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두 장벽은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어졌다. 이 문장은 치명적인 위협이 안으로 들어오는 걸 방지하는 동시에 내 마음 저깊은 곳 구석에서 쌓여가는 근심이 빠져나가는 걸 막아, 이 두가지가 한데 합쳐져 나를 두려움과 공포로 무너뜨리는 걸 차단하는 역할을 했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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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도시 기행 2 - 빈, 부다페스트, 프라하, 드레스덴 편 유럽 도시 기행 2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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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에 빈을 다녀왔다. 즉흥적인 결정이어서 그 도시에 대한 공부는 진짜 1도 하지 않고 갔다. 아마 오래 전에 본 영화 <비포 선라이즈> 때문이라고 해두자. 그런데 정작 가서는 그 유명한 대관람차 근처에는 가보지도 않았다. 그저 벨베데레에서 클림트의 <키스> 하나 본 것으로 나는 만족했으니까.

 

바로 그 15년 전의 기억들을 얼마 전에 나온 유시민 선생의 <유럽 도시 기행 2>를 보면서 되살리게 됐다. 출근길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오신 선생은 기행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드레스덴 편에서 죽음과 부활의 서사라는 아주 염통을 후벼 파는 그런 문구를 날려 주셨다. 그리고 보니 그 여행길에 뮌헨에서 베를린으로 가는 ICE에서 드레스덴을 지났던 기억이 났다. 아마, 그 전에 내가 이 책을 만났더라면 나는 베를린에 도착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주저하지 않고 바로 드레스덴에서 내렸으리라. 그때까지만 해도 나의 여행은 그렇게 즉흥적이었으니까. 지금은 어림도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아니 그냥 그런 여행들이 다 귀찮아져 버렸다. 그저 집에서 쉬는 게 최고라고 생각하는 무사안일주의자가 되어 버렸다.

 

또 이야기가 자꾸만 삼천포로 가려고 하는구나 그래. 사실 빈에 가서도 도시를 상징하는 인물 중의 하나인 프로이트 선생의 생가에도 가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빈에서 내가 무얼 했더라. 다 지나고 나니 추억이지 싶다. 유시민 선생의 빈 기행을 들으며 나는 왜 링 슈트라세를 둘러볼 생각을 하지 않았나 반추해 보게 된다. 공부를 하고 가지 않아서였다. 일정 모두가 빈 인, 파리 아웃만 잡아 놓고 나머지는 모두 현지에서 즉석으로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해서 잘츠캄머구트와 바트 이슐에도 가지 않았던가.

 

나에게 빈은 서유럽으로 파도처럼 쇄도하는 오스만 제국의 예봉을 꺾은 그런 도시로 기억된다. 두 차례에 걸친 포위전을 치른 빈은 프랑스로 침입하는 이슬람 세력을 꺾은 칼 마르텔이 그랬던 것처럼, 기독교 세계를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지켜내는데 성공했다. 만약 오스만이 빈을 점령했다면 오늘날의 서유럽의 모습은 또 달라지지 않았을까.

 


(빈의 슈테판 성당, 외부에서 사진만 찍고 내부에는 안들어갔다.)


유시민 선생에 따르면 오늘날 빈의 모습은 1857년인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도시를 지켜낸 성곽을 허물고 대공사를 치르면서 바뀌었다고 한다. 아 그랬군. 선생은 한 도시에서 종교 건축물은 하나만 본다는 원칙에 따라 슈테판 성당에 대해서도 아주 자세한 설명을 해주신다. 그런데 난 정작 그 슈테판 성당을 밖에서만 보고 안에는 들어가 보지 않았지 싶다. 그 시절 사진들을 다시 본다면 좀 더 기억이 날텐데, 사진을 찍기만 하고 인화하거나 그러지 않아 이제는 기억조차 다 휘발해 버린 그런 느낌이다.

