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 - 전2권 - side A, side B + 일러스트 화집
박민규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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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과 더브러

나에겐 이 리뷰가 올해의 마지막 리뷰이다. 감회가 새롭다. 다음해가 되면 내 인생을 가리키는 여러 숫자가 바뀌어 진다. 더해지고 늘어나는 것이 대부분일 테지만 그럼으로써 내게 주어진 수명은 줄어 들 것이다. 올 한해를 살아낸 것인지 그렇기에 죽어간 것인지 마음이 착잡해진다. 송년의 심정이란 다분 자신이 놓여진 현재의 위치에 따라 좌우되는 감상일까. 언제나 이맘 때 쯤 이면 망년회에서 십팔번의 노래를 불러가며 내년엔 더, 하는 희망으로 한 해 동안 달려온 거리와 쌓아온 성과를 자축하곤 했는데 이번엔 좋게 말하면 '내년엔 더 나아지겠지' 하는 진부한 기대감이요, 뒤돌아서 중얼거리면 '그래서, 뭐?'하고 싶은 울분이랄까, 그렇다. 그래서인지 책을 덮고 나는 짐짓 숙연해졌다. 이 책이 꼭 올 한해 누구를 만나서도 십팔번의 노래같은 건 부를 수 없었던 나를 위해 '**, 인생 뭐 있어?' 하며 어깨를 툭 쳐주는 것만 같았기에. 하필, 책의 두께가 더블이라 좀 아프긴 했다. 아니 책이라 하기엔 의아했다. 낯선 매스감이 은근히 번져오는 근육주사를 맞은 것처럼 여운도 길었다. 하지만 나는 한 사람에게 있어 독서의 시점과 때마침 집어 드는 한 권의 책은 어떤 운명적인 관계가 있다고도 믿는 사람이기에 이 책으로 올해를 보내는 송년의 의식을 기꺼이 치루어 보기로 했다. 물론, 십팔번의 노래는 그때 가서 결정할 생각이다.

그래, 지나고 보니 나는 이 책을 공들여 읽었다는 생각이다. 단편을 열여덟 편 읽었지만 마치 열여덟 권의 책을 읽었지 싶다. 이는 아무래도 작가가 의도한 책의 편집과 외적인 디자인이 피할 수 없는 영향을 주었던 듯하다. 우선 작가는 이 책이 가지는 파격적인 형식에 'LP시절의 더블앨범에 대한 로망'이라는 주석을 덧붙였는데 그러한 설명이 없었더라도 어느 솔로가수의 10주년 기념 앨범(2CD로 만든) 팩키지 정도는 연상시키기에 충분했음이다. 속지 또한 그시절 LP커버에 들어있던 그 속지라기 보다는 요즘 CD의 부록형태인 화보집정도로 이해될만 했다. 그러나 레코드는 2장이어도 목차에서는 CD처럼 disc 1, disc 2로 구분하지 않고 side A와 side B라 구분된다. 디스크란 개념은 그 시절 허리디스크와 동일했기에. 이는 개체의 개별성보다는 기록매체로서 레코드가 가지는 양면성이 그대로 표식에 반영된 것이다. 작가는 바로 이 양면성을 무의식적으로 의식한 것은 아닐까 싶다. 즉, LP 레코드의 앞과 뒷면처럼 존재하는, A면을 들을 땐 B면을 들을 수 없는 그러나 두 가지 모두 하나의 레코드를 이루는 물리적 속성을 '더블'의 본질로 따르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이것은 더블(double, 두배)이 가져다 주는 더브러(더불어의 옛말)가 아닐 수 없다. 레코드의 자켓에 해당하는 표지의 인물도 하필 복면을 쓴 덕에 두 권을 나란히 놓고 보면 두 사람은 서로 대치하거나 각자 등을 지게 된다. 절대 마주본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서로의 눈이 마주치치 않기 때문일 것. 그러나 표지의 주인공은 그러한 양면을 가진 한명의 작가일 뿐이다. 처음엔 그러려니 지나쳤는데 책을 덮고 케이스에 side A와 side B를 꽂고 보니 작가가 가장 많이 고민한 것은 혹시 우리안의 두 가지 현실, 혹은 우리 인생의 두 가지 존재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물론 처음엔 이제 이정도가 되었으니 이런 식의 크리에이티브를 마음껏 발현해 보아도 얼마든지 먹힐 것이라 생각한 다소 삐딱한 심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길거리에 피를 뿌린다면 미친* 이라 욕을 듣겠지만, 백남준이 했다 치면 그것은 예술이다!) 즉, 자타공인, 작가는 이제 '박민규니까', 이거나 '박민규 답네' 하는 반응을 들을 정도는 된 것이다. 무엇이든 새로움을 시도할 땐 기존에 변화를 추구하지 않았던 혹은 후에 선례를 가지게 될 같은 업業을 하는 사람들로부터 칭찬만큼이나 비난의 평가도 각오해야 하는 법이다. 이 사람의 문학하는 방식이 과연 독자들에게 그 만족도 더블로 제공할 것인지 와는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허나, 열여덟 편의 선물을 하나하나 다 풀어보고 샅샅이 사용해(?)보고 나니 모든 것은 끄덕임으로 돌아왔다.

물론 선물 모두가 나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작가는 한편의 이야기마다 그것을 헌사하는 주인공이 있었고 그 배경에는 결국 작가의 전 생애가 소중하게 녹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모든 이야기는 '삶'과 '죽음'에 대한 작가의 성찰로 귀결되고 있었다. 특히, side A는 '어짜피 사는 건 죽어가는 일'임을 side B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노래하고 있었다.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달나라에서도 원시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음반을 앨범이라고 하며 특히 LP판은 대놓고(?) '레코드'라고 한다. 기록과 녹음이라는 레코드는 그 시절 소중하고도 특별한 일이었다. 그는 삶과 죽음의 레코드(기록)를 통해 자신만의 레코드(앨범)를 만든 것은 아닐까. 독자로서 이러한 배경을 인식하자 열여덟 편의 이야기는 곧 열여덟 장의 사진이거나 열여덟 곡의 노래이거나 열여덟 통의 편지처럼 내가 잊고 있던 여러 감정을 확인하는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모두 한사람이 제공한 것이라는 게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소재, 입체적인 장르였지만 익숙하게도 같은 톤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분명 사진사도 가수도 편지글도 한사람인 작품이었다. 나는 흡사 그 옛날 다방의 DJ라도 되어 열여덟 가지의 사연을 읽고는 그 주인공에 음악을 띠우고 싶어지기도 했다. 『더블』은

그렇게 삶과 죽음이 '더브러' 공존하는 우리 生을 곱배기로 제시하고 있었다.  


side A .... 어짜피 죽어지는  

A면에 수록된 아홉 작품들은 사실 그 어떤 공통성을 가지고 묶어내기는 힘들었다. 장르와 소재, 집필시기를 고려해보아도 그 체계의 비밀은 작가만이 아는 듯 느껴졌다. 하지만 그러한 랜덤의 규칙 속에서도 나는 주인공들이 끊임없이 나는 어디로 갈 것인지, 나의 생이 끝나는 지점은 어디인지 질문하던 목소리를 또렷이 기억한다.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근처>의 정호연이나 이제는 더는 살고 싶지 않다는 아버지의 <누런 강 배 한 척>은 바짝 다가온 죽음의 그림자를 실체로 감지하는 주인공들의 일기를 들쳐보는 듯 했다. <굿바이, 제플린>은 어린시절 풍선과도 같은 동심의 꿈이 사라지는 듯한 동화적 판타지가 죽어진 비행선과는 별개로 반갑기도 했다. 더 없이 깊이 깊이 들어가던 바닷속 심해 SF 소설 <깊>이나 냉동인간으로 분한 각하의 자부동이 서글프기만 하던 <굿모닝 존웨인> 역시 죽음을 수면아래에 놓느냐 얼음속에 넣느냐의 문제로 인식되었다. 인류 멸망을 하루 앞둔 어느 이웃남자들의 우스꽝스런 일상을 통해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엿보게한 <끝까지 이럴래?>는 하나의 꽁트로서 재미난 무대였다. 자전소설이라기 보다는 소설가로 살아가야 할 운명을 변명한 글로 느껴지던 <축구도 잘해요>는 죽거나 혹은 죽을 상황에서도 역시 문학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그 피할수 없음이 대단히 문학적으로 암시된 글이었다. SF장르라 하기엔 너무나 우주적(?)이었던 <크로만, 운>은 꼭 스티븐 호킹 박사를 위해 쓴 글이라는 주석이 덧붙여져야 할 작품으로 이해되었다. 이들 이야기의 밑바탕에 흐르던 시간과 장소엔 모두 '죽음'이라는 피할수 없는 공동구역이 있었다. 작가는 그래보았자 결국 어짜피 죽어지는 것이 인생이라 결론내리는 것으로, 나는 받아들였다.


