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의 유령> 밀로스 포만/장 클로드 카리에르 ZIP16461

 

절판되어 중고서점에서 구한 책이다. 도서관에도 없더라.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하던데... 찾아보니 감독이 밀로스 포만이네. 아마 그럼 시나리오를 썼던 모양이다.

 

종교재판관이지만 계몽철학에 경도된 31세의 로렌조 카사마레스가 등장하고, 궁정화가로 합스부르크가에서 부르봉 왕조로 바뀐 스페인 궁정 화가였던 프란시스코 고야가 등장한다.

 

안알달루스 정복전(레콩키스타)에서 스페인의 종교재판소는 가톨릭 전사들과 신민들을 통합시키는 순기능을 담당한 적도 있으나, 이후 권력과 결탁되어 변질되면서 스페인 역사 발전에 중요한 저해 요소가 되었다. 얼마 전, 만난 너튜브 동영상에서 보니 종교재판소가 기부에 인색한 중세문화의 흐름을 바꾸는데 일조하기도 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종교재판소가 거의 순수한 악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모두가 그랬던 건 아닌가 보다.

 

어쨌든 18세기말까지 유지된 종교재판이라는 악습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흥미진진하다.

 

오늘 새벽부터 읽기 시작했다. 가독성이 아주 뛰어나다. 내가 또 이런 책들을 좋아하지.

 

간만에 레알 중고책방에도 들러봤다. 램프의 요정 중고책방은... 책만 중고지 가격이나 품질 면에서 너무 사악해서 중고책방이라고 부르기에 좀 그렇다. 중고거래소라고나 할까. 가격이 왜 이렇게 올랐는지 모르겠다. 뭐 하이퍼 인플레이션 시대의 낯설지 않은 모습이라고 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수원역 앞에 있는 수원책방에 들러봤다. 가는 길에 두 팀의 도믿남들에게 잽히기도 했다. 한참 르세라핌의 신곡을 듣고 있어서 그들이 내게 말을 거는 지도 몰랐다. 뭐라고 하는데 멀뚱하게 쳐다보니 그냥 지나치더라. 참 얼마 전에는 중앙지검에서 드디어 전화도 받아 봤다. 어떻게 흘러가는지 궁금해서 더 듣고 싶었으나, 일이 바빠서 전화를 끊어야 했다.

 

수원책방은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다. <호랑이 남자>나 요사스러운 샘의 <세상 종말 전쟁> 같은 책들이 간간히 눈에 띄긴 했지만 이미 다 읽거나 소장하고 있는 책이라 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도 맨손으로 나오기가 그래서 아테네 출판사에서 나온 <나폴레옹 이집트 원정기>를 단돈 오천원에 샀다. 무거워서 가방에 넣고 다니느라 고생깨나 했다.

 

안양 도로리책방에 얼마 전에 두 번이나 갈 기회가 있었으나, 동행들이 원하지는 장소라 하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래도 그나마 거긴 책이 좀 있는데 말이지. 예전에 도끼선생 전집 낱권으로 나왔을 적에 모두 사들였어야 했나. 하긴 도끼 선생 책들은 사두고 읽지 않는 책들이 너무 많아서리. 그나마 작년엔가 <카라마조프>를 꾸역꾸역 다 읽어서 체면이 선다. 뭐야 나 이래봬도 도끼 샘 책 읽은 닝겡이라고 말할 수 있게 돼서 다행이다.

 

뭐 이렇게 항상 바쁜지 모르겠다. 주말이 평일보다 더 빡시다.

그냥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며칠 절간에 틀어 박혀서 책이나 읽었으면 좋겠다. 핸드폰도 필요 없다. 예전 은사가 말하셨던 것처럼 미디어 다이어트를 해야 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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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11-26 13: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딱 한달만 어디 산에 들어가서 책만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 사람사는건 다 비슷한거 같아요 ㅋ

레삭매냐 2022-11-27 17:25   좋아요 2 | URL
저는 한달까지는 아이고,
딱 일주일만이라도 속세를...

그랬다고 합니다.

서곡 2022-11-26 14: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고야의유령 보다만 영화입니다 ㅎ 나탈리 포트만이 나오는데 종교재판 고문 보는 게 고구마일 것 같아 걍 접었던...

레삭매냐 2022-11-27 17:26   좋아요 1 | URL
최근에 스페인의 악명 높은
종교재판소에 대한 너튜브
컨텐츠를 만났는데, 상당히
책읽기에 도움이 되네요.

영화는 겁시 나서 못 보겠
네요 차마.

바람돌이 2022-11-26 16: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발자크에서 잠시 외도하시는건가요? ^^ 저는 고야 그림 진짜 좋아하는데 -제가 고야 때문에 저의 첫 유럽 여행지가 스페인이었다는요. - 저 책에서는 고야가 무슨 역할을 하는지 궁금하네요.

레삭매냐 2022-11-27 17:27   좋아요 2 | URL
구러게요. 발자쿠 샘 책들
시작하고 끝내지 못한 책들이
제법 되는데 말이죠.

일단 읽어야 할 책들부터
좀 정리가 되는 대로 다시
발자크 들어갑니다.

