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 위주’ 공부가 주효
2003년 12월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하기까지 그는 2001년과 2002년 두 번 고배를 맛보았다.
“2002년에 불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는 몸도 마음도 정말 지쳐 있었습니다. 예순이 훌쩍 넘은 어머니께도 죄송했고, 2000년에 행정고시에 합격한 동생에게도 면목이 없었죠. 많이 지치고 힘들었지만, 제 자신이 풀어지는 게 싫어 불합격 소식을 들은 날도 곧장 도서관으로 갔어요.”
아무리 ‘공부가 가장 쉬웠다’는 그이지만, 두 번의 실패로 인한 좌절과 사법시험의 방대한 공부량은 그를 힘들게 했다. 그래도 흔들리지 않았다. 쉬운 길을 골라가지도 않았다. 고시생 대부분이 신림동의 학원 수업에 의존해 요령껏 공부하는 것과 달리, 그는 착실하게 ‘원리 위주’로 공부했다. 1, 2년 먼저 합격하는 것보다 법률을 온전히 이해하고 제대로 공부하는 게 중요하다는 스승(서울대 법대 양창수 교수)의 가르침을 지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학교 전공 수업 위주로 공부했어요. 그리고 대부분의 법대생들이 학원에 의존하면서 법 원문은 읽지 않고 요약본 판례를 읽는데, 저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판례를 꼼꼼히 읽었어요. 법원 공보를 찾아 읽고, 교재 각주에 달린 판례도 거의 다 찾아 읽었죠. 법원 도서관 판례 모음집 CD도 구입해 읽었고요.”
하나씩 새로운 것을 알아갈 때 그는 행복했다. 그리고 공부만큼 재미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변호사를 목표로 삼으면서 학자를 꿈꾸기도 했다.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 기회가 되면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계속 하고 싶다고 한다.
고백 한 번 못한 짝사랑
사법시험에 합격하자 주위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제 결혼해야겠네”라고 했다. 그럴 때마다 “아직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응수했다. 그러나 솔직한 마음은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감히’ 못한 것”이라고 털어놓는다.
“결혼하면 가장이 되고, 가장이 되면 바깥에서 부는 어떤 바람도 막아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고루한 생각인가요? 그런데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처지에 결혼은 꿈도 꿀 수 없었죠. 누추한 인생에 누구를 끌어들이겠어요? 그건 제 자신이 용납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대학시절 마음에 둔 과 후배가 있었지만 고백하지 못했다. 그의 나이가 적지 않은 터라 좋아한다는 고백은 곧 결혼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더더욱 그러지 못했다. 서른다섯 살이 되도록 연애 한 번 못해본 그가 요즘, 친구 아기 돌잔치에 초대받거나 나들이 나온 가족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 없다고 한다.
“괜찮은 직업도 갖게 되고, 생활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되니까 가정을 이루고 싶은 ‘욕심’이 조금씩은 생기네요.”
‘햇병아리 변호사’ 장승수가 변론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진실의 무게’다.
“제 자신이 ‘유죄’라고 판단하는데, 무죄라고 변론한다고 해서 진실이 숨겨질 수 있겠어요? 설령, 숨겨진다고 해도 그것은 진정으로 그 사람을 위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유죄’라고 생각하면 방향을 바꾼다. 죄는 인정하되, 형벌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그러기 위해선 올바르게 판단해야 하는데, 그는 의뢰인과의 사이에 신뢰가 쌓여야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뢰를 바탕으로 변호사와 의뢰인의 관계를 넘어 인간과 인간으로 만나면 결과도 좋은 쪽으로 나오죠. 지금 제가 맡고 있는 소송 중에도 그런 것이 있어요. 변호를 맡을 당시 의뢰인 스스로도 좋은 결과를 기대하지 못할 만큼 상황이 좋지 않은 소송이었는데, 재판이 진행되면서 차츰 저와 의뢰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어요. 이럴 때 변호사가 된 보람을 느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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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대학시절 그에게 시련이 찾아 왔다. 2학년인 1997년 가을, 폐결핵과 늑막염 진단을 받은 것. “사람의 정신과 육체는 쓰면 쓸수록 강해진다”며 단 하루도 쉬지 않았던 그의 건강에 빨간불이 켜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빨간불을 보고도 길을 건넜다. 잠시 쉬라는 주위 사람들의 충고를 뿌리친 채 계속 학교에 다닌 것이다. 그러다 11월 기말고사 기간 중에 며칠 밤을 새운 그는 마지막 시험을 보고 집에 와 정신을 잃었다. 병원에 실려가 입원을 했고, 보다못한 동생이 그를 대신해 휴학 신청을 했다.
