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운명을 바꾼 한마디(12) - 우피 골드버그

부모·친지·동료·스승 등으로부터 격려와 용기를 받고, 힘겨운 시절을 극복. 오늘날의 부와 명성을 얻은 엔터테인먼트 장르 유명인들의 이야기를 공개한다. 유명인들의 무명시절 이야기로부터 ‘그들의 삶도 우리와 비슷했구나’ 라는 안도감과 함께, 힘겨운 상황을 인생의 전환점으로 생각할 수 있는 긍정적인 힘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이경기 씨의 <내 운명을 바꾼 한마디>에서 발췌한 것이다

관리자 



우피 골드버그(Whoopi Goldberg)
“다른 사람의 조롱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네가 강하다면, 확신을 갖고 당당히 나서려무나.”
You’re strong enough to take other people’s ridicule, then stand by your convictions.

Destiny words : 네가 강하다면 확신을 갖고 당당히 나서려무나!

‘아카데미 시상식 역사상 최초의 흑인 사회자로 무대에 나선 그녀의 자유분방한 패션은 이날의 하이라이트가 됐다.’

1994년 3월 21일 거행된 아카데미상에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
1993>가 작품상에 지명되면서, 연출자 스티븐 스필버그는 오락성과 인류 역사의 최대 비극인 나치에 의한 유태인 학살극의 참상을 다시 한 번 반추시켜주는 역사적 업적을 이루게 된다.

이날 행사장에서 스필버그에게 쏟아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에 버금가는 조명을 받은 주역은 빌리 크리스탈에 이어 사회봉을 잡은 흑인 여배우 우피 골드버그였다. 그녀는 깔끔한 정장 대신 폭이 넓은 검은색 의상에 선글라스 그리고 목에는 스카프를 맨 다소 파격적인 의상을 착용해 시선을 끌었다. 일반인들의 예상을 깬 이 같은 복장은 그녀의 성장과정을 짐작하게
해주는 징표이다.

“알게 모르게 어려서부터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볼까를 의식하면서 옷을 입고 행동을 하는 것에 묘한 반감을 느꼈습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동화되기 위해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버려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주로 아프리카 이주민들의 집단 거주지로 알려진 뉴욕 주 첼시 출신인 우피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히피 풍 나팔 청바지와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즐겨 치장하는 머리갈래를 좌우로 꼰 아프로 스타일을 하고 다닌 튀는 소녀였다. 여기에 한술 더 떠 얼굴에는 형형색색의 물감을 칠하고 다녔다. 당연히 주변에서 우피에 대해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야, 너 옷이 왜 그래? 차분하게 입을 수 없어? 너랑 다니면 나까지 손가락질을 받고 있어. 너랑 함께 안 다닐래!”
아동들만의 수수한 복장 틈바구니 속에서 찢어지고 색이 바랜 청바지, 가슴이 노출된 티셔츠, 흡사 가발을 올려놓은 듯한 수북한 아프로 헤어스타일은 친구들로부터 스스로 따돌림을 당하는 단초가 된다.

“복장을 문제 삼아 저를 멀리하는 친구들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옷을 차분히 입고 오라고 강요하는 이들에게 저는 오히려 너희들과 어울리지 못하더라도 그렇게는 못 해! 하고 강짜를 놓았죠. 이토록 주변 눈치에 전혀 개의치 않는 성격이 영화배우를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답니다.”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이렇게 독립적인 행보를 할 수 있도록 자극과 용기를 심어준 이는 다름 아닌 어머니다. 태성적으로 자신의 딸이 다른 아이들과는 별종의 성향을 갖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우피의 모친은 그녀에게 늘 격려를 해주었다.

“다른 사람의 조롱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네가 강하다면 확신을 갖고 당당히 나서려무나!”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어린 나이였지만 저는 남과 다른 행동을 보여준다는 것이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달았죠. 하지만 두려운 감정은 없었어요. 주제 넘는 말 같지만 다른 사람의 감정에 맞추어 살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까요.”

