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이야기 2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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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아민 말루프라는 레바논 출신의 작가가 쓴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이라는 책을 읽었다. 기존 서양 역사가들의 시점에서 저술된 책과 확실히 다른 관점을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책이었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발간 중인 시오노 나나미 여사의 십자군 전쟁 이야기는 어떨까. 아예 삶의 터전을 일본에서 이탈리아로 옮겨 집필에 전념하고 있는 시오노 여사의 <십자군 이야기>는 정통 역사가들이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던 십자군 전쟁의 경제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중에서도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키워드는 바로 “이코노믹 애니멀”이었다.

1차 십자군 원정의 결과 중근동에 착근한 예루살렘 왕국을 비롯한 네 개의 십자군 국가는 11세기 후반부터 대략 1세기 동안 존속하기에 이른다. 수니파와 시아파 이슬람 세계의 고질적인 분쟁은 프랑크 침략자에 대한 통일전선을 통한 대항을 이루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예루살렘 회복 이후, 보에몽과 탕크레드 같이 걸출한 영웅과 리더십의 부재에 시달리던 십자군 국가의 행운이었다. 곧이어 알레포를 중심으로 한 장기, 누레딘 그리고 이슬람 세계에서 아직도 불세출의 영웅으로 칭송되는 살라딘의 등장에 이은 이슬람 세계의 통일은 가까스로 유지되고 있던 십자군 국가의 종언을 의미했다.

치열한 역사 전개의 무대에서 어느 한 쪽으로 대세가 기울게 되는 요인 중의 하나는 이런 뛰어난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가 계속해서 배출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그런 점에서 아버지 장기 이래 숙원이던 다마스쿠스를 정복하고 나서, 지진 복구와 병원과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 기관을 설립해서 내정에 힘쓴 누레딘의 노력 덕분에 지하드[聖戰]에 방점을 찍게 되는 살라딘의 등장이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살라딘은 훗날 자신의 주군 누레딘에게 도전하게 되지만 말이다.


한편, 1144년 에데사의 함락으로 비로소 점증하는 이슬람 세력의 위협을 느낀 서방 세계는 시토회 소속 수도사 베르나두스의 주창으로 다시 한 번 십자군 원정에 나서게 된다. 제후가 주축이 되었던 1차 십자군 원정과 달리, 유럽 세계의 두 거물인 프랑스 왕 루이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콘라트가 직접 나선 두 번째 원정은 다마스쿠스 공략을 앞두고 철군하면서 실패로 돌아간다.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이 원정으로 서방 세력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이슬람 세계는 비로소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게 된다.


시오노 여사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던 이 시기에 십자군 국가가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몇 가지 원인을 다음의 요인들로 설명한다. 첫 번째는 특수부대였던 템플 기사단과 성 요한 기사단의 존재로 꼽는다. 성지회복이라는 대전제를 완수한 후, 유럽으로 돌아갔던 1차 십자군 원정에 참가했던 대다수의 서유럽 기사들과는 달리 수도사이자 전사로 “이교도 박멸”의 최전선에서 광신적으로 싸우던 템플 기사단은 이슬람 쪽의 압도적인 병력을 그야말로 일당백의 전투력으로 막아낸 일등공신이었다. 귀족 자제들이 주를 이뤄 병자를 간호하던 성 요한 기사단(병원 기사단)과 달리 하층 기사가 주축이었다고 한다.

