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늑대의 시간
김경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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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나올 예정이라고 했을 때부터 기대한 책이었다. 어제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갔다가 신간 코너에 놓여 있는 것을 보고는 냉큼 빌려왔다. 이미 누가 봤는지 책 접힌 흔적이 있었다. 그리고 마침 당장 읽어야 할 책이 없어서 바로 읽기 시작했다. 김경욱 작가는 1982년 4월 26일 경상남도 의령군 궁류면에서 벌어진 이른바 우순경(우범곤) 사건을 모티프로 삼았다. 소설을 읽으면서, 인터넷에 나와 있는 우순경 사건과 비교해 보니 주인공의 이름과 실제 지명들을 픽션화했다. 소설의 특이한 점은 가해자의 목소리 대신, 차례대로 등장하는 피해자들의 입장이라는 다양한 차원에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 굴곡진 한국사의 이모저모를 대입시켰다는 점도 눈여겨 볼 만하다.

 

기이하게도 소설은 1938년 미래 미군 제식소총 M1 카빈을 개발하게 되는 밀주업자 제이슨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김경욱 작가는 미국 체류 하던 중에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총기사건을 계기로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했던가. 기존의 윈체스터 라이플에서 가스압력으로 발사속도를 개량한 신형 총기 개발에 얽힌 스토리가 44년 뒤 동방의 어느 나라에서 벌어진 무시무시한 총기난사사건의 원형을 제공했다는 가정이라고 해야 할까.

 

실제 지명을 바꾼 궁지면 총기사건은 어려서부터 열패감에 사로잡힌 한 순경의 치정으로부터 시작됐다. 자칭 해병대 특등사수이자 빛나는 청와대 근무 이력을 가진 황 순경이 촌마을의 순경으로 발령이 나면서부터 비극은 잉태되었다. 혼례도 올리지 않은 채, 마을처녀와 살림을 차린 것부터 마을의 여론을 이끄는 오피니언 리더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게다가 술만 마시면 ‘미친 호랑이’가 되는 성정도 한몫 거들었다. 박봉의 월급에 촌구석에서 자신을 업신여긴다는 열등감에 사로잡힌 우 순경, 아니 황 순경은 상급자가 마을을 비운 틈을 타서 지서 무기고에서 탈취한 카빈 소총과 수류탄 그리고 다량의 실탄으로 무장하고 끔찍한 사람사냥에 나선다.

 

당시 사건을 다룬 기사를 비교해 보면 김경욱 작가는 사실에 충실히 기반한 서사를 이끌어 나간다. 황 순경은 술 마시고 홧김에 저질렀다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한 계획으로 범행을 주도한다. 우선 마을과 외부를 연결하는 우체국에 난입해서 직원들에게 총을 난사하고, 문제의 발단이었던 아내 손미자와 처식구들을 몰살시킨다. 그 뒤로도 황 순경은 불이 켜진 집들을 찾아다니며 범행을 계속한다. 김경욱 작가가 후기에서 썼듯이 빛이 어둠을 불러들인 격이라고 해야 할까. 주민의 치안을 담당해야 하는 경찰관이 어둠을 쫓는 게 아니라 오히려 어둠 그 자체였다는 사실은 당시 지배권력이었던 신군부의 모습과 자웅동체로 다가왔다.

 

사건이 발생했다는 보고를 접수하고 나서도 초동대처를 제대로 하지 못해 피해자수를 늘린 치안 및 행정라인의 무능은 32년 뒤에도 그대로 반복됐다.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을 탈취한 정권은 자신들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어불성설의 정치적 구호인 정의구현을 외쳤지만, 실제 이런 희대의 사건이 발생하자 사실을 감추기에 급급했고 언론통제와 지역개발에 따른 물질적 보상이라는 당근으로 비극을 덮어 버렸다. 김경욱 작가는 그에 앞서 날벼락이 떨어진 궁지면에 조용하게 살던 이들이 안고 있는 우리사회 제반에 걸친 이슈들에 착점을 맞춘다. 개천에서 용난다라는 시골전설을 믿고 삼대독자 아들을 법대생으로 만들었지만, 신학을 공부해서 신부가 되길 원하는 아들은 황 순경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되고 만다. 열아홉 꽃다운 나이의 아들을 한국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초신 전투(장진호 전투)에서 잃은 수잔 여사와 펜팔을 우정을 쌓아 가던 전화교환원 손영희 역시 비명에 스러진다. 마구잡이로 벼락같은 불을 내뿜던 해병대 특등사수의 카빈 소총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열패감에 젖은 이십대 청년의 분노는 그렇게 조용한 시골마을을 집어삼켜 버린 것이다.