동화되기보다는 자기 주관을 내세운 이탈을 시도했던 우피의 행동거지는 조화보다는 개성을 강조하는 영화계 속성에 빨리 적응할 수 있는 원천이 되었다. 프로 영화계에 입문해서도 치렁치렁한 곱슬 장발머리에 검은 슈트를 단골로 착용했던 그의 행실은 처음에는 논란거리를 제공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른 뒤 우피의 트레이드마크를 관객들과 동료 여배우들이 모방하면서 유행의 흐름을 주도하는 패션 리더로 대접받는 사태가 발생한다.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나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사실 무척 힘겨운 일이죠. 하지만 이런 당당함이 영화계, 아니 일상을 살아가는 데 자신감을 갖고 대처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는 점을 스스로 대견하게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특출난 행동으로 주위의 질시와 조롱을 받았던 우피 골드버그는 타인의 시선에 길들여지길 원하는 세상의 흐름을 연어처럼 거슬러 올라가면서 개성적인 스타로 성장한 주인공이 된 것이다. 이런 당당한 출세 뒤에는 딸의 행동을 전폭 지지하면서 격려하고 용기와 자극을 주었던 어머니의 그림자가 있다.



우피 골드버그(Whoopi Goldberg)

화장터 공사꾼 출신. 재담 갖춘 흥행 배우.
1955년 뉴욕 태생. 브로드웨이 무명 배우 시절 생계를 위해 화장터 건설 현장에서 벽돌공으로 일한 적도 있다. 뉴욕에서 별다른 배역을 받지 못하자 영화 본고장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즉석 공연을 주로 하는 공연단에 소속돼 스탠딩 코미디언으로 일하면서 기량을 축적해 나간다. 미국 교육 전문 채널 HBO로부터 여성 1인 특별쇼 ‘맘스 마블리’에 초대되면서 꾸미지 않은 자유 분망하고 자신만의 시각으로 미국 사회에서 전개되는 여러 가지 사안을 꼬집는 사회 풍자 토크쇼를 보여주어 갈채를 받아낸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칼라 퍼플The Color Purple, 1985>에서 오프라 윈프리와 함께 의붓아버지에서 수탈당하는 고단한 자매 역을 맡아 1급 배우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아낸다. <버글러Burglar, 1987> <텔레폰The
Telephone, 1988> <점핑 잭 플래시Jumpin' Jack Flash, 1986> 등에서 흑인 특유의 건들거리는 제스처와 재담을 드러낸다. 이어 <사랑과 영혼Ghost, 1990>에서 죽은 자와 산 자의 영혼을 연결시켜주는 영매 역할로 아카데미 조연 여우상을 따낸다. 천방지축 수녀 역을 맡은 <시스터 액트Sister Act, 1992> 시리즈로 가장 유명한 흑인 여배우 주가 행진을 지속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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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운명을 바꾼 한마디(2) - 르네젤 위거

부모·친지·동료·스승 등으로부터 격려와 용기를 받고, 힘겨운 시절을 극복. 오늘날의 부와 명성을 얻은 엔터테인먼트 장르 유명인들의 이야기를 공개한다. 유명인들의 무명시절 이야기로부터 ‘그들의 삶도 우리와 비슷했구나’ 라는 안도감과 함께, 힘겨운 상황을 인생의 전환점으로 생각할 수 있는 긍정적인 힘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이경기 씨의 <내 운명을 바꾼 한마디>에서 발췌한 것이다.

관리자 


르네 젤위거(Renee Kathleen Zellweger)
“나는 인생의 격렬하고 잔인한 투쟁에서 삶의 기쁨을 발견한다.
그리고 나의 기쁨은 여행하는 데서 생긴다.”
(I find my joy of living in the fierce and ruthless battles of life and my pleasure.)


Destiny words : 나는 인생의 격렬하고 잔인한 투쟁에서 삶의 기쁨을 발견한다.


남북전쟁 시절의 애환을 다룬 <콜드 마운틴>으로 편당 1,000만 달러(약 110억 원)를 챙긴 르네 젤위거.

전형적인 할리우드 미녀상은 아니지만 왠지 모를 푸근한 심성을 풍겨주는 그녀는 단번에 빠져들게 하기보다는 볼수록 상큼한 매력을 풍겨주는 주인공이다.

부친은 위스, 모친은 노르웨이 출신으로 텍사스 주 시골 소읍 카이티에서 태어났다. 돼지를 키우는 농가에서 성장한 그녀는 어찌 보면 문화생활과는 동떨어진 환경에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배우로 성공한 특이한 사례가 되고 있다.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한 뒤 배우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LA로 건너온다.

