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문제들
안보윤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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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을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소하다는 상대적인 거라고. “사소하다”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보잘것없이 작거나 적다, 그리고 반대말은 예상대로 중요하다였다. 어떤 사소한 문제는 지극히 주관적 판단의 소치다. 내가 보기에 사소한 것도 타인의 눈으로 보면 중요할 수도 있다는 상대성이야말로 처음으로 만나는 안보윤 작가의 <사소한 문제들>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닐까. 사족으로 ‘사소하다’의 예제를 찾아보니 가장 먼저 나오는 문장이 ‘사소한 문제’더라.

일단 소설 <사소한 문제들>의 배경이 내 서식지 부근의 인천 배다리가 반가웠다. 예전에 종종 헌책 사냥을 하러 다니던 헌책방이 즐비했던 바로 그 배다리. 지금은 구 도심에서 밀려나 소설에 나오는 대로 그저 시간이 고이는 장소가 되어 버렸다. 어제 책을 다 읽고 나서 한 번 배다리에 들러볼까 싶었는데, 바람이 차서 그만뒀다. 항상 행동이 생각을 쫓지 못하는구나.

안보윤 작가는 <사소한 문제들>에 두 명의 주인공을 배치한다. 먼저 등장하는 캐릭터는 권아영, 볼품없고 뚱뚱해서 스스로를 숲 속에 사는 몬스터 슈렉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 생각조차 자신의 것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던가. 어쩌면 그것도 사소한 문제일지 모르겠다. 싱글맘과 함께 사는 아영이는 외롭고, 쓸쓸하다. 게다가 동네 양아치 황순구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모욕과 협박을 받는다. 이거 초반부터 심상치가 않다. 그리고 보니 그 황순구도 자신보다 우월한 이들에게 무시로 폭압적인 대접을 받는다. 그렇게 폭력의 사슬은 이어진다는 말을 작가는 하고 싶었던 걸까. 독자는 상식을 벗어난 전개에서 작가의 진의를 부지런히 수사한다.

두 번째 주인공 배두식은 39세 중년의 헌책방 주인이다. 두식은 동네 건달 황순구의 횡포를 이기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온 아영을 거둔다. 물론, 자발적인 선택이 아니라 칼로 자해하겠다는 아영의 협박에 못 이긴 결과다. 그렇게 둘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문제는 이 아저씨가 게이라는 점이다. 안보윤 작가는 슬그머니 두식의 성 정체성의 원류를 플래시백으로 소설 곳곳에 파묻는다,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그런 부비트랩처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식과 아영은 서로에게 한 줌의 체온을 전해주면서 서로를 보듬게 되는 험한 여정에 오른다.

폭력의 먹이사슬은 황순구를 괴롭히는 일단의 무리에게서 아영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아영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보다 약한 이를 때리고 갈취하는 그야말로 전형적 노예근성이 적나라하게 노출된다. 게이 두식에게 가망 없는 로맨스를 꿈꾸게 하는 성현의 존재는 한 술 더 뜬다. 도박에 미쳐 집에서까지 버림받은 성현에게 두식은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다. 두식은 성현이 개털이 되어 오갈 데 없을 때 찾게 되는 마지막 버팀목이다. 물론 그런 오아시스도 인터넷 채팅으로 만난 게이 혐오자에게 끔찍한 폭행을 당하자 언제나 차고 넘칠 것 같은 물이 고갈되어 버린다. 그렇게 돈오하게 된 두식은 ‘조심스러운 태도와 상반된 갈구하는 눈빛’으로부터 마침내 해방된다. 물론, 그 과정에 아영의 철부지 행동이 결정적 원인을 제공한다.

정교하게 제조된 우유부단한 캐릭터 두식의 돈을 갈취하는 성현을 독자는 미워할 수박에 없다.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은 공허하다. 오만가지 이유로 멀쩡한 부모님을 돌아가시게 만들고, 사채 빚으로 가정 파탄에 일조하며, 아내마저 듣도 보도 못한 희한한 질병을 선사하는 성현은 두식을 철저하게 이용해 먹는다. 이 밉상 캐릭터에 대한 증오는 분노로 발전할 판이다. 어쩌면 성현은 두식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습기’ 같은 존재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두식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성현은 유리문에 갇힌 “죽은 넙치 얼굴을 한” 실패자다.