 

작가는 <개와 늑대의 시간>을 단지 일개 싸이코패스의 일탈적인 행동으로 분석하지 않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던 모든 문제들을 되돌아보게 하는 구조로 독자를 인도한다. 궁지면은 어쩌면 압축 고도성장으로 대변되는 우리 사회가 안은 부조리의 축소판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한국전쟁 이후 남도를 휘젓던 마지막 빨치산 부대원 56명 전원 사살로 끝난 비극의 현장이기도 했고, 제로센 전투기를 몰던 가미카제 특공대원에서 중국인민해방군의 일원으로 변신해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토굴생활을 하던 전직 빨치산도 등장하고, 보도연맹원으로 무고하게 전쟁 중에 학살당한 후예로 숨죽이며 살던 이들의 한 맺힌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조국근대화라는 미명으로 월남전에 용병으로 참전했다가 ‘에이전트 오렌지’의 후유증으로 다리를 잃은 ‘두팔로걸어’ 베테랑의 전설도 씁쓸하기만 하다. 비극의 현장과 역사적 담론을 오가며 종횡무진 달리던 작가는 강호의 초절정 고수 파천황을 창조한 무협지 대가 계룡생을 숭배하던 고교생의 이야기로 큰 웃음을 선사하기도 한다. 신군부의 3S 정책의 일환으로 한창 인기몰이를 하던 프로야구계에 진출하려던 초등학생 고동배의 이야기로 비극의 서사는 마무리가 된다.

 

사실에 충실하면서도 김경욱 작가 특유의 눙치는 유머감각을 엿볼 수 있는 <개와 늑대의 시간>은 질곡으로 가득한 한국현대사를 관통하는 의식을 선사한다. 작가는 건국 이래 최악의 총기난사 사건이라는 심각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이야기를 나락으로 떨어뜨리지 않는 절묘한 균형감각을 보여준다. 오히려 다양한 개성을 가지고 차례로 나오는 등장인물들에게 소설적 핍진성을 부여해서 우리 사회가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점들을 되돌아 볼 수 있게 해주는 특별한 계기를 제공해준 점을 무엇보다 높게 평가하고 싶다. 모쪼록 어둠 속에서 빛을 구도하는 그의 소설적 여로가 계속해서 빛을 발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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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편애 - 전주부성 옛길의 기억
신귀백.김경미 지음 / 채륜서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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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애 : 어느 한 사람이나 한쪽만을 치우치게 사랑함.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와 있는 ‘편애’에 대한 사전적 정의다.

 

역사를 전공해서 전국 두메산골 안 가본 곳이 없다고 자부했지만, 막상 전주에 가본 적이 없었다. 학교도 다 졸업하고 나서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전주를 찾았다. 학창시절처럼 치열하게 사전에 공부를 하고 간 것도 아니고, 답사를 위해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본 것도 아닌 그런 어정쩡한 여행이었다. 그런데 내가 처음으로 찾은 전주는 참 기분을 좋게 해주는 그런 곳이었다. 그래봐야 토박이도 아니고 수박겉핥기 식의 유람이었지만 만족스러웠다. 그 뒤에도 두 번 더 전주를 찾았는데 그 때마다 즐거운 추억으로 가득한 여행이었다. 이번에 신귀백 김경미 씨가 펴낸 <전주편애>를 접하면서 지상으로 네 번째 여행을 나선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저자들은 호남의 소문난 예향이자 볼거리 먹을거리가 넘쳐나는 전주부성으로 독자를 유혹한다. 우선 간략한 역사까지 곁들여서 전주가 조선왕조의 뿌리였고, 호남이 없다면 국가도 없다는 말처럼 요지 중의 요지였다는 설명들이 주르르 달린다. 여말 왜구의 침략으로 도성의 방비가 중시되어 수차례 중건되었으며, 동학운동 시절에는 폐정개혁을 요구하는 동학군의 집강소가 설치되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 전주부성의 모습은 18세기 전라감사였던 조현명의 노력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대역사는 백성들의 노동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백성들의 동원을 최소화하는 치밀한 계획으로 추진했다고 한다. 이런 목민관이야말로 현재에도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닐까 싶다.

