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계급투쟁 -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희상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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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세계는 난민 문제와 그와 관련된 이슬람 테러로 홍역을 앓고 있는 중이다. 난민 사태의 발단은 시리아 내전, 리비아 붕괴 그리고 이라크 지역에서 발흥한 IS(이슬람 국가)의 폭력과 테러 때문에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이 대규모로 서방세계로 유입되면서 시작됐다. 슬로베니아 출신 진보성향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이번에 발생한 난민 사태에 대한 냉철하면서도 균형 잡힌 시선을 <새로운 계급투쟁>이라는 팸플릿에 담아냈다.

 

그전부터 슬라보예 지젝의 명성을 가히 지젝빠라고 할 수 있는 로쟈 작가를 통해 적잖이 들어온 터라 처음 만나게 되는 지젝의 책을 접하면서 내가 과연 다 소화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들긴 했지만, 역시 대중을 위한(?) 팸플릿 성격의 책이라 그런지 예상보다는 쉽게 빠져들 수가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점은, 금번 난민 사태를 보는 서구인의 시선에 대한 기존의 사고와는 다른 지젝의 분석이었다. 가장 충격적인 가설 중의 하나는 난민들이 최종 목적지로 설정한 독일이나 스칸디나비아에 자리 잡은 시리아나 이라크 난민들이 절대 서방사람들에게 고마워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시리아나 이라크, 리비아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원인제공자가 바로 그들이라는 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소위 말하는 이런 ‘실패한 국가’ 정부들이 국민들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면서 발생한 대규모 난민 사태의 원인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서방 강대국들의 제국주의적 영토분할로 생긴 폐해가 그 1차적 원인이며, 에너지자원을 둘러싼 국경을 초월한 다국적기업의 탐욕에 방점을 찍는다.

 

또한 진보진영에서 인도적인 차원에서 무조건 국경을 개방하고 모든 난민을 받아들이라는 주장 역시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젝은 비난하고 있다. 물론 극우파의 인종차별적 주장보다는 도덕적으로 우월할지 몰라도, 국경개방과 난민수용 문제가 궁극적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난민사태의 원인과 현상을 분석하고, 대안으로 실패한 국가들의 안정화가 최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 지젝 주장의 핵심이다. 이슬람이라는 서구사회와는 상이한 풍습과 문화를 바탕으로 한 난민들이 서구사회에 동화되는 것은 정말 난망한 것이 현실이다. 지젝에 따르면 난민들은 서방국가들의 최상위 복지시스템의 혜택은 원하지만, 그들의 복지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이데올로기를 수용할 생각없이 자신들만의 생활방식을 고집하며 바꿀 생각도 없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뼈아픈 지적일 수도 있겠지만, 균형잡힌 철학자로서 지젝은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라고 주문한다.

 

오래전 베트남의 보트피플을 연상시키는 그런 절박함으로 정든 조국을 떠나 목숨을 걸고 서방행을 택하지만, 그들은 바라보는 서방의 시선은 착잡하기만 하다. 유럽연합 내의 이동은 쉥겐 협정 국가 간에는 자유롭지만, 그 외의 나라들에 대해서는 엄격한 것이 사실이 아니던가. 상품에 대해서는 국경을 초월한 이동을 무제한으로 허용하지만, 그 상품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주체로서의 자주적 인간에 대해서는 통제할 수밖에 없는 현실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자꾸만 원심력을 발휘해서 느슨해지려는 경제공동체 유럽연합의 미래에 최근 발생하고 있는 대규모 난민사태는 치명타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난민사태에 따른 이주민 문제는 이제 유럽이 공통적으로 짊어져야 하는 공동의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지젝은 좌파 진영의 휴머니즘에 입각한 온정주의를 배격하면서 실제적인 공존을 위한 방법에 대한 논의를 주문한다. 어느 사회나 받아들일 수 있는 공통의 규칙을 정해서 이를 위반할 시에는 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의 강제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신 나머지에 대해서는 무제한의 관용도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어떤 점에서 보면 우리가 처한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공존과 융화를 보장하는 ‘주도 문화’가 해답이 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아울러 세계적 환경변화가 불러올 대규모 사회 변화와 인구 이동에 대비해서 디지털 시대의 유목민이 될 수도 있다는 유연한 자세가 요구되고 있다는 지적도 눈여겨 볼만하다.

