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아 거울아 : 정시안 편
다드래기 지음 / 네오카툰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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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 책 팔러 갔다가 우연히 만난 책이다. 원래 다른 아랍권을 다룬 만화에 눈길이 더 갔지만 점심시간에 들른 것이라 오래 있을 수가 없어 고른 책이 바로 옆에 꽂혀 있던 다드래기 그룹의 <거울아 거울아>였다. 내가 아는 최근의 <거울아 거울아>는 포미닛의 노래 밖에 없는데, 표지를 들춰 보니 성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란다.

 

그래픽노블의 배경은 청암대 캠퍼스다. 요즘 캠퍼스 이슈는 무언지 모르겠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는 이 무렵이면 등투로 시작되어 5월이 참 뜨거웠었던 것 같은데 시절이 시절이다 보니 아마 요즘엔 그런 이슈들은 그들의 관심 밖이겠지. 만화의 주인공은 분명 정시안으로 보이는데, 읽어 보니 남자가 되고 싶은 여자 정시안 보다 여자가 되고 싶은 강호수 혹은 강석호가 실제 주인공처럼 보인다. 아마 최근 유행했던 만화원작 드라마의 스토리처럼 주인공 역전 현상이 대세가 된 걸까.

 

지난 8년간의 보수정권 아래 사회의 다양성은 철저히 무시되고 소통조차 불필요하다고 역설하는 소위 역주행의 시대에 사회적 편견에 맞서는 <거울아 거울아>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만화의 주인공들은 그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싶을 뿐인데, 그들에게 쏟아지는 편견의 세례는 가혹하고 그들을 옥죄는 사회적 제약과 벽은 높기만 하다. 성 소수자들에 대해 유연한 사고를 가진 서구사회에 비해 완고한 동양적 윤리질서와 규범으로 무장한 우리 사회는 여전히 변화의 조짐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예의 편견이 언제라도 그저 차가운 시선을 넘어 폭력의 형태로 진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종교재판이라는 폭력적 수단으로 사회적 약자를 억누른 중세의 종교적 광기조차 엿보이는 것 같다.

 

서구사회에서 진행된 꾸준한 성 소수자의 인권개선을 위한 사회적 비판과 노력을 상대적으로 조견하는 대신 현재의 조건만을 비교대상으로 삼은 건 만화의 전략적 착오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구성원의 성적 정체성에 대한 거부감이라는 설정 역시 너무 도식적인 게 아닌가 싶다. 동서양 어디고 가족내 구성원이 커밍아웃을 한다면 반발하지 않을까. 최근 읽은 앤 타일러의 <파란 실타래>에서도 말썽꾼 아들 데니의 느닷없는 게이 선언으로 집안이 뒤집히지 않았던가. 강호수/석호의 돈벌이 수단이 술집이라는 설정도 스테레오타입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 어쩌면 성 소수자에게 열린 취업문이 그만큼 협소하다는 사실의 방증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직 다른 시리즈들을 읽어 보지 못했지만 소셜 펀딩으로 시작된 다드래기 프로젝트의 순항을 빌어 본다. 나와 다른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는 단순한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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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3-08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도 포미닛을 아시다니! ^^

레삭매냐 2016-03-08 14:48   좋아요 0 | URL
하하 -
예전에 문학동네에서 강진답사 가서 뱃놀이할 적에
현아의 <버블 팝>을 배에 탔던 그 많은 사람들 중
에 저와 고딩 친구 한 명만 알던 일이 생각나네요.

한동안 아이돌 노래 즐겨 들었답니다.
 

 

 

 

어젯밤에 잠이 오지 않아 고생했다.

눈이 다 빡빡할 정도로 그렇게 잠이 오지 않더라. 낮에 실컷 자서 그런가.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인 느낌이랄까. 그런 적이 별로 없는데 참 살다 보니 별 일이 다 있구나. 어쩌면 자기 전에 읽은 존 반빌의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 때문일지도. 자꾸만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그런 문장들 탓을 해야 할까.

