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상·하)| 시오노 나나미 지음|김석희 옮김
한길사 | 각 권 369·478쪽|각권 1만6500원
로마 멸망 후 펼쳐진제국들 흥망성쇠 다뤄 작가의 진짜 메시지는?





10여년 전 시오노 나나미와 인터뷰를 하면서 "당신의 '로마인 이야기'는 결국 '일본인 이야기'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닌가요?"라고 물었더니 한참 생각하다가 "그렇게 읽었나요?"라고 반문하고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적어도 강한 부정은 아니었다. 인터뷰 말미에는 "왜 이렇게 먼 타국에서 지독할 정도로 글을 쓰십니까?"라고 묻자 "일본 사회에 대한 분노가 제가 글을 쓰는 에너지원(源)"이라고 답했다.

그의 신작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를 읽으면서 인터뷰 기억이 떠오른 이유는 "왜 그가 이 시기 지중해를 무대로 한 역사 이야기를 쓴 것일까"에 대한 명확한 답이 생각나지 않아서였다. 처음에는 15권짜리 대작 '로마인 이야기'를 끝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한 '디저트' 성격의 에세이겠거니 짐작했는데 막상 읽어보니 그것은 아니었다. 그러면 시오노 나나미 책의 1차 독자라 할 수 있는 일본 사람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일흔을 넘긴 노(老)작가는 고대 로마 멸망 이후 1000년이라는 장구한 시기에 도전한 것일까?





시오노 나나미./한길사 제공
시오노 나나미의 이번 이야기는 서기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 순간부터 지중해는 제국의 내해(內海)에서 주인 없는 경계의 바다로 바뀐다. 그로부터 100여년 뒤 무함마드(마호메트)가 이슬람을 세우고 이후 이슬람 세력은 무서운 기세로 북부 아프리카를 점령해 들어온다. 670년 튀니스 남쪽에 카이루안이라는 최초의 아랍인 도시를 건설한 이슬람 세력은 기독교 세력의 본산인 로마로 진격하기 위해 징검다리인 시칠리아 공략에 나선다. 50여년의 공방전 끝에 결국 728년 시칠리아의 수도라 할 수 있는 시라쿠사가 함락된다.

한편 서진(西進)을 계속한 이슬람 세력은 710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 반도를 침공한다.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확보한 다음 지금의 프랑스 지역으로 진출하려 했지만 732년 푸아티에 평원에서 프랑크왕국 군대에 패퇴한다. 카이루안의 지도부는 방향을 돌려 시칠리아를 '항공모함' 삼아 이탈리아 본토 공략에 나선다.





북아프리카 튀니지의 안토니우스 목욕장 유적 너머로 지중해가 펼쳐져 있다./한길사 제공

흔히 '암흑시대'라고 불리는 중세를 다루는 상당한 분량의 이 책은 이 시기와 이 지역에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는 다소 지루하게 여겨질 수 있다. 물론 그 지루함의 원인을 시오노의 글쓰기에서 찾을 수는 없다. 큰 사건과 큰 인물이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시대를 그나마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읽게 하는 것은 역시 그의 스토리텔링 파워다.