입원 후 몸 상태는 점점 악화됐다. 의사로부터 “잘못하면 사망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폐가 너무 나빠져 숨을 제대로 쉴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다행히 상태가 호전됐고, 이듬해 5월 퇴원할 수 있었다. 퇴원한 뒤에도 계속 통원 치료를 받았고 겨울이 돼서야 비로소 완치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독한 결핵약을 오랫동안 복용한 탓에 체력이 많이 약해져 그로부터 2년 더 힘들게 생활했다.
인생을 가르쳐준 권투
그 와중에도 다시 책을 잡았다. “숨은 쉴 수 있게 됐으니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독하게 공부했으니 대학생활의 낭만이나 즐겼겠나 싶은데, 그가 환하게 웃는다.
“저를 잘 챙겨준 동기들 덕분에 MT도 가보고, 술도 마시고, 실연당한 친구들 위로도 해주고…. 대학생활에서 경험해볼 만한 것은 다 겪어봤어요. 동기들이 미팅 자리에도 꼭 데리고 나갔어요. 근데, 미팅 나온 여학생들이 처음엔 유명인이라고 관심을 갖다가 나중엔 자기 또래의 잘생긴 친구들에게 눈길을 주더라고요.(웃음)”
인터뷰 도중 그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는 그의 목소리에 반가움이 물씬 묻어났다. ‘체육관 사부’의 전화였다. 공부하는 틈틈이 대학생활을 즐기던 중에 그가 빠져든 게 또 하나 있었다. 권투였다.
“권투는 어릴 적부터 좋아한 운동이에요. 많이 맞으면 그 충격으로 하루 종일 앓아요. 정신적으로도 위축되고요. 그렇지만 제게 권투는 맞고 때리면서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매력적인 운동이에요. 권투를 통해 인생을 배우기도 했고요.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것을요.”
고교 시절 그는 권투선수를 꿈꿨다. 하지만 먹고 살기가 바빠 그럴 여유가 없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저서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가 베스트셀러가 된 덕분에 당장 먹고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형편이 되자 봉천동 집 근처 체육관을 찾았다. 뭐든지 한 번 시작하면 대충대충하는 게 없다는 그는 “권투도 한번 시작한 이상 제대로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사법시험 준비에만 매달려도 시간이 모자랄 판에 어떻게 권투까지 ‘제대로’ 할 수 있었을까.
“오전 9시부터 밤 12시까지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중간에 체육관에 다녀오곤 했어요. 시간을 아끼기 위해 학교 샤워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학교에서 체육관까지 2km 되는 거리를 뛰어갔어요. 그러면 따로 러닝 트레이닝을 할 필요가 없죠. 운동이 끝나면 다시 체육관에서 학교까지 뛰고, 공부를 끝내고 집에 갈 때도 뛰었어요.”