 

지난 주말에 시작만 하고 못 읽은 책들을 하나둘씩 끝냈다. 리뷰는 오늘 아침에 바지런히 쓰고 있는 중이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심연>은 지난 주말에 읽고 리뷰도 깔끔하게 끝냈다. 리뷰를 다 쓰고 나서 드는 생각이지만 항상 원래 책 읽을 적에 든 생각하고 리뷰는 다르다는 느낌이 든다. 원래 정리한 메모들을 보고 적고 그래야 하는데, 아무래도 시간에 쫓기다 보니 리뷰를 휘리릭 내갈기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아무래도 책읽고 나서 느낌에 대한 사유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어쩌겠나 그래. 리뷰는 내 책읽기의 기록일 뿐일 것을.

 

어쨌든 <심연>은 알랭 들롱 주연의 <태양은 가득히>의 결말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완전범죄를 꿈꾸지만 어디 세상에 완벽한 게 존재했던가. 사소한 부주의가 결국엔 파국을 낳게 마련이다. 어디가 비슷하다고 꼭 짚어서 말하기는 그렇지만 내 느낌은 그렇다. 좀 더 생각을 가다듬는 다면 유사한 점에 대해서도 적을 수 있겠지만 귀찮다.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고 싶다.

 

다음 타겟은 <연인들을 위한 외국어 사전>. 샤오루 궈라는 중국 출신 작가의 책인데 참 재밌게 읽었다. 이미 절판되고 구할 수도 없는 책이라 알라딘을 통해 샀다. 컨디션이 좀 그랬지만 어쩌겠나 그래. 새 책을 원하지만 절판된 책에게는 호사일 따름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예전 생각이 많이 났다. 버거킹에서 햄버거 주문을 제대로 못해 좌절하던 시절의 기억들, 미국 남친과 살던 아는 누나가 싸움 끝에 결국 남친 경찰을 불러 다툼이 끝났다는 일 등등... 세상살이는 그리고 이방인이 느끼는 감정은 어디서나 다름 없다는 동질감이 느껴지는 그런 책이었다. 미스 좡의 체험이 더 버라이어티하다는 점에서 나와 달랐지만. 재미만으로는 정말 최고였다고 말하고 싶다. 좀 더 거창하게 쓸 수도 있었겠지만 오버는 하지말자. <그란타>에서 추천한 작가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책들을 찾아 읽는 것도 재밌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첫 번째 그란타 취향저격이었다. 다음은 아마도 애덤 풀스?

 

앤 타일러의 <파란 실타래>는 드디어 다 읽었다. 1월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이제야 다 읽다니 나도 참 게으르구나 그래. 그동안 읽기 시작해서 마무리짓지 못한 책들이 너무 많아 걱정이다. 하나둘씩 다 읽어서 리뷰까지 쓰는 게 나의 목표다. 볼티모어 휘트생크 집안의 이야기가 <파란 실타래>의 핵심인데 어디는 재밌다가 또 어디는 그렇지 않고 그런 부분들에서 힘을 잃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뉴욕타임즈의 미치코 가쿠타니는 클리셰이라고 혹평을 했는데, 나야 뭐 앤 타일러의 책은 처음으로 읽어본 지라 그런 건 잘 모르겠다. 어쩌면 후발 주자로서의 여유라고나 해야 할까. 이 책은 내가 올해 들어 읽은 18번째 책으로 기록했다.

 