나 많이 늙었지? ............................................................ 근처



 
진추하, Graduation Tears
(One summer Night, 1976) 

나는 이 작품을 『2009 현대문학상 수상 소설집』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 수상작은 하성란의 <알파의 시간>이었고 박민규의 <근처>는 후보작이었다. 즉, 수상의 근처에 있는 작품으로 만난 것이다. (뒤에 황순원 문학상을 수상하긴 했지만) 하지만 하성란 작가의 글이 다소 어려워 비교적 스토리가 분명했던 이 작품이 더 기억에 남았었다. 그런데 열 여덟편 중 왜 하필 이 작품이 첫 번째 수록되었는 지 책을 시작하기 전부터 궁금했다. side B에서도 비슷한 분위기의 <낮잠>이 첫 번째로 수록되었는데 이것은 확실한 의도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보통 단편을 모은 소설집에서 특정한 작품이 표제작이 되는 것을 고려하면 콕 찍어주는 표제작이 없는 더블의 경우 작품의 전반적 분위기는 독자가 알아서 '느껴야만' 하는 과제이기도 했다. 그런데 확실히 <근처>는 다음에 전개되는 실험적인 소설들을 상쇄시키는 일등공신이었다. 그것은 side B에서의 <낮잠>에서도 동일했다. 첫정이 무섭다고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질문의 여운은 다음에 등장하는 온갖 다양한 설정-만화나 SF적 기법, 무협지, 고전작품 패러디등-에 대한 마음을 열게 하는 혹은 그러한 시도 자체를 편견없이 더 확장하여 보게하는 의도적 배치가 아니었을까. 나는 원래 이런 소설도 쓸 줄 아는 사람이다, 라는. 그러니 어느 한 방향으로 나를 규정짓지 말라, 하는.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로 더블에서 <근처>를 표제작으로 인식하는 독자들이 많은 듯하다. 이 작품이 미국에선 꽤 진지했던 한 코미디언에 헌사하는 글이라는 아주 개인적인 배경이 의아할 정도로. 이야기 속에는 암으로 요절한 코미디언처럼 어느날 갑자기 간암말기 선언을 받은 마흔의 독신남이 고향에 돌아와 '이제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인지 스스로 질문하며 답을 찾는 과정이 그려진다. 인간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 것인지에 대한 독백과 대화는 이후 작품에서도 계속하여 등장하기에 일종의 작가의 운율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야기가 늘어날수록 인간은 결국 영원히 그 어디를 알 수 없는 채로 죽음을 기다리고 견디는 존재일뿐이라는 것을 알게 될 뿐이었다. 그런데 이토록 진지한 인간존재에 대한 성찰 앞에서 나는 허를 찔린 듯 멈칫거린 장면이 있었으니, 그것은 30년 만에 친구들과 학교운동장에 묻어둔 타임캡슐속의 주인공이자 여러 친구들의 로망이었던 순임의 한마디였다. 동창모임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목에서 순임이 건넨 '나 늙었지' 이 한마디에 나는 그만 눈물이 핑 돌았던 것이다. 사람이 얼마나 이기적인가 하면, 이렇듯 죽어가는 주인공이 옛동창의 의도된 친절앞에서 느끼는 자신보다 더한 연민에 공감하기 보다는 나 늙었냐고 물어보는 주변 여인의 서글픔에 더 목이 메이는 것이다. 그것은 독자인 나도 늙었다는 대답에 다름 아니었기에. 나는 독신남의 옛동창 순임을 위해 늘 졸업시즌이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진추하의 눈물을 들려드리고 싶다. 꽃다발과 앨범과 이런저런 선물포장을 건네받은 내 어깨위로 살짝 흩뿌리던 눈발이 바람처럼 스치운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았던 그때, 우리 근처엔 분명 미래가 놓여있었을 것, 이기에. 

이제 그만 건너고 싶다 ................................................... 누런 강 배 한 척
 

 


최병걸, 진정 난 몰랐었네 
(골든 힛트 선곡, 1980)

이 작품은 세상의 모든 아버지를 생각케 한다. 작가가 굳이 자신의 아버지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라 그를 위해 썼다고 밝히지 않았어도 평생을 열심히 일해 왔으나 늙고 돈없고 무력한 노인이 그 결과였다는 이야기는 언제나 내 아버지, 당신의 아버지와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는 이십구 년을 다닌 회사 근처에서 그 시절 유도에서 낙법을 가르쳐준 학교선배이자 직장상사와 재회한다. 하지만 십만불 실적을 올린 신화의 주인공이 자신에게 내민 것은 가시오가피 한 박스였고, 아버지는 분납 8회를 약속한다. 누가 인생의 낙법을 가르쳐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멍하니 슬펐던 건 아버지가 거두어야 할 치매걸린 아내가 아니었다. 교수가 되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던 딸의 전화도 아니었다. 프랜차이즈 분점에 망해버린 아들도 중국산 조기에 저녁상 생색을 내는 며느리도 아니었다. 더 이상 살고 싶지는 않은데 그래도 단 한번이라도 아내와 삶을 즐긴 후 아내와 함께 죽고 싶다는 그 부질없음, 절망속에서도 버리지 못한 한가닥의 뒤늦음이었다. 제일 의미심장했던 건 아무래도 작정하고 결행한 호텔방에 잘못 들어온 '벌'이라는 마사지사가 아니었을까. 인생을 모르기에 아니 모르는 사람이 되었기에 그 마사지로 아직은 기쁠 수 있는 아내를 보는 것이 아버지에겐 '벌'과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그 순간 창밖에 펼쳐지는 결혼식 광경을 바라보던 아버지에게 나는 내 아버지가 자주 부르시던 故 최병걸의 '진정 난 몰랐었네'를 들려드리고 싶었다. 발길을 돌리려고 바람 부는 대로 걸어도 돌아서질 않는 것은 미련인가 아쉬움인가...울 아버지는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는 김소월의 '산유화'보단 이 노래가 생각나셨을 것이, 틀림없기에. 아버지...어디로 가셨나요...

실은 나 꿈이 큰 사람이야 ................................................ 굿바이, 제플린



 

Led Zeppelin, Babe I’m gonna leave you (1969)

이 작품은 읽는 내내 애가 탔던 이야기이다.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비행선을 좇아가는 마음이 마치 연을 좇아가는 어린아이의 순심처럼 소중하고 아름다워 동화처럼 느껴지다가도 현실에서 비행선을 추적하는 서사의 추진력은 아우디의 사륜구동 콰트로를 연상케 했다. 나는 이상하게도 이 작품에서는 로커의 창법이나 기타리스트의 환상적인 연주가 생각나기도 했는데 작가는 독일의 비행선 발명가를 위해 썼다고 했지만 내게 이 작품은 당연 레드 제플린을 떠올리는 이야기였다. 레드 제플린은 1969년 출범한 독일의 비행선 이름을 따온 그룹이며, 이야기 속 비행선도 하필 제플린이었기 때문일까. 나는 워낙 범생이(?) 였기 때문에 작가가 좋아했다는 레드 제플린과 롤링 스톤즈의 음악을 즐겨듣는 쪽은 아니었다. 하지만 'Stairway to heaven(1971)'이나 요즘 예능에서 맹활약중인 김태원이 자주 언급하는 ‘Babe I’m gonna leave you’정도는 익숙하게 들어왔다. 한여름에도 고무옷을 입고 허벅지에 땀띠를 견뎌가며 이벤트 회사의 알바를 뛰는 동민이 미려의 하룻밤 배신을 알고 밤을 세워 들어야 할 곡은 꼭 레드 제플린 이었을 것이다.

제플린이라는 십오미터의 비행선이 사냥꾼의 총성에 추락해버려도 우연히 동승한 양로원의 할머니가 사라져 버려도 딸기우유 같이 달콤한 꿈은 아직 버려야 할 때는 아닌 것이다. 양로원의 한무더기 노인들이 결국 먹고 싸고 자다보면 이르게 될 나의 모습일 지라도 우린 또 비행선을 띠우는 인간들인 것이다. 인간에게 비행선은 띠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그것이 떠 있는 시간의 여부는 비행선의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한나절 비행선의 추락을 애도하며 1937년 힌덴부르그 호 폭발을 모티브로 비행선 폭파장면이 앨범의 자켓이 된 레드제플린의 데뷔앨범(1969)을 동민에게 드리고 싶다. 어쩌겠나. 비행선은 죽었지만 우린 아직 이렇게 살아있지 않은가. 그래도 비행선이 죽은건 슬픈 이야기였다. 

