업에 상관없이 모두 한명의 고독하거나 불안한 소년에 다름아니었으니 말이다.

소설은 연우를 중심으로 한 열일곱의 소년들과 이미 열일곱의 生을 한번 씩 더 보낸 어른들이 자신의 소년됨과 소년이었음을 알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자신 스스로 자기라는 존재를 생각하여 알아내고 자신만의 세계를 인정하는 일은 결코 성급히 성취될 일도 아니고 마냥 기쁘기만 한 일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야기는 봄날 눈이 녹아내리듯 느리고도 소리없이 전개되면서 시종일관 애틋하고 아릿했다고 할까. 이번 글이 어느 때보다도 천천히 그리고 아주 미세하도록 초단위의 감정체계가 빠짐없이 배열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작가만의 씨줄과 날줄이 만들어낸 촘촘한 감성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감정들은 그 어떤 것도 없어 보였고 한번 걸린 것들은 대단히 공을 들여 표현해 내고자 한 의지를 고스란히 전달받았다. 하지만 끝내 성장을 해내는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작가에게 그 부드러움의 힘겨움은 뼈를 깍는 고통스런 과정이었겠지, 싶었다. 이 책으로 스스로를 성장시켰을 작가에게 오히려 위로를 드리고 싶었다. 유난히도 책장을 조심스레 넘기며 행여 깨어지기라도 할 듯 소중히 책을 어루만진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고 세상에는 어른으로 제대로 완성되지 않았지만 어른인척 하는 소년들이 많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권위적이며 위협적이고 강압적인 행위들을 ’남성다움’혹은 ’카리스마’로 오해하고 남성답게 자라지 않았지만 남성다운 체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심리학에선 상처받은 소년의 취약성이 미성숙한 채로 성장이 멈추어 버린 현상으로 판단한다. 이러한 미성숙이 오랜기간 어른됨을 지배할 때 인간은 자신도 모르게 소년성의 원형을 드러내게 되는데 예를 들면 폭력을 일삼는 남편, 부하를 괴롭히는 상사, 경쟁을 회피하는 동료등이 성숙하지 못한 소년으로서의 어른이라 할 것이다. 작가는 누구든 어떤 이유로든 우리 生에 상처받은 소년性이야 말로 언제라도 어른이라는 완성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끼리 서로 서로 독려해주어야 한다고 말해주는 듯 했다. 그 소년性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옳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봄날처럼 푸릇하고 생기넘치며 열린 마음으로 모험과 미래를 기다리는 가장 싱그러운 에너지도 있었다고, 잘 기억해보라고 말이다. 이는 꼭 남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고 여성에게도 더 여성스러운 것이 더 어른이 되는 것과 동일시되었던 가치의 일방적 지배를 벗어나 여성이기 이전의 인간으로서의 소년性을 찾아가는 일이 얼마나 반가운 재회인지 그 비밀을 알려주는 듯했다. 그러니 책을 넘기는 일은 결국 이야기속의 모든 소년의 상처를 발견하며 그들의 슬픔과 고독을 위로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작가 스스로 재회하게 된 자신만의 소년을 말하는 방법이었을 것이고 그 소년을 통해 우리 자신의 소년을 찾아가는 여정이었을 것이다. 대체로, 그립지 않을 수 없는 한편의 봄소풍과도 같은 정경이었다.





#3. 달리고 노래하네 몸과 마음으로




나 지금, 나라고 하는 전 존재, 나라고 하는 전 우주를 오롯이 혼자
짊어진 채 달리고 있는 거야. 내가 팽개치는 순간 그것은 산산조각이 나고 내가 떠메고 나아가는 한 그것은 전진한다. 나는 나다.

연우를 비롯한 책의 주인공들은 모두 자신의 소년性을 말하고 표현하는 각자의 매체(media)가 있었다. 작가는 표면적으로 달리기와 노래를 앞세워 자신이라는 세상을 알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과 같다고 말이다. 타자를 받아들이는 일은 실은 제 안에서 그를 통해 모르고 있던 자신을 발견하는 일과 같지 않을까. 이는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곧 상대를 이해하는 밑거름이 되고 그것은 세상을 이해하는 기본이라는 뜻과도 같았다. 달리기와 노래는 모두 육체의 기관을 이용하는 작업이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비로소 실행할 수 있는 일이다. 즉, 몸과 마음을 성의껏 쓸수록 그 성과가 도드라지는 장르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는 모든 인물들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해 스스로를 표현하고 있었기에  이야기속에서 달리기와 노래를 동시에 해나가는 인물은 연우였지만 내겐 모든 사람들이 달리고 노래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연약하고 우울해 보이는 이름을 가진 연우는 여덟살 연하의 엄마의 남친 재욱형의 권유로 달리기를 시도하게 되고 힙합매니아인 친구 태수로부터 노래를 소개받은 후엔 늘 노래를 흥얼거린다. 연우에게 달리는 행위는 자신의 몸속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가 닿는 일이었고 노래하는 시간은 말로는 하지 못한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는 일이었다. 귀국청소년인 태수는 세상의 소리를 듣지 않고 힙합의 소리에만 귀기울이며 가끔 무면허 미성년자로서 자동차를 타고 내달리는 취미가 있었는데 이는 억압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충동적 반응으로서의 위험한 탈출구에 다름 아니었다. 헐렁한 흰색 후드티를 입고 마리오네트를 연상시키는 채영은 카프카의 책을 읽고 엽서를 띠우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소설로 노래하는 소녀였다. 채영의 노래는 자신을 미워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단 한사람을 향한 꿈의 고백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태수의 쌍둥이 동생 마리는 교지편집부의 모범생으로서 ’우리세대의 정체성과 미래’라는 특집기사를 기획하고 엮어냄으로써 세상에 대한 질문을 세상을 향해 노래하는 지혜로운 소녀였다. 연우가 이사오기 전 같은 방에 살았던 채영의 선배 민기훈 역시 가사를 쓰고 노래를 만드는 뮤지션이었다. 엄마 신민아씨는 옷 칼럼니스트로서 개성있는 에세이를 기고해왔으며 재욱형 역시 취미로 마라톤을 하면서 힙합칼럼을 연재하는 음악평론가였다. 이들 모두는 몸과 마음을 다해 자신의 육체를 내달리고 심경을 노래하는 인물이었으며 그러한 매체를 통해 각자의 소년性은 성장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들을 보면서 반사적으로 나를 성장하게 한 무기로서 매개체가 있었던가, 싶었다.

중학교 2학년을 앞둔 봄방학 때 친했지만 같은 반이 되지 못했던 친구 하나가 집에 전화를 걸어 아무말없이 음악을 들려준 적이 있다.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매체가 라디오와 TV밖에 없었던 그 시절 자신이 녹음을 했다며 들어보라한 노래는 조용필의 <친구여, 1983>였고 나는 수화기를 든 채로 4,5분 동안 말없이 울고 있던 친구의 눈물을 기억한다. 처음 듣는 노래였는데 가사가 맘에 든다는 말에 그녀는 개학하고 헤어짐의 선물로 여러 가요를 녹음해 테이프를 건네 주었다. 힙합 매니아가된 태수와 연우를 보니 그 시절 공테이프에 선곡된 음악들이 먼 기적소리처럼 아련히 들려왔다. 그시절 꿈과 친구를 노래하던 음악들로 내 소년이 위로를 받았던가... 마음이 아려왔다. 이 책의 제목이 <소년을 위로해줘>이지만 특별히 남성이 되기전의 소년이 떠오르지 않는 건 아마도 내 학창시절의 중성적인 캐릭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여중, 여고에서 꽤 보이쉬한 이미지의 외모와 성격으로 인기가 많았기에 같은 여자아이들로부터 편지와 선물을 많이 받았다. 나의 소년性이 왜 남성을 지향했는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여성스러워 보이는 모든 것들을 지양하며 그들이 원하는 남성적인 제스춰, 말투, 옷차림, 행동을 내 것인양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기대와는 정반대로 여대에 들어가 누구보다 멋부리기에 열중하는 대학시절을 보낸 덕에 동창생들로부터 충격과 배신의 투정을 듣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지금까지도 얼굴을 모르는 온라인에서는 내가 남성인줄로 알고 지금처럼 여고라는 글을 보고서야 여성이었음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많은 원인이 떠오르지만 대체로 여성이라는 역할과 성정체성이 내게 불편을 초래한 것만은 확실하다.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 겨우 마음 편해지기 시작한 건 최근 들어 생긴 일이고 나는 거의 내 생애의 8할 이상을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부정하며 싸우고 받아들이는데 소모했던 것 같다. 이 책에서 연우가 메이저라는 시스템에 합승하지 못한 사람들이 자기안의 혁명을 통해 내가 나일 수 있는 세계를 발견하는 과정을 이해하고 경험하는 인물이었다면 내 경운 여성이라는 성적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로와 지고자 그동안 무수히도 많은 혁명을 치루어 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다워야 하고, 여성이니까 도와야 하고, 여성으로서 감싸 안아야 하는 모든 관행과 패턴에 나는 마이너의 길을 걸어왔다는 것을 이 책을 보며 새삼 깨우쳤다. 말로서도 정리가 안될 만큼 나는 논리와 이성과 현실에 늘 방황하는 소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거의 내안의 여성이라는 만년소년을 격려하고 칭찬하는데 기꺼이 이용했다. 그냥 나 다울 수 있다는 것, 그것으로 괜찮다는 것을 나는 겨우 ’신민아씨’ 나이에 끄덕이고 있으니 말이다. 성장소설이고 청소년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꼭 지금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소년같은 성년들이 보아야 할 책일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작가가 실제로 달리기와 힙합으로 위로받은 개인적 경험이 소설화되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어떤 의미에서 주인공 모두는 작가의 1/n 만큼의 분신소년이라는 생각도 들었음이다.





#4. 날개를 펴고 꿈속을 날아가리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다고 말하는 당신
나만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의 일부
또는 나 자신조차 모르고 있던 나를 알고 있는 당신
그리고 당신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 하는 당신
그런 당신의 이야기를 듣는 나는 대체 누구죠?

이들 작가의 분신소년들은 또 각자 꿈을 펼치는 주체로서 동화속 환타지라는 소년性을 자신만의 이야기로 완성해 나가는 동일한 입장이기도 했다. 특히 연우와 채영이 소곤거리던 첫사랑의 추억은 자꾸자꾸 반복해 설레던 편지를 펼쳐보던 그 시절이 생각나 잊었던 소중함을 아주 세심하게 확인하는 시간도 되었음이다. 이들이 만들어가던 동화속에 바로 그리핀이라는 상상(想像)과 날개라는 이상(理想), 그리고 자신을 투영하는 거울로서의 자화상(自畫像) 이 있었다. 동물은 심리학적으로 볼 때 인간 자신이 갈등하는 본능을 상징한다. 뮤지션 G-그리핀의 그리핀은 독수리의 부리와 날개, 발톱에 사자의 몸을 가진 상상의 동물이었다. 힙합이라는 음악이 ’뒤집고 무너뜨리고 바꾸고 부정하고 고치고 버리고 각자의 방식으로 새로 만들어 감으로써, 내가 그냥 나일 수 있는 세계’라고 한다면 그리핀은 힙합의 혁명성이 소년의 이상임을 상징하는 이상적 자아에 다름 아닐 것이다.

연우에겐 그리핀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또 하나의 세상도 있었다. 바로 초등학교 입학날 선물받은 자신의 키보다 큰 전신거울은 연우를 더욱 성장시켜 주는 일등공신이었다. 대체로 사람들은 거울을 볼 때 상대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보다 더 예쁘고 잘생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다고 한다. 거울을 통해 자신만의 단점도 알고있듯 남들이 보지 못하는 자신의 장점도 발견하기 때문이다. 특히 사춘기 시절엔 내 눈에 보이는 내 모습이 남들에겐 어떻게 비춰질까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하는데 이는 자신을 객관화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런 반사심리일 것이다. 연우는 자신의 방 전 주인이 거울의 맞은편에 그려놓은 새의 펼쳐친 날개가 자신의 등 뒤에서 완성되는 날 거울을 깨고 날아 올라가 낯선 별을 통과해 그 너머 우주까지 날아가는 꿈을 꾸게 된다. 거울이라는 물체(物體)와 자신이라는 육체(肉體)와 새라는 모조체(模造體)의 낙서는 각기 분리된 개별적 존재들이지만 활짝 펼쳐친 날개가 달린 자신의 환상이 거울에 투사될 때 그것은 성장을 유도하는 일종의 최면효과로서 실재(實在)하는 생명체(生命體)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연우는 이 새의 날개를 완성해 나가면서 자신만의 그리핀을 탄생시키고자 했다. 그 결과 채영을 만나기 전에도 거울을 보며 날개를 확인하고 만나고 들어와서도 똑같이 거울을 본다. 상상속의 날개지만 채영을 통해 조금씩 자라난 자신의 마음이 곧 날개의 성장을 가져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미지로서만 그려지던 날개는 실제로 채영이 가진 새가 새겨진 은색 메달을 선물받게 되면서 그 환타지가 절정에 이르게 된다. 즉, 연우와 채영이 똑같은 목걸이를 옷속에 숨김으로써 비밀로서의 같은 꿈을 간직했다고 할까. 더 드라마틱한 것은 채영에게 날개는 백조가 되어 산호섬을 날아가는 꿈이었다는 것이다. 백조의 날개를 펴고 날아가 만나는 단 한사람은 그리핀의 날개를 펴고 별을 통과해 날아온 연우일 것이고 이 둘만의 환타지가 채영이 고백하는 노래이자, 소설이 된 것이 아닐까. 이 모든 환타지의 성과는 곧 연우와 채영의 동반 성장일 것이며 그 축복의 선물은 3년후 <거울의 반대편, 꿈의 반대편>, <보석의 파수꾼>이라는 노래가사로 재탄생하게 된다. 둘만의 환타지로부터 얻어낸 현실의 창조는 늘 우리가 꿈꾸던 지나간 첫사랑이자 이루지 못할 마지막 사랑이 아닐까, 싶었다. 작가는 이 아름다운 동화를 과도하게 부풀리지 않고 대단히 현실적으로 담담하게 읊조리는 성숙함을 선사하며 청소년이 아닌 이렇게 나이 들어 버린 늙은 소년들을 조곤조곤 위로하고 있었다.






#5. 별을 보며 약속하자 또 다른 나와 함께


온 생애를 걸고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한 순간. 
바로, 지금. 너와 함께 있는 모든 시간. 
그것이 우리, 낯선 우주의 떠돌이 아이들의 내일

 그런데 무엇보다도 내 까마득한 소년을 위로해주었던 건 역시 연우와 채영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친해지는 과정, 그 아스라한 시간들이었던 것 같다. 그들이 운명처럼 조우해 소꿉장난처럼 하나씩 해보는 것들은 결국 우리 나누었던 사랑을 뒤돌아 세세히 다시 느껴보는 일이었기에. 무엇하나 빠뜨리고 싶지 않은 추억이고 잊고 싶지 않은 장면이었다. ’One Piece’라는 퍼즐카페에서 처음 본 깡마르고 희고 차가운 채영의 손가락과 그 손가락 끝부분이 빨갛게 벗겨진 기억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들이 자신의 가족과 어린 시절, 꿈을 이야기 하며 하나씩 퍼즐을 맞추어 나가는 광경은 꼭 아주 오래전 내 소년들이 추억이라는 원피스를 입고서 한 조각(one piece)의 선물을 들고 한자리에 모여드는 일만 같았다. 여름에 자전거를 타고 공원에서 같이 본 분수쇼는 그 옛날 언젠가 밤하늘에 터지던 불꽃놀이와도 같았다. 여자친구가 농구를 할 땐 공을 넣게끔 번쩍 들어 올릴 줄도 알았던 연우. 세상 끝에 있는 우주정거장을 가본다며 강풍주의보를 헤치고 도착한 공항은 둘만의 우주였으리. 처음으로 손을 잡았을 때 놓아버리면 다시 잡기 힘들어 질까봐 놓지 않으려던 마음, 내 손 안에 잡아든 상대의 손에 힘을 주던 시절이 나도 있었던지. 밤에 이륙하는 비행기는 우주가 쏘아 올린 별이었고 별을 바라보며 한 약속은 죽어서도 잊지 못할 순간이겠지. 첫눈 오면 늘 만나기로 굳게 약속한 그 시절 가녀린 새끼손가락이여. 비가 쏟아지던 날 우산속 차갑고 부드럽던 첫 키스, 땀이 차오르던 깍지 낀 손... 그들의 몸짓 하나 걸음 하나에 나도 모르게 빙긋 미소가 지어졌고 가슴이 두근거리다가 끝내 이슬이 맺혀지는 건 너무 아름다웠음도 너무 선명함도 아닌 이제 너무 멀어졌다는 아득함때문 이었을까. 지금보다 한 번의 열일곱을 더 보낸다면 나는 그때도 이렇게 울 수 있을까.

하지만 연우는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봉착할 수 밖에 없는 상대를 의심하는 단계에 이르고 만다. 교지편집실에 민기훈 선배가 그려놓은 그리핀을 보고 채영에게 자신은 선배의 그림자로서 모조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불안해 한다. 잘못배달되어 온 카프카의 엽서부터 모든 것은 퍼즐을 맞추듯이 불신의 시나리오를 완성해가는 것을 보고 비로소 소년의 아픔이란 나만의 바보같은 것이 아니었구나, 싶어진다. 그리고 우린 아직도 소년이구나 입술을 깨문다. 이러한 오해를 우리는 첫사랑뿐이 아닌 두 번째 세 번째 사랑에서도 반복하며 상대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얼마나 내 자신을 괴롭혀왔던가. 우린 어쩜 사랑에 있어서는 영원한 소년인 채로 성장이 멈추어 버리는 바보 연인들이 아니었을까. 작가는 연우가 감정을 극렬하게 부정하지도 쉽게 인정하지도 않은 채 소년인 자신을 가만히 느끼도록 약간의 거리를 두는 것으로 느껴졌다. 같은 시간동안 연우는 카프카의 <성>을 읽고 재욱형의 ’아버지, 힙합 좀 듣자니까요’시리즈와 신민아씨의 ’옷에 대한 유쾌한 편견’들을 일상이 아닌 지면으로 만나면서 자신과의 조용한 대화시간을 선택한 것이다. 그들이 집에서 만나는 가족이 아닌 사회인으로서 음악과 옷을 통해 사람과 세상을 말하는 방식은 각자 자신들의 상처를 바로보고 사람과 세상을 끌어안는 치유기제 였던 것. 이렇게 불안하고 외로워도 자기다운 당당함이야말로 가장 자신일 수 있는 해답임을 가만히 알아간다. 겉으로는 잘생기고 잘난 체하는 재욱형이 엄마와 틀어져서 하는 고백을 듣고는 상대방의 내면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방법도 알게 된 것이다. 늘 시한폭탄 같던 태수가 자판기 동전배출구를 순회하는 떠돌이 아이를 돕기 위해 몇 대 맞아 눈위가 찢어진 것을 보고 비로소 폭력은 나에게서 나를 빼앗아가는 일임을 깨닫게도 되는 것이다.(거짓말처럼 이 책을 덮었을 때 자판기 동전을 상습적으로 훔쳐가는 십대 청소년들에 관한 9시 뉴스를 접했다. 하필 이 소설을 보고 따라한 것은 아닐까 얼마나 씁쓸했던지.)

유일하게, 짙은 눈썹에 반듯한 이마, 늘 꼿꼿한 걸음으로 활기차 보이던 마리에게만은 어떠한 감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던 연우를 보면 감정컨트롤에선 마이너가 아닌 메이저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연우가 그다지 야속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마리가 너무 완벽해보였기 때문일까. 마리는 오빠를 걱정하는 엄마의 소식을 전해주기도 하고 연우의 한마디로 머리스타일도 바꾸고 노래방에서 채영에게 고백하는 연우 때문에 음주사건의 당사자가 되지만 채영과 소원해진 연우에게 먼저 다가가라는 멋진 충고도 할 줄 아는 어찌 보면 가장 소년답지 않은 인물이었다. 마리의 특집 기사 제목은 ’I-My, Me, Mine’인 온통 나였는데 스스로 이미 공정하고 정의로운 범생이로서 어른과 친구들에게 인정받는 마리는 누구보다 자신을 잘 알고 상대와 세상을 이해하는 소년이었기에 일찌감치 소년을 잃어버린 아이였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빠가 사고를 당해도 여전히 엄마를 챙기고 아빠를 위로할 소년 아닌 소년으로 등장했기에 우리로부터 큰 위로를 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미안하다는 생각, 그것이 나머지 아쉬움으로 남았다. 무엇이 마리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누가 마리를 위로해주지? 혹시 마리처럼 소년을 보내고 있는 소년이 있다면 그건 분명, 어른인척 하는 대다수의 소년들 그들 때문은 아닐까.







#6. 축제는 끝이 나고 슬픔은 간직하고


빨강과 노랑과 파랑, 어지러운 원색의 스프레이 페인트 자국일뿐이다.
하지만 나는 그 속에서 울려퍼지는 나의 목소리를 듣는다.
저건 어쩌면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 그리고 나의 노래.

