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의 목욕탕과 술
구스미 마사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지식여행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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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도쿄에 처음(그리고 지금까지는 마지막) 갔을 적에 지인과 에비스타운을 찾아 낮술을 즐긴 적이 있다. 주중이었는지 주말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모두가 바쁜 시간에 마시는 낮술 한 잔의 여유는 정말 최고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그 정도는 약과였다. 진짜 고수는 따로 있었다. <고독한 미식가>라는 만화로 유명한 구스미 마사유키라는 양반은 정말 대단했다. 이번에 만난 <낮의 목욕탕과 술>(이하 낮탕술)에서 모두 열 곳의 특색 있는 목욕탕과 시원하게 목욕을 한 후에 마시는 생맥주, 사케 그리고 소주의 향연을 한 권 책에 담아냈다. 두께도 얇아서 읽는데 부담도 없다. 고지식한 위인이라 차례대로 읽었지만, 아무 데나 펼쳐서 읽어도 무방할 것 같다.

 

벌건 대낮에 노렌(포렴)을 걷고, 보무도 당당하게 목욕탕을 향해 진군해 가는 기세가 남다르다. 이 대중목욕탕은 아마 우리나라하고 일본에만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남들이 열심히 일하는 사이, 굳이 무언가 핑계를 대지 않더라도 욕탕에 들어가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프리랜서 구스미 선생이 정말 부러웠다. 작가가 서식하는 도쿄는 물론이고 홋카이도를 필두로 해서 일본 방방곡곡을 누빈다. 아마 자신이 갔던 곳 중에서 특색 있거나 혹은 개인적 사연이 있는 목욕탕 열 곳을 선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곳은 몰라도 목욕탕은 모두가 홀딱 벗고 (점잖지 못한 표현이기는 하나 작가의 표현 그대로) 불알을 대놓고 다들 열심히 몸을 씻는데 열중하는 장면을 작가는 그대로 스케치해냈다.

 

욕탕에서 그가 만난 사람들에 대한 묘사도 생생하다. 어떤 이들은 고릴라나 바다사자 도사 혹은 성성이 아님 오랑우탄에까지 비유할 정도다(뒤에 두 표현 내가 지어낸 표현이다). 작가가 표현한 대로 홀딱 벗은 사람들이 바깥 세상에서는 무얼 하나 상상해 보는 것도 낮탕술 기행기의 또다른 재미다. 틀릴 수도 있고, 맞을 수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유쾌한 작가의 상상력이라고 한다면 그 또한 재밌지 아니한가.

 

내가 진짜로 감명 받은 부분은 만화작가인 자신의 직업을 딴따라, 비렁뱅이 혹은 타인들을 위한 바보라고 부르며 기꺼워 한다는 점이었다. 유쾌한 상상에서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기비하적인 패러디 그리고 또 늙은이들만 찾는 목욕탕에도 젊은이들이 많이 와서 젊은 기운이 넘쳤으면 한다는 발상도 참신하게 다가왔다. 그가 찾은 목욕탕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아무래도 욕탕 위에 뚜껑을 닫고 공연을 한다는 벤텐탕이었다. 목욕탕 록과 놀이정신의 결합이야말로 굳이 요한 하위징아의 어려운 호모 루덴스 개념까지 가지 않더라도 충분히 즐거운 아이디어가 아니던가.

 

또 한편으로는 이제는 점점 사라져 가는 대중목욕탕에 대한 아쉬움도 절절한다. 구스미 선생은 목욕탕에는 페인트화가 제격이고, 신사 지붕 스타일의 정통 도쿄식 목욕탕이야말로 제격이라고 선언하지만 어디 세태가 그러하던가. 손이 많이 가는 페인트화를 타일화가 대체하고, 카운터에서 사람이 손님을 받는 대신 리뉴얼한 자동발권기가 대세인 모양이다. 아, 능구렁이 구스미 선생이 어느 목욕탕에서 만난 성인용 DVD에 대한 일화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도대체 왜 그런 물건이 떡하니 탈의실 로커 위에 있는 걸까. 만약 그게 속을 알 수 없는 최신 마케팅 전략의 하나라면 정말 신의 한수가 아닐 수 없을 것 같다.

