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아이덴티티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9
로버트 러들럼 지음, 최필원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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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본 아이덴티티>의 원작 소설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 나온 책의 소개로 처음 알게 되었다. 더그 라이만 감독의 영화에 나온 맷 데이먼의 연기를 보고 단박에 제이슨 본이라는 캐릭터에 빠져 버렸다. 본이 잃어버린 자신을 찾는 과정은 수도자의 고행이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이 멋진 시리즈의 원작이 따로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2011년 초여름, 로버트 러들럼 원작 소설과의 만남은 가히 충격이었다. 영화에서 접한 제이슨 본의 이야기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소설의 디테일은 섬세하면서도 화려하다. 자, 이제 본격적인 썰을 풀어 보도록 하자.

영화를 먼저 봤기에 어쩔 수 없이 원작소설과의 비교는 불가피했다. 트레드스톤이라는 비밀 첩보작전의 정예요원으로 양성된 제이슨 본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이 영화의 주요한 줄거리라면, 소설에서는 이 맛깔스러운 줄기에 고명을 한 가지 더 얹는다. 전설적 테러리스트이자 인간병기로 실존인물인 카를로스 재칼과의 목숨을 건 대결이 소설의 다른 한 축을 차지한다. 영화에서는 소설이 쓰인 1980년대 초반보다 훨씬 발전한 최첨단 기술을 도입해서, 올드 스쿨 스타일의 원작과 차별을 시도한다. 휴대전화 감청이나 인공위성을 이용한 위치 파악 같은 소재는 정말 <본 아이덴티티> 같은 스파이물에 더할 나위 없이 들어맞지 않은가 말이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 원작소설 <본 아이덴티티>에서는 팔색조 같이 멋지게 변신하고 자신도 모르는 기술과 훈련받은 동물적 감각을 이용해서 위기에서 벗어나는 제이슨 본 캐릭터를 훨씬 더 충실하게 그려냈다. 영화에서 제이슨 본이 자신의 정체성으로 고민하는 부분을 편집했다면, 소설에서는 상대적으로 제이슨 본이 도대체 누구이며 어떻게 해서 전설적 암살자 카를로스 재칼에 버금가는 킬러로 악명을 떨치게 되었는지 스스로 밝히는 과정이 긴장감 넘치게 묘사된다.

영화에서 사이드킥이자 연인으로 등장한 마리 생자크가 조금은 수동적으로 그려졌다면, 소설에서는 본에게 극적 상황을 연출하기 위한 기폭제인 동시에 적극적으로 자신의 과거를 추적하는 동지라는 차원에서 적극적 활약을 연출한다. 자신을 쫓는 킬러들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불가피하게 잡은 인질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스톡홀름 신드롬의 전형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된 카를로스 재칼과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트레드스톤 작전 입안자들에게 쫓기는 제이슨 본은 과연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이 소설이 발표된 1980년은 동서냉전과 미국과 소련의 군비경쟁이 절정으로 치닫던 시기였다. ‘스파이 픽션 스릴러’라는 레테르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본(Bourne) 시리즈의 창조자 로버트 러들럼은 이미 그 시절에 소련을 필두로 한 공산진영의 몰락을 예언이라고 한 듯, 스파이 소설하면 빼놓고 등장하는 사악한 공산주의 스파이 대신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헤게모니를 잃기 시작한 패권국가 미국으로부터 존재를 부정당한 제이슨 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이제는 새로울 것도 없지만, 공공의 적이었던 소련 출신 스파이 대신 내부의 변절자가 국가와 조직에 얼마나 위험한 존재로 돌변할 수 있다는 작가의 설정은 획기적이다.