또 하나 작가는 소년의 성장 촉진제로 축제라는 유도분만을 시도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축제의 양상은 연우의 내부세계에서 일어나는 자축적인 변화와 바깥세상을 바라보고 느끼면서 얻어지는 타의적인 깨달음의 형태로 나타났다. 연우는 태수의 불참에도 혼자서 하프 마라톤에 참가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마라톤을 완주해 내면서 ’나라고 하는 존재, 나라고 하는 전 우주를 오롯이 혼자 짊어진 채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 것이다. 이는 자신 몸속의 미지, 자신 속으로 들어가 고통과 맞붙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세계라는 점에서 소년이 맛보는 자신만의 최고의 축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몸뚱이 하나를 가지고 달리기로만 세상을 통과한 것이니 말이다. 허나 실제 규모적이고 외향적인 학교축제에서는 엄마가 발표자로 참석한다해도 참여하지 않고 태수와 함께 자신들만의 화려한 불꽃놀이를 벌이는 전형적인 아웃사이더의 축제방식을 따르게 된다. 육교아래 공공의 벽에 원색의 스프레이 페인트를 마음껏 분사해 자신만의 날개를 그리며 처음 느껴보는 전율과 충만한 행복은 메이저 축제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거울 속에서만 날아가던 상상의 날개가 뛰쳐나와 현실의 두터운 벽에 그려짐으로써 명확하게 자신을 증명하고 상징하는 하나의 인증식의 장면으로까지 이해되었다. 이 장면은 연우로선 상당히 용기가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작가는 연우의 그리핀, 채영의 백조에 이어 그 연장선상에서 서사에 극적인 심미성을 부여함으로써 행여 비행이나 일탈, 범죄행위로 그려지지 않았던 명장면이기도 했다. 그리곤 실제 메이저의 축제는 신민아씨와 마리, 재욱형으로부터 소식만 전해 듣는 당당하고 편한 길을 선택한다. 시스템안에 들어가기를 포기한 사람들이 선택한 라이프 스타일이었고 마이너의 길이었지만 누구보다도 행복한 소년의 추억이었다. 마라톤이 자신만의 내면의 축제였고 그래피티가 바깥 세계의 축제에 반항한 마이너로서의 축제였다면, 이들 행사의 마지막 뒷풀이는 더욱 중요해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연우는 재욱형의 고향 바다로 가족이 화해여행을 떠난 곳에서 채영이 건네준 소설, ’바다 오르간과 백조들의 섬’을 읽고는 모든 오해를 풀게 되지만 가장 기뻐야 할 그 순간 날아든 뜻밖의 비보를 듣고 축제의 막이 내렸음을 깨닫게 된다. 태수의 반성문은 유언이 되어 채영의 소설은 만가(輓歌)가 되어 연우와 상처를 분담했고 그들은 태수와의 소년시대를 향한 헌정식을 치루어 낸다. 축제는 끝이 났고 소년은 죽어야 했기에.

축제의 폐막을 알리는 종소리가 고요했기 때문일까. 이 소설에서 가장 충격적이어야 할 태수의 죽음은 이상하게도 가장 납득할만 했다. 그렇기에 어떤 모르는 사람의 소식처럼 멀게만 느껴지기도 했다. 어쩐지 아주 성인이 되고 난 후에 간신히 기억하는, 그러나 지금은 씩씩해진 이후라 그저 회상할 수 있는 누구나의 상처쯤으로 생각되었다. 나만의 상처가 아니라는 생각이 슬픔의 연대를 이루어내면서 오히려 서로간의 위로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 우리가 성장하기위해 시련으로써 필수적인 상처재 였다고 말이다. 그래서 시종일관 위태위태하던 행보를 보이던 태수의 죽음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으며 비록 태수에겐 잔인한 결과였지만 모두의 성장을 위해 소설에서 묻혀지는 아니 우리 가슴에 묻어야 할 이야기라 생각된, 그러므로 작가가 짊어지는 스스로의 희생은 아니었을지. 슬프지만 소년시절에 이겨내지 못한 단 한번의 충동과 잘못된 판단으로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사례 중 하나로 여기라고 그래서 슬퍼하지 말아야 한다고 담담히 말하는 작가의 눈물이 태수의 이집트 십자가의 문신처럼 푸르게 새겨지던 죽음이었다.  笑年이 되지 못하고 끝내 消年이 되어버린 상처 역시 우리네 少年의 훈장이 아니겠는가.






#7. 영원히 동행하네 나란히 걸어가자


소수는 1과 자기 자신으로만 나누어진다.
그건 결국 1과 평행선을 그으며 영원히 동행한다는 뜻이 아닐까.
1에 의해서만 자기를 나눌 수 있고
1에게만 같이 가도록 허락해주는 것이다.

문득 연우의 방에서 보이던 두 개의 길이 떠오른다. 메타세쿼이아 나무의 바깥쪽 길은 보통의 등교 풍경이지만 안쪽 길은 담배를 피우고 규범을 거부한 등굣길이었다. 연우와 채영은 스스로 나무 바깥 길의 포장도로가 아닌 안쪽의 흙길을 택하였다. 하지만 포장도로가 흙길보다 더 편하고 멋지고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 처음엔 담장처럼 나무를 사이에 두고 나뉘어진 두 갈래 길은 시스템속을 거니는 사람과 그 바깥을 걷는 사람들로 나뉘어 지는 우리 사회 이분법의 잣대를 표상한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하나는 직선, 하나는 곡선이라는 재욱형의 시선과 소수는 1과 자신으로만 나누어지므로 1과 평행선을 그으면서 영원히 동행한다는 연우의 색다른 시각을 보면서 갸우뚱했다. 나는 내안에 들어있을 모든 두 가지 양상에 이끌리고 있었던 것이다. 학창시절 어느 한쪽을 거부하며 늘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던 나의 성향과 겉모습은 여성이지만 남성적 사고방식과 업무체계를 강요하던 내 사회생활과 누구보다도 시스템안에서 보호받으며 살아왔지만 우연한 기회에 그 바깥으로 밀려난 지금의 마이너 시절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다. 처음에 연우의 두 갈래 길은 은연중에 내게 묻고 있었다. 당신은 어느 쪽으로 갈 것이냐고. 아니 어느 쪽으로 걸어왔느냐고.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이었냐고. 그 선택이 행복을 가져다 주었냐고.  매번 멈칫거리다 결국 우리는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한방향을 향해 같이 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이 책에서 소위 시스템에 속하지 않은 성인들은 대체로 상대를 배려하는 모습이었지만 시스템안에 안착한 사람들은 메이저 리거의 시선으로 자신들과 그 경계를 분명히 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였다. 동성연애자이면서 퍼즐카페의 주인아저씨는 마이너측의 대표격이었지만 아이들의 성향과 그날의 분위기에 따라 손님 이상의 배려를 베푸는 인물이었다. 그는 비오는 날 헤어진 것으로 보이는 남자 손님을 따라가 우산을 빌려주고 온다. 상처와 패배를 위로하는 마이너였다. 하지만 메이저측의 전형적인 규칙맘 마리의 엄마는 마리의 음주사건 후 연우의 집에서 연우의 신발 때문에 자신의 아들이 시비가 붙었음을 신민아씨에게 굳이 부연함으로써 자신들과 경계를 분명히 하고자 했다. 대개 시비에 유리한 조건을 가진 메이저의 태도였다. 메이저 측의 훌륭한 모델이라 할 수 있는 채영의 부모역시 한번 잡은 중산층의 기득권을 대물림하려는 우리사회 전형적인 잘난 학부모들이다. 채영의 아빠는 은행지점장 답게 형식적인 대화와 식사시간, 여행의 횟수가 가족행복의 척도라 생각하며 엄마는 의사인 자신의 바람대로 딸의 거부의사와 상관없이 영재스쿨을 강요한다. 그 결과 주어진 틀안에 끼워 맞추어야 하는 채영의 외형은 헐렁한 교복과 마른 종아리, 뜯겨진 손톱, 덮어쓰는 후드티, 담담한 목소리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언뜻 보기엔 메이저측의 시스템은 결속력이 강하여 쉽게 비집고 들어갈 수 없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고 되려 메이저는 위선과 이기심속에서 불행한 것이며 마이너야 말로 진솔하고 따스한 길이라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이 작품은 그러한 이분법의 논리, 판단법의 관행이야말로 메이저식의 매너리즘이라 주장하는 듯하다. 이미 어른이된 재욱형과 신민아씨의 경우 더 조직적이고 대우가 좋은 직업세계를 선택하지 않았을 뿐이지 음악평론가와 칼럼니스트라는 전문영역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외모는 패션과 유행에 민감한 꽤 세련된 트렌드 세터로 등장하고 있다. 비록 글로 다루는 소재는 힙합이나 옷과 같은 비주류의 테마일지 몰라도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만큼은 상, 중, 하의 단계를 부여할 수 없는 메이저급의 파워를 지닌 대중지향적 확산경로를 따르고 있다. 신민아씨는 연우에게 담배는 피우되 니코틴은 적은 걸로, 야동은 보되 사후 삭제할 것을 말하는 센스를 발휘하지만 그러한 마이너의 세계로 진입하려 한다면 그 선택에의 책임역시 감수해야 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도 메이저의 논리를 부정만 하는 기성세대로 이해되진 않았다. 메이저는 아니지만 마이너로서 더 세심함이 요구되는 분야의 풍부한 감수성을 자신의 무기로 개발했다고나 할까. 양측의 장단점을 충분히 알고 있는 이들 성인의 생각과 대사들은 청소년뿐만 아니라 비청소년에게도 상당부분 어필하는 정서였는데, 이는 공감대를 은유적으로 확장하는 작가의 내공이자 우리 세대가 만족할만한 융통성이라는 결론이다. 그렇게 본다면 연우의 두 갈래 길은 어둠속을 서로 등진 채로 걸어가는 적대적 반감의 길이 아니고 위에서 훤히 내려다 보이는 조화로운 하모니의 동행, 그로인한 공감의 길로 생각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 길은 같은 노래지만 한명은 힙합을 한명은 발라드를 부르는 친구들이 걸어가는 길 일수도 있을 것이다. 같은 엄마지만 홀로 아들을 키우며 자유로운 직업을 가진 신민아씨와 자신이 읽은 책만을 다시 골라주는 마리 엄마가 병행하는 길 이기도 할 것이다. 같은 책이지만 도박 묵시록 카이지에 심취한 태수와 이제 막 카프카를 읽기 시작한 연우가 동행하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같은 글이지만 백조이야기를 소설로 쓰는 채영과 특집기사를 기획하던 마리가 걸어가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같은 조직이지만 아버지와 힙합을 듣겠다는 재욱형과 아버지로서 역할만은 충실히 하겠다는 채영아빠가 걸어가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이미 성년이 된 나와 소년이었던 내가 함께 가는 길 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여성으로 외모를 꾸미는 나와 남성으로 글을 쓰는 내가 동행하는 길, 그 길이 메이저이든 마이너이든 내가 선택한 길이라면 내 스스로 만족을 느낀다면 남들에게 당당하다면 그것은 포장도로이든 흙길이든 중요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메타세쿼이아 숲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삶의 향기만큼은 어느 쪽이든 공평할 것이기 때문이다.




#8. 새봄이 오면 다시 또 행복이

새로운  나다움을 내가 만들어 가는 거겠지.
매일 모습이 변해가는 달과 매일 새로 떠올랐다가
지는 해가 시간이 흐르는 것을.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잖아.
움직임 속에 삶이 있어.
내가 매순간 새롭게 써나가는 노래가사들처럼.


이 책을 읽고 몸으로 내가 실천한 것들이 두 가지이다. 하나는 거울을 본 것, 또 하나는 힙합을 들어 본 것. 변한 것이 있다면 아주 오래전 그토록 매순간 나 자신을 확인하고 싶어 거울을 본 소년이었다면 지금은 그러한 나를 확인하고 싶지 않아 거울을 보지 않는 중년이 되버린 것. 내 자신을 꾸미는 것은 둘째치고서라도 지금 내가 어떠한 모습인지 제대로 확인한 지가 꽤 오래되었다는 생각이다. 언제부턴가 카메라를 들고 나가는 일도 없어졌으며 나 또한 렌즈에 포착되기를 격심히 거부해왔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이 심리엔 노화되는 스스로를 부러 확인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지만 이제 남들이 어떻게 보든 크게 상관않는다는 배짱(?)도 들어있음이다. 굳어질 대로 굳어진 인상과 성격에 구태여 변화를 추구하고 싶지 않다는 의욕상실도 함께였다. 그러니 대단한 사건이 아니면 충격도 받지 않고 감동도 느끼지 않는 무심, 무정, 무감의 원인인 것이다. 거울을 안본다는 것이 말이다. 소년을 잃어버린 다는 건, 이렇게 자기 생에 무책임한 일임을 이 책을 통해 통감하는 바이다.

또 힙합도 마찬가지. 노출빈도가 높은 MC몽이나 쌈디, 리쌍정도나 되어야 저들이 힙합을 하는 구나 겨우 연결지을뿐 가사도 안들리고 들어봐야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으니 그것은 노래가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우리 시절 ’탁자 위에 물로 쓰신 마지막 그 한마디’처럼 시적인 가사가 아니면 노랫말도 뭣도 아니라 생각했던 나였다. 개인적인 취향을 떠나서도 장르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 나뿐만이 아니라 내 세대 대부분이 요즘 아이돌 그룹의 가요가 노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성 싶은데, 이 사실이 어디로 숨고 싶을 만큼 미칠 것만 같은 이유가 바로 <소년을 위로해줘>를 만났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더욱 울컥해진다. 그렇게 되고 싶었던 어른이었고 마흔이 되면 진정한 성인이 되는 줄로 알았다. 사랑은 서른살까지만 하는 일로 생각했다. 어느 정도 돈도 있고 매너는 물론이요 나이에 어울리는 학식과 교양, 그에 걸맞는 지인들과 서로 교감가능한 대화가 우리를 더 풍요롭게 할 것이라 믿었다. 나이가 들면 어리석은 선택은 하지 않을 거라고 아직도 그렇게 믿으면서 나는 나이들어 버렸다. 그동안엔 ’그때 까지만’이라는 시간이 있었지만 이제 그 제한시간을 다 써버리고 난 나는 과연 내가 원하는 모습이 되었을까, 생각하니 술이라도 한잔 하고 싶어진다. 이쯤 되면 거울을 보는 일은 공포에 가까워 결단이 필요한 행위이리라. 어떤 면에서 소년보다 더한 유년의 습관과 무책임을 여지껏 숨기고 살아온 내 모습, 나이만 먹었지 이 사실을 들킬까봐 어른스러운 척, 인격높은 척, 공부한 척, 선배인 척 해온 내 소년이 오늘 보기좋게 울고 있지 말이다. 그 소년에게 슬그머니 말해볼까. 다시 성장하면 된다고 지금부터라도 늦은 건 아니라고 자라는 건 소년이후에도 얼마든지 계속되어야 한다고, 내 중년이 내 소년에게 염치없게도 말이지. 울면서 이 책을 가슴에 안아본다.

이번엔 봄이 기다려지는 책이었다. 아직 봄을 기다려도 되는 나를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다가오는 봄을 우주삼아 날개 없이도 바람을 내달리고 소리질러 노래하고 싶었다. 소년은 갔지만 봄은 다시 오지 않는가. 그것도 매번 새봄인 채로 말이다. 기다리지 않는 자는 초조하지도 불안하지도 않을 것이기에 어떤 두려움도 없는 법. 맞이해야 할 봄이 없다는 건 소년을 버리는 일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봄을 맞이하려면 반드시 함께 되살아나는 소년의 순수. 이번엔 꼭 아픈 겨울 뒤에 비로소 찾아드는 새봄이어야 할 것이다. 작가는 그 봄을 기다리는 힘으로 지금 아픔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토닥여 주었다. 누구나 결심을 하고 자신만의 신년계획을 세우는 요즘 나는 예전처럼 어떠한 결심도 하지 못한 채 불쑥 닥쳐온 새해를 보내고 있었다.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아무런 시작도 필요없으니 그보다 안전한 계획이 없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영원히 정지된 시간을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 책을 덮으며 결심도 다짐도 더 어른이 되고자함의 의무성 일환이었음을 깨우친다. 이번 봄엔 너무 많은 결심을 하지 않으련다. 실천을 위한 다짐도 줄이련다. 그냥, 이만큼 소년인채로 기다려 볼 테다.

3년 뒤 공연장을 찾은 연우가 3년 전 자신의 꿈과 우주야 말로 가장 소중했던 자신의 소년이었음을 깨닫듯이. 아주 오래전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마당에 나가 미소짓던 그 얼굴이, 고사리 같은 손에서 놓지 않았던 아카시아 이파리도 내 소년이었음을 깨닫는다. 그 소년은 누구보다 아름다웠고 나는 나다웠을 것이다. 시간은 흘렀고 다행히 내가 소년이었던 것만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 얼마나 고마운가. 여전히 내가 나다울 수 있는 건 아마도 내가 소년이었던 적이 있었고 그 한명의 소년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혹시 내가 가끔 소년을 잊고 나다움을 잃어버린다 한다면 오늘처럼 이렇게 괜찮다 하는 소년이 나를 위로해 주었던 폭설의 어느 겨울날이 사무치게 그리울지 모르겠다. 그 소중한 그리움만으로도 나는 다시 소년일 것이기에. 다시 소년인 나는 곧 행복해 질 것이기에. 내 생애 눈부신 첫눈처럼, 곧 다가올 나만의 새봄만큼.


<덧붙임>
이미지는 노후에 달표면에서 사는 것이 꿈이라는
몽환과 동심을 아름답게 그려내는
일본의 일러스트 작가 J.Kagaya 의 작품들입니다. 


첫눈이 쌓인만큼 겨울을 보낸만큼
소풍을 다녀오듯 소년을 찾아가듯
달리고 노래하네 몸과 마음으로
날개를 펴고 꿈속을 날아가리
별을 보며 약속하자 또 다른 나와 함께
축제는 끝이 나고 슬픔은 간직하고
영원히 동행하네 나란히 걸어가자
새봄이 오면 다시 또 행복이 

- 신춘연가新春戀歌,  소년시대 -

봄을 기다리는 마음을 그러모았더니 가사가 되네요.
한 때 소년이었고 지금 소년이며 앞으로 소년일 세상의 모든 소년들에게 
<신춘연가新春戀歌>를 바칩니다.
아마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소년들이 결성해 만든 소년시대가
불러본다면 어떨까요. 
소녀시대는 가고 소년시대가 오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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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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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Question Business ................................................................................. 비즈니스, 물어보다

이 소설을 정초에 읽었다. 나는 친척과 지인들에게 물어보았다. 비즈니스에 관한 인터뷰를 한 것이다. 비즈니스하면 떠오르는 것을 말하시오, 에 그들은 답했다. 내 세대들은 로비, 영업, 계약, 거래, 협상, 지분등을 언급했고 청춘들은 호텔, 정장, 서류라고 말했다. 아줌마들 중엔 룸살롱이라 답한 사람도 있었다. 아주 어르신들은 비즈니스맨이라 하면 곧 브로커나 사기꾼과 동일하다고도 하셨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한건 원래 뜻인 사업(事業)을 말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 내 주변 인물들이 표본샘플로서 일반성을 획득할 순 없을지 몰라도 가까운 사람들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었기에 의외로 흥미로운 대화시간을 가졌다. 그러다가 우리는 비즈니스가 성性을 구분해 비즈니스맨과 비즈니스 우먼으로 나뉠 때는 또 그 의미가 달라지는 걸 알 수 있었는데 비즈니스를 떠올리게 하는 대표적 직업으로 남성은 무역, 여성은 자동차 세일즈라는 결론을 내렸다. 주요업무로는 남성이나 여성이나 고객을 설득하고 계약을 성사시키는 일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우리끼리 웃고 말 이야기였지만 나는 돌아오는 길에 생각이 많아졌다. 남자는 교환을 하고 여자는 판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 비즈니스 행위의 목적에 해당되는 소정의 결과, 즉 성과를 달성하기 위해 행해지는 부도덕한 방법(금품및 뇌물, 접대등)이 사회전체에 만연되면서 비즈니스라는 단어는 자연스레 부정적인 뉘앙스를 획득했다는 점에 있었다. 또 하나,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그건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야"라는 말을 하고 싶을 때 "It's not my business"라는 보다 시크한 생활영어를 농담반 진담반 배운대로 활용해왔다. 여기서 비즈니스는 사업이 아닌 책임이나 소관을 뜻하는 바이지만 이것은 사적인 나의 일이니 별로 알리고 싶지 않다, 혹은 알려고 하지 말라는 복선의 의미가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누가 봐도 무역이나 세일즈를 할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비즈니스 때문에', '비즈니스가 있어서'하고 말한다면 우린 그다지 긍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무언가 뒤에서 은밀히 수행할 것이라는 상상은 곧 의심의 영역이었기에.

앞선 이야기를 종합해 볼 때 비즈니스라는 단어에 대한 고착화된 이미지와 그것을 실제 사용하는 사회, 일상에서의 습관적 행태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여간해선 반전이나 회복의 기회를 제공하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언어는 그것이 사용되는 해당사회의 발전과 그 생명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90년대 후반 벤쳐붐이 일면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이라는 마케팅 용어가 모든 제안서를 장식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를 넘어오면서 그러한 다양한 비즈니스를 통해 우리사회는 초고속 통신을 기반으로 한 IT정보강국을 이룩했고 비즈니스 이후 끊임없이 개발해야 할 것은 너무나 무궁무진했다. 중요한 건 비즈니스 자체보다는 제품의 디자인이 가지는 유틸리티, 소프트웨어의 어플리케이션, 고객과의 커뮤니케이션이 더 부각된 것이다. 그러니 2000년대 중반을 넘어오면서 비즈니스란 단어는 더 이상 창의성을 창출하지 못하고 사양화되는 추세를 맞이했고 오히려 추상적인 영역으로 고전화되거나 은어나 속어로서 재생산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 책은 바로 비즈니스라는 단어의 자의적인 특수성이 문학적으로 거래된 소설이다. 아이디어는 컴퓨터로 구상하고 프로젝트는 테이블에서 회의하고 프리젠테이션은 영상으로 발표하지만 비즈니스는 밀실에서 거래할 것같은 우리들간 암묵적 동의는 이제 더 이상 저 높은 빌딩안에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비즈니스가 지체 높으신 분들의 자부동에서 샐러리맨의 책상을 거쳐 우리들 밥상머리까지 도달한 것이다. 이는 역으로 비즈니스(business)라는 공적인 개념의 단어가 개인의 비밀을 암시하는 秘즈니스가 되기까지 우리사회는 어떠한 과정을 거쳐 왔는지 생각해보자는 뜻으로 전해졌다. 적잖이 당황했다. 『은교』에서 쓸쓸히 죽어가던 한 시인이 보여준 존재론적 고민의 절정을 맛본 까닭인지 철저히 현장밑바닥으로 침투하신 이 르포형 세태소설이 나는, 급작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환골탈태로 자신을 깨부순 자의 냉철하고도 의로운 시선이었을까. 골방에서『은교』를 탈고한 후 욕망의 정점에 서있던 자기애를 처절하게 문학으로 말살하였기 때문에 작가는 다시 시장바닥으로 뛰쳐 나올 수 있었던 것일까. 그렇담, 그는 돌아온 것이었다.

2. Come back Business .........................................................................비즈니스, 돌아오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나는 꼭 이십년 전인 내가 피도 마르지 않은 청춘일 때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이미 세간에 이름을 떨친 대중소설가였지만 그가 빚어낸 비극의 이야기는 내 청춘에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주인공들은 모두 근대화, 도시화의 희생양이었으며 아무리 살아보려 발버둥쳐도 도시는 그들을 차갑게 외면했다. 거리는 절망과 패배로 얼룩진 황량한 황야일 뿐이었다. 야망도 성공하지 못하고 사랑도 이루지 못하고 죽어버린 청춘은 도시에서 철저히 재배된 스무살 아가씨가 끄덕이고 눈물짓기엔 너무나 화가 나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래서, 날더러 어떡하란 말인가 정도가 내 결론이었다. 앞으로 도시에서 일과 사랑을 시작하고 뿌리 내려야 하는 내게 비극은 잔인했다.

