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프
파울로 코엘료 지음, 오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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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독서 악취미 중에 하나는 베스트셀러에 대한 기피다. 남들이 다 읽는 베스트셀러는 한사코 읽지 않으려고 한다. 그에 대한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래서 파울로 코엘료의 <알레프>가 시중에 나왔을 적에도 단호하게 읽지 않겠노라는 그런 터무니없는 결심을 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뒤늦게 작년에 나온 코엘료의 <브리다>를 읽고 책에 등장하는 마법과 전승에 대한 이야기에 슬슬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십대 시절에 자그마치 정신병원을 세 번씩이나 들락거리고, 좌파 지식인으로 브라질 독재정권의 핍박을 혹독하게 받았다는 파울로 코엘료의 특이한 경력이 눈에 띄었다. 한 때 신비주의와 악마주의(satanism)에 경도되었던 코엘료가 1980년대 중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을 통해 비로소 어려서부터 꿈꿔 오던 작가로 비상하게 되었노라는 그야말로 판타지 소설에 가까운 성공기는 더욱 매혹적이었다. 순례 후, 전 세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작가 중의 한 명으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솔직히 <알레프>를 읽기 전에 파울로 코엘료 작품 세계의 시원이 되는 <순례자>를 읽어 보려고 도서관에서 그 책을 빌렸다. 그리고 어느 신문 기사를 통해 알게 된 <11분>도 구했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간 때문에 <알레프>를 읽는 것만도 버거웠다. 다른 작품들도 읽었다면 코엘료가 그의 소설에서 줄기차게 들려주는 마법과 전승에 대한 근원적 이해에 도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코엘료 문학의 특질을 이루는 정신세계에 대한 희구, 영성, 신비주의 그리고 믿음과 진리를 찾는 인생 여정은 그의 자전적 소설 <알레프>의 핵심이다. <알레프>에 작가로서의 자신의 본 모습이 가장 적나라하게 투영되어 있지 않았나하는 느낌을 받았다. 소설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영적 전승의 테두리 내에서 끊임없이 성장하기를 원하는 59살의 저명한 작가에게 마스터 J.는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일상을 떠나 자신의 왕국을 재정복하라는 충고를 들려준다. 그리고 전생에서 자신이 저지른 비겁한 죄악 때문에 희생된 이들에게 용서를 구하라는 잠언을 남긴다. 주인공 “나”의 선택은 북페어에서 우연히 만난 러시아 편집자들과 독자사인회를 빌미로 한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철도여행이다.

나같이 코엘료를 잘 모르는 독자에게 소설 초반의 불친절함은 생경하게 다가온다. 마법과 전승 그리고 마스터 같이 낯선 낱말의 유희에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이런 단서만으로 어쩌면 이미 작가가 모두 깨달은 신비주의의 본질을 억지로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가 난센스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런 고비를 욱여넣고 이 멋진 작가의 순례길에 동행이 된다면 <알레프>에 숨겨진 알쏭달쏭한 신비함은 하나씩 문학적 재미로 치환된다.

코엘료가 시공을 초월해서 과거의 벌어졌던 사건과 장소 그리고 인연을 매개하는 비밀병기이자 소설의 제목으로 삼은 ‘알레프’는 특별한 공간인 동시에 지극히 일상적으로 묘사된다. 황석영 선생이 <낯익은 세상>에서 다뤘던 “일상의 위대함”이라는 주제가 코엘료에게도 공명한 것일까? 작가의 여행에 억지로 동행하게 된 미지의 캐릭터인 힐랄이라는 이름의 아가씨와 수많은 대화를 통해 함께 “알레프”를 체험하고, 묘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면서 현생에 환생하기 전, 삶을 공유했었다는 비밀에 도달한다. 그렇게 비밀의 문이 열리는 순간, 소설 <알레프>의 핵심인 사랑과 용서라는 주제가 독자의 가슴을 뒤흔들기 시작한다.

전생에 미처 다하지 못한 용서의 숙제는 생을 거듭하면서 반복된다. 신비주의자가 시간의 수레바퀴라고 부르는 억겁의 연은 보다 명징하게 다가온다. 책의 어느 곳에서 중세 스페인에서 가장 무시무시했던 종교재판소장 토마스 데 토르케마다의 이름과 마주치자, 힐랄과 작가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얼핏 짐작이 가기 시작했다. 혹시 그 사건의 설한(雪恨) 때문에 두 주인공이 지금의 생에서는 반대로 태어난 건 아닐까 하는 상상까지 될 정도로 코엘료 이야기의 매력에 푹 빠져 버렸다.