자 다음은 존 반빌의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다. 지난 늦여름 뒤늦은 제주 휴가 때 읽기 시작했는데 그동안 아예 다시 펴들 생각도 안하고 있다가 어제 다시 읽기 시작했다. 아일랜드 특유의 딱딱하고 뭐랄까 아무 맛 없는 음식을 꾸역꾸역 삼키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그렇게 읽다 보니 무언가 흐릿하게 보이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면서 점점 기분이 좋아진다. 사실 98쪽까지 읽었던 부분들이 기억이 나지 않아 위키피디아의 플롯 서머리와 다른 블로거들의 리뷰를 참조했다. 그리고 다양한 서평들을 보려고 일단 저장해 두었다. 그들의 것을 내 것으로 소화하는 과정은 독서와 또다른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절반 가량 읽었으니 이번주 안으로 다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어제 되새김질한 책에 대한 기억들이 휘발해 버리기 전에 리뷰도 조금 작성했다. 잊지 않기 위한 리뷰라... 어때 그럴 듯 하지 않은가. 왜 우리나라에서는 존 반빌이 그렇게 인기가 없는 걸까. <닥터 코페르니쿠스>도 그렇고 꼴랑 두 권 나온 책들이 모두 절판의 운명에 처해졌다. 신간인 <블루 기타>는 언제나 번역이 될지 기약이 없다. 원서로도 샀지만 언제나 그렇듯 번역에 비해 읽기가 더디다. 번역본이 나온다면 비교해 가면서 읽는 재미도 쏠쏠할 텐데.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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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3-08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 반빌이 작년 박경리문학상 후보 중 한 사람인데도 인지도가 안습이죠..

레삭매냐 2016-03-08 14:48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꼴랑 두 권 나온 책들 모두 절판되었다죠.
아마 다른 책들은 언감생김이겠죠?
 
파란 실타래
앤 타일러 지음, 공경희 옮김 / 인빅투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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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석 달 동안 잡고 있던 앤 타일러의 <파란 실타래>를 드디어 다 읽었다. 사실 지난달 독서 모임 책으로 내가 추천해 놓고, 독서모임에도 참가하지 못하고 책도 다 못 읽었다. 지난 주말에 당장 읽어야 하는 책들이 정리되자 바로 집어 들어서 남은 100쪽을 읽기 시작했다. 사실 처음 만나는 앤 타일러 작가의 책이었는데, <파란 실타래>는 앤 타일러의 스무번째 책이라고 한다. 필력이 대단하군. 이 책이 부커상 파이널 리스트에 오른 건 참고로 알아 두자.

 

소설의 구성은 기본적으로 간단한다. 미국 동부 볼티모어 햄든에 정착해서 삼대째 살고 있는 휘트생크 집안 이야기다. 불쑥 우리나라에서 한창 유행 중인 막장드라마가 생각이 났다. 가족이라는 사회의 기본단위를 배경으로 해서 이런저런 잡다한 요소들을 가미해서 자극적인 이야기로 시청자들의 눈길을 끄는 이야기에 비해 앤 타일러의 소설은 품격이 있다. 사실 어떤 점에서 본다면 막장드라마의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만. 소설의 시작은 아들 데니의 게이 선언으로 휘트생크 집안에 폭탄이 터지는 설정으로 시작된다. 나중에 알고 보니 별 일 아닌 헛소동이었지만, 독자는 이 집안의 문제아가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차린다. 뭐 보통 자식이 넷 정도면 되면 이 정도는 기본이 아닌가.

 

엄마 애비 ‘달턴’ 휘트생크는 사회복지사 출신으로 사회에서 소외된 불쌍한 이들이라면 두손 들고 식탁으로 초대하는 그런 사람이다. 아버지 레드는 대를 이어 건축업에 종사하는 고지식한 미국 아버지의 전형이라고 해야 할까. 데니의 첫 번째 누나 아만다는 변호사로 맹활약 중이고(그래 집안에 변호사 한 명쯤은 있어야지), 둘째 지니 누나도 사회에서 제몫을 하며 산다. 막내 스템은 탕자 데니와 대조되는 성격으로 언젠가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받을 것으로 인정되는 선량한 아들이다. 이런 세팅을 바탕으로 <파란 실타래>는 그야말로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엉킨 휘트생크 가족사를 상세하게 파헤치기 시작한다. 현실세계의 가족들에겐 머리 아픈 일이었겠지만 나같이 이런 드라마를 즐기는 독자에겐 즐거움일 따름이다.