어디에든, 가고 싶습니다 ................................................................
  

 

 

Pink Floyd, The Wall(1979) 

더블에서 가장 SF적이면서 동시에 생명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돋보이는 그야말로 복면화법의 이야기였다. 앞서 소개된 <근처>가 인간의 삶은 결국 자신의 근처를 맴돌다 마무리 되는 것이라 한다면 <누런 강 배 한 척>에서는 죽음이란 강 너머 저 편에 있지 않을까 했었지만 그래도 인간은 비행선이 추락하는 그 순간에도 <굿바이, 제플린>하며 하늘을 바라보는 존재로 이해되었다. 이렇듯 삶과 죽음이라는 시간적 명제가 그의 소설에선 다양한 공간으로 확장, 안착되어지는 것이라면 이제 깊고도 깊은 저 바닷속 어디에든, 가고싶은 것 또한 인간의 환타지일 것이라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던 작품이기도 했다. 제목조차 한없이 깊다는 의미의 암호로 보이는 <깊>에선 그렇게 끝없이 해저로 파고드는 다섯명의 디퍼가 등장한다. 백년 전에 지진이 났었고 지구전체가 하나의 연합국가로 되었고 큐브라는 해구연구소가 생겼고 코쿤이라는 가압장치에선 19251미터의 수압을 견디는 훈련을 하고 R-71이라는 대체체액 이야말로 유일한 생명수라는 조건을 확인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심해 해저 이만리의 SF버전의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를 떠올렸다. 하지만, 도대체 인간의 생각이란, 마음이란 어디에 있는 것인지 '나'라고 하는 전체는 생각없이 무엇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는지 하는 존재론적 질문들이 정처없이 바닷속을 유영할 때 부터, 나는 뜻밖에도 핑크 플로이드의 The wall의 뮤직비디오가 연상되기 시작했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벽돌처럼 똑같이 복제된 모습으로 생산되던 교복의 학생들...그것은 물고기 처럼 바닷속을 파고드는 똑같은 모습의 디퍼들과도 같았다. 물론, 나는 핑크 플로이드가 1979년 빌보드 정상의 자리를 차지했을 그때 그 음악을 듣지는 못했다. 아주 훗날 앨범이 영화화 되고도 한참 뒤 우리나라에서 검열이 풀린 뒤 직업적인 이유에서 돌리고 돌려보며 감탄을 마지 않았던 노래이자 영상으로 기억한다.

나는 <깊>이라는 작품에서 압력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결국은 인간의 의식과 마음을 빼앗는 직접적이고도 치명적인 장치가 될 것이라는 작가의 압력을 느끼었다. 인류에겐 끝없이 가야할 곳이 있고 그것이 인간의 역사이겠지만 결코 인간의 울음소릴 들을수 없는 압력의 세계는 아닐 것이라는 조용한 경고로도 들려왔다. 이 작품의 마지막엔 실험대상자가 자신의 죽음을 확인하는 장면에서 소름끼치게 꿈과같은 유언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죽었지만 그 순간 너와 나의 마음이 보이고 드디어 지구도 보인다는 목소리를 어찌 잊을 것인가. 심지어는 아이를 낳을 생각까지 하는 것에 가슴이 다 뭉클해 졌었다. 결국, 마음 하나 인 것이다. 이것은 그 어떠한 압력도 뚫을 수 없는 인간의 능력이자 유일한 희망일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어이없게도 전쟁과 폭력, 교육의 억압으로 인간성이 파괴되고 벽을 쌓아 스스로 고립되는 노랫속 하얀 벽돌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상상을 했다.  아마도 이 작품에서 압력을 견뎌야 했던 바닷속이 우리시절 강요되던 획일성과 권위주의, 이념의 강요등을 환기시켰던 탓일까. 더없이 <깊>어 져야 할 것은 수심(水深)이 아니라, 우리들 인심(人心)이 아닐까, 싶었던 그래서 더 마음 '깊'게 새겨진 이야기 였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 끝까지 이럴래?




The Nolans, I'm in the mood for Dancing
(Disco party classics, 1979)

나는 왜 그런지 이 작품이 그렇게 웃길 수가 없었다. 인류의 마지막 날에도 아파트 층간소음으로 자존심 싸움을 벗어날 수 없었던 인간들의 우매함이 조롱하기엔 너무나 딱해 보여 차라리 웃어 넘기고 싶었던 까닭이다. 모든 인간이 죽는 다는 것을 알지만 인간은 불행하게도 자신이 죽는 다는 것을 죽는 순간까지 믿지 못하는 존재인 것이다. 비행기가 추락해도 생존자는 존재하고 12방의 총알을 맞아도 살 사람은 살아나듯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혹시 누군가는 살아남는 것이 아닐까, 그 누군가가 나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니 이번에 큰맘먹고 층간소음의 문제를 따져보려 내려간 위층남자는 아래층 남자에게 식사는 하셨냐고 물어볼 수도 있는 문제인 것이다. 늙어진 배관공이며 가족과 헤어진 아래층 남자는 그동안 혼자서 휘파람을 불며 벽을 친구삼아 공놀이한 저간의 사정이야 감쪽같이 나몰라라 하며 예전엔 그래도 행복했다며, 아니 그것도 행복이라 생각하고 싶다고 창밖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왜! 창밖엔 간간이 폭음이 들려오지만 우린 그래도 열심히 살아왔고 최대한 옳은 길을 걸으려 했으니까. 끝까지 최선을 다한 인간들이었으니까.

나는 이들 두 사람이 서로 울컥하여 함께 울음을 터뜨리던 장면에서 빵터지고 말았다. 그래, 옛날의 행복은 오늘의 눈물이 될 만하지. 그렇담 혹시 시치미의 완결판 아래층 남자는 농구공놀이건 축구공놀이건 운동화를 신고선 바닥에 삑삑 소리를 내며 그 옛날 육체파 언니의 로망, 놀란즈의 디스코음악을 들었던 것은 아닐까. 머리에서 발끝까지 나를 따라해 보라는 그녀들의 노랫말에 맞춰 매일밤 무드에 흠뻑 빠져온 것은 아닐까. 하품이 나는 무료한 밤 시원스레 벽을 때렸을 때 묵직한 가죽공의 그 느낌을 아는 사람이었으니 분명 이 노래의 가벼운 흥겨움을 아는 사람임에 틀림없을 것이기에. 그것은 아는 사람만 아는 지금의 행복일 것이기에.

아니야, 그럴 리 없어 ......................... 양을 만든 그분께서 당신을 만드셨을까?





Bonny M, By the livers of Babylon(1978)

읽는 내내 어디서 한번은 만나본 이야기라는 기시감을 떨칠 수 없었던 이야기였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고'와 '도'는 그리고와 그래도의 애칭이자 준말쯤이라 생각하며 나는 결말을 기다렸다. 아뿔싸, 아트북을 넘기며 이 작품이 베게트에게 선사하는 글이라 했을 때 나는 그제서야 <고도를 기다리며>의 '고'와 '도'이었음을 깨닫고만 무심함이란. 12미터 높이의 망루위에서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가 아무리 원대하고 거창해봤자 네댓 평 크기의 오두막을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갑갑함이 서사의 핵심인 참으로 무책임하고도 무정한 이야기 였던 것이다.

도가 애기하면 고가 말하고 고가 말하면 도가 끄덕이는 대화의 핵심은 우리는 왜 이 짓을 하는지, 아니 왜 이 짓을 멈출 수 없는 지에 대한 끝없는 회의일 것이다. 마치 자주하는 질문과 대답을 유형별로 정리해놓은 FAQ처럼 그들의 질문과 대답은 공식처럼 건조하고 반복의 패턴을 이루고 있다. 놈들이 누군지 이유가 뭔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견딜 수 없는 것. 자신이 언제부터 이곳으로 왔고 자신이 행하는 모든 것이 무엇 때문에 반복되어야 하는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채로 그저 그 세계에 몸담을수록 앞으로 빠져나갈 수는 없다는 사실만 깨달아지는 잔인한 현실은 우리 사는 이곳의 어떤 단면과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는 고와 도가 저지르는 가장 기본적인 자신의 배설물들이 그것들의 냄새가 유엔사무국의 빌딩같은 느낌으로 우뚝버티고 있다고 말한다. 국제평화와 안전을 위해 운영되는 유엔이지만 개인의 위기와 안녕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같은 이야기라는 뼈있는 농담이었을까. 거대 자본주의와 기계화에 종속된 인간 개체성의 나약함은 박민규와 똥과 좆물보다 더 정확하고 불쾌할순 없을 듯 하다. 하지만 그 지겹고 견딜 수 없는 세계를 탈출하는 방법이 그저 똥과 좆물 생산을 중단하는 일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한 마리의 양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검고, 느릿하고, 꿈틀거리던 그것의 실체가 양인 것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늑대의 탈을 쓴 양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과 마찬가지로 양의 탈을 쓴 늑대에게도 손을 내밀지 말아야 하는 것이 이 시대 우리가 처한 이토록 쓸쓸한 외로운 섬, 고도孤島에서 살아가야 할 지혜가 아닐런지. 바빌론의 포로생활에서도 끝내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고도孤島의 시간을 견뎌내며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리라 믿었던 그들을 기리는 노래, 보니엠의 바빌론의 강가에서를 '고'와 '도'에게 들려드리고 싶다. 양을 만든 그분이 당신을 만드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분이 양을 만드신 게 맞다면 우린 양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는 것이 아닐까.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건 우리가 만든 두려움일 테니까. 

