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풀 라이프 1
다카기 나오코 지음 / artePOP(아르테팝)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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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이거 어디서 많이 본 내용인데... 마스다 미리 작가의 만화를 즐겨 보는 편이다. 아니 그녀의 만화는 거의 다 구해서 본 것 같다. 단순한 선으로 그린 심리묘사가 일품이라고나 할까. 최근에 그녀의 느긋한 작가생활에 대한 만화를 읽었는데 오늘 읽은 다카기 나오코의 <뷰티풀 라이프>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많더라. 일러스트레이터의 꿈을 안고 대도시 도쿄로 상경해서 고군분투하는 삶, 많이 비슷하다고. 다만 마스다 미리가 오사카에서 왔다면, 다카기 나오코는 미에 현에서 왔다고.

 

누구나 자신이 꿈꾸는 분야에서 성공하는 싶은 마음은 비슷할 것 같다. 다만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느냐는 다르지 않을까. 우선 성공의 가능성이 더 많은 대도시로 향한다. 일단 고향에는 성공하러 대도시로 간다고 말했기 때문에, 집에 손을 빌릴 생각은 없다. 그렇다면 안정적인 수입이 생기기 전까지 생존을 위해 월세와 식비 각종 청구서를 내야 하는 비용도 필요하고, 또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기 위해 공모전과 일거리도 구해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려야 한다. 두 만화를 비교하면서 거의 공식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스다 미리 작가의 작가생활 만화가 성공한 후에 과거를 회상하는 거라면, 다카기 나코오의 이야기는 아직 성공한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기 전의 고난의 역사가 주를 이루고 있다.

 

흥미로운 점 중의 하나는 알바를 해서도 먹고 살 수 있는 시스템이다. 우리나라도 일본을 따라 간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치솟는 거주비와 불안정한 일자리는 청년들을 벼랑 끝으로 몰고 있지 않나 싶다. 다카기 작가는 추첨행사 알바에, 수상쩍은 물건을 파는 알바직을 전전하면서도 자신의 꿈을 버리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이 그녀가 그린 성공기의 핵심이 아닐까.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알바 동료를 만나 생활의 꿀팁을 얻기도 하고 아낄 것은 최대한 아끼면서도, 꿈을 이루기 위한 비용(일러스트 학원비나 미술 재료)은 아낌없이 지출하는 모습이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다. 다만 돈을 벌기 위한 시간과 비용의 소모 때문에 알바 동료와 자연스레 멀어지는 장면은 너무 현실적이어서 오히려 이질적인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어쩌면 비정규직 삶과 먹고사니즘에 찌든 현대인의 일상이 전지구화되어가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작가가 다양한 알바 자리에 도전하면서, 특별한 기술 다시 말해 스펙이 없어 당하는 설움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다카기 작가의 고군분투는 계속된다. 생활전선에서 알바로 돈도 벌어야 하고, 친구 하나 없는 삭막한 도시에서 어떻게든 돈을 아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최소한의 비용으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도 고향에 있을 적에는 황당한 일을 겪었을 때, 푸념이라도 늘어 놓을 가족이라도 있었지만 도쿄에서는 무엇 하나 가능한 게 없다. 정작 더 무서운 건 생활고에 찌들어 꿈인 일러스트마저 게을리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점이다. 언젠가는 유카타 디자인 연구소에 알바로 채용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하늘을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지만 연구소의 사정으로 채용이 취소가 되면서 의기소침해 하는 24세 방년의 다카기 작가. 또 하나 1998년 일본사회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점은 장기간 이어진 불황 그리고 일러스트 작가를 꿈꾸는 작가지망생들이 엄청 많았다는 점이다. 다카기 작가가 일러스트 학원에서 만난 사람들은 어쩌면 현장에서 마주치게 될지도 모르는 라이벌들이 아니던가. 엄청난 작품을 그려 제출하는 N씨가 고향에서 자신처럼 유복한 가정에서 생활하며 일러스트에 전념할 거라는 작가의 추측은 보기 좋게 엇나가 버렸다. 그녀 역시 작가처럼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 두고 자신의 꿈을 좇아 도쿄로 나온 드리머(dreamer)였다. 그리고 작가보다 훨씬 더 치열하게 삶과 꿈에 도전하는 선배였다고 해야 할까.