 

지젝은 작년 파리 테러 때문에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에 무자비한 보복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경계를 요청한다. 그런 주장 뒤에서 웃고 있을 세력이야말로 멈추지 않는 서방과 이슬람 세계의 전면전을 부추기는 주범이라고 그는 분석한다. 요원하기는 하지만 지젝은 새로운 방식의 계급투쟁을 의제로 삼아, 세계적 연대를 강조하는 것만이 해결책이라는 주장에 도달한다. 유토피아적 발상일 수 있겠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패배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말로 팸플릿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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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로 읽는다 미스터리 세계사 지도로 읽는다
역사미스터리클럽 지음, 안혜은 옮김, 김태욱 지도 / 이다미디어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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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흥미롭다. 일본 역사미스터리클럽에서 출간한 <지도로 읽는다 미스터리 세계사>에는 정말 믿거나 말거나에 나올 법한 전 세계를 아우르는 미스터리들이 잔뜩 실려있다. 어떻게 보면 음모론의 총체라고 해야 할까. 사라진 아틀란티스 대륙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링컨과 케네디 대통령의 죽음에 관한 미스터리, 콜럼버스에 앞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것은 중국 명나라 출신 환관 무장 정화 제독이었노라는 이야기 그리고 우리에게는 <동방견문록>으로 유명한 마르코 폴로가 실제로 중국에 가본 적이 없었다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야기까지 미스터리 전반을 총망라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그러니 만큼 책읽는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 오늘 아침부터 시간내서 짬짬이 읽기 시작했는데 하룻만에 다 읽을 수가 있었다. 미스터리의 원인과 이유를 신속하게 분석해 내고, 그에 따른 음모론도 슬쩍 다루고 마지막에서는 아직까지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노라며 슬쩍 치고 빠지기까지 그야말로 편집의 솜씨가 명불허전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진행에 비해 많은 이야기를 다루다 보니 부실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사실 책에 실린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어디선가 한 번 쯤은 들어본 이야기가 아닌가. 나같이 까다로운 독자는 수박 겉핥기식의 그런 구성보다는 좀 더 미스터리의 본질을 꿰뚫는 그런 탐사성격의 글을 원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다양한 소재에, 제목에 나오듯 세계 각국의 지도와 첨예하게 다툴 수 있는 사건에 대한 이미지들을 삽입해서 최대한 충실하게 다루려고 한 점에 대해서는 높이 사고 싶다. 요즘 책에 실리는 이미지에 관한 저작권 이슈를 고려해서인지 대부분의 사진들은 위키미디아 커먼스에서 구한 무료 저작권 사진으로 구성된 점도 주목할 만하다.

 

개인적으로 관심을 끈 음모론 중의 하나는 타이타닉 호와 쌍둥이처럼 건조된 올림픽 호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동안 영화 <타이타닉>을 비롯해서 수많은 매체를 통해 처녀출항에서 대서양 심연으로 침몰한 타이타닉 호에 대한 음모론을 들어 보았지만, 보험금 수령을 노리고 일부러 침몰시켰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은 것 같다. 지금도 여전히 세계의 바다에서 오래전 해적들이 숨긴 보물이나 침몰한 해적선을 추적하는 보물사냥꾼 이야기는 들어 봤지만, 사략선 운영을 하다가 직접 해적이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캡틴 윌리엄 키드 이야기는 생소했다.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에 공범이 있다는 주장과 그 사건에 관련된 보고서들이 2039년에야 공개될 거라는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삼국지>에서 가장 핵심적인 전투가 벌어졌던 적벽대전의 위치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고, 무려 5개나 되는 후보지가 경합을 벌이고 있다는 주장도 관심을 끌었다. 프랑스 혁명 와중에 탕플 탑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진 루이 16세의 후계자 루이 17세의 가련한 운명에 관한 이야기도 관심을 끌었다. 예전 같으면 어림도 없을 일이겠지만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DNA는 물론이고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까지 해서 가계를 확인할 수 있다니 그저 놀랄 따름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 소개된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해서 좀 더 깊이 있게 다뤄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적으로 미스터리의 속성을 덜 가진 이야기들은 지금대로 가도 좋겠지만, 좀 더 상세한 조사가 필요한 이야기는 또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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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4-21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은 재미로 읽으면 좋은데, 말도 안 되는 음모론을 진짜로 믿는 사람이 많아서 문제예요. ^^;;