상·하권 전체를 관통하는 줄거리는 결국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의 대결이다. 다만 이 책은 저자 자신의 말대로 문제를 지중해 한가운데서 바라보려 했다는 점에서 기존의 정치·종교사 위주 책들과는 구분된다. 5세기부터 근대가 시작되는 16세기까지 1000년 동안 지중해와 그 연안에서 명멸했던 세력·국가·제국들의 흥망성쇠를 '지중해의 관점'에서 스케치하고 있다. 당연히 지중해 시대는 대서양의 발견으로 끝난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로마인 이야기》보다는 오히려 그가 베네치아 공화국 1000년 역사를 다룬 《바다의 도시 이야기》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특이하게도 하권 중간에 '독자들에 대한 부탁'이라는 부분을 따로 삽입해 두었다. 《로마인 이야기》 독자들이 이 책을 읽다가 느끼게 될 당혹감이나 불만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의 부탁은 두 가지다. 첫째 《로마인 이야기》는 15권 분량이기 때문에 숲과 나무를 동시에 다룰 수 있었지만 이번 책은 《바다의 도시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숲만 다뤘으니 이해해 달라는 것이다. 둘째 중세 후기와 르네상스 시대를 다루게 되는 하권은 《바다의 도시 이야기》와 겹쳐서 생략한 부분이 많으므로 그 책을 따로 읽어달라는 것이다. 게다가 《바다의 도시 이야기》가 숲이라면 그 숲 속의 나무에 해당하는 《콘스탄티노플 함락》 《로도스 섬 공방전》 《레판토 해전》(국내에는 '전쟁 3부작'이란 이름으로 번역됐다)도 반드시 읽어달라고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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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와 아이들’ 출신으로 현재 우리나라 최고 기획사 중 하나인 YG엔터테인먼트를 이끌고 있는 양현석 대표는 힙합 클럽 DJ이기도 하다. 8년째. “빅뱅, 2NE1, 세븐, 지누션, 원타임 등이 소속된 회사를 꾸려가는 일만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법 한데, 웬 DJ?” 라고 생각할 사람이 많을 듯 하다. 하지만 그는 “제대로 일을 하기 위해 클럽 DJ로 밤을 지샌다”고 말한다. “최근에는 마이클 잭슨의 사망 때문에 3일 연속으로 그의 노래를 시리즈로 사람들에게 들려줬다”는 그다.


“제가 YG엔터테인먼트를 이끄는 기획자이기는 하지만, 결국 제가 하는 일의 50%는 사운드와 관련된 일입니다. 가수들은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작곡가들은 좋은 노래를 만들지만 저는 그들이 만들어낸 결과물 중에서 좋은 사운드를 콕 집어내는 일을 하죠. 물론 이런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엔지니어들이 있지만 전적으로 맡길 수는 없어요. 이승엽이 매번 타석에 나와 홈런을 치지 못하는 것처럼 이들도 몇 곡은 잘 해도 나머지 몇 곡에서 ‘헛스윙’을 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음악을 직접 만든 사람들만큼 애정을 갖고 사운드를 대할 수는 없으니까요.”


양 대표는 “클렙에서 디제잉을 하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소리에 대한 실질적인 감이 생긴다”고 말했다. 그는 또 “좋은 음악을 찾아서 듣기 위해 내가 직접 만든 ‘사슬’이 바로 DJ 활동”이라고 덧붙였다.



물론 그에게 DJ 활동은 바쁜 일상 속에 잠시 숨통을 틔워주는 ‘휴식처’이기도 하다. 그는 “제가 사람들과 놀기 위해 술집을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서 어떻게 보면 무미건조한 생활을 한다”며 “그래도 클럽에서 DJ로 활동을 하니까 젊은 친구들과 맥주 한 잔 하며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사운드에 대한 집착은 불법 다운로드가 횡행하는 음악계 환경과도 밀접하게 관련돼있다. 그는 “아무리 불법 다운로드 받지 말라고 강력하게 주장을 해도 그 말에 관심 없는 사람들은 절대 따르지 않는다”며 “그렇게 얘기할 시간에 차라리 좋은 음악을 만들기 위해 공을 들이는 게 더 낫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옷이나 가방에서 명품을 찾듯이, 우리가 컴퓨터 스피커나 조악한 이어폰으로는 들을 수 없는, 불법 다운로드를 통해서는 도저히 구현될 수 없는 뛰어난 사운드를 음반을 통해 만들어낸다면 결국 사람들은 YG의 음악을 찾게 될 겁니다. 그게 우리의 경쟁력인 거죠.”


그는 “우리나라가 특별한 자원을 갖고 있는 나라도 아닌데 문화 콘텐츠 수출이 얼마나 중요하겠느냐?”며 “그런 차원에서 정부측에서 너무 음악을 비롯한 문화 콘텐츠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정치 연설할 때만 콘텐츠를 강조하시는데, 직접 만나서 말씀을 들어보면 너무 아는 게 없으세요. 가슴이 아프죠.”


그는 일본 음반시장을 부러워했다.