 

많은 역사가 있겠지만 어쨌든 한 마디로 말해 전주는 호남의 정치경제적 중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제시대에는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도성의 곳곳이 헐리고 신작로와 철도가 들어오면서 객사를 비롯한 수많은 건축물들이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편리와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우리의 옛것들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계속해서 묻게 된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전주가 지금은 영화제와 비보이의 도시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구술도 흥미롭다. 이렇게 스토리텔링이 있는 역사를 품은 볼거리 뿐만 아니라 먹거리 또한 전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일 게다. 차이나타운은 개항장 인천에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전주에도 유명한 차이나거리가 있고, 화교학교도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 새로 알게 됐다. 아직 맛을 보지 못한 전주 명물 ‘물짜장’에 대한 이야기도 절절히 이어지니, 다음번에 전주를 찾게 되면 예의 물짜장과 <일품향>의 만두도 꼭 먹어 보리라.

 

사실 전주하면 바로 연상되는 게 바로 한옥마을이지만, 저자들은 <전주편애>에서 한옥마을까지 아우르는 대신 사대문안 부성의 이모저모와 그 안에 살던 이들의 삶까지만을 다루고 있다. 전주 출신의 걸출한 야구선수인 김봉연과 어린왕자 김원형 그리고 박경완에 대한 스토리도 재밌게 들었다. 질옥, 다시 말해 돈감옥이라고 호칭하는 서민들의 금융기관이라고 할 수 있었던 이젠 모두 사라져 버린 전당포에 대한 추억도 아른하게 다가왔다. 전당포를 이용해 보진 않았지만 어린 시절 곳곳에서 보이던 전당포의 추억을 되살리니 그 또한 별미가 아닌가. 세 번의 전주행에 앞서 <전주편애>를 읽었더라면 못미더운 블로그 대신에 아주 요긴하게 도움이 되었을 텐데 하고 갖가지 산해진미가 펼쳐진 사진과 막걸리 상상만 해도 절로 도는 군침에 절로 혀를 차게 된다.

 

전주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한 이 책을 읽고 나니 저자들의 전주에 대한 사랑, 아니 편애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나도 슬쩍 그 편애에 동승해 볼까 하는 얄팍한 꼼수에 문득 웃음이 났다. 이 책을 껴안고 네 번째로 전주에 가게 되면, 눈과 입이 얼마나 호사를 누리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옥의티] 역사적 사실과 다른 것 하나 지적하고 싶다. 260쪽 ,영조가 아니라 정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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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나의 느긋한 작가생활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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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나서 한참 뒤에 리뷰를 쓰다 보면 그 책을 읽을 적에 가장 강렬한 기억을 오롯하게 뽑아낼 수 있다는 점이 참 좋다. 그렇다면 지난달에 읽은 마스다 미리 작가의 자전적 만화에서 가장 기억이 남는 장면은 무얼까? 바로 그건 편집자와 미팅하러 나간 작가에게 의외로 독서량이 많지 않은 작가를 위해 편집자가 서점으로 데려가 직접 책을 골라주는 장면이었다. 어떻게 보면 부끄러울 수도 있는 이야기겠지만, 마스다 미리 작가는 그런 이야기조차도 자신의 삶을 이룬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가감 없이 그려냈다. 이 정도로 솔직한 작가로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특히 야마다 에이미를 추천하는 예의 편집자의 센스에 정말 한 방 먹었다.

 

최근에 읽은 <뷰티풀 라이프>의 작가 다카기 나오코 작가도 그랬지만, 마스다 미리 작가 역시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26세에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겠다는 청운의 꿈을 안고 오사카에서 상경했다고 한다. 하지만 제목에도 나오는 것처럼, 그리고 어려서부터 자라온 가정분위기 때문인지 느긋하다 못해 조금은 답답해 보이기까지 하다. 다카기 나오코 작가 같은 절박함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여러 편집자와 일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됐지만 잘 맞지 않는다면 역시 느긋하게 패스시켜 버리고 달콤한 거나 먹으러 가자 이렇게 마음 먹을 수 있는 여유가 정말 부러웠다. 먹고사니즘으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에 대한 부러움이라고 해야 할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는 무한자유에 한 표 던지고 싶어라.

