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원을 구경하다

 

 

 

   슬슬 방학이 끝나가고 있다. 드디어 아이와 엄마간의 희비가 교차하는 시점이다. 이번 방학은 지난 겨울 보다 덜 추워 한층 더 나들이 계획이 많았을 듯 하다. (돈도 더 들었을 것이다 ㅠ) 보통 설 연휴가 봄방학시즌인데 이번엔 1월달 이어서 그런지 설 지나고 나니 벌써 개학준비로 마음이 바빠졌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느끼는 것인데 웬만한 전시는 거의 초등학교 저학년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아이가 고학년이 되면서는 체험이니 과학관이니 하는 관람을 유치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특히 방학용 특별 전시로 이름 지어진 각종 전시체험 행사는 사람만 많고 수준은 형편없어 돈만 아까운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는 나름 주제를 세워 국립과천 과학관에서 하는 '신비의 파라오 투탕카멘전(展)'과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스키타이 황금문명전’을 보고 왔다. 날은 추웠지만 사람들은 여전했다. 집에 돌아와 이것저것 정리를 하려는데 눈이 오고 있었다.

 

 

 

 

 

- < 신비오 파라오 투탕가멘 전 >, 국립 과천 과학관 (2012. 1.31)

 

 

 

   투탕카멘전에 전시된 유물은 대부분 대영박물관이나 이집트 박물관의 유물들을 복제한 모형들이다. 영국이나 이집트까지 가기는 어려우므로 대여했다고 치고(?) 구경하면 된다.  9시30분부터 입장하기 때문에 일찍 가는 것이 좋다. 한 겨울이지만 유치원생부터 어르신들까지 관광버스 대절팀이 많아 보였고 사람이 많아도 무덤에 관한 전시라 그런 것인지 여느 전시장보다 시끄럽진 않았다. (그래도 최근에 본 전시 중에서 볼꺼리는 많았다)

 

   나는 거기서 단체로 관람 오신 할아버지들을 볼 수 있었다. 어르신들은 관광버스를 대절해 방문하신 듯했고 무슨 여행상품의 한 코스처럼 그렇게 구경하는 느낌이었다. 이제 나는 아이가 커 사람이 많아도 잃어버릴 걱정을 안 하게 되었고 머리가 커 내가 좋다고 이거 봐라 하며 손을 이끌지 않아도 되었다. 각자 자유롭게 관람을 하던 중 나는 단체 관람객 중 할아버지 한 분이 어느 패널 앞에서 꼼짝을 않고 서 계시는 모습을 보았다. 한 쪽 벽면에 일렬로 전시된 액자는 장례절차에 관한 시리즈 벽화 그림이었는데 할아버지는 열 몇 개 그림 중 거의 마지막 단계인 지옥부분에서 그림을 응시하고 계셨다. 관람을 너머 사색이었고 명상이었다. 미이라의 부검과정이나 복원 모습 등에만 관심이 많은 아이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구석진 벽면의 전시물이었고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무슨 내용인지 알 수도 없는 혹시 이해한다고 하여도 다른 중요전시물들에 비해 존재감이 없어 보인 그림들이었다. 뭐랄까, 할아버지는 마치 바짝 다가온 자신의 죽음을 미리 시뮬레이션 해보는 시간을 가지신 듯했다. 그림과 할아버지 사이 분명 무언가 지나가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지나온 생을 돌이켜보신 것일까 앞으로의 생을 상상해 보신 것일까.


 

 

 

 

- < 스키타이 황금문명전 >, 예술의 전당 (2012. 1.27)

 

 

 

   스키타이 황금문명전은 지난 주말에 다녀왔는데 이도 사람이 적지 않았다. 유물들은 모두 우크라이나 국립 중앙 박물관에 소장중인 것들로 이번엔 한국투어로 기획된 전시였다. 세계 최초의 유목민족의 유물이라는 점에서 또 세계 5대 문명의 예술성을 확인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두면 되겠다. 귀금속 같은 경우는 민속 공예품으로 팔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디자인이 정교해 놀랍기도 하였다. 전시 동선 상에 신라 금관이 전시되어 있는데 스키타이의 황금숭배 문화에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 은희경의 <소년을 위로해줘>에 등장하는 그리핀의 형상도 확인할 수 있다.

 

 

 

 

 

-  < 놀이의 순간 >, 예술의 전당 (2012. 1.27)

 

 

 

   한가람 미술관 1층에서 놀이의 순간이라는 기획전시를 하고 있다. 지하주차장과 연결된 홀에 미리보기 같은 무료전시를 하고 있는데 다양한 소재를 이용한 명화전시와 착시를 이용한 감상이 주 포인트이다. 그외 아트센터 곳곳에서 전시를 하고 있는데 어른까지 끼어들어 보고 오기가 참, 그랬다. 요즘 전시회 성인 관람료는 만 이천원이다. 입장료와 주차비에(각종 공공장소 주차비가 4천원이더군... 언제 오른 것이냐...) 점심에 간식거리 톨비, 혹은 주유비까지 합치면 역시 가장 싼 건 영화야, 이런 생각이 절로 든다...  뮤지엄샵에서 명화 다이어리 하나 사주고 돌아오는 길. 문화 혹은 예술적 심성은 철저히 돈으로 길러진다는 생각을 했다. 돈이 많으면 더 많이 예술을 생각할 기회에 노출된다.