 


(빈에서 잔뜩 기대하고 만난 다뉴브강은 아름답지도 푸르지도 않았다.)


유시민 선생이 유람한 빈-부더페슈트-프라하-드레스덴을 상징하는 세 명의 인물들과 한 개의 건물을 책의 표지에 배치했다. 오스트리아의 시씨 황후, 헝가리의 언드라시, 프라하의 얀 후스 그리고 드레스덴의 성모교회. 그리고 보니 부더페슈트와 프라하는 각각 1956년과 1968년에 소련군에 침공을 당한 기억을 가지고 있구나. 오스트리아와 이중제국을 구축했던 헝가리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다가왔다. 출발부터 다민족국가였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제국은 19세기 후반 자신들보다 한 수 아래라고 판단했던 프로이센에게 일격을 당하고, 주류 게르만족과는 다른 다수 슬라브족들을 다스리느라 정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 중에서도 머저르 족 중신의 헝가리는 제국의 영속을 위한 정치적 파트너였던 모양이다. 제국은 헝가리 출신 지도자 언드라시에게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하면서 발칸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위태로운 그야말로 곡예 같은 정치력을 과시했다고 하던가.

 

책으로 헝가리편을 읽을 적에는 상당히 흥미진진했었는데 막상 다 읽고 나서 리뷰에 담으려고 하니 기억들이 다 날아가 버린 그런 느낌이다. 이럴 땐, 그나마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이야기들을 터는 게 최고지. 바로 보헤미아 종교개혁의 기수라고 할 수 있는 얀 후스라는 양반의 이야기를 해보자. 그 유명한 마르틴 루터에 앞서 중세를 지배하고 있던 교황청의 신정에 대해 반기를 든 인물이 바로 얀 후스였다. 루터에 백년 정도 앞서, 보통 서민들이 알아 듣지도 못하는 라틴어 예배가 아닌 현지어로 민중들의 가슴을 때리는 그런 설교를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바로 얀 후스였다.

 

지금과 달리 당시만 해도 문자 해독은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귀족이나 지식인들만의 전유물이었다. 문자로 구성된 정보를 장악한 그들은 민중들에게 정보를 공유하는 것을 거부했다. 심지어 그게 그들이 신주단지 모시는 듯하는 성경이라도 말이다. 텍스트부터 시작해서 교리에 대한 해석은 사제들만이 할 수 있는 고유의 영역이었다. 그런 판에 얀 후스 같은 이단아가 등장해서, 부패한 교황청에 반기를 드니 기존의 종교 권력집단이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당연한 수순이 아니었을까. 그는 결국 산 채로 화형을 당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던 얀 후스를 유시민 선생은 정의로운 사람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나 역시 그에 점에 대해 공감하는 바이다.

 

얀 후스가 활약했던 프라하에서는 어디서나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도 그림이 된다는 말에 그 때 나도 프라하에 갔었어야 된다는 후회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가고 싶어도 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니 말이다.

 

프라하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사건 중의 하나인 금발의 짐승으로 알려진 나치 제3제국의 3인자였다는 라인하르트 프리드리히 암살사건에 대해서도 선생은 언급한다. 나는 고전영화 <새벽의 7>을 기대했지만, 요즘 세대를 감안해서인지 최근작인 <작전명 유인원>을 인용하시는 센스란. 프리드리히 암살은 2차 세계대전을 통틀어 나치 주요 지도자에 대한 연합군이 시도한 유일하게 성공한 사례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것 같다. 책에서는 금발의 짐승이 나치돌격대(SA)를 지휘했다고 되어 있는데, 나치돌격대가 아니라 나치친위대(SS)의 오기로 보인다.