 

아직 1권에서는 다카기 작가의 고난에 찬 회상기가 이어질 뿐이다. 어쩌면 어느 정도 자리잡힌 작가가 된 후에 그 시절의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계기가 돼서, 하루살이 알바생에서 잘 나가는 전업작가가 되었는지 2부를 기대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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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어 사전
나탈리아 긴츠부르그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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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건대 나는 이 책을 서경식 교수의 <내 서재 속 고전>을 통해 알게 되었노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그 당시에 제목은 출간된 제목과 사뭇 달랐다. 선인이 추천한 책을 찾아 헤매는 책사냥꾼의 아찔한 여정은 그래서 참 재밌다는 느낌이다. 작년엔 나오지 않았지만 올해 돌베개에서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구매를 결정했다. 주저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으니까. 우리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나탈리아 긴츠부르그는 미시사의 거장으로 알려진 카를로 긴즈부르그(출판사마다 표기법이 제각각이다)의 어머니이자 반파시스트 운동 중에 세상을 떠난 부군 레오네 긴츠부르그의 아내이기도 하다. <가족어 사전>은 그녀가 자신의 가족사를 바탕으로 20세기 초반 이탈리아의 현대사를 그려낸 수작이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 이것이 소설인지 사실인지 헷갈린 것도 사실이다. 완고한 생물학자, 교수인 아버지 주세페 레비의 영도 아래 자라난 나탈리아는 세상이 모두 파시즘화 되어 가는 시절의 가족의 일상을 소설화했다. 당신의 기준에서 품위에 벗어난 행동을 하는 이들을 ‘니그로’ 같다고 비난하고, 말썽꾸러기 아들들을 당나귀 같다며 힐난을 마지 않는 아버지, 아이들을 다섯이나 낳고서도 집안일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타인을 돕거나 친분관계에 더 집중하는 어머니 리디아를 비롯해서 아버지와 사사건건 부딪히면서 결국 반파시즘 운동에 나섰다가 위험천만한 탈출극 끝에 프랑스 파리로 망명한 마리오 오빠.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에 힘썼으나 훌륭한 의사로 거듭나게 되는 알레르토 오빠. 아드리아노 올리베티(이탈리아의 재벌 가문이다)의 열렬한 구애로 결국 그의 아내가 되는 파올라 언니. 나탈리아 역시 이탈리아 레지스탕스의 상징 같은 레오네와 결혼에 골인하지 않았던가. 올케 언니 중의 한 명은 아마 저명한 화가 모딜리아니의 딸이었지. 정말 대단한 집안이 아닐 수 없다.

 