한편, 자기희생을 통한 구원이라는 기독교 정신의 전형은 전생의 업(業)을 이생에 풀어야 하는 전래하는 불가의 그것과 충돌한다. 기차 여행을 하다 말고, 기차에서 내려 아이키도 도장에서 통역가 야오와 벌이는 대련 과정에서 보여주는 화(和)의 도(道)는 또 어떠한가. 시베리아 샤먼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작가가 생각하는 신비주의의 극치가 보이는 것 같다.

열차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면서 소설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순례자와 함께 한 신비와 마법의 여행은 때로는 즐거움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그리고 외로움이라는 변용으로 다가왔다. 자연스럽게 그 끝에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질문이 순례길 내내 따라 다녔다. 그래서 종착역의 장미꽃을 건네주는 ‘강물 같은 사랑’은 못내 통속적이다. 작가의 명징한 대답을 고대하던 독자에게 코엘료는 다시 한 번 일상의 위대함으로 도전한다. 모든 것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저 책을 통해 작가와 동행하고, 참여한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자아의 신화’는 그것으로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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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1-16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고 싶군요..잘 읽고 갑니다. ^^ 주문넣고 ^^
 
한 권의 책
최성일 지음 / 연암서가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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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다, 이렇게 멋진 책을 남긴 이가 이제는 더 이상 우리와 만날 수가 없다니. 지난 성하(盛夏)에 뇌종양으로 작고한 저널리스트이자 서평가 최성일 선생의 책을 풍경은 가을이지만, 날씨는 따뜻한 봄날에 접하게 됐다. 그가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긴 <한 권의 책>이 서평책이라는 사실에 기대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또 얼마나 많은 책을 사게 될까하는 걱정이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책의 곳곳에서 책을 대하는 저자의 마음가짐을 엿볼 수가 있었다. 그것이 타인의 생각이건 아니면 저자의 생각이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 어느 일본 작가의 말대로 최종 원고가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텍스트는 저 나름대로의 여행길에 나서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이 리뷰의 제목도 “책을 읽기 전에 손을 씻으라”로 정했다. 아무리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라도 자식에게도 권하지 않았던 고인의 말이 들리는 것 같다는 느낌이다. 최근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책을 읽고 싶어 하지 않는 이에게 책을 권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더더욱 그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워낙 많은 책을 소개하다 보니 리뷰를 쓰는 지금 솔직히 말해서 저자의 말인지, 아니면 저자가 다른 책에서 인용한 말인지 헷갈리기까지 하다. 어쨌든 날마다 수도 없이 쏟아지는 책의 홍수 속에서 잡서를 읽을 시간이 없다고 말한 이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책을 추천해 달라는 말처럼 실속 없는 말도 없다고 했던가. 어찌 개인의 주관적 체험이 타인에게 고스란히 전달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아무리 감동 깊게 읽은 책이라고 해도, 타인에게는 그저 그런 잡서일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독서의 상대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최성일 작가의 서평은 정말 정갈하다. 그동안 많은 책을 읽고, 리뷰를 써오면서 진짜 좋은 리뷰는 읽는 이로 하여금 해당 리뷰의 책이 아직 그가 만나지 않았다면 독자가 책을 사게 만드는 서평이 최고의 리뷰라고 생각해왔다. 저자는 역시 고수였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오래전 군대시절에 읽은 안동림 선생의 <이 한 장의 명반>이 바로 떠올랐다. 한참 클래식에 미쳐 있던 시절, 안 선생의 책을 그야말로 신주단지 모시듯 했던 기억이다. 그 신주는 이 책으로 당분간 대체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책에 씌여 있다고 모두 믿지 말라고 일갈했던 일본 작가 다치바나 다카시의 글로 <한 권의 책>을 시작한다. 짧지만 강렬한 몇몇 문장이 애서가의 심장을 뒤흔든다. 모름지기 책을 살 때 돈을 아끼지 말 것이며, 책을 고르는데 있어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책을 읽으면서 의심을 거두지 말라는 계언이다. 독서가의 실증적 자세에 대한 주문이다. 나는 그의 애서가 리트머스 시험지 중에 어느 정도에 와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아무래도 그 수많은 책 중에서 먼저 눈길이 가는 건, 그래도 한 번 읽은 책들이었다. 드디어 만화 <십자군 이야기>의 연재를 다시 시작한 김태권 작가 그리고 닉 혼비의 <닉 혼비 런던스타일 책읽기>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책을 읽다가 계속해서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에서 해당 책들이 있는지 여부를 찾게 된다. 열악한 우리나라의 출판사정상, 수년만 지나면 품절, 절판의 운명에 처하게 되는 책이 얼마나 많던가. 아자르 나피시의 <테헤란에서 롤리타를 읽다>도 그런 운명의 책이었다. 저자는 세상의 모든 근본주의는 나쁘다고 선언한다. 시중에서 구할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한 권의 책>은 애서가에게 자성의 기회도 부여한다. 오래 전에 구입했지만 여전히 읽지 못하고 있는 업튼 싱클레어의 <정글> 서평을 보면서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자신을 볼 수가 있었다. 로버트 A. 존슨의 <신화로 읽는 남성성 He> 같은 경우에는 최성일 작가가 아니었다면 평생 존재조차 모를 뻔한 책도 있었다. 항상 서평책을 보면서 후회하지만, 한편으로는 개인적 독서의 지평을 넓혀 준다는 차원에서 환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김태권 작가의 십자군 전쟁에 대한 공정한 시각만큼이나,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책은 바로 오늘 도서관에서 바로 빌려온 타리크 알리의 <석류나무 그늘 아래>와 이거야말로 진짜 문학이라고 다른 서평가(최성각)의 말을 빌어 소개한 <드리나 강의 다리>였다. 급한 마음에 도서관에 가서 빌려 오긴 했는데, 아마 이 두 책은 조만간에 구입하게 될 것 같다.

