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하게 굳어 있던 북한 관객들은 공연 후반부로 갈수록 긴장을 풀고 호응했다.

조용필은 ‘돌아와요 부산항에’ 이후 정규 앨범을 22장 냈다. 기획 앨범이나 라이브 앨범은 훨씬 많다. 그가 취입한 노래는 210곡 가량. 앨범은 지금까지 1500만장 가량 팔렸다.
-인터넷 시대에 불법 다운로드가 많아 이제 음반이 옛날같이 안 팔리죠.
“우리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음반시장이 거의 죽었다고 봐야죠.”
-그걸 뚫고 나갈 방법이 없을까요.
“방법이 없어요. 힘듭니다. 지금은 젊은 음악 팬들이 앨범 단위로 사지 않고 곡 단위로 구입합니다. 자기가 안 좋아하는 곡이 든 앨범은 살 필요가 없다는 거죠. 기념으로 앨범을 사는 사람도 있지만 그 숫자는 많지 않아요. 500원이나 1000원씩 내고 여러 곡을 다운로드해 자기 나름대로 편집해서 각자의 앨범을 만드는 거죠. 우리나라처럼 컴퓨터와 인터넷이 발달한 나라에서는 그런 현상이 첨단을 걸어요. 불법 다운로드도 많고요. 신문에 얼마 팔렸다고 기사가 나오지만 그건 믿을 수 없죠, 홍보 차원의 숫자니까.”
-1990년대를 거치면서 노래가 방송용에서 무대용으로 발전했다는 평가가 있더군요.
“1980년대까지는 TV에 의존했지만 1990년대 들어서서 무대로 옮겨갔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공연문화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낮았지요. 공연 가수로 성공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가수가 롱런 하려면 무대에서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나만의 철학이 있었죠. 그런 이유로 방송을 기피했어요.
처음엔 힘들었죠. TV에 나오던 사람이 갑자기 그만두면 어떤 현상이 나타나겠습니까. 조용필 시대가 막을 내렸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당연하죠. 늘 보던 사람이 안 나오니까. 가끔이라도 나오면 새롭게 부각될 수도 있겠지만 늘 나오던 사람이 전혀 안 나오니 일단 대중한테서 점점 멀어져간다는 두려움이 생겼죠.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무대로 갔습니다. 잘못 되면 지금까지 해온 게 다 허물어지는 거죠. 그걸 극복하는 데 3년 정도 걸렸어요. TV 출연을 중단하고 나서 지방에 가면 때로 손님이 반밖에 안 오는 때도 있었죠.”
-TV 금단(禁斷)현상이었군요.
“그런 경우겠죠. 지금은 TV에 안 나오니 공연장으로 가야 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제 공연장에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이 몰립니다.”
조용필은 낯가림이 심해 처음 보는 사람과는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원고지를 100매 이상 메워야 하는 인터뷰인데도 답변을 길게 하는 경우가 적었다. 그리고 말투도 약간 어눌했다. 답변을 쥐어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조용필은 인터뷰 중간에 껌을 꺼내 씹었다. 담배를 끊은 지 얼마 안 돼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다. SBS에서 방영한 평양 공연 다큐멘터리에서도 조용필이 공연 관계자들과 회의를 하면서 껌을 씹는 모습이 나왔다. 나름대로 긴장을 푸는 방법인 것 같기도 했다.
인터뷰어를 조금 만만하게 보고 편안하게 이야기해보라는 뜻에서 “제가 음악을 잘 몰라 가끔 무식한 질문을 해도 이해해주세요”라고 말했다. 조용필은 “하도 그런 경우가 많아서 괜찮아요”라고 받았다.
55kg의 ‘작은 거인’
-립싱크 가수들은 기계가 노래를 대신 해주고 춤만 춥니다. 비디오용 가수죠. 그런 현상이 마음에 드나요.
“노래 기계가 너무 발달했어요. 사람이 할 일을 기계가 하는 거죠. 그러기 때문에 자꾸 기계한테 의존하는 시대가 됐어요. 이러다가는 로봇 가수도 나오겠어요. 아무렇게나 불러도 기계를 거치면 완벽한 음이 되거든요.”
-저 같은 음치가 노래해도 그럴까요.