아, 고야 !!! 고야의 그림이
어쩌면 모든 사단의 원초
가 되지 않았나 싶네요.

프레이야 2022-11-26 16: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고야의 유령, 영화만 봤어요. 충격적이었어요.
책이 있군요. 미디어 다이어트 필요한데 말이죠. ^^

레삭매냐 2022-11-27 17:28   좋아요 1 | URL
책으로 먼저 만나 보고
싶었는데 책은 절판되었고
도서관에서 비치가 되어
있지 않아서 결국 중고서점
원정 가서 사왔답니다 :>

시나리오를 겨냥해서 쓴
책이라 그런지 술술 익히
는 느낌입니다.

핸드폰 없이 사는 게 불가
능해진 것처럼 미디어 다이
어트 역시나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페크pek0501 2022-11-27 15: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 살 때가 행복하죠..^^

레삭매냐 2022-11-27 17:29   좋아요 2 | URL
그렇지요 아무래도.

앞뒤 재지 않고 지르려고
한답니다. 일단 질러~~~

그레이스 2022-11-28 1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궁금했어요.
 
미지의 걸작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김호영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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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서점에서 발자크의 <미지의 걸작>을 사놓았다. 물론 당장 읽지는 않고 좀 묵혀 두었다. 그러다 이번 달에 발자크 발동이 걸려서 내리 5권을 읽었다. 물론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도 계속해서 읽는 중이다. 문제는 막상 <미지의 걸작>을 읽어 보려고 하니, 찾을 수가 없더라는 거였다. 결국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었다.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미지의 걸작>에는 두 편의 단편이 들어 있는데 단가가 무려 17,000원이다. 이거 너무 비싼 거 아냐? 그리고 뒤에는 <미지의 걸작>1994년에 자크 리베트가 영화로 만든 <누드 모델>의 씬들이 몇 컷 실려 있더라. 다 읽고 나서도 여전히 비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가격을 이 정도 받으려면 단편 하나 정도는 더 넣어 주어야 하지 않았나.

 

타이틀작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실린 <영생의 묘약>부터 잠깐 짚고 넘어 가자. 이 짤막하고 기묘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그 유명한 돈 후안 벨비데로다. 공간은 이탈리아의 페라라. 아버지 덕분에 잘 먹고 잘 살고, 또 유흥과 환락에 아낌 없이 돈을 써대는 탕자 같은 아들이 바로 돈 후안이었다.

 

그의 아버지 바르톨로메오는 인생의 대부분을 상인으로 살아온 구십대의 노인이다. 이제 곧 죽음을 얼마 남기지 않은 상태로, 병상에서 죽어가는 중이다. 죽음의 시간이 이르자, 아버지는 탕자 아들을 불러 마지막 부탁을 남긴다. 기묘해 보이는 병에 든 약물을 자신이 죽고 난 다음에 자신의 시신 곳곳에 발라 달라는 거였다. 아무리 탕자였지만, 죽어가는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 주겠다고 약속하는 돈 후안. 그리고 아버지의 유언 대로, 하얗게 변한 아버지의 눈에 묘약을 넣자 아주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다.

 

그렇게 영생의 비밀을 깨닫게 된 돈 후안은 자신의 아들 펠리페에게도 비슷한 부탁을 한다. 고딕 스타일의 언데드를 연상시키는 결말이 사뭇 충격적이다. 19세기 프랑스/파리 사회를 그린 발자크가 이런 스타일의 소설도 썼구나 하며 넘어간다.

 

지금까지는 워밍업이었다. 이제 본론인 <미지의 걸작>에 대해 이야기할 시간이다. 나는 <미지의 걸작>을 읽으면서 지난주에 우연히 만나게 된 너튜브 르네상스 동영상에 대해 고마움을 느꼈다. 그건 마치 내가 이 책을 읽기 위해 준비라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원근법의 도래를 알린 조르조네의 <폭풍우>를 필두로 해서, 그의 제자로 16세기를 대표하는 화가였던 티치아노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바로 <미지의 걸작>을 읽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심지어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포르뷔스-니콜라 푸생 그리고 프렌호퍼와의 대화에 등장하는 앙리 4(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시조), 마리 드 메디시스와 칼 5세 등이 전혀 낯설게 다가오지 않았다. 이래서 역사 공부가 중요하다는 걸까. 마침 공부처럼 열심히 메모까지 해가면서 시청한 르네상스 동영상이 소설의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바이다.

 

포르뷔스와 니콜라 푸생은 실존 인물이고 프렌호퍼는 발자크가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다. 이제 막 화가로 출발한 니콜라에게 거의 모든 화가들과 그들의 작법에 대해 비평을 삼가지 않는 프렌호퍼는 과연 대단한 인물이었다. 심지어 가난한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그는 부자기도 했다.