 

자 어느 폭탄부터 살펴볼까. 우선 스템은 애비와 레드의 친자식이 아니다. 그럼에도 애비는 스템을 친자식 이상으로 보살폈다. 하지만 치매를 앓던 애비가 불의의 사고로 죽은 뒤에 사실의 전모를 알게 된 스템은 아버지 레드를 보살피기 위해 신앙심 넘치는 아내 노라와 자식들을 이끌고 햄든 저택으로 들어왔다가 충격을 받고 탕자 데니와 피튀기는 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싸움을 벌인 스템과 데니의 이야기는 그들의 할아버지 주니어와 리니 매의 사랑이야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앤 타일러 작가는 그런 자극적인 이야기들을 점층적 설정에 입안해서 후반에 배치한 것 같은데 절로 혀를 찰 정도의 막장드라마 같은 이야기들이 속출한다. 아 그리고 보니 레드의 누나 메릭 휘트생크도 신데렐라 스토리의 완성을 위해 친구의 애인을 빼앗아 결혼하지 않았던가.

 

<파란 실타래>는 책의 절반 이상을 현재의 이야기에 할애하고 있다. 그렇게 책의 절반 가량을 현재에 투자하고 나머지 부분을 과거의 플래시백에 골고루 분배한다. 우리가 사는 현재가 과거로부터 비롯된 게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라면 작가의 설정은 다분히 공정하다. 하지만 시대마다 휘트생크 가족이 겪는 문제는 다 다를 수밖에 없다. 현재의 데니가 말썽꾼이었다면 과거에는 메릭이라는 아가씨가 문제였다. 좀 더 상류계층으로 이동을 원하는 메릭은 정확한 판단을 바탕으로 최고의 인생투자를 결심한다. 그 결과 자신이 원하는 지위와 부를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세간의 비난과 호랑이 같이 꼬장꼬장한 시월드의 주인을 모셔야 하는 부담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주니어와 리니 매까지 올라가는 이야기는 문득 서부시대의 속도위반결혼(shotgun marriage)를 연상시킨다. 주니어와 기가 막힌 정분이 난 리니 매의 아버지와 형제들은 윈체스터 장총으로 주니어를 발가벗겨 집에서 내쫓는 위엄을 발휘했으니 말이다. 성인이 되어 볼티모어에 안착한 주니어를 찾아가 마침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룬 리니 매의 결기도 만만치 않다. 문득 <파란 실타래>를 영화로 만든다면 어떨까 싶었다. 휘트생크 집안의 구성원에 대한 캐스팅 상상만으로도 즐거울 지경이다.

 

사실 앤 타일러의 전작들을 읽어 보지 못해 그녀의 스타일이 어떤지 알 도리가 없다. 작가의 작품세계와 볼티모어 중산층 이상의 삶을 통해 엿볼 수 있는 미국인들의 라이프 스타일로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었지만, 뉴욕타임즈의 미치코 가쿠타니의 생각은 나와 좀 다른 것 같다. 어쩌면 앤 타일러의 작품세계는 내가 좋아했던 우디 앨런의 영화와 그 궤를 같이 한 게 아닐까. 굳이 앤 타일러를 위한 변론을 하자면 클리셰이 같은 반복에 대해서 반대하는 편이지만, 작가가 언제나 수작을 양산해낼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개인적으로 뭐 이 정도면 무난한 편이 아닌가 싶다. 일단 앤 타일러의 다른 작품을 읽어 보기 전까진 <파란 실타래>만으로는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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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들을 위한 외국어 사전
샤오루 궈 지음, 변용란 옮김 / 민음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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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달 들어 처음 읽은 책이다. 지난달에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세트를 사면서 같이 주문한 책인데, 한 번 잡으니 도대체 손을 놓을 수가 없더라. 이 책은 어느 블로그에서 본 영국의 문예지 <그란타>에서 기대되는 유망주 작가 중의 한 명이라는 글을 보고 읽게 됐다. 나온지 7년 밖에 안되었는데 이미 절판의 운명에 처해진 그런 비운의 책이다. 아니 이렇게 재밌는 책이 왜. 같이 <그란타>에서 추천한 작가로 애덤 풀스가 있는데 그 책은 아직 시중에서 구할 수가 있어 다행이다. 누군가 예전에 우리나라 책의 수명이 짧기 때문에 당장 읽지 않더라도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바로 사야 한다고 했는데 이 책을 구하면서 수긍이 갔다. 물론 어느 정도는 스스로의 책 사재기에 대한 자족적 변명일 수도 있겠지만.