레비 집안의 가족사를 들여다 보면 20세기 현대 유럽사를 주름잡은 유명인사들의 이름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게다가 이들은 유대인들이다. 유대인이라면 치를 떠는 이웃 독일과 추축동맹으로 전쟁에 뛰어 들었지만 무솔리니의 파시즘을 경멸하는 지식인들이 도처에 가득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됐다. 어쩌면 이탈리아 지식인들은 어릿광대 같은 두체가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될 줄 예상하지 못했던 게 아닐까. 사실 아버지 주세페는 집안에서 두체 같은 권력을 휘두르며 아내의 머리 스타일에 잔소리를 해대고, 자식들을 데리고 등산에 나서는 횡포를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자식들의 결혼에 대해 거의 반대 의견을 표명한다. 구시대 가장의 전형이라고 해야 할까. 동시에 개인의 자유를 옥죄는 국가 파시즘에 대해서는 경멸을 마다하지 않는다. 어쩌면 나탈리아 긴츠부르그는 이런 한 개인의 역설적인 이중성이야말로 현대 이탈리아의 비극이 아니었을까 이 작품을 통해 묻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자신의 집안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까지도 하나하나 짚어내면서 정작 독자가 관심을 가질 만한 자신과 남편 레오네 간의 로맨스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 어떻게 둘이 만나 결혼에 이르게 되었는지, 레지스탕스 운동을 하다가 이탈리아의 추축동맹 이탈 후 이탈리아를 점령한 독일군에게 체포되어 로마의 차디찬 감옥에서 비명에 간 자신의 사랑하는 남편 레오네의 이야기는 빈 칸으로 남겨 놓았다. 결혼하기 전까지 가정부를 부리는 일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던 작가가 결혼 후 자신의 가정을 꾸린 뒤에는 타인의 피곤과 노동에 의존하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각성하게 되었다고 술회한 부분이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다. 어쩌면 사회주의 운동가였던 남편의 영향 때문일까, 태어나면서부터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들였던 부르주아적 삶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는 시간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전쟁은 평온했던 레비 가족의 일상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전쟁의 불길은 긍정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는 어머니 리디아를 아버지 주세페가 수감된 감옥으로 인도해서 옥바라지를 하게 했고, 자신의 남편 역시 감옥을 수차례 들락거려야 했으며, 남편이 투옥된 뒤에는 자신과 아이들까지 체포될 위기를 겪기도 한다. 수많은 자신의 친구들이 유형지로 끌려가고 또 기차에 실려 알 수 없는 곳으로 실려 가기도 했다. 모두가 죽어가는 세상은 모든 삶의 방식을 바꾸게 강제한 모양이다. 그렇게 죽음이 도처에 널려 있던 그런 엄혹한 시절일수록 사람들은 삶을 상상하기 마련인가 보다. 뛰어난 문학가로 이탈리아 신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작가였던 친구 체사레 파베세가 준비한 죽음에 대해서도 작가는 덤덤하게 진술하고 있다. 날카로운 직관으로 다른 결점들을 커버했던 파베세가 일상에서 책을 읽을 시간도 공간도 없었다고 했던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였지만, 이탈리아의 해방공간 역시 혼돈과 무질서 그리고 방향상실로 점철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거의 반동에 가까운 보수주의자 아버지 밑에서 자란 오남매가 제각각 다른 성정을 가지고 독립된 인격체로 성장해 가는 과정도 신기했지만, 그들의 삶 속에 살아 숨 쉬는 이탈리아 반파시즘 저항의 역사와 다채로운 인물들과의 조화를 이룬 관게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에는 처음으로 나온 나탈리아 긴츠부르그의 책인데, 앞으로 또다른 그녀의 저작들도 만나볼 수 있었으면 하는 작은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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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독약 창비세계문학 28
엔도 슈사쿠 지음, 박유미 옮김 / 창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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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에는 나탈리아 긴츠부르그의 <가족어 사전>을 마저 다 읽을 계획이었는데 사무실에 책을 두고 가는 바람에 급회전에서 2년 전 동네 책축제 때, 창비 정기구독을 하면서 서비스로 받아온 엔도 슈사쿠의 <바다와 독약>을 읽게 됐다. 창비 설렉션 중에서 내가 이 책을 고른 아마 가장 큰 이유는 얄팍한 두께 때문이 아니었을까. 여전히 창비만의 독특한 표기법이 눈에 거슬렸지만, 뭐 책 읽는 데 큰 지장은 없었다. 가뿐하게 무시해 버리면 되니까. 굉장히 무거운 주제였는데 술술 익히는 바람에 하루 저녁에 다 읽을 수가 있었다. 모든 책을 이런 속도로 다 읽을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현실은 너무 다르다.

 