소설 <본 아이덴티티>는 공교롭게도 지난 5월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우리에게 처음으로 소개된 영화 <카를로스>와도 묘한 접점을 이룬다. 영화판 <본 아이덴티티>에서는 쏙 빠진 캐릭터인 카를로스 재칼을 전면에 세운 영화로 프랑스 출신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5시간 30분이라는 엄청난 러닝타임을 자랑하는 영화 <카를로스>는 지난해 세계 유수의 영화잡지에서 호평을 받은 작품이라고 한다. 일리치 라미레즈 산체스라는 본명의 카를로스 재칼은 베네수엘라 출신으로 수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제이슨 본 못지않은 변신의 귀재로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세기의 대결을 벌이는 캐릭터로 소설을 장식한다.

영화가 제이슨 본을 ‘클린’하려는 세력에 맞서 생존을 위해 싸우는 주인공의 활약에 초점을 맞췄다면, 원작소설은 좀 더 긴 호흡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고 한 꺼풀씩 벗겨지는 자신의 정체에 괴로워하는 자연인 제이슨 본의 내적 고뇌와 갈등에 방점에 찍는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피도 눈물도 없이 목표물이나 장애물을 죽여야 하지만, 자위적 방어를 위한 ‘킬링’ 외에는 의미 없는 살인을 피하려는 착한 킬러의 모습은 역설 그 자체다. 마치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살인병기”로 훈련된 손과 발이 알아서 척척 움직이는 모양새라고나 할까?

개인적으로 사방에서 날아오는 총탄도 척척 피해내는 그런 슈퍼맨 같은 스타일의 첩보원보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인질과 사랑에 빠지고, 압도적인 적에 둘러싸여 총알도 두어방 맞고 그런 올드 스타일이 마음에 든다. 어떻게 보면 진부할지도 모르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그녀를 떠나야 한다는 마음과 함께 위기를 극복해 나가자고 갈등하는 장면 역시 인간적이다. 사람이 구닥다리여서 그런지 제임스 본드 같이 세련된 여유보다, 투박하면서도 어느 정도 운빨도 서는 그런 제이슨 본 스타일이 더 좋다.

책 선전에서 내일 출근하려면 이 책을 펴지 말라고 경고했던가. 솔직히 말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가 제대로 낭패를 봤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2편을 미리 장만해 두지 않은 점이다. 하마터면 날밤을 꼬박 세울 뻔 했다. 이제 곧 새로운 시리즈인 <본 레거시>가 촬영에 들어간다고 하는데, 이번에는 또 어떤 이야기를 보여줄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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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들의 중국사
사식 지음, 김영수 옮김 / 돌베개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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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출신의 역사학자로 태평천국 전문가인 사식(史式) 선생의 <황제들의 중국사>는 기존의 역사 서적과 그 결을 달리한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역사란 자고로 승자의 역사가 아니었던가. 특히 왕조가 오래될수록 그 왕조의 녹을 먹은 사관들이 적은 역사의 기록은 아무래도 해당 왕조의 군주에 대해 관대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반대로 단명한 왕조의 역사에 대해 아무런 도의적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후대가 사가들은 냉혹한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황제들의 중국사>에는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중국의 제왕들에 대한 비평이 들어 있다.

책을 접하고 가장 먼저 읽은 인물은 바로 명나라 태조 주원장 편이었다. 중국에 수많은 왕조의 개국 군주 중에서 그 바탕이 가장 비천한 사람이 바로 주원장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주원장은 거지이자 승려 그리고 건달을 두루 섭렵한 인물로 근거지를 바탕으로 칭왕을 뒤로 미루고, 자신에 앞서 원나라의 폭정에 맞서 기의한 민족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다. 그런데 그게 과연 사실일까? 주원장은 교활하게도 각지에서 일어난 군웅들이 몽골족과의 격전으로 모두 지쳐 쓰러질 때까지 마냥 기다리다가 마지막 순간에 결실을 거뒀다. 만약 그가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대몽항쟁에 나섰더라면, 다른 군웅처럼 역사 속에서 스러졌을 거라는 것이 사식 선생의 냉철한 분석이다. 선생은 제국 수립 후에, 수많은 개국 공신을 숙청하고 독재권 강화를 위해 공포정치를 실시한 주원장을 혹독하게 비판한다.