아영의 화끈한 방화로 두식의 터전이었던 헌책방이 홀랑 타버렸을 때, 두식은 ‘욕망이 거세된 책’들을 지켜본다. 그런데 정작 거세된 욕망의 주인공은 있으나 마나 한 책이 아니라 두식이 아니었을까. 죽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시간이 고인 헌책방에서 도대체 두식은 무슨 꿈을 꾸고 있었을까. 희한하게도 헌책방 주인이 책 읽는다는 말은 아마 소설에 등장하지 않은 것 같다. 그저 하루의 벌이를 위해 분류를 하고, 인터넷에 가격을 넣는 일을 할 뿐이다. 그마저도 아영이 등장한 다음에는 아영의 몫이 되었지만. 아영이 자신의 발목을 잡는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헌책방이 그렇게 어이없이 사라져 버렸을 때, 비로소 두식은 자신의 과거에 이별선언을 할 수가 있었다. 아영이 남긴 최소한의 체온의 아스라한 추억을 뒤로 한 채.

그러고 보니 <사소한 문제들>에 진짜 ‘사소한’ 문제는 하나도 없었다.

[뱀다리] 방화 와중에 두식의 헌책방 위에 거주하던 성인용품점 사장이 구하기 위해 던진 각종 낯 뜨거운 물품들을 구경꾼들이 잽싸게 약탈해 가는 장면에 대한 묘사는 정말 일품이었다.

[뱀다리2] 작가 사진은 파주가 아니라 배다리에서 찍었으면 더 좋았을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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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 오가와 요코 컬렉션
오가와 요코 지음, 권영주 옮김 / 현대문학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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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체스도 둘 줄 모르면서 순전히 귀엽다는 이유로 심슨 가족이 체스 판의 말로 등장하는 체스 판을 산 적이 있다. 같이 살던 친구와 체스에 취미를 붙여 보려고 한동안 체스 두는 법을 배우곤 했는데, 끈기가 없어서인지 만날 같은 상대를 상대하다 보니 재미가 없어져서인지 금세 그만둬 버린 것이 나의 체스에 대한 유일한 기억이다.

우리에게는 <박사가 사랑한 수식>으로 유명한 오가와 요코의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로 다시 체스의 세계에 빠져 들었다. 어느 한가한 휴일 오후, 이 책과 그동안 읽고는 있었는데 미처 읽지 못한 세 권의 책을 들고 카페로 향했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바깥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커피향이 그윽하게 밴 카페에 들리는 적당한 소음과 BGM으로 깔린 재즈 음악을 들으며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를 읽기 시작했다.

일본 작품이 분명한데도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에는 이 아름다운 소설의 배경이 일본인지 아니면, 서구의 어느 조용한 고장인지 알 방법이 없다. ‘리틀 알레힌’이라는 이름의 주인공 소년의 이름도 알 수가 없다. 천재 체스 플레이어 소년은 체스 판에서 소리 없이 움직이는 우직한 말의 상징처럼 그렇게 다가온다. 조실부모하고 가구 수리를 하는 할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 소년은 입술이 달라붙은 채 태어난다. 정강이 살을 이식한 수술로 입이 튼 소년, 당연히 말수가 적고 주변에 친구도 없다.

아, 아니다 소년에게는 백화점 옥상에 올라갔다가 너무 커서 내려올 수 없게 된 코끼리 인디라와 좁은 틈에 갇혀 죽었다는 전설의 미라가 있다. 어쩐지 그의 주변에서 죽음의 그늘이 떠날 줄을 모른다. 아,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 소설은 호러 엽기 소설은 아니니까. 게다가 어느 날 학교 수영장에서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버스 운전사 아저씨를 발견한 소년, 해초처럼 너풀대던 그의 겨드랑이 털이 유난히 떠오른다. 그날 이후, 소년은 그의 입술 주변에 돋아난 솜털로 그를 괴롭히던 소악당들로부터 해방된다.

버스를 개조한 트레일러에서 살면서 간식을 즐기던 마스터로부터 소년은 체스를 배우기 시작한다. 이 세상에 마음을 둘 곳이 없던 소년은 8X8 반상의 세계에 그만 홀딱 반해 버린다. 체스 세계의 SCV 같은 존재인 폰(pawn)을 제 이름으로 한 고양이를 쓰다듬으면서 마스터에게 한 수 한 수 배우는 즐거운 나날들이 계속된다. 세상 무엇보다 체스 두는 도중에 간식을 즐기던 마스터가 심장마비로 죽고 나자, 비로소 소년은 홀로서기에 나선다. 스승의 죽음과 제자의 홀로서기라는 신화의 전형을 소설은 그대로 재현한다.