소설은 초반에만 등장해서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도쿄 외곽에 사는 못 도매상이자 기흉환자인 가 기흉 치료를 위해 만난 의사 스구로의 행적을 추적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촌마을 의사 스구로의 실력이 의심되지만, 공기 주입을 위해 주삿바늘을 찌르는 그의 냉철하면서도 정확한 솜씨에 의사로서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느낌이 묘하게 교차되면서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또 다른 한 축으로는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평온한 일상 가운데 주변의 보통사람들이 전쟁 중에는 지금과는 다른 얼굴을 가졌었다는 사실을 나레이터가 깨닫게 되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화자 역시 전쟁에 참가하긴 했지만, 끝무렵이라 난징대학살 같은 가증스러운 전쟁범죄에는 참가하지 않았던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나레이터 나는 우연한 기회에 자신을 치료하는 의사 스구로가 전쟁 중에 살아있는 미군포로를 생체해부한 전범이었고, 그 죄로 전후에 징역살이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소설은 나레이터에서 소설의 진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닥터 스구로의 이야기로 전환된다. 그 후 나레이터의 역할이 소멸되면서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야말로 모두가 죽어가는 세상에서 외과학부생 스구로는 한 명의 생명이라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일하는 대학병원에 소개된 무료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여념이 없다. 특히 자신이 처음으로 맡은 아지매에 대한 애착은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정도다. 이미 이때부터 자본의 힘은 사람의 생사여탈을 결정할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한편, 미군의 계속된 공습으로 인근 F(아마도 후쿠오카로 추정된다)가 전소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상황을 목도하면서 젊은 의대 학부생 스구로의 양심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게다가 의학부장 자리를 두고 암투를 벌이는 교수진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인간을 살리기 위해 존재한다는 의술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독자에게 묻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물며 독자도 이럴진대, 죽음의 소용돌이 속에서 악전고투를 벌이던 청년 스구로의 양심은 오죽했을까. 의학부장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무리하게 타베 부인 수술을 진행하던 하시모토 교수의 실수로 환자가 사망하자, 교수는 더 큰 무리수를 두기 시작한다. 아마 그들도 그 당시에 그런 결정이 후에 어떤 파국을 초래할지 몰랐으니까 그런 결정을 내렸겠지만. 그 결정은 포로로 잡힌 미군을 상대로 정말 끔찍한 생체실험을 하겠다는 것이다. 군의관과 군부까지 개입된 이 사건으로 전후에 열린 재판에서 관련자가 모두 처벌받고 주임교수는 자살했다고 신문기사는 전하는데, 엔도 슈사쿠 작가는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독자의 추론에 맡긴 것 같다.

 

한편, 제목에 등장하는 바다는 규슈 앞의 그것이다. 쉴 새 없이 쓸려오는 검푸른 빛깔의 바다라는 자연은 얼떨결에 생체해부팀 합류를 결정한 스구로의 양심을 묵직하게 타격한다. 그토록 자신이 살리려고 노력했던 아지매는 시바타 조교수의 결정으로 어차피 죽을 운명이니 성공확률이 지극히 낮은 수술에 동의하고 결국 폭격 와중에 자연사하고 만다. 동료이자 친구 고베 출신의 토다는 소설 후반에 드러나게 되지만, 이미 스구로가 갈등하는 양심하고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어쩌면 토다야말로 모두가 죽어가는 참혹한 세상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겠다는 그리고 양심보다는 수치심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본인을 상징하는 캐릭터가 아닐까. 들키지만 않으면 괜찮다는 비양심으로 무장된 토다는 자신의 절도를 다른 친구에게 뒤집어씌우고, 사촌과 간통하고, 자신의 아이를 가진 하녀의 위험천만한 소파수술을 직접 집도하고 내쫓아 버리는 냉혈한이다. 그렇기에 살아있는 포로들을 상대로 한 생체실험에도 벌벌 떠는 스구로를 대신해 나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소설에서 바다로 형상화된 자연이 스구로로 대변되는 양심을 대변한다면, 모두가 죽어가는 세상이라는 핑계로 양심을 마취시키고 비인간적 활동을 합리화시키는 일단의 의사들과 군부는 제목에 등장하는 독약이다. 어쩌면 전쟁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같은 아시아 민족을 위한다는 대동아전쟁의 실체는 결국 침략전쟁일 뿐이고 궁극적으로 그들이 가해자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결말 부분에 나오는 스구로 같은 개인이 그런 치명적인 독약이 조종하는 거대한 움직임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는 고백은 어쩐지 비겁한 변명처럼 들렸다. 그런 점에서 지금 같이 읽고 있는 나탈리아 긴츠부르크의 <가족어 사전>이나 페터 바이스의 <저항의 미학>이 그에 대한 답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문득 스구로의 양심을 그렇게 괴롭히던 규슈 앞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내가 처음으로 만난 엔도 슈사쿠 작가의 <침묵>에서 기리스탄과 후미에 서사를 통해 신의 섭리에 대한 도전을 만났다. 현실을 너무나 닮은 <바다와 독약>에서는 신이 부재한 세상에서 홀로 남은 인간의 양심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침묵>부터 다시 한 번 읽어야할 것 같다. 너무 무거운 주제에 한숨부터 나온다.

