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드라마는 한 작품에 소속된 작가도 많지만, 전체 기획을 하는 크리에이터 아래 검증된 기성 작가가 여럿 있고, 그런 작가들 아래 여러 명의 라이터가 소속됩니다. 실력 있는 기성 작가들이 공동작업에 참여하는 것은 그만한 대우를 받기 때문이죠. 우리의 경우 대표작가 한 사람에 초짜(초보) 작가 서넛이 보조합니다. 지금의 집필료 수준으로는 그렇게밖에 팀을 짤 수가 없어요.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미국 드라마는 시장이 클 뿐 아니라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이 세계적으로 판매되기 때문에 그런 대우가 가능합니다. 다행히 우리에게도 한류를 타고 시장이 넓어졌습니다. 미국이나 유럽을 공략하는 데는 한계가 있겠지만 20억 아시아시장이 있으니 잘 만들면 분명히 팔릴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시스템이 미국처럼 되는 것도 시간 문제겠죠.”
하지만 현재의 무게가 너무 버겁다. 괜히 총대를 멨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하다. 오죽하면 한 달 전쯤에는 모든 것을 버리고 숨고 싶다는 생각도 했을까. 그러나 그는 도망치지 못했다.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가 사라지면 남은 사람들이 겪을 혼란이 얼마나 클 것인지를 알기 때문이었다.

암전 같은 20대, 그리고 서른 잔치
그는 확실히 너무 많은 일을 벌여놓았다. 현재 방영되고 있는 ‘에어시티’와 오는 7월 촬영에 들어가는 120억원 규모의 ‘식객’, 주몽의 손자를 주인공으로 한 ‘대무신왕’, 2009년에 들어갈 ‘올인2’, 그리고 논의되고 있는 여러 작품. 그가 사라진다는 것은 드라마계의 재앙이다. 그가 감옥 같은 작업실을 지킬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제 작가 최완규의 과거라는 우물에 두레박을 내려 보낼 시간이다.
그는 미래에 글쟁이가 될 것이라는 막연한 꿈 하나만 믿고 20대를 보냈다. 사춘기도 좌충우돌이었다. 책은 넘치도록 읽었지만 공부는 늘 뒷전이었다. 소설뿐 아니라 이념·철학서적까지 두루 섭렵한 그는 친구들을 물들이던 불온한 고교생이었고, 통과의례처럼 가출까지 감행한, 커서 뭐가 될까 걱정스럽던 막내아들이었다. 재수 끝에 대학에 진학했지만, 대학시절이라고 방황하는 젊음이 정착할 리 만무했다. 1학년 말 성적은 학사경고.
이럴 때 군대는 참 편한 돌파구다. 제대 후 학교로 돌아갔지만 끝내 졸업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백수가 됐고, 간혹 공단의 떠돌이 일꾼이 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책을 읽거나 TV 앞을 지키다 20대가 저물어갔다.
그에게 서른은 청춘의 무덤이자,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이었다. 서른이 되던 1993년 MBC베스트극장 드라마 공모에 당선되며 작가의 길이 열렸다. 그러나 생각하던 것처럼 인생을 바꿔놓을 만한 사건은 아니었다. 한 달 50만원의 월급을 받으며 1년간 작가수업을 받는 특전을 부여받았을 뿐이다.
1년이 지났을 때 그는 함께 공부한 7명 중 낙오된 5명에 속했다. 매달 한 편씩 내야 하는 작품 숙제를 매번 건너뛰었고, 어쩌다 한 편 내는 작품도 탄광촌을 배경으로 한 무겁고 어두운 주제의 작품이라 평가도 후하지 않았다.
작가를 포기해야 할 기로에 있을 때 드라마 ‘종합병원’ 보조작가 제의가 들어왔다.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닌지라 열심히 기획안을 만들었고, 기획안이 채택돼 병원 현장 취재를 시작했다. 방송 시작 6개월 전부터 그는 병원에서 생활하며 의사들의 삶을 밀착 취재했다.
그런데 드라마를 쓰기로 한 작가가 사정이 생겨 작품이 무산될 위기에 놓였다. 전문성을 요하는 의학 드라마라 대체 작가를 찾을 수도 없는 상황. 그런 위기에 기회가 왔다. 연출자가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은 표정으로 대본을 써보라고 제의했다. 신인작가에게 주간 단막극을 의뢰하는 일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하지만 그는 거짓말처럼 1년6개월 동안 73회의 ‘종합병원’ 대본을 성공적으로 집필했고, 작가로서 입지도 굳혔다.
