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
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 푸른숲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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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국민작가로 불리는 아지즈 네신과 나의 첫 만남은 지난여름이었다. 같이 일하는 사무실 동료에게 책선물을 해주겠다고 했을 때, 그가 원한 책이 바로 아지즈 네신의 <튤슈를 사랑한다는 것은>이란 책이었다. 물론 난 아직 읽어 보지 못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기 전에 아지즈 네신의 다른 작품인 <행방불명 야샤르>를 구입했다. 하지만 정작 첫 대면은 <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로 낙찰되었다.

지금으로부터 어언 60년 전, 트루먼 독트린으로 미국의 우산 안으로 들어가려던 작가의 조국 터키의 상황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아지즈 네신은 10개월간의 실형과 4개월 10일간의 유배형을 선고받는다. 물론 요 부분은 책의 본문에서는 소개가 되지 않고 맨 끝의 작가 후기를 통해 소개가 된다. 궁금했던 점을 풀어줘서 아주 고마웠다.

이 책은 바로 아지즈 네신이 유배지 부르사에서 겨울을 나던 시기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예전 오스만 터키 시절만 하더라도, 유배형을 사는 이들에게 허드렛일이라도 하게 해줘서 적어도 먹을거리와 잠자리 걱정은 하지 않았다는데 현대 터키에서 유배형을 선고 받은 이들은 그야말로 불가촉천민 같은 존재였다. 아지즈 네신의 친구들도, 동창들도 모두 그를 외면한다. 정치범인 그와 접촉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에게 돌아올 불이익 때문인 것이다. 아지즈 네신은 이미 자신을 유배형에 처한 이들을 용서했지만, 자신을 외면했던 이들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날리고 있었다.

작가로서 섬세한 감정의 소유자인 화자이자 주인공인 아지즈 네신은 무엇보다 굶주림에 시달린다. 당장의 끼니를 해결할 수가 없어, 고민하는 그의 모습은 무장해제된 지식인의 무능력함으로 치환되고 있었다. 문학을 하는 것도 좋지만, 실질적인 기술을 익히는 것도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작가의 지론이 가슴에 와 닿았다. 한 잔의 짜이와 빵조각을 위해 자신과 생사고락을 같이 한 담요를 팔아 끼니를 잇기 위해 부르사의 뒷골목을 전전하는 그의 뒷모습이 너무나 쓸쓸하게만 느껴졌다.

지식인으로써 지인이 보내준 책들을 팔아 역시 양식을 마련해 보려는 그의 망설임 역시 충분히 이해가 갔다.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는 작가의 우국충정만큼이나 실질적인 생존을 위한 자신과의 싸움을 나름대로의 해학으로 버무려내는 아지즈 네신의 내공이 놀라웠다. 어떻게 보면 타인에게 들어내고 싶지 않은 자신의 비참했던 과거를 유머로 승화시켜 결국엔 작품으로까지 발표한 그의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

가족에 대한 사랑 역시 남 못지않다. 결국 적발되면 추가형량을 선고 받을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서, 유배지 부르사를 남몰래 이탈해서 가족이 있는 이스탄불을 몰래 찾는다. 한편 부르사에서 알게 된 문학청년의 몹쓸 습관인 관음증에 대한 작가의 기술이 흥미롭다. 예의 관음증으로 대변되는 훔쳐보기는 그 개인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당시 계엄 하의 서슬 퍼런 군부독재 하에서 많은 이들이 즐기던 국민스포츠였다. 지휘고하 노소를 막론하고, 많은 이들이 훔쳐보기에 몰입해 있었다. 작가가 슬쩍 언급했듯이 이 훔쳐보기가 다른 사람들의 일이 끼어들기 좋아하고, 충고하기 좋아하는 터키 사람들의 국민성에 대한 은근한 풍자라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는 확실히 유쾌하고 재밌는 책이다. 하지만 한 꺼풀만 벗겨 놓고 보면, 희망마저 거세된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던 작가의 비참했던 과거를 직시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계기로 해서, 작가의 다른 책들과의 만남을 이어가고 싶어졌다.