이번엔 우리 차례인가 ..................................................... 굿모닝, 존웨인
 

 

 


Olivia Newton John, Physical(1981) 

이 소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서부영화의 대표적 영화배우 존 웨인이라는 실존 인물을 극중에서 브랜드화 한다는 점에서 이장욱의 <변희봉>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동시대가 아닌 시점이 훨씬 지난 미래 어느 공간에 존 웨인은 금속의 명칭이거나 그것에 붙은 라벨로 상징화 된다. 여기서 천년을 이끌 냉동인간으로서 사후신탁의 시초가 되는 시점이 1979년인 것을 보면 존 웨인과 같은 해에 죽은 인물이면서 자부동을 심히 사랑할 것으로 추정되는 그분은 한명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자부동과 함께 냉동인간이 쥐고 있던 천조각에 그려진 십장생도도 의미심장했는데 이는 권력자가 꿈꾸는 영생을 상징하는 것 같아 이 소설은 가장 한국적 소재를 세계적인 SF장르로 표현해낸 새로운 실험이었다는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굿모닝, 존 웨인'은 '각하, 밤새 안녕하셨습니까'의 냉동버전쯤 되지 않을까. 그런데 어쩐지 그토록 바라던 영생의 세계에 냉동인간으로 다시 태어는 그들의 삶은 자부동 시절만큼 안락할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질병을 아무리 극복해도 새로운 바이러스는 다시 출현하며 결국엔 남은 생존자들마저 냉동인간을 식량으로 삼는다는 충격적인 세계는 희고 깨끗한 '눈의 여왕'의 천국이 아닌 피마저 하얗게 얼려지는 얼음같이 차디찬 세계였을 뿐인 것이다. 나는 고기를 썰며 이제는 내 차례인가 의심하는 집행자의 대사에서 언어도 통일되고 민족이라는 개념도 사라진 유토피아적 이상세계에서 조차 육질에 쾌감을 느끼는 인간의 욕심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소름끼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더블에서 이 이야기가 가장 육체적으로 들려왔으며 자부동을 찾는 각하의 특별지시가 선사하는 블랙유머가 금박이 수 놓여진 푹신한 질감을 연상케 하며 어이없게도 올리비아 뉴튼존의 피지컬이라는 그 시절 대박의 노래가 흥얼거려졌다. '냄비위에 파리똥'이라고 한참을 따라 불렀던 그 후렴구는 박정희 사후 군사정권으로 신군부를 수립한 전두환 시절 컬러시대와 함께 불어 닥친 팝송의 새바람이었다. 그 시절엔 보통 한 노래가 히트하면 10주는 불러줘야 그래도 인정하는 분위기였는데 피지컬 역시 헬스장에서 야릇한 포즈로 뭇 남성들을 설레게 하던 대표적인 디스코음악이었다. 당시엔 꽤 선정적이었던 음악이었지만 지금 들으면 꽤 컨트리한 이 노래를 자부동을 찾던 각하의 좋은 아침을 기도하며 '눈의 여왕'로비에 빵빵하게 틀어주고 싶은 바이다.  

정말 재능이 있나요? ....................................................... 축구도 잘해요




유재하, 사랑하기 때문에(1987)

문학이란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쓰지 않고, 매리 크리스마스라고 쓰는 일'이라는 故김현의 강의 내용이 곧 작가가 문학하는 변명이자 방식을 대변하는 인터뷰로 들려왔던 작품이다. 특별한 의미는 없지만 특별히 자전소설이라 밝혔기에 나는 그렇게 받아 들였다. 메리와 매리간의 반집싸움이야 말로 작가가 죽는 날까지 피할 수 없는 숙명의 전쟁일 것이라는 자기선언으로도 들렸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절대 똥을 대변이라고는 쓰지 않는 고집으로도 들렸고 문장안에서 대화체와 문어체의 구분을 하지 않는 것이 낯설지 몰라도 내식 이다라는 말로도 읽혀졌다. 행간의 흐름이나 문장부호의 사용역시 그것을 표현하는 나만의 호흡이니 숨쉬는 것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는 방어로도 느껴졌다. 세상에 문학 아닌 것들은 지천에 널렸는데 어디서 그것들 몇 개를 주어와 문학안에 포함시키고자 한 것을 굳이 사건이나 변화라 말할 것 까지는 없지 않느냐는 담담한 목소리 같기도 했다. 실은 꼭 그렇게 구분짓고 틀에 박힌 잣대에 의해 새로움을 발굴하자는 의도 때문에 역으로 운좋게 얻어 걸린 작품들도 있지 않느냐는 겸손으로도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문학을 한다하면 자신이어야 한다고 믿었을 뿐이라는 그의 이야기가 나는 왜 이렇게 슬프던지.

관철동의 한 점집에서 처녀보살인지가 아무리 전생이 마릴린 먼로라 했다 손 치더라도 한국에서 다시 태어나 열여섯 되던 해 외계인에게 납치되었다 하더라도 목성과 화성의 중간쯤에서 김현과 바둑을 두고 있는 전남편 아서 밀러를 만났다 해도 그는 문학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었다. 지구에 도착한 뒤 김현에게 눈도장을 찍은 아들 태권소년의 사실은 축구도 잘한단다는 그 한마디에 그는 총을 조준하며 "다시 한번 문학은 누가 하실 겁니까?"하고 묻는 군인의 질문에 그만 손을 들 수밖에 없을 팔자라는 것이 나는 결국, 저릿해지고 말았다. 얼마나 무책임한 문학인가. 얼마나 대책없는 시작인가. 나는 그가 손을 들고말 때 내 평생 처음으로 내 돈 주고 사본 LP판의 첫사랑, 유재하의 한 노래가 떠올랐다. 그것은 그의 유작앨범이 되었다. 마치 첫사랑의 대상이 불의의 교통사고라도 난 것처럼 나는 그 이후 LP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LP의 요절은 꼭 사장시킨 내 꿈의 운명과도 비슷했다. 떠난 그대를 잊지 못하는 내가 미웠지만 다시 돌아온 그댈 위해 내 모든 것을 드리겠다는 가사는 거짓말처럼 지금 뒤늦게 꿈을 더듬어보는 내 모습과 닮아있다. 모든 것의 의미부여는 이토록 이기적이고 억지스럽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 억지마저 자전소설이 되는 가슴뭉클함을 전해준다. 유재하의 노래는 그가 아닌 나를 위해 다시 듣고 싶은 노래이기에 다시 묻은 꿈을 꺼내보는 내게 들려주는 노래이기에 슬며시 눈을 감아본다.