“가수처럼 될 수 있어요. 듣기와 보기의 비중이 옛날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댄싱도 잘해야 인기를 얻죠. 이게 시대의 흐름이라고 봐요. 꼭 나쁘게만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대중의 인기를 얻는 것은 그 사람한테 매력이 있기 때문이죠.”
-무대엔 몇 살까지 설 작정입니까.
“그건 정말 몰라요. 언젠간 스스로 결정해야죠. 이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그만둬야지….”
-체력이 중요합니까.
“물론이죠. 체력이 달리면 일단 그만둬야 해요. 체력이 안 되면 보는 사람들이 실망하죠. 청중이 ‘아, 저 사람도 이제 안 되는구나’ 하고 생각할 때쯤 관둬야죠.”
조용필은 하루 두 갑씩 피던 담배를 끊었다. 고등학교 때 피기 시작한 담배를 끊자면 고통이 심할 것이다. 체중이 너무 줄어 살을 찌울 요량으로 금연했다고 말했다.
“담배 끊은 지 5개월 돼 가는데 5kg 늘었어요.”
현재 몸무게가 얼마나 되냐고 묻자 “그건 좀 그래요” 하며 대답하지 않았다. ‘동아일보’ 허엽 위크엔드 팀장한테 들은 대로 55kg이냐고 묻자 “맞습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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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달러라고 하면 거기서는 큰돈이거든요. 글쎄 나도 보도를 보고 이게 어느 쪽에서 나온 이야기인지 궁금했어요. 아마 사실이니까 나왔겠죠. 아무튼 거기서는 제 공연에 관해 물어볼 겨를이 없었어요. 도착하자마자 환영 만찬이다 뭐다 해서 끌려다니느라 바빴어요. 3박4일 동안 공연 준비하고 공연 끝나고 나서는 인터뷰하고, 일정이 빡빡했어요.”
올해는 가수 인생 37년째인 조용필에게 여러모로 의미 있는 해다. 광복 60년, 대중문화 60년을 기념하는 각종 행사에서 최고 노래(‘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른 최고 가수로 선정됐다.
기지촌과 나이트클럽을 전전하던 무명가수 조용필은 1972년 아세아레코드에서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들어간 첫 음반을 냈으나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이 음반은 4년 동안이나 죽어 있었다. 1976년 조총련 모국 방문단의 한국 방문이 시작되면서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부산에서부터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 삽시간에 국민가요가 됐다. 그해 이 노래는 가요차트 1위, 방송횟수 1위를 기록하며 무명의 가수를 스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각고 끝에 찾아온 희열의 순간은 길지 않았다. 다음해 조용필은 대마초 스캔들에 휘말렸다. 그리고 정부가 작성한 방송 금지가수 명단에 포함됐다.
1970년대 살벌한 유신 치하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은 외아들이 연예인들과 어울려 대마초를 피운 사실을 알고 나서 격노했다. 전면적인 대마초 사범 검거령이 내려졌다.
조용필은 용주골 기지촌에서 공연할 때 미군 병사의 권유로 대마초를 몇 차례 피워본 일이 있다. 대마초 연예인에 대한 단속 열풍이 계속되면서 조용필은 남산(중앙정보부) 마약반에 불려가 “1969년에 대마초를 피운 일이 있다”고 자백하고 벌금을 내고 풀려났다. 이것이 문제가 돼 방송에도 못 나가고 나중엔 무대에도 설 수 없었다. 그 시대엔 가혹한 이중처벌이 당연시됐다.
그는 대마초 이야기를 꺼내자 “과거 이야기는 재미없다”며 말하길 꺼렸다.
“사실 그때 생각이 잘 안 나요. 저는 어떤 생활철학이 있어요. 과거는 과거대로 묻어둬야 한다는 거죠. 과거가 나한테 하나도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미래가 더 중요한 법이지요. 또 오늘이 중요하고요. 남들이 제게 그때 얼마나 고생했냐고 곧잘 묻지만 전 고생했다고 생각지 않아요.
냉정하게 돌이켜보면 큰 꿈이 무너진 거죠. 그렇지만 현실을 빨리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제부터 내가 헤쳐나가야 된다기보다는 이제부터 새로운 걸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음악 연주도 하고, 다른 것도 하고…. 그런 일들은 지나간 추억에 불과하죠.”