레삭매냐 2016-04-21 16:10   좋아요 0 | URL
기분 전환으로 아주 제격이었습니다. 때로는 가벼운 썰도 재밌는 것 같습니다 :>
그렇죠, 적당한 음모론은 약이지만 맹신은 독일 듯 싶네요.
 
미치코 씨, 영어를 다시 시작하다 - be동사에서 주저앉은 당신에게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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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사십살 먹은 아오야마 미치코 씨가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유는 마사미(미치코의 딸)의 큰엄마와 함께 뉴욕 여행가서 현지인들과 대화를 나눠 보겠다는 현실적 이유에서였을까? 시마다 씨를 영어선생으로 맞아 본격적인 영어공부에 나선다.

 

문제는 중학교 때부터 시작해서 대학교까지 영어교육을 받았지만, 지금 영어 실력은 거의 바닥이라는 점이다. 이해해서 완전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은 공부의 폐해라고나 할까. 게다가 잘 모르는 건 그냥 무조건 외우는 스타일의 암기위주 교육방식은 이웃나라 일본이나 우리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나의 체험을 되돌아 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런 식으로 진도를 나가다 앞에서 막히면 바로 공부에 대한 관심을 잃어 버리게 되는 코스였다고나 할까. 마스다 미리 작가는 바로 그 지점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는 바닥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배움에 조금이라도 허세가 들어가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배움이 되지 않는다고 단언하고 싶다. 물론 배움의 과정이 그런 생각과 이상적으로 딱 맞아 떨어진다면 좋으련만 그렇지도 않은 게 사실 아닌가. Be 동사부터 시작해서 동양에는 없는 a 나 the 같은 개념들을 탑재하려면 사실 이해보다는 어쩌면 암기가 더 유리할 지도 모르겠다. 우리도 그냥 일상적으로 쓰는 표현들이 있지 않은가. 그 모든 걸 다 알고 사용하는 건 아니니까.

 

마스다 미리 작가는 영어 공부를 하는 도중에 모국어 사용에 대해서도 한수 배우게 되었노라고 대리인 미치코 씨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다. 언어란 모름지기 수학공식 같이 딱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나라의 사고와 풍습들을 아우르는 문화적 총합이 아닐까. 책을 보면서 영어는 일본어나 한글보다 숫적 표현에서 더 정확한 표현을 요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일본어도 그렇다고 하지만 우리도 자신을 표현하는 I 대신, 아니 생략하고 사용할 때가 더 많지 않은가. 특별하게 어순을 정하지 않고 말해도 뜻이 전달된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우월한 게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도 불쑥 들었다.

 

어쨌든 우리의 시마다 선생은 “간단하죠”란 표현으로 신출내기 영어공부에 나선 학생을 기죽이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미치코 씨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적당히넘어가지 않고 꼭 이해하기로 작심하고 숱한 질문들을 던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공부하는 사람의 정확한 자세를 엿볼 수가 있었다. 이런 결기로, 허세를 버리고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야말로 자신이 배우고자 하는 것을 과정에서 얻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 한 가지 미치코 씨의 영어공부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배운 것을 일상에 적용했다는 점이다. 백화점 판매코너에서 일하는 미치코 씨는 시마다 선생에게 배운 것들을 일상생활 가운데 내내 생각하고 적용하려고 노력한다. 어떤 경우에 부정관사 a를 사용하는지, 그리고 어떤 경우에 the를 사용하면 그 의미가 달라지는지, am is are 같은 be동사들이 어울리는 주어가 어떤 것인지 스스로 묻고, 대답하는 과정을 통해 깨닫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일본어와 영어를 차이를 롤케이크에 비유한 장면도 아주 재밌었다.

