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피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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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게도 이 소설을 덮었을 때, 여름은 끝나 있었다.

어느 여름이 덥지 않았을까마는 이번 여름은 특히, 최고, 최악이라 할 만 했다. 이상하게도 인간은 고통이 극심할 때는 어떻게든 그 상황을 견디다가 조금 나아질 때야 아파하기 시작한다. 여름을 잘 견뎌놓고 이제 더위가 물러간다하니 내 몸과 마음 구석구석 왜 이렇게 아우성일까. 지긋지긋하면서도 그 치열했던 모든 것들을 보내기가 쉽지 않다. 소설도 마찬가지. 책을 덮으면 좀 시원하고 후련할 줄 알았는데 여름 내내 그 북적거렸던 바닷가에 거짓말처럼 손님들이 다 빠져나간 느낌이랄까. 문득 독자도 이렇게 빠져나오기 힘든데 그 출렁거리던 바달 써댄 작가는 어떨까 싶어 새삼 뭉클하기도 했다.

희수의 예언대로 ‘뜨거운 여름이 끝나면 바다로 몰려온 그 많은 사람들은 떠날 것’이고 ‘1993년 봄과 여름, 구암의 날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 서서히 잊혀질 것이고 희수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겐 ‘어느새 춥고 외롭고 쓸쓸한 겨울 바다’가 펼쳐질 것이 틀림없다.

이 소설은 ‘봄’과 ‘여름’의 두 챕터로 작가의 말 포함 595페이지 인 채 끝이 난다. 분량의 압박이 만만치 않다. 하지만 쉽게 멈출 수 없는 가독성이 하루키도 따라올 수 없는 경지이며 내용자체가 다음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라 맘 만 먹으면 빨리 덮을 수도 있는 경우였다. 그런데 쉽게 쉽게 페이지를 넘기지는 못했다. 쉽게 어이없게 죽어나가는 건달이라고 그 인생은 쉬웠을까 싶어 후반부로 갈수록 괴롭고 슬프고 답답하고 힘들었다. 이 소설에서 건달의 죽음은 빈번하고도 일상적이다. 건달이 죽는 이유는 죽어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인데 모든 건달은 자기 이외의 건달을 죽임으로써 자기 삶을 유지한다. 즉 누구도 건달이라면 내 목숨 하나가 다른 건달의 죽음 하나인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지금 살아있다는 건 곧 나중에 죽는다는 뜻과도 같다.

사실 배경이 조폭의 세계라고는 하지만 이 법칙은 요즘 같은 경쟁사회에서 세상 어디에도 적용되는 보이지 않는 룰이 된지 오래다. 내가 대학을 합격하는 건 다른 누군가의 불합격을 의미하고 승진이나 승패, 성과를 내는 모든 일이 그러하다. 누군가를 배려하고 경쟁자에게 호의를 베풀며 살기에 우리네 인생은 팍팍하고 벅찬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또 하나 피 튀기는 전쟁에서 살아남는 과정 자체는 무척이나 구질구질하고 신파스럽다. 소설 속에서 작가는 주인공 희수의 시선으로 독자에게 늘 사업도 인생도 구질구질한 것이며, 사람도 다 거기서 거기며, 깨끗하기만 한 놈도 더럽기만 한 년도 없다고 부르짖는다. 누군가에겐 잔인한 가해자였을지라도 오늘 내게 꼭 필요한 조력자가 될 수 있다. 저 사람이 내게 나쁜 지만이 중요하지 원래 나쁜 사람이었다는 건 하나도 중요하지가 않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우린 누군가에게 가해자가 되어도 예전처럼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살아간다. 한마디로 구질구질해 보이기 싫어서다. 그러니까 삶은, 한 계단 올라가는 그 과정은 원래부터 구질구질한 것이었다는 걸 우리 모두는 안다.