하지만 삶의 밑바닥에서도 그들 청춘이 죽기직전까지 주고받던 사랑의 서사시는 참 오래도 기억에 남았다. 이 기시감은 박범신 소설에서 남녀가 사랑을 한다하면 끈적한 관능도 시적감성으로 격상되는 매력포인트라고도 할 수 있다. 가령, 『풀잎처럼 눕다』에서 도엽으로 인해 자신의 성감대가 뜻밖에도 무릎인지 난생처음 알게 되는 은지는 어느날 층계를 올라가다 접질린 발목의 옴씬 들어간 부분을 손가락으로 꼭꼭 눌러주던 老시인 이적요로부터 새로운 감각의 세계로 첫발을 들여놓는 『은교』와 꼭 일치했다. 그것은 마치 문학으로, 글만으로 온몸의 피가 허리를 타고 머리까지 감전되는 소스라친 전율의 경험이라 할 수 있는데 돌이켜보니 나는 그의 문학으로 일종의 성인식을 치루었다는 생각이다. 그러니 박범신은 내 문학의 관능적 감성을 새롭게 발견해준 소설의 콜럼버스라해도 무방할 것이다. 나는 적어도 이적요가 은교의 손을 사랑했듯이 하얀 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린 채 만년필을 집어든 작가의 관능적인 손가락만큼은 언제나 그리워했다, 고 말할 수 있으니 말이다. 첫정이 무섭다고 결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지만 그 시절 풋풋하던 문학의 처녀성을 일깨운 작가의 대중소설과 다시 재회한 느낌이 늘었다. 그는 원래 이런 소설을 아주 잘 쓰고 그래서 사람들을 울리던 작가였다. 뭐랄까. 『비즈니스』는 지난 이십년간 풀잎처럼 누워버린 내 문학적 감수성이 살랑살랑 봄바람처럼 슬며시 일어나서 다시 부활하는 기분이었달까. 뉴스였다. 작가도 나도, 무언가 다시 태어난 이 느낌, 되려 신선했다.

그런데 모처럼 환기된 감수성만큼이나 소설도 감미롭지는 않았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흡사 이십년 전의 은지와 도엽이 그럭저럭 살아와 지금의 불혹을 맞은 것처럼 보였다. 아직도 거짓말 같은 내 나이처럼 말이다. 이들은 모두 두어 번의 연애와 결혼을 통해 자식을 얻고 남들처럼 일하고 돈을 벌어 서울강남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디 근교에 서른 두 평 아파트정도는 소유하고 아이들은 서울에 있는 대학교를 나와 대기업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제 밥벌이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그야말로 평범한 꿈을 가지고 살았을 것이다. 마치 내속을 들여다보는 것같아 얼굴이 달아오르는 꿈이지 말이다. 그런데 서울에 삼십년을 살고 마흔을 넘기고 보니 이 평범해 보이는 꿈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결론을 얻는다. 이렇게 변함없이 평범하게 살아서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달성고지가 너무나 먼 그들만의 이야기라는 걸 이제는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이제 그다지 슬프지가 않다. 우리가 불감해진 탓일까 싶다가도 아무리 생각해도 고개가 흔들린다. 불감증에 자청해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변명하련다. 내가 슬픈 건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가 이제는 그 옛날처럼 화가 나고 슬프지 않다는 것에 있었다. 그것이 은지와 도엽 이후 살아온 내 이력이자 현주소요 일상이었다. 불감에 통감하는 나를 향해 작가는 이 불감증을 앞으로도 계속 자극하겠노라 선언한다. 좀 유치해보일 지라도 직접적으로 삿대질 하시겠다 한다. 나는 정말이지, 많이많이 우울했다. 은지와 도엽이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치더라도 결국 이 책의 '칼라'와 '옐로'밖에 더 되었겠나 싶었기 때문에. 그때나 지금이나 도시에 꿈을 두긴 마찬가지였고 그렇기에 이루지 못한 것도 똑같았기에. 도시는 더 거대해졌고 더 발전했지만 나는 더 작아졌고 더 차가워졌기에. 오히려 그땐 그래도 애절한 사랑만이라도 간직할 수 있었지만 오늘 남겨진 그들의 사랑엔 휑하니 뼈가 다 시려운 것이기에.

3. Naming Business ....................................................................................비즈니스, 이름하다

이 소설의 무대가 되는 곳은 흡사 새만금을 연상시키는 서해안의 도시로서 수십㎞의 방조제 공사로 매립지가 조성된 ㅁ시이다. 개발의 수혜로 공항이 들어서고 테마파크가 조성되는 광경은 자고나면 발표되는 신도시 계획안의 요약판쯤으로 여겨졌고 만灣의 안쪽에 자리잡았으니 ㅁ시가 마땅해보였다. 하지만 첫인상은 네모난 구멍이 난 공허한 사각형쯤 되보였다. ㅁ시는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뉘며 그사이엔 이름조차 황폐한 황강(荒江)이 흐르고 있다. 개발논리에 따라 공업지구가 들어서고 인구가 유입되자 자연스레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로 구획이 나누어 지는 것은 이제 병적인 신도시개발의 후유증으로 만성감기처럼 앓아오던 지병의 하나쯤으로 여겨지는 듯하다. 구시가지의 다세대 주택에 사는 아주머니들이 신시가지의 주상복합에 사는 젊은 애기엄마 집에 파출부로 출근하는 광경은 어찌보면 진부하기까지 하다. 실제로 내가 얼마 전까지 살았던 동네에선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도 십년 이상된 아파트와 새로 지어진 주상복합주민들 사이에서 갈등이 가시화되기도 했다. 학부모들 사이에선 옛날 아파트 엄마들은 몸으로 때우는 청소를 하고 주상복합 엄마들은 돈으로 때운다는 불문율이 팽배했었고 아침 출근 시간엔 주상복합측의 경비원들이 일찍 나와 교묘하게 자신의 아파트에서 나온 차량을 먼저 큰 도로에 진입하도록 교통정리를 하기도 했다. 일분이 아까운 아침시간에 고급의 외제차들은 떡하니 하나의 전용차선을 미리 확보해놓는 것과 같았다. 그뿐인가. 아파트 평수에 따라 배달하는 피자의 브랜드도 달라진다. 22평에서 먹는 피자와 55평에서 먹는 피자 한판의 가격은 약 이만원이 차이가 난다. 그것은 1500cc 준준형 세단과 2000cc이상의 중형세단에 투입되는 휘발유의 양과 같은 이치이다. 그것은 11번가의 만원 짜리 청바지를 입을 것이냐 백화점에서 십만원 이상의 리바이스를 고를 것이냐 명품브랜드의 디젤을 택할 것이냐의 차이와 같은 사안인 것이다. 고로 모든 것은 돈의 문제이다. 그런데 우린 그 문제에 가장 민감하면서도 가장 둔감한 사람들이 되어왔다. 잘 훈련된 둔감을 미덕삼아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런데 이십년 전 보다 돈은 더 많아졌는데도 왜 가난한 사람은 더 많아진 느낌일까.

우리 사회가 어느덧 빈부의 격차나 자본의 편중, 그로인한 신분의 파생, 교육의 편차, 다시 대물림되는 현상들에 체념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저마다 생존전략으로 비즈니스를 수행하는 이야기는 더 이상 새롭거나 충격적이지는 않은 것이다. 9시뉴스에 소개될만한 선정성과 사회적 이슈를 가지고 있다 해도 놀랄만한 기사가 되지는 않아 보인다. 실은 놀라지 않고 있는 그 사실이 너무도 슬펐는데 말이다. 드라마틱한 상투성이 더 이상 소설로서 낯선 느낌이 들지 않는 우리 현실이야 말로 이보다 더한 엄마도 많고 그보다 더한 도둑도 많은 듯했다. 읽는 내내 너무 평범해서 그들은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우리보다 더 불행한 것도 아니고 그저 비슷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것이 무겁도록 의식을 지배했다. 하지만 가랑비에 옷젖는다고 천천히 조금씩 스며들던 빗방울에 온몸이 젖어 버린 것일까, 책을 덮고 나는 눈이 많이 쌓인 창밖을 오래 바라보았다. 연말부터 불어 닥친 한파와 폭설의 무게가 더욱 갑갑하게 느껴지던 독서였다. 이 책은 통속의 서사로 우리를 저 쌓인 눈밭에 내동댕이 치고마는 매정한 구석이 있었다. 어쩔 것인가. 누군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했던가. 나는 눈밭에 구르고 돌아온 심정으로 다시 마음을 잡아야 했다.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비즈니스를 한다. 시장은 신시가지 조성을 위해 여자는 아들의 과외비를 벌기 위해, 남자는 부잣집을 털기 위해 여자의 친구는 가난을 탈출하기 위해 각자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분야에서 그만큼의 능력으로 비즈니스를 수행해간다. 그런데 가만보면 남자는 자신의 요구조건과 보상을 교환하고자 하고 여자는 자신의 미모나 육체를 팔아 원하는 바를 얻고자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비즈니스를 사업이라 보았을 때 비즈니스는 이와같이 경제행위를 전제로 하며 비즈니스의 주체에는 갑과 을의 관계가 발생한다. 갑과 을은 서로 대등할 수도 종속적일 수도 경쟁적일 수도 있다. 어떻든 갑이 이익을 제공하면 을은 그 댓가를 지불하는 거래관계가 비즈니스의 핵심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경제행위에 중요한 것은 사업자의 능력인 것이지 공익성이나 도덕 및 윤리성이 아니라는 것에 있었다. 그것은 곧 자본주의의 속성에 해당하기에 비즈니스는 태생자체가 윤리의 의무가 없는 공익에 자유로운 행위일 수 밖에 없는 활동인 것이다. 그러니 빌딩내부 전략용어였던 비즈니스가 타락한 삶의 현장용어로 추락해 보이는 현상은 어쩌면 예정된 사회문제가 비로소 가시화 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작가는 비즈니스를 사회에 건설적인 행위로서 복제되는 모델이 아니라 질병처럼 퍼져나가는 바이러스와도 같다고 말한다. 이는 사업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더욱 많은 비즈니스가 등장하면 그만큼 바이러스가 퍼져가는 영역이 넓어지고 변종이나 악성바이러스도 당연한 이야기라는 말씀이다.

작가는 대형 프로젝트의 수주에 앞서 해당 심사위원에게 뇌물을 건네고 입찰후 리베이트를 관행처럼 지켜온 우리사회 윗선의 비즈니스가 남편의 한달 월급으로는 도저히 사교육비를 마련할 수 없는 중학생 엄마가 자신의 몸을 팔아 돈을 마련하는 아랫목 비즈니스와 무엇이 다른가 질문한다. 실제로 이 책에서의 화자는 ㅁ시의 시장 때문에 너나없이 자신을 '비즈니스맨'이라고 부르는 게 대유행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제는 모두들 철저하게 그 비즈니스의 속성을 간파하고 그것을 정확하게 이행하는 인물들이 된 것이 동일할 뿐 오가는 금액과 가시화된 성과에서 비즈니스의 우월성을 논할 수는 없지 않을까. 양심을 더럽히건 육체를 더럽히건 얻어지는 이득을 위해 수행되는 제반과정을 비즈니스라 통칭한다면, 이젠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켜내야 할 것이 오히려 비즈니스가 아닌가,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해서 등장인물의 이름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비즈니스 전략으로 브랜드화된 느낌이 들었다. 화자이면서 지혜롭지 못했던 정우의 엄마는 그중에 가장 인위적인 이름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자신의 비즈니스를 수행하러 고객을 만나러 갈 때엔 흰 칼라 한송이를 들고 나타나며 꽃과 같은 순결한 닉네임 '칼라(calla)'를 사용했다. 하지만 보통 점심시간을 이용해 그녀를 찾던 고객들이 주로 하이 '칼라(collar)'의 남성들이었기에 이름지어지는 종속적 개념에 불과하기도 했다. 이는 순결처럼 다른 개인의 정체성이 크게 의미없는, 즉 자신의 '칼라(color)'가 생성될 수 없는 무개성, 무색, 무빛깔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그녀의 비즈니스 전략은 '자신을 없애는 것'이었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칼라'엔 아이러니하게도 그 어떤 '칼라'도 없는 것이다. 이 정체성이 반영된 그녀의 비즈니스는 그쯤이야 아무것도 아닌 일, 로서 非즈니스가 아니었을까. 공허한 그녀의 닉네임이 유난히도 남의 이름처럼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에 반해 화자의 친구인 주리는 언뜻보기에 여성스럽고 다정해 보이는 뉘앙스이긴 했으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도 양면적인 의미를 띠고 있었다. 그녀는 대학생때 부터 탁월한 비즈니스 감각으로 미모와 재능을 십분 이용해 스폰서를 심사하고 평가하는 '주리(jury)'로서 철저하게 이득이 생기는 쪽으로만 움직이던 '주리(走利)'였다. 그러나 그 결과 자신이 행해온 비즈니스와 똑같은 방법으로 파멸하는 가여운 영혼으로 '주리'를 트는 형벌과도 같은 죄값을 치루게 된다. 비즈니스감각으로만 사람을 평가하던 그녀는 사회의 '주리(jury)'로부터 감옥에 갇히게 된다는 점에서 누구보다도 서늘해지는 이름이었다. 그녀는 마음껏 소비하는 費즈니스의 전문가였지만 자신처럼 미래를 준비하는 더 감각적인 備즈니스 전문가를 이길 수는 없었나 보다.

작품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이름을 가진 남자, '타잔'의 경우는 어딘가 어색하면서도 수긍이 가는 네이밍이었다. 비즈니스 전략과 활동, 사후 추진방향(?)과도 적절하게 어울리는 이름이기도 했다. '타잔'에게는 강력계 형사 출신의 정준하라는 실명이 있었지만 부자들이 숨겨놓은 잉여재산으로서의 '타잔(他盞, 남긴돈)'을 훔치는 사람으로 유명세를 떨치게 된다. 그의 최후는 '타잔(Tarzan)'처럼 길게 늘어진 넝쿨식물의 끝을 잡고 외롭게 황해바다를 넘어가는 뒷모습이었지만 그가 주로 고위층이 뇌물로 받은 금품과 보석을 훔쳐왔다는 점에서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사는 숨겨둔 비즈니스 모델이 되기도 했다. 짝퉁의 타잔들은 타잔의 용맹을 그리워하고 타잔의 범죄에 대리만족하는 '타잔(垛䝳, 탐내고 쌓다)'의 심리상태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자신의 얼굴과 신분을 드러낼 땐 '옐로'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며 노랑색 넥타이를 하고 나타났다. 노랑색은 동양에선 부와 권력, 수확등을 상징하나 서양에선 질투나 원한을 상징하는 이중적 의미의 색이다. 그는 아내를 잃고 직업에 낙오된 신분으로서 사회에 원한을 가지기도 했지만 욕망의 궁극엔 다시 돈을 벌고 바다를 살리겠다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는 바다오염으로 희생된 게 한 마리를 보고도 눈물지으며 다른 여자와 육체관계를 맺고는 절정의 순간에 아내를 부르던 순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생계를 이어주는 횟칼로 사람을 위협해 협박도 할 줄 아는 적개심을 동시에 가진 인물이었다. 사랑을 원하고 바라면서도 원망하고 증오하던 '옐로'가 속마음이었다면 부자들의 남은 돈을 훔쳤지만 자신의 남은 행복은 끝내 지키지 못한 '타잔'은 겉모습의 브랜드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대도로서 하늘로 비상하는 飛즈니스를 꿈꾸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누구보다 슬픈 悲즈니스맨이 되고 말았다.

그 외 비즈니스와 큰 상관이 없었던 화자의 남편 이름은 민첩할 '민', 길 '영'의 서민영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것이 민첩한 길을 가는 지혜로운 인물이 아닌 서민(庶民)으로서 영원히(永) 남게 될 이름으로 들렸다. 유일하게 싱그러운 이름을 가진 '타잔'의 아들 '여름'이가 이 작품에서 그래도 희망을 암시하는 인물이었다고나 할까. '여름'이는 여름이 시작되는 입하에 꽃이 피기에 입하목이라 불리는 이팝나무에 맺힌 '여름(열매)'이 아니었을까, 해서이다. 이 책에서 이팝나무는 화자가 남편과 사랑의 맹세를 하던 소중한 장소이며 여름이 엄마를 묻은 그리움의 장소로서 화자와 타잔간의 상처의 접점지대, 추억의 공동구역이라 할 수 있다. 화자도 여름이 엄마도 모두 '이팝나무 흰꽃 같은 아내'라 불리우는 정서적 공통점이 있었다. 책의 후반부에선 이미 '여름'이의 모성을 이팝나무에서 잉태했다고 볼 수 있는 화자가 '여름'이가 마음을 '여름(열음)'으로써 지난날의 상처도 자신에겐 '여름(열매)'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는 인생의 반전을 깨닫는다. 비록 다른 사연의 이팝나무였지만 그로 비롯된 그들의 '여름(夏)'은 훗날 사발에 소복히 얹은 쌀밥처럼 포근해 지리라는 기대를 하게했던 이름이었다.

4. Explain Business .....................................................................................비즈니스, 해명하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러한 비즈니스를 수행하지 않으면 안되었을까. 모든 사람들이 부모가 능력이 없고, 사업이 망하고, 남편의 월급이 턱없이 부족하다 하여 도둑질과 매춘을 비즈니스로 일삼진 않지 않은가. 죽을만큼 힘들다 하여 모두가 진짜 자살을 하는 것은 아니듯 그래도 내일 떠오르는 해를 떠올리며 개미처럼 일하고 매순간 거짓없이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이런 작품을 대할 때만 우리는 윤리선생님이 되고 싶기도 하다. 이에 대해 작가는 사람들이 비즈니스를 하게 된 배경으로 한번 실패한 경험이 다시는 일어날 수 없게 만드는 사회구조를 꼬집고 있다. 폭력과도 같은 자본주의적 경쟁구조, 그로 대물림되는 빈부의 격차, 그것으로 파생되는 인간성 상실, 타자의 불행에 무감해지는 사회를 향해 상당히 직접적인 논조를 펼치셨다. 최근 조정래 작가의『허수아비춤』에서 시민단체와 불매운동을 통한 경제민주화를 외치던 어느 경제학 교수의 목소리가 슬몃 중첩되는 기분도 들었음이다. 작가의 의도를 너무나 잘 알면서도 나는 솔직히 옥에 티만큼만 아쉬웠던 부분이기도 했다. 나는 이번 작품이 전작과 분위기가 상이해 갸우뚱거린 점도 있었지만 사회를 향한 직접적인 어투가 어쩐지 급하게 느껴졌다고 할까. 작가는 워낙 세태소설로 대중적 인기를 누리던 분인지라 남녀간의 사랑을 엮어내는 서사의 추진력, 파멸로 치닫는 이야기의 속도감에선 여전한 내공을 보여주었지만 독자를 훈계하는 듯한 어조는 사뭇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런 면에서 조금 더 분노하던 조정래 작가의 어조보다는 아예 아주 통속적이고 더 기가 막히고 청승맞은 사연들이 어쩔 수 없게 펼쳐졌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속절없이 구멍난 매립지구를 채워 줄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처절함이 제격 아니었을까. 분량면에서 타잔과 화자의 남편, 친구 주리의 과거 사연이 설명식이 아닌 드라마틱한 전개가 동반되었다면 더 감동적이었을 거라는 생각, 물론 마흔이 넘은 옛날 그시절 팬으로서 지극히 주부스러운 발상임을 먼저 밝혀두는 바이다.

우선 화자의 남편은 다리를 저는 무기력한 사십대 중반의 가장이 되어 희미한 골목길에서 나타난 듯 보였다. 그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다친 결과로 무릎은 10도가 구부러진 채 영영 펴지지 않는 장애인이 된 것이다. 이후에도 끝내 고시를 패스하지 못해 '인권변호사'의 꿈을 이루지 못하는 패배자의 길을 걷게 된다. 화자 남편이 한 번의 산재로 무릎이 꺽이는 현실은 한 번의 실패로 다시는 희망을 펼칠 수 없는 우리네 보통 서민의 신세를 표상한다고 느껴졌다. 나는 어느날 밤 화자가 무엇에 홀린 듯 검은 그림자를 쫓아갔던 매립지구에 홀연히 나타나 다리를 절면서 걸어가는 뒷모습으로 등장한 남편의 잔영이 아직도 뇌리에 선하다. 그때 화자의 상에 맺힌 피사체로서의 한명의 장애인은 살을 맞대고 살아가는 아내조차도 공포스럽고 낯설기만 한 것이다. 알고 보면 그 모습은 실패와 좌절의 그림자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어둠을 표류하는 우리들 자화상에 다름 아닐 것이기에 애써 확인하고 싶지 않은 남편이기도 한 것 아닐까.