명나라의 개국 군주 주원장을 차가운 시선으로 보고 있다면, 반면에 명나라의 망국 군주인 숭정제에게는 반대로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조선출병과 수년간의 실정, 환관의 발호 그리고 여진족 후금의 침략으로 만신창이가 된 명나라의 멸망을 청년 황제가 홀로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오히려 제국의 무너지는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선언했던 숭정제의 용기를 사식 선생은 극찬한다. 어느 제국의 일인자가 그렇게 정치적 책임을 지려고 했던 적이 있었던가. 숭정제는 모든 것은 황제가 결정하지만, 책임은 지지 않았던 황제 제도의 모순에 역행하는 드문 황제였다. 북경이 이자성의 반란군에 함락당하는 순간 자진하면서도 백성의 안위를 걱정했던 이 청년 황제에게 사식 선생은 다른 황제와는 다른 평가를 매긴다.

우리가 <삼국연의>로 익히 알고 있는 유비와 제갈량의 <삼고초려> 고사를 사식 선생은 정면으로 부인한다. 정사로 인정받고 있는 진수의 <삼국지>외에도 다양한 사료를 교차분석하면서, 유비가 제갈량을 초빙하기 위해 공명을 찾아갔다는 고사는 허구였다는 사실을 밝힌다. 제갈량이 아무런 밑천도 없는 유비의 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관우가 죽고 형주를 잃으면서 비이성적인 동오 침공으로 결국 제갈량의 원대한 국가대계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국제 정세를 냉철하게 들려준다. 경쟁국이었던 조조의 위나라나 손권의 동오에 비해 절대적으로 불리했던 촉나라가 앉아도 죽고 일어서도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일견 무모해 보이는 북벌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사식 선생은 증언한다.

아울러 촉한의 망국 군주였던 아두 유선에 대해서도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자신보다 뛰어난 신하들에게 국정을 맡겨 백성의 피해를 최소로 했다는 사실을 피력한다. 능력이 부족한 군주가 전면에 나서서 국정을 수행하려고 하다가 더 큰 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물론 절대 군주가 스스로의 부족함을 깨닫고, 타인에게 위임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촉한의 후주 유선에 대해 나름대로 후한 평가를 내린다. 사식 선생은 촉한의 후주 유선, 남당의 후주 이욱, 북송의 휘종 그리고 초나라의 항우 같이 역사의 패자에게도 정사(正史)라는 이름으로 승리자에 편중한 역사의 기록에 치우치지 말 것을 주문한다. 특히 사성(詞聖)으로까지 추앙받는 남당의 이후주에 대해서도 패배자가 아니라 문인으로 성공한 인물이었다는 평가가 참신하다.

요순시대의 선양제도를 흉내낸 동한과 위, 위와 진의 그것을 저자는 정치적 쇼라고 폄하한다. 이미 정치적 실권을 모두 장악하고 호가호위하는 조씨 집단과 사마씨 집단의 찬탈을 아무리 좋은 모양새로 꾸며도 후대의 평가는 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시대를 풍미한 간웅으로 현대에 새로이 조명받고 있는 맹덕 조조에 대해서도 그의 평가는 냉혹하다. 유가에서 중요시하는 도의나 도덕 대신 오로지 실력과 능력만으로 인재를 채용한 위나라 정권의 말로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천하를 얻기 위해 내달린 조씨 집단은 역시 비슷한 루트로 성장한 사마씨 집단에게 왕조를 뺏기고, 사마씨 집단의 진나라 역시 일족간의 혈투로 엉망이 되고 흉노를 필두로 한 북방 외래민족에게 중원이 유린당하는 참담한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 저자의 날카로운 지적이다. 그래서 조조의 등장이 민중에게는 재앙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사회주의 국가 출신의 역사학자라 그런 진 몰라도 사식 선생의 중국 황제 제도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다. 중국사가 지속적으로 정체된 이유가 성군과 암군이 교대로 등장하면서 선대에 축적된 유무형의 자산들을 후대의 암군들이 한 방에 날려 버리면서 연속성이 떨어졌다는 저자의 주장이 꽤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현대 같은 민주 사회라면 가능하지 않았을 일이지만, 황제 일인독재가 횡행하던 전제 군주시대에는 다반사였다.

