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고준
고종석 지음 / 새움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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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자亡者를 이해하는 시간

나의 아버지는 자살하지 않았다. 작가도 아니셨다. 하지만 작가로서 마지막을 자살로 선택하셨다면 나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이 노무현 前 대통령이 자살한 날이었다면 나는 어느 한사람의 죽음이 덜 슬플 수 있었을까. 아니 동시에 공평하게 슬퍼할 수 있었을까. 나는 확신한다. 나머지 한명의 죽음은 인식조차 할 수 없는 공백의 死로 처리될 것임을. 시간이 지나도 그 한명은 제대로 죽어지지 않을 것임을.

어머니가 죽던 날 나와 가장 친하던, 나를 가장 아끼던 이모가 죽었다. 아니 이모도 죽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같은 날 같은 방법으로 같은 장소에서였다. 하지만 아직도 이모의 죽음은 기억조차 나지 않으며 그런만큼 충분히 슬퍼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어머니는 동생인 내 이모를 따라가신 것으로 결론을 내리기에 나는 오랫동안 어머니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결국 이해하기로 했고 그 이해된 마음 한 구석엔 아직도 내 이모가 미안한 얼굴로 서계시다. 나는 그것이 늘 죄스러워 가슴속에 이모 한명을 그냥 살려두었다. 내 부모가 죽은 날 누군가가 죽는다면 그건 같은 날 저 세상을 가게 되는 사람들에게나 의미있는 일이지 남은 사람들에겐 죽음도 슬픔도 1/n로 절대 나눌 수가 없는 것이다. 즉, 내 어머니에게나 이모와 같이 저승길을 간다는 것이 의미있는 일이듯 노무현의 죽음은 독고준에게나 의미있는 일이지 남은 딸에겐 오히려 원망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음이다. 물론 작품속에서 독고준은 노무현보다 몇 시간 먼저 죽었다고 적혀있다. 하지만 두 번 소설을 읽은 나에게 독고준은 노무현을 따라 죽은 것으로, 혹은 노무현이 죽고 나서 죽은 것으로, 그것도 안된다면 노무현이 죽는 날 같이 죽어야 할 운명으로 읽혀진다. 굳이 따라 죽는 쪽이라면 노무현이 독고준을 따라 할 일은 백퍼센트 없겠지만 독고준은 그러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책을 덮은 다음 자리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적혀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내 오해와 고집 혹은 착시로 읽는 일이, 이 책에서는 더러 발생하였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것이 나에겐 어머니가 따라간 내 이모를 향한 원망을 많이도 줄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독고준의 딸이 되어 아버지를 이해하는 시간은 아버지의 죽음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일이었고, 그것은 결국 내 어머니의 선택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나를 확인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다는 것. 그것은 그 시점까지 살아온 전 생애의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 아닐까. 이 작품은 전직대통령이 자살한 그날 투신으로 생을 마감한 작가 아버지의 일기장을 건네받은 딸의 이야기이다. 아니, 교수로 성공한 딸을 둔 작가가 자신이 죽으면서 남겨놓은 일기에 관한 이야기다. 백일 전 우연한 기회로 거의 출간과 동시에 이 책을 처음 만났다. 그땐 <서유기>나 <회색인>이 작가에게 어떠한 의미인지 그저 적혀있는 대로만 눈으로 이해하고 책을 덮었을 때 작품의 내용이 내가 원하던 바의 일기가 아닌 것에, 독고준이 그다지 회색인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에 일말의 배신감을 느꼈었다. 그로부터 두어 계절이 지나가는 동안 나에겐 조그만 변화가 생겼다. 물론 <서유기>와 <회색인>을 여전히 읽지 못한 무정한 독자이지만 좀 더 많은 책을 읽었고 그러므로 그에 관해 작성한 서평이 많아졌다. 한해가 마무리 되는 시점에 다시 소설을 들쳐보니 그때와는 사뭇 다른 감정이 발돋움하는 나를 발견한다. 올해 나는 서평자로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았다는 감회때문인지 이 책은 독고준의 딸 독고원의 서평이야기로 다시 보이는 것이다. 작가인 아버지를 둔 평론가 딸이 아버지 사후 그제서야 아버지의 문학작품에 대해 리뷰하는 글로 말이다. 아버지의 작품 전체를 한 번의 리뷰로 마무리 짓는 방법으론 일기보다 더 완벽한 형식은 없다고 본다. 이러한 잘 짜여진 치밀한 각본의 배경을 이해하고 나니 나는 앞서 언급한 어머니의 죽음을 이해하는 과정과 더불어 내 아버지의 직업을 다시 돌아보며 그것을 지금의 어른됨으로 평가하고 있는 내 자신도 발견하게 되었다. 물론, 내 아버지는 글쓰는 일과는 상관없이 술과 말로 상대를 공략하고 회유하며 협상하는 '술상무'에 가까웠지만 나 역시 오랫동안 말로 먹고 사는 직업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아버지의 삶속에서 진행되어온 '말'이라는 작품을 뒤늦게나마 내 '말'을 덧붙여 리메이크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은 이래저래 내 부모님의 죽음과 직업을 다시 정리하게 하는 방편으로 제대로 활용한 셈이 되었다. 뜻하지 않게 실로 지극히 개인적인 독서였다. 독서란 어짜피 자신의 내면과 소통하는 가장 사적인 시간이므로 두 번째『독고준』은 내게 공적인 글로써 사적인 상처와 그리움을 위무해주던 일종의 해결사와도 같았음이다.