무엇보다 타잔의 경우는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그는 독학으로 대학을 마치고 강력계 형사생활을 시작했지만 공무원과 유흥업주들 간의 유착된 비리를 눈감아주지 못한 죄로 좌천되는 이력을 얻게 된다. 공적사회에서 소수정의 몰락의 전형적인 케이스였다. 우여곡절 끝에 타잔은 ㅁ시의 매립지에서 '동백횟집'의 사장이 되지만 쓰레기소각장과 해안도로 개발등의 신시가지 개발계획으로 인해 꿈을 사장(死藏)시키는 희생양이 되고 만다. 이후 아내의 죽음과 연이은 아들의 자폐는 마치 타잔의 몰락에 예정된 수순처럼 피어나고 그는 넝쿨 하나에 인생을 의지해 부자들의 담벼락을 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처음부터 정의를 외면하고 적당히 양심을 처분했다면 그는 어쩜 횟집사장이 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화자의 경우는 아버지의 사업실패와 잇단 투신으로 온가족이 사글세 지하방으로 내몰리게 되면서 학업을 중단하게 되는 불우한 가정환경의 대표케이스였다. 비록 기득권층에 탑승하진 못했지만 남편과는 대파와 쪽파시절 소박한 사랑과 꿈이 있었다. 처음부터 과외비를 명목으로 매춘을 시작한 것이 아니고 구청의 요가강사 자리도 비굴이 필요함을 깨달은 시기에 우연히 친구의 논리에 휘말리게 된 경우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신념으로 자라난 것은 당연 인권변호사의 꿈을 가졌으나 고시를 패스하지 못한 남편의 실패가 버팀목처럼 자리잡고 있었음이다. 이렇듯 지금, 비즈니스를 한다고 말하는 두 사람의 과거 실패에는 최초 자신들의 선택과 잘못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선택을 하게한 사회구조와 가정환경이 그들을 비즈니스의 세계로 내몰았거나 이끌었다고 보여진다. 결국 공적인 개념의 비즈니스가 가장 사적인 개념의 비즈니스로 변질된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이들이 행한 비즈니스야말로 뿌리깊은 사회적 비즈니스가 아니겠느냐고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자신들의 선택으로 실패를 자초한 화자의 남편과 화자의 친구는 별도의 사적인 비즈니스를 진행하지 않은 사람으로 그려졌다. 남편은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아내의 전략을 알고도 있었으면서 눈감아 주었고 친구는 비즈니스 자체가 삶이긴 했지만 결혼 후엔 비즈니스로 경제적 이득을 본 것은 아니었다. 남편과 친구는 좋지 못한 환경요인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실패자체가 불합리한 사회구조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들은 사회가 아닌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배신당하는 개인적인 상처를 얻게 되지만 화자와 타잔은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신세가 된 것이 아닐까. 혹시 화자와 타잔의 비즈니스는 어쩌면 가정과 사회로부터 추락한 자신들을 수렁속에서 탈출시키고자 한 전략적 몸부림인 동시에 다시 가정과 사회에 돌려주고자 한 자포자기성 복수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그들을 비난하거나 어떠한 충고도 할 입장은 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나 역시 자영업에 크게 손을 댔다 참담한 실패를 겪어 본 입장으로서 이들의 추락이 얼마나 억울하고 뼈아픈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대충대충 열심히 하지 않고 망한 사람들은 또 어떻게든 그 염치없음으로 곧잘 재생의 기회를 얻어내기 마련이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전 재산을 다 바쳐 신앙처럼 사업한 사람들은 좌절을 쉽게 인정하지도 못하고 그 분노와 배신으로 괴로워하며 차마 타인을 볼 수 없어 자신을 망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작가는 바로 이러한 경우 보편적인 윤리를 중시하다간 자신들의 생존을 버려야 하는 자본주의의 슬픔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지 조용히 묻고 있었다. 뼈빠지게 마트에서 일한 돈으로 사교육비를 마련하고 그렇게 해서 특목고에 진학하고 운좋게도 일류대학에 들어간들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하면 뼛속부터 성골인 자식들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그들의 재산을 늘려주는 일에 다시 뼈아프게 봉사해야 하는 우리네 사회뼈대 속에서 그럼 어떻게 무슨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느냐, 말이다.

엄마를 잃고 온종일 방바닥을 두들기던 여름이의 손바닥과 담벼락을 발로 차던 발길질이 못견디게 사무친다. 마치 어린 것이 내 손바닥이라도 되어 애꿎은 가슴을 사정없이 치고 마는 장면이었다. 억장이 무너진다는 말은 이럴 때 하는 말이 아닐까. 그래봤자 내 손과 내 발만 다치게 되는 이 억울한 광경이 우리 사는 오늘의 현장임을 비로소 확인한다. 우리네 가족모두 무국적자가 되어 조국이 없는 아이들이 내일도 방바닥을 담벼락을 두드리고 있을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울분이 차오른다. 이대로 살다가 죽기는 싫다는 하소연을 하고 싶어진다.

돈을 이상의 조국삼지 않고 비즈니스를 삶의 전략으로 세우지 않고 윤리를 잃지 말고 사랑을 베푸는 것이, 물론 답인 것을 우리가 모른다고 생각지 말라. 타잔과 화자는 그들이 칼라이고 옐로인 이름을 버린 후엔 오히려 육체관계를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들의 윤리성을 지키려고 했다. 비즈니스를 버리자 윤리를 되찾은 것이다. 사랑은 비즈니스가 아닌 유일한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화자는 '당신 뜻대로 해'라고만 하는 끄덕없는 남편과 '엄마때메 정말 돌겠다'고 꿈쩍않는 아들과 달리 자신을 조국으로 여기고 마음을 여는 여름이를 변화시켰다는 것에 살맛을 느끼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비록 친구는 평생 장충동 족발집에서 몸에 밴 어머니의 돼지기름 냄새를 벗어나고자 비즈니스를 시작했고 그것을 자신에게 가르쳐 주었지만 이제 자신은 돼지갈비집에서 온종일 뒤집어쓴 돼지기름 냄새가 언짢은 냄새가 아니라 오히려 향긋하다고 말할수 있는 것이 아닌가. 돼지기름 냄새가 꽃향기로 느껴지는 것이 희망과 사랑의 힘인 것을 우리가 모를 것이라 여기지 말라. 하지만 돼지우리 같은 방구석에서도 이팝나무의 꽃이 피어날 수 있음을, 정녕 몰랐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5. Sympathy Business ..............................................................................비즈니스, 용서하다

이 책을 읽고 살면서 그동안 내가 행해온 비즈니스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아주 오래전에 내가 대학교 2학년일 때 아버지가 쓰러진 후였다. 하필 그때 내가 다니던 디자인 학원의 실장이 비즈니스를 제안해왔다. 학원수업 끝나고 바로 앞 카페에서 점잖으신 분들의 말동무가 되어주는 알바가 있는데 그분들이 꼭 여대생을 원한다며 월수입은 한 달에 오백이라고 끈질기게 나를 설득했다. 돌이켜보니 딱 이십년 전이다. 한 학기 내 등록금이 백 만원이 조금 넘었으니 엄청난 액수였고 상상하기 어려워 가슴이 쿵쿵 뛰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그때 확인차 카페를 들러 어떤 손님들이 오는 곳이며 여대생들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 지켜보았다. 정장을 입고 화장을 곱게한 아가씨들과 나이가 지긋해보이는 아저씨들이 테이블을 하나 놓고 그야말로 열심히 진지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순간, 저정도라면 괜찮치 않을까 하는 꽤 합리적인 설레임이 내게도 찾아왔다. 하지만 화장실에서 우연히 그녀들의 기가막힌 대화를 엿듣곤 결국 그 학원을 그만두었던 그때 이후로 돈이 아쉬울 때마다 그 제안이 그리워지기도 했다는 사실, 나만이 알고 있는 추억이 되었다. 그때 그녀들은 겉으로는 순결한 한송이의 '칼라'와 다를 바 없었는데 말이다. 나는 친척의 소개로 다른 중소기업의 일자리를 얻어 방학이면 등록금을 벌기위해 온몸을 다 바쳤고 운좋게도 무사히 졸업을 했다. 결국 그 회사에 취직해 근 십년간을 거기서 오를 수 있는 자리까지 올라갔던 것 같다. 사장은 밤샘을 밥먹듯이 하던 내게 대학원 첫학기 등록금을 건네며 공부를 계속하라 했고 그런 나를 질시하는 직원들의 눈총을 견뎌가며 나는 또 석사과정을 진행했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나는 여전히 사회가 윤리적으로 용인하는 비즈니스만을 수행하며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공부를 마치고 돈을 벌고 사회적 지위를 얻고 나자 목표를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때마침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는 남겨주신 재산과 모든 인력을 동원해 충동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그것은 참 이상적인 술집이었고 윤리적인 자영업이었다. 나는 여자를 좌석에 앉히지 않았고 이윤을 부풀리지 않았고 손님에게 비굴하지 않았고 직원을 인간적으로 대했지만 그랬기에, 보기 좋게 망했다. 지난 일 년이 아니 내 인생이 너무 길다는 생각이 드는 건 生의 레일에서 추락한자의 억울함일 게다. 어떻게들 알고 지금의 내게 이러저러한 비즈니스의 유혹이 꼭 이십년 전의 디자인 학원에서처럼 너무나 선명하게 다가온다. 이 책의 주인공 격인 화자의 마흔에 꼭 비법을 전수하겠다는 비전(祕傳)의 秘즈니스에 나도 얼마든지 뛰어들 수 있었는데 말이다. 나는 화자처럼 남의 자식도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 따스한 가슴을 가진 낭만주의자가 아니었나보다. 내가 믿는 건 그 옛날 앤틱풍의 거실장에 오롯이 놓여진 체코제 크리스탈 컵처럼 소중한 사랑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집었다 던져버릴 수 있는 걸레나 빗자루 같이 질기디 질긴 일상의 힘이었다.

한 해가 바뀌고 무엇이든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싶을 때지만 나는 좀처럼 기운이 나지 않는 요즘을 살고 있다. 이제보니 'ㅁ시'는 네모난 구멍이 난 '口市'라는 공간이기도 했지만 우리 생에 비전없는 비즈니스로 공백이 생겨버린 구멍난 시간으로서의 '口時'이기도 한 듯하다. 우연찮게 집어든 한권의 책이 내 구멍난 가슴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지 집요하게 되묻는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 시절 그길로 빠져들지 않은 것을 내심 자랑스러워 하며 막다른 길에서 포기하지 않았다는 자부심으로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닐까. 우린 그렇게 우묵해진 우리 생의 시간과 공간을 돌이나 흙이 아닌 땀이나 눈물로 매립하며 다시 '메움'의 'ㅁ시'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인간만이 희망이고 사랑만이 살길이라 그 연대의 힘만이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오늘의 슬픔을 달래줄 뿐이라, 당신께 말하지는 못하겠다.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다 해도 다른 희망은 알지 못한다 해도 나는 오늘 무엇인가 되찾아 내고 싶다. 그때 쉽게 포기할 수 없었던 내 자존심으로 다만 말하지 않고 나는 오늘도 등돌린 그의 뒷모습에서 서글프게 굽어진 세월의 등뼈를 바라보겠다. 지난해보다 가늘어진 그의 허벅지와 더 시큰해진 무릎팍에 고개숙이겠다. 막다른 길이라고 나를 저버리는 비즈니스만이 살길은 아닐 것이다. 언젠가 미국 어느 레스토랑에서 全 웨이터가 멕시칸인 것을 보고 저것이 우리의 미래일까 생각한 적이 있다. 그래도 그들은 웃는 얼굴이었고 그 안에서 행복해보였다. 당신이 비즈니스를 수행하건 비즈니스를 택하지 않건 우리는 그와 상관없이도 행복하고 싶다. 성공한 비즈니스맨도 화려한 비즈니스우먼도 행복하지 않다하면 돈과 명예도 권력도 우리에게 자랑할 게재가 아닌 것이다. 이팝나무 푸른 그늘아래 삼겹살에 소주 한잔으로도 더 행복해진 우리야 말로 生의 비즈니스 감각이 탁월한 자본주의 시민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자본주의를 빠르게 흡수해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중국을 향해 이러한 작품을 한중 교류작품으로 꺼내드신 작가의 효율적이고도 감각적인 비즈니스 역량에 진심어린 박수를 보낸다.

돈에 종이 되거나 주인이 되지 말고 한발 물러앉은 구경꾼이 되고 싶은 밤이다. 우리 오늘 잠이든 옆지기의 어깨를 살포시 안아주자. 어느 여름날 칼라보다 예쁜 꽃다발 한아름을 건네려 내앞에 나타난 그 장면을 기억하자. 우리에게도 대파와 쪽파쯤의 추억이 왜 없겠는가. 특목고와 외고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그것이 살길이라 오늘도 학원을 돌고 온 아이의 잠든 이마에 조용히 입맞춤하자. 우리네 남편들이야 말로 밀림을 해치는 문명인들을 응징하며 밀림의 평화를 지켜낸 자랑스런 가장으로서의 '타잔'일 것이다. 우리네 아이들이야말로 여름만이 아닌 사계절을 앞둔 기다림의 계절에 태어나 온몸으로 희망을 깨워준 '여름'일 것이다. 당신과 나야말로 한맺힌 며느리의 영혼이 쌀밥같은 흰눈으로 환생하듯 피어난 순결의 나무일 것이다. 나는 이제 세상의 주인을 우리로 삼고 삶의 유일한 전략을 행복으로 삼아 일상을 살아가는 아주 변함없는 '칼라'를 가지고 싶다. 우리네 서민의 서글프고 고달픈 그 색깔이야말로 우리를 지켜주는 개성일 것이다. 우리의 '여름'은 그렇게 서로 지친 어깨를 보듬어 주는 작은 마음 하나에서 개화할 것임을, 믿는다. 그렇게 다시 일어날 비즈니스를 바보처럼 기다린다. 그 믿음과 기다림의 힘으로 나는 일상을 견디리라.

아니고도(非) 슬프면서(悲) 고달프고도(憊) 낮으면서(卑) 날아갈듯(飛) 숨기어진(秘) 세상의 모든 비즈니스여, 이제 그만 우릴 용서하시라. 알고 있었지만 행복하고 싶었던 어리석음을 눈감아 주시라. 사는 건 거래가 아닐 테다. 죽는 건 협상이 아닐 테다. 사랑은 계약이 아니고 아이는 지분이 아닌 게다.

'지금 참 좋다'는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해 살자,
우리 이번 생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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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09 12: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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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08 21: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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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08 21: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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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09 13: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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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09 14: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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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09 2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10 0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더블 - 전2권 - side A, side B + 일러스트 화집
박민규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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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과 더브러

나에겐 이 리뷰가 올해의 마지막 리뷰이다. 감회가 새롭다. 다음해가 되면 내 인생을 가리키는 여러 숫자가 바뀌어 진다. 더해지고 늘어나는 것이 대부분일 테지만 그럼으로써 내게 주어진 수명은 줄어 들 것이다. 올 한해를 살아낸 것인지 그렇기에 죽어간 것인지 마음이 착잡해진다. 송년의 심정이란 다분 자신이 놓여진 현재의 위치에 따라 좌우되는 감상일까. 언제나 이맘 때 쯤 이면 망년회에서 십팔번의 노래를 불러가며 내년엔 더, 하는 희망으로 한 해 동안 달려온 거리와 쌓아온 성과를 자축하곤 했는데 이번엔 좋게 말하면 '내년엔 더 나아지겠지' 하는 진부한 기대감이요, 뒤돌아서 중얼거리면 '그래서, 뭐?'하고 싶은 울분이랄까, 그렇다. 그래서인지 책을 덮고 나는 짐짓 숙연해졌다. 이 책이 꼭 올 한해 누구를 만나서도 십팔번의 노래같은 건 부를 수 없었던 나를 위해 '**, 인생 뭐 있어?' 하며 어깨를 툭 쳐주는 것만 같았기에. 하필, 책의 두께가 더블이라 좀 아프긴 했다. 아니 책이라 하기엔 의아했다. 낯선 매스감이 은근히 번져오는 근육주사를 맞은 것처럼 여운도 길었다. 하지만 나는 한 사람에게 있어 독서의 시점과 때마침 집어 드는 한 권의 책은 어떤 운명적인 관계가 있다고도 믿는 사람이기에 이 책으로 올해를 보내는 송년의 의식을 기꺼이 치루어 보기로 했다. 물론, 십팔번의 노래는 그때 가서 결정할 생각이다.

그래, 지나고 보니 나는 이 책을 공들여 읽었다는 생각이다. 단편을 열여덟 편 읽었지만 마치 열여덟 권의 책을 읽었지 싶다. 이는 아무래도 작가가 의도한 책의 편집과 외적인 디자인이 피할 수 없는 영향을 주었던 듯하다. 우선 작가는 이 책이 가지는 파격적인 형식에 'LP시절의 더블앨범에 대한 로망'이라는 주석을 덧붙였는데 그러한 설명이 없었더라도 어느 솔로가수의 10주년 기념 앨범(2CD로 만든) 팩키지 정도는 연상시키기에 충분했음이다. 속지 또한 그시절 LP커버에 들어있던 그 속지라기 보다는 요즘 CD의 부록형태인 화보집정도로 이해될만 했다. 그러나 레코드는 2장이어도 목차에서는 CD처럼 disc 1, disc 2로 구분하지 않고 side A와 side B라 구분된다. 디스크란 개념은 그 시절 허리디스크와 동일했기에. 이는 개체의 개별성보다는 기록매체로서 레코드가 가지는 양면성이 그대로 표식에 반영된 것이다. 작가는 바로 이 양면성을 무의식적으로 의식한 것은 아닐까 싶다. 즉, LP 레코드의 앞과 뒷면처럼 존재하는, A면을 들을 땐 B면을 들을 수 없는 그러나 두 가지 모두 하나의 레코드를 이루는 물리적 속성을 '더블'의 본질로 따르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이것은 더블(double, 두배)이 가져다 주는 더브러(더불어의 옛말)가 아닐 수 없다. 레코드의 자켓에 해당하는 표지의 인물도 하필 복면을 쓴 덕에 두 권을 나란히 놓고 보면 두 사람은 서로 대치하거나 각자 등을 지게 된다. 절대 마주본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서로의 눈이 마주치치 않기 때문일 것. 그러나 표지의 주인공은 그러한 양면을 가진 한명의 작가일 뿐이다. 처음엔 그러려니 지나쳤는데 책을 덮고 케이스에 side A와 side B를 꽂고 보니 작가가 가장 많이 고민한 것은 혹시 우리안의 두 가지 현실, 혹은 우리 인생의 두 가지 존재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물론 처음엔 이제 이정도가 되었으니 이런 식의 크리에이티브를 마음껏 발현해 보아도 얼마든지 먹힐 것이라 생각한 다소 삐딱한 심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길거리에 피를 뿌린다면 미친* 이라 욕을 듣겠지만, 백남준이 했다 치면 그것은 예술이다!) 즉, 자타공인, 작가는 이제 '박민규니까', 이거나 '박민규 답네' 하는 반응을 들을 정도는 된 것이다. 무엇이든 새로움을 시도할 땐 기존에 변화를 추구하지 않았던 혹은 후에 선례를 가지게 될 같은 업業을 하는 사람들로부터 칭찬만큼이나 비난의 평가도 각오해야 하는 법이다. 이 사람의 문학하는 방식이 과연 독자들에게 그 만족도 더블로 제공할 것인지 와는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허나, 열여덟 편의 선물을 하나하나 다 풀어보고 샅샅이 사용해(?)보고 나니 모든 것은 끄덕임으로 돌아왔다.

물론 선물 모두가 나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작가는 한편의 이야기마다 그것을 헌사하는 주인공이 있었고 그 배경에는 결국 작가의 전 생애가 소중하게 녹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모든 이야기는 '삶'과 '죽음'에 대한 작가의 성찰로 귀결되고 있었다. 특히, side A는 '어짜피 사는 건 죽어가는 일'임을 side B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노래하고 있었다.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달나라에서도 원시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음반을 앨범이라고 하며 특히 LP판은 대놓고(?) '레코드'라고 한다. 기록과 녹음이라는 레코드는 그 시절 소중하고도 특별한 일이었다. 그는 삶과 죽음의 레코드(기록)를 통해 자신만의 레코드(앨범)를 만든 것은 아닐까. 독자로서 이러한 배경을 인식하자 열여덟 편의 이야기는 곧 열여덟 장의 사진이거나 열여덟 곡의 노래이거나 열여덟 통의 편지처럼 내가 잊고 있던 여러 감정을 확인하는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모두 한사람이 제공한 것이라는 게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소재, 입체적인 장르였지만 익숙하게도 같은 톤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분명 사진사도 가수도 편지글도 한사람인 작품이었다. 나는 흡사 그 옛날 다방의 DJ라도 되어 열여덟 가지의 사연을 읽고는 그 주인공에 음악을 띠우고 싶어지기도 했다. 『더블』은

그렇게 삶과 죽음이 '더브러' 공존하는 우리 生을 곱배기로 제시하고 있었다.  


side A .... 어짜피 죽어지는  

A면에 수록된 아홉 작품들은 사실 그 어떤 공통성을 가지고 묶어내기는 힘들었다. 장르와 소재, 집필시기를 고려해보아도 그 체계의 비밀은 작가만이 아는 듯 느껴졌다. 하지만 그러한 랜덤의 규칙 속에서도 나는 주인공들이 끊임없이 나는 어디로 갈 것인지, 나의 생이 끝나는 지점은 어디인지 질문하던 목소리를 또렷이 기억한다.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근처>의 정호연이나 이제는 더는 살고 싶지 않다는 아버지의 <누런 강 배 한 척>은 바짝 다가온 죽음의 그림자를 실체로 감지하는 주인공들의 일기를 들쳐보는 듯 했다. <굿바이, 제플린>은 어린시절 풍선과도 같은 동심의 꿈이 사라지는 듯한 동화적 판타지가 죽어진 비행선과는 별개로 반갑기도 했다. 더 없이 깊이 깊이 들어가던 바닷속 심해 SF 소설 <깊>이나 냉동인간으로 분한 각하의 자부동이 서글프기만 하던 <굿모닝 존웨인> 역시 죽음을 수면아래에 놓느냐 얼음속에 넣느냐의 문제로 인식되었다. 인류 멸망을 하루 앞둔 어느 이웃남자들의 우스꽝스런 일상을 통해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엿보게한 <끝까지 이럴래?>는 하나의 꽁트로서 재미난 무대였다. 자전소설이라기 보다는 소설가로 살아가야 할 운명을 변명한 글로 느껴지던 <축구도 잘해요>는 죽거나 혹은 죽을 상황에서도 역시 문학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그 피할수 없음이 대단히 문학적으로 암시된 글이었다. SF장르라 하기엔 너무나 우주적(?)이었던 <크로만, 운>은 꼭 스티븐 호킹 박사를 위해 쓴 글이라는 주석이 덧붙여져야 할 작품으로 이해되었다. 이들 이야기의 밑바탕에 흐르던 시간과 장소엔 모두 '죽음'이라는 피할수 없는 공동구역이 있었다. 작가는 그래보았자 결국 어짜피 죽어지는 것이 인생이라 결론내리는 것으로, 나는 받아들였다.


