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나의 ‘파트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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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한 달 전인 2004년 5월30일 생신을 맞아 가족들과 찍은 사진.
신혼 시절인 데다 공무원 생활을 갓 시작하면서 겪은 이 사건은 당시로서는 무척 힘든 경험이었지만 동시에 좋은 약이 되었던 것 같다. 정치와 행정의 야합(野合)에 대한 저항력도 생겼고, 어려운 시기를 참고 넘기는 저력도 키웠다. 무엇보다도 공직자로서 인맥이 아니라 일로 승부를 내겠다는 자세를 익힌 기회가 되었다.
권위주의 시대의 정치상황에서 야당 정치가인 아버지와 행정가인 아들의 입지는 운명적으로 교차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아버지는 6대 국회의원 4년 임기를 마친 후 정치인의 뜻을 접으시고 다시 철학자의 자리로 돌아오셨다. 반면 나는 본격적으로 전문행정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때부터 아버지는 나의 공직생활이 당신의 뜻을 펼치는 또 다른 방편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내가 공직에 나아갈 때마다 친인척들에게는 청탁 금지령을 내리고, 항상 기성 정책의 건전한 비판자, 민심의 전달자 역할을 자임하시며 내가 관료적인 타성에 젖지 않도록 엄한 감독의 눈길을 보내셨다. 또 내가 공직에서 물러나 있을 때에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셨다. 나와 아버지 사이에 무언의 파트너십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공직생활을 시작할 때 아버지는 내게 ‘공직삼계(公職三戒)’를 내려주셨다. 다름 아닌 ‘누구 사람이라고 낙인 찍히지 마라’ ‘남의 돈 받지 마라’ ‘술 잘 먹는다고 소문내지 마라’는 세 가지가 그것이다.
누구 사람이라고 낙인 찍히지 말라는 것은 줄 서지 말고 실력으로 헤쳐가라는 뜻이었다. 이미 강성 야당 정치인의 아들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정부에 들어간 이상 이 첫 번째 계명은 공직자로서 생존하기 위해 당연히 지켜야 할 수칙이 아닐 수 없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버지가 정치를 그만두신 다음에도 맡은 일에 몸과 마음을 전력투구한다는 자세는 내게 ‘제2의 천성’이 되었다. 그 때부터 나는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니 ‘감천(感天)’까지는 못 가도 ‘감민(感民)’까지는 가야 국민의 공복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지성감민(至誠感民)’이라는 말까지 만들어 좌우명으로 삼았다. 나는 공직생활을 통해 인사(人事)운동을 하거나 어느 정파에 줄을 대거나 한 일이 단 한 번도 없다.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至誠’이면 ‘感民’
두 번째 계명인 ‘돈 받지 말라’, 즉 청렴의 의무는 공직자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덕목이다. 그러나 당연한 것을 지키기가 정말 어려운 것 또한 사실이다. 3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도지사로 부임하게 되자 아버지는 친지, 가족들을 불러 모아 청탁금지의 엄명을 내리시는 한편, 오히려 이들의 협조를 받아 매달 일정액의 판공비를 내게 보내주셨다.
돈도 물론 큰 도움이 되었지만, 나로서는 여기에 담긴 아버지의 당부를 항상 새롭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신군부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국보위에 반대해 서슴없이 사표를 내던질 수 있었던 것도 이렇게 청렴을 유지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청렴하려면 눈앞의 이익에 의연해야 한다. 이건 보통사람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주문이다. 그래서 나는 몸담은 조직의 부하들에게 다산(茶山)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에 나오는 ‘지자이렴(知者利廉)’을 자주 얘기해주곤 했다. ‘지자(知者)는 청렴(淸廉)을 이(利)롭게 여긴다, 청렴(淸廉)은 천하(天下)의 큰 장사이다, 큰 것을 바라는 사람은 반드시 깨끗해야 한다’는 얘기다.
수서사건으로 권좌에 있던 여러 사람이 줄줄이 수감되었지만 나와 함께 특혜를 거부한 서울시 공무원들은 하나도 연루되지 않았다. 바로 ‘지자이렴’의 산 증인들이다. 나는 처음에는 아버지와의 약속 때문에, 다음에는 더욱 보람 있는 일을 소신 있게 하기 위해서 청렴의 계율을 지켰다. 나는 이렇게 형성된 ‘미스터 클린’의 브랜드를 끝까지 지켜갈 것이다.
‘공직삼계’ 중 이렇게 첫 번째와 두 번째 계율은 잘 지켰지만 ‘술 잘 먹는다고 소문내지 마라’는 세 번째 계율만은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술을 먹더라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말아라’는 계율이라면 어느 정도 준수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술의 양과 관련된 문제라면 글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DNA 탓인지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와 술자리를 같이했던 사람들이 소문을 내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사실 내게 술을 가르쳐주신 분도 아버지다. 그래서 술주정을 모른다. 어릴 때부터 제삿날마다 음복을 시켰고 대학생이 되자 저녁 밥상에서 한잔의 반주를 권하곤 하셨다. 언젠가는 아버지의 호출에 따라 명동의 ‘뽕 쏘아’라는 ‘빠(Bar)’로 찾아갔더니 동료교수들이며 마담과 둘러앉아 대작하고 계시다가 내게 합석하라고 하시고는 ‘마티니’란 것을 시켜주셨다. 처음 마셔본 칵테일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