 

<연인들을 위한 외국어 사전>은 사전이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 출신의 영어 못하는 23살난 처녀 미스 좡이 영국 런던으로 가서 1년간 영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생기는 에피소들을 모은 페이크 저널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sorry of my English”로 시작되는 일기는 참 흥미롭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도 과거에 비슷한 처지였기 때문일까. 물설고 낯선 땅에서 그 나라 말도 못하는 이방인으로 살기란 정말 신산하기 짝이 없는 그런 신세로 내 기억에 각인되어 있다. 아니 그 나라에 말을 배우러 갔는데, 모국어처럼 그들과 대화를 나눈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이야기인가. 미스 좡도 나와 비슷한 오류를 체험했던 것 같다. 언어, 영어에 무지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전에 의존해야 하는 그런 삶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전에 나와 있는 말들과 그네들이 진짜 사용하는 말 사이에는 엄연한 괴리가 존재한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다시 말해 사전에 나오는 대로 말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 의사소통을 필두로 해서 동양과 서양의 현격한 차이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회주의 국가 출신의 미스 좡이 자유주의 천국이라고 할 수 있는 자본주의 원조국가에서 겪을 문화적 충격은 남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운이 좋게 ‘당신’을 만나 소통과 배움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사실 무슨 말을 하면서 모르는 단어를 설명해 가며 가르킴을 전수하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마치 야구를 전혀 모르는 연인을 야구장에 데려가 야구의 기본적인 룰을 하나하나 가르쳐 주는 것과 다를 게 없을 것이다. 야수선택 같은 표현이야 그렇다 치고, 왜 스트라이크 세 개면 아웃이냐고 묻는 질문에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미스 좡은 당신과 아예 살림을 차리면서 그리고 조금씩 그의 고통을 이해하면서 그런 복잡다단한 과정을 이해하기에 이른다.

 

미스 좡이 이 소설에서 직면한 또다른 문제 중의 하나는 당신이 보통 사람과 전혀 모양새의 사람이라는 점이다. 자그마치 스무살 이상이나 차이 나는 나이부터 시작해서 스스로를 못생긴 촌닭이라고 생각하는 미스 좡이 지긋지긋한 촌의 부모로부터 탈출해서 도회의 삶을 어쩔 수 없이 동경하는 입장이라면, 천생이 농부 출신으로 채식주의자(미스 좡은 고기야말로 영혼을 충족하게 해주는 삶의 기초 재료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며 어쩔 수 없이 생존하기 위해 돈을 벌며 한 때 스콰터(불법거주자) 같이 자유로운 삶을 살았던 당신이라는 영혼은 처음부터 미스 좡과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미스 좡은 줄기차게 당신과의 불확실한 미래를 정상궤도(?)에 올려놓으라며 떠들어 대지만, 당신은 미래보다 현재의 삶에 집중하라며 문제의 핵심을 빗겨 나간다. 게다가 당신은 섹스에 탐닉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하지만, 바이섹슈얼이라는 성적 정체성에 주인공은 당혹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미스 좡과 당신의 관계는 처음부터 종착점을 향하는 버스 같은 관계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미스 좡이 체험하는 일들을 내가 과거에 체험했던 일들과 비교해 가면서 스스로를 소설에 충분히 투영시킬 수가 있었다. 한 때 유행했던 가사처럼 그땐 그랬지하며 슬며시 웃음을 짓기도 했다. 전형적인 동양 사고를 가진 여자 미스 좡은 데이트 비용은 무조건 남자가 부담해야 한다고 하며 당신을 놀래키기도 한다. 사실 거주비와 식료품비마저 모두 당신이 부담해야 하는 입장에서 데이트 비용도 각자 부담해야 한다는 서구적 사고방식을 가진 당신에게 미스 좡은 도대체 어떤 존재였을까. 당신에게 그녀란 존재는 자신의 편두통을 가시게 하기 위한 성적 파트너에 지나지 않았던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미스 좡은 당신이 런던을 잠시 떠난 있는 동안, 당신이 가지고 있던 예전 사진들과 일기 편지를 읽어 버린다. 사랑하는 사이라면 이 정도 사생활 침해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녀와 미스 좡의 이런 행동에 경악하는 당신의 반응은 둘 사이의 도저히 메울 수 없는 간극으로 다가온다.