“종합병원은 저를 알린 출세작이기에 특별한 작품이지만, 내 인생에서 그보다 더 치열하게 산 적이 있을까 할 정도로 열심히 만든 것이기에 더 특별한 의미가 있어요. 서른 이전의 꼬이고 불투명한 인생이 이 작품을 계기로 술술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방송운은 줄곧 내 편이었어요.”
두 번째 작품은 ‘그들의 포옹’이었다. 이영애, 김승우, 안재욱, 최민식 등이 출연했지만 당시 그들은 겨우 얼굴이 알려지기 시작한 신인 연기자들이었다. 어지간한 드라마광이 아니면 기억 못하는 작품이다. 다시 쓴다면 정말 잘 쓸 수 있는 작품목록 첫 번째에 놓아두었다.
“올해 81세인 노모가 가장 훌륭한 시청자 평가단입니다. ‘종합병원’ 때 소감을 물었더니 좋았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눈물이 핑 돌더군요. 그런데 ‘그들의 포옹’을 보신 후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셨어요. 실패한 거죠. 저는 어머니가 보시기 좋은 드라마 대본을 쓰고 싶어요. 그렇게 쓰면 시청자의 절반이 쉽게 볼 수 있는 드라마가 될 겁니다.”
   (계속)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다른 원인도 있겠지만 조 작가의 죽음에는 과도한 시청률 스트레스가 작용했다고 그는 믿고 있다. 조 작가는 짧은 투병 기간 병문안을 온 한 방송 연출자에게 “아침마다 받아보던 ‘맨발의 청춘’ 시청률표가 말기 간암 판정보다 더 두려웠다”며 시청률 스트레스를 토로하기도 했다. 조 작가는 ‘맨발의 청춘’이 시청률이 저조해 조기 종영되면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고, 이를 만회하기 위한 작품을 구상하려고 프랑스로 떠난 것이었다.
“임종을 지켜보고 나오는데 걷잡을 수 없이 우울해지는 겁니다. 내 사는 꼴이 보이는 거예요. 저는 조 선배보다 더하면 더했지 나을 게 없었어요. 가정도 꾸리지 않았고, 건강도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였어요. 저도 선배처럼 시청률과 일의 덫에 허우적거리다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뜨고 마는 건 아닐까 싶어 정말 가슴이 콱 막히더군요.”
그는 건강이 좋지 않다. 1년째 약으로 버티고 있는 당뇨가 언제 합병증을 일으킬지 모른다. 두 달에 한 번씩 병원을 찾지만 의사는 “무조건 쉬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야단을 친다. 몸무게를 지금보다 15kg은 줄여야 하는데, 숨쉬기운동만 하는 그에게 다이어트도 여의치가 않다.
선배의 죽음 이후 ‘주몽’은 승승장구했다. 조기 종영이라는 초강수로 작가를 내친 방송사는 꽃바구니를 보내고 일찌감치 연장 방송을 검토했다. 시청률이 모든 것을 말하는 방송동네의 생리는 그렇듯 냉혹했다.
그러나 시청률이 높다고 작가가 마냥 즐거울 수는 없었다. ‘주몽’을 두고 역사 고증 문제와 연장방송으로 인해 느슨한 극의 전개, 허술한 전투신 등에 대해 드라마 게시판에 신랄한 비판이 쏟아졌다. 작가는 시청자의 지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베테랑이 될수록 이런 비판은 더 뼈아프다.
“고증 문제에 대해서는 별 자책감이 없어요. 역사가 없는 그 시대를 누가 철저하게 고증하고 진실 여부를 판가름하겠습니까. 저는 역사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역사를 현재에 되살려내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런 비판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극의 밀도가 떨어지고 긴장이 풀어졌다는 지적은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반성하고 있습니다. 시청률이 높았던 것은 운이 좋았죠. 쉽고 단순하게, 그리고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는 드라마를 쓰자는 첫 기획의도가 먹혀든 것 같아 만족해요.”
작가의 한계도 있었지만 연출에서도 규모에 맞지 않은 전투신이나 연출로 욕을 먹었다. 그는 “연출력의 문제가 아니라 방송환경 문제”라고 지적했다.
“일주일에 두 편의 사극을 제작하는 일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에요. 한정된 제작비와 촉박한 방송일정에 맞춰 그만한 퀄리티의 작품을 내놓은 것은 제작진이 기적 같은 일을 해낸 겁니다. 방송환경 전체를 놓고 가할 비판이 ‘주몽’ 제작진에 쏟아지는 것은 가혹하죠.”