 

자자, 목욕탕 이야기도 좋지만 진짜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그렇게 목욕을 마친 구스미 선생은 치밀한 사전조사 혹은 추체험을 바탕으로 인근에 자리잡은 이자카야나 허름한 술집은 전전한다. 주말에 책을 다 읽고 어제 아침에 출근하는 길에 생각해 보니, 구스미 선생은 보통 이자카야들이 저녁 장사 준비를 하는 3시에서 5시 사이에 목욕을 느긋하게 즐기고 이제 막 영업에 들어간 첫손님으로 가게를 찾는 계획이었던 것 같다. 대단하군!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지인들과 함께 할 때도 있고 홀로 찾을 때가 더 많았지만, 시원한 맥주와 사케 그리고 소주를 연신 특색 있는 돼지볼살구이 같은 음식들로 독자의 흥취를 자극한다. 아니 당장에라도 선생의 뒤를 따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다.

 

그것은 마치 요즘 유행하는 먹방의 귀재들을 능가하는 문학적 먹방 아니 술방의 다름 아니었다. 왜 빨리 주문한 술을 대령하지 않냐는 투정이 귀엽기만 하다. 시원한 잔에 담겨 나오는 크림색 거품이 살짝 묻혀진 맥주를 그리고 삿포로에서 삿포로 맥주를 마시는 게 당연한 게 아니냐고 묻는 능청스러움에 그만 할 일을 잊어버린다. 원고료를 줄 수 없는 출판사 사장이 젊디젊은 작가를 데리고 목욕탕과 낮술 세계로 인도하는 장면도 압권이다. 어쩌면 그런 시간의 더께들이 쌓여서 낮탕술의 베이스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문득 구스미 선생의 발자취를 쫓아 일본에 건너가 기회가 된다면 그가 전술한 낮탕술 기행에 나서는 상상을 해본다. 문제는 언어다. 일본어를 못하는 위인이 낯선 술집에 들어가 영어로 주문을 날린다고 상상해 보니 다만 웃음이 나올 뿐이다. 메뉴 주문할 때 아는 말이라고는 “코히 비루” 밖에 없으면서 말이다. 내가 또 구스미 선생의 멋진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하나는 일찌감치 시원한 술과 다양한 안주거리들을 만끽하고, 본격적으로 퇴근길 단골손님들이 들이닥칠 무렵에는 조용히 자리를 나선다는 점이다. 역시 고수답다.

 

기타모리 고 선생이 상상 속에서 창조한 가나리야바 같은 곳이 부근에 있다면 당장에라도 회사 사무실을 뛰쳐나가 나만의 낮탕술에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지 못하는 게 그저 원통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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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13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거운 추석 보내세요. ^^

초딩 2016-09-14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복한 추석 연휴되세요~ 레삭매냐님~
 