그렇게 열심히 한 덕분에 사법고시보다 권투 실력을 먼저 인정받았다. 2000년 프로복싱 슈퍼플라이급 테스트에 통과해 프로복서가 된 것. 2003년 말 사법시험에 합격하자 그는 이듬해 1월에 열리는 슈퍼플라이급 신인왕전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는 등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면서 운동을 제대로 하지 못한 데다 인대까지 다치는 바람에 신인왕전 출전을 포기했다. 지금은 한 달에 2~3번 체육관에 나가 몸을 푸는 정도로 만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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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두 번이나 돌아본 사건 현장은 그에게 ‘피의자는 여자친구를 강간한 것이 아니다’라는 확신을 심어줬다. 현장에 들어가고 나올 때 두 사람은 다정한 모습이었다. 그것을 본 목격자가 있었다. 더욱이 피해자는 옷을 가지런하게 입고 나왔고, 외상도 없었다.
그런데 정작 피의자와 피의자의 노부모가 그의 확신을 흔들어놓았다. “강간이 아님을 인정받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 같다. 일단 (혐의를) 인정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꿔 석방을 시켜놓은 뒤 재판에서 집행유예를 받는 쪽으로 추진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그 심정을 이해 못했던 건 아니에요. 피의자가 경찰서 유치장을 거쳐 구치소에 구속된 지 근 열흘이 지나 있었어요. 피의자는 좌절하고 있었죠. 더욱이 노부모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아들이 구속됐으니 어떻게든 석방부터 시켜놓고 싶었겠죠.”
“저는 변호사잖아요”
3월 중순, 마지막으로 피의자를 접견하고 돌아오는 길에 변호인으로서 변론의 방향을 결정해야 했다. 그 또한 의뢰인의 요구대로 혐의를 인정하고, 선처를 바랄까도 생각해봤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피의자가 너무 젊었다. 피의자의 나이 이제 겨우 스물일곱. 강간치상의 전과를 안고 살아가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나이였다. 구치소에서 사무실로 오는 동안 그의 머릿속은 몹시 혼란스러웠다.
“제가 스물여섯 살에 대학에 들어갔어요. 스물일곱 살 땐 한창 꿈을 꾸고 있었죠. 그렇게 자신의 꿈을 향해 전진해야 할 나이의 청년이 평생 전과자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살아가도록 내버려둘 순 없었어요. 저는 변호사잖아요.”
결국 그는 끝까지 무죄 주장을 포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동안 여러 차례 피의자와 피해자의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성관계에 관해 장시간에 걸쳐 피의자를 신문하며 얻은 확신이 뒷받침됐다. 사무실에 도착한 그는 서둘러 검사에게 제출할 변호인 의견서를 작성했다.
피의자에 대한 검찰의 1차 구속 만기일을 하루 앞둔 3월17일 금요일 오후가 되면서부터 그는 초조해졌다. 상담하러 온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마음이 콩밭에 가 있었다. 그런데 공무원 퇴근시간인 오후 6시가 다 되어도 피의자는 석방되지 않았다. 깊은 좌절감이 찾아들었다. 그런데 오후 7시경, 그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피의자의 부모에게서 온 전화였다. 그는 선뜻 전화를 받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휴대전화가 그렇게 무겁게 느껴질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수화기 너머로 ‘아이고 변호사님 고맙습니다’ 하는 들뜬 목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석방된 피의자에게서 마중 나오라는 전화가 왔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스물일곱 살 청년의 인생을 구했다는 생각에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죠.”
그는 “깊은 강물 속에 가라앉았던 마음이 수면으로 떠오르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고 털어놓는다.
“비록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피의자는 무려 16일 동안 구치소에 갇혀 있었어요. 그리고 그의 부모는 졸지에 ‘강간범의 가족’으로 몰려 이웃의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고요. 경찰은 피해자의 진술만을 근거로 피의자를 범인으로 단정하는 우를 범했고, 법원 또한 경찰의 주장이 사실과 다를 수 있음을 간과했어요.”