두 번째 요인으로는 만성적인 병력 부족 때문에 광대한 영지를 지킬 수 없었던 십자군 국가는 곳곳에 기사단을 주축으로 한 성채를 건설했다. 서구식 봉건제를 팔레스티나 지방에 그대로 이식한 십자군 국가는 서유럽에서 자신들의 근거였던 성채로 공성전에 익숙하지 못한 이슬람 군대를 상대로 유리한 방어전을 구사했다. 마지막으로 내륙의 거점을 지원하기 위해 해안에 포진한 항구도시를 지원하는 이탈리아에 포진했던 해양 도시국가 베네치아와 제노바, 피사 등의 해군력 지원을 들 수가 있다. 물론 이슬람 세계에도 이집트 파티마 왕조의 해군력이 존재하긴 했지만, 서방 세계의 압도적인 해군력에 상대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 이전에 상인이었던 해양 도시국가들은 십자군 국가의 생명선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까 싶다. 국시였던 경제 교역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들 “이코노믹 애니멀”들은 민족과 종교 이데올로기를 초월해서 이익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1980년대 세계 경제를 주물렀던 작가의 동포들과 유사하다. 그래서 시오노 여사가 굳이 ‘경제 동물’이라는 표현을 이코노믹 애니멀이라는 말로 순화하지 않았나 싶다.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의 등장까지 좀 지루한 면이 있지만, 마침내 파티마 왕조의 이집트와 아바스 왕조의 이라크와 시리아를 통일한 살라딘이 등장하면서 십자군 국가의 몰락을 향한 역사의 시계추는 숨 가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살라딘이 지금까지도 아랍 세계의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지만, 살라딘이 아직도 소외당하는 쿠르드족 출신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살라딘은 주군 누레딘의 명을 받아 이집트 정복에 나서게 되면서 비로소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파티마 왕조의 멸망과 누레딘의 죽음(1174년)으로 명실상부한 아랍 세계의 술탄으로 공식 임명된 살라딘은 바야흐로 그리스도교,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교의 공통 성지인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지상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지하드에 나선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시오노 여사의 <십자군 이야기> 두 번째 인스톨은 2005년 할리우드에 제작된 대작 영화 <킹덤 오브 헤븐>과 조우한다. 어떻게 해서든 성도(聖都) 예루살렘 왕국을 지키려는 영민한 군주 보두앵 4세의 눈물겨운 분투기도 빠질 수 없다. 나병이라는 천형(天刑)으로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보두앵 4세는 트리폴리 백작 레몽과 이벨린의 발리앙의 도움을 받아 성지 수호에 나선다. <십자군 이야기> 후반기에 등장하는 발리앙이 바로 영화에서 올랜도 블룸이 연기한 바로 그 캐릭터다. 영화에서 발리앙은 프랑스 대장장이 출신으로 각색돼서 등장하는데, 시오노 여사의 추적에 의하면 그의 가문은 이탈리아에 근거를 둔 기사 집안으로 중근동에서 나고 자란 발리앙은 여러 언어에 능통했고 십자군 국가의 운명을 가른 하틴 전투에 참가해서 용맹을 과시했으며, 특히 예루살렘 공방전에서는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살라딘과 함께 후세에 길이 남을 기사도의 원형을 보여준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엄청난 이슬람 대군의 공격 앞에 자력으로 예루살렘을 지켜낼 수 없었던 이벨린의 발리앙과 예루살렘 수비대는 살라딘을 상대로 영예로운 항복을 얻어내고 성도 예루살렘으로부터 철수한다. 백 년 전, 예루살렘을 정복했던 십자군이 성도를 피로 물들였다면 살라딘은 이슬람 종교지도자 이맘들의 격렬한 항의를 받으면서까지 자신의 관대함을 만방에 과시한다. 그는 그리스도교가 보여주지 못했던 용서와 관용을 실천한 이슬람 지도자였다.

시오노 여사는 십자군 국가의 방어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기사단의 유래와 활약에서부터 시작해서, 훗날 십자군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되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서방제국과의 갈등, 예루살렘 공방전 같은 십자군 역사의 중요한 뼈대는 물론이고 ‘산의 노인’이 시작한 해시시를 피우는 암살단 아시시의 이야기는 물론이고 십자군 국가의 깡패이자 ‘고삐 풀린 개’라는 별명으로 불린 르노 드 샤티용의 만행 같은 깨알 같은 재미도 빠트리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시오노 여사가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거시사보다 최근에는 정사(正史)에서 다루지 않는 개인의 일상 같은 미시사의 재미에 흠뻑 빠져 있는데, 오래간만에 만난 통사적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다만,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시오노 여사의 여전한 ‘영웅 중심적 사관’은 불편하다. 어쩌면 살라딘에 앞서 이슬람 세계를 통일하고 예루살렘 탈환을 했을지도 모를 이마드 앗딘 장기가 어느 이름 모를 노예에게 암살당한 사실도 역사의 흐름을 뒤바꾼 무명인의 활약을 반증하는 역설이 아닐까. 이슬람 측 사료의 절대 부족이 한 원인이기도 하겠지만, 십자군 전쟁에 대한 서구 중심적 서술 역시 아쉽다. 그런 점에서 당시 시대상의 이슬람 측 증언인 우사마 이븐 문키드가 기록은 아주 중요하다. 문키드가 남긴 프랑크인의 의술 편은 김태권 작가가 알라딘에서 연재 중인 같은 제목의 만화에서도 다뤘는데 두 작품을 비교하면서 읽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다.

시오노 여사의 베네치아에 대한 사랑은 <십자군 이야기>에서 유감없이 드러났다. 어쩌면 그동안에 나온 르네상스 시대를 배경으로 한 저술의 알파와 오메가가 <십자군 이야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내륙 거점을 모두 잃은 십자군 원정에서 앞으로 해양 도시국가의 대표 주자인 베네치아의 비중의 더욱 커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성도 예루살렘을 둘러싼 공방전으로 십자군 국가/서방 세계와 이슬람 세계가 장군, 멍군을 한 번씩 불렀다면 이제 <십자군 이야기> 세 번째 인스톨에서는 십자군 전쟁 최고의 영웅들이 격돌하는 세 번째 십자군 원정이 펼쳐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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