작가, 그 이상으로 산다는 것
그는 자주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비벼 끈 꽁초가 반 갑 가까이 됐다. 보루째 사다놓은 담배꾸러미가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시간을 내 맘대로 쓸 수 없는 것이 가장 힘들어요. ‘주몽’ 연장 방송을 하면서 대본을 쓸 때도 힘들었지만,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았어요. 괜히 욕심을 부린 것 같아요.”
왜 아니겠는가. 작품 하나에 매달려 있을 때에도 부단히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자학에 가까운 글쓰기를 하는 그가 요즘처럼 여러 작품에 매달려 시간을 쪼개 쓰는 일이 쉽지 않을 터다. 혼자 사는 오빠를 위해 일주일에 한두 번 들러 살림을 돌봐주는 막내 여동생이 그가 전화기에 매달린 사이 “거절을 못하는 성격이라 고생을 사서 해요”라며 측은한 눈길을 보낸다.
작가 최완규는 ‘홀몸’이 아니다. 그는 30명이 넘는 작가를 거느린 ‘에이스토리’의 대표를 맡고 있다. 미국식 작가 시스템을 동경해 만든 에이스토리는 그에게 감당하기 버거울 만큼의 일을 안겨주고 있다.
“2005년 회사를 설립해 3년째 실험을 하고 있어요. 전문성을 갖춘 ‘ER’이나 ‘24’ 등 미국 드라마는 십수 명의 작가가 붙어서 퀄리티 높은 드라마를 만들어내고 있잖아요. 전문 직업군(群)을 다룬 드라마를 작가 혼자서 만드는 시대는 갔습니다. 작품성 있는 연속극이나 대하 드라마라면 한 작가가 일관성을 가지고 가야겠지만, 전문성이 필요한 주간 단막극이나 미니시리즈는 미국식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최고의 흥행을 기록하는 드라마 작가가 독불장군 대신 한국 드라마에 발전적 모델을 제시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시행착오로 치러야 하는 금전적, 정신적 손실이 생각보다 크다. 그는 드라마 작가의 저변이 넓지 않은 점과 공동창작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실정을 그 이유로 꼽았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파이’다. 많은 작가가 함께 일하면 한정된 집필료를 나눠 갖느라 배가 고파질 게 뻔하다.
   (계속)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여의도 작업실 문을 밀치고 들어섰을 때 그는 통화 중이었다. 인터뷰를 시작한 후에도 그의 휴대전화는 쉬지 않고 몸부림을 쳤다. 불과 20분 사이 그는 다섯 통의 전화를 받았고, 그중 두 통은 심각한 내용인지 내실로 들어가서 통화를 하고 나왔다. 올림픽대로를 줄지어 달리는 자동차들과 한강을 오가는 유람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작업실 창가에 서서 그가 급한 불 끄기를 기다렸다. 방송작가에게 저렇게 급한 일이란 대본말고는 없을 터.

시청률은 ‘萬事’
한참을 여기저기 통화하고 나서 마주앉은 그는 기다리게 한 것이 미안했는지 묻지도 않은 말을 불쑥 꺼냈다.
“방송동네라는 곳이 시청률만 높으면 시비 거는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시청률이 예상보다 저조하면 별의별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고 사공이 많아집니다. 그래서 작가에게 어느 정도의 시청률은 외부의 간섭 없이 극을 이끌어갈 수 있는 담보가 됩니다. 시청자 불만이 많고 극의 개연성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사람이 많아도 시청률이 높으면 방송사 관계자나 연기자들도 작가에게 불만을 토로하지 않죠.”
작가 최완규(崔完圭·43)가 시청률 얘기를 꺼낸 것은 MBC 드라마 ‘에어시티’와 관련한 전화를 받은 때문이었다. 출입제한구역이 많은 인천공항 내에서 주로 촬영되는 탓에 현장 진행속도가 더딘데다, 최지우와 이정재라는 특급배우들을 기용했지만 동시간대에 맞붙는 KBS1의 ‘대조영’에 밀려 10%대 초반의 시청률에 머물고 있다.
더 이상 꼬치꼬치 묻지 않았다. 그의 말 행간에서 ‘시청률이 만사’라는 방송판의 ‘진리’를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청률이라는 족쇄는 이쪽 밥을 먹는 사람에겐 피치 못할 숙명이다.