 

회화는 기본적으로 고래로 자연을 모사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중세 회화는 신학을 보조하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다. 하지만 르네상스가 도래하고, 신 중심의 사고에서 인문주의로 사유의 거대한 흐름이 전환하게 된 점을 발자크는 프렌호퍼의 유창한 언변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역시 천재였던 미켈란젤로가 형태의 마법사였다면, 티치아노는 색채의 조련사였다. 그는 특히 붉은색을 그 누구보다 잘 사용하기로 유명했는데, 주걱턱 유전자를 가진 자신의 외모에 대한 자신감이 결여된 칼 5세의 전속 초상화 화가가 되면서 그야말로 인생역전에 성공하게 된다. 물론 이 부분은 소설에 나오는 것은 아니고 내가 동영상을 통해 알게 된 부분들이다.

 

훗날 빛에 집착하게 된 인상파들에 앞서, 빛이야말로 천재적 창조자라는 표현으로 발자크는 자신의 미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끝없이 늘어놓는다. 정말 강력한 미술 비평가로서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이 글로 시대의 관찰자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면, 화가들은 화폭에 데생과 색채 그리고 선으로 자신이 관찰한 것을 실천해냈다고 한다.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 선들이 그림 세계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는 점도 새삼 깨닫게 되었다.

 

포르뷔스와 니콜라는 프렌호퍼가 자신의 아틀리에에 지난 10년 동안의 작업을 꽁꽁 감춰 두고 보여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가 구상해온 작품에 미지의 걸작이라는 이름을 붙여 준다. 나는 순간, 그 걸작이 과연 존재는 하는가라고 직감적으로 묻게 된다. 그리고 니콜라는 자신의 애인이자 순결한 질레트를 프렌호퍼의 애타게 그리고자 하는 걸작의 모델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그 다음에는 광기에 물든 작가의 기이한 행동들이 이어진다.

 


그 다음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발자크의 <미지의 걸작>을 좀 더 시각적으로 그리고 서사적으로 완성했다고 생각하는 자크 리베트의 영화 <누드 모델 La Belle Noiseuse (1991)>이다. 너무나 친절한 너튜브 리뷰의 도움으로 237분 짜리 원작 영화를 7분만에 퉁칠 수 있었다. 니콜라의 여친 마리앤 역할을 맡은 이십대의 엠마뉘엘 베아르의 고혹적인 연기는 이게 정말 연기인가 화가 앞에 선 모델인가 싶을 정도였다. 넘실대는 애증의 관계 속에서 베아르가 보여주는 자기파멸적 감정에 대한 연기는 정말 대단했다. 그걸 카메라에 담은 누벨바그/카이에 뒤 시네마 출신 감독의 연출에 박수를 보낸다.

 

그렇게 정성 들여 그린 걸작을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다며, 벽에 넣고 회칠하는 노화가 에두아르의 모습에서는 <미지의 걸작> 엔딩의 프렌호퍼가 연상됐다. 소설에도 나오듯이 아름다움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아름다움을 탐색하고 압축해야 한다. 그리고 아름다움이 스스로 발화할 수 있게 긴밀하게 얽어매야 한다. 소설의 주인공들이 이런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고자 했다면, 종이에 서사를 그리는 글쟁이들에게도 비슷하게 적용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역시 발자크다. 말이 필요 없다.



[뱀다리] 영화 <누드 모델>에서 노화가 에두아르 프렌호퍼의 부인으로 등장하는 리즈 역은 제인 버킨이 맡았다. 그렇다, 버킨백으로 유명한 그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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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2-11-22 14: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에 리베트의 저 영화 극장에서 봤습니다. 베아르 정말 아름답고 열연 대단한데 한편 그 긴 시간 내내 너무 고생스럽게 보여 -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촬영시간은 훨씬 더 길었겠죠 - 절래절래 했던 기억이 납니다.

레삭매냐 2022-11-22 14:09   좋아요 1 | URL
저도 영화 한 번 보고 싶었으나
어마무시한 러닝타임으로 인하야 -
짧은 리뷰로 대신했답니다.

자크 리베트는 처음 들어 보는데
누벨바그 출신 감독이라고 하네요.

네 시간 짜리 영화를 보셨다니 대
단하십니다 !!!

독서괭 2022-11-22 17: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내리 5권이라니!! 한 작가 내리 읽어도 지겹지 않으신가봐요. 저도 예전엔 그렇게 읽었던 때가 있긴 한 것 같은데 요즘은 끈기가 부족해서인지;;
우연히 봤던 뭔가가 탁 독서에 도움이 되는 순간 짜릿하죠~^^

레삭매냐 2022-11-22 19:20   좋아요 1 | URL
발자쿠가 구사하는 너무나 다양
한 당대 이바구가 넘나 재밌습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중독 증상이 심해
지는 느낌이랄까요.

이렇게 훅~ 다 읽어 버릴까봐 조
바심이 날 정도입니다 ㅠㅠ

바람돌이 2022-11-22 20: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찾을수가 없어 도서관 대여라니.... 이런 웃픈 일이 종종 우리에게 일어나죠. ㅎㅎ

미지의 걸작 내용을 보니 앗 이건 사야돼가 바로 떠오르네요. ^^

레삭매냐 2022-11-25 10:58   좋아요 1 | URL
그렇지요. 다 뒤집어 쌌는데
도대체 찾지를 못해서 결국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었더라
는... 별 일이 다 있습니다.