우주를 만들 수 있는 건 가요? ............................................... 크로만, 운





Leif Garrett, I was made for dancing(1979)

스티븐 호킹을 위해 썼다는 이 작품이 나는 더블에서 가장 어렵게 다가왔다. 언젠가 나 자신의 우주를 만들 거라는 소녀의 속삭임을 감안해서라도 가장 우주적으로 다가왔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렴풋이 황순원의 소나기의 우주버전쯤으로 느껴졌으니, 말이다. 시공을 알 수 없는 우주 이야기 속에서도 여실히 존재하는 신분의 차이와 노동의 비루함을 차라리 낭만을 가장한 비극쯤으로 포장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 작품은 서문에서 밝힌 ‘나는 흡수한다. 분열하고, 번식한다. 그리고 언젠가 하나의 채널이 될 것이다.’ 라는 자기 설명의 본질에 매우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류는 과학을 흡수하여 곤충의 그것을 모방한 생식체계를 통해 인류의 자궁을 창안해 내고 그곳에서 잉태된 대량의 생명체는 인간이라기 보다는 노동의 자원으로서 살아간다. 이 모든 것을 설계한 네드는 빛의 사용법을 터득해 개인의 우주를 만들어 내고 세인트 홀이라는 전체주의 시스템을 뿌리 내린다. 여기서 네드의 노예격인 융 신분의 소년과 소녀가 크로만과 운이라는 설정과 이들이 네드처럼 자신만의 우주를 창조하는 것이 소원이 되는 현실은 우주가 이미 우주인 시대를 넘어선 모순과 부조리를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융인 신분으로서 비천함을 벗어날 수 없었던 크로만과 운이 자신들의 생명을 걸고 잉태해 내는 눈부신 빛이야말로 이들이 원하는 우주가 아닌지 작가는 두사람이 볼 수는 없지만 여기에도 거기에도 있는 빛을 보았다는 두사람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나 이야긴 여기서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지구에서는 가족을 잃고 경마와 도박으로 시간을 보내는 어느 파산자앞으로 부쳐진 내역서가 크로만과 운으로 등장한다. 파산자에게 모든 걸 처분해 얻어낸 우주야 말로 크로만과 운이 보았던 그 빛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득, 작가에게 우주는 무엇일까 궁금했다. 흡수하고 분열하고 번식하는 것은 흡사 모든 생물의 정충의 운명과도 닮지 않았을 지. 새로운 생명(창작)을 잉태해내는 작가가 끊임없이 하나의 채널이 되기까지 그리고 그 채널을 통해 이렇듯 작품을 수용하는 이 신비스런 문학의 정경이야 말로 그에겐 우주에 다름 아닐 것이다.

나 어렸을 때 땅따먹기를 한 후 주고받던 꽃미남 아이돌 스타가 있었다. 나는 그의 우주여행이 늘 이 노래처럼 신나길 아니 조금이라도 즐거워 지길 바란다. 밤새도록 춤을 추기위해 태어났다는 열여덟 살 미소년의 노래를 그는 기억할까. 문득, 내가 만들고 싶은 우주, 나를 쳐다보고 있을 우주가 미치도록 그리워진다. 
 

side B .... 그렇다고 죽을 수는 없는 

엄밀히 말하면 그렇다고 희망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내가 그렇게 느낄 뿐이었는지 모른다. B면에서 느낀 여러 감정들은 말 그대로 여러 가지 였지만 굳이 하나로 말해보라 한다면 나는 그럼에도 불구한 위로라 말하고 싶다. 삶은, 인생은, 누구에게나 그 종착지가 죽음이고 다같이 죽어가는 현실이지만 그렇다고 죽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당뇨와 심장병에 요실금의 처량한 늙은이지만 요양원에서 그 옛날 고향 첫사랑과 재회하지 않았는가. 나른한 어느 오후 그녀의 무릎을 베고 낮잠을 청한다면 그것은 내일 죽더라도 오늘 행복한 우리 일 것이다. 입장만 바꾸면 <루디> 속의 금융회사 부사장이 그가 내친 고용원도 되는 법. 손바닥 뒤집듯 우린 언제나 피해자도 가해자도 될 수 있다는 공평함이 일방적인 비극보다 낫지 않은가. 영웅의 시대는 가고 소녀의 시대가 도래했지만 뒤집어 보면 장풍과 검법의 무림고수도 영원할 수 없다는 이치 아니겠는가. 용도 네 개가 모이면 수다스러운 서민이 된다지 않는가.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바닷가에서 접하는 네 명의 <비치보이스>는 그래도 철이 들날이 있지 않겠는가. 63빌딩위에 <아스피린>이 출현한들 갑자기 어제까지 마시던 커피를 끊을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라는 어느 계약직 아저씨의 은밀한 고백은 그래도 귀엽지 않은가. 그들의 밥상에 차려지는 오메가 3가 혹시 딜도를 대신할지 모를일 아닌가. 마음이 별처럼 곱디곱던 우리의 대리기사는 한번 품었던 그때 그 <별>을 그 자리에 놓아두지 않았던가. 비록 죽는다고 말하는 것으로 살아보고자 한 젊은이지만 <아치>에서 만난 김순경 같은 아저씨가 손을 잡아주지 않았던가. 무릎이 꺽인 원시인도 처자식을 먹여 살리겠다고 목숨 줄을 놓지 않는 것이 모든 <슬(膝)>下에 새끼를 둔 부모의 심정이 아니겠는가. 그들은 모두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는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알지만 안다고 죽을수는 없는 것이 그들과 우리의 인생 아니었을지


같이, 산보라도 가실래요? ........................................................ 낮잠
 

 

 
윤연선, 얼굴
(매혹의 노래모음, 1975)

side B의 시작은 역시 어머니였다. 작가는 오래전에 치매에 걸린 어머니가 현재 요양원에 계시며 그로인한 그리움과 미안함 때문에 휠체어에 앉아서 집필을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 글을 읽고 나 역시 조용히 어둠속에서 눈물 지었다. 작가는 비록 기억을 잃어버렸지만 젊은 날 어머니의 소중한 추억만은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기록화 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살아가는 일이 곧 생명의 시간이 줄어드는 일이긴 하지만 인간의 기억마저 기억속의 사랑과 추억마저 양적으로 줄어든다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처사이며 그 주인공이 어머니라는 사실은 그 어머니 속을 뚫고 세상에 나온 자식으로선 마치 자신의 출생지나 생일이 없어지는 듯한 기분이 아닐까. 작가의 사무치는 개인사 때문인지 서사를 이끌어 가는 화자는 side A에 등장한 바 있는 <누런 강 배 한 척>의 아버지와 동일인물로 느껴진다.

그래도 지방 언론사 출신이었던 주인공은 아내가 죽자 요양원으로 입소해 죽음을 기다리는 것으로 生의 의미를 붙들고 있는 경우였다. 마지막에는 고향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노인은 꼭 마지막까지 고향에서 살고 싶다는 말로 들렸다. 요양원에서 조우한 그 시절의 동창들은 그나마 외로움을 덜수 있는 존재였던 것. 지나간 세월은 모두 아름다운 것이니까. 그런데 거기서 만난 첫사랑이 바로 치매의 주인공, 어쩌면 작가의 어머니일 지 몰랐다. 노인은 한시절 자신의 여신이었으며 연인이었고 친구이자 어머니였던 그녀를 보며 김상희의 '코스모스'와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과 윤연선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것 모두 같이 산보를 가고보니 나뭇잎을 밟아보니 겹쳐지는 지나간 그리움인 것이다. 급기야 요양비를 체납한 그녀가 안스러워 혼인신고를 통해 친권자가 될 것을 자청해 나서는 그는 얼마나 낭만적인 로맨티스트였던가. 하지만 혼인신고를 마치고 근사하게 외식을 하고 그 옛날 강당앞 벤치에 다다르자 현실은 너무 우스꽝스러워 차마 웃을 수 없는 눈물을 자아낸다. 왜 작가는 그 순간에 소변을 지리고 똥을 싸고 마는 그들을 生의 절정으로 묘사하는 것인지, 알면서도 그것이 원망스러웠다.

인생이 잠시 왔다가는 소풍이라는 천상병 시인이 생각나는 작품이었다. 한나절 낮잠이 들면 꼭 흘러나올 것만 같은 노래 윤연선의 얼굴은 그래서 더 먹먹하다.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그 얼굴이 생각나 잠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은 음악이다. 작가의 어머니에게도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이, 분명 있었기를. 그녀의 얼굴을 따라 하얗게 피어나던 구름속에 나비처럼 날아가던 누군가를 위해 이 노래를 불러본다.

왜 일을 어렵게 만들지? ............................................................ 루디




Culture club, Karma Chameleon
(Colour By Numbers, 1983)

나는 이 작품을 『현장비평가가 뽑은 2010 올해의 좋은 소설』(현대문학)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때 '영원이 우리는 함께'라는 소름끼치는 결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나는 그때 이토록 잔혹한 로드 무비의 결말에 절대 동의하고 싶지 않았던 듯 하다. 어느날 갑자기 알래스카 팍스하이웨이 길 바닥에서 만난 루디가 대체 누구인지 궁금하기 보단 루디에게 당한 대책없는 폭력에 더 마음의 상처를 입었던 까닭일 것이다. 그런데 이번 아트북에서 이 소설은 오바마 이후 나타날 미합중국의 대통령을 위해 쓰여졌다고 하니 그제서야 끄덕여지는 이 안심의 출처는 어디일까. 혹시 폭력의 방향이 우리는 아니지 싶은 일말의 안도감이나 미국보다 약소국인 약자적 입장에서의 마땅한 심사일까.