 

시마다 선생이 출판사에서 부서를 옮기게 되면서 미치코 씨의 짧은 영어공부도 곧 끝나게 되었지만, 영어공부를 위한 준비공부로 <미치코 씨 영어를 다시 시작하다>는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 영어에 시달리는 모든 분들도 미치코 씨의 도전정신을 본받아 부디 영어의 달인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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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 프랑스 만화가의 좌충우돌 평양 여행기
기 들릴 지음, 이승재 옮김 / 문학세계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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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된 프랑스계 캐나다 국적의 기 들릴 전작 두 편을 읽었다. <굿모닝 예루살렘> 그리고 <굿모닝 미얀마>. 그리고 나서 정말 두 달간의 짧은 북한 방문기를 다룬 <평양>이 보고 싶어졌는데 절판의 운명인지라 하는 수 없이 최근에 알게 된 전 세계를 상대로 무료 배송한다는 영국 북디파지토리에서 주문해서 어제 받아서 읽기 시작했다. 1일 날 주문했는데, 어제 받았으니 18일 정도 걸린 모양이다.

 

기 들릴 작가는 프랑스 최대 텔레비전 네트워크인 TF1과 북한의 SEK(Scientific Educational Korea) 스튜디오의 협업으로 북한에서 두 달이라는 짧은 체류기간을 갖게 됐다. 공항 검색대에서부터 기 들릴의 수난은 시작됐다. 보안검색에서 북한 관리는 작가가 가지고 온 모든 물건을 샅샅이 검사한다. 정확하게 작가의 방문시점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김정일 시대에 방문한 것으로 보인다. 이웃이자 혈맹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에 질겁하며 쇄국정책을 고수하면서, 모든 재화와 정보가 국경 없이 통용되는 글로벌 시대에 뒤떨어진 주체사상을 유일사상으로 떠받치는 전체주의 국가 방문이 서양 이방인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지 호기심을 자극한다. 북한 여행을 준비하면서 기 들릴이 준비한 책이 조지 오웰의 <1984>라는 점은 탁월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외국인 클럽에 가서 디스코를 추고, 포켓볼 경기를 하는 것 정도의 오락거리가 없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유령도시 평양에서 오웰의 <1984>를 읽는 것도 특별한 의미가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가 북한에 간 이유는 애니메이션 슈퍼바이저로 북한 기술자들을 아웃소싱하기 위해서였다. 의사소통 문제로 기술적 문제야 그렇다 치더라도, 철저히 통제되는 일상이 자본주의 국가 출신의 서양인에게는 아마 짜증나는 일이었던 모양이다. 가이드와 통역 없이는 외출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외국인들이 머물러야 하는 외국인 전용 호텔도 지정되어 있고(저자는 양강도 호텔에 체류했다), 작가의 바람대로 북한 주민과의 접촉은 아예 차단되어 있다. 호텔에서도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지켜지지 않는다. 개성 없이 1호 식당(1호식사칸), 2호 식당으로 구분된 호텔 식당의 서비스는 물론이고 선택의 여지도 없는 메뉴는 말할 것도 없다. 고난의 행군 시절이었던 90년대 서방의 경제제재와 가뭄 홍수 등의 재난으로 대규모 기아 사태가 발생해서 인도주의 단체에서 지원에 나섰지만 구호물품이 전용된다는 사실에 구호단체에서 지원을 중단했던 사태도 저자는 예리하게 지적한다. 만성화된 에너지난으로 전력부족은 그렇지 않아도 무채색의 도시 평양을 어둡게 만들고 있었다. 휴대가 금지된 물품인 라디오를 몰래 반입해서 음악방송을 들어 보려고 하지만, 라디오채널에서는 김씨 부자의 찬양과 프로파간다 일색일 따름이었다. 재즈 음악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 다는 말을 듣고는, 비슷한 방식으로 프로파간다에 대응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작가에게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점 중의 하나는 개인숭배였다. 위대하는 지도자, 친애하는 지도자라 불리는 김일성-김정일 부자를 신적 존재로 숭배하는 북한 주민들의 모습을 민주주의 국가 출신인 기 들릴은 절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놈의 금기사항이 그렇게도 많은지 현기증이 날 정도다. 어쩌면 두 세대 이상 그렇게 세뇌가 된다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어딜 가나 늘 달라붙는 가이드와 통역은 안내자라기보다 이방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하게 관찰하는 감시자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게다가 그들은 자유롭게 평양의 거리를 거닐어 보겠다는 작가의 시도를 갖은 이유를 들어가며 번번이 무산시킨다. 걷는 것이 북한에서는 천한 일로 취급되고, 차를 타는 것이 특권이라는 설정도 재밌다. 그러니 머리가 아파 좀 걷겠다는 작가의 행동을 가이드 캡틴 신과 통역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됐다.