나 많이 늙었지? ............................................................ 근처



 
진추하, Graduation Tears
(One summer Night, 1976) 

나는 이 작품을 『2009 현대문학상 수상 소설집』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 수상작은 하성란의 <알파의 시간>이었고 박민규의 <근처>는 후보작이었다. 즉, 수상의 근처에 있는 작품으로 만난 것이다. (뒤에 황순원 문학상을 수상하긴 했지만) 하지만 하성란 작가의 글이 다소 어려워 비교적 스토리가 분명했던 이 작품이 더 기억에 남았었다. 그런데 열 여덟편 중 왜 하필 이 작품이 첫 번째 수록되었는 지 책을 시작하기 전부터 궁금했다. side B에서도 비슷한 분위기의 <낮잠>이 첫 번째로 수록되었는데 이것은 확실한 의도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보통 단편을 모은 소설집에서 특정한 작품이 표제작이 되는 것을 고려하면 콕 찍어주는 표제작이 없는 더블의 경우 작품의 전반적 분위기는 독자가 알아서 '느껴야만' 하는 과제이기도 했다. 그런데 확실히 <근처>는 다음에 전개되는 실험적인 소설들을 상쇄시키는 일등공신이었다. 그것은 side B에서의 <낮잠>에서도 동일했다. 첫정이 무섭다고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질문의 여운은 다음에 등장하는 온갖 다양한 설정-만화나 SF적 기법, 무협지, 고전작품 패러디등-에 대한 마음을 열게 하는 혹은 그러한 시도 자체를 편견없이 더 확장하여 보게하는 의도적 배치가 아니었을까. 나는 원래 이런 소설도 쓸 줄 아는 사람이다, 라는. 그러니 어느 한 방향으로 나를 규정짓지 말라, 하는.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로 더블에서 <근처>를 표제작으로 인식하는 독자들이 많은 듯하다. 이 작품이 미국에선 꽤 진지했던 한 코미디언에 헌사하는 글이라는 아주 개인적인 배경이 의아할 정도로. 이야기 속에는 암으로 요절한 코미디언처럼 어느날 갑자기 간암말기 선언을 받은 마흔의 독신남이 고향에 돌아와 '이제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인지 스스로 질문하며 답을 찾는 과정이 그려진다. 인간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 것인지에 대한 독백과 대화는 이후 작품에서도 계속하여 등장하기에 일종의 작가의 운율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야기가 늘어날수록 인간은 결국 영원히 그 어디를 알 수 없는 채로 죽음을 기다리고 견디는 존재일뿐이라는 것을 알게 될 뿐이었다. 그런데 이토록 진지한 인간존재에 대한 성찰 앞에서 나는 허를 찔린 듯 멈칫거린 장면이 있었으니, 그것은 30년 만에 친구들과 학교운동장에 묻어둔 타임캡슐속의 주인공이자 여러 친구들의 로망이었던 순임의 한마디였다. 동창모임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목에서 순임이 건넨 '나 늙었지' 이 한마디에 나는 그만 눈물이 핑 돌았던 것이다. 사람이 얼마나 이기적인가 하면, 이렇듯 죽어가는 주인공이 옛동창의 의도된 친절앞에서 느끼는 자신보다 더한 연민에 공감하기 보다는 나 늙었냐고 물어보는 주변 여인의 서글픔에 더 목이 메이는 것이다. 그것은 독자인 나도 늙었다는 대답에 다름 아니었기에. 나는 독신남의 옛동창 순임을 위해 늘 졸업시즌이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진추하의 눈물을 들려드리고 싶다. 꽃다발과 앨범과 이런저런 선물포장을 건네받은 내 어깨위로 살짝 흩뿌리던 눈발이 바람처럼 스치운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았던 그때, 우리 근처엔 분명 미래가 놓여있었을 것, 이기에. 

이제 그만 건너고 싶다 ................................................... 누런 강 배 한 척
 

 


최병걸, 진정 난 몰랐었네 
(골든 힛트 선곡, 1980)

이 작품은 세상의 모든 아버지를 생각케 한다. 작가가 굳이 자신의 아버지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라 그를 위해 썼다고 밝히지 않았어도 평생을 열심히 일해 왔으나 늙고 돈없고 무력한 노인이 그 결과였다는 이야기는 언제나 내 아버지, 당신의 아버지와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는 이십구 년을 다닌 회사 근처에서 그 시절 유도에서 낙법을 가르쳐준 학교선배이자 직장상사와 재회한다. 하지만 십만불 실적을 올린 신화의 주인공이 자신에게 내민 것은 가시오가피 한 박스였고, 아버지는 분납 8회를 약속한다. 누가 인생의 낙법을 가르쳐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멍하니 슬펐던 건 아버지가 거두어야 할 치매걸린 아내가 아니었다. 교수가 되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던 딸의 전화도 아니었다. 프랜차이즈 분점에 망해버린 아들도 중국산 조기에 저녁상 생색을 내는 며느리도 아니었다. 더 이상 살고 싶지는 않은데 그래도 단 한번이라도 아내와 삶을 즐긴 후 아내와 함께 죽고 싶다는 그 부질없음, 절망속에서도 버리지 못한 한가닥의 뒤늦음이었다. 제일 의미심장했던 건 아무래도 작정하고 결행한 호텔방에 잘못 들어온 '벌'이라는 마사지사가 아니었을까. 인생을 모르기에 아니 모르는 사람이 되었기에 그 마사지로 아직은 기쁠 수 있는 아내를 보는 것이 아버지에겐 '벌'과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그 순간 창밖에 펼쳐지는 결혼식 광경을 바라보던 아버지에게 나는 내 아버지가 자주 부르시던 故 최병걸의 '진정 난 몰랐었네'를 들려드리고 싶었다. 발길을 돌리려고 바람 부는 대로 걸어도 돌아서질 않는 것은 미련인가 아쉬움인가...울 아버지는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는 김소월의 '산유화'보단 이 노래가 생각나셨을 것이, 틀림없기에. 아버지...어디로 가셨나요...

실은 나 꿈이 큰 사람이야 ................................................ 굿바이, 제플린



 

Led Zeppelin, Babe I’m gonna leave you (1969)

이 작품은 읽는 내내 애가 탔던 이야기이다.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비행선을 좇아가는 마음이 마치 연을 좇아가는 어린아이의 순심처럼 소중하고 아름다워 동화처럼 느껴지다가도 현실에서 비행선을 추적하는 서사의 추진력은 아우디의 사륜구동 콰트로를 연상케 했다. 나는 이상하게도 이 작품에서는 로커의 창법이나 기타리스트의 환상적인 연주가 생각나기도 했는데 작가는 독일의 비행선 발명가를 위해 썼다고 했지만 내게 이 작품은 당연 레드 제플린을 떠올리는 이야기였다. 레드 제플린은 1969년 출범한 독일의 비행선 이름을 따온 그룹이며, 이야기 속 비행선도 하필 제플린이었기 때문일까. 나는 워낙 범생이(?) 였기 때문에 작가가 좋아했다는 레드 제플린과 롤링 스톤즈의 음악을 즐겨듣는 쪽은 아니었다. 하지만 'Stairway to heaven(1971)'이나 요즘 예능에서 맹활약중인 김태원이 자주 언급하는 ‘Babe I’m gonna leave you’정도는 익숙하게 들어왔다. 한여름에도 고무옷을 입고 허벅지에 땀띠를 견뎌가며 이벤트 회사의 알바를 뛰는 동민이 미려의 하룻밤 배신을 알고 밤을 세워 들어야 할 곡은 꼭 레드 제플린 이었을 것이다.

제플린이라는 십오미터의 비행선이 사냥꾼의 총성에 추락해버려도 우연히 동승한 양로원의 할머니가 사라져 버려도 딸기우유 같이 달콤한 꿈은 아직 버려야 할 때는 아닌 것이다. 양로원의 한무더기 노인들이 결국 먹고 싸고 자다보면 이르게 될 나의 모습일 지라도 우린 또 비행선을 띠우는 인간들인 것이다. 인간에게 비행선은 띠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그것이 떠 있는 시간의 여부는 비행선의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한나절 비행선의 추락을 애도하며 1937년 힌덴부르그 호 폭발을 모티브로 비행선 폭파장면이 앨범의 자켓이 된 레드제플린의 데뷔앨범(1969)을 동민에게 드리고 싶다. 어쩌겠나. 비행선은 죽었지만 우린 아직 이렇게 살아있지 않은가. 그래도 비행선이 죽은건 슬픈 이야기였다. 

어디에든, 가고 싶습니다 ................................................................
  

 

 

Pink Floyd, The Wall(1979) 

더블에서 가장 SF적이면서 동시에 생명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돋보이는 그야말로 복면화법의 이야기였다. 앞서 소개된 <근처>가 인간의 삶은 결국 자신의 근처를 맴돌다 마무리 되는 것이라 한다면 <누런 강 배 한 척>에서는 죽음이란 강 너머 저 편에 있지 않을까 했었지만 그래도 인간은 비행선이 추락하는 그 순간에도 <굿바이, 제플린>하며 하늘을 바라보는 존재로 이해되었다. 이렇듯 삶과 죽음이라는 시간적 명제가 그의 소설에선 다양한 공간으로 확장, 안착되어지는 것이라면 이제 깊고도 깊은 저 바닷속 어디에든, 가고싶은 것 또한 인간의 환타지일 것이라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던 작품이기도 했다. 제목조차 한없이 깊다는 의미의 암호로 보이는 <깊>에선 그렇게 끝없이 해저로 파고드는 다섯명의 디퍼가 등장한다. 백년 전에 지진이 났었고 지구전체가 하나의 연합국가로 되었고 큐브라는 해구연구소가 생겼고 코쿤이라는 가압장치에선 19251미터의 수압을 견디는 훈련을 하고 R-71이라는 대체체액 이야말로 유일한 생명수라는 조건을 확인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심해 해저 이만리의 SF버전의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를 떠올렸다. 하지만, 도대체 인간의 생각이란, 마음이란 어디에 있는 것인지 '나'라고 하는 전체는 생각없이 무엇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는지 하는 존재론적 질문들이 정처없이 바닷속을 유영할 때 부터, 나는 뜻밖에도 핑크 플로이드의 The wall의 뮤직비디오가 연상되기 시작했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벽돌처럼 똑같이 복제된 모습으로 생산되던 교복의 학생들...그것은 물고기 처럼 바닷속을 파고드는 똑같은 모습의 디퍼들과도 같았다. 물론, 나는 핑크 플로이드가 1979년 빌보드 정상의 자리를 차지했을 그때 그 음악을 듣지는 못했다. 아주 훗날 앨범이 영화화 되고도 한참 뒤 우리나라에서 검열이 풀린 뒤 직업적인 이유에서 돌리고 돌려보며 감탄을 마지 않았던 노래이자 영상으로 기억한다.

나는 <깊>이라는 작품에서 압력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결국은 인간의 의식과 마음을 빼앗는 직접적이고도 치명적인 장치가 될 것이라는 작가의 압력을 느끼었다. 인류에겐 끝없이 가야할 곳이 있고 그것이 인간의 역사이겠지만 결코 인간의 울음소릴 들을수 없는 압력의 세계는 아닐 것이라는 조용한 경고로도 들려왔다. 이 작품의 마지막엔 실험대상자가 자신의 죽음을 확인하는 장면에서 소름끼치게 꿈과같은 유언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죽었지만 그 순간 너와 나의 마음이 보이고 드디어 지구도 보인다는 목소리를 어찌 잊을 것인가. 심지어는 아이를 낳을 생각까지 하는 것에 가슴이 다 뭉클해 졌었다. 결국, 마음 하나 인 것이다. 이것은 그 어떠한 압력도 뚫을 수 없는 인간의 능력이자 유일한 희망일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어이없게도 전쟁과 폭력, 교육의 억압으로 인간성이 파괴되고 벽을 쌓아 스스로 고립되는 노랫속 하얀 벽돌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상상을 했다.  아마도 이 작품에서 압력을 견뎌야 했던 바닷속이 우리시절 강요되던 획일성과 권위주의, 이념의 강요등을 환기시켰던 탓일까. 더없이 <깊>어 져야 할 것은 수심(水深)이 아니라, 우리들 인심(人心)이 아닐까, 싶었던 그래서 더 마음 '깊'게 새겨진 이야기 였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 끝까지 이럴래?




The Nolans, I'm in the mood for Dancing
(Disco party classics, 1979)

나는 왜 그런지 이 작품이 그렇게 웃길 수가 없었다. 인류의 마지막 날에도 아파트 층간소음으로 자존심 싸움을 벗어날 수 없었던 인간들의 우매함이 조롱하기엔 너무나 딱해 보여 차라리 웃어 넘기고 싶었던 까닭이다. 모든 인간이 죽는 다는 것을 알지만 인간은 불행하게도 자신이 죽는 다는 것을 죽는 순간까지 믿지 못하는 존재인 것이다. 비행기가 추락해도 생존자는 존재하고 12방의 총알을 맞아도 살 사람은 살아나듯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혹시 누군가는 살아남는 것이 아닐까, 그 누군가가 나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니 이번에 큰맘먹고 층간소음의 문제를 따져보려 내려간 위층남자는 아래층 남자에게 식사는 하셨냐고 물어볼 수도 있는 문제인 것이다. 늙어진 배관공이며 가족과 헤어진 아래층 남자는 그동안 혼자서 휘파람을 불며 벽을 친구삼아 공놀이한 저간의 사정이야 감쪽같이 나몰라라 하며 예전엔 그래도 행복했다며, 아니 그것도 행복이라 생각하고 싶다고 창밖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왜! 창밖엔 간간이 폭음이 들려오지만 우린 그래도 열심히 살아왔고 최대한 옳은 길을 걸으려 했으니까. 끝까지 최선을 다한 인간들이었으니까.

나는 이들 두 사람이 서로 울컥하여 함께 울음을 터뜨리던 장면에서 빵터지고 말았다. 그래, 옛날의 행복은 오늘의 눈물이 될 만하지. 그렇담 혹시 시치미의 완결판 아래층 남자는 농구공놀이건 축구공놀이건 운동화를 신고선 바닥에 삑삑 소리를 내며 그 옛날 육체파 언니의 로망, 놀란즈의 디스코음악을 들었던 것은 아닐까. 머리에서 발끝까지 나를 따라해 보라는 그녀들의 노랫말에 맞춰 매일밤 무드에 흠뻑 빠져온 것은 아닐까. 하품이 나는 무료한 밤 시원스레 벽을 때렸을 때 묵직한 가죽공의 그 느낌을 아는 사람이었으니 분명 이 노래의 가벼운 흥겨움을 아는 사람임에 틀림없을 것이기에. 그것은 아는 사람만 아는 지금의 행복일 것이기에.

아니야, 그럴 리 없어 ......................... 양을 만든 그분께서 당신을 만드셨을까?





Bonny M, By the livers of Babylon(1978)

읽는 내내 어디서 한번은 만나본 이야기라는 기시감을 떨칠 수 없었던 이야기였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고'와 '도'는 그리고와 그래도의 애칭이자 준말쯤이라 생각하며 나는 결말을 기다렸다. 아뿔싸, 아트북을 넘기며 이 작품이 베게트에게 선사하는 글이라 했을 때 나는 그제서야 <고도를 기다리며>의 '고'와 '도'이었음을 깨닫고만 무심함이란. 12미터 높이의 망루위에서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가 아무리 원대하고 거창해봤자 네댓 평 크기의 오두막을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갑갑함이 서사의 핵심인 참으로 무책임하고도 무정한 이야기 였던 것이다.

도가 애기하면 고가 말하고 고가 말하면 도가 끄덕이는 대화의 핵심은 우리는 왜 이 짓을 하는지, 아니 왜 이 짓을 멈출 수 없는 지에 대한 끝없는 회의일 것이다. 마치 자주하는 질문과 대답을 유형별로 정리해놓은 FAQ처럼 그들의 질문과 대답은 공식처럼 건조하고 반복의 패턴을 이루고 있다. 놈들이 누군지 이유가 뭔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견딜 수 없는 것. 자신이 언제부터 이곳으로 왔고 자신이 행하는 모든 것이 무엇 때문에 반복되어야 하는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채로 그저 그 세계에 몸담을수록 앞으로 빠져나갈 수는 없다는 사실만 깨달아지는 잔인한 현실은 우리 사는 이곳의 어떤 단면과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는 고와 도가 저지르는 가장 기본적인 자신의 배설물들이 그것들의 냄새가 유엔사무국의 빌딩같은 느낌으로 우뚝버티고 있다고 말한다. 국제평화와 안전을 위해 운영되는 유엔이지만 개인의 위기와 안녕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같은 이야기라는 뼈있는 농담이었을까. 거대 자본주의와 기계화에 종속된 인간 개체성의 나약함은 박민규와 똥과 좆물보다 더 정확하고 불쾌할순 없을 듯 하다. 하지만 그 지겹고 견딜 수 없는 세계를 탈출하는 방법이 그저 똥과 좆물 생산을 중단하는 일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한 마리의 양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검고, 느릿하고, 꿈틀거리던 그것의 실체가 양인 것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늑대의 탈을 쓴 양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과 마찬가지로 양의 탈을 쓴 늑대에게도 손을 내밀지 말아야 하는 것이 이 시대 우리가 처한 이토록 쓸쓸한 외로운 섬, 고도孤島에서 살아가야 할 지혜가 아닐런지. 바빌론의 포로생활에서도 끝내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고도孤島의 시간을 견뎌내며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리라 믿었던 그들을 기리는 노래, 보니엠의 바빌론의 강가에서를 '고'와 '도'에게 들려드리고 싶다. 양을 만든 그분이 당신을 만드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분이 양을 만드신 게 맞다면 우린 양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는 것이 아닐까.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건 우리가 만든 두려움일 테니까. 

이번엔 우리 차례인가 ..................................................... 굿모닝, 존웨인
 

 

 


Olivia Newton John, Physical(1981) 

이 소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서부영화의 대표적 영화배우 존 웨인이라는 실존 인물을 극중에서 브랜드화 한다는 점에서 이장욱의 <변희봉>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동시대가 아닌 시점이 훨씬 지난 미래 어느 공간에 존 웨인은 금속의 명칭이거나 그것에 붙은 라벨로 상징화 된다. 여기서 천년을 이끌 냉동인간으로서 사후신탁의 시초가 되는 시점이 1979년인 것을 보면 존 웨인과 같은 해에 죽은 인물이면서 자부동을 심히 사랑할 것으로 추정되는 그분은 한명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자부동과 함께 냉동인간이 쥐고 있던 천조각에 그려진 십장생도도 의미심장했는데 이는 권력자가 꿈꾸는 영생을 상징하는 것 같아 이 소설은 가장 한국적 소재를 세계적인 SF장르로 표현해낸 새로운 실험이었다는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굿모닝, 존 웨인'은 '각하, 밤새 안녕하셨습니까'의 냉동버전쯤 되지 않을까. 그런데 어쩐지 그토록 바라던 영생의 세계에 냉동인간으로 다시 태어는 그들의 삶은 자부동 시절만큼 안락할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질병을 아무리 극복해도 새로운 바이러스는 다시 출현하며 결국엔 남은 생존자들마저 냉동인간을 식량으로 삼는다는 충격적인 세계는 희고 깨끗한 '눈의 여왕'의 천국이 아닌 피마저 하얗게 얼려지는 얼음같이 차디찬 세계였을 뿐인 것이다. 나는 고기를 썰며 이제는 내 차례인가 의심하는 집행자의 대사에서 언어도 통일되고 민족이라는 개념도 사라진 유토피아적 이상세계에서 조차 육질에 쾌감을 느끼는 인간의 욕심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소름끼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더블에서 이 이야기가 가장 육체적으로 들려왔으며 자부동을 찾는 각하의 특별지시가 선사하는 블랙유머가 금박이 수 놓여진 푹신한 질감을 연상케 하며 어이없게도 올리비아 뉴튼존의 피지컬이라는 그 시절 대박의 노래가 흥얼거려졌다. '냄비위에 파리똥'이라고 한참을 따라 불렀던 그 후렴구는 박정희 사후 군사정권으로 신군부를 수립한 전두환 시절 컬러시대와 함께 불어 닥친 팝송의 새바람이었다. 그 시절엔 보통 한 노래가 히트하면 10주는 불러줘야 그래도 인정하는 분위기였는데 피지컬 역시 헬스장에서 야릇한 포즈로 뭇 남성들을 설레게 하던 대표적인 디스코음악이었다. 당시엔 꽤 선정적이었던 음악이었지만 지금 들으면 꽤 컨트리한 이 노래를 자부동을 찾던 각하의 좋은 아침을 기도하며 '눈의 여왕'로비에 빵빵하게 틀어주고 싶은 바이다.  

정말 재능이 있나요? ....................................................... 축구도 잘해요




유재하, 사랑하기 때문에(1987)

문학이란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쓰지 않고, 매리 크리스마스라고 쓰는 일'이라는 故김현의 강의 내용이 곧 작가가 문학하는 변명이자 방식을 대변하는 인터뷰로 들려왔던 작품이다. 특별한 의미는 없지만 특별히 자전소설이라 밝혔기에 나는 그렇게 받아 들였다. 메리와 매리간의 반집싸움이야 말로 작가가 죽는 날까지 피할 수 없는 숙명의 전쟁일 것이라는 자기선언으로도 들렸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절대 똥을 대변이라고는 쓰지 않는 고집으로도 들렸고 문장안에서 대화체와 문어체의 구분을 하지 않는 것이 낯설지 몰라도 내식 이다라는 말로도 읽혀졌다. 행간의 흐름이나 문장부호의 사용역시 그것을 표현하는 나만의 호흡이니 숨쉬는 것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는 방어로도 느껴졌다. 세상에 문학 아닌 것들은 지천에 널렸는데 어디서 그것들 몇 개를 주어와 문학안에 포함시키고자 한 것을 굳이 사건이나 변화라 말할 것 까지는 없지 않느냐는 담담한 목소리 같기도 했다. 실은 꼭 그렇게 구분짓고 틀에 박힌 잣대에 의해 새로움을 발굴하자는 의도 때문에 역으로 운좋게 얻어 걸린 작품들도 있지 않느냐는 겸손으로도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문학을 한다하면 자신이어야 한다고 믿었을 뿐이라는 그의 이야기가 나는 왜 이렇게 슬프던지.