처음에는 배우들이 단골로 드나드는 레스토랑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접시를 치우고 탁자에 널브러져 있는 담뱃재 닦는 일을 해낸다.
“육체는 힘들었지만 때의 경험이 배우생활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죠. 식당에서 일하면서 저는 다양한 사람들, 특히 배우들의 행태를 관찰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교과서에서 배울 수 없는 살아 있는 연기 교본이 됐다고 봅니다.”

1996년 스포츠 에이전트 세계를 묘사한 <제리 맥과이어>에서 미혼모 역을 맡아 극중 탐 크루즈와 연분을 맺어가는 푸근한 역할을 열연해 주었다. 재학 시절 치어 걸, 스포츠클럽, 연극 동아리 등 다양한 체험을 한 것이 프로 연기자가 된 후 여러 배역을 순탄하게 연기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으며, 잠자기 전에 하루 동안 겪은 사건을 에세이로 작성하는 것도 감추어져 있는 취미 중의 하나이다.

뉴욕 최대 백화점 중의 하나인 시어즈 백화점의 화려한 풍광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아 이때 소감을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투고했던 경험도 있다고 하는데, 채택이 안 돼 그녀의 무명 시절 글 솜씨를 훔쳐볼 수 없다는 것이 일말의 아쉬움이다.

이 시절 그녀가 잡지에서 어거스트 스트린드버그의 「미스 줄리아Miss Julia」의 서문에 기술되어 있다는 명구를 읽고 그녀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방랑벽을 자극하는 감흥을 받았다고 한다.

‘나는 인생의 격렬하고 잔인한 투쟁에서 나의 삶의 기쁨을 발견한다. 그리고 나의 기쁨은 여행하는 데서 생긴다.’

화려하고 번잡한 나날이 늘 기다리고 있는 배우생활에서 여가는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촬영이 없는 날이면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자동차를 몰고 거리를 질주하죠. 특히 아직 오염되지 않은 자연 풍광을 간직하고 있는 고향 텍사스 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해요. 가식적인 웃음을 강요하는 연예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원초적인 제 자신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자동차 여행, 근사하지 않아요?”

이런 취미생활 때문에 그녀는 여행에 관한 수필집을 늘 자동차 안에 두고 다닌다. 당연히 인생 교훈이자 전환점을 제공했다고 느끼는 경험을 여행 관련 독서를 통해 체득했다.

<제리 맥과이어> 이후 노처녀의 결혼 해프닝극 <브릿지 존스의 일기 1,2> 그리고 육감적인 시카고 나이트클럽 댄서 역으로 출연했던 <시카고> 등 짧은 배우생활 동안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아직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배우라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아요. 다른 연기자들처럼 배우가 되겠다는 일념을 갖고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적도 없고요. 이 때문에 어찌 보면 지금까지 예상치 못한 행운으로 지금의 명예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절대 지금의 성공에 자만하지 않고 있습니다.”



르네 젤위거(Renee Kathleen Zellweger)

“목표를 세워 놓았다고 해서 인생이 그 목표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이 때문에 저는 종착역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흘러가는 방랑자처럼 살고 싶습니다.”

1969년 텍사스 주 카이티 태생. 푸근한 외모에서 우러나오는 곰살맞은 연기로 남성 팬들에게높은 관심을 얻어내고 있다.

텍사스 오스틴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한 뒤 <텍사스 체인 살인사건4The Return of the Texas Chainsaw Massacre 4, 1994>에서 단역을 맡는다. 이 시기 매튜 맥커너히를 만나 그의 주선으로 <러브 앤 A 45Love and a 45, 1994>에 출연해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아내고, 카메론 크로우 감독의 눈에 띄어 <제리 맥과이어Jerry Maguire, 1996>에 출연하면서 단번에 시선을 끄는 신예 배우로 주목받는다.

<미, 마이셀프, 아이린Me, Myself & Irene, 2000>에서 짐 캐리와 컴비 연기를 통해 코미디 배우로의 가능성을 펼쳐 보인다. <너스베티Nurse Betty, 2000>에서 순수한 사랑을 갈망하는 간호 보조원 역으로 골든 글로브 여우상을 수여받는다.