...언사言辭가 완성되는 시간

나는 작품 속에서 말장난이나 말싸움에 능한 작가를 좋아한다. 이것은 주로 '설득'의 프리젠테이션을 담당해온 내 직업병이기도 하고 논쟁으로 치닫는 대화에서 더 차분해지는, 결론은 내지 못하지만 분석에는 강한 내 성향이기도 하다. 언변에 뛰어나셨던 아버지의 특성이기도 하다. 나는 말장난이나 말싸움 자체를 대화기술의 증진을 위한 연마쯤으로 여겼던 시절도 있었다. 유난히도 아버지와 논리적인 말싸움에서 패배하면 어떻게든 다시 말로써 동의를 구해보려 투지(?)를 불태웠던 적도 있었다. 그래서 문장을 읽어 내려가다 독자에게 말장난을 치거나 싸움을 거는 투의 구절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물론 여기서의 시비는 관념적인 것이라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되면 그 작가의 스타일에서 좀처럼 빠져나오기 힘들 정도로 중독된다. 급기야는 어찌어찌 하여 비슷하게라도 그의 글투를 따라하고 싶어 흉내도 내어본다. 나는 눈과 귀로 확인하는 말투처럼 안보이고 안들리는 글투에도 예민한 편이라 글투를 보고 사람을 확인하는 버릇도 있다. 그래서 어떤 작가의 글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오히려 책을 빨리 읽어버리는 것으로 책에 대한 아쉬움을 실컷 투사해버리는 독자였다. 이러한 내 경력은 이 작품을 절대 빨리 읽을 수 없었던 이유가 되기도 했다. 작품 전반에 걸쳐 관념적인 분위기를 지속하다가도 불쑥불쑥 싸움을 걸어와 말초적인 신경을 자극하는 그의 글투가 퍽이나 사랑스럽고 흥분되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자살한 후 1년 뒤 어머니로부터 건네받은 아버지의 일기장을 따라가는 딸의 이야기라는 다분히 소설적인 서사의 뼈대는 이 작품에 대한 소설로서의 기대치를 드높이는 효과로도 충분해 보였다. 그런데 프레임 자체는 드라마틱한 줄거리를 지향하고 있지만 펼쳐지는 이야기로는 의외로 담담했다고 할까. '소설의 옷을 입은 에세이' 이거나 '에세이 형식을 빌린 소설'로도 인식되었다. 그것 역시, 나름의 독창성을 획득하면서 이 작품이 가지는 특성이자 문학적 성취로 생각되어 향후 소설적 기법이나 전개에 있어 훌륭한 선례로 기억될 것으로 보인다.