체스를 사랑하는 재력가 노파 영양의 도움으로 체스 두는 인형 리틀 알레힌으로 소년은 체스의 바다에 뛰어든다. 체스 판에서 상대에 맞서기보다 체스 판 밑으로 기어 들어가 체스의 바다를 헤엄치기 좋아하는 소년의 환상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코끼리 인다라의 꼬리를 잡고 흑백의 체스 무늬가 들어간 고양이 폰을 왼손에 앉은 소설의 표지 그림이 완벽하게 이해됐다.

체스를 위해 자신의 몸집까지 줄여 가면서 체스에 몰입해서 손끝으로 이야기하는 어느 소년의 이야기는 경이로웠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천명관 작가의 <고래>가 떠올랐다. 그 소설에서도 아마 박제된 코끼리 이야기가 나왔지. 현실 세계와 조금은 얼토당토않은 환상이 겹쳐지는 교차점이 조금 당황스러울 때도 있었다. 온통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체스 기보를 통해 실존을 확인하는 과정 속에서 나도 모르게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불완전한 존재는 그래서 기록을 좇게 되는 것일까. 비록 그것이 주관적이라고 해도 말이다.

삶의 고갱이가 농축된 체스 무대를 배경으로 종횡무진 활약하던 리틀 알레힌의 최후에는 유려한 비장미가 흐른다. 실존했던 체스 계의 그랜드마스터 알렉산드르 알레힌의 죽음처럼 소설의 주인공 역시 선구자의 길을 따른다. 그렇게 반하(반하의 시인, 리틀 알레힌의 짧았지만 치열한 삶의 궤적을 따르는 문학 여행은 조용하게 막을 내린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는 바로 리틀 알레힌과 그의 조수 미라의 ‘체스 기보 편지’였다. 인형 속에 들어가 수를 두던 소년을 위해, 대신 기보를 기록하고 말을 처리하던 미라와 헤어져 산 위의 요양원에 올라가 있던 소년은 미라에게 단 한 줄의 체스 기보로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곤 했다. 그리고 편지는 보내는 순간부터 기다리던 미라의 답장에 적힌 기보를 보고 기뻐하던 주인공의 그 순수한 감정에 대한 묘사는 정말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아직 오가와 요코의 대표작인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읽어 보진 못했지만 왠지 이 작품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시간 내서 영화로 먼저 이 작품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를 영화로 만들면 소년의 환상 부분이 어떻게 표현될지 못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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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문학 걸작선 1
스티븐 킹 외 지음, 존 조지프 애덤스 엮음, 조지훈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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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종말의 시대는 오래전부터 매혹적인 문학 소재였다. 그래서 많은 장르 소설 작가들이 앞 다투어, 지구 종말과 인류 멸망 이후의 어떤 세계가 펼쳐질 지에 대해 수많은 작품을 발표해 왔다. 이번에 황금가지를 통해 선보이는 <종말 문학 걸작선>에서는 거장 스티븐 킹의 단편을 비롯한 모두 22편의 지구 종말을 주제로 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지구 종말이 다가왔을 때,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에 이 소설 선집의 키포인트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건 바로 생존이다. 인류는 진화 단계에서, 어떤 식으로 생존에 집착해왔다. 후손에게 자신의 유전인자를 물려주고, 보존하는 것이야말로 인류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간단하게 말해서, 지구에 종말이 닥쳐와도 인류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남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류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마저 사라진 종말시대에 진짜 동물을 본 기계 인류의 이야기는 흥미롭다. 유기물이 아닌 무기물로 생존하고, 자유자재로 재생이 가능한 시기에 구시대의 유물로 등장하는 개의 존재는 그들에게 이질적으로 다가온다. <모래와 슬래그의 사람들>에서 파올로 바시갈루피는 신인류에게는 없는 다른 생명체와의 교감의 중요성을 슬쩍 내비친다. 거창하게 왜 우리에게 종의 다양성이 필요한가를 말하기보다 종말 이후의 삭막한 지구의 현실을 통한 우화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모티프를 얻었다는 <빵과 폭탄>에서는 나와 다른 이들과 함께 사는 법에 대한 M. 리케르트의 사고를 엿볼 수가 있다. 9-11 사건 이후, 전 미국을 휩쓸었던 반 이슬람 분위기에 대한 냉소적 시선을 아이들 사이의 갈등으로 풀어내가는 솜씨가 여간 아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웜바이러스 때문에 순식간에 지구의 시스템이 파괴되는 과정을 그린 <시스템 관리자들이 지구를 다스릴 때>에서는 저자 코리 독토로의 네트워크 환경에 대한 전문적 지식에 감탄했다. 사랑하는 아들과 아내를 잃은 주인공 펠릭스(역설적으로 주인공의 이름이 “행운아”라니!)는 인류 삶의 터전인 지구와 가족이 붕괴되는 과정을 목격하면서, 희망을 잃지 않고 문명의 보존과 재건을 위해 안간힘을 쓰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전통적인 오프라인 관계 상실의 시대에, 네트워크로 연결된 공동체의 생존 방식에 대한 작가의 문제제기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개인적으로 이 단편들이 어쩌면 작가들이 나중에 그 외연을 확대해서 장편으로 개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희미하나마 보이는 희망의 끈이 인상적이었다.