 

선생의 두 번째 유럽 도시 기행의 대미는 작센 주의 수도 드레스덴이 장식한다. 내가 드레스덴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커트 보네거트의 <5도살장>을 통해서였다. 자신이 직접 1945213일과 14일 양일에 걸쳐 이루어진 미영 연합군의 대공격으로 발생한 대참사를 목격한 보네거트는 자신의 작품에 역사적 사건을 인용했다. 훗날 벌어질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을 버금가는 무시무시한 폭발력을 나치 독일에게 과시하겠다는 연합군의 공습도 전쟁에 이기지 못할 바에야 독일 민족을 파멸로 인도하겠다는 미치광이 지도자 히틀러의 전쟁 의지를 꺾지 못했다. 그저 숱한 드레스덴의 문화유산과 다수의 인명 피해만 발생시켰을 뿐이었다. 자신들의 전쟁의 원인을 제공했던 원죄를 지닌 독일 사람들은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전쟁 범죄가 분명한 이 사건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또 한편에서는 서부전선에서 지지부진한 연합군의 진격과는 상대적으로 무서운 속도로 제3제국의 아성 베를린으로 동진해 오는 소련군에 대해 미국과 영국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한 일종의 경고였다는 주장도 흥미롭다.

 

한 때 독일에서 인구 5위를 자랑할 정도의 도시였지만 통일이 된 다음에 위상은 예전만 못하다고 한다. 보수적인 작센 주의 성격상 사회주의 체제에서 40여년을 보낸 뒤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전환하는데 다른 도시들보다 고생을 하기도 했다고. 여전히 사회주의 시절에 만들어진 건축물들이 다수 존재한다는 점도 나의 흥미를 끌기도 했다. 내가 방문한 유이한 독일 도시인 베를린은 너무나 자본주의틱해서 그다지 관심이 가지 않았다.

 

어쨌든 결론은 유시민 선생의 <유럽 도시 기행 2> 드레스덴 편을 읽었더라면 나는 두말할 것 없이 드레스덴을 방문했을 거라는 점. 나의 드레스덴 경유와 독서의 시점이 15년이라는 시차만 없었다면.

 

역시나 일반 대중을 겨냥한 책이니 만큼 읽는데 부담이 없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너튜브에 끝없이 업데이트되는 다양한 콘텐츠들 때문에 책을 읽는데 열흘 정도 걸렸다. 보통의 스피드라면 2-3일이면 되었을 텐데 말이다. 이제 포기한지 오래되었지만, 그래도 한 때 배가본드였던 이는 여전히 오래 전의 발걸음 닿는 대로 간다는 막무가내식 여행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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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7-28 12: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책 1권은 독자들로부터 욕을 많이 먹었던 것 같은데
2권은 읽을만한가 봅니다.
원래 여행가서 길을 잃어보라고 하지 않습니까?그래야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고.
매냐님의 여행도 나름 의미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긴 비싼 돈 내고, 시간 내서 하는 여행인데 헛투로 할 수도 없겠죠.ㅠ

레삭매냐 2022-07-28 13:38   좋아요 3 | URL
그러게요. 1권 평이 썩 좋지 않더라구요.
아니면 제가 유시민 선생 팬이어서 팬심
으루다가 ㅋㅋ

여행가서 길 잃는 건 어려서나 가능하지
지금은 길 잃으면 너무 힘듭니다 ^^

그냥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네요.

얄라알라 2022-07-28 14: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vagabond...^^
레삭매냐님, 저는 이상하게도 레삭매냐님 포스팅을 읽을 때마다 뭐가 되었던 단어 하나씩은 검색하고 지나갑니다. 이번에는 베가본드였는데 오늘 처음 들어보았습니다 ㅎㅎ

1도 안 알아보고 다녀오신 빈 여행이라 어쩌면 다음 여지를 남겨주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레삭매냐 2022-07-28 15:13   좋아요 2 | URL
ㅎㅎ 그냥 리뷰 쓰다가 생각나서
날린 드립 멘트였는데, 효과적이었네요.

슬프게도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생에
다시 빈에 가볼 일이 없을 것 같아요...