이어 <브릿지 존스의 일기Bridget Jones's Diary, 2001>에서 30대 초반 노처녀의 결혼 갈망기를 보여주어 전 세계적인 히트작으로 만들어낸다. <시카고Chicago, 2002> <콜드 마운틴Cold Mountain, 2003> 등으로 취월장하는 연기 실력을 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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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운명을 바꾼 한마디(1) - 로버트 레드포드

부모·친지·동료·스승 등으로부터 격려와 용기를 받고, 힘겨운 시절을 극복. 오늘날의 부와 명성을 얻은 엔터테인먼트 장르 유명인들의 이야기를 공개한다. 유명인들의 무명시절 이야기로부터 ‘그들의 삶도 우리와 비슷했구나’ 라는 안도감과 함께, 힘겨운 상황을 인생의 전환점으로 생각할 수 있는 긍정적인 힘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이경기 씨의 <내 운명을 바꾼 한마디>에서 발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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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레드포드 (Charles Robert Redford Jr.)
“희망과 인내는 만병을 다스리는 두 가지 치료약이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의지할 수 있는 가장 믿음직한 자리이자 가장 부드러운 방석이다.”
(Hope and patience are two sovereign remedies for all. The surest reposals, the softest cushions to lean on in adversity.)


Destiny words : 희망과 인내는 만병을 다스리는 두 가지 치료약이다.


그는 1980년에는 미국 중산층 가정의 남모르는 비애를 다룬 <보통사람들>로 전격 감독 겸업 선언을 한다.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을 타내면서 원숙한 영화의 열정을 드러내게 된다. 그런데 사실 그는 영화보다는 그림에 더욱 관심이 많은 화가 지망생이었다.

대학 1학년 때 학업을 중단하고 파리 노트르담 거리에서 오가는 관광객의 즉석 초상화를 그려주면서 열정을 불태웠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의 열의만큼 손님이 많지 않아 미국인들이 즐겨 찾는 클럽이나 바를 전전하면서 하루하루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배고픈 시절을 보낸다.

파리에서의 생활에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자 체계적인 회화를 공부하겠다는 계획을 품고 이태리 플로렌스로 건너간다. 청운의 꿈을 품고 미술학교에 등록하지만 그의 그림을 본 지도교수들은 이구동성으로 비판을 가한다. 그림을 그려서 성공할 수는 없다고 결론을 내린 그는 고향으로 돌아온 뒤 칩거 상태에서 매일 술만 마셔댔고 급기야 거의 자폐증 환자와 같은 대인기피증에 시달리게 된다.

이런 암울한 시절 그에게 따사로운 봄 햇살과도 같은 구원의 손길이 비춘다. 청년 레드포드의 방탕한 생활을 남몰래 지켜본 주인공은 그의 2층에 하숙을 하고 있던 금발 미녀 롤라 폰 와제넌.그녀는 의욕을 상실한 그에게 용기를 북돋워주는 친구가 되어준다.

그리고 어느날 로버트 버틴의 저서 『우울의 해부Anatomy of Melancholy』를 선물한다. 평상시와 다름없이 골방에 처박혀 대낮부터 술에 만취돼 있던 그는 롤라가 건네준 책자를 무심히 넘긴다. 그때 그가 한 문구를 읽게 된다.

‘희망과 인내는 만병을 다스리는 두 가지 치료약이다.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의지할 수 있는 가장 믿음직한 자리이자 가장 부드러운 방석이다.’

짧은 문장이지만 그에게 인생 목표를 정립하는 계기를 주게 된다. 일순간 자포자기 삶을 벗어버린 레드포드는 롤라의 권유를 받고 뉴욕 프래트 인스티튜트에 입학해 미술 공부를 재개한다. 이때 교양과목으로 ‘연극 디자인’을 공부하다 지도교수로부터 연기를 이수해볼 것을 권유받는다.

그는 아메리칸 드라마 아카데미에 입학한 뒤 자기에게 그림보다는 연기가 더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전력을 쏟아 결국 할리우드를 석권하는 개성 스타로 발돋움하게 된 것이다. <내일을 향해 쏴라>에서 서부 무법자 선댄스 키드 역으로 뭇 여성들의 애간장을 태운 그는 극중 배역을 딴 독립영화 축제인 ‘선댄스 영화제’를 지난 1980년대부터 주최, 재기 발랄한 미래의 영화 인재를 육성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화가가 되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젊은 시절 한동안 방황했던 레드포드는 결국 한 여인이 건네준 책자와 자신의 감추어져 있는 재능을 발견하면서 폭발력을 갖춘 연기자로 대성하게 된 것이다. 그에게 격려와 명구가 담겨 있는 책자를 선물하는 등 아낌없는 도움을 주었던 롤라는 그 후 레드포드의 아내가 되어 스타 배우를 만들어내는 숨은 내조자가 된다.