사족으로 터키어를 전공한 이난아 씨의 번역으로 아지즈 네신의 작품과 만나게 된 행운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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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나라, 인간의 땅 - 고진하의 우파니샤드 기행
고진하 글.사진 / 비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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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 시즌이 시즌이니만큼 범람하는 여행 서적들과 에세이들을 많이 접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 되돌아보니, 기억에 떠오르는 책들은 단 한 권도 없었다. 내가 접한 여행 책들의 깊이가 없어서였을까? 그러던 올해 초에, 일본 출신의 작가 세노 갓파의 <인도 스케치 여행>을 읽게 됐다. 그 책에 읽고 나서, 인도에 대한 관심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그러던 차에 고진하 목사의 <신들의 땅, 인간의 나라>는 다른 차원의 나라 인도를 나에게 소개해 주었다. 보다 심오한 영적인 차원의.

사실 우파니샤드란 말은 그동안 많이 들어와 봤지만 단 한 번도 그 뜻을 찾아보거나 그러진 않았다. 우파니샤드란 ‘스승이 아끼는 제자를 무릎이 닿도록 가까이 앉히고 은밀히 전해주는 지혜’를 뜻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다른 건 몰라도 인도 기행에 있어서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고진하 목사가 독자들에게 은밀하게 전해주는 지혜가 이 책 속에 담겨져 있단 말인가? 슬며시 미소가 피어올랐다. 지은이의 인도 기행의 중심에는 언제나 그렇게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지인에게 책의 내용에 대해 설명을 했었는데 그는 내가 말하는 내용들이 지은이가 말하고 싶어 한 게 아닌 것 같다는 아주 예리한 지적을 해주었다. 사실 기독교인으로서, 힌두사상에 심취한 지은이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그런 편견을 걷어내고 정말 이 책에서 지은이가 하고 싶어 하는 게 무엇인가를 들여다보았다. 인도의 신기하고 풍경과 기이한 그네들의 생활의 모습들? 아니다 그런건 모두 허위와 위선으로 가득한 물질세계의 환영(幻影)에 지나지 않았다.

이 책에서 말하고 싶어 하는 것들은 바로 궁극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 다시 말해 아트만(참자아)의 세계로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진리는 서로 통한다고 했던가? 마야의 세계에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궁극의 행복에 다다르기 위해 자신의 참모습과 자아를 찾기 위한 지난한 도상에 우리는 서 있는게 아닐까. 동시에 개인적인 질문이 하나 생각났는데, 아니 설사 살면서 아트만의 경지에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누구나 아트만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 아닌가 말이다. 혼란스러웠다.

힌두 철학에서 말하는 대로 브라흐만(창조자), 비슈누(유지자) 그리고 시바(파괴자)가 서로 합일과 해체를 통한 영혼의 속성을 나타낸다고 했던가. 인간은 누구나 죽음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한다는 아니 보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 본연의 모습이 떠올랐다. 육신의 소멸과 억겁의 회귀 등의 이야기들은 인도 힌두 철학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시키기도 했다.

인도 (우파니샤드) 기행이라는 제목만 보고서 이 책을 집어든 이들에게 이 책은 실망스러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면의 근원적인 결핍을 다스리기 위해 세속의 행복보다는 근원적인 그 무엇인가를 기대한 이들에게 이 책은 아주 반가운 손님으로 다가온다. 신과의 진정한 합일을 위해 오늘도 노래와 악기를 내려놓지 못하는 바울(음유시인)들의 모습에서 시간이 빚어내는 환영을 초월한 구도자의 모습이 저물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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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스라엘 2000년의 역사
전호태.장연희 지음 / 소와당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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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에 앞서 이 책이 어떤 성격의 책인가에 대해 많은 관심이 갔다. 전호태와 장연희 두 저자는 책의 말머리에 기독교인이라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뚜렷이 밝히고, 성경의 구약사를 커버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루겠다고 선언했다. 연초에 유대인들의 삶을 다룬 책을 읽으면서 안 그래도 유대인들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던 차에 아주 반가운 책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 읽은 책에서 편향된 시각 때문에 즐거워야할 독서경험이 그렇지 못해서 참 아쉬워서 더 그랬을 지도 모르겠다.

