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 버티고 시리즈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홍성영 옮김 / 오픈하우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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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뒤늦은 발견이라고 해야 할까. 부지런히 그녀의 작품들과 만나고 있다. 올해 들어 <캐롤>에 이어 하이스미스 작가의 <심연>도 읽었다. 미국 동부 매사추세츠 리틀 웨슬리에 사는 중상층 부르주아 가정에서 벌어지는 치정과 살인에 대한 이야기는 매혹적일 수밖에 없다. 겉으로 보기에 평온해 보이는 그들의 삶에 이런 숨막히는 비밀이 숨어 있으리라고 누가 알겠는가 말이다. 소설의 초반 진행은 느리게 전개되지만 아내의 계속되는 부정을 감내하는 남자 빅터 반 알렌의 이야기가 조금씩 냉담한 독자의 가슴에 불을 지피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는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우선 하이스미스 작가는 소설의 주인공 빅터 반 알렌을 가히 인내심의 달인으로 설정한다. 그는 분명 오쟁이진 남편으로 주변의 비웃음을 사도 모자랄 것 같은데 거의 부처 같은 인내심으로 멋쟁이 아내 멜린다의 부정을 눈감아 준다. 사실 그의 심리 상태가 이해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다 아는데, 드러내놓고 바람을 피우는 멜린다도 그렇지만 더 이상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그런 수모와 모욕을 견디는 삶을 왜 사는 걸까. 그가 그렇게 사랑해 마지 않는 외동딸 트릭시의 존재만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모든 일은 단순한 농담에서 시작됐다. 일전에 뉴욕에서 살해당한 멜린다의 전 애인을 죽인 범인이 자신이라고 고백하면서 멜린다 주변의 수컷들을 빅터는 일소해 버린다. 그 정도로 세게 나가야 할 정도의 반 알렌 부부의 문제는 심각하지만 여전히 빅터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상당한 유산을 상속받아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서도 중상류 클래스의 삶을 유지하는 빅터는 1년에 고작 네 권 정도의 책을 펴내는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며 웨슬리에서의 하루하루를 보낸다. 리틀 웨슬리에 사는 이들은 강박처럼 파티를 열어 이웃과의 친목을 다지는데 여념이 없다. 이 소설이 나온 1957년은 팍스 아메리카나가 전 세계에 그 위력을 떨치고 있을 시절이다. 어쩌면 미국인들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을 그런 벨에포크 시절이 아니었을까. 마을에서 사람들의 눈밖에 난 사람은 어쩌면 파티에 초대 받지도 못하고 출처가 불분명한 가십의 대상이 되어 따돌림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주인공 빅터는 그런 예외적 인물들과는 달리 모든 이에게 호감을 사는 그런 스타일의 사람이었다. 바로 이런 점이 그의 완전범죄를 가능하게 만들었을 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 샌님 같은 출판사 사장이 그럴 일을, 그럴 리가 없지하고 말이다.

 

그가 상상 속에서 살해했던 멜린다의 전 애인을 죽인 진짜 범인이 발견되자 잠시 잦아드는가 싶었던 멜린다는 주체할 수 없는 바람기를 감추지 않는다. 아니 그럴 거면 빅터와 헤어지지 않고 계속 사는 걸까. 이미 각방을 쓴지도 오래됐고, 어떤 대화도 통하지 않는 그런 연극 같은 결혼생활을 계속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 둘을 계속해서 묶어 두는 원동력은 빅터의 재산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빅터의 상상은 곧 현실이 된다. 마을에 새로 도착한 피아니스트 찰리 드 리슬은 바로 멜린다의 타겟이 되어 정분이 나고,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힌 빅터는 그를 코원 부부의 코스튬 파티에서 살해한다. 수영장에서 우발적으로 폭발된 감정이 빅터의 상상을 결국 실행에 옮기게 한 것이다. 초반에 비해 약간 지지부진했던 소설은 바로 이 지점에서 탄력을 받기 시작한다. 우유부단한 것으로 보였던 주인공이 결국 사고를 친 것이다. 과연 빅터의 일탈은 이번 한 번으로 끝날 것인가. 아니다, 멜린다의 바람기가 고쳐지지 않는 이상 일단 폭발한 빅터의 인내심은 통제되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소설 <심연>의 나머지 페이지를 넘기는 나의 손길이 분주해지기 시작한다. 도대체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는 걸까 하는 기대감에.

 

타인의 시선에 완벽해 보이는 반 알렌 부부의 결혼생활의 실상은 파경 그 자체였다. 그들의 이야기를 조금만 들어봐도 부부가 물과 기름 같은 사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굳이 멜린다의 장점을 찾아 가며, 그리고 어쩌면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트릭시에게 부모의 이혼이라는 충격을 안겨 주고 싶지 않아서인지 이혼을 주저하는 빅터의 결정장애가 문제였다. 그런데 모든 문제의 원인을 빅터의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멜린다가 좀 더 결혼에 충실했다면, 그리고 딸 트릭시에게 좀 살갑게 대했다면 모든 이에게 부처 같이 대했던 빅터가 이성의 끈을 놓는 그런 일 따위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빅터와 멜린다 모두 하이스미스의 플롯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체스판의 말들이겠지만 이 정도로 뛰어난 생명력을 가진 캐릭터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소설의 결말은 하이스미스의 리플리 시리즈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태양은 가득히>를 연상시킨다. 빅터가 연출하는 완전범죄를 기대했는데 아쉽다. 그만큼 강렬한 결말이라고 해야 하나. 스포일은 여기까지. 사람들이 엮어 가는 이야기는 정말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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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ri 2016-03-06 0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플리랑 최근의 캐롤 . 작가 발견이네요 .^^

레삭매냐 2016-03-07 09:43   좋아요 0 | URL
오래 전에 영화 <태양은 가득히> 보고서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작가가 대단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최근 다시 한 번 감탄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그녀의 책들이 대부분 영화화 되었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