부족한 리뷰의 마무리를 하며, 다시 한 번 책읽기 전에 손을 씻는다는 말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누구에게나 책을 읽는 백만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의 벗으로 평생지기 같은 책을 대하는 최소한의 정갈한 예의의 시작이다. 그렇게 책과 만났으면 좋겠다. 참 좋은 책들을 알게 돼서 <한 권의 책>을 만난 보람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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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토끼 차상문 - 한 토끼 영장류의 기묘한 이야기
김남일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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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기묘한 이야기”다. 나는 이 표지에 나온 “기묘”란 단어에서 두 개의 중첩되는 이미지를 읽었다. 하나는 말 그대로 이상하고 묘하다는 뜻과 다른 하나는 <천재토끼 차상문>의 주인공 천재토끼, “기묘”(己卯)라고 명시되어 있지 않은가. 하나의 단어에서 전혀 다른 두 가지의 의미를 유추해낼 수 있다니, 이 소설 재밌을 것 같은 감이 온다. 이렇게 김남일 작가의 소설은 처음부터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출발한다.

<천재토끼 차상문>의 시발점을 기묘년(1939)으로 삼고 싶다. 그 단서는 책의 서두에 등장하는 황국신민서사다. 작가는 곧바로 식민지배와 해방을 아우르는 역사적 사실과 호모 사피엔스의 후예로 태어난 토끼인간 차상문의 이종교배를 시도한다. 영화 <엑스맨>은 저리가라할 정도의 생물학적 사실을 뛰어넘는 시도에 그저 놀랍기만 하다. 차상문의 가계도를 분석하는 일은 너무 복잡하니 토끼인간으로 태어난 그의 성장에 주목하자. 굳이 멘델의 우열의 법칙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토끼인간이 우성이라는 건 불문가지다. 아버지의 엄격한 훈육이라는 후천적인 영향까지 더해져서 호모 사피엔스의 능력을 뛰어넘는 천재형 토끼인간의 탄생을 독자는 목격한다.