 

하지만 역시 자신이 찾고 있는 무언가를 찾을까 하는 마음에 소재사냥에 나서는 그녀의 모습에 작가가 받는 스트레스의 일면을 보았다고나 해야 할까. 그래서 작가는 버섯 강좌를 찾거나 쌍둥이바람초 관찰모임, 밤에 산을 하이킹 같은 특이한 행사에도 부지런히 출석한다. 하긴 그런 이야기들이 하나둘씩 쌓여 오늘날의 마스다 미리 작가가 탄생한 거겠지 싶다. 어린 시절 공부를 못했다고 하면서, 그래도 부모님들이 건강하게 자라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격려해 주셨다고 했지 아마. 모두가 그렇게 잘 나갈 필요는 없겠지, 누군가는 이렇게 재미난 일러스트를 그려 사회에 이바지하는 이들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서양화를 전공하고 카피라이터로 사회 초년생으로 출발한 작가가 우연한 기회에 자신이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노라고 고백하는 장면도 마음에 들었다. 인간은 누구나 익숙한 환경에서 떠나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마스다 미리 작가 역시 오사카의 가족과 떨어져 낯설고 물선 도쿄에서 새롭게 출발한다는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두둑한 배짱으로 성공해 내지 않았던가. 그리고 안단테 스피드로 느긋한 삶을 즐기고 있는 모양이다. 여전히 소심한 성격은 벗어나지 못해 서점가에 놓인 자신의 책 띠지를 가지런히 놓기도 하고, 서서 자신의 책을 다 읽는 사람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엿보길 즐기기도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마스다 미리 작가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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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다시 뜬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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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네스트 헤밍웨이의 <태양은 다시 뜬다>를 읽으면서 두 가지 사실에 놀랐다. 하나는 내가 그의 작품이라고는 <노인과 바다> 말고는 읽은 게 없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이미 이 책을 샀었다는 사실이었다. 몇 년 전, 헤미웨이 책들에 대한 저작권이 풀리면서 출판사들이 앞다투어 책을 내던 시절에 아마 산 모양이었다. 그리고 물론 사두기만 하고 읽지 않았다. 얼마 전, 중고서점에서 만난 책으로 부담 없이(?) 읽을 수가 있었다.

 

이 소설의 얼개는 비교적 간단하다. 우리의 주인공은 제이콥 반즈, 파리에 사는 엑스팻(expatriates) 다른 말로는 고국이탈자란다. 나폴레옹 전쟁 이래 한 세기 가까이 진행된 평화시절이 지나고,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으로 불렸던 1차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불의의 사고로 성불구가 된 남자의 이야기다. 쉥겐 조약으로 유럽의 국경이 거의 허물어지긴 했지만, 첫 번째 세계대전이 끝나고 흥청거리던 구대륙에 살던 젊은이들의 이야기다. 가장 빛나던 젊음의 시절을 전쟁터에서 보낸 이들을 로스트 제네레이션이라 부른다고 했던가. 미래에 대한 희망 따위는 접어둔 채 오늘의 쾌락을 위해 파리에 줄지어선 카페와 레스토랑을 드나들며 과음을 일삼고, 파티와 환락의 시간들이 이어진다. 어쩌면 그네들의 그런 모습은 전쟁에서 상실한 것들에 대한 보상이 아니었을까. 사랑놀음 역시 빠지지 않는다.

 

그 중심에 여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레이디 브렛 애슐리가 있다. 아마 남주 제이크와 결혼했다가 갈라섰던가. 띄엄띄엄 읽다 보니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동방의 어느 나라에 유행했던 자유부인 못지않게 자유분방한 신여성으로 남자 없인 살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 여인네 때문에 제이크를 비롯한 친구들이 골머리를 많이 썩는다. 다양한 군상의 엑스팻들이 등장하는 <태양은 다시 뜬다>의 공간적 배경은 크게 두 곳으로 나뉜다. 하나는 소설이 시작된 유럽의 문화수도 파리 그리고 산페르민 축제로 유명해진 에스파냐의 팜플로나가 그곳이다.