 

말로는 여가시간에 갖는 자원봉사라고 하지만, 누가 봐도 뻔히 보이는 강제동원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도대체 누가 일과를 마친 상태에서 도로공사와 다리 정비, 조경 사업 같은 일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싶어 한단 말인가. 모두가 전체주의 국가에서나 가능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한편, 외국인에게 허용된 관광은 대부분 김씨 부자와 관련된 조형물이나 주체사상탑, 태권도 홀, 오래 전에 나포된 푸에블로 호, 어린이 궁전 등의 코스일 따름이다. 무조건 크고 거대한 것이 좋다는 발상에서 만들어진 개성 없는 획일적인 조형물을 본 외국인들의 반응을 고려해 보기는 했을까.

 

한편, 이방인에게 그들이 보여주고 싶지 않아 하는 치부는 절대 드러내지 않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곳곳에서 엿볼 수가 있다. 작가가 어째서 수도 평양에 장애인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느냐고 묻는 말에, 가이드가 북한에서는 모두 건강하고 강하게 태어나서 장애인이 없다는 말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들이 자랑하는 어린이 궁전에서 꼬마 연주자들이 이방인을 위해 필사적으로 악기 연주를 하는 모습을 보고 기 들릴은 거의 눈물을 터뜨릴 뻔했다고 고백한다. 문득 어린이 궁전의 어린이들에게 그들이 선전하는 대로 북한이 어린이들의 천국인지 묻고 싶어졌다.

 