근대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독재자를 숭배하는 토깽이 아빠는 그를 데리고 어느 날 공장식 축산방식으로 개조된 양계장을 방문한다. 낮과 밤이 조작된 자연 환경 속에서 시도 때도 없이 알을 생산하는 닭의 모습은 조국 근대화라는 미명으로 농촌에서 도시의 공장으로 내몰린 세대의 변주곡이다. 작가는 직접적이지 않으면서도 고도로 농축된 묘사를 통해 개발 독재 시대의 씁쓸한 풍경을 들려준다. 어쨌든 차상문이 목도한 양계장의 비참한 현실은 그의 삶에서 계속해서 트라우마로 작동한다. 여기서 독자가 마주치게 되는 역설은 주인공 토끼인간 차상문 자체가 자연의 순리에 어긋난 존재라는 사실이다. 더블 트위스트?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야만적 폭력에서 차상문은 얼마 전에 읽은 나치가 아우슈비츠에서 저지른 만행을 떠올린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인생은 그렇게 우리네 생각대로 단순하게 흘러가지 않는 법, 묘한 방식으로 매질 끝에 화해를 하는 부모를 접하면서 청소년 토끼는 다양한 모둠살이의 이벤트의 의미를 깨쳐 나간다.

병신년(1956, 왜 하필이면 병신년생이던가!)에 태어난 천재토끼는 당시의 천재답게 월남전으로 골탕 먹고 있던 대국(大國)의 고등교육제도로 편입된다. 반전 물결과 자유주의가 넘쳐흐르던 캘리포니아 버클리는 인류의 새로운 종에게 신천지였다. 버클리에서 수학을 공부하며 레푸스 사피엔스(lepus sapiens)는 불확실성이 지배하던 시기에 합리적 사고와 이성을 추구하는 법을 배운다. 버클리에서 자신의 영혼을 뒤흔든 동종의 짝 신애란을 만나지만, 그녀가 DPRK 출신이라는 말에 그는 자신의 감정을 소환해 버린다. 그에게 남은 건 LSD와 교미(交尾)로 대변되는 비벌리힐스의 타락뿐이다.

테트 대공세, 반전 운동, 유신헌법, 워터게이트 사건, 독재자의 비참한 죽음 그리고 6월 항쟁에 이르는 대한민국과 미국의 굵직굵직한 현대사가 정신적 교미와 예술적 교미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갈등으로 어리둥절한 표정의 실존적 존재의 주변을 그야말로 폭풍처럼 엄습한다. 노골적인 방식이 아니라 고래의 구전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 풍자와 해학을 텍스트와 적절하게 배합한 작가의 농익은 진가가 그 빛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이것으로 끝인가?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작가는 전 미국을 뒤흔든 폭탄 테러용의자로 체포하는데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비용이 들었다는 몬태나에 거주하는 “은둔자”를 비로소 등장시킨다.

영예가 보장된 모교에서의 전임 교수 자리를 박차고 산골 마을로 하방한 천재토끼는 자신의 전임자처럼 환경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의 존재 자체(그 어느 누구도!)가 지구별에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치명적 결론에 도달한다. 이런 반지구적 비밀 앞에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이 책을 읽는 내내 나를 따라다닌 것 같다. 기존의 종과 전혀 다른 레푸스 사피엔스의 존재론적 인식으로부터 출발해서, 파란만장한 역사를 관통해서 지구별과 함께 하는 모둠살이에 이르는 철학적 질문은 끊이지 않는다.

소설의 후반부는 6월 항쟁의 한 복판에 내던져진 토끼인간과 실존 인물 시어도어 존 카진스키의 전설이 두 번째 이종교배를 시도하면서 뒤죽박죽이 된다. 다시 생각해도 폭소가 터져 나오는 연필깎이 칼로 분연히 보수의 의기를 과시하던 한미건강원 김억구 사장 에피소드는 정말 압권이었다. 그 외에도 <천재토끼 차상문>의 깨알 같은 재미를 더하는 작가의 뻔뻔한 이야기들은 끝이 없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생각해 보니 <천재토끼 차상문>은 정말 기묘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캐릭터의 신비한 탄생으로부터 시작해서, 한 개인을 옴짝달싹하게 못하게 옭아매는 무게가 느껴지는 역사의 진중한 전개는 정말 일품이다. 우리와 더불어 모둠살이하고 있는 지렁이 같은 미물이라도 ‘쿵쿵’거리는 소리로 놀라게 하지 말라는 토끼인간의 계언(戒言)은 오랫동안 나의 기억에 남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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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 2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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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아민 말루프라는 레바논 출신의 작가가 쓴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이라는 책을 읽었다. 기존 서양 역사가들의 시점에서 저술된 책과 확실히 다른 관점을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책이었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발간 중인 시오노 나나미 여사의 십자군 전쟁 이야기는 어떨까. 아예 삶의 터전을 일본에서 이탈리아로 옮겨 집필에 전념하고 있는 시오노 여사의 <십자군 이야기>는 정통 역사가들이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던 십자군 전쟁의 경제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중에서도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키워드는 바로 “이코노믹 애니멀”이었다.