그레이스 2022-07-28 15: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빈에서도 볼게 너무 많아서 짧게 다녀온다면 누구누구 생가 정도는 건너뛰어야 하지 않을까요?
전 벨베데레에서 본 그림들 너무 좋았어요.
미술사박물관 놓친게 후회되요.
유럽의 트램은 넘 부러워요.
음식도 좋았구요.
슈테판 성당!

저도 읽어보고 싶네요.^^

레삭매냐 2022-07-28 15:30   좋아요 3 | URL
저는 빈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은 클림트의 키스, 키스, 키스
오로지 키스 뿐입니다 **

저도 미술사박물관에 갔었어야
했는데, 아쉬버요.

비너 슈니첼만 40년 튀겼다는 베스
트판호프 근처의 할머니 집도 넘
좋았지요.

단발머리 2022-07-28 16: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구입만 해놓고 아직 읽기 전인데요. 읽고 나면 유럽 가고 싶어질 것 같은데. 저는 가고 싶은 곳을 잘 찾아가는 사람이 아니라서요. 집 앞에서 마을버스 탈때도 2번씩 검색하는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찍기만 하면 예술 사진이 나온다는 프라하에 가고 싶군요.

레삭매냐 2022-07-28 16:35   좋아요 2 | URL
산 책은 빨랑빨랑 닐거야 하는데
자꾸만 미루게 되더라구요.
<링컨 하이웨이>도 호기롭게 시작
했으나 아예 펼칠 생각도 안하고
있네요.

유럽병이 또 그렇게 도지나 봅니다.

전 이미 그 시절에 프라하와 동유럽
을 돌고 파리에서 만난 빈 시절 동
지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더랬죠.
빈에서 갔었어야 했습니다 -

뮌헨의 호프 브로이에서 비어를 먹
겠다는 일념 때문에 그만 방향이
틀어지는 통에 ㅋㅋㅋ

mini74 2022-07-29 16: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새벽의 7인입니다.ㅎㅎ한때 무슨 드라마였나요 그것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 프라하 엄청 갔다고 하던데요... 전 여행가고 싶다고 하면서 정작 가지 않는 ㅠㅠ 남편이 가서 사 온 냉장고 자석들이며 병따개만 있네요! 보석을 사오라고!!해도 귀를 막았는지!! 병따개는 왜 사오는지 ㅎㅎㅎ 넘 재미있게 읽었어요 매냐님 배가본드.ㅠㅠ 만화책 먼저 떠올랐어요 ㅎㅎ

레삭매냐 2022-07-29 17:08   좋아요 2 | URL
아 그 드라마 저도 기억이 날 듯
말 듯 하네요 :> 드라마 파워가
대단한 것 같습니다.

<새벽의 7인>을 1975년 작이네요.

저도 냉장고 자석 모은 답니다 ^^
보석!!! 비싸니깐요.

만화 <배가본드>, 저도 애정하는
만화랍니다. 그런데 끝까지는 못본
것 같아요. 문득 보고 싶다는 생각
이 드네요.

라로 2022-07-30 17: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요즘 여행하고 싶어서 들썩이는 데요. ㅎㅎㅎ 오스트리아에서 저는 좋았던 도시가 빈은 아니었어요. 올려주신대로 다뉴브강은 실망이었구요. ㅎㅎㅎ 하지만 잘즈브르크와 인스브르크는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아름답게 기억되어 있어요. 오스트리아 참 좋아하는 곳이에요. 언제 다시 가게 될지… 하아~~~

레삭매냐 2022-08-01 09:35   좋아요 0 | URL
곰곰 생각해 보니 저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잘츠캄머구트에서 바라본 오스
트리아 알프스는 정말 일품이었
답니다 :>

잘츠부르크도 너무 좋았어요 ^^
아숩게도 인스부르크에는 가보질
못했네요.