방송과 무대 출연이 금지된 조용필은 좌절하지 않고 판소리와 남도창을 배우고 독자적인 창작 활동을 계속했다.
“제 목소리가 미성(美聲)이라서 좀 허스키한 탁성(濁聲)으로 바꿔봤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어요. 미성으로는 다양한 노래를 할 수 없어요. 탁성은 가능하죠. 판소리는 전부 탁성이잖아요. 어느 날 TV에서 조상현씨의 판소리 공연을 보다 ‘저걸 해보자’는 생각이 들어 ‘흥보전’ ‘심청전’ 판소리 레코드판을 샀어요. 사서 그대로 흉내내본 겁니다. 흥부가 놀부에게 가서 구걸하는 대목이 마음에 들어 100번 이상 불러봤죠. 제가 국악을 하려 했던 건 아니고, 목소리에 변화를 주려는 시도였죠. 도움이 됐어요. 판소리에서 남도창과 서도 민요로 발전했죠. 그러다 ‘한오백년’도 부른 거죠.”
이 나라를 18년 동안 무소불위로 통치했던 박 대통령의 시대는 궁정동의 총성과 함께 막을 내렸다. 박 대통령이 죽고 한 달여가 지난 1979년 12월 대마초 연예인이 해금(解禁)됐다. 동아방송 안평선 프로듀서가 막 풀려난 조용필에게 ‘창밖의 여자’라는 라디오 드라마의 주제가 작곡과 노래를 부탁했다. 1960∼70년대에는 라디오 드라마가 인기를 끌어 주제가가 히트곡이 된 경우가 많았다.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도 라디오 연속극 주제가다.
조용필 시대의 탄생
‘창밖의 여자’는 당시 유행가의 틀을 깨는 파격적인 멜로디의 노래였다. 여기에 심금을 울리는 절절한 가창이 어우러지면서 듣는 이의 감정을 고조시켰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에서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창밖의 여자’는 조용필 시대의 탄생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안평선 프로듀서는 노래를 듣는 순간 전율이 느껴지며 ‘이건 된다’는 직감이 스쳤다고 뒷날 술회했다.
1980년 3월 정식 앨범으로 나온 이 노래는 국내 최초로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소득수준이나 물가와 비교할 때 대중음악 사상 최고의 대박이었다. 지구레코드사는 그에게 100만장 발매 기념 골드 디스크를 만들어줬다.
“미국 암펙스가 ‘골든 릴’을 주었어요. 세계 각국에서 인구 대비 최다 판매 음반에 주는 상이었죠. 제가 스케줄 때문에 미국에 가지 못해 미국대사관에 가서 받았죠.”
필자가 ‘그 노래가 그 시대에 그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냐’고 묻자 조용필은 “그때 뭐 여러 가지 기사가 안 나왔나요?”라고 반문했다. 수없이 나온 이야기를 인터뷰 때마다 반복하자면 조금 짜증이 날 것이다. 필자도 ‘창밖의 여자’ 스토리를 사전에 공부하고 갔지만 그의 일생에서 매우 중요한 노래이기 때문에 지금 이 시점의 견해를 들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았다.
“음악의 변화였죠. 멜로디와 가사의 변화, 또 소리의 변화를 담은 노래였죠. 1980년대 들어와 제가 만든 곡의 소리, 멜로디, 가사 그리고 악기음이 1970년대의 노래와는 달랐던 거죠. 젊은 학생들이 새로운 음악과 새로운 장르를 경험하는 기분이 들어 좋아하게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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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장소를 놓고 남북의 의견이 달랐습니다. 올해 초 ‘필 앤드 피스(Pil and Peace)’라는 주제로 전국 월드컵경기장 순회공연을 시작할 때 ‘제주에서 평양까지’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저는 ‘필 앤드 피스’의 연장선상에서 콘서트를 하고 싶었습니다. 북쪽은 더 좋은 음질을 들을 수 있는 극장에서 하자고 주장했지요. 봉화예술극장은 2000석 규모입니다. 우리가 ‘필 앤드 피스’는 대규모 공연이라 극장 안에 넣을 수 없다고 설명했지요. 처음엔 3만명 이상 들어가는 체육관으로 정했는데 시설 문제가 생겼죠. 결국 7000석 규모의 정주영체육관으로 낙착됐죠. 새로 지었고 평양에서 제일 좋다고 하더군요.”