<종말 문학 걸작선> 첫 번째 권에 실린 소설 중에서 역시 가장 관심을 끄는 작품은 1번 타자이자 가장 널리 알려진 작가 스티븐 킹의 <폭력의 종말>이었다. 프리랜서 작가인 하워드 포노이의 마지막 원고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작가의 천재 동생 바비 포노이가 어떻게 인류를 종말로 이끌었는지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다. 어려서부터 천재성을 드러낸 바비는 인류의 폭력성과 비열함에 절망하고, ‘특수한 물’의 심판을 내린다. 문제는 그의 극단적 치료제가 가진 부작용이었다. 선의가 언제나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건 아니라는 방증이다.

스티븐 킹의 단편을 보고 나서 바로 미국 케이블 채널인 TNT에서 제작된 동명의 텔레비전 영화를 구해서 봤는데, 원작을 그대로 구현한 콘텐츠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큰 차이점은 원작에서는 주인공 하워드가 바비의 전동타자기로 기록을 남기는 것으로 나오는데, 텔레비전 영화에서는 비디오카메라로 좀 더 비주얼적인 측면을 다룬다는 점 정도. 나머지는 정말 환상적으로 원작을 재현해내는데 성공했다.

마지막으로 <종말 문학 걸작선>을 읽고서 두 가지 아쉬운 점을 말하고 싶다. 하나는 존 조지프 애덤스가 “들어가는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아포칼립스 문학에서 빠질 수 없는 좀비 창궐과 외계인의 지구 정복이라는 소재의 글이 빠진 것이다. 후자는 차치하고서라도,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지구 문명이 파괴되고 죽어도 죽지 않는 좀비와의 사투야말로 종말 문학 중에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는데 아쉽기 짝이 없다. 두 번째로는 책의 곳곳에서 보이는 오탈자와 아귀가 맞지 않는 전후관계 설명이다. 책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교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좀 엉뚱한 질문이지만, 포스트 아포칼립스 시대에도 문학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그러기 위해선 문학의 생산자와 소비자인 인류가 꼭 필요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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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데이
김병인 지음 / 열림원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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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작품들의 공통점을 찾아보자. <사람의 탈>, <아버지의 길> 그리고 <디데이>. “노르망디의 코리안,” 딩동댕이다. 오래전 어느 방송사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식민지 조선 출신 일본군에서, 소련군으로 그리고 다시 독일 동방대대 소속으로 최전방 서부전선에서 미영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투입된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과 만났다. 그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이것 참 이야깃거리가 되겠다고 생각한 이가 나만은 아니었나 보다. <디데이>의 저자 김병인 씨의 시놉시스를 바탕으로 강제규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마이 웨이>가 개봉 대기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위에서 언급한 세 개의 소설에서 조금씩 디테일은 다르지만, 일본군-소련군-독일군으로 죽음의 전장을 전전한 주인공이라는 큰 줄기를 공유한다. <사람의 탈>과 <아버지의 길>이 그런 주인공에 초점을 맞췄다면, <디데이>는 그 위에 하나의 토핑을 더 추가한다. 주인공 한 대식의 라이벌로 일본 제국주의의 화신 후지와라 요이치가 등장한다. 소설은 그래서 대식과 요이치의 시선에서 동일한 사건을 다루는 구성으로 진행된다. 그래서인지 책의 가독성은 그야말로 몰입되는 순간, 폭발해 버린다.