<황제들의 중국사>처럼 역사에 대한 다양성과 새로운 시선이 담긴 책을 환영한다. 기존의 천편일률적인 역사 해석보다 아날학파의 미시사 연구나 조너선 스펜스 교수의 중국 역사 탐구 같은 신선한 결과물이 더 끌린다. 기회가 되면, 사식 선생의 또다른 저서 <청렴과 탐욕의 중국사>도 도전해 보고 싶다. 비오는 주말의 유익한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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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쾌한 논어, 21세기에 답하다 - 알기 쉽게 풀어쓴 알기 쉽게 풀어쓴 동양철학 시리즈 2
푸지에 해설, 이성희 옮김 / 베이직북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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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일이지만, 지금까지 동양 고전 중의 고전으로 불리는 사서삼경을 읽어 보지 못했다. 책 좀 읽는다고 하지만, 어떻게 지금까지 성현의 말씀이라는 사서삼경을 읽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사서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책이자,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논한 내용을 공자 사후에 기록했다는 <논어>의 현대판 주석에 해당하는 <명쾌한 논어, 21세기에 답하다>를 읽으면서 그런 마음의 짐을 좀 덜 수가 있었다.

중국 항저우 출신의 푸지에 교수는 마냥 고리타분할 것으로 생각되는 고전을 현대 감각에 맞춰 주해한다. 원래 상론 10편, 하론 10편 모두 20편으로 구성된 <논어>를 강의 형식으로 7부 67강으로 재구성했다. 비슷한 내용으로 묶다 보니, <논어>의 원래 순서를 고집하는 것으로 보인다. <논어>의 전문이 아니라 핵심만 뽑은 엑기스 형식으로 보면 무난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 오래전에 홍신문화사에서 나온 <사서오경> 시리즈를 참고하면서 읽으니 더 도움이 된 것 같다.

어려서부터 항상 해온 질문에 대한 답으로 푸지에 선생의 <논어>는 시작된다. 배움이 주는 즐거움은 본질은 무엇일까? 공자의 말씀대로 책을 외우고, 복습의 심화로 깨닫는 즐거움의 도에는 여전히 미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반성하게 됐다. 그 옛날의 성현도 항상 배움에 힘썼거늘, ‘이제 공부는 됐어’라는 생각은 자만이 아닌지 스스로 돌아보게 된다. “내외적 성장, 경험의 확대, 자기반성의 심화” 중에 한 마리의 토끼만 배움을 통해 얻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은 각별한 인연으로 잊을 수 없는 문장인데 <논어>에 나오는 구절이란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어려서 서예를 배울 적에, 수도 없이 썼던 문장이다. 자기 수양을 위해 배운 붓글씨던만, 지금은 거실 벽에 얌전하게 걸린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옛 것에 되새기는 과정에서 새로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공자의 말씀이 과거와 현재의 연결고리로 다가온다.

유가에서 최고의 도덕준칙으로 꼽히는 <中庸>의 미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 같다. 혼탁하기 그지없는 세상에서 모자라지도, 지나치지도 않은 그야말로 중용의 실천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덕목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지근거리에 있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쉽게 얻을 수 삶의 경지라는 것이 푸지에 선생의 설명이다.