이미자의 공연은 2500석 규모의 동평양대극장에서 열렸는데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용순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위원장 같은 북한 고위 인사가 참석했다. 조선중앙TV를 통해 북한 전역에 녹화 방송됐다. 조용필의 공연은 사전 약속과 달리 아직까지 중계되지 않고 있다.
-저같이 공연을 자주 안 보는 남쪽 사람이 보기에도 무대가 화려했어요. 북쪽 사람들한테는 강렬한 문화충격을 줬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노래도 트로트풍의 이미자·김연자씨와는 분명히 다른 면이 있었을 겁니다.
“북쪽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더랍니다. 아무래도 그런 공연은 처음일 테니까요. 무대 테크닉도 생소했을 테고. 심지어 남쪽 사람들조차 평양 공연을 TV로 보고 ‘조용필이 저렇게 요란하게 공연하는구나’ 하고 알게 된 사람이 많다고 들었어요. 평양에 따라온 기자들 중에도 이런 공연은 처음 봤다는 사람이 있었어요. 평양 시민에겐 엄청난 충격이겠지요. 우리 일행이 북쪽 사람들과 같이 식사하면서 ‘공연이 어땠냐’고 물어보니까 얘기를 안 하더래요. 한참 있다 되묻더래요. ‘선생은 어땠습니까?’ 그래서 ‘감동적이었다’고 하니까 북쪽 사람이 ‘우리는 세 배라고 생각하면 됩네다’ 하고 얘기하더래요. 감동을 감추고 있었던 거죠.”
“통일의 시간을 앞당겼다”
-공연 다음날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만났을 땐 뭐라던가요.
“그분은 공연장에는 나오지 않았어요. 김영남 위원장이 ‘이번 공연에 대해 평양 시민 모두 기대가 컸고 훌륭한 공연이었다’고 치하하더군요. ‘통일의 시간을 앞당겼다. 통일 역사에서 한 페이지를 크게 장식했다’고 말했어요.”
-공식적인 말 외에 음악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습니까.
“김정일 위원장이 음악을 좋아한다고 말했습니다.”
조용필 공연을 조선중앙TV 카메라 5대가 촬영했는데, 김 위원장이 생중계로 공연을 본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물론 북한의 실정상 확인할 수는 없었다.
-평양은 ‘북한의 진열장’이라고 하지요. 3박4일 동안 북한의 수도를 살펴보면서 어떤 느낌을 받았습니까.
“아무래도 생활수준이라든가, 이런 것은 우리에 비해…. 우리가 버스 타고 돌아다녔는데, 평양엔 차가 많지 않으니 다들 걸어서 다녔죠. 3년 전에 와봤다는 분이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고 하더군요.”
-좋아졌다는 뜻일까요.
“네. 저는 뭐가 좋아졌는지 모르죠. 아무튼 자유롭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거기 사람들이 긴장해서 살고 있으리라는 선입관이 있잖아요.”
-백두산 공연을 한다는 기사가 나오던데요.
“언젠가 한번 했으면 좋겠다는 거지요. 북쪽이 이번 공연의 결과를 어떻게 평가할까요? 진정으로 통일의 길을 앞당겼다고 생각할지, 아니면 북한 주민에게 문화적 충격이나 상처를 줬다고 생각할 수도 있단 말이죠. 미묘한 면이 있어요.
우리를 초청한 단체의 사람들은 남한을 여러 번 왔다 간 사람들입니다. 그분들은 남북간 문화와 정서의 차이를 잘 알아요. 한국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는 분들도 있었어요. 조용필이란 사람은 북쪽으로 치면 굉장한 인민배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제 노래를 몇 곡 부를 줄 아는 주민이 많았죠. 문화적 충격이라고 하면 우리가 과대평가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공연 보고 나서 북쪽 사람들은 다르게 느꼈을 겁니다.
북한에도 유명한 예술적 창작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아리랑축전이라든가 카드섹션 같은 것은 엄청난 규모이고 예술성이 뛰어나다는군요. 물론 무대 테크닉은 다르겠지요. 우리는 영상이나 첨단 악기를 가지고 하기 때문에. 북쪽 사람들이 야외 공연을 한번 더 봤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30달러에 암표 거래
-북한 사람들이 한국 가수들의 노래를 부르고 드라마도 본다고 하는데, 폐쇄 사회에서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모르겠어요.