1차 십자군 원정의 결과 중근동에 착근한 예루살렘 왕국을 비롯한 네 개의 십자군 국가는 11세기 후반부터 대략 1세기 동안 존속하기에 이른다. 수니파와 시아파 이슬람 세계의 고질적인 분쟁은 프랑크 침략자에 대한 통일전선을 통한 대항을 이루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예루살렘 회복 이후, 보에몽과 탕크레드 같이 걸출한 영웅과 리더십의 부재에 시달리던 십자군 국가의 행운이었다. 곧이어 알레포를 중심으로 한 장기, 누레딘 그리고 이슬람 세계에서 아직도 불세출의 영웅으로 칭송되는 살라딘의 등장에 이은 이슬람 세계의 통일은 가까스로 유지되고 있던 십자군 국가의 종언을 의미했다.

치열한 역사 전개의 무대에서 어느 한 쪽으로 대세가 기울게 되는 요인 중의 하나는 이런 뛰어난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가 계속해서 배출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그런 점에서 아버지 장기 이래 숙원이던 다마스쿠스를 정복하고 나서, 지진 복구와 병원과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 기관을 설립해서 내정에 힘쓴 누레딘의 노력 덕분에 지하드[聖戰]에 방점을 찍게 되는 살라딘의 등장이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살라딘은 훗날 자신의 주군 누레딘에게 도전하게 되지만 말이다.


한편, 1144년 에데사의 함락으로 비로소 점증하는 이슬람 세력의 위협을 느낀 서방 세계는 시토회 소속 수도사 베르나두스의 주창으로 다시 한 번 십자군 원정에 나서게 된다. 제후가 주축이 되었던 1차 십자군 원정과 달리, 유럽 세계의 두 거물인 프랑스 왕 루이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콘라트가 직접 나선 두 번째 원정은 다마스쿠스 공략을 앞두고 철군하면서 실패로 돌아간다.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이 원정으로 서방 세력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이슬람 세계는 비로소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게 된다.


시오노 여사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던 이 시기에 십자군 국가가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몇 가지 원인을 다음의 요인들로 설명한다. 첫 번째는 특수부대였던 템플 기사단과 성 요한 기사단의 존재로 꼽는다. 성지회복이라는 대전제를 완수한 후, 유럽으로 돌아갔던 1차 십자군 원정에 참가했던 대다수의 서유럽 기사들과는 달리 수도사이자 전사로 “이교도 박멸”의 최전선에서 광신적으로 싸우던 템플 기사단은 이슬람 쪽의 압도적인 병력을 그야말로 일당백의 전투력으로 막아낸 일등공신이었다. 귀족 자제들이 주를 이뤄 병자를 간호하던 성 요한 기사단(병원 기사단)과 달리 하층 기사가 주축이었다고 한다.