짧은 단편인데 참 매력적이
었습니다. 소장각 공감합니다.

서니데이 2022-11-25 2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991년이면 엠마누엘 베아르가 젊은 시절에 찍은 영화겠네요.
제인버킨이 나온다고 하니 오래전 영화 같기도 해요.
잘읽었습니다.
레삭매냐님,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레삭매냐 2022-11-27 17:30   좋아요 1 | URL
그렇죠 :>

제인 버킨은 노화가 에두아르
의 부인으로 나온답니다. 아마
이 때도 나이가 있었던 것 같
습니다.

베아르는 그야말로 팜므 파탈
의 전형을 보여주는 그런 느낌
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22-12-08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한니발 - 로마의 가장 위대한 적수
필립 프리먼 지음, 이종인 옮김 / 책과함께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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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전에 군사전문가 리델 하트가 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 대한 평전을 읽었다. 그의 호적수는, 로마 역사상 로마를 그야말로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인 카르타고 출신의 천재 전략가 한니발 바르카였다. 무려 하버드 출신 필립 프리드먼이 저술한 <한니발> 평전은 그야말로 옛날 이야기 읽듯이 그렇게 술술 읽을 수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가독성이 뛰어난 책을 애정한다.

 

페니키아인들의 후손이 북아프리카에 건설한 도시 상업국가 카르타고는 북쪽에서 지중해 패권을 두고 경쟁한 로마가 추구한 제국주의와는 다른 결을 지닌 국가였다. 고대 페니키아/티레에서 유래한 바알 함몬 신을 숭배한 카르타고 인들은 몰크라는 이름의 유아 희생제의로 악명을 떨쳤다. 로마 사람들은 그런 카르타고인들을 야만인이라 부르며 경시하기도 했다.

 

카르타고가 지중해를 배경으로 성장할수록 로마와의 패권 대결은 불가피했고, 결정적 이권이 달린 시칠리아에서 결국 로마와 카르타고는 충돌하게 된다. 로마의 성장기에 시칠리아는 도시국가 로마에 식량을 공급하는 중요한 배후지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제정기에 들어서는 이집트가 밀 공급기지 역할을 맡게 된다.

 

시민군을 주력으로 하는 로마 중장보병대의 결속을 파괴할 수 없었던 카라타고의 용병대를 결국 패배하고, 해상전투가 장기였던 카르타고 해군 역시 로마군의 코르부스 전술로 해전에서 패하고 제해권마저 로마에게 내주게 된다. 이런 조국의 처절한 패배를 보고 자란 새끼 사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카르타고 바르카 가문의 장남 한니발이었다.

 

첫 번째 포에니 전쟁의 참패로 카르타고는 국가적 위기에 봉착했다. 그들의 앞바다였던 지중해는 로마 해군의 독무대로 바뀌고 있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한니발의 아버지였던 하밀카르 바르카는 눈길을 이베리아 반도로 돌렸다. 위기는 기회인 법이다. 이베리아 반도에 새로운 식민지를 개척하겠다는 하밀카르의 의견에 카르타고 원로원의 보수파들은 일제히 반대했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하밀카르는 자신의 아들과 거의 사병에 가까운 병사들을 이끌고 이베리아로 떠났다. 로마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우던 아들 삼형제는 하밀카르의 든든한 우군들이었다.

 

결국 하밀카르의 이 선택은 신의 한수였다는 것으로 판명됐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금과 은으로 로마가 설정했단 가혹한 전쟁배상금을 단숨에 갚아 버리고 다시 한 번 국가 부흥의 기회를 잡게 됐다. 물론 로마라고 해서 이베리아에서 부흥하는 카르타고에 대한 견제를 잊지 않았지만. 당장 일리리야와 지중해 동부를 제압하는데 정신이 팔려 이베리아의 호랑이 새끼가 대호(大虎)로 성장하는 걸 미처 깨닫지 못했다.

 

한편, 한니발은 아버지 하밀카르 밑에서 전무후무한 그런 전쟁의 천재로 성장했다. 무엇보다 병사들을 인솔하는 리더십은 기본이었다. 사령관으로 천상의 지휘자로 군림하지 않고, 일개 병사들과 숙식을 함께하는 진짜 전우로서의 모범을 보였다. 공격에 있어서는 가장 먼저 앞장을 섰고, 후퇴할 적에는 가장 어려운 후위를 자처했다. 이런 전장에서의 리더십이야말로 훗날 로마 전역을 휩쓸면서 고국의 지원을 하나도 받지 못하는 고립무원의 상태에서도 십 수 년간 로마와 동맹시들을 공포에 몰아넣은 원동력이 되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로마와의 결전을 대비해서 힘을 키우고 병력을 모집하고, 보급물자에 40마리의 코끼리 부대까지 마련한 한니발은 이베리아로 자신을 요격하러 온 로마 군단들을 따돌리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초겨울 알프스 산맥을 넘는 기발한 전술로 로마 본토 공격에 나선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숱한 병사들과 물자를 잃는 위기를 겪기도 했다. 5만 명의 병사들로 알프스 돌파에 나섰지만, 포 강 유역에 도달했을 때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누미디아 그리고 켈트 연합군의 군세는 25천명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한니발의 숙적 로마는 본토에서 계속해서 병력 자원을 충당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저력을 가지고 있었다. 2차 포에니 전쟁 초기, 한니발은 속전속결로 자신의 뛰어난 기병대가 활약할 수 있는 야전에서 로마군을 섬멸해야만 했다.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무참하게 격파했던 승리의 추억과 카르타고 군을 야만족 부대라고 생각한 로마군 지휘관은 한니발의 능력을 무시했고 곧 시작된 티키누스강, 트레비아강, 트레시메노 호수 등지에서 연전연패하기에 이른다.