“중국을 통해 들어간다고 합니다. SBS가 이번에 평양 공연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 탈북자를 인터뷰했지요. 그 탈북자가 제 노래를 이불 뒤집어쓰고 라디오를 통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가 평양 주민은 제 얼굴은 모르더라도 이름과 노래는 많이 알 거라고 말해줬습니다.”
SBS가 어떤 경로를 통해 확인했는지는 모르지만 조용필의 북한 공연은 미화 30달러에 암표가 거래됐다고 한다. 남한의 3만원에 상당한다. 북한에선 노동자 1년 봉급에 해당하는 거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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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과거는 과거대로 묻어둬야 한다는 게 생활철학
● 가수가 롱런 하려면 TV보다 무대에서 승부 걸어야
● 교과서에 실린 ‘친구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 뮤지컬 하려는 이유? 대중이 변하는데 음악이 그대로면 안 되니까…
● 아내 잃은 상처, 좀체 아물지 않아
● 음악·소리·영상·무대 아우른 종합예술연구소 건립이 꿈





너비 50여m의 대형 스크린에서 거대한 우주의 형상을 객석으로 쏘아 보낸다. 우주에서 지구로, 다시 한반도로 좁혀오는 영상을 배경으로 금빛 재킷을 걸친 조용필(趙容弼·55)이 리프트를 타고 올라오며 ‘태양의 눈’을 부르기 시작한다.

‘어두운 도시에는 아픔이 떠 있고,
진실의 눈 속에는 고통이 있고,
답답한 내 가슴에 간절한 소망….’

화려한 조명이 터지고 레이저 광선이 어둠을 갈랐다. 애니메이션이 투사된 장막을 뚫고 나와 노래하는 조용필은 화려한 의상을 숨 가쁘게 갈아입었다. 5인조 밴드 ‘위대한 탄생’의 열광적인 연주, 백 코러스의 화음, 솟아오르는 연기, 객석 위에 흩날리는 색종이….
그러나 관객은 무대가 아무리 요동쳐도 인형처럼 앉아 있다 노래가 끝나면 조용히 박수를 쳤다. 관객의 복장은 남성은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 차림, 여성은 빛깔만 달랐지 한복 일색이었다. 원색의 치마저고리가 객석을 화사하게 수놓았다.
조용필의 공연은 평양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북한 관객의 태도는 예의바른 유치원생들 같았지만 카메라를 통해 클로즈업된 얼굴에는 조용필과 무대에 빨려든 표정이 역력했다.
조용한 북한 관객
서울 강남 YPC 프로덕션 사무실에서 평양 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작은 거인’을 만났다. YPC는 ‘용필 조’의 영문 이니셜. 보라색렌즈 안경을 쓴 조용필은 청색 재킷에 노란색 계열의 면바지 차림이었다. 머리숱이 짙고 흰머리가 한 올도 눈에 띄지 않았다. 사진을 찍을 때 “염색하셨나요?” 하고 가볍게 물었으나 대답이 없어 묻는 사람이 조금 머쓱해졌다. 나중에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알게 됐지만, 그는 과거사와 프라이버시에 관한 질문을 좋아하지 않았다.
-TV로 평양 공연을 보았습니다. 북한 관중은 노래 도중엔 아무 반응이 없다가 노래가 끝나면 얌전히 박수를 치더군요. 나중에 북한에서 ‘박수를 세게 쳐도 안 되고, 그렇다고 성의 없이 쳐도 안 된다’는 사전 교육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관중이 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에 당황하지 않았나요.
“긴장했죠. 사람끼리 만났을 때도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건넸는데 상대방이 무뚝뚝하게 나오면 무안하고 어색하잖아요. 익숙지 않은 광경이라 곤혹스러웠죠. 그쪽의 문화적 정서 같아요. 북한 분들이 노래를 중간에 따라 부른다든지, 박수를 치는 것은 관객의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더군요. 북한 당국자들이 사전에 그런 이야기를 해줬지만 막상 무대에 올라 조용한 관객을 바라보자니 난감했죠.”