그는 또 “경찰과 법원으로서는 피해자의 진술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고,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평범한 시민에게 경찰과 법은 무시무시한 존재”라며 “그들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대학시절 찾아온 시련
장 변호사는 잘 알려진 대로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열 살 때 아버지를 여읜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공사장 막노동, 택시 운전, 가스통 배달, 식당 물수건 배달 등 온갖 잡다한 일을 하면서 가족(어머니와 남동생)의 생계를 이어야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그는 이렇게 살면 가난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공부를 시작했고, 고교 졸업 6년 만에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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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도 기억 안 나는 ‘첫경험’
● “스물일곱 청년을 평생 강간범 누명 쓰고 살게 할 순 없었죠”
● “무시무시한 경찰과 법원, 범죄자 몰린 소시민의 두려움 보듬어야”
● 대학시절 겪은 죽을 고비, 사법고시 연달아 낙방
● 연애 한 번 못한 서른다섯 총각, “괜찮은 직업 가지니 결혼 욕심나요”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의 저자로 잘 알려진 장승수(張承守·35)씨. 막노동판을 전전하다 1996년 서울대 인문계열 전체수석을 차지하며 법학과에 입학해 화제를 모은 그는 2003년 사법시험(45회)에 최종 합격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장씨는 지난 2월 사법시험 동기와 함께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햇살이 유난히 따사롭던 날, 그의 서초동 사무실을 찾았다. 두꺼운 법서를 보고 있던 그가 환하게 웃으며 일어서는데, 타이를 매지 않은 살짝 구겨진 하얀 와이셔츠가 눈에 띄었다. 변호사가 된 지 3개월째, 그 사이 사건 하나를 해결하고 20여 건의 소송을 진행 중이다. 그는 “경력과 사무실 규모에 비해 너무 많은 사건을 맡아 정신이 없다”며 멋쩍어 했다.
그의 ‘첫경험’이 궁금했다. 처음 법정에 선 ‘변호사 장승수’의 모습은 어땠을까.
“(사법연수원 시절) 실무 경험을 충분히 쌓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법정에 서니 몹시 떨렸어요. 더욱이 상대편에서 내세운 증인을 상대로 반대 신문을 해야 했던 터라 더욱 긴장했죠. 재판이 끝나고 나서는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했는지 생각이 나질 않더군요. 주위 사람들 얘기로는 잘했대요(웃음).”
‘유죄는 아니다’ 직감
그가 맡은 사건들의 면면이 궁금했는데, “대부분 소송이 진행 중이어서…”라며 말하기를 꺼렸다. 유일하게 결론이 난 사건에 대해서만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이른바 ‘초짜 변호사의 강간치상 피의자 무죄 변론기’다.
지난 3월1일, 그는 혼자 사무실에 나와 일을 하고 있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선배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건 오후 3시 무렵. 선배는 뭔가 아주 어려운 이야기를 하려는 듯 머뭇거리던 끝에 조카가 강간치상 혐의로 입건돼 있다며 도와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날 오후에 당장 피의자와 피의자의 노부모를 만났다. 불구속 입건된 피의자에겐 검찰의 구속영장이 청구된 상태였다. 피의자의 부모를 다른 방에 모셔놓고, 피의자로부터 2시간 가량 사건의 전말을 들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피의자 A에겐 1년 이상 교제해온 여자친구가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여자친구가 헤어지자고 했다. A는 헤어지기를 원치 않았다. 두 사람은 며칠간 옥신각신했다. 사건이 일어난 날도 A는 여자친구를 설득해보려고 만났다. 그러는 과정에서 성관계를 가졌는데, 헤어진 뒤 여자친구가 A를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
피의자 A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난 뒤 그는 직감적으로 ‘유죄는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사귀었고, 그 사이 성관계도 여러 번 가졌다. 게다가 피의자는 지금껏 단 한 번도 경찰서에 드나든 적 없는 순박한 청년이다.’ 그는 “여전히 여자친구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피의자의 눈에서 진심을 읽었다”고 말한다.