“지금 일본이 세계 최고의 음반 시장 중 하나가 돼버렸잖아요. 그러니까 외국 가수들도 우리나라보다 상대적으로 싼 개런티에 일본에서 공연을 하는 거고요. 그게 바로 콘텐츠의 힘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가짜를 싫어하죠. 불법 다운로드에 대한 정부의 규제도 강하구요. 우리하고는 많은 점에서 달라요.”






▲ SM엔터테인먼트의 이수만 대표(좌), JYP 엔터테인먼트의 박진영 대표(우).

양현석은 음악인 출신으로 우리나라 음악계를 이끄는 기획사 사장이라는 점에서 SM엔터테인먼트의 이수만, JYP 엔터테인먼트의 박진영과 닮아있다. 양현석은 “두 사람을 모두 존경한다”고 말했다.


“제가 못하는 일을 잘 하시니까요. 저도 간혹 소녀시대, 원더걸스 같은 팀을 만들고 싶을 때가 있어요. 새로운 일이잖아요. 전 늘 해보지 않은 일에 도전해보고 싶어요. 그런데 그 분들이 워낙 잘 하셔서 제가 끼어들 틈이 없어요.”

양현석은 “이수만 선배님과 제가 비교되는 것 자체는 무척 영광”이라며 “나이도 저보다 17살 많으시고 일단 저와 동시대 분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그렇다”고 했다. “정말 실력을 겨뤄야 한다면 17년 후의 저와 지금의 이수만 선배님을 두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Updated : 2009.07.14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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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1 '낭독의 발견'

여성 산악인 고미영씨가 지난 11일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 등정 후 하산하다 실족, 사망한 것으로 확인돼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다. 14일 밤 11시30분 방송될 KBS 1TV '낭독의 발견'에는 그녀의 대선배이자 산악인인 허영호씨가 출연해 자신의 힘겨운 히말라야 등정 과정을 털어놓는다.

그는 새로운 등정을 계획할 때마다 노트 한 권을 먼저 구입했다고 한다. 거기에 적힌 것은 맥박, 혈압, 고도 등이 꼼꼼히 적힌 등반 일지. 그는 방송에서 1983년 세계 8위봉 마나슬루 등반 당시의 일기를 소개한다.





그는 산에 오를 때마다 책을 여러 권 챙긴다고 말한다. 2007년 에베레스트에 올랐을 때는 달라이 라마의 '용서'가 그의 곁을 지켰다. 그는 이 책의 한 대목을 낭독하면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텐트 안에서는 읽은 책의 활자 하나하나가 또렷이 기억된다"고 말한다.

그는 8400m 로체샤르 정상을 300m 남겨둔 시점에서 과감하게 발길을 돌린 기억을 소개한다. 그는 "몸 컨디션과 날씨를 보고 힘들다고 판단이 되면 정상이 눈앞에 있어도 과감하게 포기할 수밖에 없다"며 "집을 떠날 때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온다고 가족들과 약속했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텐트에 돌아와서는 '죽더라도, 다치더라도 정상에 올랐어야 했는데…'라며 엉엉 울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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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히말라야 14좌 완등하면 동네잔치 하고 싶어요.
또 얼큰하게 취하셔서 막내딸 자랑하셔야죠.


아버지!
사랑만 가득하신 아버지!

어느덧 아버지 곁을 떠난 지 25년이 흘렀네요. 아버지가 저를 낳았던 때의 나이가 되었고, 그리고 아버지가 살아왔던 시간의 절반에 와 있기도 합니다. 신발끈을 고칠 새도 없이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어느덧 저도 중년이에요.

사람의 시간이 일 년 단위로 쪼개어져 있는 건 우리에게 잠시 멈춰서 숨을 고르고 뒤돌아 볼 때를 알려주기 위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해가 다 가는 이 시점에, 건강한 모습으로 아버지께 편지를 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요. 아버지께 그 동안 단 한 통의 편지를 보내지 않았던 제가 말이죠.