 

어쨌든 이십대 철부지 처녀는 당신과 수없는 관계 그리고 다툼을 과정을 거치면서 비로소 독립된 인격체로 거듭나게 되는 과정을 겪는다. 이 소설은 파격적이면서도 동시에 한 편으로는 전형적인 이방인의 성장소설의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는다. 그리고 끝부분에서 역자도 언급했지만 미스 좡의 영어는 일 년간의 속성교육으로 일취월장하게 되는데, 아무래도 번역을 통해서는 이 점을 살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영어 원문이 주는 그런 디테일한 맛을 번역으로 구현하기엔 아마 역부족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에서 당신은 미스 좡에게 유럽 대륙을 한 번 혼자서 여행해 보라고 강권한다. 스스로의 외로움의 세계로 밀어 넣고 싶지 않았던 미스 좡은 당신의 제안을 거부하지만 그녀에겐 선택지가 없다. 이 여행이야말로 그 둘의 파국의 씨앗이었다. 개인적으로 여행은 자아를 성장시키는데 더 없이 귀중한 자산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샤오루 궈 작가는 바로 이 과정을 통해 당신으로부터 벗어나 자주적 인간으로 탈바꿈하는 결정적 계기로 만들어 버렸다. 멋지다.

 

정말 재밌는 소설을 읽고 싶었는데 나에게 샤오루 궈의 <연인들을 위한 외국어 사전>은 딱 그런 책이었다. 요즘 이책저책 마구잡이로 책을 읽고 있는데, 그 와중에도 도무지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을 정도로 마성의 매력을 가진 책이었노라고 후기에 적고 싶었다. 그녀의 다른 책들도 읽어 보고 싶은데 유감스럽게도 국내에 출간된 책은 <연인들을 위한 외국어 사전> 밖에 없다. 다른 책도 만나볼 수 있다면 좋겠는데 말이다. 그래서 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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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 버티고 시리즈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홍성영 옮김 / 오픈하우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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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뒤늦은 발견이라고 해야 할까. 부지런히 그녀의 작품들과 만나고 있다. 올해 들어 <캐롤>에 이어 하이스미스 작가의 <심연>도 읽었다. 미국 동부 매사추세츠 리틀 웨슬리에 사는 중상층 부르주아 가정에서 벌어지는 치정과 살인에 대한 이야기는 매혹적일 수밖에 없다. 겉으로 보기에 평온해 보이는 그들의 삶에 이런 숨막히는 비밀이 숨어 있으리라고 누가 알겠는가 말이다. 소설의 초반 진행은 느리게 전개되지만 아내의 계속되는 부정을 감내하는 남자 빅터 반 알렌의 이야기가 조금씩 냉담한 독자의 가슴에 불을 지피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는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우선 하이스미스 작가는 소설의 주인공 빅터 반 알렌을 가히 인내심의 달인으로 설정한다. 그는 분명 오쟁이진 남편으로 주변의 비웃음을 사도 모자랄 것 같은데 거의 부처 같은 인내심으로 멋쟁이 아내 멜린다의 부정을 눈감아 준다. 사실 그의 심리 상태가 이해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다 아는데, 드러내놓고 바람을 피우는 멜린다도 그렇지만 더 이상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그런 수모와 모욕을 견디는 삶을 왜 사는 걸까. 그가 그렇게 사랑해 마지 않는 외동딸 트릭시의 존재만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모든 일은 단순한 농담에서 시작됐다. 일전에 뉴욕에서 살해당한 멜린다의 전 애인을 죽인 범인이 자신이라고 고백하면서 멜린다 주변의 수컷들을 빅터는 일소해 버린다. 그 정도로 세게 나가야 할 정도의 반 알렌 부부의 문제는 심각하지만 여전히 빅터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상당한 유산을 상속받아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서도 중상류 클래스의 삶을 유지하는 빅터는 1년에 고작 네 권 정도의 책을 펴내는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며 웨슬리에서의 하루하루를 보낸다. 리틀 웨슬리에 사는 이들은 강박처럼 파티를 열어 이웃과의 친목을 다지는데 여념이 없다. 이 소설이 나온 1957년은 팍스 아메리카나가 전 세계에 그 위력을 떨치고 있을 시절이다. 어쩌면 미국인들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을 그런 벨에포크 시절이 아니었을까. 마을에서 사람들의 눈밖에 난 사람은 어쩌면 파티에 초대 받지도 못하고 출처가 불분명한 가십의 대상이 되어 따돌림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주인공 빅터는 그런 예외적 인물들과는 달리 모든 이에게 호감을 사는 그런 스타일의 사람이었다. 바로 이런 점이 그의 완전범죄를 가능하게 만들었을 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 샌님 같은 출판사 사장이 그럴 일을, 그럴 리가 없지하고 말이다.