이튿날인 3월2일 오전 10시, 그는 수원지법 성남지원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에 참석해 피의자의 무죄를 호소했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날 오후 피의자는 전격 구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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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한국·일본에서 1000만부 팔려


작가 시오노 나나미에게 ‘로마인 이야기(신초사(新潮社))’는 준비에만 20년, 집필에 다시 15년이 걸린 평생의 작업이다. 1992년 제1권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를 시작으로 매년 1권씩 출간해 지난해 말 제15권 ‘로마시대의 종언’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일본에서는 단행본과 문고본을 합쳐 누계 770여 만부가 팔렸다. 매년 12월 중순경 책이 나와 유명인사나 지식인층이 연말연시 휴가 때 읽는 도서목록에 반드시 끼곤 했다. 한국에서는 1995년 한길사가 번역판 제1권을 낸 뒤 지난 2월 제15권을 발간했고 판매 누계 250만부를 기록한 스테디셀러다. 특히 기업인, 정치인에게는 탁월한 경영도서로 주목을 받았다.
지력, 체력, 경제력, 기술력 모든 면에서 주변 민족보다 열세에 있던 로마가 지중해 전역을 제패하고 중근동,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대제국을 1000년 넘게 경영한 비결이 도대체 무엇인가. 작가는 이 한 가지 주제를 기원전 753년 전설의 로물루스가 로마를 세운 때부터 서기 476년 서로마제국 멸망에 이르는 시기를 1∼5권 ‘융성기’, 6∼10권 ‘안정기’, 11∼15권 ‘쇠퇴에서 멸망’의 세 단계로 나눠 추적했다.
‘로마인 이야기’는 철저한 고증과 사료에 바탕을 두되 사료가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은 상상력으로 보충하지만 허구에 빠지지 않는 작가의 독특한 글쓰기 스타일로도 유명하다.
1937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시오노씨는 고교 시절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읽고 지중해 세계에 빠져들어 라틴어를 독학으로 공부할 정도로 ‘별난 소녀’였다. 대학시절에는 학생운동에도 참여했으나 마키아벨리에 심취하면서 회의를 느꼈다. 1963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서양문명의 모태인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의 역사 현장을 찾아다녔다.
데뷔작은 1968년 일본에 귀국해 주오고론(中央公論)사에서 발표한 ‘르네상스의 여인들’. 그러나 세상의 인정을 받은 것은 1970년의 첫 장편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이다. 마키아벨리 ‘군주론’의 모델인 체사레 보르자의 일대기를 그린 이 책으로 마이니치(每日) 출판문화상을 받았다.
그해 다시 이탈리아로 건너가 이탈리아 의사와 결혼해 피렌체에 정착했다. 이후 독학으로 이탈리아 역사를 공부하며 다양한 저서를 쏟아냈다.

▼ 시오노씨는 정치를 해도 잘했을 것 같습니다.
“그럴 생각이 있었으면, 잘했을지도 모르죠. 인간이란 뭐라도 하겠다는 생각이 있으면 해낼 수 있습니다. 아들은 ‘엄마가 정치를 하면 외교 문제를 일으킬 거다. 하고 싶은 대로 말해버리니까’라고 하더군요(웃음). 다만 유권자 앞에서 표 달라고 고개 숙이는 게 체질에 안 맞습니다. 하긴 그것도 혹 정치를 했더라면, 효과적인 방법을 생각해냈을지도 모르죠. 속된 말로 ‘어떻게 하면 나를 가장 비싸게 팔까’하는 방법을 생각해내는 거지요. 하지만 제겐 이제 시간이 없습니다.”

“난 철저한 아웃사이더”
▼ 사회지도층 가운데 시오노씨를 만나려는 사람이 많은 걸로 압니다. 자리 제안도 많았다는 소문이고….
“시간이 없으니 VIP들과의 만남을 자제하려고 합니다. 그들과 만나고 나면 잠시 나도 함께 고양된 듯한 기분이 들곤 합니다만, 제 작업하고는 별로 관계가 없지요. 개인적으로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 아니면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거절의 방법이 늘 고민입니다. 지금까지 일본에서 제게 뭔가를 제안해오는 사람은 대개 제 책의 독자였습니다. 그럴 때 정해놓고 거절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장관이나 기관장은 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사람,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지만 고대 로마의 역사를 15년에 걸쳐 쓰려는 바보는 저밖에 없다’는 거죠. 그러면 대충 납득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지난 15년간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에고이스트로 지내왔습니다. 이제 그 핑계를 댈 수 없으니 다른 거절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 앞으로의 계획은.