두 번째 요인으로는 만성적인 병력 부족 때문에 광대한 영지를 지킬 수 없었던 십자군 국가는 곳곳에 기사단을 주축으로 한 성채를 건설했다. 서구식 봉건제를 팔레스티나 지방에 그대로 이식한 십자군 국가는 서유럽에서 자신들의 근거였던 성채로 공성전에 익숙하지 못한 이슬람 군대를 상대로 유리한 방어전을 구사했다. 마지막으로 내륙의 거점을 지원하기 위해 해안에 포진한 항구도시를 지원하는 이탈리아에 포진했던 해양 도시국가 베네치아와 제노바, 피사 등의 해군력 지원을 들 수가 있다. 물론 이슬람 세계에도 이집트 파티마 왕조의 해군력이 존재하긴 했지만, 서방 세계의 압도적인 해군력에 상대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 이전에 상인이었던 해양 도시국가들은 십자군 국가의 생명선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까 싶다. 국시였던 경제 교역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들 “이코노믹 애니멀”들은 민족과 종교 이데올로기를 초월해서 이익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1980년대 세계 경제를 주물렀던 작가의 동포들과 유사하다. 그래서 시오노 여사가 굳이 ‘경제 동물’이라는 표현을 이코노믹 애니멀이라는 말로 순화하지 않았나 싶다.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의 등장까지 좀 지루한 면이 있지만, 마침내 파티마 왕조의 이집트와 아바스 왕조의 이라크와 시리아를 통일한 살라딘이 등장하면서 십자군 국가의 몰락을 향한 역사의 시계추는 숨 가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살라딘이 지금까지도 아랍 세계의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지만, 살라딘이 아직도 소외당하는 쿠르드족 출신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살라딘은 주군 누레딘의 명을 받아 이집트 정복에 나서게 되면서 비로소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파티마 왕조의 멸망과 누레딘의 죽음(1174년)으로 명실상부한 아랍 세계의 술탄으로 공식 임명된 살라딘은 바야흐로 그리스도교,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교의 공통 성지인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지상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지하드에 나선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시오노 여사의 <십자군 이야기> 두 번째 인스톨은 2005년 할리우드에 제작된 대작 영화 <킹덤 오브 헤븐>과 조우한다. 어떻게 해서든 성도(聖都) 예루살렘 왕국을 지키려는 영민한 군주 보두앵 4세의 눈물겨운 분투기도 빠질 수 없다. 나병이라는 천형(天刑)으로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보두앵 4세는 트리폴리 백작 레몽과 이벨린의 발리앙의 도움을 받아 성지 수호에 나선다. <십자군 이야기> 후반기에 등장하는 발리앙이 바로 영화에서 올랜도 블룸이 연기한 바로 그 캐릭터다. 영화에서 발리앙은 프랑스 대장장이 출신으로 각색돼서 등장하는데, 시오노 여사의 추적에 의하면 그의 가문은 이탈리아에 근거를 둔 기사 집안으로 중근동에서 나고 자란 발리앙은 여러 언어에 능통했고 십자군 국가의 운명을 가른 하틴 전투에 참가해서 용맹을 과시했으며, 특히 예루살렘 공방전에서는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살라딘과 함께 후세에 길이 남을 기사도의 원형을 보여준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엄청난 이슬람 대군의 공격 앞에 자력으로 예루살렘을 지켜낼 수 없었던 이벨린의 발리앙과 예루살렘 수비대는 살라딘을 상대로 영예로운 항복을 얻어내고 성도 예루살렘으로부터 철수한다. 백 년 전, 예루살렘을 정복했던 십자군이 성도를 피로 물들였다면 살라딘은 이슬람 종교지도자 이맘들의 격렬한 항의를 받으면서까지 자신의 관대함을 만방에 과시한다. 그는 그리스도교가 보여주지 못했던 용서와 관용을 실천한 이슬람 지도자였다.

시오노 여사는 십자군 국가의 방어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기사단의 유래와 활약에서부터 시작해서, 훗날 십자군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되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서방제국과의 갈등, 예루살렘 공방전 같은 십자군 역사의 중요한 뼈대는 물론이고 ‘산의 노인’이 시작한 해시시를 피우는 암살단 아시시의 이야기는 물론이고 십자군 국가의 깡패이자 ‘고삐 풀린 개’라는 별명으로 불린 르노 드 샤티용의 만행 같은 깨알 같은 재미도 빠트리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시오노 여사가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거시사보다 최근에는 정사(正史)에서 다루지 않는 개인의 일상 같은 미시사의 재미에 흠뻑 빠져 있는데, 오래간만에 만난 통사적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다만,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시오노 여사의 여전한 ‘영웅 중심적 사관’은 불편하다. 어쩌면 살라딘에 앞서 이슬람 세계를 통일하고 예루살렘 탈환을 했을지도 모를 이마드 앗딘 장기가 어느 이름 모를 노예에게 암살당한 사실도 역사의 흐름을 뒤바꾼 무명인의 활약을 반증하는 역설이 아닐까. 이슬람 측 사료의 절대 부족이 한 원인이기도 하겠지만, 십자군 전쟁에 대한 서구 중심적 서술 역시 아쉽다. 그런 점에서 당시 시대상의 이슬람 측 증언인 우사마 이븐 문키드가 기록은 아주 중요하다. 문키드가 남긴 프랑크인의 의술 편은 김태권 작가가 알라딘에서 연재 중인 같은 제목의 만화에서도 다뤘는데 두 작품을 비교하면서 읽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다.