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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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한국 문학의 부흥을 이끌고 있다는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드디어 읽었다. 맨부커상 수상 이후, 치솟는 판매고와 순댓국집에서 점심을 즐기는 할머니들까지 이야기하던 <채식주의자>를 그 열기가 한참 지나고서야 읽게 됐다. 다 읽은 소감은 역시나 독자를 불편하게 하는 그것은 여전하구나 싶었다. 그리고 이 책이 무려 9년 전에 나왔다는 점, 그리고 일련의 연작소설이라는 점 등이 흥미로웠다. 맨부커상 심사위원들이 이 작품의 어떤 점을 그렇게 높이 평가했는지 일개 독자로서 알 수는 없겠지만, <채식주의자>가 촉발시킨 것이 문화애국주의든 아니든 간에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면 그것으로 또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모두 3편의 중편으로 구성된 <채식주의자>의 내용은 비교적 간단하다. 모두 세 명의 다른 시선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이 이채롭다.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영혜가 어느날부터 꿈 때문에 육식을 거부하고 채식만을 고집한다. 첫 번째 이야기의 화자인 영혜의 남편은 그런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 일상의 안온함과 지극히 평범함을 사랑하는 남자에게 아내의 변신은 용서 받을 수 없는 그런 죄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아무리 책을 읽어 봐도, 영혜가 육식을 끊고 채식주의자로 변신하는 과정이 모호하기만 하다. 몇 번의 악몽을 꾸었다고 해서 평생 동안 지속해온 습관을 단숨에 바꾸는 것이 가능할지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어쨌든 남편은 극단적 채식에서 장모의 생신과 처형의 집들이날 벌어진 일련의 폭력과 자해, 발광 그리고 정신병원 입원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냉혹하게 결별을 선언하면서 무대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등장한 남자는 두 번째 화자 영혜의 형부다. 비디오 아티스트라는 그는 아내에게 들은 처제의 몽고반점(우습지만 나는 몽고반점 타이틀을 보고는 중국집 생각을 했다)이 주는 이미지의 저열한 유혹에 빠져 예술혼을 불사른다는 미명 아래 결국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고야 만다. 모든 파국이 그렇듯, 우연히 동생의 자취방을 찾은 인혜는 모든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순간 그들은 모두 새처럼 비상해서 끝을 냈어야 했던가.

 

 

다시 인혜가 세 번째 화자로서 바통을 이어 받아 달리기 시작한다. 자신이 과연 남편을 사랑했던가? 정신세계가 무너져 가족들도 내친 동생을 돌보고, 지우 때문에 그러지 못할 것 같은 남편과의 관계도 냉정하게 정리한다. 인혜는 축성산 정신병원에 입원한 영혜가 병원을 탈출하기도 하고 육식은 물론 모든 식사를 거부한다는 소식에 동생을 찾아 나선다. 하루가 다르게 여위어 가는 동생을 보며, 동생의 정신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가족 중에서 가장 멀쩡한 자신이 무너지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지옥 같은 현실 속에서 냉정하게 이어지는 일상에 대한 고찰은 정말 대단했다. 얼마 전 읽은 편혜영의 <홀>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다리가 무너지고 배가 가라앉고 건설현장에서 불이 나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되는 일상성의 주기적인 반복이 섬뜩해지는 순간이었다.

 

소설 <채식주의자>를 읽기 전부터 이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하나 하는 고민을 했다. 육식으로 상징되는 현실계의 폭력에 대한 페미니즘적인 저항으로 읽어야 하나? 개인적으로 이해할 수 없지만 예술혼에 불타는 어느 중년남성의 일탈로 봐야 할까? 어떤 해석도 적용이 가능할 것이고, 또 역설적으로 어느 해석도 적용되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군상들의 모습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점에서부터 시작해서, 그들이 벌이는 행각들이 불가해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아찔한 유혹을 발산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도대체 영혜의 (채식주의자로) 변신을 촉발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그녀가 꾼 꿈으로만은 설명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리고 그녀가 그 변신을 결심하는 순간, 내친 모든 것들이 주는 상징성을 보라. 가장 먼저 거추장스러운 껍데기에 불과한 남편을 내버렸고, 그 다음에는 자신의 울타리인 가족을 차례로 내려놓았다. 집들이에서 아버지가 행한 폭력에 대한 저항은 극단적 자해로 나타났다. 훗날 인혜가 후회하는 것처럼 과거에 그런 요소들이 제거되었다면 지옥 같은 현실의 아수라판이 재현되지 않았을까? 아마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에 누적된 폭력의 잔해들이 영혜의 극단적 저항을 불렀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황망하게 유탄을 맞은 영혜의 남편이 가장 불쌍한 존재가 아닐까.