시청률 얘기를 하자면 그는 어느 작가 부럽지 않다. 4%로 시작해 50%로 종영한 ‘야망의 전설’을 시작으로, ‘국민 드라마’라 불리며 시청률 50%를 훌쩍 넘겨 롱런한 ‘허준’ ‘올인’ ‘주몽’이 그의 손끝에서 창조됐으니 말이다. 그런 그가 다른 드라마의 높은 시청률에 치여 애면글면하는 것을 보면서 인생의 묘한 순환을 실감한다.
“네티즌들은 참 엉뚱한 통계를 잘 냅니다. 얼마 전 인터넷 서핑을 하다 시청률 최하위 작품 목록을 발견했는데, 10개 중 9개가 ‘허준’ ‘올인’ ‘주몽’ 때 맞붙은 작품이었어요. 예전 같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겠지만, 이제 저도 제작자의 처지가 되고 보니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가 않더군요. 그때 저와 맞붙은 작가나 제작사, 출연배우들이 받았을 스트레스를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작가에게 시청률은 상대 프로그램을 밟고 일어서야 하는 전쟁이다. 과거의 그라면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태도였겠지만 경륜이 쌓이고 회사의 대표가 되면서 최완규 작가는 확실히 변했다.

‘주몽’과 선배 작가의 죽음
무너져가던 ‘드라마 왕국’ MBC의 숨통을 시청률 고공행진으로 틔워준 최근작 ‘주몽’은 그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케 했다.
“방영 2주 만에 시청률이 25%를 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30% 중반까지 가파르게 올라갔어요. 생각지 않게 시청률이 30%, 40%를 넘어갈 때마다 방송사에서 꽃바구니를 챙겨 보냈어요. 그런데 ‘주몽’을 시작하고 열흘도 안 돼 조소혜 선배가 세상을 떴습니다.”
2006년 5월24일 그는 참담하게 우울했다. ‘첫사랑’(1997년)으로 한국 드라마 역대 최고 시청률 기록(65.8%)을 세운 선배작가 조소혜씨가 영면에 든 날이기 때문이다. ‘젊은이의 양지’ ‘엄마야 누나야’ ‘회전목마’ 등 시청자의 사랑을 듬뿍 받은 작품을 쓴 조씨는 고작 쉰 해를 채우고 세상을 떠났다.
드라마 작가모임에서 친하게 지내던 선배이자 동료였던 조소혜 작가는 프랑스에 장기간 머물 계획으로 출국했다. 소화가 안 돼 현지 병원을 찾았다가 프랑스 의사의 권유로 급히 귀국해 종합검진을 받은 끝에 말기 간암 판정을 받았다. 이미 손쓸 도리가 없었고, 입원한 지 한 달 만에 세상을 등졌다.
   (계속)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다시 그의 휴대전화에서 ‘사계’가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그의 아내가 전화를 했다. 앞서 인터뷰 요청을 거절할 때와는 딴판으로 목소리가 아주 정겨운 톤으로 바뀌었다.
“응, 나 인터뷰 중인데. 왜? 그래, 그래, 응응~.”
▼ 국내외에 호적수나 좋아하는 작가들이 있다면.
“작가란 각자 독립된 존재니까, 호적수니 뭐니 하며 비교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다들 색깔이 다르고 자라온 배경과 시대배경도 다르니까. 들판을 보면 작은 풀꽃도 있고, 큰 나무도 있듯이 말입니다. 다만 동시대에 같이 활동하고 싶은 작가가 있다면 이문구 선생을 꼽고 싶어요. 저는 그분의 소설을 아주 좋아하고 존중합니다. 제가 가지지 못한 장점들을 갖고 있거든요. 그가 이 세상에 없는 게 참 아쉽습니다.”
▼ 해외 작가로는 어떤 이들을 좋아합니까.
“훌륭한 작가가 많죠. 그런데 요새 서구 문학이 ‘매가리’가 없어요. 오히려 서구문학이 주변부인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의 문학에서 수혈받고 있는 느낌이에요.”
▼ 황 선생께서도 그런 주변부 문학을 높이 사는지요.