 

[뱀다리] 이 소설이 1986년에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한 번 보고 싶다. 냉혈한 토다 역은 와타나베 켄이 맡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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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16-06-30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비에서 나온 일본문학책을 몇 권 주문했는데 (여기서밖에 출간되지 않은 작품들이라) 일본어 표기법이 저도 거슬려서 왜 굳이 다르게 표기하는 것일까 궁금해하던 차에 레샥매냐님 리뷰를 보고 반가웠어요. 엔도 슈사쿠는 처음인데 이 책으로 시작해도 괜찮을까요?

레삭매냐 2016-06-30 21:37   좋아요 0 | URL
창비는 왜 국어표준 표기법을 따르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여튼,,,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대표작으로 권해 드리고
싶지만, <바다와 독약>이 좀 더 무난하지 않을까 하네요.
 
매직 스트링
미치 앨봄 지음, 윤정숙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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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으면서 참 특이하다는 생각이 든 건 화자가 바로 음악그 자체라는 점이다. 음악은 신처럼 전지전능하며 그가 사랑하는 제자의 삶에 대한 알파와 오메가를 모두 꿰고 있다. 그래서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주인공을 연상시키는 천재 기타리스트 프랭키 프레스토의 파란만장한 삶을 독자들에게 친절하게 들려 준다. 또 한 가지 서사에서 특이할 만한 점은 탄생에서 그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그것도 아티스트라면 누구나 꿈꿀 법한 무대에서 죽은 가히 기타의 신이라고 할만한 사나이 삶의 궤적을 추적한다. 어쩌면 미스터리 소설 찜쪄 먹을 정도의 프랭키가 구사하는 속사포 기타 연주 같은 그런 고도의 테크닉을 구사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소설을 읽을수록 독자가 빠져 들지 않을 재간이 있나 그래.

 

서두에 포레스트 검프를 언급했는데 로버트 저메키스의 감독의 영화에서 약간 어리숙한 우리의 주인공 검프가 미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사건들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개입했다면, 소설에서 프랭키 프레스토 역시 미국 팝역사의 굵직한 대표선수들과 자웅을 겨룬다. 캐나다에서는 엘비스 프레슬리를 대신해서 무대에 섰으며, 스페인에서 미국으로 가기 위해 밀항한 영국에서는 두손가락의 천재 기타리스트 장고 라인하르트에게 한 수 배운다. 듀크 엘링턴과도 만났으며, 미국을 대표하는 음악도시인 디트로이트와 내슈빌 그리고 뉴올리안스를 전전하며 당대의 대스타를 만나 갖가지 에피소드들을 엮어낸다. 그것은 마치 촌에서 강호로 나온 초짜가 고수들과 대결을 통해 비전의 무공을 배워 마침내 강호를 평정했노라는 무협지의 그것과 일맥상통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프랭키에게 진짜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한다 하는 그런 아티스트들이 아니라, 자신의 고향 비야레알에서 만난 장님 기타리스트 엘 마에스트로였다. 연주하기 전에 먼저 들으라는 그의 가르침에서부터 시작해서 부드럽게 기타줄을 다루라는 주옥 같은 명언들을 프랭키는 가슴 속 깊이 간직한다. 팝음악이라는 강호에서 고수가 되기 위해 엘 마에스트로의 레슨이 필요했다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연주를 하기 위해서는 사랑에 대해 배울 필요가 있었다. 미치 앨봄 작가는 그런 포인트를 놓치지 않고, 프랭키가 평생을 바친 연인 오로라 요크를 등장시킨다. 그것은 마치 검프의 제니에 대한 숭고한 사랑의 음악 버전이라고 해야 할까. 절묘하게도 그렇게 영화와 소설은 다르면서 또 한편으로는 유사하게 공명하고 있었다.

 

스페인 내전의 와중에 태어나 어머니를 잃고, 그를 키운 양아버지 바파 루비오마저 정어리공장 직원들의 밀고로 잃은 프랭키는 엘 마에스트로의 도움으로 독재자 프랑코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자유와 물질이 넘치는 나라 미국으로 밀항하는데 성공한다. 지금 같으면 어림 없는 이야기겠지만 그 시절만 해도 그렇게 국가 간의 왕래가 자유로웠다고 치부해 두자. 고모에게 버림받고 고아원에서 지내던 프랭키는 오직 기타 하나와 자신의 천부적인 재주로 음악계를 평정하기에 이른다. 동시에 여전히 자신이 꿈꾸는 애인 오로라를 언젠가는 찾고야 말겠다는 불굴의 신념으로.