 

 

비디오 아티스트를 자처하는 영혜의 형부는 또 어떠한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명백한 사실을 그는 과연 알고 있었을까? 자신의 행위가 나중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지 않았으리라. 그러기에 모든 책임은 처제의 몽고반점이 격발한 불타오르는 욕망을 자제하지 못한 그에게 있었다. 결국 그가 쫓은 색채와 이미지는 모두 허상이 아니었던가. 현실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도는 그를 대신해서 일상과 생계 그리고 자식을 책임진 아내 인혜에게 일말이라도 미안한 감정이 있었다면 이성이 행동을 금지했을 텐데. 그가 남보다 자제력이 부족하다는 말 따위는 하지 말자. 그런 점에서 그의 존재는 한강 특유의 불편함을 상징하는 집대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스스로를 나무라고 생각하는 영혜에게 삶은 괘념하고 싶지 않은 무엇이 아니었을까. 일절의 음식을 거부한 그녀를 가족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처절하게 설득하는 언니에게 “왜, 죽으면 안되는 거야”라는 질문이 돌아온다. 그것은 유한한 인간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지 않은가. 더 이상 사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지 못한 존재에게 어떤 대답을 해주어야 할까.

 

결국 <채식주의자>를 읽었지만, 맨부커상 이전의 작품처럼 이 작품 역시 대중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맨부커 인터내셔널 수상작이라는 이유로 이 책이 이 정도의 대중성을 얻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후 한강 작가가 쓸 책이 더 기대된다.

 

아, 이제 데보라 스미스가 새로 쓴 <Vegetarian>을 읽어봐야겠다. 마침 미리 사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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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의 봄 핵없는 세상을 위한 탈핵 만화
엠마뉘엘 르파주 지음,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 길찾기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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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백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체르노빌에서 원전사고가 터진 것이 지금으로부터 딱 30년 전의 일이다. <게릴라들: 총을 든 사제>로 처음 만난 프랑스 출신 일러스트 작가 엠마뉘엘 르파주의 그림을 체르노빌 방문기로 다시 만나게 됐다. 얼마 전부터 계속해서 보고 싶다고 생각만 하다가 오늘 드디어 읽을 수가 있었다.

 

다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2008년 엠마뉘엘 르파주를 비롯한 일단의 예술가 그룹이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 터지기 전, 가장 큰 핵재앙이었던 구 소련의 체르노빌을 방문해서 재앙의 잔재를 기록하는 프로젝트를 가동 중이었다. 데생악퇴르 그룹의 일원으로 체르노빌을 방문할 계획을 세우던 이들은 심각한 고민에 사로잡힌다. 그것은 바로 체르노빌 원전사고가 터진 지 22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방사능 피폭에 대한 위협이 가시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들은 체르노빌을 방문하는 동안 먹을 안전한 먹거리 확보부터 시작한다.

 

아무리 안전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방사능이 잔존하는 이상, 방사능 피폭이 초래할 암이나 갑상선 질환 같은 각종 질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는 현실이 제기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과연 이런 위험요소들을 무릅쓰고 프로젝트를 가동할 충분한 이유가 되는가라는 점에 대해 묻게 된다. 자라나는 엠마뉘엘의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필요하다는 식구들의 조언도 무시할 수 없다. 설상가상으로 평생 그림그리기를 업으로 삼아온 엠마뉘엘은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어쩌면 체르노빌이라는 이름이 가진 잠재적 위협에 대한 방어기제가 작동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민 끝에 르파주는 일단의 동료들과 체르노빌 행을 감행한다. 비행기를 동원한 신속한 방법보다 서구 유럽에서 폴란드를 거쳐 체르노빌에 도달하는 육로는 물리적 거리감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였다.