이 소설에 표면적인 피해자로 등장하는 '나'는 예일대 출신 뉴욕의 어느 금융회사의 부사장인데다가 세금과 기부를 일상화한 꽤 의식있는 지식인이다. 그런데 그 역시 총소리에 오줌을 지르고 총잡이의 똥을 싸라는 명령에 굉장한 양의 그것을 쏟아내는 기본적 생리현상에 충실한 인간이었음을 우리는 확인하고 싶지가 않다. 지금까지 모피반대 캠페인을 지지한답시고 경제인 연합에 낸 기부금을 생각해서라도 이런식의 무식한 폭력은 가당치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입장을 바꾸어서 그가 말 한마디로 직원을 해고한 덕에 내 가족은 길거리로 내몰리고 그 이후 인생은 추락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면 그런데도 그 인간은 자신의 명예와 체면을 위해 동물을 위한 거금의 기부만은 멈추지 않는다면.

가능한 이야기였다. 거대자본과 무기, 권력, 정보를 앞세운 미국의 패권주의를 향한 시원한 한방이었다. 우리는 영원한 러닝 메이트, 즉 정신적 폭력과 외상적 폭력을 양면으로 하는 그들은 결국 같은 편의 폭력서클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서 나와 루디의 관계가 룸에이트가 아닌 러닝메이트 인 것은 혹시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부통령 후보자를 은연중에 암시하기 위한 것일까. 하지만 결국 나는 내안에 존재하는 두 가지 폭력이 짝을 이룬 경주마처럼 달려가는 장면을 떠올리며 반사적으로 한 노래가 생각났다. 여장남자의 분장으로 더욱 유명했던 보이조지가 비웃는 듯한 미소로 노래하던 카멜레온의 추억. 카멜레온처럼 자신을 속여가며 사랑해온 상대를 조롱하는 이 노래는 마치 이제는 먹고 살만한 자본주의의 성공국가가 되어버린 우리나라를 꼬집는 듯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나'이면서 '루디'이고도 한 나같은 한국인들에게 이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 중독성 강한 후렴구에 잠시 자신을 숨기고 싶지 않을 자가 누구란 말인가.  

이 나라는 어떻게 되는 건가? ...................................................... 𪚥





Duran Duran, A view to a kill(1985)

이 작품은 무림의 고수들이 화려한 장풍과 눈부신 검법으로 마법을 펼치는 무협지를 박민규식으로 리메이크한 작품이었다. 용 용(龍)자 4개를 모아서 제목이 된 한자는 "말 많을 절" 의 절이라고 한다. 실제 획수가 64획이나 되며 "획수가 가장 많은 한자"로도 알려져 있다. 이 한자의 뜻을 몰랐던 무식의 소치로 나는 네 명의 용(대권천왕, 청룡검제, 운무천마, 정천대법)이 한데 무리를 이룬 모습이겠지, 싶었는데 용도 많아지면 수다를 떨 수 있다는 사실에 흠칫했었다. 이 소설의 마지막이 결국 무림의 영웅들이 쓸쓸히 퇴장하는 시대라 보았을 때 용을 이루는 한자의 획은 이들의 칼 한 획 한 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세상은 법이 정의를 대신하고 금전이 힘을 대신하니 용을 믿는 세계도 용이 필요한 세계도 아니었다는 작가의 말은 이 한자의 뜻을 잘 가르쳐 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신비한 용이 네명이나 모였는데도 이제는 칼의 한 획 한 획이 쓸모가 없어 그저 수다나 떨고 있는 형국에 다름 아니라는 작금의 시대는 더 이상 영웅이 아닌 소녀들의 시대였던 것이다. 아, 이토록 짜릿한 농담의 수사가 참 오랜만이다. 한자로 보여주는 기호학의 재치가 돋보였던 이 작품에서 나는 정작 소녀시대의 노래는 생각나지 않고 왜 007 영화의 주제곡이 떠올랐을까.

지금으로 치면 씨엔블루쯤(아무리 생각해도 대적할만한 그룹이 없기는 하다만) 되려나. 우리시절 듀란 듀란이 들고 나온 007 주제곡 'A view to a kill'이야말로 한 시절을 풍미한 007 시리즈의 마지막 연가가 아니던가. 이 영화는 제임스 본드역의 로저 무어의 마지막 출연작이었다. 한 때 천하를 양분한 네 마리의 용이 자신들의 처지를 표상하던 미꾸라지 추어탕을 먹지 못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세상은 변했고 시대는 바뀌었다. 대의와 명분이, 도와 예가 사라진 물질만능의 시대에 나는 소녀시대를 듣지 않고 한물간 007 주제가를 그리워한다. 무협지를 좋아라 하시던 어머니도 생각나던 작품이었다. 작가는 한국인이라는 직업을 가진 모두에게 주는 글이라 했지만 나는 자본주의에 물든 이 세계의 시민됨을 반성하기 보다 영웅에 환호하던 그 시절이 자꾸, 그립기만 하다.  

넌 어쩔건데 ..................................................................... 비치보이스

 

 


The Beach Boys, Kokomo
(영화 칵테일 OST, 1988)

이 작품은 더블에서 가장 가볍게 미소지으며 넘길 수 있었던 이야기였다. 초, 중, 고는 물론이요 여섯 개 학원의 동창생인 네 명의 친구들이 입대를 앞두고 떠난 좌충우돌 바다 여행기가 서사의 핵심이라 할 것이다. 동반입대를 앞두었다는 다소 코미디적 상황의 설정은 물론 모두 22평 친구들로서 엄마들의 과보호 속에서 학교생활을 해온 이들의 청춘은 그야말로 철없기 그지 없었다. 친구들이 안하는 건 안하고 친구들이 하는 건 하는 줏대없는 캐릭터들이 행동과 생각에 큰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지도자나 온화한 조정자, 혹은 남다른 몽상가, 꼼꼼한 노력가로 구분하는 시츄에이션이야 말로 고급의 유머라 느껴졌다. 제일 끄덕였던건 친절한 도우미 격의 엄마들이긴 했지만.

이들은 TV에서 지진과 테러, 전쟁과 폭동으로 어지러운 세계정세를 보고서도 편의점이 파괴되는 것이 제일 두렵고 해파리가 나타난 위급상황에서는 전혀 기본적인 대처를 할 수 없는 한무리일 뿐이었다. 작품 마지막에 정말로 전쟁이 발발해 사람들이 바다를 빠져나가는 상황에서 이들 네명이 주고받는 대화는 어쩌면 우리의 현재이거나 가까운 미래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어쩔거냐고 묻는 서로에게 서로는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늘 자신들 스스로의 생각이 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이는 우리가 아는 어떤 사람들과 참 많이도 비슷하다는 생각이다. 이제 학부모가 된 내 입장에선 저런 식으로 사육되는 획일식 교육시스템을 맹렬히 비난하던 주인공에서 어느덧 똑같은 방법으로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지독한 방식으로 우리 아이들을 붕어빵 찍기 하고 있는 헬리콥터맘이 되가고 것은 아닐까. 비리와 비굴에 도가튼 교사로부터 철저하게 위선을 학습해온 덕에 이 들 네 명은 바닷가에서 비치(beach)보이스가 아니라 비굴하고 치사한 비치(卑恥)보이스가 되고 만 것은 아닐까. 이들 네 명이 가야 할 바닷가는 서핑으로 미국 전체를 돈다는 비치보이스의 Surfin' U.S.A가 아니라 플로리다 해변에서 좀 떨어져 있다는 자메이카 해변의 코코모가 아닐까 싶은데 말이다. 나는 바닷가에서 까지 고민을 떠안기 싫은 마음으로 오랜만에 코코모를 들으며 그 옛날 바닷가에서 나는 무엇을 비치備置하였는지 새삼 머리를 굴려 보는 중, 이시다.

도대체,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 아스피린





Wham, Wake me up before you go go (1984)

인류가 발명한 최고의 약이 UFO가 되어 하늘에 나타났지만 어제마신 커피를 오늘도 변함없이 마신다는 이야기는 side A의 <끝까지 이럴래?>와 그 분위기가 비슷했다. 주 배경은 미국에 본사를 둔 외국계열의 광고회사로서 요실금 팬티의 런칭을 앞두고 피티 준비에 여념이 없는 직장인들의 심리상태가 꼭 불감증 걸린 사람들처럼 반복되는 이야기였다.