문체의 미감으로 본다면 개인적인 흥분을 토로하지 않을 독자가 있을까 싶지만, 이야기로 본다면 정작 소설 속에 아니 일기 속에 대단한 비밀이나 극적인 내러티브는 없었기로 불만을 내비칠 우려도 있었다. 다른 사건도, 다른 인물도, 다른 갈등도, 그러므로 어떠한 해결이나 결론도 없었기에. 작가로서 숨겨둔 비밀이나 사생활의 고백을 원한 독자들에겐 평화를 가장한 지루함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그가 매일 일기를 쓴 것도 아니고 일기를 쓸 만한 일이나 그에 준하는 생각이 떠올랐기에 일기를 쓴 것이라 가정한다면 적어도 그의 인생에서 일기를 쓴 날은 그렇지 않은 날보다 특별한 날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그 특별한 날들을 한데 모아 놓은 이야기는 더없이 평탄하고 일률적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있었던 일은 특별할 수 있으나 그것을 표현하는 태도와 방법이 일관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버지의 일기와 딸의 일상이 아버지의 작품과 딸의 평가가 교차, 반복되는 과정 역시 절제된 감정, 고요한 패턴, 중도합의된 선에서의 무난함으로 이해되었다. 최상위의 점수와 최하위의 점수를 제외한 나머지 심사위원들의 점수의 합계를 나눈 평균치로서 고급의 절제에 단련된 그 아버지에 그 딸이었다. 그것은 오히려 잘 계획된 부녀간의 평생 프로젝트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그러니까 혹시 아버지는 자신이 죽고 나서 어쩌면 딸이 자신의 부족한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보완해 좀 더 완성된 자신을 이룩해 줄 것을 무의식중에 기대하진 않았을까. 그렇게 본다면 특정한 작품과 그에 대한 해설 및 평론이 이보다 더 아름답고 완벽한 작품으로 탄생한 문학은 없을 것이다. 작가와 평론가의 관계 밑바탕에 흐르고 있는 부녀간의 같은 피는 물론이고, 가족으로서 사후에 이루어지는 숙연한 해석, 지식인으로서 덧붙여지는 전문적 통찰까지 고려한 소설적 상황과 결과는 상당히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어느 정도 정치적이고 그리하여 얼마간 이기적이며, 그럼으로써 상당히 자기 자신을 사랑한 사람들이었다는 생각도 들었음이다.