관철동의 한 점집에서 처녀보살인지가 아무리 전생이 마릴린 먼로라 했다 손 치더라도 한국에서 다시 태어나 열여섯 되던 해 외계인에게 납치되었다 하더라도 목성과 화성의 중간쯤에서 김현과 바둑을 두고 있는 전남편 아서 밀러를 만났다 해도 그는 문학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었다. 지구에 도착한 뒤 김현에게 눈도장을 찍은 아들 태권소년의 사실은 축구도 잘한단다는 그 한마디에 그는 총을 조준하며 "다시 한번 문학은 누가 하실 겁니까?"하고 묻는 군인의 질문에 그만 손을 들 수밖에 없을 팔자라는 것이 나는 결국, 저릿해지고 말았다. 얼마나 무책임한 문학인가. 얼마나 대책없는 시작인가. 나는 그가 손을 들고말 때 내 평생 처음으로 내 돈 주고 사본 LP판의 첫사랑, 유재하의 한 노래가 떠올랐다. 그것은 그의 유작앨범이 되었다. 마치 첫사랑의 대상이 불의의 교통사고라도 난 것처럼 나는 그 이후 LP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LP의 요절은 꼭 사장시킨 내 꿈의 운명과도 비슷했다. 떠난 그대를 잊지 못하는 내가 미웠지만 다시 돌아온 그댈 위해 내 모든 것을 드리겠다는 가사는 거짓말처럼 지금 뒤늦게 꿈을 더듬어보는 내 모습과 닮아있다. 모든 것의 의미부여는 이토록 이기적이고 억지스럽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 억지마저 자전소설이 되는 가슴뭉클함을 전해준다. 유재하의 노래는 그가 아닌 나를 위해 다시 듣고 싶은 노래이기에 다시 묻은 꿈을 꺼내보는 내게 들려주는 노래이기에 슬며시 눈을 감아본다.

우주를 만들 수 있는 건 가요? ............................................... 크로만, 운





Leif Garrett, I was made for dancing(1979)

스티븐 호킹을 위해 썼다는 이 작품이 나는 더블에서 가장 어렵게 다가왔다. 언젠가 나 자신의 우주를 만들 거라는 소녀의 속삭임을 감안해서라도 가장 우주적으로 다가왔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렴풋이 황순원의 소나기의 우주버전쯤으로 느껴졌으니, 말이다. 시공을 알 수 없는 우주 이야기 속에서도 여실히 존재하는 신분의 차이와 노동의 비루함을 차라리 낭만을 가장한 비극쯤으로 포장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 작품은 서문에서 밝힌 ‘나는 흡수한다. 분열하고, 번식한다. 그리고 언젠가 하나의 채널이 될 것이다.’ 라는 자기 설명의 본질에 매우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류는 과학을 흡수하여 곤충의 그것을 모방한 생식체계를 통해 인류의 자궁을 창안해 내고 그곳에서 잉태된 대량의 생명체는 인간이라기 보다는 노동의 자원으로서 살아간다. 이 모든 것을 설계한 네드는 빛의 사용법을 터득해 개인의 우주를 만들어 내고 세인트 홀이라는 전체주의 시스템을 뿌리 내린다. 여기서 네드의 노예격인 융 신분의 소년과 소녀가 크로만과 운이라는 설정과 이들이 네드처럼 자신만의 우주를 창조하는 것이 소원이 되는 현실은 우주가 이미 우주인 시대를 넘어선 모순과 부조리를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융인 신분으로서 비천함을 벗어날 수 없었던 크로만과 운이 자신들의 생명을 걸고 잉태해 내는 눈부신 빛이야말로 이들이 원하는 우주가 아닌지 작가는 두사람이 볼 수는 없지만 여기에도 거기에도 있는 빛을 보았다는 두사람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나 이야긴 여기서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지구에서는 가족을 잃고 경마와 도박으로 시간을 보내는 어느 파산자앞으로 부쳐진 내역서가 크로만과 운으로 등장한다. 파산자에게 모든 걸 처분해 얻어낸 우주야 말로 크로만과 운이 보았던 그 빛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득, 작가에게 우주는 무엇일까 궁금했다. 흡수하고 분열하고 번식하는 것은 흡사 모든 생물의 정충의 운명과도 닮지 않았을 지. 새로운 생명(창작)을 잉태해내는 작가가 끊임없이 하나의 채널이 되기까지 그리고 그 채널을 통해 이렇듯 작품을 수용하는 이 신비스런 문학의 정경이야 말로 그에겐 우주에 다름 아닐 것이다.

나 어렸을 때 땅따먹기를 한 후 주고받던 꽃미남 아이돌 스타가 있었다. 나는 그의 우주여행이 늘 이 노래처럼 신나길 아니 조금이라도 즐거워 지길 바란다. 밤새도록 춤을 추기위해 태어났다는 열여덟 살 미소년의 노래를 그는 기억할까. 문득, 내가 만들고 싶은 우주, 나를 쳐다보고 있을 우주가 미치도록 그리워진다. 
 

side B .... 그렇다고 죽을 수는 없는 

엄밀히 말하면 그렇다고 희망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내가 그렇게 느낄 뿐이었는지 모른다. B면에서 느낀 여러 감정들은 말 그대로 여러 가지 였지만 굳이 하나로 말해보라 한다면 나는 그럼에도 불구한 위로라 말하고 싶다. 삶은, 인생은, 누구에게나 그 종착지가 죽음이고 다같이 죽어가는 현실이지만 그렇다고 죽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당뇨와 심장병에 요실금의 처량한 늙은이지만 요양원에서 그 옛날 고향 첫사랑과 재회하지 않았는가. 나른한 어느 오후 그녀의 무릎을 베고 낮잠을 청한다면 그것은 내일 죽더라도 오늘 행복한 우리 일 것이다. 입장만 바꾸면 <루디> 속의 금융회사 부사장이 그가 내친 고용원도 되는 법. 손바닥 뒤집듯 우린 언제나 피해자도 가해자도 될 수 있다는 공평함이 일방적인 비극보다 낫지 않은가. 영웅의 시대는 가고 소녀의 시대가 도래했지만 뒤집어 보면 장풍과 검법의 무림고수도 영원할 수 없다는 이치 아니겠는가. 용도 네 개가 모이면 수다스러운 서민이 된다지 않는가.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바닷가에서 접하는 네 명의 <비치보이스>는 그래도 철이 들날이 있지 않겠는가. 63빌딩위에 <아스피린>이 출현한들 갑자기 어제까지 마시던 커피를 끊을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라는 어느 계약직 아저씨의 은밀한 고백은 그래도 귀엽지 않은가. 그들의 밥상에 차려지는 오메가 3가 혹시 딜도를 대신할지 모를일 아닌가. 마음이 별처럼 곱디곱던 우리의 대리기사는 한번 품었던 그때 그 <별>을 그 자리에 놓아두지 않았던가. 비록 죽는다고 말하는 것으로 살아보고자 한 젊은이지만 <아치>에서 만난 김순경 같은 아저씨가 손을 잡아주지 않았던가. 무릎이 꺽인 원시인도 처자식을 먹여 살리겠다고 목숨 줄을 놓지 않는 것이 모든 <슬(膝)>下에 새끼를 둔 부모의 심정이 아니겠는가. 그들은 모두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는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알지만 안다고 죽을수는 없는 것이 그들과 우리의 인생 아니었을지


같이, 산보라도 가실래요? ........................................................ 낮잠
 

 

 
윤연선, 얼굴
(매혹의 노래모음, 1975)

side B의 시작은 역시 어머니였다. 작가는 오래전에 치매에 걸린 어머니가 현재 요양원에 계시며 그로인한 그리움과 미안함 때문에 휠체어에 앉아서 집필을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 글을 읽고 나 역시 조용히 어둠속에서 눈물 지었다. 작가는 비록 기억을 잃어버렸지만 젊은 날 어머니의 소중한 추억만은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기록화 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살아가는 일이 곧 생명의 시간이 줄어드는 일이긴 하지만 인간의 기억마저 기억속의 사랑과 추억마저 양적으로 줄어든다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처사이며 그 주인공이 어머니라는 사실은 그 어머니 속을 뚫고 세상에 나온 자식으로선 마치 자신의 출생지나 생일이 없어지는 듯한 기분이 아닐까. 작가의 사무치는 개인사 때문인지 서사를 이끌어 가는 화자는 side A에 등장한 바 있는 <누런 강 배 한 척>의 아버지와 동일인물로 느껴진다.

그래도 지방 언론사 출신이었던 주인공은 아내가 죽자 요양원으로 입소해 죽음을 기다리는 것으로 生의 의미를 붙들고 있는 경우였다. 마지막에는 고향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노인은 꼭 마지막까지 고향에서 살고 싶다는 말로 들렸다. 요양원에서 조우한 그 시절의 동창들은 그나마 외로움을 덜수 있는 존재였던 것. 지나간 세월은 모두 아름다운 것이니까. 그런데 거기서 만난 첫사랑이 바로 치매의 주인공, 어쩌면 작가의 어머니일 지 몰랐다. 노인은 한시절 자신의 여신이었으며 연인이었고 친구이자 어머니였던 그녀를 보며 김상희의 '코스모스'와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과 윤연선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것 모두 같이 산보를 가고보니 나뭇잎을 밟아보니 겹쳐지는 지나간 그리움인 것이다. 급기야 요양비를 체납한 그녀가 안스러워 혼인신고를 통해 친권자가 될 것을 자청해 나서는 그는 얼마나 낭만적인 로맨티스트였던가. 하지만 혼인신고를 마치고 근사하게 외식을 하고 그 옛날 강당앞 벤치에 다다르자 현실은 너무 우스꽝스러워 차마 웃을 수 없는 눈물을 자아낸다. 왜 작가는 그 순간에 소변을 지리고 똥을 싸고 마는 그들을 生의 절정으로 묘사하는 것인지, 알면서도 그것이 원망스러웠다.

인생이 잠시 왔다가는 소풍이라는 천상병 시인이 생각나는 작품이었다. 한나절 낮잠이 들면 꼭 흘러나올 것만 같은 노래 윤연선의 얼굴은 그래서 더 먹먹하다.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그 얼굴이 생각나 잠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은 음악이다. 작가의 어머니에게도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이, 분명 있었기를. 그녀의 얼굴을 따라 하얗게 피어나던 구름속에 나비처럼 날아가던 누군가를 위해 이 노래를 불러본다.

왜 일을 어렵게 만들지? ............................................................ 루디




Culture club, Karma Chameleon
(Colour By Numbers, 1983)

나는 이 작품을 『현장비평가가 뽑은 2010 올해의 좋은 소설』(현대문학)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때 '영원이 우리는 함께'라는 소름끼치는 결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나는 그때 이토록 잔혹한 로드 무비의 결말에 절대 동의하고 싶지 않았던 듯 하다. 어느날 갑자기 알래스카 팍스하이웨이 길 바닥에서 만난 루디가 대체 누구인지 궁금하기 보단 루디에게 당한 대책없는 폭력에 더 마음의 상처를 입었던 까닭일 것이다. 그런데 이번 아트북에서 이 소설은 오바마 이후 나타날 미합중국의 대통령을 위해 쓰여졌다고 하니 그제서야 끄덕여지는 이 안심의 출처는 어디일까. 혹시 폭력의 방향이 우리는 아니지 싶은 일말의 안도감이나 미국보다 약소국인 약자적 입장에서의 마땅한 심사일까.

이 소설에 표면적인 피해자로 등장하는 '나'는 예일대 출신 뉴욕의 어느 금융회사의 부사장인데다가 세금과 기부를 일상화한 꽤 의식있는 지식인이다. 그런데 그 역시 총소리에 오줌을 지르고 총잡이의 똥을 싸라는 명령에 굉장한 양의 그것을 쏟아내는 기본적 생리현상에 충실한 인간이었음을 우리는 확인하고 싶지가 않다. 지금까지 모피반대 캠페인을 지지한답시고 경제인 연합에 낸 기부금을 생각해서라도 이런식의 무식한 폭력은 가당치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입장을 바꾸어서 그가 말 한마디로 직원을 해고한 덕에 내 가족은 길거리로 내몰리고 그 이후 인생은 추락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면 그런데도 그 인간은 자신의 명예와 체면을 위해 동물을 위한 거금의 기부만은 멈추지 않는다면.

가능한 이야기였다. 거대자본과 무기, 권력, 정보를 앞세운 미국의 패권주의를 향한 시원한 한방이었다. 우리는 영원한 러닝 메이트, 즉 정신적 폭력과 외상적 폭력을 양면으로 하는 그들은 결국 같은 편의 폭력서클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서 나와 루디의 관계가 룸에이트가 아닌 러닝메이트 인 것은 혹시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부통령 후보자를 은연중에 암시하기 위한 것일까. 하지만 결국 나는 내안에 존재하는 두 가지 폭력이 짝을 이룬 경주마처럼 달려가는 장면을 떠올리며 반사적으로 한 노래가 생각났다. 여장남자의 분장으로 더욱 유명했던 보이조지가 비웃는 듯한 미소로 노래하던 카멜레온의 추억. 카멜레온처럼 자신을 속여가며 사랑해온 상대를 조롱하는 이 노래는 마치 이제는 먹고 살만한 자본주의의 성공국가가 되어버린 우리나라를 꼬집는 듯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나'이면서 '루디'이고도 한 나같은 한국인들에게 이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 중독성 강한 후렴구에 잠시 자신을 숨기고 싶지 않을 자가 누구란 말인가.  

이 나라는 어떻게 되는 건가? ...................................................... 𪚥





Duran Duran, A view to a kill(1985)

이 작품은 무림의 고수들이 화려한 장풍과 눈부신 검법으로 마법을 펼치는 무협지를 박민규식으로 리메이크한 작품이었다. 용 용(龍)자 4개를 모아서 제목이 된 한자는 "말 많을 절" 의 절이라고 한다. 실제 획수가 64획이나 되며 "획수가 가장 많은 한자"로도 알려져 있다. 이 한자의 뜻을 몰랐던 무식의 소치로 나는 네 명의 용(대권천왕, 청룡검제, 운무천마, 정천대법)이 한데 무리를 이룬 모습이겠지, 싶었는데 용도 많아지면 수다를 떨 수 있다는 사실에 흠칫했었다. 이 소설의 마지막이 결국 무림의 영웅들이 쓸쓸히 퇴장하는 시대라 보았을 때 용을 이루는 한자의 획은 이들의 칼 한 획 한 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세상은 법이 정의를 대신하고 금전이 힘을 대신하니 용을 믿는 세계도 용이 필요한 세계도 아니었다는 작가의 말은 이 한자의 뜻을 잘 가르쳐 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신비한 용이 네명이나 모였는데도 이제는 칼의 한 획 한 획이 쓸모가 없어 그저 수다나 떨고 있는 형국에 다름 아니라는 작금의 시대는 더 이상 영웅이 아닌 소녀들의 시대였던 것이다. 아, 이토록 짜릿한 농담의 수사가 참 오랜만이다. 한자로 보여주는 기호학의 재치가 돋보였던 이 작품에서 나는 정작 소녀시대의 노래는 생각나지 않고 왜 007 영화의 주제곡이 떠올랐을까.

지금으로 치면 씨엔블루쯤(아무리 생각해도 대적할만한 그룹이 없기는 하다만) 되려나. 우리시절 듀란 듀란이 들고 나온 007 주제곡 'A view to a kill'이야말로 한 시절을 풍미한 007 시리즈의 마지막 연가가 아니던가. 이 영화는 제임스 본드역의 로저 무어의 마지막 출연작이었다. 한 때 천하를 양분한 네 마리의 용이 자신들의 처지를 표상하던 미꾸라지 추어탕을 먹지 못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세상은 변했고 시대는 바뀌었다. 대의와 명분이, 도와 예가 사라진 물질만능의 시대에 나는 소녀시대를 듣지 않고 한물간 007 주제가를 그리워한다. 무협지를 좋아라 하시던 어머니도 생각나던 작품이었다. 작가는 한국인이라는 직업을 가진 모두에게 주는 글이라 했지만 나는 자본주의에 물든 이 세계의 시민됨을 반성하기 보다 영웅에 환호하던 그 시절이 자꾸, 그립기만 하다.  

넌 어쩔건데 ..................................................................... 비치보이스

 

 


The Beach Boys, Kokomo
(영화 칵테일 OST, 1988)

이 작품은 더블에서 가장 가볍게 미소지으며 넘길 수 있었던 이야기였다. 초, 중, 고는 물론이요 여섯 개 학원의 동창생인 네 명의 친구들이 입대를 앞두고 떠난 좌충우돌 바다 여행기가 서사의 핵심이라 할 것이다. 동반입대를 앞두었다는 다소 코미디적 상황의 설정은 물론 모두 22평 친구들로서 엄마들의 과보호 속에서 학교생활을 해온 이들의 청춘은 그야말로 철없기 그지 없었다. 친구들이 안하는 건 안하고 친구들이 하는 건 하는 줏대없는 캐릭터들이 행동과 생각에 큰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지도자나 온화한 조정자, 혹은 남다른 몽상가, 꼼꼼한 노력가로 구분하는 시츄에이션이야 말로 고급의 유머라 느껴졌다. 제일 끄덕였던건 친절한 도우미 격의 엄마들이긴 했지만.

이들은 TV에서 지진과 테러, 전쟁과 폭동으로 어지러운 세계정세를 보고서도 편의점이 파괴되는 것이 제일 두렵고 해파리가 나타난 위급상황에서는 전혀 기본적인 대처를 할 수 없는 한무리일 뿐이었다. 작품 마지막에 정말로 전쟁이 발발해 사람들이 바다를 빠져나가는 상황에서 이들 네명이 주고받는 대화는 어쩌면 우리의 현재이거나 가까운 미래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어쩔거냐고 묻는 서로에게 서로는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늘 자신들 스스로의 생각이 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이는 우리가 아는 어떤 사람들과 참 많이도 비슷하다는 생각이다. 이제 학부모가 된 내 입장에선 저런 식으로 사육되는 획일식 교육시스템을 맹렬히 비난하던 주인공에서 어느덧 똑같은 방법으로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지독한 방식으로 우리 아이들을 붕어빵 찍기 하고 있는 헬리콥터맘이 되가고 것은 아닐까. 비리와 비굴에 도가튼 교사로부터 철저하게 위선을 학습해온 덕에 이 들 네 명은 바닷가에서 비치(beach)보이스가 아니라 비굴하고 치사한 비치(卑恥)보이스가 되고 만 것은 아닐까. 이들 네 명이 가야 할 바닷가는 서핑으로 미국 전체를 돈다는 비치보이스의 Surfin' U.S.A가 아니라 플로리다 해변에서 좀 떨어져 있다는 자메이카 해변의 코코모가 아닐까 싶은데 말이다. 나는 바닷가에서 까지 고민을 떠안기 싫은 마음으로 오랜만에 코코모를 들으며 그 옛날 바닷가에서 나는 무엇을 비치備置하였는지 새삼 머리를 굴려 보는 중, 이시다.

도대체,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 아스피린





Wham, Wake me up before you go go (1984)

인류가 발명한 최고의 약이 UFO가 되어 하늘에 나타났지만 어제마신 커피를 오늘도 변함없이 마신다는 이야기는 side A의 <끝까지 이럴래?>와 그 분위기가 비슷했다. 주 배경은 미국에 본사를 둔 외국계열의 광고회사로서 요실금 팬티의 런칭을 앞두고 피티 준비에 여념이 없는 직장인들의 심리상태가 꼭 불감증 걸린 사람들처럼 반복되는 이야기였다.

사람들은 상공에 '아스피린'이라는 물체가 나타난 것을 보고 듣고도 지식인답게 점심을 먹고 회의를 하며 맥주를 마신다. 여기서 인상깊었던 단어는 아스피린 보다는 '붐'이었는데 맨 처음 아스피린이 등장할 때 화자는 순간 귀가 멍할 정도의 '붐'을 느꼈다고 했으며 동료중 하나는 TV에 등장한 아스피린을 보고 저러다 '붐'하고 광선을 쏘는 게 아니냐며 걱정을 한다. 아스피린을 구경하러 나온 광장의 인파는 거대한 '붐'에 휩싸인 것이다. 작가는 해열진통제의 대명사 아스피린이 결국 어떤 사회에서 특정한 현상이 갑작스레 유행하거나 번성하는 '대성황', 혹은 '대유행'으로서의 '붐'이 된 것은 아닌지 일갈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지식인스러운 세련됨으로 자연스레 일상에 적응하려하고 오히려 무기력한 일상에 의욕을 느끼기 까지 한다. 무언가 하늘로부터 지배를 받는다는 느낌쯤이야 대응할 수 없을 때 발휘되는 적응기제로 치환하며 변함없이 도시를 살아가기로 동의한 것일까.

사람들의 암묵적 합의가 무섭다는 생각을 이 작품을 통해 깨닫게 된 아스피린 이었다. 아무리 큰 아스피린도 하늘을 가릴 순 없다는 뜻으로도 들려왔다. 무엇이 나타났느냐 보다는 어떻게 적응 할 것이냐가 더 중요한 오늘의 도시, 빌딩위 하늘을 올려다 보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하늘을 향해 치솟은 빌딩 속에서 사람들은 일시적인 '붐'에 휩쓸린 채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리 나쁘지는 않은 사람들 속에서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는 환경속에서 우린 어쩌면 나쁘지만은 않은 제품들을 소비하며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오늘도 변함없는 출근길에 나서던 그 아침, 떠나기 전에 나를 깨워달라는 그 시절 알람과도 같던 도시남자들의 노래가 퍼뜩 떠오른다. 비록 아스피린이 하늘 한 구석을 차지해 무슨일을 벌일지 모르지만 나는 습관처럼 커피를 마시고 약속된 회의를 준비 할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는 일, 자, 일이나 하자.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걸까 ...................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




Cyndi Lauper, Girls Just Want To Have Fun
(She's So Unusual, 1983)

나는 이 작품을 『2010 이상문학상 작품집』에서 먼저 접했다. <아침의 문>이라는 수상작과 함께 작가가 자선 대표작으로 수록한 글이었다. <아침의 문>이 워낙 충격적인지라 이 작품은 다소 유머러스한 이야기로 받아들였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다시만난 딜도는 굉장히 슬픈 이야기였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딜도로 가정을 지켜낸 가장은 한때 잘나갔으나 현재 계약직의 자동차 영업부장인 존 굿맨을 닮은 오십대 아버지이다. 실적이 없어 아들이 알바비로 받은 돈을 담뱃값으로 꾸고는 찜질방을 찾아든 그는 우연찮게 옛 영업동료를 만나 서로 딱해진 신세를 그저 체념으로 위로한다. 그런데 이야기의 반전은 그러니까, 화성에 있었다.

사소한 말다툼으로 집안을 풍지박산 내고 발견한 아내의 딜도에 낙심한 아버지는 화성에 가보라는 친구의 덕담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화성괴물과도 같은 그 동네 사모님의 동굴속으로 자진해 들어가 자동차로서 딜도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덕분에 계약서를 세장이나 챙긴 아버지 입장에선 딜도가 가정을 지킨 자위시스템으로서 충분한 역할을 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지구인의 럭셔리 세단이 거구의 화성사모님의 자위용으로 딜도로서 작동되던 테스트 드라이브 장면은 압권이었다. 작가는 그렇게 해서라도 오메가 3가 들어간 식단을 먹을 수 있다면 괜찮은 가장이 아니겠는가, 하고 질문한다. 아내의 욕망을 채워주진 못해도 비슷한 욕망을 가진 고객으로서의 여성을 만족시켜주면 보상이 따른다는 소비와 구매의 현실이 참 역겹고도 슬퍼지던 이야기였다.