고등학교 시절 고문 시간에 무슨 공식처럼 죽어라고 외웠던 윤선도 선생의 어부사시사에도 드러나는 ‘안빈낙도’ 역시 <논어>에 나오는 말이었다. 작금의 가난함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배움에 있어서 상하를 가리지 않는 자세야말로 군자의 정신이라고 했던가. 모든 근심걱정의 원인이 바로 스스로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이 참으로 와 닿는다. 나의 사람 됨됨이는 어떤지 자문하게 된다. 나의 즐거움의 여부를 물질적 환경에서 찾지 말라는 말은 모든 것이 물질로 환산되는 현 세태에 대한 선인의 가르침이리라.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깊이 없는 SNS 소셜네트워크가 만연하는 시대에 ‘친구를 사귀는 즐거움’에 대한 공자의 말씀은 독자의 폐부를 찌른다. 이익을 매개로 한 친구가 아닌, 군자끼리의 도리에 의한 사귐이야말로 우정의 정수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친구를 사귀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지만,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항상 그렇게 시간이 부족하다는 말인가.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부리지 못하는 현대인이 깊이 반성해야 할 점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관계의 황금률은 다음의 문장에서 다시 한 번 우리의 이목을 집중하게 만든다. “내가 원치 않는 일은 남에게도 강요하지 말라.” 개인적으로 <논어>에서 최고로 꼽는 명문장이다. 이 역시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보편 준칙이면서 실천은 또 다른 문제다. 특히 직장생활을 하면서,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다.

푸지에 선생의 <명쾌한 논어>를 읽으면서 기회가 된다면, 원전 <논어>에 도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경전이나 그렇듯, 미시적인 접근과 더불어 거시적인 방법론도 동시에 수용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많은 책을 읽고 있지만 여전히 배움이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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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 피시 - 네 종류 물고기를 통해 파헤친 인간의 이기적 욕망과 환경의 미래
폴 그린버그 지음, 박산호 옮김 / 시공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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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어부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낚시를 좋아했다. 보트를 타고 하는 낚시는 낚시라고 생각해본 적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다. 난 주로 갯바위 낚시를 즐겼다. 물고기를 잡으면 좋았고, 단 한 마리도 못 잡아도 좋았다. 그러다가 낚시를 안 가게 된 지 수년이 넘었다. 이제 예전처럼 낚시를 즐기진 못하게 되었지만, 물고기 사랑은 여전하다. 책으로 만나게 된 나의 옛 동료 바다농어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흥미진진했다.

<포 피시>의 저자 폴 그린버그 역시 못지않은 낚시 애호가로, ‘바다는 물고기를 주고 나는 잡는다’라는 문장으로 낚시꾼과 낚시의 유대 관계를 설명한다. 심지어 잡은 물고기를 팔아, 모터보트 기름값을 마련했다는 그의 증언에 얼마나 공감이 가던지. 저자는 코네티컷 연어의 전멸을 보면서 예전에 그 많던 물고기들이 어디로 갔느냐는 아주 단순한 질문으로 산업과 경제, 환경보호, 해양생물과의 공존 그리고 식량자원 확보라는 다양한 주제에 도전한다. 그가 목표로 삼은 네 가지 물고기는 다음과 같다. 연어, 농어, 대구 그리고 참치 이렇게 네 종류의 생선이다.

개인적으로 연어는 장어 다음으로 내가 즐기는 생선이다. 연한 오렌지 빛깔의 통통한 육질을 생각하면 어느새 입안에 군침이 돈다. 강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살다가 산란을 위해 다시 자기가 태어난 강으로 돌아온다는 회귀성 어류의 대표적인 연어는 <포 피시>의 일번타자를 맡을 정도로 연어는 우리 식생활에서 빠뜨릴 수 없는 어종이다. 인류 생존을 위해 선택된 특정 어종 중에 연어는 당당하게 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것이 연어의 비극이었을까?