계속해서 저자들이 각 장에서 밝히다시피, <고대 이스라엘 2000년의 역사>의 기본 텍스트는 성경, 그 중에서도 구약성경이다. 오늘날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국가의 역사는 야웨의 약속으로 시작된다. 갈대아 우르 사람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는 지상명령이 떨어지고, 아브람은 야웨의 말대로 가나안 땅을 향해 나간다. 기독교의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인 순종이 전면에 부상한다.

이방인들의 땅인 가나안 땅에서 타민족의 핍박 가운데, 히브리인들은 아브람(이후 아브라함으로 불리게 된다), 이삭 그리고 야곱의 대를 거쳐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아들 요셉 대에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전역을 강타한 7년간의 가뭄으로 인해 야곱 휘하의 히브리인들은 이집트로 이주를 하게 된다. 저자들은 바알 신앙으로 대표되는 가나안의 토착신앙에 동화되지 않기 위해, 야웨가 이집트 고센 땅으로 그들을 인도한 것이 아닌가 하는 가설을 내세우고 있다.

이후 이집트의 지배계층은 이방인들인 히브리인들을 국가노예화하고, 각종 국가사업에 그들을 동원하게 된다. 결국 야웨는 모세를 그들의 지도자로 삼아, 야곱의 후손인 12지파를 이끌고 장장 40년에 걸친 광야생활을 거쳐 약속의 땅에 그들을 인도한다. 실제 거리로는 7일이면 주파가 가능한 거리를, 40년 동안이나 걸린 이유에는 이집트 땅에서 노예근성이 밴 엑소더스 1세대의 세대교체와 야웨 신앙의 정화라는 궁극적인 목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연단의 시간을 거쳐, 이집트에서 탈출한 히브리인들은 야웨 언약의 본질을 깨닫게 되고 비로소 가나안 정복전쟁을 수행할 준비에 들어간다. 하지만 계속되는 히브리민족의 우상숭배와 야웨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지 않으면서 그들에게 약속된 가나안의 정복은 판관시대와 왕정기를 거친 다윗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문자적 의미에서의 정복을 완수하게 된다. 이 투쟁의 과정은 히브리인들은 기존의 떠돌이 이방인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와 평등을 근간으로 하는 새로운 민족으로의 탄생을 의미한다.

<고대 이스라엘의 2000년 역사>의 전반부를 다루는 이 시기에 대한 저자들의 일관된 시선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바로 야웨와의 언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유일신 야웨에 대한 히브리인들의 신앙은 그들의 정체성을 담보한다. 하지만 현실세계에서 적대적인 부족들에게 둘러싸인 히브리인들은 민족의 생존을 위해, 주변 이방민족들과 세속적인 타협을 진행하면서 자신들의 야웨 신앙과 동떨어진 자기모순에 빠진다.

그 결과 다윗과 솔로몬 왕 시기에 건설된 제국은 북의 이스라엘과 남의 유다로 분열하게 되고, 멸망과 유배의 과정을 거쳐 민족의 디아스포라를 겪게 된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 주로 다뤄지게 될 내용들이다. 북왕국 이스라엘에서는 엘리야가 그리고 남왕국 유다에서는 이사야가 등장을 해서 야웨를 믿지 않는 히브리인들에 대한 경고가 이어진다. 결국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게 그리고 유다는 신바빌로니아에게 멸망을 당하면서, 히브리인들의 본격적인 디아스포라가 시작된다.

하지만 70년간의 바빌론의 유수를 겪으면서 오히려 유대민족은 자신들의 신앙공동체를 정화하고 거듭남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중근동의 여느 민족처럼 통혼과 이주정책으로 타민족에 동화가 되지 않고, 야웨 신앙을 근거로 한 유대민족 공동체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신바빌로니아의 멸망 후, 페르시아 제국 시대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이 허용된 유대인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성전을 짓고, 무너진 성벽을 재건한다.

