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어 사전
나탈리아 긴츠부르그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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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건대 나는 이 책을 서경식 교수의 <내 서재 속 고전>을 통해 알게 되었노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그 당시에 제목은 출간된 제목과 사뭇 달랐다. 선인이 추천한 책을 찾아 헤매는 책사냥꾼의 아찔한 여정은 그래서 참 재밌다는 느낌이다. 작년엔 나오지 않았지만 올해 돌베개에서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구매를 결정했다. 주저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으니까. 우리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나탈리아 긴츠부르그는 미시사의 거장으로 알려진 카를로 긴즈부르그(출판사마다 표기법이 제각각이다)의 어머니이자 반파시스트 운동 중에 세상을 떠난 부군 레오네 긴츠부르그의 아내이기도 하다. <가족어 사전>은 그녀가 자신의 가족사를 바탕으로 20세기 초반 이탈리아의 현대사를 그려낸 수작이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 이것이 소설인지 사실인지 헷갈린 것도 사실이다. 완고한 생물학자, 교수인 아버지 주세페 레비의 영도 아래 자라난 나탈리아는 세상이 모두 파시즘화 되어 가는 시절의 가족의 일상을 소설화했다. 당신의 기준에서 품위에 벗어난 행동을 하는 이들을 ‘니그로’ 같다고 비난하고, 말썽꾸러기 아들들을 당나귀 같다며 힐난을 마지 않는 아버지, 아이들을 다섯이나 낳고서도 집안일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타인을 돕거나 친분관계에 더 집중하는 어머니 리디아를 비롯해서 아버지와 사사건건 부딪히면서 결국 반파시즘 운동에 나섰다가 위험천만한 탈출극 끝에 프랑스 파리로 망명한 마리오 오빠.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에 힘썼으나 훌륭한 의사로 거듭나게 되는 알레르토 오빠. 아드리아노 올리베티(이탈리아의 재벌 가문이다)의 열렬한 구애로 결국 그의 아내가 되는 파올라 언니. 나탈리아 역시 이탈리아 레지스탕스의 상징 같은 레오네와 결혼에 골인하지 않았던가. 올케 언니 중의 한 명은 아마 저명한 화가 모딜리아니의 딸이었지. 정말 대단한 집안이 아닐 수 없다.

 

레비 집안의 가족사를 들여다 보면 20세기 현대 유럽사를 주름잡은 유명인사들의 이름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게다가 이들은 유대인들이다. 유대인이라면 치를 떠는 이웃 독일과 추축동맹으로 전쟁에 뛰어 들었지만 무솔리니의 파시즘을 경멸하는 지식인들이 도처에 가득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됐다. 어쩌면 이탈리아 지식인들은 어릿광대 같은 두체가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될 줄 예상하지 못했던 게 아닐까. 사실 아버지 주세페는 집안에서 두체 같은 권력을 휘두르며 아내의 머리 스타일에 잔소리를 해대고, 자식들을 데리고 등산에 나서는 횡포를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자식들의 결혼에 대해 거의 반대 의견을 표명한다. 구시대 가장의 전형이라고 해야 할까. 동시에 개인의 자유를 옥죄는 국가 파시즘에 대해서는 경멸을 마다하지 않는다. 어쩌면 나탈리아 긴츠부르그는 이런 한 개인의 역설적인 이중성이야말로 현대 이탈리아의 비극이 아니었을까 이 작품을 통해 묻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자신의 집안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까지도 하나하나 짚어내면서 정작 독자가 관심을 가질 만한 자신과 남편 레오네 간의 로맨스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 어떻게 둘이 만나 결혼에 이르게 되었는지, 레지스탕스 운동을 하다가 이탈리아의 추축동맹 이탈 후 이탈리아를 점령한 독일군에게 체포되어 로마의 차디찬 감옥에서 비명에 간 자신의 사랑하는 남편 레오네의 이야기는 빈 칸으로 남겨 놓았다. 결혼하기 전까지 가정부를 부리는 일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던 작가가 결혼 후 자신의 가정을 꾸린 뒤에는 타인의 피곤과 노동에 의존하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각성하게 되었다고 술회한 부분이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다. 어쩌면 사회주의 운동가였던 남편의 영향 때문일까, 태어나면서부터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들였던 부르주아적 삶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는 시간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전쟁은 평온했던 레비 가족의 일상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전쟁의 불길은 긍정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는 어머니 리디아를 아버지 주세페가 수감된 감옥으로 인도해서 옥바라지를 하게 했고, 자신의 남편 역시 감옥을 수차례 들락거려야 했으며, 남편이 투옥된 뒤에는 자신과 아이들까지 체포될 위기를 겪기도 한다. 수많은 자신의 친구들이 유형지로 끌려가고 또 기차에 실려 알 수 없는 곳으로 실려 가기도 했다. 모두가 죽어가는 세상은 모든 삶의 방식을 바꾸게 강제한 모양이다. 그렇게 죽음이 도처에 널려 있던 그런 엄혹한 시절일수록 사람들은 삶을 상상하기 마련인가 보다. 뛰어난 문학가로 이탈리아 신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작가였던 친구 체사레 파베세가 준비한 죽음에 대해서도 작가는 덤덤하게 진술하고 있다. 날카로운 직관으로 다른 결점들을 커버했던 파베세가 일상에서 책을 읽을 시간도 공간도 없었다고 했던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였지만, 이탈리아의 해방공간 역시 혼돈과 무질서 그리고 방향상실로 점철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거의 반동에 가까운 보수주의자 아버지 밑에서 자란 오남매가 제각각 다른 성정을 가지고 독립된 인격체로 성장해 가는 과정도 신기했지만, 그들의 삶 속에 살아 숨 쉬는 이탈리아 반파시즘 저항의 역사와 다채로운 인물들과의 조화를 이룬 관게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에는 처음으로 나온 나탈리아 긴츠부르그의 책인데, 앞으로 또다른 그녀의 저작들도 만나볼 수 있었으면 하는 작은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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