 

체르노빌 원전사태가 터진 1980년대는 여전히 냉전의 열기가 뜨거운 상태였다. 어느 정부나 그렇듯 공산주의 종주국이었던 구 소련 역시 최악의 원전사태를 숨기기에 급급했다. 방사능 피폭의 후유증을 예상하지 못했던 용감한 이들은 화염에 휩싸인 원전의 불길을 잡고 사태를 진전시키기 위해 일선에서 최선을 다하던 기술자들과 노동자들은 방사능 피폭으로 모두 사망한다. 방사능을 피하기 위해 수십만의 사람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고, 피폭된 2세에서 4세 수많은 아이들이 숨졌다. 어디 그 뿐이던가? 체르노빌의 최전선에서 싸우던 처리반요원들이 없었다면 서구 사회 역시 안전할 수 없었으리라고 작가는 진단한다.

 

금지된 도시에는 현재에도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데생악퇴르 그룹은 체르노빌 부근에 거처를 구하고 활동을 개시한다. 예술가 집단들은 이방인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현지인들과 조금씩 소통하고, 그들의 내면세계에 접근을 시도한다. 식탁에서 음식과 보드카를 나누는 교제야말로 아이스브레이킹의 최고의 방법이었지만, 과연 체르노빌 사람들이 권하는 음식을 먹어도 되는지 프랑스 예술가들은 고민에 빠지지만 곧 주저 하지 않고 음식을 나누기 시작한다.

 

엠마뉘엘 르파주는 체르노빌의 암담한 현재를 그려 서방세계에 진실을 알리겠다는 사명으로 체르노빌을 찾았지만, 체르노빌의 아름다운 이면을 발견하고 고민에 빠진다. 틱 틱 거리며 라돈 수치를 보여주는 방사능 측정기를 따라 움직이는 작가의 손길은 곧 원래의 솜씨를 되찾는다. 술자리의 달아오를 흥취에 젖어, 현지인들을 희화화하는 그림을 그리기도 하지만 곧 예술가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 서방인들이 보길 원하는 암울하고 묵시록적인 그림 대신, 당시 체르노빌의 현실을 그리고 싶다는 자신의 바람에 따라 르파주는 그야말로 붓 가는 대로 그리기 시작한다. 그렇기 바로 그게 장인의 예술혼이 아니었던가.

 