워낙 평양에 사는 주민들과 접촉이 없다 보니(가이드와 통역의 선방으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예루살렘이나 버마에서 현지주민과 같이 체험한 생생한 에피소드가 없다는 점이 좀 아쉬웠다. 만화를 보면서 재밌던 점 중의 하나는 작가가 한글을 몰라서 북한의 명소에 씌여 있는 한글을 모두 꼬불거리는 이미지처럼 처리해서 도대체 읽을 수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역시 이방인의 한계였다고 해야 할까. 위키피디아에서 <아시아옵스큐라>란 사이트에 올라온 앤디 디머의 패러디 평양방문기도 찾아 봤는데 상당히 흥미로웠다. 좀 더 색다른 관광체험을 원하는 서양인들이 북한을 찾는 모양이다. 기 들릴의 만화는 스티브 카렐 주연의 영화로 제작될 예정이었는데, 2014년 북한이 관계된 해커들의 위협으로 제작이 취소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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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중국사 송 - 유교 원칙의 시대 하버드 중국사
디터 쿤 지음, 육정임 옮김 / 너머북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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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쉽게 읽을 수가 있었다. 소설 같은 문학작품을 즐겨 있지만, 개인적으로 역사를 전공해서 그런 진 몰라도 역사서 특히 이번에 읽은 하버드 중국사 같은 개론서 스타일의 역사책은 술술 읽히는 편이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태사공 선생의 <사기>를 비롯해서 중국사에 관심을 많아 다양한 책들을 섭렵하다 보니 상호작용을 일으켜서 시너지 효과가 생긴 모양이다. 서구 학자로 중국역사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조너선 스펜스 교수의 책도 컬렉션하고 있는 중인데, 최근 서구 역사가들이 통사적 관점에서 벗어나 미시사적 차원에서 역사연구를 인도해 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독일 출신의 역사학자 디터 쿤 교수는 정통사 차원의 정치사와 사회경제사를 적절하게 잘 다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왕조마다 다른 연구자들이 저술해서 기존에 나온 청나라시대와 원명제국에 대한 기술은 또 어떨지 기대가 된다. 사실 작년에 하버드 중국사 청제국편을 사긴 했지만 지금까지 묵혀 두고 있었는데 왠지 왕조사를 역순으로 가기 보다는 차례대로 읽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족한 서론이 길었다. 저자는 <송 유교 원칙의 시대>에서 천 년 전(자그마치 밀레니엄이로구나) 당말의 혼란기를 거쳐 오대십국 시절의 분열을 통일한 송제국을 주제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오대시절 중원의 마지막 패자였던 후주의 장군이었던 조광윤은 동료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르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중원을 차지한 왕국이 통일에 가장 유리한 위치를 선점할 수 있었다. 비록 무인 출신이긴 했지만, 제국의 영속적인 통치를 위해 당말 절도사들의 발호와 전횡을 똑똑히 목격했던 송 태조 조광윤은 사대부 엘리트에 의한 문치주의를 국시로 삼게 된다. 이를 위해 비교적 공정한 관료 선발을 위한 시스템이었던 과거가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당나라 시대처럼 국가의 최고통치자는 황제였지만 제국의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출중한 역량을 갖춘 사대부야말로 최고의 국정 파트너가 아닐 수 없었다. 지배층이었던 사대부 역시 그 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정이 정호 형제와 주희로 대변되는 유교 철학자들은 한나라 시대 이래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유효했던 유학을 개조해서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신유학을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신유학의 합리주의 정신과 이데올로기로 무장된 사대부 엘리트들이 국정의 전반에 진출하게 되면서 당대까지 지속된 문벌귀족 시대는 종언을 고하게 됐다. 당나라가 세계적인 대제국을 이뤘다면 상대적으로 송나라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중화제국의 원형을 형성했다. 건국 초기부터 북방의 오랑캐인 거란족의 요나라와 여진족의 금나라 그리고 서방의 당항족의 서하 등과 전쟁을 치러야 했던 송나라는 압도적인 경제력을 바탕으로 적국에게 세폐를 제공하며 평화와 균형정책을 추구했다. 사실 북방민족에 비해 전쟁 수행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중화제국 송나라가 막대한 전쟁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신유학자들이라면 치를 떨 화이론을 압도했을 것이다. 사실 전쟁으로 오랑캐를 복속시키겠다는 일부의 주장은 이상론이었을 뿐이다. 북송 중기 신종 시대의 왕안석이 모두가 아는 신법으로 국가중흥을 시도했지만, 보수반동파의 역공으로 그가 추진하던 개혁들이 모두 엎어지면서 결국 북쪽 여진족의 남하로 수도 개봉이 함락되고 양자강 남쪽의 항주(임안)로 쫓겨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한편, 디터 쿤 교수는 상대적으로 정치사보다 나머지 사회경제사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송제국을 이 책에서 다루고 있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장면들을 열거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송대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신유학이었지만, 사회의 많은 부분에 불교와 도교가 침투해서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완고한 성리학자들처럼 송대 신유학자들은 불교나 도교를 탄압하려고 했던 것 같지 않다. 상대성을 인정하고 북방민족들과의 그것처럼 공존을 선택했다고나 할까.