“저는 라틴문학을 특히 높이 칩니다. 환상문학도 좋지만, 잉카·아즈테카 문명을 바탕으로 정복자의 언어인 스페인어로 세계의 보편성에 도달하는 라틴 문학이 흥미롭습니다. 지난해 아시아·아프리카 문학제에 50개국 83명의 작가가 참가했는데, 그들이 자국의 생생한 현실을 끌어안고 있는 것을 보고 서구문학이 얼마나 오만하게 일방적으로 세계를 자기화해왔는가 하는 점을 새삼 발견하게 됐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베트남전쟁 외엔 큰 전쟁도 없었고, 살상도 없었다고 아는 이가 많습니다. 그러나 1990년 이후 세계 37개국에서 분쟁이 있었고, 이 기간에 1200만명 이상이 살상됐어요. 콩고 내전에서 400만명, 르완다 내전 때는 3개월 만에 100만명이 죽어나갔습니다. 또 미국의 봉쇄가 이뤄진 10년 동안 북한에선 300만명의 동포가 아사했습니다. 전쟁과 다를 게 뭐가 있나요. 유엔 통계에 따르면 하루에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12억명이 넘습니다. 국제 교역 가운데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분야가 바로 무기입니다. 우린 그런 현실을 망각해왔습니다.”

“실수 저지를 용기가 젊음의 비결”
▼ 전북 진안에 황석영 문학촌이 들어선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문학촌 전망이 뚜렷하지 않아 일단 접었습니다. 아내나 지인들도 당분간 사회봉사보다는 창작에 전념하는 게 좋겠다고들 합니다.”
▼ 마지막으로, 황 선생께선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이라고 보십니까.
“한국 중산층은 이미 너무 잘살고 있죠? 런던과 파리에서 몇 년 보내면서 만난 중산층 이웃들은 아주 검소했습니다. 온 가족이 한 달에 한 번 외식하는 것도 부담스러워해요. 그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 잘 살고 돈을 흥청망청 쓰는 편입니다. 검소하고 평화롭게 사는 것이 좋지 않은가요. 저는 북구(北歐) 형태의 삶이 참 괜찮은 것 같아요. 약간 심심하고 쓸쓸한 정도의 검소한 생활이 정말 잘사는 것 아닐까요. 우리는 생애 대부분을 집 사고 아이들 대학 보내는 데 바칩니다. 그 두 가지에서만 놓여나도 삶의 질이 훨씬 높아질 겁니다. 그러면 가족이 여행도 다니고 책도 읽고 전람회나 콘서트에도 가며 생활할 수 있지 않을까요.”
두어 시간의 인터뷰 내내 그는 줄담배를 피워댔다. 술 담배를 얼마나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의 답이 재미있다.
“오스카 와일드가 그랬대요. 젊은 시절에 저지른 실수를 거듭해서 저지를 수 있는 용기와 각오가 있는 사람이면 그는 젊은 거래요, 어허허허. 그러니 내 젊음의 비결이 거기에 있지 않나 생각해요. 그리고 창조적인 열정을 끊임없이 자기 내부에서 퍼내면 그것이 사람을 늙지 않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러다 글이 잘 써지지 않으면 폭삭 늙겠죠. 하지만 지금 저는 생애 가장 왕성한 창작욕에 불타고 있거든요.”
그가 자의반 타의반 작가로서 글을 쓰지 못했던 시기는 거의 15년에 이른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몇 년간의 사회운동(그는 ‘사회봉사’라고 표현), 5년간의 망명, 5년간의 감옥생활 동안 그는 사실상 작가가 아니라 행동가였다.
“그러니까 사실 지금이야말로 혼자 집필실에 틀어박혀 왕성하게 쓸 수 있는 시간과 때를 만난 거죠. 건강이 허락한다면 앞으로 한 20년은 더 쓸 거예요. 그때면 86세가 되니, 세계 최고령 현역작가가 돼보고 싶어요. 누가 사주팔자를 따져보더니 향후 20년 동안 왕성하게 활동한다고 그래요. 명도 길어 90대 중반까지는 간다니까 한 10년은 유유자적하면서 생애를 보내고 싶어요.”
황씨는 그 어느 때보다 창작 엔도르핀이 왕성하게 분비되고 있는 듯했다. 그런 상황에서 ‘개밥바라기 별’이 연재되고 있으니 그 소설을 읽는 독자도 행복해질 것 같다. 삶의 진실을 찾아 모순된 사회에 맞서 치열하게 살아온 노작가의 열정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기회다.
   (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황석영씨는 1월9일 진로발렌타인스 주최 ‘마크 오브 리스펙트’ 시상식에서 ‘올해의 존경받는 문화예술인’으로 선정됐다.