...오해를 고백하는 시간

그런데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바로 아버지가 죽은 이유를 발견하기 힘들었다는 것과 아버지로 분한 독고준과 작가인 고종석을 떼어내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어려움은 이 작품을 순수한 일기로 기대하고 그 속에서 무언가 해답을 찾으려던 순수한 바램때문 이었을 것이다. 일기를 통해 아버지의 죽음을 정리하고자한 독고원과 독자인 내 바램은 첫 번째 독서에서 어느 정도 이루어졌으나 소설의 주인공과 작가를 분리하지 못한 것은 두 번째 독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아마도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온라인서점『독고준』의 소설 앞에 붙은 '동인문학상 심사 거부' 라는 헤드 카피때문이 아닐까, 싶어진다. 작가는 2003년도 동인문학상 후보를 거절하였다. 수상이 아닌 후보작의 이름에 자신의 이름과 작품이 거론되기를 거부 한 것이다. 그동안 강도높게 비판해온 문학상의 후보에 오른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체 하기 싫었다는 인터뷰를 기억한다. 작가의 문단이력을 작품 이해와 관련시키고자 한 의도는 없었지만 책을 처음 접할 때 별수 없이 제시된 홍보용 구절에 영향을 받아야 했다. 적어도 고종석 작가에게 그 이력은 그가 어떤 책을 출간하든지 간에 평생 따라다닐 만한 관용적 문구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로써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문인으로서의 정치적 색깔을 만천하에 고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회색인이라는 선언으로 인식되었고 나는 그 정체성을 자연스레 독고준의 말과 글을 통해 확인하고 있었다. 소설속에는 실제 사건과 정치인 실명이 등장하므로 이것은 작가가 유도한 장치임을 알면서도, 서문에서까지 그 인물들은 현실속 인물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해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점점 독고준과 고종석이 한 인물이라는 증거를 찾기 위해 책을 읽는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작품을 덮으면서 회색인은 자신이 회색임을 말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러므로 독고준은 회색인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자 그렇다면 자신이 회색이라 천명한 고종석이 뜻밖에도 나머지 과제로 남고 말았다. 난감했다. 결국 회색인을 규정짓는 사람들은 나같이 그들을 회색으로 인식하고 흑백의 사이에서 굳이 회색으로 구분지으려는 사람들의 문제임을, 나는 깨닫고 말았다. 처음부터 두 사람을 일치시켜 색깔이 같은 것인지 확인하고자 한 나는 순수한 독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두 번째 독서에서 씁쓸하게 확인하며 작가의 순수창작물에 일말의 회색시선을 가진 내 정치적 편견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는 꼭 약점이나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의 하나였다. 자신과 같은 상처를 지닌 사람을 누구보다 잘 알아보는 사람들이 가끔 오해로 상대를 잘못 짚고 그 속내가 결국은 자신의 약점을 들키지 않으려는 심리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회색인... 흑과 백을 택하지 않는 언제나 중립자. 그것이야 말로 그동안 내가 지향해온 색깔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다시, 내 아버지는 작가도 아니었고, 자살도 하지 않았고, 일기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서른 권의 일기를 남기셨고, 달리 자신의 작품에 대한 언급이 없었고, 내 직업이 문학 평론가이면서 현직교수였다면 나는 백퍼센트 일기를 유고작으로 출판했을 것이다. 작품 속에선 독고준의 딸인 독고원의 입을 빌어서도 일기의 내용을 보고는 아버지가 출간을 염두해 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출판을 고려해 보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내비추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교수인 딸의 고민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기라는 문학에 대한 의문과 의심을 정당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누가보아도 독고준의 일기는 사후 출간의지를 반영한 글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이 잘 짜여진 틀안에서 47년간의 작가로서의 고뇌와 아버지로서의 말로 못다한 가족애와, 북에 두고 온 누이에 대한 그리움과 한 남자로서의 숨겨진 사랑을...적어도 나는 순진하게 그 부분을 기대했었다. 유치하게 소설임을 감안한 어느 정도 반전까지도 가능하다고 믿었다. 이미 죽은 사람의 일기라는 것은 '비밀'이나 '고백'을 상징하는 소설적 소재라 생각했기 때문에. 특히, 자살이라면 더욱더 고백이 마땅하다 생각했기에 첫 번째 독서에서 이 점이 가장 화가 나는 지점이기도 했다.

그런데 다시 독고원을 서평자로 생각하자 내가 작가이면서 그녀의 아버지였다면, 나는 당연히 일기마저도 독고준스럽게 작성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작가로서 평론가인 딸을 위한 선배로서의 배려였고 자신의 일기를 출판화하는 것에 대한 전문가로서의 딸의 판단을 전적으로 존중하는 일이었다. 자살로 마무리 하면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한 치의 개입도 허락지 않은 아버지였지만 딸로서 아버지의 죽음을 가장 의미있게 수용할 마지막 일감은 소중히 남겨둔 것이었다. 그러니 독고준의 일기는 일기의 내용으로만 보자면 문예지에 청탁을 받아 미리 써 놓은 원고이거나 혹시라도 누가 볼 수 있음을 배려한 친절하고도 깔끔한 메모의 성격을 띨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간혹 부인과 딸에 대한 걱정과 상념들을 우리가 알고 있는 일기 속에 서술하고 있긴 하나 그 역시 저 깊은 속마음을 담은 '진실' 이라기 보다는 있었던 일상을 전달하는 '사실'에 더 가깝다 할 것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일기장을 다 훑어보면 아버지가 자살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건 독자로서 크나큰 오해에 불과했던 것 아닐까.