자신들을 덮친 핵 재앙으로부터 달아나는 대신 맞서 싸우는 체르노빌 사람들에게서 작가는 희망을 그린다. 체르노빌에서 인류 스스로를 파괴할 수도 있는 기계문명을 대표하는 방사능 오염 물질은 후크 선장의 한쪽 손목을 뺏어간 악어처럼 사람들을 노리는 이미지로 형상되어 등장한다. 그리고 안전하고 저렴하다는 이유로 곳곳에 지금도 지어지고 있는 원자력 발전소가 어느 순간 재앙으로 돌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바로 이웃나라 후쿠시마 사태에서도 뻔히 보고서도 각성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체르노빌의 봄>을 통해 되돌아보게 됐다. 조금 불편하고 에너지를 덜 소비하는 한이 있더라도, 기존 17기의 원전을 폐쇄하기로 결정한 독일의 선례대로 그린에너지와 재생에너지를 개발해서 누구도 원하지 않는 재앙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원전 대책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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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마음산책 짧은 소설
이기호 지음, 박선경 그림 / 마음산책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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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독서는 언제나 그렇듯 충동적이다. 이기호 작가의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도 그렇게 충동적으로 구매해서 읽었다. 모두 40편의 짧은 소설이 실린 소설집에는 2016년 대한민국을 읽을 수 있는 모든 코드들이 집대성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그래서 그렇게 빨리 읽을 수가 있었을까? 아니 어쩌면 온라인 지면을 메우는 단신 뉴스들을 읽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나는 먼저 청년들의 가장 큰 고민인 취업을 다룬 글들이 눈에 들어왔다. <비치보이스>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학도 별 볼 일 없이 지내던 청년 셋이 여름을 맞아 멋진 비키니 입은 여대생들과 썸씽을 꿈꾸며 달랑 편도 교통편을 이용해서 바닷가를 찾는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휴가지의 비싼 바가지 요금과 당장 아르바이트 전선에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현실 뿐이었다. 그들의 한바탕 모험기는 결국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무더운 여름날 주차장 알바를 하다가 살이 데이는 고통으로 끝을 맺는다. 무위도식하는 청년들에게도 남들 같이 느긋한 휴가를 즐기고 싶다는 욕망이 살아 꿈틀거리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해야 할까. 역시 취업전선에 나섰지만 계속 실패하던 청년이 참 쉽죠잉~을 남발하는 스타 쉐프의 초간단 또띠아 만들기에 도전했다가 밀대 대용으로 사용하던 소주병을 깨먹으면서 곤히 잠든 아버지와 어머니를 깨우는 불상사로 마무리되는 이야기는 또 어떤가. 아무리 일 없이 지내는 백수라지만, 배고픔과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는 이라는 인간 기본의 생리 현상은 무시할 수 없는 모양이다. 아, 그리고 누가 쉽다고 해서 누구나에게 적용이 되는 건 아니라는 간단한 진리로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생활전선에 시달리다가 극단적 결정을 내린 남자의 이야기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주물공장의 부도로 결국 졸음쉼터에서 만오천원 짜리 화덕과 번개탄으로 생을 마무리지으려던 남자의 결심은 느닷없이 등장한 트럭 운전사 아저씨의 방해를 받는다. 라이터를 빌려 달라고 하질 않나, 간이 잘밴 고등어를 싸게 넘겨 주겠다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또하나의 희비극은 삼만원에 주겠다는 고등어를 살 돈이 없다는 거다. 마지막에 트럭 운전사 양반은 주인공이 삶을 마감지으려던 화덕으로 별도 좋은데 고등어나 구워 먹잔다. 그리고 남자의 흘러 내리는 눈물. 그런 거 보면 이 세상은 여전히 살 만한 곳이 아닐까 싶어진다.

 

이승에서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으면 저승 가서 그만큼 받게 된다는 전형적인 인과응보식 이야기도 진부하지만 울림이 쎄다. 우리는 바쁘고 피곤하며, 시간이 없다는 갖가지 이유를 대며 우리를 이렇게 키워 주신 부모님의 마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던가. 아버지 제삿날 돌아가셔야 자식들이 두 번 걸음하지 않는다는 어머니의 자식걱정 앞에 정말 할 말을 잃어 버렸다. 그 자식들은 나이 드신 어머니의 그런 걱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몫이 될 수도 있었던 재산 나부랭이를 두고 입씨름을 벌인다. 이런 대조야말로 구차한 오늘을 사는 우리네 초상에 대한 저격이 아니였던가. 층간 소음으로 위층에 사는 우락부락한 남정네를 찾아간 아래층 남자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손주를 돌아가신 영감으로 착각하고 뒤쫓는 기괴한 장면을 보고 할 말을 잃어 버렸다. 주변의 이런 소소한 이야깃거리들이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멋지게 탈바꿈할 수 있다니 놀랍기만 하다.

 

공무원 생활을 은퇴해서 농사를 시작한 아버지가 벌이는 에피소드도 만만치 않다. 평생 서류 작업만 해오신 양반이 농작물 경작법에 대한 노하우를 가지고 계실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결국 책을 보고 유기농 토마토를 손주들에게 물리도록 공급하시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출발하셨지만, 농약으로 범벅이 된 토마토를 한 아름 안겨 주시는 상황은 정말. 그 이듬해에는 식용 옥수수 대신 사료용 옥수수를 보내시는 통에, 주인공의 어머니가 전화로 먹지 말라고 만류하기에 이른다. 한편 잘하던 숯불돼지갈비집을 때려치고 시의원 선거에 나갔다가 처참한 득표수를 기록한 친구를 말리는 당부 편지도 또한 일품이다. 결국 당선도 되지 못하고 숯불구이집도 망하고, 대신 통닭집을 운영하던 중에 때가 되어 다시 시의원에 도전하겠다는 친구에게 차라리 시의원 연봉이 탐나서 업종전환을 시도하는 게 아니냐고 조심스럽게 묻는다.