 

그가 상상 속에서 살해했던 멜린다의 전 애인을 죽인 진짜 범인이 발견되자 잠시 잦아드는가 싶었던 멜린다는 주체할 수 없는 바람기를 감추지 않는다. 아니 그럴 거면 빅터와 헤어지지 않고 계속 사는 걸까. 이미 각방을 쓴지도 오래됐고, 어떤 대화도 통하지 않는 그런 연극 같은 결혼생활을 계속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 둘을 계속해서 묶어 두는 원동력은 빅터의 재산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빅터의 상상은 곧 현실이 된다. 마을에 새로 도착한 피아니스트 찰리 드 리슬은 바로 멜린다의 타겟이 되어 정분이 나고,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힌 빅터는 그를 코원 부부의 코스튬 파티에서 살해한다. 수영장에서 우발적으로 폭발된 감정이 빅터의 상상을 결국 실행에 옮기게 한 것이다. 초반에 비해 약간 지지부진했던 소설은 바로 이 지점에서 탄력을 받기 시작한다. 우유부단한 것으로 보였던 주인공이 결국 사고를 친 것이다. 과연 빅터의 일탈은 이번 한 번으로 끝날 것인가. 아니다, 멜린다의 바람기가 고쳐지지 않는 이상 일단 폭발한 빅터의 인내심은 통제되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소설 <심연>의 나머지 페이지를 넘기는 나의 손길이 분주해지기 시작한다. 도대체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는 걸까 하는 기대감에.

 

타인의 시선에 완벽해 보이는 반 알렌 부부의 결혼생활의 실상은 파경 그 자체였다. 그들의 이야기를 조금만 들어봐도 부부가 물과 기름 같은 사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굳이 멜린다의 장점을 찾아 가며, 그리고 어쩌면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트릭시에게 부모의 이혼이라는 충격을 안겨 주고 싶지 않아서인지 이혼을 주저하는 빅터의 결정장애가 문제였다. 그런데 모든 문제의 원인을 빅터의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멜린다가 좀 더 결혼에 충실했다면, 그리고 딸 트릭시에게 좀 살갑게 대했다면 모든 이에게 부처 같이 대했던 빅터가 이성의 끈을 놓는 그런 일 따위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빅터와 멜린다 모두 하이스미스의 플롯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체스판의 말들이겠지만 이 정도로 뛰어난 생명력을 가진 캐릭터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소설의 결말은 하이스미스의 리플리 시리즈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태양은 가득히>를 연상시킨다. 빅터가 연출하는 완전범죄를 기대했는데 아쉽다. 그만큼 강렬한 결말이라고 해야 하나. 스포일은 여기까지. 사람들이 엮어 가는 이야기는 정말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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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ri 2016-03-06 0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플리랑 최근의 캐롤 . 작가 발견이네요 .^^

레삭매냐 2016-03-07 09:43   좋아요 0 | URL
오래 전에 영화 <태양은 가득히> 보고서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작가가 대단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최근 다시 한 번 감탄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그녀의 책들이 대부분 영화화 되었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