이렇듯 독고준의 일기는 타인으로부터 자유로와야 할 개인의 글인 일기 속에서도 철저히 관념과 사유만으로 완벽한 형식과 구성을 이루고 있다는 것, 아버지의 일기를 보고 느낀 점을 서술하는 딸 역시도 아버지와 같은 유전자를 프리젠테이션 하고 있다는 것에 서운하지 않아야 함이 독자된 이해의 태도임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이 연출은 애초부터 철저히 독자를 배려할 수 없는 시작이었다. 그의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차가운 열정'이나 '뜨거운 이성'즈음으로 표현될 수 있겠지만 그 '공정함'으로 가는 길이 누구 말마따나 참으로 '편파적'이었기에 나는 처음부터 중심을 잡지 못한 독자였음을 고백한다.

...색깔을 확인하는 시간

또 하나 나를 갸웃거리게 한 것은 일기의 형식이었다. 독고준의 일기는 연도순으로 제시되지 않고 4월부터 3월까지 한 달 단위로 끊어 '사계'라는 부제의 두 번째 장에 소개된다. 이 구성 역시 1960년 4월 혁명부터 2007년 대통령 선거에 이르기까지 수직적인 시간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 47년간의 매해 4월, 매해 5월.....매해 3월 이런 식으로 수평적 구성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독고준의 의도인가, 아버지의 일기를 독파하고 난 후 딸의 의도인가, 두사람의 작업을 고려한 작가의 의도인가. 시간의 흐름을 단지 숫자로만 이해한다는 것의 의미를 역으로 깨닫기도 했다. 이는 독고준이라는 인물이 시간이 흘러 변모한 모습, 세월이 바뀜에 따라 잃거나 얻은 것들을 총체적으로 정리 할 수 없도록 만듦으로써 그를 생각이 변하지 않는 사람, 그렇기에 발전이나 퇴보도 없는 사람으로 인식되도록 하는 계획된 레이아웃이었을까. 독자로선 이야기의 중심을 잡기가 난해한 형식이었다. 하지만 더욱 더 독고준의 복잡한 내면만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기 위한 장치로 느껴지기도 했고 그 내면에 함부로 독자의 주관을 삽입하기가 쉽지 않았음도 알아졌다. 일생을 수직적으로 나열하지 않고 수평적으로 배치 할 경우 배치된 것들이 각각의 테마로서 공평해야 하는데 외적으로 특별한 의미없이 치밀하게 의미를 추구한 것으로 느껴져 나는 가슴한구석이 다 서늘해지기도 했다. 일기의 시작을 4월로 한 것은 아마도 4.19혁명을 시작으로 한 의도로 보이나 소제목이었던 '사계'의 의미를 외양적, 내면적으로 모두 제대로 공감하기 어려웠기에 이는 총체적인 회색의 계절로만 기억되었다. 계절의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바뀌는 계절이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일기에 어느 유명한 평론가가 자신의 소설에서 눈치 채지 못한 부분을 이야기하며 슬며시 냉소하는 장면이 소개되는데 나는 혹시라도 작가의 숨은 의도를 전달 받지 못한 것이 아닌가 싶어 이부분이 아직도 막연하다. 책을 덮고 나서도 그의 사계절은 안개처럼, 희뿌연하게 기억될 듯하다. 아마 무언가 가려져 있어 실체가 분명치 않은 회색의 그것조차 맞는 것인지 모르지만.