로버트 레드포드(Charles Robert Redford Jr.)

미국 중산층이 가장 선호하는 미남 배우 겸 감독
1937년 캘리포니아 주 산타 모니카 태생.
콜로라도 대학에서 아마추어 야구 선수로 활동했지만 음주문제로 퇴출당하고, 대학 졸업 후 프라트 예술연구소에서 그림을 전공한 뒤 유럽에서 무명 화가로 잠시 활동한다.

뉴욕 아메리칸 드라마 예술 아카데미를 이수한 후 미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외모를 바탕으로 TV와 연극에서 경력을 쌓아 나간다.
조지 로이 힐 감독의 서부 무법 영웅을 묘사한 <내일을 향해 쏴라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 1969>에서 선댄스 키드 역을 맡아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된다. 이어 <추억The Way We Were, 1973> <스팅The Sting, 1973> 등으로 할리우드 최고 흥행배우 타이틀을 부여받는다.

1980년 재능 있는 후배 영화인들을 발굴하기 위해 유타 주에 선댄스 연구소를 설립해서 연례 영화 축제인 ‘선댄스 필름 페스티벌’을 개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권위 있는 독립영화 축제로 성장시킨다.

미국 중산층의 문제점을 노출시킨 <보통사람들Ordinary People,1980>로 감독 데뷔를 선언. 이 작품으로 1981년 아카데미 감독상을 타내는 저력을 발휘한다. 또한 브래드 피트를 발굴한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rough It,1992>과 미국 공영 퀴즈 방송에서 자행되는 비리를 꼬집은 <퀴즈 쇼Quiz Show,1994>로 상당한 연출력을 갖고 있는 재능꾼임을 입증시킨다.
1970년대 폴 뉴먼과 팀워크를 이뤄 <내일을 향해 쏴라> <스팅> 등을 연이어 히트시키면서 할리우드 ‘버디 무비’장르 붐을 이끌어냈던 주역이 로버트 레드포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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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운명을 바꾼 한마디(22) - 폴 맥카트니(James Paul McCartney)

부모·친지·동료·스승 등으로부터 격려와 용기를 받고, 힘겨운 시절을 극복. 오늘날의 부와 명성을 얻은 엔터테인먼트 장르 유명인들의 이야기를 공개한다. 유명인들의 무명시절 이야기로부터 ‘그들의 삶도 우리와 비슷했구나’ 라는 안도감과 함께, 힘겨운 상황을 인생의 전환점으로 생각할 수 있는 긍정적인 힘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이경기 씨의 <내 운명을 바꾼 한마디>에서 발췌한 것이다

관리자 



“밤이 암담해질지라도, 아직 나를 비추어주는 등불은 남아 있어 내일까지 비출 거예요. 그대로 내버려 두세요.”
And when the night is cloudy, there is still a light that shines on me, shine on until tomorrow, let it be.


- 폴 맥카트니(James Paul McCartney)


Destiny words : 밤이 암담해질지라도, 아직 나를 비추어주는 등불은 남아 있습니다.

‘마음을 편히 가져라. 이런 저런 일에 관여해 신경을 쓰지 말거라. 그저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다 보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기 마련이다.’

1964년부터 1970년까지 세계 음악계의 지축을 흔든 그룹이 영국 출신의 4인조 보컬 비틀즈이다. 무명 시절을 제외하고 비틀즈가 프로 팝 시장에서 활동한 6년 동안의 행적은 지금도 경신되지 않고 있는 음악사의 위대한 업적으로 남아 있다.

1965년 ‘I wanna hold your hand’로 미국 빌보드 톱을 석권하면서 시작된 비틀즈의 미국 시장 성공 신화는 ‘England Invasion’이라는 질시 섞인 칭송을 받을 만큼 엄청난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 더벅머리 총각 4명이 발표하는 곡들은 흡사 경쟁하듯이 팝 기록을 추가시켰다.

수많은 여성 팬들의 환호성,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듯 따라 붙는 카메라 기자들의 후레시 세례. ‘천상의 행복이 이런 것이구나!’라고 느낄 만큼 기쁨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지만 외부의 화려한 시선만큼 내면에서는 지독한 고독과 외로움에 시달리는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존 레논과 함께 팀을 이끌고 있었던 폴 맥카트니였다.