▼ 핵 문제 해결, 북미수교 조짐이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그 시기를 내년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아무튼 한반도의 운에 달린 거죠. 그래서 이명박 정부가 잘해야 합니다. 북한을 어떻게 우리 경제공동체로 끌어안을 것인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개성공단이나 해주공단 같은 것을 더 넓혀서 저임금의 북한 노동자들을 이용해 남한의 내수를 진작시키고 북한에도 도움을 준다면 변화의 기초가 생기는 거죠. 허리띠 졸라매고 굶다가 좀 먹고 살게 되면 생각이 바뀝니다. 사람은 물질적 존재이거든요. 이렇게 단순한 것을 왜 그렇게 두려워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노무현 정부, 소통 회복에 실패
▼ 한반도대운하는 왜 반대합니까.
“대기업들 통해 내수를 키워서 서민들의 실물 경제를 좀 개선하려는 모양인데, 제 생각에는 ‘언 발에 오줌 누기’ 아닐까 합니다. 강산은 우리가 같이 살아가는 생물체이고, 원래 그렇게 된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그걸 파헤쳐서 활용하는 효과도 그로 인해 잃게 될 것에 비하면 그리 크지 않은 듯하고요. 더구나 우선순위를 따지면 북방으로 눈을 돌리는 게 먼저라고 봅니다.”
▼ 기왕 정치 얘기가 나왔으니 지난 노무현 정권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는지 궁금합니다.
“실패했다고까지는 보지 않지만 그렇게 잘했다고도 보지 않습니다. 다 된 밥에 코 빠뜨린 격이랄까.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는데 아쉬워요. 지난 정권의 가장 큰 약점은 프로젝트만 있고, 인간끼리의 정이나 소통을 회복하는 데 실패한 것입니다. 한국 근대화도 그 점을 무시하며 치달려왔지요.”
황씨는 남한 사회가 IMF체제 이후 신자유주의 세계 속에 재편됐는데,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는 바로 거기에 적응하는 시기였다고 보았다. 그 시기 동안 국민의 의식도 변화됐는데,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이 바로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는 인식이 생겨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저는 아직도 민주주의가 우리의 영원한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부정부패니 양극화 같은 문제는 민주적 내실이 다져지지 않아서 벌어지는 일이거든요. 노무현 정권의 주도세력을 ‘386’이라고 하는데, 과거 그들과 얘기를 해보면 ‘토론 좋아하고 기획은 잘하는데, 남의 말을 안 듣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민주적 소통 부재가 바로 거기에서 연유한 겁니다. 그들은 ‘소설 따위는 안 본다’고 해요. 그 이유를 물으면 ‘사회과학 책 읽을 시간도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소설을 안 보면 동시대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읽나’라고 야단치곤 했습니다. 물론 노무현 정부가 복지정책 등 잘한 것도 많지만, 남북 문제나 FTA 협상, 이라크 파병 같은 일을 처리하면서 자신을 뽑아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렸거든요. 그래서 고립된 게 아닌가 해요.”
▼ 지난해 손학규 통합민주당 대표(당시 무소속)를 대선후보로 밀자는 지지선언을 하셨는데요.
“당시 누구나 ‘87체제’의 종언이니, 패러다임의 전환기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잖아요. 그래서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기존의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구도로는 어렵고 촉매제가 될 수 있는 인물이 손학규씨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그는 섣불리 우리당으로 들어갈 게 아니라 문국현 후보처럼 자기 세력을 키워나가면서 제3의 세력을 규합했어야 했어요. 당시 판이 깨지긴 깨졌는데, 아주 조금 깨졌어요. 와장창 부서졌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그걸 주도했던 이들이 다 범생이여서 그랬나 봅니다. 저는 진퇴가 분명한 사람이니까 이후엔 전혀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이문구 선생 없어 참 아쉽다”
▼ 지금도 자신을 참여작가라고 생각합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선 일정한 직업윤리가 있죠. 특히 사람의 삶과 직접 관계된 일에 종사하는 교사, 종교인, 의사, 그리고 작가들을 생각해봅니다. 그들은 동시대와 관계를 가지면서 자기 생업을 영위하므로 동시대 사람들에 대해 일단의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동아시아에서는 공자 이래로 ‘지식은 공동체에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이 팽배했고, 서양은 소크라테스 이래로 ‘비판적 기능’을 지식인의 주요 기능으로 봤습니다. 그래서 양자를 결합해보면 작가는 최소한 동시대 삶과 결부된 중요한 일에는 발언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계속)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