한편, 내용면에서 독고준의 일기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컨텐츠는 단연 유명인의 죽음이다. 그의 일기 속에서 운명을 달리한 사람들은 대부분 정치인이고 다음이 화가, 작가, 음악인이었다. 그는 자신처럼 속임수에 능했다고 판단한 피카소에겐 명복을 빌었다. 사르트르는 작고했고, 티토, 앙드레 말로, 카뮈, 애거사 크리스티, 호찌민도 작고했다, 고 적었다. 김현, 박정희, 김일성, 모택동, 푸랑코는 죽었으며, 아키노와 케네디는 암살당했다, 고 적었다. 에디트 피아프와 드골, 칼 포퍼, 바슐라르는 타계했으며 유키오는 할복자살, 로맹가리는 자살, 히로히토는 사망했다, 고 표현하였다. 이 부분은 한사람의 죽음을 짧은 한 문장의 부고기사로 남기면서 은연중에 자신의 정치, 예술적 성향을 단적으로 암시한 것이다. 호찌민은 작고했지만 모택동은 죽었다고 했으니까. 아버지의 짧은 부고 글 밑에 이어지는 딸의 해석으로 아버지가 살아 생전에 호감을 보이던 작가와 그렇지 않은 정치인을 알 수는 있었지만 내 경우 그 구분을 알아갈수록 어떤 알 수 없는 열패감이 들었달까. 누구는 좋아하고 누구는 싫어했다는 것이 그들 사이에선 중요한 판단기준으로 생각되었다. 아버지가 회색인이었던 것을 조명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회색인이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대체로 일기의 독자인 딸의 시각이나 아버지의 시각이 내게는 한통속으로 보였고 결과를 가지고 이건 의외, 이건 이해라고 덧붙이는 것 자체가 지식인들끼리만 교감할 수 있는 그들만의 우월감으로 느껴졌다면 이것도 자격지심인 것일까. 독고준과 비슷한 연세의 내 아버지와 또 독고원과 비슷한 나이의 내가 작가이면서 평론가인 그들 문학인의 관계로 부터 감지하는 生의 패배감은 아니었을까. 아버지가 비워둔 행간이나 여백에 딸이 주석을 채우는 것으로 그래서 아버지의 아성을 더 굳건히 완성하는 작업의 과정으로 보였다. 부럽다. 소설의 마지막은 '슬프다'는 한마디지만 나는 그 슬픔마저 '부럽다', 고 말하고 싶다. 독고준의 시간 상 마지막 일기에는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당선했고 이 땅의 자유주의자들에게 혹은 진보주의자들에게 희망이 있을까? 하는 질문을 마지막으로(2007.12.19) 그는 일기를 중단했다. 어쩌면 그는 희망을 중단했는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아무래도 중립적이지 않은 감정을 말할 때였다. 그의 일기를 통해 나는 다수의 젊은 시인들의 시를 구절구절 나누어 가며 그 심정을 이해하고자 한 태도와 그것을 전달하는 공감능력에 크게 위로받았다. 작가로서 작품과 작가를 말하는 것이 가장 유일하게 진솔하게 다가왔고 소개된 시역시 하나같이 애절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 그는 일기에서 서정시는 근본적으로 시인 자신의 노래이며 시인과 시적화자는 좀처럼 분리되지 않지만 소설은 자기와 무관하게 적대적인 인물을 창조하거나 그들의 자리만 마련해 주고 자신은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다고 비교하고 있다. 이것은 독고준이 감성으로는 시를 좋아했지만 그럼으로써 시를 쓰지 않은 이유이고 그리하여 소설을 쓴 이유이기도 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즉, 시를 통해서는 자신을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며 소설을 통해서 자신을 말하지 않아도 되는 입장이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지. 그렇기에 더욱 시를 이야기 할때 온 감성을 다해 작품을 전달하고 작가에 공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기에 그의 자살은 당당히 자신을 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며 작가로서 일생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문학적 사건이라고 보고 싶다. 그래서 자신을 말하기 위해 자신을 죽인 작가의 일기는 치밀한 계획서에 다름 아닐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독고준은 자살하고자 일기를 써왔으며 일기를 중단함으로써 삶을 마감한 것이다. 그렇다면 일기를 썼기에 자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자유를 발견하는 시간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정치인의 죽음을 목격한 날 독고준은 가족에게 전화를 걸거나 고향,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에 젖는다. 이것은 하나의 반복되는 습관이자 그가 일기를 작성해온 패턴이기도 한데 바꾸어 말하면 정치인이 죽으면 그날은 일기를 썼다는 것이 된다. 그는 결국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이 죽은 날 자살이라는 최후의 일기를 마침표로 작성하지 않았나. 그러나 '관념소설'을 쓰며 '회색인'이라 불렸던 유명 소설가가 선택한 죽음까지 온전히 그레이톤은 아니었다. 작가로서 누구보다 이야기의 힘을 믿는 그가 일기 속에 마치 출간을 염두해 둔 듯한 글을 세상에 내 보낼 수 있는 명분으로서 가장 신비스런 장치로 선택한 것이 바로 자살이었으며 또 그것이 가장 유력하고 타당해 보이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흑'이나 '백'을 선택한 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흑'과 '백'을 적절히 섞은 중립적 의미로서의 '회색인'도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흑'도 '백'도 모두 양손에 들고 있는 그래서 어느 한쪽을 택한 사람보다 인생의 무게가 몇 배일 수 밖에 없었던 '양색인(兩色人)'이었던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하면 그는 어느 한쪽을 택함으로써 치우칠 수 밖에 없는 부자유를 선택하지 않고 두 쪽 다 택함으로써 자유를 지향한 내면의 욕망에 충실한 완벽한 자유의지자 였던 것이 아닐까. 소설가로서 아버지의 문학세계를 규정한 평론가 딸의 냉철한 결론은 그것을 방증하는 단서였다.