 

우리의 뛰어난 이순신 장군처럼, 한니발 역시 고도의 심리전을 펼쳐 적장에 대한 상세한 정보 파악을 바탕으로 해서 자신이 원하는 장소와 시간에서 적을 유인해서 효과적으로 섬멸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한니발을 무찔러서 로마로 개선하겠다는 호승감에 사로 잡힌 로마군 지휘관들은 무턱대고 자신들의 군세만 믿고 카르타고군에게 달려들었다가 한니발이 치밀하게 구상한 포위망에 걸려 거의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다.

 

개별 전투 못지않게 한니발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로마와 동맹시들의 분열 작전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자신에게 항복한 세력들에 대해서는 관대하게 대응했지만, 저항하는 곳에 대해서는 가혹할 정도로 유린했다. 그리고 계속되는 전투에서의 승리로 시간이 갈수록 한니발에게 투항하는 지역들이 늘어났다. 로마 원로원에서는 한니발이 그동안 로마를 위협했던 적들과 다르다는 점을 깨닫고 지연 전술의 대가로 알려진 파비우스를 독재관으로 삼아 한니발을 상대하게 했다. “쿤크라토르라는 별명으로도 알려진 파비우스는 한니발과의 야전에서의 정면대결을 기피하는 소모전으로 한니발의 원정군을 지치게 만들어갔다.

 

기원전 21682, 로마가 있는 병력, 없는 병력을 끌어 모아 만든 8만 명의 대군이 칸나이 평원에서 자신들보다 열세인 카르타고군을 마주했다. 로마에서는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를 사령관으로 삼아 한니발을 상대하게 했다. ‘노부스 호모출신으로 공명심에 불타는 집정관 바로는 파울루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한니발을 무찌르는 공훈을 세우겠다고 한니발이 치밀하고 조심스럽게 만들어 놓은 덫에 스스로 기어 들어가 버렸다. 칸나이 회전에서 로마군은 자그마치 6만 명에 달하는 전사자가 발생하고 수천 명이 포로로 카르타고군에게 잡혔다.

 

바로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한니발은 곧장 적의 심장부였던 로마를 공략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런 결정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신중한 한니발은 일격필살의 승부 대신 지구전을 선택했고 이것이 2차 포에니 전쟁의 승부를 가름했다. 결국 포기를 모르는 로마가 젊은 사령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집정관으로 삼아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성공했다.

 

우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한니발 원정대를 이탈리아 남부 지역에 고립시켜 두고, 카르타고의 멀티격인 이베리아 반도 공략에 나섰다. 스키피오는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자신의 스승격인 한니발의 전략에 따라 이베리아의 수도격인 카르타고 노바(오늘날의 카르타헤나)를 공략해서 함락시켰다. 그리고 이베리아 주둔 사령관 격인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을 패퇴시키고,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수중에 넣는데 성공했다. 그의 다음 목표는 아프리카의 카르타고 본국이었다. 역으로 뛰어난 명장 스키피오의 역습을 받은 카르타고는 로마가 제시하는 가혹한 평화조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본국으로부터 소환 명령을 받은, 한 때 로마를 멸망 직전으로 몰아넣었던 시대의 명장은 빈손으로 귀국해야만 했다.

 

그후 한니발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다시 전쟁을 도발한 로마 때문에, 은퇴한 명장 한니발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상대로 기원전 202년 가을 자마 전투에 나섰다. 그리고 로마군에게 패배했다. 로마 원로원의 강경파들은 계속해서 한니발의 조국 카르타고 타도를 외쳤다. 비록 적장이었지만, 한니발을 존경하던 스키피오가 비호해 주었지만 한니발은 조국을 떠나 해외로 망명해야만 했다. 결국 비티니아에서 자신을 추적해온 로마파견대에 사로 잡히기 전 그는 가지고 다니던 독약으로 자살했다고 한다.