 

저자는 종래의 정사(正史) 뿐만 아니라 무덤에서 출토된 부장품과 풍속도, 회화 등의 다양한 자료를 통해 송대 역사에 대한 세밀한 관찰을 시도한다. 중원 중심에 자리 잡은 송나라 수도 개봉은 당나라 시대의 장안과는 달리 천자의 권위나 세계제국의 수도로서의 위용보다는 철저하게 계획된 수도로서 제국 신민의 경제적 효용 가치를 따랐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제국 수도 입안자들이 고려하지 않았을 리 없겠지만, 사방이 트인 평원에 위치했다는 방위상의 약점보다는 변하를 이용한 물산의 집결과 교역에 더할 나위 없이 유리했다는 장점을 중시했던 걸까. 방적기와 농업기술의 발달, 자작농의 활성화 등의 조건으로 제국의 재정은 그 어느 때보다 풍성했다. 비록 막대한 세폐를 오랑캐 제국에 바치기는 했지만 그렇게 돈으로 산 태평성세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송나라 재정은 튼튼했다는 것이 저자 관찰의 핵심이다.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았던 11세기 송나라의 수도 개봉에 대한 저자의 묘사는 정치의 영역을 뛰어넘는 경제활동 중심지로서의 경제수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개봉의 시장에서는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재화들이 거래되었고, 이러한 상업의 발전이 국가 재정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파악한 송대 관료들은 상품의 지불과 용역의 교환에 더 용이한 지폐나 태환이 가능한 어음 발행에 열성적이었다. 아울러 지폐와 화폐 주조에 따른 인플레이션 관리에도 탁월한 실력을 보여주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개인의 영달보다는 국가에 충성한다는 신유학에 충실한 신유학 관료들의 사고방식은 그들의 사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금은 제기보다는 검소하면서도 실용적이고 뛰어난 미적 감각을 발휘할 수 있었던 자기들을 송대 사대부들은 선호했다. 늘어난 경제력은 소비경제의 선순환을 촉진했고, 다양한 상인 조합이 출현하기에 이르렀다. 정치, 사 회 뿐만 아니라 예술 분야에서도 사대부들은 당대의 환영을 쫓던 화려함에서 벗어나 실용주의적이면서도 사실주의적인 예술을 추구했다.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사대부들의 긍정적인 활약에도 불구하고, 상류 계층에서 유행하기 시작해서 사회 전반에 대유행하게 된 금련이라 불리는 전족 풍습은 당대에 말을 타고 격구를 할 정도로 활동적이었던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고 남성에 예속시키기에 이르렀다.

 

디터 쿤 교수는 중화제국이었던 송나라 뿐 아니라 주변국가였던 요나라와 금나라 그리고 몽골의 풍습에 대해서도 균형 잡힌 서술을 이어간다. 다만 아무래도 기록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보니, 중심 주제인 송나라에 비해 빈약한 건 어쩔 수가 없다. 거시사적 차원에서의 세법 문제라던가 신유학이 도입된 이래 사회전반에 걸친 인식의 변화 같은 이슈도 그렇지만, 몇몇 그림을 통해 드러난 보통 사람들의 미시적 삶을 다룬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강행초설도>에 나온 어부들의 고투에 대한 스케치를 비롯해서, 개봉 황궁에 설치된 천문 시계 장치 <수운의상대>의 기구한 운명, 개봉의 다양한 주루와 물레방아 그리고 변하의 수로를 오가는 대형 바지선들에 대한 분석은 역시 미시적 차원의 접근을 어떻게 디터 쿤 교수가 보여주고 있는가에 대한 답이 아닐까 생각된다.

 

21세기에 천년도 더 지난 중국 역사를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 이웃 중국은 이제 대국굴기의 시대에 들어서 있다. 현재 중국은 아편전쟁 이래, 서양 열강의 침탈에 시달리던 굴욕의 시기를 벗어나 다시 한 번 세계의 중심(중화)이 되어 일로일대(신 실크로드 전략)에 매진하고 있다. 어쩌면 가깝지만 먼 이웃인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 현대 중국 원형의 모델이었던 송나라 역사를 읽고,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뛰어넘는 사회질서의 원천인 유교 원칙을 형성한 시대의 역사를 접해 보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6권으로 구성된 하버드 중국사의 첫 도전으로 매우 만족스러운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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