 

소설은 프랭키 프레스토의 일대기와 그의 장례식에 참가하기 위해 모여든 명사들이 회고하는 그의 단편적인 삶의 이야기들이 버무려지면서 엔딩으로 치닫는다. 주관적이면서 객관적인 이야기의 균형을 잡아 주는 건 바로 음악이다. 한편 프랭키는 자신의 실력으로 바닥에서 치고 올라가 마침내 정상에 올랐지만, 인생사가 그렇듯 갑자기 찾아온 성공과 행운을 주체하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어렵게 찾은 오로라마저 떠나보내고 히피시대의 정점이었던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 최고의 연주와 더불어 끔찍한 자해로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다. 우리의 주인공 프랭키는 어떻게 다시 반등할 것이며, 결말에서 독자를 기다리고 있는 놀라운 반전은 또 무엇일까.

 

책을 읽다가 문득 어쩌면 작가가 영화화를 고려해서 소설을 집필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전 세계를 무대로 한 스케일과 촘촘한 이야기의 구성이 인상적이었다. 우리의 인생을 밴드에 비유해서 쉴 새 없이 가족이라는 밴드, 공동체라는 밴드, 친구라는 밴드, 연인이라는 밴드 같이 살면서 알게 모르게 유기적으로 결합하게 되는 관계를 밴드에 비유하는 장면도 정말 멋졌다. 어떤 영화에서 본 것처럼 사랑에도 유효기간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감정과 관계의 유효기간이 소멸하면 밴드는 해체되기 마련이고 또다른 만남을 향해 나가게 된다는 이야기가 솔깃하게 들렸다. 게다가 한 시절을 풍미한 멋진 노래들까지 등장하니, 할리우드에서 이런 소재를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을 것 같다. 감동 넘치는 인생 파노라마에, 스페인에서 출발해서 영국과 미국 그리고 뉴질랜드까지 커버하는 로케이션, 좋았던 시절의 향수를 자극하는 음악까지 나오면 더 바랄 게 없겠지 아마도. 좀 엉뚱항 상상이긴 하지만, 프랭키와 포레스트 검프가 만나는 설정은 어떨까. 프랭키 프레스토와 함께 한 시간은 정말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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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이의 생애 - 베르톨르 브레히트 카툰 클래식 10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기획집단 MOIM 글, 정성호 그림 / 서해문집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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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신문에선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 <갈릴레이의 생애>를 가지고 독서모임을 했다는 칼럼니스트의 글을 읽고 이 책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했다(사실 이것도 확실하지 않다, 하도 많은 글과 정보들을 접하다 보니 출처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마침 서해문집에서 나온 카툰클래식이 있다는 말을 듣고 도서관에 가서 냉큼 빌려다 읽었다. 내가 읽은 브레히트의 희곡은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이 유일했는데(오래 돼서 무슨 내용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제 두 번째 책으로 이탈리아 출신 위대한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삶을 다룬 책을 추가할 수 있게 되었다.

 

카툰클래식의 제목은 <갈릴레오의 생애>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그가 46세가 되던 해부터의 일대기를 브레히트가 희곡으로 만들었다. 카툰을 보면 두 사람의 대화체로 구성되어 있는 부분이 많아 역시 희곡으로 무대에 올려 상연하는 것으로 전제로 글을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갈릴레오는 베네치아에서 천체에 대한 연구로 이름을 날렸는데, 베네치아 공화국에서는 학문연구의 자유가 있었지만 학문연구를 위한 경제적 지원에는 공화국의 실질적인 이익을 주는 것이 아니라면 가난한 연구자가 연구를 계속할 수 없을 정도로 경제적 상황이 곤궁했던 모양이다. 마르크스주의자였던 브레히트는 그 점을 예리하게 파고든다. 네덜란드에서 이미 발명되어 판매되고 있던 망원경 아이디어를 가로채 연구자금을 공화국으로부터 뜯어내는 장면은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다.