사람들은 상공에 '아스피린'이라는 물체가 나타난 것을 보고 듣고도 지식인답게 점심을 먹고 회의를 하며 맥주를 마신다. 여기서 인상깊었던 단어는 아스피린 보다는 '붐'이었는데 맨 처음 아스피린이 등장할 때 화자는 순간 귀가 멍할 정도의 '붐'을 느꼈다고 했으며 동료중 하나는 TV에 등장한 아스피린을 보고 저러다 '붐'하고 광선을 쏘는 게 아니냐며 걱정을 한다. 아스피린을 구경하러 나온 광장의 인파는 거대한 '붐'에 휩싸인 것이다. 작가는 해열진통제의 대명사 아스피린이 결국 어떤 사회에서 특정한 현상이 갑작스레 유행하거나 번성하는 '대성황', 혹은 '대유행'으로서의 '붐'이 된 것은 아닌지 일갈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지식인스러운 세련됨으로 자연스레 일상에 적응하려하고 오히려 무기력한 일상에 의욕을 느끼기 까지 한다. 무언가 하늘로부터 지배를 받는다는 느낌쯤이야 대응할 수 없을 때 발휘되는 적응기제로 치환하며 변함없이 도시를 살아가기로 동의한 것일까.

사람들의 암묵적 합의가 무섭다는 생각을 이 작품을 통해 깨닫게 된 아스피린 이었다. 아무리 큰 아스피린도 하늘을 가릴 순 없다는 뜻으로도 들려왔다. 무엇이 나타났느냐 보다는 어떻게 적응 할 것이냐가 더 중요한 오늘의 도시, 빌딩위 하늘을 올려다 보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하늘을 향해 치솟은 빌딩 속에서 사람들은 일시적인 '붐'에 휩쓸린 채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리 나쁘지는 않은 사람들 속에서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는 환경속에서 우린 어쩌면 나쁘지만은 않은 제품들을 소비하며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오늘도 변함없는 출근길에 나서던 그 아침, 떠나기 전에 나를 깨워달라는 그 시절 알람과도 같던 도시남자들의 노래가 퍼뜩 떠오른다. 비록 아스피린이 하늘 한 구석을 차지해 무슨일을 벌일지 모르지만 나는 습관처럼 커피를 마시고 약속된 회의를 준비 할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는 일, 자, 일이나 하자.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걸까 ...................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




Cyndi Lauper, Girls Just Want To Have Fun
(She's So Unusual, 1983)

나는 이 작품을 『2010 이상문학상 작품집』에서 먼저 접했다. <아침의 문>이라는 수상작과 함께 작가가 자선 대표작으로 수록한 글이었다. <아침의 문>이 워낙 충격적인지라 이 작품은 다소 유머러스한 이야기로 받아들였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다시만난 딜도는 굉장히 슬픈 이야기였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딜도로 가정을 지켜낸 가장은 한때 잘나갔으나 현재 계약직의 자동차 영업부장인 존 굿맨을 닮은 오십대 아버지이다. 실적이 없어 아들이 알바비로 받은 돈을 담뱃값으로 꾸고는 찜질방을 찾아든 그는 우연찮게 옛 영업동료를 만나 서로 딱해진 신세를 그저 체념으로 위로한다. 그런데 이야기의 반전은 그러니까, 화성에 있었다.

사소한 말다툼으로 집안을 풍지박산 내고 발견한 아내의 딜도에 낙심한 아버지는 화성에 가보라는 친구의 덕담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화성괴물과도 같은 그 동네 사모님의 동굴속으로 자진해 들어가 자동차로서 딜도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덕분에 계약서를 세장이나 챙긴 아버지 입장에선 딜도가 가정을 지킨 자위시스템으로서 충분한 역할을 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지구인의 럭셔리 세단이 거구의 화성사모님의 자위용으로 딜도로서 작동되던 테스트 드라이브 장면은 압권이었다. 작가는 그렇게 해서라도 오메가 3가 들어간 식단을 먹을 수 있다면 괜찮은 가장이 아니겠는가, 하고 질문한다. 아내의 욕망을 채워주진 못해도 비슷한 욕망을 가진 고객으로서의 여성을 만족시켜주면 보상이 따른다는 소비와 구매의 현실이 참 역겹고도 슬퍼지던 이야기였다.

80년대 마돈나와 여성 솔로 팝송 시장을 양분하던 신디 로퍼의 돈냄새 물씬 풍기는 노래가 생각났다. 소녀들은 단지 재미를 위해 즐거움을 원할 뿐이라는 이 노래는 지금 생각해보니 자본주의의 속성과 본질에 길들여진 우리 세대들의 물질주의 숭배가였던 것 같다. 물론, 그때는 몰랐지만 그걸 듣고 성장해온 우리들이 원하는 건 결국 무엇이든 자신을 위로하는 대상으로서의 물질적 자위시스템은 아닐까. 문득 자신들만의 딜도를 하나씩 감쳐놓은 외로운 중년이, 나도 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부장님만큼이나 서글퍼지던 시간이었다.   

넌 왜 이러고 사냐 .........................................................................






혜은이, 당신만을 사랑해(1978)

순진한 청년을 미모로 유혹해 하루아침에 신용불량자를 만들어 버린 옛애인과 기가막힌 조우를 하게 된 어느 대리운전기사의 낭만 복수극의 이야기. 이 작품 역시 <고도를 기다리며>의 패러디 소설 <양을 만든 그분께서 당신을 만드셨을까?>처럼 알퐁스 도데의 <별>을 다시 해체 조립한 실험적 작품이었다.

열심히 카드를 돌려 막아가며 적금도 깨어가며 몸과 마음을 바쳐 사랑한 여자는 잔인하게도 전화한통으로 결혼을 통보한 후 얼마나 잘먹고 잘 살았을까. 옛애인의 대리운전기사로 나타난 청년은 그시절 연인을 태우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곳으로 내달리기 시작한다.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느냐고 따귀를 몇 대 때려주어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하필 걸려오던 의문의 남자로부터 청년은 여자 역시 현재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는 정보를 얻고 넌 왜 이러고 사냐고 몰래 눈물 훔친다. 청년은 매일 밤 하늘을 바라보며 높은 곳에서 빛나던 나만의 별을 가슴에 되새기며 사랑을 품어온 순수를 아직 버리지 않은 자신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한다. 한번 새겨진 별은 그로써 영원한 별이었던 것. 나는 청년이 결국 그녀의 집 근처에서 밤은 깊어 머리위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이지만 그녀에게 어깨를 내어주는 '인간'이 되어주는 장면에서 그만 마음이 싸해졌던 것 같다. 청년을 위해 내가 대중가요를 알고 나서 처음으로 따라 부른 혜은이의 당신만을 사랑해를 들려주고 싶었다. 어쩌면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고이 사랑을 간직해온 모든 바보같은 인간들, 당신만을 사랑한 그 인간들을 위한 곡인지도 모르겠다. 울며 울며 날으는 갈매기여 내마음을 수평선 아득한 곳에 계시는 내님에게 말해줘요...혜은이도 그땐 나의 별이었다.


나보고 어떻게 살라는 거야 .......................................................... 아치

 

 

Queem, Bohemian Rhapsody
(A Night at the Opera, 1975) 
 

이 작품을 읽고는 소리내어 울었더랬다. 무에 그리 서러웠던지 마치 내가 그 아치에 올라가 사람들을 향해 소리라도 치고 온 사람처럼 울먹해지던 이야기였다. 먼저, 이 작품과 너무나 잘 어울리던 노래를 들으면서 눈물을 닦았기에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를 언급하고자 한다. 살인을 저지른 사형수가 어머니에게 죽고 싶지 않다고 절규하는 충격적인 가사의 이 노래는 우리시절 소녀적 막연한 슬픔을 절정으로 치닫게 하는 파워를 지닌 곡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프레디 머큐리의 라이브 무대는 마치 자신의 죽음을 앞둔 사람이 온몸으로 자신을 불사르는 에너지를 내뿜던 치명적인 무대였다. 나는 솔직히 이 노래가 어떤 자살충동을 유발한다고 까지 생각이 들 정도로 마력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자살을 하고자 결심한 청년이 아치에 올라가 눈물로 절규할 때 이 노래 말고 다른 노래는 생각나지 않았다.

살아야 할 이유를 찾기 위해 아치를 올라가는 사람이나 어떻게든 아치에 올라간 사람들을 다시 끌어 내리는 김순경이나 그 순간 춥고 무섭고 배고픈건 마찬가지인 것이 인생인데 죽으려고 들어간 강물이 너무 차가와 다시 나왔다는 어떤 고백도 생각이 났다. 살다보면 누구나 이럴 수 있다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왜 그렇게 서럽던지, 나는 한때 죽는 것이 답이 될 수도 있겠다는 내 인생의 어느 시기와 장소가 생각이 나 나도 모르게 눈물을 닦아 내었던 것 같다. 나도 알고 보면 당신보다 더할 것도 없는 같은 종류의 인간이라는 김순경의 넋두리가 기실 레파토리가 정해진 업무로서의 입에 발린 말이었지만 또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이 없어 사실이기도 한 김순경의 서러움이 많이도 허전하고 쓸쓸했음이다.