"아버지의 소설은 전형적 모더니즘 소설도 아니고, 전형적 리얼리즘 소설은 더욱 아니다.
 동시에 모더니즘 소설이기도 하고 리얼리즘 소설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일상이건 작품이건 자신을 이야기 하지 않고 남의 말을 듣지도 않고 평가도 원치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의 무선택 성향의 근원적인 배경을 가족史에서 쉽게 엿볼 수 있었다. 독고준에게 원산시절 아버지가 월남한 후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했다는 이유로 학교동무들 앞에서 자아비판을 당했던 기억은 성인이 되면서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안전해지려는 굳건한 생존의 전략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는 아무것도 선택 하지 않았으므로 살아 생전엔 타인으로부터 평가 받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하며 이것은 곧 나에 대한 평가는 죽고 나서 해달라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누이의 양보로 월남하게 된 독고준은 원래 누이의 남편이었던 매부가 재가한 집의 처제 이유정에게 매력을 느꼈지만 일가친척이 없었던 그가 선택한 여자는 가족을 형성하고 오랜기간 가정을 유지 할 수 있는 소수파 종교인 순임 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는 아내의 전도를 평생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그 안에서 나름의 주어진 자유를 선택한다. 더 나아가선 동성애자인 큰 딸의 커밍아웃을 인정하고 작은 딸의 아이가 딸린 남자와의 결혼을 반대하지 않음으로써 그 자유의지를 적극적인 지지행위로 실천한다. 이렇듯 외부에 비추어진 작가로서 경계인이자 회색인이었던 독고준은 정작 가정내에서는 그 회색지대의 자유로움을 마음껏 행사하며 따지고 보면 자신의 의지대로 하지 못한 일은 없었던 것이 아닐까.

독고준의 두 딸은 각각 박사와 석사공부를 하고 교수와 기자라는 사회적 성공의 자리에 안착하게 되는데 일기에서 비쳐진 그들의 생활수준은 경제적으로 중상 이상이었다. 두 내외가 딸과 함께 두어 달 유럽여행을 다녀오거나 가족 간에 외식을 할 땐 호텔 레스토랑, 한정식집, 일식집을 벗어나 본적이 없었다. 이렇듯 경제적으로도 안정된 가정내에서 큰 문제 없이 가족들과 잘 지내던 독고준이 자살을 선택 한 것은 바로 자신의 내면을 용서하지 못한 자책에서 기인한 듯하다. 말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을 벗어나는 일. 말하지 못했던 자신을 용서하려면 그렇게 자신을 만들어 온 자신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 운명일 수 밖에 없는 운명. 나는 결국 회색인으로 인식된 자신을 파기하는 것이야 말로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가장 큰 자유의지였으며 그 의지의 실현은 자살일 수 밖에 없었겠구나, 하는 심정으로 책을 덮었다.