80년대 마돈나와 여성 솔로 팝송 시장을 양분하던 신디 로퍼의 돈냄새 물씬 풍기는 노래가 생각났다. 소녀들은 단지 재미를 위해 즐거움을 원할 뿐이라는 이 노래는 지금 생각해보니 자본주의의 속성과 본질에 길들여진 우리 세대들의 물질주의 숭배가였던 것 같다. 물론, 그때는 몰랐지만 그걸 듣고 성장해온 우리들이 원하는 건 결국 무엇이든 자신을 위로하는 대상으로서의 물질적 자위시스템은 아닐까. 문득 자신들만의 딜도를 하나씩 감쳐놓은 외로운 중년이, 나도 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부장님만큼이나 서글퍼지던 시간이었다.   

넌 왜 이러고 사냐 .........................................................................






혜은이, 당신만을 사랑해(1978)

순진한 청년을 미모로 유혹해 하루아침에 신용불량자를 만들어 버린 옛애인과 기가막힌 조우를 하게 된 어느 대리운전기사의 낭만 복수극의 이야기. 이 작품 역시 <고도를 기다리며>의 패러디 소설 <양을 만든 그분께서 당신을 만드셨을까?>처럼 알퐁스 도데의 <별>을 다시 해체 조립한 실험적 작품이었다.

열심히 카드를 돌려 막아가며 적금도 깨어가며 몸과 마음을 바쳐 사랑한 여자는 잔인하게도 전화한통으로 결혼을 통보한 후 얼마나 잘먹고 잘 살았을까. 옛애인의 대리운전기사로 나타난 청년은 그시절 연인을 태우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곳으로 내달리기 시작한다.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느냐고 따귀를 몇 대 때려주어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하필 걸려오던 의문의 남자로부터 청년은 여자 역시 현재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는 정보를 얻고 넌 왜 이러고 사냐고 몰래 눈물 훔친다. 청년은 매일 밤 하늘을 바라보며 높은 곳에서 빛나던 나만의 별을 가슴에 되새기며 사랑을 품어온 순수를 아직 버리지 않은 자신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한다. 한번 새겨진 별은 그로써 영원한 별이었던 것. 나는 청년이 결국 그녀의 집 근처에서 밤은 깊어 머리위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이지만 그녀에게 어깨를 내어주는 '인간'이 되어주는 장면에서 그만 마음이 싸해졌던 것 같다. 청년을 위해 내가 대중가요를 알고 나서 처음으로 따라 부른 혜은이의 당신만을 사랑해를 들려주고 싶었다. 어쩌면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고이 사랑을 간직해온 모든 바보같은 인간들, 당신만을 사랑한 그 인간들을 위한 곡인지도 모르겠다. 울며 울며 날으는 갈매기여 내마음을 수평선 아득한 곳에 계시는 내님에게 말해줘요...혜은이도 그땐 나의 별이었다.


나보고 어떻게 살라는 거야 .......................................................... 아치

 

 

Queem, Bohemian Rhapsody
(A Night at the Opera, 1975) 
 

이 작품을 읽고는 소리내어 울었더랬다. 무에 그리 서러웠던지 마치 내가 그 아치에 올라가 사람들을 향해 소리라도 치고 온 사람처럼 울먹해지던 이야기였다. 먼저, 이 작품과 너무나 잘 어울리던 노래를 들으면서 눈물을 닦았기에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를 언급하고자 한다. 살인을 저지른 사형수가 어머니에게 죽고 싶지 않다고 절규하는 충격적인 가사의 이 노래는 우리시절 소녀적 막연한 슬픔을 절정으로 치닫게 하는 파워를 지닌 곡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프레디 머큐리의 라이브 무대는 마치 자신의 죽음을 앞둔 사람이 온몸으로 자신을 불사르는 에너지를 내뿜던 치명적인 무대였다. 나는 솔직히 이 노래가 어떤 자살충동을 유발한다고 까지 생각이 들 정도로 마력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자살을 하고자 결심한 청년이 아치에 올라가 눈물로 절규할 때 이 노래 말고 다른 노래는 생각나지 않았다.

살아야 할 이유를 찾기 위해 아치를 올라가는 사람이나 어떻게든 아치에 올라간 사람들을 다시 끌어 내리는 김순경이나 그 순간 춥고 무섭고 배고픈건 마찬가지인 것이 인생인데 죽으려고 들어간 강물이 너무 차가와 다시 나왔다는 어떤 고백도 생각이 났다. 살다보면 누구나 이럴 수 있다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왜 그렇게 서럽던지, 나는 한때 죽는 것이 답이 될 수도 있겠다는 내 인생의 어느 시기와 장소가 생각이 나 나도 모르게 눈물을 닦아 내었던 것 같다. 나도 알고 보면 당신보다 더할 것도 없는 같은 종류의 인간이라는 김순경의 넋두리가 기실 레파토리가 정해진 업무로서의 입에 발린 말이었지만 또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이 없어 사실이기도 한 김순경의 서러움이 많이도 허전하고 쓸쓸했음이다.

나는 감히 말한다. 자살은 결코 용기있는 자들이 선택하는 삶의 최선이 아니요 대안이나 차선도 아니요 어느 한순간의 실수로 나타나는 결과일 뿐이라고. 그래, 그래도 살아야지 하는 말은 아마도 우리 모두에게 해주는 이 세상 모든 순경의 목소리 일 것이다. 오늘 보헤미안 랩소디를 들으며 그래도 살아야지 하는 누군가를 기다려본다. 어쩌면 내 스스로 울려오는 그 한마디에 나는 또 이렇게 홀로이 랩소디를 읊어본다.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살길은 어디인가 ......................................................................... 슬膝




조동진, 행복한 사람(1979)

이 작품이 더블의 마지막 수록작이라 그런지 나는 마지막 이야기를 결코 절망적으로 보지 않았다. 아니, 무엇보다 희망적이었고 그래서 벅차게 책을 덮을 수 있었던 이야기 였다. 나는 건축, 전시업계에서 기획자로 오랜기간 종사해왔다. 작가가 미국의 건축가 벅민스터 풀러 박사에게 이 글을 헌사한다는 의미를 왜 모르겠는가. 그는 이 작품속의 우처럼 처자식을 버리고 자살하기 직전에 전광석화처럼 마음이 바뀌어 그후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많은 발명의 업적을 이루어 낸 인물이었다. 그가 설계한 박람회 건축물은 우리업계의 교과서였었고 조명시스템에 까지 그의 이름을 딴 버키볼은 하나의 볼거리로서 상징조형물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곤 했다. 이런 그의 인생史를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무릎이 꺽인 우의 이야기는 그래도 살아가야 하는 우리네 인생에 경건한 지침이 되어 주었다.

이 작품은 BC 17000년, 돌을 갈아 칼을 만드는 원시인 부부의 생존기를 담고있다.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을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약육강식의 적자생존 시대에 우는 동물의 배설물을 맛보아 가며 상대와 싸워 이길 생각을 하는 영리한 인간으로 그려진다. 이 작품에서 인상깊었던 장면은 그렇게 좇아간 늙은 코끼리가 결정적인 위험에 빠진 우를 보고선 그냥 물러서는 순간이었다. 문명이 시작되지 않은 원시시대에도 생명을 존중하는 예를 인간이 아닌 동물로부터 배운 것이다. 또 하나 틈에 빠진 자신의 다리를 잘라 내면서까지 살고자 몸부림 치던 우가 어떤 돌칼로도 짐승의 뼈를 자를 순 없다는 깨달음은 그래서 죽을 수 밖에 없다가 아닌 그럼에도 살고 싶다는깊은 울음으로 다가왔다. 우는 다시 아내와 자식이 살아있기를 바라면서 마지막 살점을 주워 담고 앞으로 비록 사냥을 다시 할 수 없을지 몰라도 삶을 포기해선 안된다는 주문을 중얼 거릴 것이다.

그 순간 우는 우의 삶이기도 했지만 아내와 자식의 삶이기도 했다. 우리는 이렇게 나의 삶만이 아닌 누군가의 삶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그것은 어쩌면 행복한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의 가족에게 내가 많이도 좋아했던 조동진의 행복한 사람을 들려 드리고 싶었다. 울고 있지만 아직도 남은 별 찾을 수 있는 두 눈이 있고 바람결 느낄 수 있는 그 마음 있으니 당신은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아름다운 노래를 말이다. 우리 모두가 각자 외롭지만 서로의 삶이 되는 서로는 누구보다 행복하지 않은가. 이 노래를 슬하에 자녀가 있는 모든 어버이와 같이 듣고 싶었다. 어느 절망적인 겨울날 사람과 거리가 두려워 희망을 잃은 누군가의 어미나 아비 역시 우처럼 가족을 위해 눈길을 헤치고 있을지 모를 일이기에. 
 

삶과 더브러 죽음도

가만 보니 작가가 들려준 열 여덟 개의 트랙은 모두 외로운 사람들을 위해 작곡된 노래에 다름 아니었다. 그들을 위해 작가는 사는 건 죽어가는 일이라고 하지만 죽는 것 또한 삶의 일부라 노래했다. 이렇게 지난 세월동안 쌓아둔 이야기를 푸짐한 보따리로 꾸렸으니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그의 대답이 비로소 이해가 된다. 언젠가 “송구스럽지만 난 요즘 언젠가 찾아올 내 인생의 마지막 날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최대한 열심히 쓰겠다”고 말한 그는 이제 어디로 떠날 것인가. 다음엔 어떻게 살 것인가. 이것이 현실인지 환상인지 물어보던 보헤미안 랩소디의 노랫말이 생각난다. 비록 괴물같은 삶을 살았지만 다시 살고싶다는 절규를 기억한다. 작가는 마치 프레디 머큐리처엄 현실과 환상이 서로 등돌린 배신의 관계가 아니라 영원히 함께 가는 동행의 동반자라 외치는 듯하다. 삶과 죽음 역시 정 반대에서도 조용히 같이 걸어가고 있었다고,  

다만 그것은 그리 유별난 일은 아닌 것이라 적어놓은 것이었다.

그 덕분에 나도 LP시절 내 추억의 사진첩을 잘 정리할 수 있었다. 그 시절이 그립기야 매 한가지 아닐까. 지금에야 하는 말이지만 박민규는 딱 내 2년 선배이다. 미팅이나 소개팅에서 자주 부딪히던 학번이다. 나는 여대를 나와 남자선배가 전무했지만 공학을 다니는 친구들은 선배들을 '형'이라 불렀다. 나는 그 호칭이 '오빠'보다 미치도록 근사하고 부러웠다. 비록 조용필과 이용에겐 오빠라고 외쳤지만 학교에선 여성성을 배제한 형이라는 호칭을 마지막으로 불러본 세대란 말이다. 그래서 난 박민규가 내 시절 그 '형'이길 바란다. 학회나 술자리에서 그를 만났다면 나는 분명 형, 산다는 건 무어냐고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냐 물었을 게 확실하다. 그럼 그는 무어라 답했을까. 나중에 내 소설을 읽어봐, 이렇게 말했을까. 단편을 쓰는 일이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일이라는 그에게 나도 이 리뷰를 선물하고 싶다. 물론 그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겠지만 어쩌겠나, 그도 알퐁스 도데가 자신의 선물을 알아주길 바라진 않았을 것 아닌가.

여지껏 작가의 외모와 스타일이 그의 작품을 읽고 리뷰하는 데 미친 영향을 떠올려보면 박민규의 고글과 복면마스크는 이제 그를 대변해주는 가장 상징적인 트레이드 마크로서 자리매김 하는 듯하다. 점점 그의 작품을 받아 들이는데 있어 시각적 기호를 배제하기 힘들어지며 드디어 작품의 패키지로서도 그 메시지를 이렇게 간곡하게 전달하고 있는 모습으로 느껴진다. 처음엔 작품외적인 작가의 외양적 이미지가 자유롭지 못한 제한적 요소라고 까지 여겼었는데 이제는 필수적인 포인트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작품이었다. 그의 계획적인 시도앞에 박수를 보낸다.

'인간은 태어나려 태어난 것이 아니고 죽으려도 죽기 힘들므로 사는 동안 살아가야'하는 존재임을 조용히 깨우친다. 올 한해 너무 힘겨웠다. 죽고 싶을 만큼인 적도 없지 않았다. 어느 가을날 커튼뒤에 몸을 숨긴 내 육신이 저 베란다 아래로 안착한들 큰 상관이 없으리라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 순간 사람이 죽는 것은 한순간 이구나, 싶었다. 그때 내 눈에 띄인건 2층 데크에 놓여진 흔들리는 그네였고 내 아이만한 딸래미가 혼자서 외롭게 그네를 타고 있었다. 눈물이 핑돌았다. 그래, 너도 외롭지. 그 앞에 떨어지면 그 아이의 동심 한 자락을 죽여버리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걸어가야 한다.
삶과 더브러 죽음도 다같이.
내가 별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이, 오늘 참
고맙다.  

당신 역시 마찬가지일 것임을 기대한다. 그것은 언제나 죽지 못한 내가 당신에게 할수 있는 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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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고준
고종석 지음 / 새움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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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자亡者를 이해하는 시간

나의 아버지는 자살하지 않았다. 작가도 아니셨다. 하지만 작가로서 마지막을 자살로 선택하셨다면 나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이 노무현 前 대통령이 자살한 날이었다면 나는 어느 한사람의 죽음이 덜 슬플 수 있었을까. 아니 동시에 공평하게 슬퍼할 수 있었을까. 나는 확신한다. 나머지 한명의 죽음은 인식조차 할 수 없는 공백의 死로 처리될 것임을. 시간이 지나도 그 한명은 제대로 죽어지지 않을 것임을.

어머니가 죽던 날 나와 가장 친하던, 나를 가장 아끼던 이모가 죽었다. 아니 이모도 죽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같은 날 같은 방법으로 같은 장소에서였다. 하지만 아직도 이모의 죽음은 기억조차 나지 않으며 그런만큼 충분히 슬퍼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어머니는 동생인 내 이모를 따라가신 것으로 결론을 내리기에 나는 오랫동안 어머니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결국 이해하기로 했고 그 이해된 마음 한 구석엔 아직도 내 이모가 미안한 얼굴로 서계시다. 나는 그것이 늘 죄스러워 가슴속에 이모 한명을 그냥 살려두었다. 내 부모가 죽은 날 누군가가 죽는다면 그건 같은 날 저 세상을 가게 되는 사람들에게나 의미있는 일이지 남은 사람들에겐 죽음도 슬픔도 1/n로 절대 나눌 수가 없는 것이다. 즉, 내 어머니에게나 이모와 같이 저승길을 간다는 것이 의미있는 일이듯 노무현의 죽음은 독고준에게나 의미있는 일이지 남은 딸에겐 오히려 원망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음이다. 물론 작품속에서 독고준은 노무현보다 몇 시간 먼저 죽었다고 적혀있다. 하지만 두 번 소설을 읽은 나에게 독고준은 노무현을 따라 죽은 것으로, 혹은 노무현이 죽고 나서 죽은 것으로, 그것도 안된다면 노무현이 죽는 날 같이 죽어야 할 운명으로 읽혀진다. 굳이 따라 죽는 쪽이라면 노무현이 독고준을 따라 할 일은 백퍼센트 없겠지만 독고준은 그러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책을 덮은 다음 자리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적혀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내 오해와 고집 혹은 착시로 읽는 일이, 이 책에서는 더러 발생하였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것이 나에겐 어머니가 따라간 내 이모를 향한 원망을 많이도 줄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독고준의 딸이 되어 아버지를 이해하는 시간은 아버지의 죽음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일이었고, 그것은 결국 내 어머니의 선택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나를 확인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다는 것. 그것은 그 시점까지 살아온 전 생애의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 아닐까. 이 작품은 전직대통령이 자살한 그날 투신으로 생을 마감한 작가 아버지의 일기장을 건네받은 딸의 이야기이다. 아니, 교수로 성공한 딸을 둔 작가가 자신이 죽으면서 남겨놓은 일기에 관한 이야기다. 백일 전 우연한 기회로 거의 출간과 동시에 이 책을 처음 만났다. 그땐 <서유기>나 <회색인>이 작가에게 어떠한 의미인지 그저 적혀있는 대로만 눈으로 이해하고 책을 덮었을 때 작품의 내용이 내가 원하던 바의 일기가 아닌 것에, 독고준이 그다지 회색인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에 일말의 배신감을 느꼈었다. 그로부터 두어 계절이 지나가는 동안 나에겐 조그만 변화가 생겼다. 물론 <서유기>와 <회색인>을 여전히 읽지 못한 무정한 독자이지만 좀 더 많은 책을 읽었고 그러므로 그에 관해 작성한 서평이 많아졌다. 한해가 마무리 되는 시점에 다시 소설을 들쳐보니 그때와는 사뭇 다른 감정이 발돋움하는 나를 발견한다. 올해 나는 서평자로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았다는 감회때문인지 이 책은 독고준의 딸 독고원의 서평이야기로 다시 보이는 것이다. 작가인 아버지를 둔 평론가 딸이 아버지 사후 그제서야 아버지의 문학작품에 대해 리뷰하는 글로 말이다. 아버지의 작품 전체를 한 번의 리뷰로 마무리 짓는 방법으론 일기보다 더 완벽한 형식은 없다고 본다. 이러한 잘 짜여진 치밀한 각본의 배경을 이해하고 나니 나는 앞서 언급한 어머니의 죽음을 이해하는 과정과 더불어 내 아버지의 직업을 다시 돌아보며 그것을 지금의 어른됨으로 평가하고 있는 내 자신도 발견하게 되었다. 물론, 내 아버지는 글쓰는 일과는 상관없이 술과 말로 상대를 공략하고 회유하며 협상하는 '술상무'에 가까웠지만 나 역시 오랫동안 말로 먹고 사는 직업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아버지의 삶속에서 진행되어온 '말'이라는 작품을 뒤늦게나마 내 '말'을 덧붙여 리메이크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은 이래저래 내 부모님의 죽음과 직업을 다시 정리하게 하는 방편으로 제대로 활용한 셈이 되었다. 뜻하지 않게 실로 지극히 개인적인 독서였다. 독서란 어짜피 자신의 내면과 소통하는 가장 사적인 시간이므로 두 번째『독고준』은 내게 공적인 글로써 사적인 상처와 그리움을 위무해주던 일종의 해결사와도 같았음이다.

...언사言辭가 완성되는 시간

나는 작품 속에서 말장난이나 말싸움에 능한 작가를 좋아한다. 이것은 주로 '설득'의 프리젠테이션을 담당해온 내 직업병이기도 하고 논쟁으로 치닫는 대화에서 더 차분해지는, 결론은 내지 못하지만 분석에는 강한 내 성향이기도 하다. 언변에 뛰어나셨던 아버지의 특성이기도 하다. 나는 말장난이나 말싸움 자체를 대화기술의 증진을 위한 연마쯤으로 여겼던 시절도 있었다. 유난히도 아버지와 논리적인 말싸움에서 패배하면 어떻게든 다시 말로써 동의를 구해보려 투지(?)를 불태웠던 적도 있었다. 그래서 문장을 읽어 내려가다 독자에게 말장난을 치거나 싸움을 거는 투의 구절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물론 여기서의 시비는 관념적인 것이라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되면 그 작가의 스타일에서 좀처럼 빠져나오기 힘들 정도로 중독된다. 급기야는 어찌어찌 하여 비슷하게라도 그의 글투를 따라하고 싶어 흉내도 내어본다. 나는 눈과 귀로 확인하는 말투처럼 안보이고 안들리는 글투에도 예민한 편이라 글투를 보고 사람을 확인하는 버릇도 있다. 그래서 어떤 작가의 글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오히려 책을 빨리 읽어버리는 것으로 책에 대한 아쉬움을 실컷 투사해버리는 독자였다. 이러한 내 경력은 이 작품을 절대 빨리 읽을 수 없었던 이유가 되기도 했다. 작품 전반에 걸쳐 관념적인 분위기를 지속하다가도 불쑥불쑥 싸움을 걸어와 말초적인 신경을 자극하는 그의 글투가 퍽이나 사랑스럽고 흥분되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자살한 후 1년 뒤 어머니로부터 건네받은 아버지의 일기장을 따라가는 딸의 이야기라는 다분히 소설적인 서사의 뼈대는 이 작품에 대한 소설로서의 기대치를 드높이는 효과로도 충분해 보였다. 그런데 프레임 자체는 드라마틱한 줄거리를 지향하고 있지만 펼쳐지는 이야기로는 의외로 담담했다고 할까. '소설의 옷을 입은 에세이' 이거나 '에세이 형식을 빌린 소설'로도 인식되었다. 그것 역시, 나름의 독창성을 획득하면서 이 작품이 가지는 특성이자 문학적 성취로 생각되어 향후 소설적 기법이나 전개에 있어 훌륭한 선례로 기억될 것으로 보인다.

문체의 미감으로 본다면 개인적인 흥분을 토로하지 않을 독자가 있을까 싶지만, 이야기로 본다면 정작 소설 속에 아니 일기 속에 대단한 비밀이나 극적인 내러티브는 없었기로 불만을 내비칠 우려도 있었다. 다른 사건도, 다른 인물도, 다른 갈등도, 그러므로 어떠한 해결이나 결론도 없었기에. 작가로서 숨겨둔 비밀이나 사생활의 고백을 원한 독자들에겐 평화를 가장한 지루함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그가 매일 일기를 쓴 것도 아니고 일기를 쓸 만한 일이나 그에 준하는 생각이 떠올랐기에 일기를 쓴 것이라 가정한다면 적어도 그의 인생에서 일기를 쓴 날은 그렇지 않은 날보다 특별한 날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그 특별한 날들을 한데 모아 놓은 이야기는 더없이 평탄하고 일률적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있었던 일은 특별할 수 있으나 그것을 표현하는 태도와 방법이 일관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버지의 일기와 딸의 일상이 아버지의 작품과 딸의 평가가 교차, 반복되는 과정 역시 절제된 감정, 고요한 패턴, 중도합의된 선에서의 무난함으로 이해되었다. 최상위의 점수와 최하위의 점수를 제외한 나머지 심사위원들의 점수의 합계를 나눈 평균치로서 고급의 절제에 단련된 그 아버지에 그 딸이었다. 그것은 오히려 잘 계획된 부녀간의 평생 프로젝트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그러니까 혹시 아버지는 자신이 죽고 나서 어쩌면 딸이 자신의 부족한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보완해 좀 더 완성된 자신을 이룩해 줄 것을 무의식중에 기대하진 않았을까. 그렇게 본다면 특정한 작품과 그에 대한 해설 및 평론이 이보다 더 아름답고 완벽한 작품으로 탄생한 문학은 없을 것이다. 작가와 평론가의 관계 밑바탕에 흐르고 있는 부녀간의 같은 피는 물론이고, 가족으로서 사후에 이루어지는 숙연한 해석, 지식인으로서 덧붙여지는 전문적 통찰까지 고려한 소설적 상황과 결과는 상당히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어느 정도 정치적이고 그리하여 얼마간 이기적이며, 그럼으로써 상당히 자기 자신을 사랑한 사람들이었다는 생각도 들었음이다.