 

이십대 나이에 이 작품을 발표한 헤밍웨이는 일약 유명 스타 작가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고 한다. 사실 헤밍웨이 스타일로 유명한 빙산 이론(iceberg theory)도로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됐다. 군더더기 없는 일체의 기교를 배제한 채, 간략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압축된 문장으로 다양한 인간군상들이 펼치는 관계의 심연을 훑어 낸다고 해야 할까. 그런 여백의 미학 때문에 헤밍웨이가 의도했던 그렇지 않건 간에 상상 그 이상의 다양한 층위의 해석들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떤 점에서는 영화계의 완벽주의자 스탠리 큐브릭이 연상되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낚시를 즐긴 헤밍웨이(책 뒤편에 실란 꼬마 헤밍웨이가 긴 낚싯대를 휘두르는 사진을 보라)는 제이크 일행이 팜플로나로 가서 본격적인 투우를 관람하기 전에 들른 에스파냐 부르게테에서 송어 낚시를 즐기는 광경은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장면이었다. 낚시의 고수답게 미끼로 사용할 지렁이조차 직접 잡아내는 디테일에 깜짝 놀랐다. 시원하게 흐르는 개울물에 준비해간 와인을 시원하게 담가 두는 치밀함이며, 낚아 올리는 송어를 잡아 손수 손질하는 장면도 정말 멋졌다. 팜플로나에서 광란의 휴식을 보낸 뒤, 산세바스티안 바닷가에서 노독을 풀며 독서하는 주인공의 망중한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역자는 <태양은 다시 뜬다>를 다른 서평가의 분석을 통해 순례기로 보기도 했는데 나는 이 책을 타향에서 원 없이 삶을 즐긴 고국이탈자(엑스팻)들의 여행기로 보고 싶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처럼 그렇게 복잡하게 세상을 살고 싶지 않다는 말로 변명해 볼까.

 

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재 가운데 하나는 역시 투우다. 예전부터 에스파냐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가게 되면 꼭 보고 싶은 것 중의 하나가 투우였다. 요즘은 잔인한 동물학대라는 이슈 때문에 예전 같이 인기를 끌지 못하고 있다는 말도 들은 것 같은데, 이 소설이 발표된 1920년대만 하더라도 에스파냐에서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모양이다. 헤밍웨이는 실존했던 전설적인 투우사들의 실명을 들어가며 폭력적인 이벤트의 정수를 독자들에게 선사한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작은 고장의 행사였던 산페르민 축제가 지금은 전 세계에 널리 알려져서 연인원 100만 명이 참가하는 큰 행사가 되었다고 했던가. 어떻게 보면 <태양은 다시 뜬다>는 수일간 계속되는 산페르민 축제기간 동안, 밤이고 낮이고 술을 질탕 퍼마시며 젊음을 소비한 고국이탈자들의 정신세계에 대한 보고서다. 전쟁터에서 숱한 죽음의 파편을 접수한 젊은이들이 더 이상 잃을 게 없다고 생각하고 유한한 삶을 향락적으로 소진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목표로 정한 것처럼 그렇게 먹고 마시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편 주인공 제이크는 다른 이들과 구별되는 아피시온(열정)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여전히 가히 만인의 연인이라고 할 수 있는 브렛을 사랑하면서도 그녀의 주변에서 위성처럼 떠도는 남자의 모습이 ‘로스트 제네레이션’을 관통한다고나 할까. 이 남자, 저 남자와 숱한 염문을 뿌리던(심지어 열아홉 먹은 절정의 투우사 페드로 로메로와도!) 레이디 애슐리는 어쩌면 자신이 결국 돌아갈 곳은 제이크 곁 뿐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방황을 멈추지 않는다. 하긴 그 누가 겉잡을 수 없는 사랑의 여로를 말끔하게 정리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소설에 나오는 멋진 문구처럼 ‘아무튼 그렇게 되고 말았다(That was it all right)’는데 어쩔 것인가.

 

좀 엉뚱하게 들릴 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헤밍웨이의 고전 <태양은 다시 뜬다>를 읽고 나서 다시 한 번 에스파냐에 언젠가 가보겠다는 결심을 다졌다. 시간과 금전적 여유가 많아, 작가의 여정을 그대로 좇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언제나 그렇듯 구도의 길에 나선 순례자는 무엇 하나 풍족한 게 없지 않았던가. 지금은 원하는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시간만이라도 넉넉하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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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9-26 18: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헤밍웨이는 천재였던가요?!? 그런 생각을 합니다 20대에 그것도! 자격지심이 느껴지네요 ㅎㅎ잘 읽고 갑니다^^

레삭매냐 2019-09-26 20:40   좋아요 1 | URL
다 그렇게 가는 거지요 -

여전히 헤밍웨이의 책들을 읽지
못하고 있네요.
 