일본의 조선 지배에 항거하다가 불령선인으로 몰려 일본 헌병의 손에 죽은 대식의 아버지의 비극은 그대로 묻혀 버린다. 아들 대식은 후지와라 가의 호의로 남작당에 둥지를 튼, 대식네 일가가 보기 싫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안쓰러운 마음을 품는 요이치. 육상 트랙 경주를 시작으로 대식과 요이치 간의 보이지 않는 경쟁은 막을 올린다. 때마침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 선수의 쾌거로 대식은 자신이 최고로 잘하는 달리기를 통해 집안의 간난을 일소에 해결하려는 꿈을 꾼다.

하지만, 일본 지배하의 피지배민족인 조선인이 일본 제국의 신민을 이기는 용서할 수가 없었던 이들은 대식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고 간다. 결국 아버지의 원수인 일본군이 되어 대식은 전장으로 끌려간다. 다른 작품에서 주인공들이 강제로 징병되었다면, <디데이>에서 주인공은 현재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방법으로 일본군에 지원한다. 피 끓는 제국의 청년이었던 요이치 역시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군에 입대한다. 그 둘이 투입된 노몬한 전투로부터 그들의 파란만장한 삶의 드라마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뭐 좋다. 이런 기가 막힌 이야기를 그대로 방치한다는 건 아마 문학인으로서 결계일 테니까. 그런데 문제는 식민지 조국의 민족해방이라는 현실적 문제의식보다, 올림픽 대회에 나가 개인의 영달을 이루겠다는 대식의 욕망이다. 대식이 피와 살이 튀던 노몬한의 전장에서, 비참한 소련 굴라크에서 그리고 스탈린그라드에서 살고자 했던 이유는 오로지 올림픽 제패라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그 꿈을 가슴팍에 일장기를 달고 이루고 싶었던 걸까? 그건 아니었을 것이다. 바로 그 점에서 소설 <디데이>는 암울한 식민지 현실과 개인의 꿈이라는 가치를 교환해 버린다.

“인공적인 느낌이 완전히 배제된 원초적인 질주. 비본질적인 것들을 모두 제거한 순전한 본질로의 회귀, 바로 그것이었다 (179쪽).”

작가는 대신 “명백하고 즉각적인 인과관계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골수 제국주의자이긴 하지만, 전장과 기나긴 포로생활을 통해 갱생의 길을 걷게 되는 또 다른 주인공 요이치를 취사선택한다. 대식과 요이치가 펼치는 애증의 관계는 좀 진부하긴 하지만 소설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극적 요소로 멋지게 작용한다. 할리우드 영화사의 투자가 결렬되면서, 어쩔 수 없이 적과의 공존이라는 주제를 택한 탓일까. 어떤 면에서 본다면 <디데이>는 한국의 관객들에게도, 그리고 일본의 관객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하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 둘 사이의 어중간한 설정이 위태로워 보인다.

다음으로 “노르망디의 코리안”은 모두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고 하는데, 제발 좀 적극적으로 그 ‘실화’의 비밀을 시원하게 벗겨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외국의 경우에는 아무리 소설이라도 하더라도, 그 소설을 쓰게 된 원전을 밝히기 마련이다. 달랑 미군이 노르망디 해변에서 찍은 사진 한 장으로 일본군-소련군-독일군 출신 조선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아무래도 신빙성과 설득력이 떨어진다. 사실에 풍설이 너무 많이 들어가면 원래 있던 사실마저도 그 빛을 바래기 마련이 아니던가.

대식과 요이치의 마지막 관문이었던 스탈린그라드 탈출기를 위해, 요이치의 독일 유학 설정이 매우 유효했다고 본다. 요이치가 독일어로 대식과 자신이 동맹국 일본 출신이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면, 소련군 까레이스키로 몰려 죽었을 테니까 말이다. 엽기적인 굴라크 수용소장 페트로프의 심리전도 인상적이었다.

자,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노르망디의 코리안”의 문학 3부작과 다큐멘터리를 모두 섭렵했으니 다음 달 크리스마스 무렵에 개봉예정이라는 <마이 웨이>만 보면 된다. 어디까지가 실화이고, 어디까지가 영화적 상상력의 소산인지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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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너무 사랑한 남자 - 책 도둑과 탐정과 광적인 책 수집가들에 대한 실제 이야기
앨리슨 후버 바틀릿 지음, 남다윤 옮김 / 솔출판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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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책을 사랑한다. 책이 좋아서, 책을 사는 데 쓰는 돈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인터넷, 홈쇼핑을 통해 다양한 물건을 구입하듯이 나도 그렇게 다양한 루트를 통해 책을 구입한다. 인터넷은 물론이고, 오프라인 서점, 헌책방, 북페스티벌 등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다양한 방법으로 책을 수중에 넣는다. 나의 책 구입 행동에 하자가 있을까? 그건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름대로 애서가를 자처하는 독서가로서 <책을 너무 사랑한 남자>에 나오는 반쪽 주인공 존 길키의 절도/사기가 이해할 수가 없다.