“이 바다가 뭣이 좋습니까. 소매치기에, 사기꾼에, 포주에, 창녀에, 양아치들이며, 만날 싸우고 지지고 볶고, 기껏 화해시키려고 자리마련하면 이야기 쪼매하다가 결국 욕하고, 술판 뒤집고, 소주병 날아다니고, 대가리 깨지고, 울고, 그래놓고도 또 술 처마시면 서로 껴안으면서 사랑한다, 우리가 남이가 이 지랄이나 하고 자빠지고, 영감님 저는 마 요즘엔 신파가 딱 싫습니다.”   -414p

 

한때는 아버지나 엄마, 다른 누구처럼 절대 살지 않을 거라고, 절대 질척거리지 않고 깔끔하고 쿨 하게 살 거라고 다짐한 적이 있다. 살면서 아니 살수록 어쩌면 살아 있기에 막장따위, 눈물바람의 신파 따위 피할 방법은 없다는 걸 그땐 알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사랑을 건넬 방법’이나 나 또한 ‘상처를 받지 않고 사랑을 받을 방법’따위 하나도 없다는 걸 이토록 많은 상처를 주고 받은 후에야 깨달았다.

 

소설은 우리 모두 각자 자기 인생의 구질구질함을 펼쳐 보이는 구암과도 같은 바다를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때론 파도가 때론 태풍이, 그러다가 가끔 평화도 찾아드는 저 질척한 바다를 절대 떠날 수는 없을 것이라 예언한다. 쿨한 듯 보이는 저 바다 앞에서 심장이 뛰고 있는 한 이토록 뜨거운 피를 작동시키지 않을 방법 또한 알 수는 없다고 몰아친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는 정답을 깨닫고 살아가는 당신 역시 좋은 사람으로만 살수는 없다는 걸 어쩌면 처음부터 좋은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걸 슬며시 알려준다. 누군가에게 적당히 좋다가도 가끔은 나쁘고, 욕심 없는 척해 봤지만 돌아와 가질 수 없는 것들에 얼마나 좌절을 했었는지 저 바다는 이미 알고 있다고 끄덕인다. 당신의 편의와 행복을 위해 사라져야 할 무엇들을 위해 얼마나 기도했는지 실은 누구보다 눈물짓고 연연해하며 원망으로 보낸 세월이 많았는지 모두모두 이해한다고 토닥인다.

 

이 모든 적나라한 신파를 뒤로한 채 이제야 어른이 된 듯 수줍게 고개를 들고 나온 사람은 누구인가. 희수는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쿨 하지 못할 작가의 분신이면서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이름이 없고 희수, 인숙, 아미 정도만 실명이 언급된다.(그의 소설에선 여간해서 사람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영감이나 노인, 소녀 같은 연령대를 호칭하는 경운 양반이다. 주로 인물의 외모와 성격, 매력, 하는 일, 그로인한 종합적 평가를 통합하여 아주 심플한 한단어로 표기할 뿐이다.(꿈이  벤츠 옆자리에  가스나 태우고 멋지게 해변을 달리는 거라는 마나는 뭐든 하나마나해서 '마나'다) 그래서 등장인물이 많아도 이미 부여된 캐릭터를 따라 장수를 넘기는 일은 무척 신이 난다. 그러면서 독자인 나 역시 (이름없는)그들의 삶에 더욱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실명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존재감이 무겁고 상대적으로 친근감이 덜하기 때문에 아이러니 하게도 객관적인 거리가 생긴다. 현실이 아닌 소설 속 인물로서만 공감을 하고 싶다는 바램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그 바램은 책을 덮으면서 여지없이 무너지고 결국 희수는 ‘뜨거운 피’를 지혜롭게 운영하는 방법을 알지 못해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그리하여 아무리 차가운 어른으로 살아가려 발버둥쳐도 신파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고만고만한 우리네 삶을 대표하는 존재로 각인된다.

 

삶은 절대 멋있거나 근사한 것이 아니고, 뜨거움을 모두 놓아버리고서 작동하는 삶은 없으며, 지금 여름의 바다를 건너 왔을지라도 다시 춥고 외로운 겨울 바다는 돌아올 것이 분명하다고. 이 모든 걸 함께 할 수는 없을지라도 다행히 누구나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다는 깨달음은 지금 함께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소설은 완성도에 다다른다. 하얀등대와 빨간등대에 가보진 못했지만 둘다 가본 듯한 만족을 준다.

 

어쩌면 이토록 구질구질한 삶일지라도 이순간 함께 살아있다는 것이 喜壽, 우리들 기쁨의 목숨, 그 목숨들의 이야기는 아닐런지 작가에게 조용히 고개 들어 여쭙고 싶다. 삶이 구질구질할 지라도 이토록 구구절절 이야기를 펼쳐낸 당신의 '뜨거운 피' 만큼은 누구보다 멋지고 아름다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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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05 14: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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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06 13: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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