공연이 끝나면 존 레논·링고 스타·조지 해리슨 등 다른 멤버들은 사랑하는 여자친구나 부인을 찾아 떠났을 때 노총각 맥카트니는 런던 세인트 존스 우드에 위치한 독신자 아파트 계단을 터벅터벅 걸어 올라가야 했던 외로운 사나이였다.

그는 지금도 '그때 나를 포근히 감싸줄 여성이 절실히 필요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혼신을 다한 콘서트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옷을 입은 채로 침대에 쓰러진 뒤 아침에 눈을 뜰 때 “나는 간혹 새벽에 잠을 자다 침상에 코가 박혀 질식사하는 꿈도 꾸었다”고 털어 놓았다. 이런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꿈속에 나타나는 작고한 모친이었다.

‘우리 귀여운 폴, 뭘 그리 고민하느냐. 세상은 그저 흘러가는 대로 두거라. 그러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을 듣고 폴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베란다 근처에 놓여 있는 피아노 앞으로 달려가 즉석에서 노래를 작곡한다.

내가 고난에 처해 있을 때 마리아가 내게 다가와 말씀을 합니다.그대로 내버려 두세요. 암흑의 시간 속에 내가 서있을 때 마리아가 내게 다가와 말씀을 합니다. 그대로 내버려 두세요.

밤이 암담해질지라도 아직 나를 비추어주는 등불은 남아 있어 내일까지 비출 거예요. 그대로 내버려 두세요.모친이 꿈에서 나타나 지독한 외로움을 겪는 아들 폴에게 충고한 말은 이렇게 해서 ‘Let it be’로 탄생하게 된다. 이 곡은 지금도 전 세계 팝 애호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노래 중의 하나로 아직까지도 사랑받고 있다.

세상살이에서 겪는 즐거움과 분노에 일희일비 하지 말라는 가사는 흡사
노자의 무위사상을 떠올려준다.이 때문인지 미국 건국 이래 전 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갔던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인들이 흥분된 감정을 진정 시키기 위해 은연중 합창한 노래가 바로 ‘Let it be’였다.
‘폴, 그냥 내버려 두거라!’

외로움에 빠져 있는 아들 폴에게 들려준 어머니의 이 격려의 말은 지금도 힘겨운 일에 빠져 있는 지구촌 사람들에게 생의 의욕을 다잡을 수 있는
위안의 메시지로 환대받고 있다.


폴 맥카트니(James Paul McCartney)

1942년 영국 메세사이드 주 리버풀 태생.
1960년대 팝 역사를 장식한 비틀즈 그룹에서 베이스 기타 겸 보컬을
담당했다.

기네스북에 ‘팝 역사에서 가장 성공한 작곡가’로 등재돼
있다. 비틀즈 해체 이후 그룹 ‘윙스Wings’를 결성해 상업적 반응을 이어 나간다. 윙스 시절 발표한 앨범 ‘Tug of War’‘Flowers in the Dirt’를 밀리언셀러로 만들었다.

1980년대 들어 자전적 음악 영화 <폴 매카트니의 브로드 스트리트Give My Regards to Broad Street, 1984>와 앨범 ‘Press to Play’을 출반했다. 2005년 9월 ‘Driving rain, 2001’ 이후 4년 만에 제작 프로듀서, 작곡을 모두 혼자 담당한 원 맨 밴드(One-man band) 신보 앨범 ‘The Chaos and Creation in the Backyard’를 출반, 식지않는 음악 열정을 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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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운명을 바꾼 한마디(14) - 이자크 펄만

부모·친지·동료·스승 등으로부터 격려와 용기를 받고, 힘겨운 시절을 극복. 오늘날의 부와 명성을 얻은 엔터테인먼트 장르 유명인들의 이야기를 공개한다. 유명인들의 무명시절 이야기로부터 ‘그들의 삶도 우리와 비슷했구나’ 라는 안도감과 함께, 힘겨운 상황을 인생의 전환점으로 생각할 수 있는 긍정적인 힘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이경기 씨의 <내 운명을 바꾼 한마디>에서 발췌한 것이다.

관리자 



78회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영화 <브로크백마운틴>의 음악을 연주하는 펄만

천재란 1퍼센트의 영감과 99퍼센트의 연습으로 이루어진다.”
Genius is one percent inspiration and ninetynine percent practice.
이자크 펄만(Itzhak Perlman)

Destiny words 천재란 1퍼센트의 영감과 99퍼센트의 연습으로 이루어진다.