 

역설적이게도 한니발 원정군과의 치열한 전쟁을 통해, 비로소 로마는 세계제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게 되었다. 고대 전쟁의 규칙에 따른 패배를 거부한 도시국가 로마는 한때 자신들의 성문 코앞까지 쳐들어왔던 한니발의 위협을 결국 이겨내는데 성공했다. 한니발에게 패전해서 병사들이 부족할 때마다, 로마인들은 나이 어린 소년병들까지 징집하고 노예병사들까지 편성하는 단결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한니발은 조국 카르타고에서 해외 원정군의 눈부신 활약을 시기 질투한 한노 일파의 견제로 그 어떤 병력과 물자 지원도 받지 못했다. 어쩌면 로마인들에게 한니발 전쟁은 자신들의 조국을 지키기 위한 애국투쟁이었지만, 카르타고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게 아닐까. 저자 필립 프리먼은 에필로그에서 한니발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승리했다면 오늘날의 우리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을 거라는 예상으로 마무리한다. 이런 대체역사의 가능성이야말로 역사를 더 재밌게 만드는 요소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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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4 1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1-25 1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생의 첫출발 대산세계문학총서 74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선영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발자크 도전 7번째가 무사히 완료되었다. 발자크의 책들을 읽으면서 <백합의 골짜기>와 함께 수배해둔 책이다. 문지에서 나왔는데 이제는 절판되어 중고나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어야 한다. 나는 운이 좋게 중고로 구할 수가 있었다, 쌩유 알라딘 중고. 놀랍게도 중고책값이 6년 전보다 천원 오르는 신비로움을 이 책을 통해 알 수가 있었다. 중고가 시간이 가면 값이 오를 수도 있구나 싶었다. 게다가 볼펜 줄도 죽죽 가 있어서, 왜 내가 팔아먹으려는 책은 낙서가 되어 있으면 바로 매입불가 판정이 떨어지는지 알 수가 없더라. 다 그런 거지.

 

발자크의 소설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왜 또 서설이 길었나 모르겠다. 이놈의 삼천포병은 도무지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때는 바야흐로 1822, 전 유럽을 주름 잡던 나폴레옹이 몰락한 지 대략 7년 정도 흐른 시점이다. 우리 장황설의 대가 발자크 선생은 또 이제 곧 이루어질 산업화로 사라져 버릴 당대 가장 인기 만점이었던 합승마차 산업에 대한 자신의 지식과 노하우를 아낌없이 21세기 독자에게 날린다.

 

그렇다, 이제 곧 철마가 달릴 철도가 부설되면 도시와 도시 그리고 마을을 잇던 합승마차의 호시절은 지나갈 거라고 시대의 예언자는 확신에 찬 목소리를 외친다.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수익성 증대를 위해 과적과 인원 초과는 기본이었던 모양이다. 그렇지 돈을 벌려면 승객의 안전 따위는 멍멍이에게나 던져 주라지. 아무튼 전직 기병대원 피에로탱은 합승마차에 승객을 꽉꽉 채워 달린다.

 

왜 느닷없이 합승마차 타령이냐고? 발자크가 바로 이 합승마차에 탄 어느 청년의 일대기를 독자들에게 소개하려고 워밍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지. 그 주인공은 바로 19, 가난과 궁핍에 찌든 청년 오스카르 위송이다. 그의 어머니 클라파르 부인의 일대기는 그야말로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신파니, 한 번 책으로 만나 보시길. 등장인물들의 썰을 다 풀자면 한이 없을 터이니 말이다.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이 허영 덩어리 청년은 자존심만 살아서 자신의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천방지축으로 날뛰게 된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서너번 정도.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삶이 얼마나 만만치 않다는 걸 절실하게 배우게 된다는 게 발자크가 <인생의 첫 출발>에서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메시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 나만 그렇게 생각할 지도.

 

합승마차에 이러저러한 사람들이 많이 탔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영향력있는 사람은 바로 드 세리제 백작이다. 왕정복고 시절에 정무장관을 지내기도 하고, 돈도 많고 귀족 출신에 아리따운 부인도 있는 무엇 하나 부러울 게 없는 사람이다. 그런 드 세리제 백작이 왜 합승마차를 타고 자신의 영지인 프렐르 성관으로 가느냐고? 그건 바로 자신의 집사 모로가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영주 행세를 하며 숱한 삥땅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밀고했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모로 일당이 협잡해서 자신에게 돌아올 수익을 해먹으려는 것을 저지하려고 밀행에 나선 것이다. 자신의 정체를 아는 피에로탱에게 그 사실을 비밀로 해달라고 하면서, 자신의 요청이 잘 수행되면 그가 새마차 구입에 절실하게 필요한 천 프랑을 주겠다고 언약한다. 예나 지금이나 돈의 위력은 가늠할 수가 없다.

 

그 와중에 한량 조르주와 가짜 화가 쉰네르를 자처하는 일행은 세상 물정 모르는 오스카르가 지루한 여행 기간 동안 자신들의 좋은 놀림감이 되리라는 걸 직감한다. 아니 그런 청년을 도와 주지는 못할망정 골려 먹을 궁리를 하다니. 그 또한 당대의 정경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오스카르보다 훨씬 더 세상을 산 이들이 청년보다 아는 게 많으니, 여러 가지 테스트로 그의 수준 파악하기란 누워서 떡먹기였으리라. 그의 사방이 기운 옷을 입은 오스카르의 입성은 그가 얼마나 궁핍한 지 있는 그대로 보여 주지 않았던가.