 

 

 

#2. 영원을 견디다


 

 

   집에 돌아와 나는 이 책을 덮었다. 역사도 좋고 예술도 좋지만, 무언가 허전함을 채울 길은 이 방법 밖에 없었기로... 이 불후의 명작을 지금에서야 읽었노라 말하는 것이 새삼 창피하다. 어떤 유명한 명작은 그 이름만으로도 너무나 익숙하고 선명해 거의 읽었다고 믿게 되는 책들이 있다. <노인과 바다>는 내가 헤밍웨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이미 읽었다고 착각하게 되는 작품 중 하나였다.

 

   처음 몇 페이지는 같이 온 영문판과 대조해 보다가 얼마 안 되는 뒷장이 궁금해 그냥 달렸다. 마치 내가 망망대해에 청승맞게 떠있는 배에 홀로 앉아 노를 젓는 심정이었다. 역시 허전함은 허전함으로 막아야 한다. 노인은 최선을 다한 오늘 밤 사자 꿈을 꿀 것이고 허전한 나는 노인의 꿈을 꾸게 될까... 그렇다면 혹시 이렇게 말해주시진 않을까.

 

 

그러고 나서 돌아가 꿋꿋하게 도전하며 너답게 살아. 사람이든 새든 물고기든 모두 그렇듯이 말이다.    -p57

 

  

 

    그는 '인간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또 얼마나 견뎌낼 수 있는지 놈에게 보여주고 말겠'다고 했다. 하지만 내게는 노인의 모든 것이 인간이 할 수 없고 아무도 그를 견뎌낼 수 없는 순간을 보여주었다는 생각이었다. 그래도 노인처럼 되고 싶었다. 얄밉게도 나는 노인처럼 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고 싶었다. 나는 비겁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살면서 <노인과 바다>를 읽고 우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도 아직 노인은 아닐지 모른다. 어부 같은 일과는 상관없을지 모른다. 아마 전혀 낚시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일지 모른다. 그런데 그 사람은 다른 생각 없이 지금 하고 있는 일만 죽어라 생각하는 사람일지 모른다. 누군가를 간절히 이기고 싶은 사람인지 모른다. 혹 누구도 경쟁자가 없다하면 그토록 지겨운 자신을 넘어야 하는 사람인지 모른다. 아니면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처럼 막막한 무엇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일지 모른다. 그 사람은 자신의 뜨거운 심장과 지나온 시간과 흘려온 눈물을 믿었지만 더 이상 운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지 모른다. 어제와 똑같은 오늘이지만 그 다를 것 없는 오늘이 지나고 나면 어딘가에서 커다란 행운을 만날 것이라 믿었는지 모른다.

 

   아마 그 사람은 많은 도전을 했을 것이고 그만큼에 비례하는 실패를 했을지 모른다. 그러다가 속절없이 나이만 들었을지 모른다. 한 시절 젊음과 건강을 믿고 그것이 영원하리라 의심치 않았는지 모른다. 가끔 그 사람에게 찾아온 행운은 다른 누가 아닌 자신의 노력 때문이라 여겼는지 모른다. 자신의 재능은 비교적 세상에 써 먹을 만한 것이며 누군가는 꼭 그 재능을 알아 봐주리라 믿었는지 모른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아무도 이기지 못하고 무엇도 잡지 못한 오늘을 견디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노인과 대치하며 꿋꿋하게 바다를 나아갔던 그 물고기가 보고 싶었다. 물고기는 고통스러웠을지언정 외롭지 않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나처럼 울고 있을지 모를 그 사람이 보고 싶었다. 나처럼 똑같은 사투에 놓여있을 그가, 그의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놈이 선택한 것은 그 어떤 덫과 함정과 속임수도 미치지 못하는 먼 바다의 깜깜하고 깊은 물속에 머무르자는 것이었지. 그리고 내가 선택한 것은 그 누구도 미치지 못하는 그곳까지 가서 그놈을 찾아내는 것이었고. 그 누구도 미치지 못하는 그곳까지 가서 말이야. 이제 우린 서로 연결된 거야. 어제 정오부터, 게다가 우린 아무한테도 도움을 받을 수 없어.
-p 52


 

    노인은 자신이 죽여야 할 상대도 형제라 여겼다. 다만 서로 목숨을 건 채로 같은 고통을 견디고 있기 때문에 배에 묶여 '둘이 함께 나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노인은 어부이기 때문에 물고기를 죽인 것이지 결코 물고기로 다른 이득을 보자고 죽인 것이 아니라 말했다. 외려 '물고기가 살아 있을 때'도 '녀석을 사랑했고' 그리고 '죽은 뒤에도 사랑했'다고 말했다. 나는... 누군가 나의 적이 되어 목숨을 건 그가 나를 이렇게 생각해 줄 수 있다면 기꺼이 그 적의 손에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경쟁은 내 전부를 걸 수 있는 일생 일대 최고의 사건이고도 남을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노인도 보고 싶었다. 그가 살아온 바다가 그리웠다.