나는 감히 말한다. 자살은 결코 용기있는 자들이 선택하는 삶의 최선이 아니요 대안이나 차선도 아니요 어느 한순간의 실수로 나타나는 결과일 뿐이라고. 그래, 그래도 살아야지 하는 말은 아마도 우리 모두에게 해주는 이 세상 모든 순경의 목소리 일 것이다. 오늘 보헤미안 랩소디를 들으며 그래도 살아야지 하는 누군가를 기다려본다. 어쩌면 내 스스로 울려오는 그 한마디에 나는 또 이렇게 홀로이 랩소디를 읊어본다.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살길은 어디인가 ......................................................................... 슬膝




조동진, 행복한 사람(1979)

이 작품이 더블의 마지막 수록작이라 그런지 나는 마지막 이야기를 결코 절망적으로 보지 않았다. 아니, 무엇보다 희망적이었고 그래서 벅차게 책을 덮을 수 있었던 이야기 였다. 나는 건축, 전시업계에서 기획자로 오랜기간 종사해왔다. 작가가 미국의 건축가 벅민스터 풀러 박사에게 이 글을 헌사한다는 의미를 왜 모르겠는가. 그는 이 작품속의 우처럼 처자식을 버리고 자살하기 직전에 전광석화처럼 마음이 바뀌어 그후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많은 발명의 업적을 이루어 낸 인물이었다. 그가 설계한 박람회 건축물은 우리업계의 교과서였었고 조명시스템에 까지 그의 이름을 딴 버키볼은 하나의 볼거리로서 상징조형물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곤 했다. 이런 그의 인생史를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무릎이 꺽인 우의 이야기는 그래도 살아가야 하는 우리네 인생에 경건한 지침이 되어 주었다.

이 작품은 BC 17000년, 돌을 갈아 칼을 만드는 원시인 부부의 생존기를 담고있다.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을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약육강식의 적자생존 시대에 우는 동물의 배설물을 맛보아 가며 상대와 싸워 이길 생각을 하는 영리한 인간으로 그려진다. 이 작품에서 인상깊었던 장면은 그렇게 좇아간 늙은 코끼리가 결정적인 위험에 빠진 우를 보고선 그냥 물러서는 순간이었다. 문명이 시작되지 않은 원시시대에도 생명을 존중하는 예를 인간이 아닌 동물로부터 배운 것이다. 또 하나 틈에 빠진 자신의 다리를 잘라 내면서까지 살고자 몸부림 치던 우가 어떤 돌칼로도 짐승의 뼈를 자를 순 없다는 깨달음은 그래서 죽을 수 밖에 없다가 아닌 그럼에도 살고 싶다는깊은 울음으로 다가왔다. 우는 다시 아내와 자식이 살아있기를 바라면서 마지막 살점을 주워 담고 앞으로 비록 사냥을 다시 할 수 없을지 몰라도 삶을 포기해선 안된다는 주문을 중얼 거릴 것이다.

그 순간 우는 우의 삶이기도 했지만 아내와 자식의 삶이기도 했다. 우리는 이렇게 나의 삶만이 아닌 누군가의 삶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그것은 어쩌면 행복한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의 가족에게 내가 많이도 좋아했던 조동진의 행복한 사람을 들려 드리고 싶었다. 울고 있지만 아직도 남은 별 찾을 수 있는 두 눈이 있고 바람결 느낄 수 있는 그 마음 있으니 당신은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아름다운 노래를 말이다. 우리 모두가 각자 외롭지만 서로의 삶이 되는 서로는 누구보다 행복하지 않은가. 이 노래를 슬하에 자녀가 있는 모든 어버이와 같이 듣고 싶었다. 어느 절망적인 겨울날 사람과 거리가 두려워 희망을 잃은 누군가의 어미나 아비 역시 우처럼 가족을 위해 눈길을 헤치고 있을지 모를 일이기에. 
 

삶과 더브러 죽음도

가만 보니 작가가 들려준 열 여덟 개의 트랙은 모두 외로운 사람들을 위해 작곡된 노래에 다름 아니었다. 그들을 위해 작가는 사는 건 죽어가는 일이라고 하지만 죽는 것 또한 삶의 일부라 노래했다. 이렇게 지난 세월동안 쌓아둔 이야기를 푸짐한 보따리로 꾸렸으니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그의 대답이 비로소 이해가 된다. 언젠가 “송구스럽지만 난 요즘 언젠가 찾아올 내 인생의 마지막 날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최대한 열심히 쓰겠다”고 말한 그는 이제 어디로 떠날 것인가. 다음엔 어떻게 살 것인가. 이것이 현실인지 환상인지 물어보던 보헤미안 랩소디의 노랫말이 생각난다. 비록 괴물같은 삶을 살았지만 다시 살고싶다는 절규를 기억한다. 작가는 마치 프레디 머큐리처엄 현실과 환상이 서로 등돌린 배신의 관계가 아니라 영원히 함께 가는 동행의 동반자라 외치는 듯하다. 삶과 죽음 역시 정 반대에서도 조용히 같이 걸어가고 있었다고,  

다만 그것은 그리 유별난 일은 아닌 것이라 적어놓은 것이었다.

그 덕분에 나도 LP시절 내 추억의 사진첩을 잘 정리할 수 있었다. 그 시절이 그립기야 매 한가지 아닐까. 지금에야 하는 말이지만 박민규는 딱 내 2년 선배이다. 미팅이나 소개팅에서 자주 부딪히던 학번이다. 나는 여대를 나와 남자선배가 전무했지만 공학을 다니는 친구들은 선배들을 '형'이라 불렀다. 나는 그 호칭이 '오빠'보다 미치도록 근사하고 부러웠다. 비록 조용필과 이용에겐 오빠라고 외쳤지만 학교에선 여성성을 배제한 형이라는 호칭을 마지막으로 불러본 세대란 말이다. 그래서 난 박민규가 내 시절 그 '형'이길 바란다. 학회나 술자리에서 그를 만났다면 나는 분명 형, 산다는 건 무어냐고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냐 물었을 게 확실하다. 그럼 그는 무어라 답했을까. 나중에 내 소설을 읽어봐, 이렇게 말했을까. 단편을 쓰는 일이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일이라는 그에게 나도 이 리뷰를 선물하고 싶다. 물론 그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겠지만 어쩌겠나, 그도 알퐁스 도데가 자신의 선물을 알아주길 바라진 않았을 것 아닌가.

여지껏 작가의 외모와 스타일이 그의 작품을 읽고 리뷰하는 데 미친 영향을 떠올려보면 박민규의 고글과 복면마스크는 이제 그를 대변해주는 가장 상징적인 트레이드 마크로서 자리매김 하는 듯하다. 점점 그의 작품을 받아 들이는데 있어 시각적 기호를 배제하기 힘들어지며 드디어 작품의 패키지로서도 그 메시지를 이렇게 간곡하게 전달하고 있는 모습으로 느껴진다. 처음엔 작품외적인 작가의 외양적 이미지가 자유롭지 못한 제한적 요소라고 까지 여겼었는데 이제는 필수적인 포인트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작품이었다. 그의 계획적인 시도앞에 박수를 보낸다.

'인간은 태어나려 태어난 것이 아니고 죽으려도 죽기 힘들므로 사는 동안 살아가야'하는 존재임을 조용히 깨우친다. 올 한해 너무 힘겨웠다. 죽고 싶을 만큼인 적도 없지 않았다. 어느 가을날 커튼뒤에 몸을 숨긴 내 육신이 저 베란다 아래로 안착한들 큰 상관이 없으리라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 순간 사람이 죽는 것은 한순간 이구나, 싶었다. 그때 내 눈에 띄인건 2층 데크에 놓여진 흔들리는 그네였고 내 아이만한 딸래미가 혼자서 외롭게 그네를 타고 있었다. 눈물이 핑돌았다. 그래, 너도 외롭지. 그 앞에 떨어지면 그 아이의 동심 한 자락을 죽여버리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걸어가야 한다.
삶과 더브러 죽음도 다같이.
내가 별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이, 오늘 참
고맙다.  

당신 역시 마찬가지일 것임을 기대한다. 그것은 언제나 죽지 못한 내가 당신에게 할수 있는 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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