 

합승마차에서 펼쳐지는 천일야화 같은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버렸다. 그리고 별 것도 아닌 일이 발끈한 오스카르가 바로 눈 앞에 있는 이가 드 세리제 백작인 지도 모르고, 백작의 집사 모로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둘은 예전의 연인 사이였고, 모로 씨는 오스카르의 후견인이었다)를 통해 알게 된 드 세리제 백작의 수치스러운 질병과 스캔들을 그대로 폭로해 버린다. 그 자리에 있었던 백작이 대로한 것은 불문가지일 것이다. , 철부지 오스카르가 합승마차에 오르기 전에 그의 어머니 클라파르 부인이 그렇게 신신당부를 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입조심하라고. 하지만 이런 소설 서사에서 그런 금기는 반드시 깨어지게 되어 있고, 더 나아가 파국적인 결과를 초래하기 마련이다.

 

후견인 모로 씨가 지배하는 프렐르 성관에 가서 세상사를 좀 배울 예정이었던 오스카르의 꿈은 초장부터 야무지게 박살나 버렸다. 분노한 백작이 부른 마차에 실려 다시 초라한 집구석으로 돌아온 오스카르 위송. 의붓아버지는 무슈 클라파르가 얼마나 고소해 하던지. 그런 걸 보면, 비록 자신을 마땅하게 생각하지 않는 의붓아버지지만 오스카르의 실체에 대해 잘 알고 있지 않았나 싶다.

 

클라파르 부인은 그간 소원했던 연줄인 카르도 외삼촌을 동원해서 오스카르를 미래의 소송대리인으로 만들 프로젝트를 가동한다. 그렇지 세상이 무너져도 살아날 구멍은 있는 법이지. 그렇게 간신히 정신 차리고 데르슈 사무소에서 정신을 차리나 싶었던 허영덩어리 오스카르는 다시 한 번 합승마차의 악연 조르주를 만난 신세를 망칠 만한 두 번째 재앙에 손을 대게 된다. 그야말로 말마따나 이 정도면 구제불능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이래서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고 했던가.

 

결국 인생의 막장 코너에 몰리게 된 오스카르는 군에 징집되어 기병대원으로 알제리에서 마지막 기회를 잡게 된다. 합승마차 부분과 달리 후반에서는 좀 급하게 진행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현란한 전개가 펼쳐진다. 완행열차에서 KTX로 갈아탄 그런 느낌이랄까. 막타 전투에서 드 세리제 백작의 유일한 아들을 구해내지만, 그 때 입은 부상으로 오스카르는 한쪽 팔을 잃게 된다. 그리고 백작의 아들 역시 부상으로 죽는다. 어쩌면 이 영웅적 행동으로 오스카르는 철부지 시절 백작에게 입힌 치욕을 어느 정도 씻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퇴역한 대령이자, 드 세리제 백작의 지원으로 보몽의 징세관이 된 오스카르 위송은 어머니 클라파르 부인과 함께 여전히 운송업을 종사 중인 피에로탱의 합승마차에 오른다.

 

소설 <인생의 첫 출발>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1822년은 물질주의가 만연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혁명과 전쟁 그리고 제정을 거치면서 좋았던 시절의 선한 가치들은 모두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버렸다. 모든 이들이 자신의 노후를 보장할 그놈의 연금에 목을 매달기 시작했고, 잇달아 바뀌는 정권 교체기에 어디에 줄을 서냐에 따라 자신의 인생이 천당에서 나락으로 떨어지고 역전을 반복했다. 이렇게 모든 게 불안정한 시기에 사람들은 에퀴(5프랑 짜리 주화)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노회한 물질주의자로 대변되는 무슈 모로는 드 세리제 백작의 집사로 출발해서 축재에 열심이었다. 비록 백작에게 발각되어 파면되기는 했지만 그간 모아 놓은 돈으로 이번에는 부동산업자로 변신했다. 마지막에 그렇게 모은 돈으로 그는 정치판에 뛰어 들어 의원 나리가 되기도 했다.

 

미남자에 멋쟁이로 통하던 조르주 마레는 그렇게 허랑방탕하고 통음난무의 시절을 보내고 나서 인생역전에 성공한 34세의 오스카르 위송과 마주하게 된다. 철부지 소년은 15년이 흘러 세상의 단맛쓴맛을 모두 보고 나서 비로소 성인이 되었다. 소설의 말미에 등장하는 가진 게 없는 사람은 완벽해야 한다는 말을 그대로 실천에 옮긴 모습이다. 인생의 첫 출발은 치욕스러웠지만, 두 번의 큰 재앙을 통해 삶의 교훈을 배운 남자는 가슴팍에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단 명예로운 퇴역 군인으로 금의환향했다.

 

발자크의 소설들은 중독이고 수렁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소설의 세계에 빠져 드니 말이다. 바로 <어둠 속의 사건>에 도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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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11-18 1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야 레삭매냐님의 발지크 읽기는 완전 특급행 열차 같아요~!!

레삭매냐님 글 보고 우주점가서 발자크를 검색했는데 <고리오 영감> 밖에 없더라구요 😅

레삭매냐 2022-11-18 16:09   좋아요 1 | URL
제가 선수를 친 모양입니다 :>

순식간에 발자크 네 권을 읽었
네요. 이러다 번아웃이 올 것 같
아 잠시 쉬고 나서 다시 읽어야
지 싶습니다.