 

외국인 백만시대에 바다 건너 저 멀리 아일랜드의 골웨이라는 곳에서 온 아일랜드 출신 원어민 선생님은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술을 마셔대는 한국 풍습에 혀를 내두른다. 아일랜드 사람들도 술이라면 못지 않은데, 이곳과는 차원이 다르다. 누가 배달의 민족이 아니랄까봐 낮밤 없이 피자와 치킨이 배달되는 동방예의지국 코리아에서는 특히 연말이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환송회와 송년회를 빌미삼아 말아 마시고, 꺾어 마신다. 결국 우리의 주인공 데이비드 로지 씨는 속병이 나고, 골웨이의 한가한 펍에서 마시는 맥주가 그리워지기에 이르렀다는 말씀이다.

 

표지에도 등장한 <아파트먼트 셰르파>에 대한 풍자는 천민자본주의가 만연한 현 세태를 예리하게 꼬집는다. 원동기 면허증 같은 건 필요 없고 튼튼한 체력을 요구하는 점주의 질문에 주인공은 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25층의 위용을 자랑하는 치킨집의 최대고객 행복아파트는 배달원에게 엘리베이터 사용을 금지한단다. 배달의 편리함은 좋지만, 치킨을 배달하는 청년에게 공동전기료가 부담되는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하라는 강제에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게 그냥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냐고 한다면 정말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모르시는 말씀이다. 이렇게 현실과 문학적 허구를 넘나들면 종횡무진 글을 써제끼는 이기호 작가의 글을 읽다 보니 어느새 새벽녘이 되었더라.

 

단편소설의 핵심은 삶의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신형철 평론가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충분히 이기호 작가의 짧은 소설들은 우리네 삶 속에 덕지덕지 묻은 그런 진실들을 캐내고 있다. 너무나 현실을 복제한 것 같은 이야기 속에 감동을 먹어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했다가, 묘하게 비튼 풍자에 웃음을 빵빵 터트리기도 했다. 오락적 차원에서라면 정말 별평점 열 개를 줘도 모자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순전히 미스터 버티고 서점 사장님의 특별한 띠지로 읽기 시작했는데 그야말로 백점만점이다. 역시 띠지 글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따뜻한 봄날의 햇살 같은 단편소설집

이런 소설이면 정말로 잘 팔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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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08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 분량이 짧아서 그런지 책을 빨리 읽으셨군요. 전 단편집 한 권 읽는데도 하루 이상 걸려요. ㅎㅎㅎ

레삭매냐 2016-09-10 17:37   좋아요 0 | URL
분량이 짧기도 하지만 너무 재밌어서 읽는 속도가
붕붕 났습니다.
어떤 책은 얇아도 진도가 팍팍 나가지 않을 때가 있더라구요.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박연선 지음 / 놀 / 2016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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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방면에서 다양한 장르의 글을 잘 쓴다는 박연선 작가의 한국형 코지 미스터리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를 읽었다. 여름에 자고 나니, 아침에 가을이 되었더라는 날씨치럼 그렇게 푹푹 찌던 폭염이 드디어 물러가고 가을이 도래했다. 그렇게 계절의 전환기로 접어드는 늦여름에 딱 맞는 재밌는 미스터리 소설로 폭염을 몰아낸 것 같아 기분이 좋다.