시오노 여사의 베네치아에 대한 사랑은 <십자군 이야기>에서 유감없이 드러났다. 어쩌면 그동안에 나온 르네상스 시대를 배경으로 한 저술의 알파와 오메가가 <십자군 이야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내륙 거점을 모두 잃은 십자군 원정에서 앞으로 해양 도시국가의 대표 주자인 베네치아의 비중의 더욱 커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성도 예루살렘을 둘러싼 공방전으로 십자군 국가/서방 세계와 이슬람 세계가 장군, 멍군을 한 번씩 불렀다면 이제 <십자군 이야기> 세 번째 인스톨에서는 십자군 전쟁 최고의 영웅들이 격돌하는 세 번째 십자군 원정이 펼쳐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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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1 - 결의 형제
이두호 지음 / 자음과모음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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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오늘 도서관에 안보윤 작가의 <사소한 문제들>을 빌리러 갔다. 그런데 문득 눈에 띄는 만화 전집이 있었다. 자음과 모음 출판사에서 나온 32권 짜리 임꺽정 시리즈였다. 빌릴 수 있는 한도가 1인 하루 5권이라고 해서, <사소한 문제들>과 나머지 네 권은 모두 <만화 임꺽정>을 빌렸다. 그렇게 우리 만화를 줄기차게 그린다는 이두호 화백의 만화를 정말 오랜만에 만날 수가 있었다.

사실 내가 아는 임꺽정이라고는 벽초 홍명희 선생의 미완성 작품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읽기에 부담 없는 만화가 있어서 참 다행이지 싶었다. 헌책방에서 산 벽초 선생의 임꺽정과 이두호 화백의 만화 임꺽정은 많이 달랐다. 전자가 임꺽정과 함께 활동하게 되는 주면인물들의 등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후자는 백정의 아들 임꺽정이 어떻게 해서 검술의 달인이 되는지 그 과정을 중점으로 그리고 있다.

만화 임꺽정에서 양주 사는 주인공 임꺽정은 고을의 지주 박 좌수의 아들을 골탕먹인 죄로 어쩔 수 없이 정든 마을을 떠나게 된다. 어려서부터 괴력을 소유한 영웅은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는 말을 그대로 보여준다. 아, 그전에 앞서 만화는 훗날 임꺽정을 토벌하게 되는 토포사 남치근과 임꺽정의 질긴 인연의 끈을 슬쩍 보여준다. 명종 10년(1555)에 일어난 을묘왜란에서 왜군에게 포위되었다가 임꺽정의 활약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남치근은 뛰어난 무공을 보여준 백정 임꺽정을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다.

영웅서사에서 빠질 수 없는 주인공이 겪게 되는 고난과 역경은 만화 임꺽정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지주 박 좌수의 핍박을 피해 서울로 가는 길에 구공 스님을 만나, 일생의 스승인 전다비를 만나 절세 무공을 익히고 전가의 보도 <제민도>를 득템하기에 이른다. 훗날 의적 두목으로 신출귀몰하며 관군을 농락하게 될 기본 기술과 무기의 바탕에 대한 설명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스승을 떠난 임꺽정은 두 번째 스승 갖바치(양주봉)에게 글을 배우며 몰락한 양반의 후예 장학봉과 의지할 곳 없는 떠돌이 소년이자 돌팔매의 명수 조금맹과 의형제를 맺는다. 박 좌수 아들의 행패와 산 속에서 의형제 결의를 맺는 임꺽정과 장학봉 그리고 조금맹을 역모로 엮겠다는 포졸의 행태에서 부패한 관리의 실상을 엿볼 수가 있었다. 자, 이제 주인공의 바탕과 주인공을 도울 사이드킥이 준비되었으니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갈 차례다.

왕조국가 조선에서 사농공상이라는 성리학적 신분질서는 사회구성의 근간이었다. 이런 기본 사회 구성요소에도 들지 않는 백정은 천민으로 그야말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았다. 백정의 자식은 영원히 백정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조선 사회 신분질서였다. 이런 계급적 질서를 인정할 수 없었던 임꺽정이 고를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는 반역이었을 게다. 아직 만화에서는 형상화되지 않았지만, 주인공 임꺽정이 사회의 모순과 불합리한 신분질서의 진실을 깨닫는 순간 그 폭발력은 어떨지 궁금하다. 당분간 열심히 도서관에 출입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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