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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프
파울로 코엘료 지음, 오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9월
평점 :
내가 가진 독서 악취미 중에 하나는 베스트셀러에 대한 기피다. 남들이 다 읽는 베스트셀러는 한사코 읽지 않으려고 한다. 그에 대한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래서 파울로 코엘료의 <알레프>가 시중에 나왔을 적에도 단호하게 읽지 않겠노라는 그런 터무니없는 결심을 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뒤늦게 작년에 나온 코엘료의 <브리다>를 읽고 책에 등장하는 마법과 전승에 대한 이야기에 슬슬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십대 시절에 자그마치 정신병원을 세 번씩이나 들락거리고, 좌파 지식인으로 브라질 독재정권의 핍박을 혹독하게 받았다는 파울로 코엘료의 특이한 경력이 눈에 띄었다. 한 때 신비주의와 악마주의(satanism)에 경도되었던 코엘료가 1980년대 중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을 통해 비로소 어려서부터 꿈꿔 오던 작가로 비상하게 되었노라는 그야말로 판타지 소설에 가까운 성공기는 더욱 매혹적이었다. 순례 후, 전 세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작가 중의 한 명으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솔직히 <알레프>를 읽기 전에 파울로 코엘료 작품 세계의 시원이 되는 <순례자>를 읽어 보려고 도서관에서 그 책을 빌렸다. 그리고 어느 신문 기사를 통해 알게 된 <11분>도 구했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간 때문에 <알레프>를 읽는 것만도 버거웠다. 다른 작품들도 읽었다면 코엘료가 그의 소설에서 줄기차게 들려주는 마법과 전승에 대한 근원적 이해에 도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코엘료 문학의 특질을 이루는 정신세계에 대한 희구, 영성, 신비주의 그리고 믿음과 진리를 찾는 인생 여정은 그의 자전적 소설 <알레프>의 핵심이다. <알레프>에 작가로서의 자신의 본 모습이 가장 적나라하게 투영되어 있지 않았나하는 느낌을 받았다. 소설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영적 전승의 테두리 내에서 끊임없이 성장하기를 원하는 59살의 저명한 작가에게 마스터 J.는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일상을 떠나 자신의 왕국을 재정복하라는 충고를 들려준다. 그리고 전생에서 자신이 저지른 비겁한 죄악 때문에 희생된 이들에게 용서를 구하라는 잠언을 남긴다. 주인공 “나”의 선택은 북페어에서 우연히 만난 러시아 편집자들과 독자사인회를 빌미로 한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철도여행이다.
나같이 코엘료를 잘 모르는 독자에게 소설 초반의 불친절함은 생경하게 다가온다. 마법과 전승 그리고 마스터 같이 낯선 낱말의 유희에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이런 단서만으로 어쩌면 이미 작가가 모두 깨달은 신비주의의 본질을 억지로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가 난센스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런 고비를 욱여넣고 이 멋진 작가의 순례길에 동행이 된다면 <알레프>에 숨겨진 알쏭달쏭한 신비함은 하나씩 문학적 재미로 치환된다.
코엘료가 시공을 초월해서 과거의 벌어졌던 사건과 장소 그리고 인연을 매개하는 비밀병기이자 소설의 제목으로 삼은 ‘알레프’는 특별한 공간인 동시에 지극히 일상적으로 묘사된다. 황석영 선생이 <낯익은 세상>에서 다뤘던 “일상의 위대함”이라는 주제가 코엘료에게도 공명한 것일까? 작가의 여행에 억지로 동행하게 된 미지의 캐릭터인 힐랄이라는 이름의 아가씨와 수많은 대화를 통해 함께 “알레프”를 체험하고, 묘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면서 현생에 환생하기 전, 삶을 공유했었다는 비밀에 도달한다. 그렇게 비밀의 문이 열리는 순간, 소설 <알레프>의 핵심인 사랑과 용서라는 주제가 독자의 가슴을 뒤흔들기 시작한다.
전생에 미처 다하지 못한 용서의 숙제는 생을 거듭하면서 반복된다. 신비주의자가 시간의 수레바퀴라고 부르는 억겁의 연은 보다 명징하게 다가온다. 책의 어느 곳에서 중세 스페인에서 가장 무시무시했던 종교재판소장 토마스 데 토르케마다의 이름과 마주치자, 힐랄과 작가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얼핏 짐작이 가기 시작했다. 혹시 그 사건의 설한(雪恨) 때문에 두 주인공이 지금의 생에서는 반대로 태어난 건 아닐까 하는 상상까지 될 정도로 코엘료 이야기의 매력에 푹 빠져 버렸다.
한편, 자기희생을 통한 구원이라는 기독교 정신의 전형은 전생의 업(業)을 이생에 풀어야 하는 전래하는 불가의 그것과 충돌한다. 기차 여행을 하다 말고, 기차에서 내려 아이키도 도장에서 통역가 야오와 벌이는 대련 과정에서 보여주는 화(和)의 도(道)는 또 어떠한가. 시베리아 샤먼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작가가 생각하는 신비주의의 극치가 보이는 것 같다.
열차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면서 소설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순례자와 함께 한 신비와 마법의 여행은 때로는 즐거움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그리고 외로움이라는 변용으로 다가왔다. 자연스럽게 그 끝에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질문이 순례길 내내 따라 다녔다. 그래서 종착역의 장미꽃을 건네주는 ‘강물 같은 사랑’은 못내 통속적이다. 작가의 명징한 대답을 고대하던 독자에게 코엘료는 다시 한 번 일상의 위대함으로 도전한다. 모든 것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저 책을 통해 작가와 동행하고, 참여한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자아의 신화’는 그것으로 충분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