-공연 전반부에 북한 노래를 불러 분위기를 띄웠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전략적으로 북한 노래를 먼저 넣자는 얘기가 있었지만 저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연출상 점점 더 올라가는 것이 좋지, 처음에 푹 올라갔다 떨어지는 것은 안 좋아요.”
-북한 노래를 100곡가량 들어보고 두 곡을 골랐다면서요. 북한 가요를 들어보면 군가나 새마을 노래 같은 느낌이 들어요.
“거기 음악은 민요적인 게 많아요. 보천보 악단이 잘해요. 제가 고른 ‘자장자장’과 ‘험한 풍파 넘어 다시 만나리’는 둘 다 가곡이죠. ‘험한 풍파…’는 나중에 알고 보니 영화 주제가였더군요. 우리가 오랜 기간 갈라져 있는 분단 민족인데 이번에 만나서 동심(童心)의 세계로 가보자는 취지에서 자장가를 불렀죠. ‘험한 파도…’는 멜로디도 익숙하고 가사가 이산가족 찾기 주제가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공연 마지막에는 관중의 기립박수와 함께 ‘재청(앙코르)’이 나왔다. 조용필이 무대에 다시 나와 ‘홀로 아리랑’을 부르자 관중은 그때서야 따라 부르며 손뼉을 쳤다. ‘홀로 아리랑’은 환영 만찬에서 북한측 인사들의 간곡한 요청을 받고 조용필이 북한에서 급하게 연습한 남쪽 민요. 북한 관객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홀로 아리랑’을 따라 불렀다.
조용필이 공연한 ‘유경 정주영체육관’은 보통강변에 자리잡고 있다. 현대아산이 지은 건물이다. 필자도 평양에 갔을 때 본 적이 있다. 외관이 아름다운 체육관이다. 보통강변에는 버드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유경(柳京)이라는 평양의 이명(異名)도 버드나무에서 유래했다. 평양에서 남한 가수의 단독 콘서트가 열린 것은 2002년 이미자씨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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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은 안으로 굽는다”
그는 왜 판사나 검사가 아닌 변호사를 택했을까.
“법이라는 것, 규범이라는 것은 학습으로 익히는 것들이에요. 그런데 그런 교육을 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공평’하기 위해 그들에게도 똑같이 법을 적용하는 건 ‘불공평’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사람들을 위해 변호사가 되고 싶었어요.”
또 한 가지 이유는 자유롭기 위해서다. 사법연수원을 수료하자마자 그와 마찬가지인 신참 변호사와 함께 사무실을 연 것도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성실한 변호사, 용기 있는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지극히 평범한 바람을 털어놓았다.
“경찰이나 검사, 판사 앞에서 피의자는 너무나 무력해져요. 경찰과 검찰, 법원은 평범한 시민들에게 무시무시한 존재죠. 그들로부터 범인으로 몰리면 평범한 시민이면 누구라도 깊은 좌절감에 빠지고, 자신의 억울함을 인정받기는 어렵다는 자포자기 심정이 되고 말아요. 그렇다면 누군가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피의자 편이 돼줘야 하지 않을까요? 진실은 누구도 알 수 없는 거잖아요. 쉽게 단정하는 쪽이 있다면 누군가는 반대쪽에서 그 단정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바로 변호사가 할 일이죠. 그런데 변호사도 한 개인에 불과한지라, 여럿이 ‘합동작전’으로 나오는 수사기관에 맞서는 것이 쉽지는 않아요. 그들의 무게에 밀려 소극적으로 변호하거나 쉽게 타협점을 찾고 싶을 때도 있어요. 그럴 때마다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타협하지 않는 변호사가 되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죠.”
장 변호사는 또 그 자신이 사회의 음지(陰地)에 있어 보았기에 팔이 안으로 굽는 것처럼 사회의 약자 쪽으로 마음이 움직인다며 그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지난날의 힘들고 어려웠던 경험이 지금 제게 소중한 자원이 돼요. 요즘 사법시험 합격자들의 면면을 보면 성장 과정부터 기득권을 누려온 경우가 많아요. 적어도 저는 가난한 삶을 체험해본 만큼 약자의 삶을 이해하는, 균형감각을 지닌 변호사가 되고 싶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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