침묵을 위한 시간 - 유럽 수도원 기행 봄날의책 세계산문선
패트릭 리 퍼머 지음, 신해경 옮김 / 봄날의책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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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알고 있지만 회피하고 싶은 사실이 하나 있다.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어제 읽은 패트릭 리 퍼머가 방문한 수도원에서 영성을 가꾸며 사는 수도사들, 특히 트라피스트로 알려진 시토수도회에 소속된 라 그랑 트라프 대수도원 이야기를 읽어 보니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내가 읽은 <침묵을 위한 시간>의 저자 패트릭 리 퍼머는 영국 출신의 전쟁 영웅이다. 황현산 선생이 추천한 <그리스의 끝, 마니>란 책으로 이 작가를 알게 되었는데(2년 전에 읽기 시작한 책을 아직도 못 다 읽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적은 분량의 책이라 좀 더 쉽게 읽을 수 있을 거라는 얄팍한 꾀로 부지런히 읽기 시작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게 끝인가 싶을 정도로 금세 다 읽었다.

 

아주 오래 전에 공지영 작가가 쓴 <수도원 기행>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지금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너무 오래 전에 읽은 모양이다. 가톨릭 신자인 작가의 수도원 피정 이야기가 주를 이뤘던 것 같은데(이조차도 명확하지 않다), 수십 년을 수도원에서 묵언을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행적을 뒤쫓으며 생활하는 수도사들의 이야기를 며칠간의 체험으로 과연 글로 담아낼 수 있는지 나도 의문이 들었다. 아마 그 부분에 대해 패트릭 리 퍼머 역시 자신의 책이 출간되고 난 후에 어느 익명의 수도사로부터 받은 편지를 받고 반성하는 신문에 실었다고 했던가.

 

<침묵을 위한 시간>에는 사실 많은 수도원의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는다. 베네딕토 수도회를 대표하는 수도원으로 생 방드리유 드 퐁트넬 수도원, 솔렘 대수도원,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문자 그대로 따르는 시토회 라 그랑 트라프 대수도원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제는 폐허가 되어 유적만 남은 비잔틴 시대의 바실리오 수도회의 카파도키아 바위 수도원이 차례로 등장한다. 저자의 그것과는 달리 일천한 지식으로 독서한 바에 따르면, 고대 수도원의 유래에서부터 시작해서 지식과 학문의 보고이자 교육기관으로 핵심적 역할을 했던 중세를 거쳐, 프랑스혁명이라는 암흑기를 거쳐 다시 속세와 분리된 자급자족적인 공동체로서 수행에 방점을 둔 고유의 목적으로 돌아간 현재(그것도 반세기 전의 기록이다)를 그리고 있다.

 

근대 수도원의 위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중세 봉건질서의 한 축이 종교집단이었던 사실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프랑스혁명기의 성난 군중들이 종래 신분질서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와 수도원을 타깃 삼아 공격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고행을 통해 개인의 영성을 강화하고 수도하는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세속화되고, 종교권력으로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는 결국 폭력적인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았던가. 패트릭 리 퍼머가 자신의 글을 가다듬기 위해 수도원을 순례하던 시절과는 또 어떻게 바뀌었을지 궁금해졌다.

 

개인적으로 카파도키아에 산재해 있던 바위 수도원에 대한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다. 오로지 시간이라는 제한을 초월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역사가 아니었을까. 이교도들의 침입을 피해 신의 계시를 피해 주상고행이나 수상고행을 하며 그런 숭고한 유적을 남긴 이들이 또 무슨 이유에서 흔적도 사라졌는지에 대한 작가의 문제제기도 주목할 만하다. 이런 시대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고대 그리스어와 역사 그리고 종교에도 정통한 이들의 노고가 필요하다는 지적에 절로 공감이 갔다. 서두에 작가가 인용한 것처럼 그런 진실을 풀기 위해서는 어쩌면 때를 기다려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일천한 독서후기는 아마 여기까지인 모양이다. 이 책을 접으면서 난 먼저 읽기 시작한 패트릭 리 퍼머의 <그리스의 끝, 마니>부터 다 읽어야겠다는 반성을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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