현대의 모든 것이 그렇듯, 연어 양식 역시 경제적 측면이 고려되었다. 0.5 킬로그램의 양식 연어를 얻기 위해 1.5 킬로그램의 물고기 사료를 투자하는 게 과연 사료 방정식에 부합하는 걸까? 다른 물고기에 비해 비교적 알 채취가 쉬운 연어(육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알이 크다고 한다)가 양식 어종으로 선택된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인류는 연어 양식을 통해 최고의 효율을 얻기 위해 내성이 강하고, 번식과 성장이 빠른 신종 연어의 개발을 위해 유전자 조작도 마다치 않았다. 일찍이 노르웨이는 연어 양식의 선두 주자로 대량 생산에 적합한 “살모 도메스티커스”라는 신품종 연어를 생산하기에 이른다. 동시에 인류의 연어 소비 역시 비약적으로 증대하지만, 과연 환경오염과 자연 연어의 공존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시간이 필요하다는 느낌이다.

후속 타자로 등장하는 바다농어는 나에게 낚시의 진수를 알려준 녀석이다. 탐욕스러운 바다의 포식자인 바다농어는 한 때 잔칫상에나 오르는 그런 귀한 생선이었다. 하지만 상시적인 공급을 원하는 인간은 양식에 적합하지 않은 바다농어 양식을 위해 엄청난 노력과 시간 그리고 금전적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식량자원 확보라는 국가적 과제 수행을 위해 이스라엘에서 시작된 바다농어 양식은 타나시스 프렌초스라는 그리스 해양생물학자에 의해 태고이래 비밀이 풀리고 마침내 양식에 성공하게 된다.

식탁에서 손쉽게 만나게 된 바다농어를 위해 그렇게 많은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됐다. 태생적으로 인간의 손길을 거부하는 바다농어 서식과 성장을 위한 완벽한 조건의 조성을 위해 노력한 수많은 이들의 노고가 폴 그린버그의 저술을 통해 재연되는 과정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우리나라에는 <세계를 바꾼 어느 물고기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어부 출신 저널리스트 마크 쿨란스키의 <대구>로 세 번째 물고기 대구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가장 대표적인 “산업용 생선”이자 흰 살 생선의 대명사 대구는 서민을 위한 물고기였다. 하지만 영원히 고갈되지 않을 것 같이 풍족했던 대구는 탐욕이라는 인류의 욕심으로 전멸의 위기에 몰리고 미국과 캐나다 정부는 전면적인 대구 포획 금지라는 극약 처방을 내리게 된다. 20~30% 정도의 개체 수만 존재해도 다시 왕년의 물고기 챔피언 자리를 찾을 수 있다지만, 10% 미만의 수로는 개체 회복이 역부족이었단다. 더 큰 문제는 대구 집단이 유전자 보존 경쟁에서 밀리면서 엄청나게 컸던 녀석들이 이제는 손바닥만 한 크기로 줄었다고 했던가.

이 시점에서 폴 그린버그는 각각의 물고기 집단의 유전적 형질과 다양성을 유지하면서, 전 세계적인 물고기 자원의 보존과 유지를 위한 공동의 해법이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도 빠뜨리지 않는다. 그에 대한 한 가지 해법으로 어부이자 관리인으로 전문가의 존재를 그는 상정한다. 대대로 해당 물고기에 대해 잘 아는 어부야말로, 해당 어종 관리를 잘할 수 있는 전문가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폴 그린버그는 맺음말에서 물고기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동안 물고기 집단은 순전히 식품으로만 인식됐고, 포획이나 양식의 대상이었다. 무분별한 남획으로 앞으로 우리 식탁에 오를 생선의 종류가 대폭 줄 거라는 뉴스는 이제 더 새롭지 않은 경고다. 인류의 귀중한 보고인 물고기 자원의 보호를 위해 다양한 법령의 제정과 함께 어업 규제와 종 보호를 위한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식탁에서 연어, 바다농어, 대구 그리고 참치 같은 자연 식품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우리 시대의 특권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할 것이다. 그들이 우리의 동반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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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청춘의 감옥 - 시대와 사람, 삶에 대한 우리의 기록
이건범 지음 / 상상너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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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통 속에서도 꽃은 피어난다고 했던가? 굳이 러시아의 국민시인 푸시킨의 시나 원효대사의 유심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고난과 역경 속에서 삶의 즐거움과 의미를 찾은 경우는 많다. 그렇다면 시간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공간적 구속이 따르는 징역살이에 대입해 보면 어떨까? <내 청춘의 감옥>의 저자인 이건범 씨는 바로 그 징역살이를 버텨낸 힘의 원천을 자신이 발굴한 생명의 힘, 웃음에서 찾는다.