 

어쨌든 베네치아에서 계속해서 연구활동을 할 수 없었던 갈릴레오는 피렌체로 이주해서 든든한 궁정후원을 받으며 연구에 전념한다. 문제는 갈릴레오가 살던 17세기가 여전히 교황청이 주도하는 종교의 강력한 영향과 규제 아래 있었다는 점이다. 15세기 코페르니쿠스 지동설을 주장한 이래, 기존의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가 주장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천동설에 반하는 모든 주장은 이단이자 신민들을 현혹하는 사악한 학설로 공격받았다. 이성으로 무장한 수많은 학자들의 가설을 통한 규명이 이루어졌지만, 가톨릭 도그마를 중시하는 신학자들은 그런 주장들을 일절 무시했다. 뛰어난 천문학자였던 망원경을 천체관측에 이용해서, 지구가 하늘에 붙박혀 있지 않고 태양을 중심으로 해서 자전한다는 사실을 규명하기에 이른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지만, 당시에는 성경에 기록된 진리에 어긋나고 기존 질서를 위협하는 위험한 주장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종교 지도자들은 설사 이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으리라. 과학(이성)이 권력에 도전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자신과 친분이 있었던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교황이 되어 자신의 연구가 인정받을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연구가 금지된 태양의 흑점연구를 지속하지만 결국 로마로 소환되어 종교 재판관에 서게 됐다. 같은 베네치아 출신으로 천문학자이자 회개할 줄 모르는 고집 센 이단자로 규정되어 화형당한 지오다노 브루노의 길을 따라 과학의 순교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학자로서의 굴욕을 견디고 살아남아 연구를 계속하고 기록을 남기느냐 하는 갈래길에서 빈손보다는 더럽혀진 손을 택했다. 어쩌면 갈릴레오는 이성을 대변하는 자신의 제자 안드레아의 말처럼 세속의 권력과 타협하는 대신, 진리의 순교자의 길을 택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의 선택은 달랐다. 그 결과 외동딸 비르기니아의 약혼자 루도비코가 파혼을 선언했고 자신 역시 재판 결과 종신 가택연금과 저술활동에 대한 엄격한 제약을 받게 됐다.

 

브레히트가 쓴 이 희곡의 하일라이트는 갈릴레오의 제가 안드레아가 연금 중인 갈릴레오를 찾아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과학이 새로운 시대를 인도하리라고 생각한 청년 안드레아에게 생존을 위해 지동설을 철회한 스승의 변명이 어쩌면 구차하게 들렸을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피렌체에 퍼진 죽음의 흑사병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시에 남아 연구를 하는 기개도, 이미 알려진 망원경에 대한 정보를 입수해 자신의 발명인 것처럼 꾸며 천체연구에 몰입하는 교활함도 가장 고통스러운 사형 방법이라는 화형과 종교 재판의 고문 앞에는 유한한 인간의 초라한 모습일 뿐이었다. 재판이 끝난 뒤, 그가 남몰래 했다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공식기록이 아닌 도시전설 같은 이야기라고 하는데 궁극적으로 종교적 도그마에 대한 과학정신의 승리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갈릴레오를 로마 교황청에서 신원하는데 걸린 시간이 자그마치 350년이라고 하니 놀랍다.

 

마르크스주의자답게 희곡의 작가인 브레히트는 과학의 발전에 따른 이성과 사유의 진보를 억압하는 주체로 당대 기득권을 대표하는 사제와 종교지도자들을 배치한다. 기존질서를 해치는 어떠한 사실도, 그것이 설사 규명된 진리라 할지라도 그들은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도 동시대인들에게 통용되는 이탈리아말이 아니라 학문 용어인 라틴어를 지껄여 대는 지식인들의 허위와 위선을 갈릴레오는 통렬하게 공격하기도 한다. 과학적 지식이 과학자 개인의 사리사욕이 아닌 모든 인류의 복리를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갈릴레오의 대사는 정말 대단하다. 브레히트는 세계대전 종식을 위해 가동된 맨해튼 프로젝트라 불린 핵무기 과학기술 프로그램이 결국 인류를 파멸로 인도할 수도 있다는 인문학적 통찰에 도달했을 지도 모르겠다. 카툰을 읽을 적에는 많은 생각들이 머리에 떠올랐었는데 정리가 잘 되지 않은 모양이다. 원전 희곡을 읽어야 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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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4-27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희곡을 어린이 위인전으로 편집한 듯한 느낌이 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