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들을 위한 외국어 사전
샤오루 궈 지음, 변용란 옮김 / 민음사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이달 들어 처음 읽은 책이다. 지난달에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세트를 사면서 같이 주문한 책인데, 한 번 잡으니 도대체 손을 놓을 수가 없더라. 이 책은 어느 블로그에서 본 영국의 문예지 <그란타>에서 기대되는 유망주 작가 중의 한 명이라는 글을 보고 읽게 됐다. 나온지 7년 밖에 안되었는데 이미 절판의 운명에 처해진 그런 비운의 책이다. 아니 이렇게 재밌는 책이 왜. 같이 <그란타>에서 추천한 작가로 애덤 풀스가 있는데 그 책은 아직 시중에서 구할 수가 있어 다행이다. 누군가 예전에 우리나라 책의 수명이 짧기 때문에 당장 읽지 않더라도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바로 사야 한다고 했는데 이 책을 구하면서 수긍이 갔다. 물론 어느 정도는 스스로의 책 사재기에 대한 자족적 변명일 수도 있겠지만.

 

<연인들을 위한 외국어 사전>은 사전이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 출신의 영어 못하는 23살난 처녀 미스 좡이 영국 런던으로 가서 1년간 영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생기는 에피소들을 모은 페이크 저널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sorry of my English”로 시작되는 일기는 참 흥미롭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도 과거에 비슷한 처지였기 때문일까. 물설고 낯선 땅에서 그 나라 말도 못하는 이방인으로 살기란 정말 신산하기 짝이 없는 그런 신세로 내 기억에 각인되어 있다. 아니 그 나라에 말을 배우러 갔는데, 모국어처럼 그들과 대화를 나눈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이야기인가. 미스 좡도 나와 비슷한 오류를 체험했던 것 같다. 언어, 영어에 무지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전에 의존해야 하는 그런 삶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전에 나와 있는 말들과 그네들이 진짜 사용하는 말 사이에는 엄연한 괴리가 존재한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다시 말해 사전에 나오는 대로 말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 의사소통을 필두로 해서 동양과 서양의 현격한 차이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회주의 국가 출신의 미스 좡이 자유주의 천국이라고 할 수 있는 자본주의 원조국가에서 겪을 문화적 충격은 남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운이 좋게 ‘당신’을 만나 소통과 배움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사실 무슨 말을 하면서 모르는 단어를 설명해 가며 가르킴을 전수하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마치 야구를 전혀 모르는 연인을 야구장에 데려가 야구의 기본적인 룰을 하나하나 가르쳐 주는 것과 다를 게 없을 것이다. 야수선택 같은 표현이야 그렇다 치고, 왜 스트라이크 세 개면 아웃이냐고 묻는 질문에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미스 좡은 당신과 아예 살림을 차리면서 그리고 조금씩 그의 고통을 이해하면서 그런 복잡다단한 과정을 이해하기에 이른다.

 

미스 좡이 이 소설에서 직면한 또다른 문제 중의 하나는 당신이 보통 사람과 전혀 모양새의 사람이라는 점이다. 자그마치 스무살 이상이나 차이 나는 나이부터 시작해서 스스로를 못생긴 촌닭이라고 생각하는 미스 좡이 지긋지긋한 촌의 부모로부터 탈출해서 도회의 삶을 어쩔 수 없이 동경하는 입장이라면, 천생이 농부 출신으로 채식주의자(미스 좡은 고기야말로 영혼을 충족하게 해주는 삶의 기초 재료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며 어쩔 수 없이 생존하기 위해 돈을 벌며 한 때 스콰터(불법거주자) 같이 자유로운 삶을 살았던 당신이라는 영혼은 처음부터 미스 좡과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미스 좡은 줄기차게 당신과의 불확실한 미래를 정상궤도(?)에 올려놓으라며 떠들어 대지만, 당신은 미래보다 현재의 삶에 집중하라며 문제의 핵심을 빗겨 나간다. 게다가 당신은 섹스에 탐닉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하지만, 바이섹슈얼이라는 성적 정체성에 주인공은 당혹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미스 좡과 당신의 관계는 처음부터 종착점을 향하는 버스 같은 관계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미스 좡이 체험하는 일들을 내가 과거에 체험했던 일들과 비교해 가면서 스스로를 소설에 충분히 투영시킬 수가 있었다. 한 때 유행했던 가사처럼 그땐 그랬지하며 슬며시 웃음을 짓기도 했다. 전형적인 동양 사고를 가진 여자 미스 좡은 데이트 비용은 무조건 남자가 부담해야 한다고 하며 당신을 놀래키기도 한다. 사실 거주비와 식료품비마저 모두 당신이 부담해야 하는 입장에서 데이트 비용도 각자 부담해야 한다는 서구적 사고방식을 가진 당신에게 미스 좡은 도대체 어떤 존재였을까. 당신에게 그녀란 존재는 자신의 편두통을 가시게 하기 위한 성적 파트너에 지나지 않았던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미스 좡은 당신이 런던을 잠시 떠난 있는 동안, 당신이 가지고 있던 예전 사진들과 일기 편지를 읽어 버린다. 사랑하는 사이라면 이 정도 사생활 침해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녀와 미스 좡의 이런 행동에 경악하는 당신의 반응은 둘 사이의 도저히 메울 수 없는 간극으로 다가온다.

 

어쨌든 이십대 철부지 처녀는 당신과 수없는 관계 그리고 다툼을 과정을 거치면서 비로소 독립된 인격체로 거듭나게 되는 과정을 겪는다. 이 소설은 파격적이면서도 동시에 한 편으로는 전형적인 이방인의 성장소설의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는다. 그리고 끝부분에서 역자도 언급했지만 미스 좡의 영어는 일 년간의 속성교육으로 일취월장하게 되는데, 아무래도 번역을 통해서는 이 점을 살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영어 원문이 주는 그런 디테일한 맛을 번역으로 구현하기엔 아마 역부족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에서 당신은 미스 좡에게 유럽 대륙을 한 번 혼자서 여행해 보라고 강권한다. 스스로의 외로움의 세계로 밀어 넣고 싶지 않았던 미스 좡은 당신의 제안을 거부하지만 그녀에겐 선택지가 없다. 이 여행이야말로 그 둘의 파국의 씨앗이었다. 개인적으로 여행은 자아를 성장시키는데 더 없이 귀중한 자산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샤오루 궈 작가는 바로 이 과정을 통해 당신으로부터 벗어나 자주적 인간으로 탈바꿈하는 결정적 계기로 만들어 버렸다. 멋지다.

 

정말 재밌는 소설을 읽고 싶었는데 나에게 샤오루 궈의 <연인들을 위한 외국어 사전>은 딱 그런 책이었다. 요즘 이책저책 마구잡이로 책을 읽고 있는데, 그 와중에도 도무지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을 정도로 마성의 매력을 가진 책이었노라고 후기에 적고 싶었다. 그녀의 다른 책들도 읽어 보고 싶은데 유감스럽게도 국내에 출간된 책은 <연인들을 위한 외국어 사전> 밖에 없다. 다른 책도 만나볼 수 있다면 좋겠는데 말이다. 그래서 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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