10년 넘게 이장을 하시며 어렸을 적 동네사람들을 우리 집 마당에 가득 채우고 새마을 운동에 관한 연설을 하시던 때가 어렴풋이 생각나요. 모기 때문에 온 몸을 긁적이며 잠이 쏟아지기도 했지만 큰 소리로 사람들에게 연설하시던 모습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몰라요. 마이크 없이도 아버지의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렸죠.

지난 여름에 방문했을 때 “이제는 동네에서 내가 가장 연장자여!”라고 큰 소리 치시고 “앞으로도 10년은 문제 없다”면서 소주 한 대접 들이키던 모습이 참 보기 좋았어요. 그렇지만 한편으론 머리 절반 이상이 희어지시고 치아는 흔들거리는데다 얼굴과 몸 곳곳에 주름져 남아 있는 세월의 흔적들 때문에 서글프기도 했답니다.

아버지! 걱정만 가득하신 아버지!
막내딸이 위험한 곳만 골라 다닌다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고산등반을 하면서 가장 고마운 사람은 바로 아버지인 걸요. 제가 히말라야의 멋진 장관을 보고, 고통스럽고 처절한 시간들을 잘 견뎌내고, 소중한 인연들을 알 수 있었던 건 모두 아버지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저 데리고 등산 한번 간 적 없는데 무슨 소리냐 물으실지도 모르겠어요. 저에게 강인한 의지와 지치지 않는 체력을 물려주신 분, 바로 아버지 아니시던가요.

정상을 향해 한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숫자를 세기도 하고, 주문을 외우기도 하지만 ‘아직은 견딜 만하다’는 의지 덕분에 뒤돌아서지 않을 수 있답니다. 이것이 곧 열정이고 지금의 저를 있게 해준 원동력입니다.

아버지! 그리움만 가득하신 아버지!
일년에 한 두 번 뵙는 게 고작이지만 제 마음만은 늘 강렬한 태양에 그을린 아버지의 얼굴을 생각하고 있다는 걸 기억해 주세요. 군데군데 녹슨 파란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왔냐?” 작별인사를 할 때면 눈도 안 마주치시며 “언제 올래?” 두 마디로 일관하시지만 이 안엔 들어 있는 많은 뜻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 동안의 그리움이고 또 다시 헤어지는 안타까움이 아니던가요. 겉으론 무뚝뚝하시지만 사선을 넘나드는 막내딸을 걱정하고 그리워하신다고, 술 한잔 들어가시면 “딸래미 보고 싶다”는 말도 자주 하신다고 지난 번 집에 찾아갔을 때 어머니께서 전해주시더군요.

저의 목표인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후, 동네잔치를 하고 싶어요. 작은아버지, 큰오빠가 서울의 명문대에 갔을 때 마을에서 큰 잔치 했던 것처럼요. 아버지 그날 또 얼큰하게 취하셔서 동네 사람들에게 쩌렁쩌렁 딸 자랑 하셔야죠. 그날까지 열심히 논두렁 밭두렁 걸으며 건강관리 하시길 바라요. 술은 견딜 수 있을 만큼만 드시구요. 노인정에 나가 친구 분들과도 많이 어울리세요.

아버지, 다음 생신 때 찾아 뵐게요. 안녕히 계세요.

막내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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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봉(峰) 등정후 추락 사망
"대한민국 여성의 기상을 떨치겠습니다" 마지막 말 남기고… 끝내 히말라야 품에 안겨
경쟁하던 오은선 "우린 같은 꿈을 꾸었는데…"

한국의 대표적 여성 산악인 고미영(41)씨가 11일 오후 6시(현지시각·한국시각 11일 오후 9시)쯤 히말라야에서 추락해 숨졌다. 세계 8000m 이상 14개봉 정복에 나선 고씨는 11번째 봉우리인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해발 8126m) 등정에 성공하고 하산하던 길이었다.