이후 계속된 헬레니즘 문화에 대항해서, 유대인들은 헤브라이즘 전통을 이어 나가게 된다. 아울러 자신들의 이 모든 고난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줄 메시아, 다시 말해서 구원자를 기다리게 된다.

로마시대 이후, 단 한 명의 유대인도 유대 땅에 거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게 되면서 본격적인 디아스포라를 경험하게 된 그들이 어떻게 해서 2000년간이나 돌아갈 고향조차 없는 가운데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켰는가에 대한 기본적인 해설이 이 책에 담겨져 있다. 야웨 신앙을 근간으로 하는 부족공동체에서 출발을 해서, 판관시대 그리고 왕정을 거쳐 로마의 속주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자세히 그려진다.

야웨의 약속으로 시작된 이주와 더불어 유대인들 특유의 선민의식은 오늘날까지도 중동지역의 불안요소가 되었다. 그들이 진정으로 회개와 세례를 통해,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법을 깨닫게 될 날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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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로시티 - 딘 쿤츠 장편소설 모중석 스릴러 클럽 18
딘 R. 쿤츠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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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스릴러 작품을 전문적으로 쓰는 것으로 알려딘 딘 쿤츠라는 이름을 많이 들어 보았는데, 이번에 비채에서 출간된 <벨로시티>로 그와 첫 만남을 가질 수가 있었다. 벨로시티(velocity) 라, 속도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단순하게 속도라는 뜻만 있는게 아닐 것이라는 추측이 되서, 위키피디아에게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기대 이상의 대답을 내주었다. 물리학에서 사용되는 말로 위치의 변화율을 지칭하며, 속도를 뜻하면서 동시에 그 방향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소설 <벨로시티>의 주인공 빌리 와일스의 육체적, 도덕적 상황을 설명하기에 이 “벨로시티”보다 더 적절한 단어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경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 부근의 내퍼 카운티였던가. 어느 이름 없는 ‘선술집’에서 이 기이하면서도 읽는 순간은 손에서 책을 뗄 수 없는 매혹적인 이야기는 시작이 된다. 주인공은 이 바에서 일하는 바텐더 빌리. 어느 점에서도 보더라도, 지극힌 평범한 보통 남자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로부터 쪽지를 한 장 받으면서 느슨하게 조여 있던 삶의 긴장이 폭발해 버린다.

자신이 받은 쪽지의 내용을 경찰에 알리지 않으면 금발의 여선생이 죽고, 그렇지 않으면 자선사업을 할머니를 죽이겠다는 협박이 날아든다. 제한시간이 주어지고, 모든 건 빌리의 선택이라고 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보이지 않은 적으로부터의 공포가 가장 큰 법이다. 이런 짓을 하는 이가 누군지 그 실마리조차 제공되지 않는다. 부모가 죽고 나서, 포스터 차일드로 자라난 빌리는 조용하게 살고 싶을 뿐이다. 병상에는 4년 전, 약혼을 하고 깡통에 든 수프를 먹고 의식을 잃은 약혼녀 바바라가 있다.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그녀에게 헌신적인 빌리.

협박을 계기로 해서 작가 딘 쿤츠는 빌리 와일스의 삶에 독자들을 조금씩 안내하기 시작한다. 첫 번째 협박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빌리에게 두 번째 쪽지가 날아들고, 더 이상 이 협박이 단순한 공갈이 아니라는 것이 빌리의 친구이자 보안관 대리인 래니 올슨을 통해 드러나게 된다. 이 협박을 진행하는 보이지 않는 “미친놈”은 빌리를 심리적으로 압박해 나가면서, 결국 물리적 폭력 행사에까지 다다른다. 협박에 이은 두 건의 살인을 확인하고, 심지어 끔찍한 폭행을 당한 빌리는 자신이 접하게 된 사건이 우연이 아니라 치밀하게 준비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미친놈”으로부터 받은 궁극적인 협박은 빌리 자신이 자살하게 된다는 선언이었다. 그리고 빌리가 처해 있는 모든 정황들은 피해자인 빌리가 범인이라고 지목하고 있다. 자신의 가장 취약한 약점인 바바라를 보호하면서, 왜 자신이 이런 사태를 감당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빌리는 목숨을 건 사투에 나서게 된다.