 

    오늘 내가 본 그림속의 사람은 영생을 꿈꾸기도 하고 초원을 누비기도 했다. 책에서의 사람은 바다에서 삶을 관조하기도 했다. 모두다 영원을 믿는 듯 했다. 정말 사람인 나는 이제 돌아와 내 한 몸 누울 수 있는 침대를 찾고 싶었다. 그들이 말하는 사람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지만 나인 사람은 얼마나 많이 지고 얼마나 많이 실패를 하였던가. 나아닌 그들 모두는 역사도 예술도 문학도 불멸이라는 희망을 꺼트리지 않은 채 아름답게 버티고 있는 존재들만 같다. 그 아름다움이 나에겐 왜 이렇게 서럽게 느껴지는 것일까. 하지만 오늘은 울어도 아픈 날은 아닐 듯 하다. 영원하다는 건, 아니 영원을 바란다는 건 언제나 고통스럽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간이기에 그 거짓말이 차라리 차갑게 나를 위로한다. 돌이켜 보면 아무도 나를 패배하게 한 것은 없었다. 그저... 여기까지 이렇게 살아 왔고 살아 가고 있을 뿐이다. 사는 건 이기고 지고와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에.

 

나는 줄을 정확하게 드리우지. 다만 더 이상 운이 없을 뿐이야. 하지만 누가 알아? 오늘이라도 운이 트일지? 매일 매일이 새로운 날인걸. 운이 있다면야 물론 더 좋겠지. 하지만 난 우선 정확하게 하겠어. 그래야 운이 찾아 왔을 때 그걸 놓치지 않으니까.    - p33

 

   운이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이 아니면 내일도 괜찮을 것 같다. 다만 운이 왔을때 그걸 놓치지 않기 위해 어제하던 걸 멈추진 않아야 겠다. 누가 알아? 내일이라도 운이 트일지, 하하. 매일매일 새로운 날인걸. 당신도 나도 그건 똑같은 일인걸...

 

 

 

 

 

 

 

덧붙임)

 

한달에 열개의 포스트가 넘어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세어보진 않았지만 폭풍독서를 한 것 같기도 하다..

무언가, 갈증이 분명하다.

 

참, 투탕카멘전은 PDF 파일로(약 40M) 괜찮은 학습자료가 있는데

초등용으로 좋을 듯하다.

(혼자 갖고 있기 아까워 댓글 주시면 메일로 전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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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31 22: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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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1 09: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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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1 10: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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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2 10: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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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2-02-01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33쪽의 문장이 유난히 새로워요. 분명 읽은 책인데 낯설고 새롭고.
정말 운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저 살아야하니까 사는 날들도 이제는 받아들인만 한 것 같아요. 애써 포유류의 숙명 따위를 언급하지 않고 말이죠.

한사람 2012-02-02 10:22   좋아요 0 | URL

예, 저는 유난히도 그 문장이 읽는 동안에도 계속 남더라구요.
노인이 계속해서 누구와 대화하듯이 바다에서 독백을 하잖아요.
흠칫흠칫 나한테 하는 말인가 싶기도 하구요.
나중에 읽어도 또 색다른 느낌일것 같아요.
그래서 '불후의 명작'인가봅니다^^

아이리시스 2012-02-01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이건 뭡니까! 이 대영박물관 같은 분위기는..( '')
그러고보니까 한사람님도 그렇게 쓰셨군요..(제대로 안 읽고 댓글 단다ㅜㅜ)

좋겠어요, 서울사람들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부산에서 뭘 해도 잘 안갑니다ㅋㅋㅋ)

한사람 2012-02-02 10:25   좋아요 0 | URL

한때는 의무적으로 다녔는데..
지금은 거의 아이숙제때문에 다닙니다.
좋아하는 전시는 성곡이나 가나아트에서 하는데
너무 멀어서... 괜히 혼자 청승 떨기 싫어서 안가게 되네요, 하하

그대신 부산은 언제든 휭하니 바다로 나갈수 있잖아요 !!!!
오늘 여긴 엄청 추워요, 부산은 아닐거잖아요 !!
ㅋㅋ

2012-02-02 06: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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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2 10: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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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2 14: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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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7 08: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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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2-02-06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과천 과학관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소라... 날이 가을일때 갔었는데 너무 좋았던 기억이 나는데 또 한 번 더가보고 싶네요. 밖에 김밥사들고 자리펴놓아도 좋은 장소같았는데...ㅎㅎ

한사람 2012-02-07 08:59   좋아요 0 | URL

가연님은 과학전공이니 애정이 남다르시군요 ㅋㅋ
저는 과천가는 길이 좋아요.
근처에 현대미술관 올라가는 길(미술관보다 길이, 하하) 사계절 아주 좋아요.
과학관, 박물관은 한번도 즐기면서 관람한적이 없었던거 같습니다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