민주화 열기가 뜨겁던 80년대, 대학생이었던 글쓴이 역시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가 없었나 보다. 행동하는 양심은 개헌 요구를 하다가 구속수감이 되었고, 그 후 노동운동을 하다가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본격적인 징역을 살게 된다. 이 책은 이건범 씨의 육필 징역 체험수기다. 인간의 기본권인 신체의 자유에 대한 제한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건범 씨가 책에서는 위트와 유머를 섞어 부드럽게 표현한 신체적 구속의 괴로움을 알지 못하리라. 사회와 단절되어 자유로운 소통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가 징역살이의 대표적 고통일 것이다.

신체적으로 구속된 상황에서 가장 먼저 찾게 되는 것이 아마도 먹는 즐거움이리라. 궁하면 통한다는 말처럼, 교도소에서 배급되고 영치금으로 구입이 가능한 음식재료로 사제 같은 맛을 추구하는 요리 배틀이 정겹다. 명절은 특히나 갇혀 사는 사람들에게 특히 괴로운 시간이다. 보통 사람에게는 꿀맛 같은 휴식의 시간이지만, 늘 시간이 넘쳐 나는 이들에게는 쉬는 것이 더 어려울 일일 게다. 긴 명절을 보내기 위해 직접 그린 화투로 고스톱을 치는 장면도 생생하게 그려진다. 그렇다고 마냥 그렇게 놀고먹는 것만 추구하지는 않는다. 이건범 씨만 하더라도, 연단의 시간에 스스로 갈고 닦아 출소한 뒤에 징역살이에서 배운 영어가 사업에 도움이 되었다고 하지 않는가.

수갑 차고 이십 대를 보낸 작가는 ‘운동권 전과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다. 그리고 멀티미디어 콘텐츠 기획자로 화려하게 비상했다. 호사다마라고 잘 나가던 회사는 12년 만에 파산하고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시각장애 1급 장애 판정을 받았지만, 징역살이 때와 마찬가지로 조금도 굴하지 않고 성한 사람도 버겁다는 출판 기획자로 거듭났다.

술과 나이(세월)가 사람을 너그럽게 만든다는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은 것 같다. 24년의 세월은 보수와 진보 진영을 오가며 팔색조와 같이 화려한 변신을 하는 이들에게도 작가로 하여금 관대한 시선을 갖게 하여 주었나 보다. 청년 시절 품었던 사회개조의 꿈은 민주적 방식과 절차대로 행하는 것이 옳다는 돈오의 순간으로 이끈다. 청년 때는 스스로 노력해서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는 희망만 앞세웠던 게 아닐까. 인생의 어느 한 부분을 공유할 수 있었다는 짧은 행복의 기억이야말로 고통을 이겨낸 원동력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울러 치열한 현실과 오랜 시간 속에서 녹아든 깨달음이 참 마음에 와 닿았다.

감옥에 갇힌 정치범은 이래야 한다는 전형적 사고의 틀에 이건범 씨는 ‘가벼움’으로 맞선다. 주간지와 여성지를 감방 동료끼리 돌려 보고, 기약 없는 무기형을 사는 동료를 위해 과자 꾸러미를 아낌없이 푸는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가을께에 출간될 또 다른 작품의 주제는 “파산”이란다. 어느 작가는 자신이 체험하지 않는 것은 글로 쓰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건범 씨도 그와 비슷한 길을 가는 걸까. 끊임없는 그의 도전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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