<벨로시티>를 다 읽고 나서, 딘 쿤츠의 전작들을 살펴보았다. 다작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이름에 걸맞게 수많은 책들이 검색창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 후기로 실린 모중석의 인터뷰에서 말해지듯이, 보통남자 3부작 중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벨로시티>는 하루하루의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익명의 쪽지를 받게 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물론 이 보통남자가 갑자기 미처 자신이 모르고 있던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내서 악당과 대결한다는 슈퍼히어로식 설정이 아니다.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면서,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조용하게 살려는 보통남자가 불가피한 극한 상황에 내몰려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이는 상황이다. 게다가 그를 위협하는 “미친놈”의 정체는 도대체 알 수가 없다. 단서가 너무나 빈약하다.

“미친놈”은 라벨의 볼레로처럼 주인공에게 공포와 위협의 단계를 서서히 높여 나가면서 독자들이 점차 느끼게 되는 스릴과 서스펜스에 휘발유를 끼얹는다. 동시에 작가는 우리가 모르는 빌리의 어두운 과거들을 한 꺼풀씩 벗겨 내준다. 그동안 주변의 타인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아왔던 빌리는 협박이 확대되자, 주변인들을 모두 의심하기에 이른다. 그들이 진술한 완벽한 알리바이는 <벨로시티>의 맛깔나는 함정이다. 더 이상의 스포일러는 이제 그만!

스릴러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들이 느낄 수 있는 최대의 즐거움은 도대체 이 기이하기 짝이 없는 사건을 진행시킨 범인이 누구인가를 맞추는 것이다. 물론 작가가 여기저기 흩뿌려 놓은 단서들을 통해 유추해내면서 지목하는 경우가 있겠고, 작가의 의도대로 결말에 도달해서 알게 되는 경우가 있겠다. 그동안 대개의 경우, 후자를 선택했었다. 하지만 이번에 <벨로시티>를 읽으면서, 그런 정밀한 유추 없이 개인적 심증을 두었던 캐릭터가 범인이었다. 물론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지만. 아마 딘 쿤츠는 그것까지 치밀하게 계산해 두었지 싶었다. 아, 역시 작가가 한수 위였구나.

소설의 제목처럼 <벨로시티>는 속도감이 넘친다. 벡터 물리학의 정의대로, 속도가 넘치면서도 그 방향성도 뚜렷하다. 작가가 준비한 이정표대로 독자들은 한걸음씩 발을 내딛기만 하면 된다.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대중성을 겸비했으면서도, 찰스 디킨스나 T.S. 엘리엇 같은 문호들의 코드들도 자신의 작품에 용해시킬 줄 아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딘 쿤츠의 차기 작품들이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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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세상이다 - 청소년과 가정을 위한 지식사전
피에르 제르마 지음, 최현주 옮김 / 하늘연못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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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책의 화려한 올 컬러에 반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어디선가 한 번 읽어 봤다는 기시감이 자꾸만 들었다. 도대체 왜일까? 해서 저널리스트로서 다양한 경력을 자랑하는 <이것이 세상이다>의 저자 피에르 제르마의 국내에서 출간된 책들을 검색해 봤다. 아니 그랬더니만 바로 2006년에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된 <세상을 바꾼 최초들>이란 책이 있지 않은가. 내용을 살펴보니, 판박이였다. 물론 기존의 책에서 7개의 장에서 다룬 것들이 새로 나온 <이것이 세상이다>에서는 8개의 장으로 바뀌고, 번역자가 두 명에서 한 명으로 줄어들면서 아주 작은 차이가 있긴 했지만 대동소이했다. 재작년 크리스마스 때에 읽은 책이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좋은 책들은 자꾸만 접할수록 좋은 것 아닌가. 예전에는 흑백의 단색인쇄였는데 이번에는 무엇보다 올 컬러 인쇄로 보다 생생하고 화려한 도화들이 무엇보다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새로운 책을 읽는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책을 읽는 동안, 인류 문명의 발달에 있어 지대한 공헌을 해왔던 세계 최초에 대한 기록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역시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인상적인 발명은 바로 바퀴였다. 이제는 너무 흔해 빠져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지만, 인류사적 측면에서 바퀴의 발명은 그야말로 획기적이었다. 아시아와 유럽 같은 구대륙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져온 바퀴가 신대륙의 잉카문명에서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유용한 운송수단 없이도 그 무거운 석재들을 운반해서 거대한 신전과 건축물들을 어떻게 해서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류사에 있어서 하나의 미스터리였다.