다시는 못갈 것 같다는 게 포인트
인 것 같습니다 ㅠㅠ
 

영웅은 탄생하는 게 아니다. 민중이 찾아내고 만든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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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 민음사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48
찰스 부코스키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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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알라딘 동지들의 놀이터인 북플이 최고다. 다른 분들처럼 나도 북플에 올라오는 책들을 그리고 다른 채널로는 인스타를 참고한다. 올라오는 피드에 자극을 받아 책을 사거나 빌리거나 한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말년에 잘 나가기 시작한 찰스 부카우스키의 시집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를 읽었다. 아마 중고 서점에 있었다면 사서 읽었을 텐데 어제 도서관에 갔다가 빌려서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건 시집인가 아니면 노땅 백인 아자씨의 넋두리인가. 그리고 보니 소설가로 만난 부카우스키가 출발은 시인이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별의별 일을 다 한 부카우스키는 끝내 버텨서 꽤 나이가 들어서 작가로 성공했다고 한다.

 

말년에 발표한 작품이라 그런지 몰라도, 자신이 늘 속여 넘기는데 성공한 죽음의 그림자가 곳곳에서 보인다고나 할까.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죽음이란 숙명은 오히려 젊은이들이 더 두려워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오히려 나이 든 이는 오랜 경험 덕분인지 담담하게 받아 들이기는 개뿔! 그럴 리가 있나 그래. 여전히 시간과 죽음을 속일 수만 있다면 기꺼이 부카우스키 아저씨는 그럴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 아무렇지도 않게 술을 마시고, 경마장을 찾아 돈을 날리고 또 술집에서 드잡이질을 마다하지 않는 부카우스키의 뻔뻔함을 사랑하게 된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작가로서의 찰스 부카우스키의 정체성을 만든 요소는 무엇일까? 가학적인 아버지 헨리의 폭력이었을까? 아니면 어려서부터 반강제로 독립해서 산전수전을 겪으면서 체험하게 된 세상과 경험이 훗날 그가 글을 쓰는 데 소재가 된 게 아닐까. 확실히 곧고 바르게 자란 문창과 엘리트 계급 출신의 작가들과는 변별력을 가지는 날것 그대로의 펄떡거림을 느낄 수가 있다.

 

부카우스키는 참 특이한 캐릭터인 게 예술, 특히 문학을 어떨 때는 개똥 같이 여기다가도 또 작가로서의 한계를 느끼고 타자기 앞에서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하는 창작의 고통을 토로하기도 한다. 또 한 가지 그에게 배울 만한 점이,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창작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없다며 불평 따위는 하지 말란다. 어쩌면 종이 한 장과 볼펜 한 자루만 있더라도 무언가를 쓰고 싶어서 환장하는 게 작가라는 존재여야 한다는 말을 고상한 방식 대신 거친 방식으로 내질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박중독자 대선배 도끼 선생의 후배답게 부카우스키도 경마라는 도박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경마장에서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자, 사귀는 여자(?)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다른 여자와 있지 않았냐고 따진다. 성난 그녀에게 부카우스키가 진실을 이야기해도 전혀 먹히지 않는다. 물론 상대방이 그런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을 숱하게 해온 전과 때문이라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시인이자 작가로 성공한 다음에는 바로 그 점을 이용해서 여자들을 꾀기도 한다. 부카우스키는 그런 데 대해 전혀 부끄러움이 없었다. 어쩌면 자신의 오랜 고생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젊은이와 고속도로에서 얼토당토않은 레이싱을 하다가 자신이 목표한 지점보다 30km를 더 나가는 치기를 보여 주기도 한다. 아무리 자신이 유명하다고 하더라도, 불멸의 걸작을 남긴 세르반테스보다는 하수라는 점을 인정하기도 했던가.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으려고 노력하기보다, 어쩌면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는 게 더 중요한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제 부카우스키의 이 시집을 열심히 읽고 있는데 옆지기가 보더니, 감수성이 많다며 왜 생전 안 보는 시집을 다 보냐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늙다리 영감탱이가 쓴 시집의 레알 콘텐츠를 봤다면 아마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지. 어쨌든 나는 부카우스키의 지독한 뻔뻔함이 마음에 든다. 쟁여둔 부카우스키의 다른 책들도 읽어야지.