이 책의 저자 앨리슨 후버 바틀릿은 존 길키를 ‘책 도둑’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를 책 도둑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사기꾼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의 절도/사기 행각은 인터넷 시대에 아주 고전에 속한다. 미국 유명 백화점에서 임시고용인으로 일한 바 있는 길키는 신용 사회 쇼핑에 있어서 꼭 필요한 신용 카드 정보를 직장을 통해 얻는다. 그리고 자신이 사고 싶은 고서, 희귀 서적에 자신이 불법적으로 탈취한 정보로 책을 주문한다. 타인을 가장한 픽업이나 혹은 호텔로 책 배달을 시켜서 마침내 자신의 컬렉션에 넣는다. 문제는 길키가 이런 방식을 통해 훔친/사기 친 책의 가격이 10만 달러를 훌쩍 뛰어넘는다는 사실이다. 놀랍군!

사회에서는 언제나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51개 주의 연합체인 미국 주(州)간의 허술한 사법 공조 체계의 빈틈을 노린 길키를 잡으려는 정의의 사나이가 빠질 수 없다. 자신이 직접 희귀서적상을 운영하는 켄 샌더스가 바로 주인공이다. 서적상 협회의 보안담당을 맡게 된 샌더스는 북부 캘리포니아 일대에서 벌어진 길키의 유사한 범죄에 주목하고, 범인을 쫓는다. 이렇게 책을 너무 사랑한 ‘두 남자’의 맞대결을 저널리스트 출신으로 이제 막 서적광(bibliomania)의 세계에 발을 디딘 저자 바틀릿이 이 책의 삼각 축을 형성한다.

저자는 길키가 계속해서 범행을 저지르면서도, 자신의 행위가 타인에게 심각한 경제적 손해를 끼치는 범죄행위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길키는 인류에게 다양한 정보를 전달해 주는 도구로서의 책이 아니라, 오로지 수집을 통한 개인적 만족 때문에 불법 행위도 마다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훔친 책을 읽지도 않는다! 절도와 사기의 연이은 성공으로 인한 쾌감이 길키를 희대의 책 도둑으로 만든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책을 너무 사랑한 남자>는 우리에게 생소하지만, 무척이나 흥미로운 미국의 희귀 고서적 수집의 세계로 독자를 인도한다. 왜 그렇게 서적 수집가들이 저자의 서명이 들어가 초판본에 열광하는지, 그리고 그런 희귀한 책을 사는데 가히 천문학적인 돈을 쓰는 이유를 저자는 멋지게 추적해냈다. 개인적으로 책의 존재 이유는 바로 ‘독서’라고 생각하는데, 책에 소개된 등장인물의 생각은 나와 다른 것 같다. 그들은 책을 자본 증식을 위한 투자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보통 책을 살 때도 오프라인 매장에서 살펴보고 사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하는데, 온라인 판매로 해당 책의 상태나 판본 같은 걸 어떻게 믿을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물론 요즘에는 디지털 사진 기술의 발달로 그런 비주얼적인 측면에 많이 해소되긴 했지만 길키와 샌더스가 쥐와 고양이 싸움을 벌이던 시절은 벌써 십년 전이 아니던가. 저자가 세계 최고의 장물 사이트라고 표현한 이베이 상의 거래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나도 오래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 하드커버를 이베이 경매를 통해 구매한 적이 있는데 책을 받고 보니, 어느 도서관의 관인이 떡 하니 찍혀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사실을 확인했을 때의 낭패감이란 정말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아주 평범한 질문으로 이 책의 리뷰를 끝내야할 것 같다. 도대체 책을 수집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책 도둑 길키에게 책 수집은 평생의 임무이자 강박이었다. ‘제리’ 길키를 잡으려는 “톰” 샌더스에게 책 수집은 밥줄이었다. 나같이 무심한 독자는 초판본이나 저자 사인본에 집착하지 않지만, 그래도 ‘그런 책이 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은 한다. 그전에 기껏 수집했지만 읽지 못하고 있는 책부터 읽어야겠다. 그런 책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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