 

네 소녀 실종사건이라는 15년 전, 운산면 두왕리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파헤치는 수사관 역할을 방년 21세 처녀이자 삼수생 강무순 씨가 캐스팅됐다. 그녀를 서포트하는 조연 역에는 종갓집 소년 꽃돌이(유창희)와 무슨의 할매이자 폭력노파 홍간난 여사를 배치했다. 장르물이라고 해서 굳이 심각할 필요가 없다고 박연선 작가는 선언한다. 얼마든지 유쾌할 수 있다는 가능성애 도전했다는 느낌일까.

 

드라마와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일가를 일군 작가답게 마치 드라마 대사를 치는 듯 호흡이 빠르고 경쾌하다. 누군가에게는 비극으로 기억될 네 소녀 실종사건을 다임개술(타입캡슐)이라는 지난 시절에 유행했던 소재를 이용해서 외부에서 투입된 강무순이가 느슨해 보이지만 무언가 알 수 없는 비밀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를 구성지게 파헤친다. 무순 역시 15년 전에, 비극의 현장에 가찹게 존재할 수 있었던 그런 상황이었지만 위기를 모면하고 할아버지의 상을 당해 홀로 계신 홍간난 여사를 위무하고 보필하라는 특명을 받고 두왕리에 잔류하게 되었다.

 

무순과 꽃돌이는 팀을 이루어 보물상자이길 바랐던 다임개술 안에 들어있던 몇 가지 단서들을 빌미로 네 소녀 실종사건에 연루된 당사자들의 운명을 한 꺼풀씩 차례로 벗겨낸다. 첫 번째 주자는 종갓집 아기씨로 만인의 연인이었던 유선희, 마을의 소문난 말썽꾼이었던 유미숙, 목사관의 둘째딸이자 무순을 잘 챙겨 주던 조예은 마지막으로 효녀로 유명했던 황부영의 과거와 현재에 박연선 작가는 소설의 포커스를 정조준한다. 문득 누군가의 생과 사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희비가 교차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매 챕터의 끝에 주마등이라는 코너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의 독백도 등장한다. 아무래도 네 소녀 실종사건의 키를 쥔 것으로 보이는 신원불명의 캐릭터의 이야기는 코지 미스터리 소설의 긴장감을 한껏 고조시키는 역할을 무난하게 수행한다. 꽃돌이 소년이 진중하게 무게를 잡는 역할을 해냈다면, 폭력노파 홍간난 여사는 그 반대편에 서서 가볍지만 두왕리 대소사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오지라퍼로 종횡무진 활약한다. 다수의 작품활동을 통해 캐릭터의 밸런스에 대한 감각을 익힌 덕분이라고나 할까. 지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경계선을 잘 유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코지 미스터리답게 어쩌면 그런 균형감각이 중요했을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눈여겨 본 점 중의 하나는 다른 건 몰라도 드라마 시작하는 시간 하나는 칸트 뺨치는 정확도를 자랑하는 드라마교의 열혈신자인 홍간난 여사를 앞세운 드라마 비판이다. 천편일률적인 내용의 드라마 전개를 예상하는 홍간난 여사의 숭악한 손녀 무순도 예외는 아니다. 빤한 소재를 반복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제작진의 시청률 타령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다시 네 소녀 실종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났을 때, 두왕리를 습격한 언론에 작태에 대해서도 작가의 비판은 냉정하고 준엄하다. 그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알 권리를 두왕리 사람들이 아니라 정말 큰 비리를 저지른 정치인과 기업인들에게 추상같이 적용시키기만 해도 우리의 국격이 상승하지 않을까?

 

후반으로 갈수록 작가는 소설 곳곳에 깔아둔 밑밥에 걸린 이야기들을 주낙 낚듯이 수확한다.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원인과 결과 그리고 범인 설정이야말로 모든 미스터리가 갖추어야할 기본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꼭 꼬집어 이야기할 수 있는 결핍도 존재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참을 만한 소설의 가벼움 때문이라고 한다면 과언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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