“올해는 15년분의 휴가를 쓰려고 합니다.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자신의 가능성을 조금씩 지워 나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낙관적으로 봐도 내가 작가 생활을 할 수 있는 기간은 10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올 한 해엔 그 10년간 무엇을 할지 생각해보려 합니다. 20~30년 전이라면 나도 정치를 하라는 제안에 응했을 것 같습니다. 남은 시간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또 하나, 메이저리그 진출을 준비 중입니다.”
▼ 무슨 뜻입니까.
“‘메이저리그 진출’은 오쿠다 히로시(奧田碩) 도요타자동차 고문의 표현입니다. ‘로마인 이야기’ 영역(英譯)을 준비 중이라고 했더니 그렇게 표현하더군요. 믿을 만한 번역이 되도록 자비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번역은 변호사와 학자 두 사람에게 맡겼지만 감수는 영국인 교수 한 사람에게 받습니다. 도쿄에 집을 사려고 모아둔 돈을 그리로 돌렸죠. 전 ‘로마인 이야기’를 특정 국가가 아닌 인간을 위해서 썼고, 좀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동양인이 일본어로 쓴 서양사를 서양에 수출하겠다는 것이니, 일본의 자동차 수출이나 야구선수의 메이저리그 진출과 닮은 것 아니겠습니까.”
▼ 작가의 작업은 대개 철저히 혼자 진행됩니다. 외롭지는 않았습니까.
“난 철저한 아웃사이더입니다. 학교에 적을 둔 것도 아니고, 일본이 아닌 외국에서 살며, 그것도 역사소설을, 그것도 로마사를 쓰는 것은 몇 중의 아웃사이더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일본에 오면 작가라고 하지만 사실 이탈리아에 가면 보통사람이지요.”

“도쿄대 교수들이 나를 싫어해”
▼ ‘시오노식 역사서술’에 대해 학계에서는 반발도 꽤 있다던데요.
“이탈리아 주재 일본대사관에서 ‘내일 도쿄에서 유명대 교수들이 온다’며 만찬에 와달라는 연락을 받았다가 곧 그 교수들이 저와 동석하기 싫다고 했다는 연락을 받거나, 마키아벨리 전집에 발문을 써달라고 연락이 왔는데, 좀 지나니 번역자가 시오노의 발문은 싫다고 했다는 얘길 들을 때 어땠겠습니까. 그런 일은 수시로 일어났습니다.”
▼ 그런 때 어떻게 했습니까.
“속으로 두고보자고 생각했지요. 그들보다 더 큰 성과를 내면 된다고. 많은 독자가 제 책을 읽고 그 내용을 기반으로 로마사를 본다는 것 자체가 성과 아니겠습니까. 학생들이 그 교수들이 정리한 책이 아니라 제 책을 읽고 교수들에게 질문을 합니다. 역사학 교수들에게는 ‘평생 월급 받으며 뭘 했냐’고 묻고 싶지요.”
그는 말 그대로 홀로 싸우는 전사(戰士) 같았다. 그가 쓴 역사 속에서도 항상 승부에 나서는 사람들을 좋아했고 그들을 살려내려 애썼듯이, 그 스스로도 나름의 승부처를 정하고 모든 것을 ‘올인’했다.
“승부에는 총리가 정치생명을 걸고 나선 것도 있고 회사원이 나선 것도 있습니다. 결코 화려한 것이 아닙니다. 보통 사람도 각자 나름대로 승부를 걸고 있는 것 아닙니까. 작가 일이란 것도 어느 지점에 가면 결단력이 중요해집니다. 정하고 나면 가야 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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