개인적으로 맥주를 좋아해서인지 이번에도 역시나 맥주와 홉(hop)에 대한 기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많은 종류의 채소들이 처음에는 식용이 아니라 관상용으로 재배되었다는 사실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었다. 중세를 지나 근대에 이르면서, 후추와 같은 향신료들이 진귀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봤지만 금과 은 같은 정도로 취급을 받으면서 화폐의 기능까지도 담당했었다는 놀라운 이야기도 알게 됐다. 아주 오래 전, 어느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 인도네시아에서 난 육두구와 정향의 가치가 당시에는 금값이었다는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세상이다>를 통해 확인할 수가 있었다.

얼마 전에 주제 사라마구의 <수도원의 비망록>을 읽었는데, <이것이 세상이다>에 바로 그 사라마구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중의 한 명인 바르톨로미에 데 구스망 신부가 고안해냈다는 기구 “파사볼라”에 대한 역사적 기술을 다루고 있어서 너무나 반가웠다(321페이지). 신화적 상상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대한 교차 확인이 너무나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역시 최근에 출간된 사라마구의 <죽음의 중지>에서도 소개되는 운명의 여신 중에서 죽음을 다루는 아트로포스에 대한 언급(464페이지)도 빼놓을 수가 없겠다.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이 가는 분야 중의 하나였던 중세와 근대의 직업군에 대해서도 다양한 판화나 에칭화로 소개해 주고 있었다. 유럽의 많은 작가들은 다수의 작품들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풍속화들을 남겨 주었는데 책을 접하는 독자들에게 이해력울 향상시켜 주는 동시에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도 뛰어났다고 생각이 됐다. 그리스 로마신화에서 비롯된 어원이나 이야기들이 오늘날에도 사용되는 많은 부분들에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인상적이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아무래도 저자가 프랑스 출신의 작가여서 그런지 세계 최초에 관한 것들에 대해 프랑스 중심적인 사고가 많이 배어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아시아나 아메리카 대륙의 정보에 대해서는 의도적이었는지 아니면 리서치의 부족이었는지 상당 부분이 빠져 있었다. 예를 들어 인쇄술의 경우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목판 및 금속활자 인쇄술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이전에 이미 상당 수준에 달해 있었지만 달랑 몇 줄만 다루고 넘어갔다.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데 있어서도 내셔널리즘은 여전히 그 유효성을 잃지 않고 있었다.

감수를 하는데 있어서, 우리에게 익숙하지 못한 불어 표현을 그대로 차용한 것도 문제지만 어떤 것들은 사실 관계 여부를 따져보지 않은 것 같았다. 예를 들어 철의 장막을 다룬 내용 가운데, 159페이지에 나오는 “발트해의 수데텐란트”라고 나오는데 수데텐란트는 발트해와는 상관이 없다. 수데텐란트는 체코의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부근의 수데텐 산맥 부근을 지칭하는 지명이다.

지금은 우리네 일상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되는 물건들이나 혹은 탈 것들이지만, 오래 세월을 두고 우리 인류의 조상들이 열과 정성을 다해서 발전시켜온 삶의 지혜들의 결정체라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는 좋은 독서의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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