99%의 연습으로 대가반열에 오른 이스라엘 출신 음악가 이자크 펄만.
“노력이라는 것은 음악가에게 연습과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내가 바이올린 주자로 명성을 얻은 근본적인 요인은 바로 지겹도록 반복한 연습 덕분입니다.”

라디오 음악 프로를 늘 청취했던 부모 덕분에 펄만은 출생 직후부터 음악 선율을 감싸 안으면서 성장하게 된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바이올린 연주 실황을 듣고 “엄마, 나도 저 악기 연주하고 싶어”라고 말한 것이 음악가의 길로 들어서는 계기가 된다. 이때 그의 나이가 불과 4살이었다.

“많은 악기 중 바이올린은 아담하고 단정한 리듬을 낼 수 있다는 것이 매력이었습니다.”

10살 때 체계적인 바이올린 교습을 받기 위해 텔아비브 콘세르바토레에 입학하게 되고, 이곳에서 평생 음악 스승 중 한명인 리브카 골드기르트로부터 13여 년 동안 바이올린 독주법에 대한 훈련을 받는다.
“선생님께서 제게 늘 하신 말씀은 ‘연습, 연습’이었습니다. 다른 말은
필요 없었습니다.”

한창 또래아이들과 뛰어놀 나이에 펄만은 학교 연습실에서 하루 4~5시간씩 주어진 변주곡을 끊임없이 반복 연주하는 과제물을 받았다.
“너 연습했어?”
리브카 선생은 펄만을 보면 단 두 마디만 했다.

“악기를 공부하는 대다수의 학생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한 곡을 지정해 반복 연주하는 연습입니다. 나 또한 똑같은 곡을 하루에 수 시간씩 연습해야 한다는 것이 넌더리나게 싫었던 적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펄만은 이러한 고된 연습이 있었기에 탄탄한 기본기를 갖추게 됐고 이것이 바탕이 되어 세계 최고의 기량을 갖춘 바이올린 연주자가 될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연습은 음악가의 길로 접어들면서 생긴 후천적 습관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본능이 되었습니다. 연주 공연을 할 때 성공이냐 실패냐 하는 판정은 결국 연주회를 앞두고 얼마만큼 연습을 했느냐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숱한 연습은 결국 노력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라고 본다면 발명왕 에디슨이 체험에서 우러나온 노력 99%는 음악가인 나에게 그 어떤 말보다도 더 실감나는, 내 인생의 기반을 만들어준 잠언이라고 생각합니다.”

펄만은 이제 많은 젊은 예비 음악학도를 양성하고 있다. 그가 지금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굴리고 있는 제자들에게 외치고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이 어린 시절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말이다.

“연습하라, 그리고 또 연습하라! 천재는 99% 연습에서 나온다.”

강연에 나섰을 때 펄만은 “세상의 모든 음악가는 상황이 어찌됐든 간에 자신이 관심을 두었던 분야에 목표를 세웠고 진정한 실력자가 되기 위해 아낌없는 시간을 투자해 연습을 했다고 봅니다”고 강조하면서, “여러분이 어느 한 분야의 대가가 되기 위해서는 연습 그리고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라는 조언을 해주고 있다.

펄만의 이런 주장은 아마 음악가들에게만 주는 충고는 아니라고 본다.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선사해주는 교훈이 아닐까?



이자크 펄만(Itzhak Perlman)
20세기 가장 뛰어난 바이올린 독주자
1945년 이스라엘 텔아비브 태생.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수식어를 듣고 있다. 매우 정교한 음악 해석과 뛰어난 테크닉을 가미시켜 연주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전 세계 주요 각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페스트벌, 리사이틀, 오케스트라 협연에 단골로 초빙되고 있다.

소아마비에 걸려 4살 때 다리 절단 수술을 받았다. 신체적인 결함에서 온
콤플렉스를 텔아비브에 위치한 슈라밋 고등학교에 입학해 바이올린을 공부하면서 털어낸다.
1958년 미국으로 이주한다. 1963년 카네기 홀에서 데뷔 무대 공연을 갖는다. 2000년 12월 그동안의 음악 공적을 인정받아 당시 클린턴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국가 예술 메달 National Medal of Arts’을 수여받는다. 고
이스라엘 필하모닉과 협연을 지속하고 있다. 존 윌리암스와 팀웍을 이뤄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 1993> 사운드트랙에 참여, 아카데미 작곡상을 따내는 데 일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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