 

[뱀다리] 하도 이 작자가 궁금해서 너튜브의 도움을 받아 마지막 리딩이라는 타이틀을 보게 되었다. 세상에, 오디언스 앞에서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담배도 꼬나물고 뭐라고 하는 오디언스에게 쌍욕을 박는 장면에서는 정말. 또 다른 시퀀스에서는 리쿼 스토어에서 6병들이 맥주를 사면서 어느 손님에게 자신의 이름을 정확하게 부카우스키라고 발음하는 것도 들었다. 우리 미국인 친구 브랜던이 알려준 발음이 맞다는 걸 오늘에서야 내 귀로 확인하게 됐다. 어느 시 낭독의 밤(1972)에 등장할 땐, 거의 록스타 수준의 환호를 받기도 하더라. 부카우스키는 진짜 기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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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22-07-25 16:4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덕분에 찰스 부카우스키를 알게 되어 기뻐요. 감사합니다! ^^

레삭매냐 2022-07-25 17:18   좋아요 3 | URL
지금 다시 찾아 보니 예전에
열책에서 나온 책들은 모두
절판이 되었네요. 아쉬워라.

아주 재밌는 작가로 기억합니다.
단, 꼰대라는 점도...

얄라알라 2022-07-25 16:4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소개하신 몇 일화만 봐도, 양면성이 튀는 독특한 작가일 것 같습니다! 30km를 더 나갔다는 건 차로 갔다는 말씀이시죠? 달리기가 아니라?^^

레삭매냐 2022-07-25 17:19   좋아요 4 | URL
네이 그러합니다 -
부카우스키 씨가 청년하고
붙었던 경험이라고 하네요.

미미 2022-07-25 17: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를 읽어봤는데 개성이 돋보이는 작가라고 생각했어요.
부카우스키의 시집을 읽어봐야겠네요! ^^*

레삭매냐 2022-07-25 19:32   좋아요 3 | URL
넵, 저도 그 책 7년 전에
읽었답니다. 이래서 기록이
필요한가 봅니다 :>

재밌고 기묘한 개성이 넘치
니는 작가지요, 부카우스키.

얄븐독자 2022-07-25 19: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절판된 책 잘 간직하고 있어야겠네요 ㅋ 어쩌면 판권을 다른곳에서 가져갔으려나

레삭매냐 2022-07-25 19:34   좋아요 2 | URL
제가 이래서 책을 못 정리하는
거라고 나름 위로해 봅니다 :>

<우체국>이랑 <여자들>은 다시
읽어 보고 싶네요. 처음에 읽을
적에 뭐 이런 작가가 다 있나 싶
었는데 말이죠.

비교적 최근에 나온 책들도 다
절판이 되었더라구요.

mini74 2022-07-26 14: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얼핏 보이는 싯구로는 감수성과 거리가 먼 듯 합니다 ㅎㅎ뻔뻔한데 솔직해서 매력적인 작가같습니다. 저도 궁금해지네요 이 작가님..ㅎㅎ

레삭매냐 2022-07-26 17:54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감수성과는 1도 관련
이 없는 양반이랍니다. 너무 레알
해서 당황스럽게 만드시는 탁월
한 능력이 있으신 분이시죠.

재밌는 작가이니 한 번 읽어보시
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유럽 도시 기행 2 - 빈, 부다페스트, 프라하, 드레스덴 편 유럽 도시 기행 2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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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1편을 읽지 않았지? 빈을 필두로 한 4개 도시에 이야기가 매력적이다. 가본 곳에 대해서는 추억을,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해서는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어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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