전 <외제니 그랑데>의 새로운
버전 출간을 기대해 봅니다.

바람돌이 2022-11-18 2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진게 없는 사람은 완벽해야 한다? 저 말입니까??? ㅎㅎ
레삭매냐님 덕분에 발자크에 점점 관심이 커지고 있는 1인입니다. ^^

레삭매냐 2022-11-25 11:00   좋아요 1 | URL
저는 가진 것도 없고...
완벽해질 가능성도 -
뭐 그랬다고 합니다.

발자쿠는 고저 사랑입네다.
 


 

발자크와 다시 만나기까지 12년이 걸렸다.

12년 전에 <나귀 가죽>으로 발자크를 처음 만났다. 그리고 그 해 여름에 <고리오 영감>을 읽었다.

 

다시 만난 과연 발자크는 디테일의 마법사답다.

사람들은 발자크의 책들이 장황하고 지루하다고 한다. 인정한다.

그는 소설가인 동시에 시대의 기록자이기도 했다.

나도 처음에 <고리오 영감>을 읽으면서 미치는 줄 알았다. 이게 세계 10대 소설이라고? 하면서도 꾸역꾸역 읽었다.

 

19세기 프랑스를, 그리고 파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발자크를 만나기 위해서 이 장벽을 뛰어 넘어야 한다. 그렇게 장벽을 뛰어 넘은 이들에겐 극락이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사촌 퐁스>를 읽으면서 내가 경험한 것이다. 절반 정도까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드디어 본 궤도에 오르니, 무언가 번쩍 하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발자크의 팬이 된 순간이었다.

 

바로 3년 전에 사서 묵혀둔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을 읽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평생의 연인 한스카 부인을 만나는 장면까지, 절반 정도 읽었다. 그러다 발자크의 원전을 읽어야지 하는 마음에 잠시 한눈을 팔고 있다.

 

, 도서관에서 빌린 <사촌 베트>도 마저 읽어야 하는데... 중역이란 말이 있어서 좀 켕긴다. 일단 읽기는 해야겠지.

 

발자크의 책들은 다양한 출판사에서 나와서 수집하는 맛도 있다. 다음 타켓은 주말에 <사라진느>를 사냥할 계획이다.

 

지금은 문지에서 나왔지만 절판된 <인생의 첫 출발>을 읽는 중이다. 19세 청년 오스카르가 합승마차를 타고 가는 길에 만난 이들과 나누는 블러핑 섞인 대화들이 어찌나 재밌는지 모르겠다. 물론 이번에도 발자크는 19세기 파리의 원거리 대중교통 수단이었던 뻐꾸기마차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강력한 서사의 힘으로 발자크 특유의 장황함을 돌파할 것이다 나는. 결론은 발자크는 역시 문학 천재 그리고 소설기계라는 점이다.



발자쿠 읽기와 함께 깊어가는 가을, 단풍 사진 하나 투척.

참 이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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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2-11-17 10: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흑흑 매냐님, 제게 발자크는 <나귀가죽> 한권으로 별1개짜리 작가가 되고 말았습니다ㅠㅠ
발자크의 가장 난이도 낮은 작품이 뭐가 있을까요....

레삭매냐 2022-11-17 10:50   좋아요 1 | URL
꼴랑 6개의 발자크를 읽은
닝겡으로 감히 추천해 드리
기 거시키하지만...

아주 주관적 판단에 의하면
지만지에서 나온 <샤베르 대령>
과 꿈꾼문고의 <곱세크>가
어떠실지 조심스레 추천해 봅
니다. 일단 분량이 적답니다 ^^

물감 2022-11-17 11:16   좋아요 1 | URL
후... 매우 겁나지만 언젠가 도전해보겠습니다.
정보 감사합니다 ㅎㅎ

Falstaff 2022-11-17 21:24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 나귀가죽을 가장 어려운 발자크로 꼽는 분이 무지하게 많은데 그걸. ㅎㅎㅎ

stella.K 2022-11-17 13: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확실히 소설 고수시네요.
소설이라고 다 잘 읽히는 게 아닌데...
부럽습니다. 전 언제나 발자쿠를...ㅠ

레삭매냐 2022-11-17 17:57   좋아요 1 | URL
고수라니요... 당치도
않은 말쌈을 ㅋ

전 고저 부지런하고 싶은
책쟁이일 따름이지요.

발자쿠 넘나 잼나지 뭡니
까 그래. 읽을수록 찰진
맛이 -

바람돌이 2022-11-17 16: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고리오영감의 진입장벽이 높군요. 대표작인데말이죠. 레삭매냐님의 리뷰들 덕분에 발자크 진입장벽이 점점 낮아지고 있네요. ^^

레삭매냐 2022-11-17 17:58   좋아요 1 | URL
이러저러한 정보들을 캐다 보니
사람들이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
는 <고리오 영감>에서 바로 다
좌절해 버린다고 하네요 :>

아마 발자쿠 특유의 장황함과
디테일이 독으로 작동하지
않았나 싶네요. 일단 고비를 넘
기시고 난다면 웰컴투 극락월드
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