...오해를 고백하는 시간

그런데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바로 아버지가 죽은 이유를 발견하기 힘들었다는 것과 아버지로 분한 독고준과 작가인 고종석을 떼어내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어려움은 이 작품을 순수한 일기로 기대하고 그 속에서 무언가 해답을 찾으려던 순수한 바램때문 이었을 것이다. 일기를 통해 아버지의 죽음을 정리하고자한 독고원과 독자인 내 바램은 첫 번째 독서에서 어느 정도 이루어졌으나 소설의 주인공과 작가를 분리하지 못한 것은 두 번째 독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아마도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온라인서점『독고준』의 소설 앞에 붙은 '동인문학상 심사 거부' 라는 헤드 카피때문이 아닐까, 싶어진다. 작가는 2003년도 동인문학상 후보를 거절하였다. 수상이 아닌 후보작의 이름에 자신의 이름과 작품이 거론되기를 거부 한 것이다. 그동안 강도높게 비판해온 문학상의 후보에 오른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체 하기 싫었다는 인터뷰를 기억한다. 작가의 문단이력을 작품 이해와 관련시키고자 한 의도는 없었지만 책을 처음 접할 때 별수 없이 제시된 홍보용 구절에 영향을 받아야 했다. 적어도 고종석 작가에게 그 이력은 그가 어떤 책을 출간하든지 간에 평생 따라다닐 만한 관용적 문구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로써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문인으로서의 정치적 색깔을 만천하에 고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회색인이라는 선언으로 인식되었고 나는 그 정체성을 자연스레 독고준의 말과 글을 통해 확인하고 있었다. 소설속에는 실제 사건과 정치인 실명이 등장하므로 이것은 작가가 유도한 장치임을 알면서도, 서문에서까지 그 인물들은 현실속 인물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해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점점 독고준과 고종석이 한 인물이라는 증거를 찾기 위해 책을 읽는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작품을 덮으면서 회색인은 자신이 회색임을 말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러므로 독고준은 회색인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자 그렇다면 자신이 회색이라 천명한 고종석이 뜻밖에도 나머지 과제로 남고 말았다. 난감했다. 결국 회색인을 규정짓는 사람들은 나같이 그들을 회색으로 인식하고 흑백의 사이에서 굳이 회색으로 구분지으려는 사람들의 문제임을, 나는 깨닫고 말았다. 처음부터 두 사람을 일치시켜 색깔이 같은 것인지 확인하고자 한 나는 순수한 독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두 번째 독서에서 씁쓸하게 확인하며 작가의 순수창작물에 일말의 회색시선을 가진 내 정치적 편견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는 꼭 약점이나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의 하나였다. 자신과 같은 상처를 지닌 사람을 누구보다 잘 알아보는 사람들이 가끔 오해로 상대를 잘못 짚고 그 속내가 결국은 자신의 약점을 들키지 않으려는 심리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회색인... 흑과 백을 택하지 않는 언제나 중립자. 그것이야 말로 그동안 내가 지향해온 색깔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다시, 내 아버지는 작가도 아니었고, 자살도 하지 않았고, 일기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서른 권의 일기를 남기셨고, 달리 자신의 작품에 대한 언급이 없었고, 내 직업이 문학 평론가이면서 현직교수였다면 나는 백퍼센트 일기를 유고작으로 출판했을 것이다. 작품 속에선 독고준의 딸인 독고원의 입을 빌어서도 일기의 내용을 보고는 아버지가 출간을 염두해 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출판을 고려해 보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내비추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교수인 딸의 고민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기라는 문학에 대한 의문과 의심을 정당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누가보아도 독고준의 일기는 사후 출간의지를 반영한 글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이 잘 짜여진 틀안에서 47년간의 작가로서의 고뇌와 아버지로서의 말로 못다한 가족애와, 북에 두고 온 누이에 대한 그리움과 한 남자로서의 숨겨진 사랑을...적어도 나는 순진하게 그 부분을 기대했었다. 유치하게 소설임을 감안한 어느 정도 반전까지도 가능하다고 믿었다. 이미 죽은 사람의 일기라는 것은 '비밀'이나 '고백'을 상징하는 소설적 소재라 생각했기 때문에. 특히, 자살이라면 더욱더 고백이 마땅하다 생각했기에 첫 번째 독서에서 이 점이 가장 화가 나는 지점이기도 했다.

그런데 다시 독고원을 서평자로 생각하자 내가 작가이면서 그녀의 아버지였다면, 나는 당연히 일기마저도 독고준스럽게 작성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작가로서 평론가인 딸을 위한 선배로서의 배려였고 자신의 일기를 출판화하는 것에 대한 전문가로서의 딸의 판단을 전적으로 존중하는 일이었다. 자살로 마무리 하면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한 치의 개입도 허락지 않은 아버지였지만 딸로서 아버지의 죽음을 가장 의미있게 수용할 마지막 일감은 소중히 남겨둔 것이었다. 그러니 독고준의 일기는 일기의 내용으로만 보자면 문예지에 청탁을 받아 미리 써 놓은 원고이거나 혹시라도 누가 볼 수 있음을 배려한 친절하고도 깔끔한 메모의 성격을 띨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간혹 부인과 딸에 대한 걱정과 상념들을 우리가 알고 있는 일기 속에 서술하고 있긴 하나 그 역시 저 깊은 속마음을 담은 '진실' 이라기 보다는 있었던 일상을 전달하는 '사실'에 더 가깝다 할 것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일기장을 다 훑어보면 아버지가 자살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건 독자로서 크나큰 오해에 불과했던 것 아닐까.

이렇듯 독고준의 일기는 타인으로부터 자유로와야 할 개인의 글인 일기 속에서도 철저히 관념과 사유만으로 완벽한 형식과 구성을 이루고 있다는 것, 아버지의 일기를 보고 느낀 점을 서술하는 딸 역시도 아버지와 같은 유전자를 프리젠테이션 하고 있다는 것에 서운하지 않아야 함이 독자된 이해의 태도임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이 연출은 애초부터 철저히 독자를 배려할 수 없는 시작이었다. 그의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차가운 열정'이나 '뜨거운 이성'즈음으로 표현될 수 있겠지만 그 '공정함'으로 가는 길이 누구 말마따나 참으로 '편파적'이었기에 나는 처음부터 중심을 잡지 못한 독자였음을 고백한다.

...색깔을 확인하는 시간

또 하나 나를 갸웃거리게 한 것은 일기의 형식이었다. 독고준의 일기는 연도순으로 제시되지 않고 4월부터 3월까지 한 달 단위로 끊어 '사계'라는 부제의 두 번째 장에 소개된다. 이 구성 역시 1960년 4월 혁명부터 2007년 대통령 선거에 이르기까지 수직적인 시간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 47년간의 매해 4월, 매해 5월.....매해 3월 이런 식으로 수평적 구성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독고준의 의도인가, 아버지의 일기를 독파하고 난 후 딸의 의도인가, 두사람의 작업을 고려한 작가의 의도인가. 시간의 흐름을 단지 숫자로만 이해한다는 것의 의미를 역으로 깨닫기도 했다. 이는 독고준이라는 인물이 시간이 흘러 변모한 모습, 세월이 바뀜에 따라 잃거나 얻은 것들을 총체적으로 정리 할 수 없도록 만듦으로써 그를 생각이 변하지 않는 사람, 그렇기에 발전이나 퇴보도 없는 사람으로 인식되도록 하는 계획된 레이아웃이었을까. 독자로선 이야기의 중심을 잡기가 난해한 형식이었다. 하지만 더욱 더 독고준의 복잡한 내면만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기 위한 장치로 느껴지기도 했고 그 내면에 함부로 독자의 주관을 삽입하기가 쉽지 않았음도 알아졌다. 일생을 수직적으로 나열하지 않고 수평적으로 배치 할 경우 배치된 것들이 각각의 테마로서 공평해야 하는데 외적으로 특별한 의미없이 치밀하게 의미를 추구한 것으로 느껴져 나는 가슴한구석이 다 서늘해지기도 했다. 일기의 시작을 4월로 한 것은 아마도 4.19혁명을 시작으로 한 의도로 보이나 소제목이었던 '사계'의 의미를 외양적, 내면적으로 모두 제대로 공감하기 어려웠기에 이는 총체적인 회색의 계절로만 기억되었다. 계절의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바뀌는 계절이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일기에 어느 유명한 평론가가 자신의 소설에서 눈치 채지 못한 부분을 이야기하며 슬며시 냉소하는 장면이 소개되는데 나는 혹시라도 작가의 숨은 의도를 전달 받지 못한 것이 아닌가 싶어 이부분이 아직도 막연하다. 책을 덮고 나서도 그의 사계절은 안개처럼, 희뿌연하게 기억될 듯하다. 아마 무언가 가려져 있어 실체가 분명치 않은 회색의 그것조차 맞는 것인지 모르지만.

한편, 내용면에서 독고준의 일기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컨텐츠는 단연 유명인의 죽음이다. 그의 일기 속에서 운명을 달리한 사람들은 대부분 정치인이고 다음이 화가, 작가, 음악인이었다. 그는 자신처럼 속임수에 능했다고 판단한 피카소에겐 명복을 빌었다. 사르트르는 작고했고, 티토, 앙드레 말로, 카뮈, 애거사 크리스티, 호찌민도 작고했다, 고 적었다. 김현, 박정희, 김일성, 모택동, 푸랑코는 죽었으며, 아키노와 케네디는 암살당했다, 고 적었다. 에디트 피아프와 드골, 칼 포퍼, 바슐라르는 타계했으며 유키오는 할복자살, 로맹가리는 자살, 히로히토는 사망했다, 고 표현하였다. 이 부분은 한사람의 죽음을 짧은 한 문장의 부고기사로 남기면서 은연중에 자신의 정치, 예술적 성향을 단적으로 암시한 것이다. 호찌민은 작고했지만 모택동은 죽었다고 했으니까. 아버지의 짧은 부고 글 밑에 이어지는 딸의 해석으로 아버지가 살아 생전에 호감을 보이던 작가와 그렇지 않은 정치인을 알 수는 있었지만 내 경우 그 구분을 알아갈수록 어떤 알 수 없는 열패감이 들었달까. 누구는 좋아하고 누구는 싫어했다는 것이 그들 사이에선 중요한 판단기준으로 생각되었다. 아버지가 회색인이었던 것을 조명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회색인이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대체로 일기의 독자인 딸의 시각이나 아버지의 시각이 내게는 한통속으로 보였고 결과를 가지고 이건 의외, 이건 이해라고 덧붙이는 것 자체가 지식인들끼리만 교감할 수 있는 그들만의 우월감으로 느껴졌다면 이것도 자격지심인 것일까. 독고준과 비슷한 연세의 내 아버지와 또 독고원과 비슷한 나이의 내가 작가이면서 평론가인 그들 문학인의 관계로 부터 감지하는 生의 패배감은 아니었을까. 아버지가 비워둔 행간이나 여백에 딸이 주석을 채우는 것으로 그래서 아버지의 아성을 더 굳건히 완성하는 작업의 과정으로 보였다. 부럽다. 소설의 마지막은 '슬프다'는 한마디지만 나는 그 슬픔마저 '부럽다', 고 말하고 싶다. 독고준의 시간 상 마지막 일기에는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당선했고 이 땅의 자유주의자들에게 혹은 진보주의자들에게 희망이 있을까? 하는 질문을 마지막으로(2007.12.19) 그는 일기를 중단했다. 어쩌면 그는 희망을 중단했는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아무래도 중립적이지 않은 감정을 말할 때였다. 그의 일기를 통해 나는 다수의 젊은 시인들의 시를 구절구절 나누어 가며 그 심정을 이해하고자 한 태도와 그것을 전달하는 공감능력에 크게 위로받았다. 작가로서 작품과 작가를 말하는 것이 가장 유일하게 진솔하게 다가왔고 소개된 시역시 하나같이 애절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 그는 일기에서 서정시는 근본적으로 시인 자신의 노래이며 시인과 시적화자는 좀처럼 분리되지 않지만 소설은 자기와 무관하게 적대적인 인물을 창조하거나 그들의 자리만 마련해 주고 자신은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다고 비교하고 있다. 이것은 독고준이 감성으로는 시를 좋아했지만 그럼으로써 시를 쓰지 않은 이유이고 그리하여 소설을 쓴 이유이기도 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즉, 시를 통해서는 자신을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며 소설을 통해서 자신을 말하지 않아도 되는 입장이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지. 그렇기에 더욱 시를 이야기 할때 온 감성을 다해 작품을 전달하고 작가에 공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기에 그의 자살은 당당히 자신을 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며 작가로서 일생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문학적 사건이라고 보고 싶다. 그래서 자신을 말하기 위해 자신을 죽인 작가의 일기는 치밀한 계획서에 다름 아닐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독고준은 자살하고자 일기를 써왔으며 일기를 중단함으로써 삶을 마감한 것이다. 그렇다면 일기를 썼기에 자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자유를 발견하는 시간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정치인의 죽음을 목격한 날 독고준은 가족에게 전화를 걸거나 고향,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에 젖는다. 이것은 하나의 반복되는 습관이자 그가 일기를 작성해온 패턴이기도 한데 바꾸어 말하면 정치인이 죽으면 그날은 일기를 썼다는 것이 된다. 그는 결국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이 죽은 날 자살이라는 최후의 일기를 마침표로 작성하지 않았나. 그러나 '관념소설'을 쓰며 '회색인'이라 불렸던 유명 소설가가 선택한 죽음까지 온전히 그레이톤은 아니었다. 작가로서 누구보다 이야기의 힘을 믿는 그가 일기 속에 마치 출간을 염두해 둔 듯한 글을 세상에 내 보낼 수 있는 명분으로서 가장 신비스런 장치로 선택한 것이 바로 자살이었으며 또 그것이 가장 유력하고 타당해 보이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흑'이나 '백'을 선택한 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흑'과 '백'을 적절히 섞은 중립적 의미로서의 '회색인'도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흑'도 '백'도 모두 양손에 들고 있는 그래서 어느 한쪽을 택한 사람보다 인생의 무게가 몇 배일 수 밖에 없었던 '양색인(兩色人)'이었던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하면 그는 어느 한쪽을 택함으로써 치우칠 수 밖에 없는 부자유를 선택하지 않고 두 쪽 다 택함으로써 자유를 지향한 내면의 욕망에 충실한 완벽한 자유의지자 였던 것이 아닐까. 소설가로서 아버지의 문학세계를 규정한 평론가 딸의 냉철한 결론은 그것을 방증하는 단서였다.

"아버지의 소설은 전형적 모더니즘 소설도 아니고, 전형적 리얼리즘 소설은 더욱 아니다.
 동시에 모더니즘 소설이기도 하고 리얼리즘 소설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일상이건 작품이건 자신을 이야기 하지 않고 남의 말을 듣지도 않고 평가도 원치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의 무선택 성향의 근원적인 배경을 가족史에서 쉽게 엿볼 수 있었다. 독고준에게 원산시절 아버지가 월남한 후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했다는 이유로 학교동무들 앞에서 자아비판을 당했던 기억은 성인이 되면서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안전해지려는 굳건한 생존의 전략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는 아무것도 선택 하지 않았으므로 살아 생전엔 타인으로부터 평가 받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하며 이것은 곧 나에 대한 평가는 죽고 나서 해달라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누이의 양보로 월남하게 된 독고준은 원래 누이의 남편이었던 매부가 재가한 집의 처제 이유정에게 매력을 느꼈지만 일가친척이 없었던 그가 선택한 여자는 가족을 형성하고 오랜기간 가정을 유지 할 수 있는 소수파 종교인 순임 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는 아내의 전도를 평생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그 안에서 나름의 주어진 자유를 선택한다. 더 나아가선 동성애자인 큰 딸의 커밍아웃을 인정하고 작은 딸의 아이가 딸린 남자와의 결혼을 반대하지 않음으로써 그 자유의지를 적극적인 지지행위로 실천한다. 이렇듯 외부에 비추어진 작가로서 경계인이자 회색인이었던 독고준은 정작 가정내에서는 그 회색지대의 자유로움을 마음껏 행사하며 따지고 보면 자신의 의지대로 하지 못한 일은 없었던 것이 아닐까.

독고준의 두 딸은 각각 박사와 석사공부를 하고 교수와 기자라는 사회적 성공의 자리에 안착하게 되는데 일기에서 비쳐진 그들의 생활수준은 경제적으로 중상 이상이었다. 두 내외가 딸과 함께 두어 달 유럽여행을 다녀오거나 가족 간에 외식을 할 땐 호텔 레스토랑, 한정식집, 일식집을 벗어나 본적이 없었다. 이렇듯 경제적으로도 안정된 가정내에서 큰 문제 없이 가족들과 잘 지내던 독고준이 자살을 선택 한 것은 바로 자신의 내면을 용서하지 못한 자책에서 기인한 듯하다. 말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을 벗어나는 일. 말하지 못했던 자신을 용서하려면 그렇게 자신을 만들어 온 자신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 운명일 수 밖에 없는 운명. 나는 결국 회색인으로 인식된 자신을 파기하는 것이야 말로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가장 큰 자유의지였으며 그 의지의 실현은 자살일 수 밖에 없었겠구나, 하는 심정으로 책을 덮었다.

...죽음을 이겨내는 시간

중립적인 것은 어느 쪽의 편도 아닌 것임을 의미한다. 독고준은 모두의 편이 되는 것으로 철저하게 자신의 편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선택이 외롭다. 온전한 자유는 결국 온전한 외로움 위로 날아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소설의 마지막 독고준 소묘, 아버지의 문학세계와 삶을 정리한 딸의 글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자유의지로 결론맺고 자신의 작업 역시 아버지의 자유의지에서부터 이미 결정된 일이었음이 슬프다는 그녀의 마지막이 독고준의 죽음보다 더 쓸쓸하게 다가왔다. 아버지는 딸인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할지 알고 계셨기 때문이라는 한마디 독백은 모든 것을 인정하는 끄덕임으로 느껴졌다. 모든 것을 파악하고 이해하고 가슴으로도 받아 들인다는 인증의 목소리였다. 한 사람의 죽음을 안다는 것은, 그래서 외로운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아름답지 않은가. 아버진 그로써 누구보다 딸이 자랑스러웠을 것이며 그들이 완성해 낸 것은 문학하는 부녀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이고도 빛나는 이야기 일 것이기에.

아버지와 딸의 완벽한 합주를 듣고 나는 그들에게 가슴으로 박수를 보낸다. 이번 독서는 무언가를 많이도 깨닫는 시간이었다.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한 사람을 이해하는 시간도 되었고, 남겨진 사람이 먼저 간 사람을 이해하는 방법도 배우는 시간이었고, 먼저 가신 부모님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함으로써 내 자신을 더 책임있게 내 인생을 더 오롯하게 자리매김하는 시간도 마련했다. 정치적인 편견으로 시작한 독서지만 내 마지막은 지극히도 사적이다. 그래서 이 책은 여러모로 내 부모님을 많이도 그립게 한다. 그들의 삶에 내 삶을 포개고 그들이 남겨 놓은 것에 내가 무언가를 덧대는 일이란 무엇일까. 독고원이 자신의 방식으로 아버지를 이해했듯이 나도 내 방식으로 부모님을 이해하고 싶어진다. 그런데 내게 이일은 아버지의 몇십년 일기에 자신의 평을 덧대는 한편의 책처럼 근사하진 않겠지만 아마도 평생을 해가야 할 지속적인 숙제가 아닐까, 싶다. 마치 하루하루 일기를 써가듯 그렇게 죽는 날까지. 아마도 작가의 부모님을 두지 않았고 평론가도 되지 못한 나같은 일개 독자들, 그러나 부모님의 죽음과 그들의 삶만큼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 평생 외면하지 못할 뒤늦은 불효자들은 다같은 입장일 것이다. 나는 거꾸로 부모님에 대한 회한과 그리움을 지금의 일기로 그러모아 먼 훗날 그들과 재회의 선물로 준비하겠다는 야무진 계획을 세워본다. 독고준의 딸만큼은 되지 못하겠지만 독고원의 아버지처럼 일기를 써보겠다. 혹시 내 아이가 내 사후 독고원이 되어줄 줄 또 모르지 않는가. 그런데 그러고 보니 일기라고 명명만 하지 않았지 나는 사실 매일 부모님을 그리며 어떤 형태로든 그들과 나의 이야기를 여기저기 적어왔던 것은 아닐까. 그 이야기엔 지금처럼 그들을 향한 원망이나 그리움에서 시작하여 그들과 내 자신을 이해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 글도 있지 않을까. 나도 모르는 새 부모님은 내 시작과 끝이 되고 있지 않았을까. 독고원의 작업이 아버지의 죽음에서부터 이미 시작되 버린 것처럼.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방법으로 부모나 연인, 친구의 죽음을 이겨내는 것이었다. 독고원은 자신이 가장 잘 하는 글쓰기로 아버지의 죽음을 이겨 낸 것이다. 나 역시 우리 역시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가장 잘 하는 방법으로 그들을 돌아다 본다. 그의 죽음은 슬펐고 대통령의 죽음도 슬펐고 죽음을 말하는 그녀도 슬펐지만 그들을 만난 나는 이제 슬프지 않다. 내가 가장 잘하는 건 죽을만큼 슬퍼한 후 결국 슬퍼하지 않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내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런 나를 이미 알고 계셨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나는, '슬프지 않다'라고 적는다. 이것은 오늘 나의 일기의 전부이고 내가 적을 수 있는 최선의 마지막이다. 슬프지 않다. 내가 혹은 그들이 가장 듣고 싶은 말로 나는 오늘도 일기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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