...죽음을 이겨내는 시간

중립적인 것은 어느 쪽의 편도 아닌 것임을 의미한다. 독고준은 모두의 편이 되는 것으로 철저하게 자신의 편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선택이 외롭다. 온전한 자유는 결국 온전한 외로움 위로 날아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소설의 마지막 독고준 소묘, 아버지의 문학세계와 삶을 정리한 딸의 글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자유의지로 결론맺고 자신의 작업 역시 아버지의 자유의지에서부터 이미 결정된 일이었음이 슬프다는 그녀의 마지막이 독고준의 죽음보다 더 쓸쓸하게 다가왔다. 아버지는 딸인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할지 알고 계셨기 때문이라는 한마디 독백은 모든 것을 인정하는 끄덕임으로 느껴졌다. 모든 것을 파악하고 이해하고 가슴으로도 받아 들인다는 인증의 목소리였다. 한 사람의 죽음을 안다는 것은, 그래서 외로운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아름답지 않은가. 아버진 그로써 누구보다 딸이 자랑스러웠을 것이며 그들이 완성해 낸 것은 문학하는 부녀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이고도 빛나는 이야기 일 것이기에.

아버지와 딸의 완벽한 합주를 듣고 나는 그들에게 가슴으로 박수를 보낸다. 이번 독서는 무언가를 많이도 깨닫는 시간이었다.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한 사람을 이해하는 시간도 되었고, 남겨진 사람이 먼저 간 사람을 이해하는 방법도 배우는 시간이었고, 먼저 가신 부모님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함으로써 내 자신을 더 책임있게 내 인생을 더 오롯하게 자리매김하는 시간도 마련했다. 정치적인 편견으로 시작한 독서지만 내 마지막은 지극히도 사적이다. 그래서 이 책은 여러모로 내 부모님을 많이도 그립게 한다. 그들의 삶에 내 삶을 포개고 그들이 남겨 놓은 것에 내가 무언가를 덧대는 일이란 무엇일까. 독고원이 자신의 방식으로 아버지를 이해했듯이 나도 내 방식으로 부모님을 이해하고 싶어진다. 그런데 내게 이일은 아버지의 몇십년 일기에 자신의 평을 덧대는 한편의 책처럼 근사하진 않겠지만 아마도 평생을 해가야 할 지속적인 숙제가 아닐까, 싶다. 마치 하루하루 일기를 써가듯 그렇게 죽는 날까지. 아마도 작가의 부모님을 두지 않았고 평론가도 되지 못한 나같은 일개 독자들, 그러나 부모님의 죽음과 그들의 삶만큼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 평생 외면하지 못할 뒤늦은 불효자들은 다같은 입장일 것이다. 나는 거꾸로 부모님에 대한 회한과 그리움을 지금의 일기로 그러모아 먼 훗날 그들과 재회의 선물로 준비하겠다는 야무진 계획을 세워본다. 독고준의 딸만큼은 되지 못하겠지만 독고원의 아버지처럼 일기를 써보겠다. 혹시 내 아이가 내 사후 독고원이 되어줄 줄 또 모르지 않는가. 그런데 그러고 보니 일기라고 명명만 하지 않았지 나는 사실 매일 부모님을 그리며 어떤 형태로든 그들과 나의 이야기를 여기저기 적어왔던 것은 아닐까. 그 이야기엔 지금처럼 그들을 향한 원망이나 그리움에서 시작하여 그들과 내 자신을 이해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 글도 있지 않을까. 나도 모르는 새 부모님은 내 시작과 끝이 되고 있지 않았을까. 독고원의 작업이 아버지의 죽음에서부터 이미 시작되 버린 것처럼.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방법으로 부모나 연인, 친구의 죽음을 이겨내는 것이었다. 독고원은 자신이 가장 잘 하는 글쓰기로 아버지의 죽음을 이겨 낸 것이다. 나 역시 우리 역시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가장 잘 하는 방법으로 그들을 돌아다 본다. 그의 죽음은 슬펐고 대통령의 죽음도 슬펐고 죽음을 말하는 그녀도 슬펐지만 그들을 만난 나는 이제 슬프지 않다. 내가 가장 잘하는 건 죽을만큼 슬퍼한 후 결국 슬퍼하지 않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내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런 나를 이미 알고 계셨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나는, '슬프지 않다'라고 적는다. 이것은 오늘 나의 일기의 전부이고 내가 적을 수 있는 최선의 마지막이다. 슬프지 않다. 내가 혹은 그들이 가장 듣고 싶은 말로 나는 오늘도 일기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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