고씨가 소속된 코오롱스포츠는 "하산 도중 해발 6300m 지점의 '칼날 능선'에서 1000m 아래로 추락했다"고 12일 밝혔다. 고씨가 추락한 지 약 18시간 뒤인 12일 낮 12시쯤, 파키스탄 수색 헬기 2대가 캠프1을 약 100m 앞둔 해발 5300m 지점 눈밭에 낭가파르바트 정상을 바라보는 자세로 누워 있는 고씨를 찾아냈다. 주(駐)파키스탄 한국대사관은 이날 밤 "고씨가 이끄는 등반팀과 통화한 결과 고씨가 사망한 것을 확인했다"고 전했다.

고씨보다 4시간쯤 먼저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올랐던 오은선(블랙야크 소속·43)씨는 이날 오후 본지와의 위성전화 통화에서 "캠프4(해발 7500m)에서 정상을 향해 출발하는 고씨와 마주쳐 '잘하라'고 격려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라이벌이자 후배를 잃은 오씨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라이벌'이라고 했지만 우리는 산을 사랑하는 동료였을 뿐"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함께 북한산에 오른 고미영씨(오른쪽)와 오은선씨. 두 사람은 ‘8000m급 14개 봉 완등’기록을 위해 경쟁해왔다.


"한 시즌에 히말라야 3개봉을 오른 건 (고씨가) 처음일 거예요. 누가 시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의지가 강한 후배였어요.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직후 추락 소식을 듣고 숨이 막혔어요."

전 세계 여성 산악인 중 처음으로 8000m급 14개 봉을 완등하는 대기록을 세우는 것이 고씨의 꿈이었다. 낭가파르바트를 포함해 12개봉을 정복한 오씨와는 같은 꿈을 꾸는 후배이자 경쟁자 관계였다. 지난 10일 4시간 차이를 두고 각각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올랐지만, 불의의 사고로 고씨의 꿈은 11번째 봉 낭가파르바트에서 끝나고 말았다.

오씨와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산악인으로 꼽히는 고씨는 앞서 지난 10일 오전 2시30분쯤 캠프4를 출발했다. 15시간에 걸친 사투 끝에 정상에 오른 고씨는 이날 오후 5시30분 낭가파르바트 정상에서 베이스캠프로 무전을 보냈다.

"존경하는 전설적인 산악인 헤르만 불이 처음으로 등정한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올라 감격스럽습니다. 남은 3개봉도 안전하게 등정해 대한민국 여성의 기상을 전 세계에 떨치겠습니다."






한국의 대표적 여성 산악인 고미영씨로 추정되는 인물이 히말라야 해발 5300m 지점 눈밭에서 정상을 바라보는 자세로 누워 있다. 고씨는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해발 8126m) 등정 후 하산 길에 실종됐다./KBS TV

정상에 오르는 길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던 낭가파르바트는 제트기류와 눈보라로 하산하는 고씨의 발목을 잡았다. 기상악화로 악전고투를 벌이던 고씨는 해가 저문 뒤 해발 7700m 지점에서 베이스캠프로 지원을 요청했다.

한발 앞서 하산 중이던 오씨가 오스트레일리아·독일·캐나다 산악인으로 구성된 다국적 등반대 '내셔널 팀'을 통해 산소통과 보조 자일, 따뜻한 물 등을 고씨에게 올려 보냈다. 고씨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11일 새벽 6시쯤 캠프4까지 내려오는 데 성공했다. 다시 하산하기 시작한 고씨는 11일 오후 6~7시쯤 캠프2(해발 6200m)를 100m쯤 앞둔 칼날 능선에 도달했다. 낙석과 눈사태가 잦고, 몸을 의지할 수 있는 고정 로프가 전혀 없는 구간이 약 10m쯤 계속되는 곳이다. 이 지점에서 고씨는 설산(雪山)의 깊은 골짜기로 추락했다.

지인들은 고씨가 유쾌하고 씩씩한 사람이었다고 기억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독하게 이를 악무는 '철녀(鐵女)'이기도 했다. 고씨는 2006년 10월 히말라야 초오유(해발 8201m) 등정을 시작으로 고산 등반에 뛰어들어 8000m급 고봉을 차례로 정복해 나갔다. 올 들어 히말라야 마칼루(5월 1일), 칸첸중가(5월 18일), 다울라기리(6월 8일)를 한 시즌에 정복하는 '근성'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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