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자 옆에 줄을 서라. 산삼 밭에 가야 산삼을 캘 수 있다.
2. 부자처럼 생각하고 부자처럼 행동하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자가 되어 있다.

 

3. 항상 기뻐하라. 그래야 기뻐할 일들이 줄줄이 따라 온다.
4. 남의 잘됨을 축복하라. 그 축복이 메아리처럼 나를 향해 돌아온다.

 

5. 써야할 곳 안써도 좋을 곳을 분간하라. 판단이 흐리면 낭패가 따른다.
6. 자꾸 막히는 것은 우선 멈춤 신호다. 멈춘 다음 정비하고 출발하라.

 

7. 힘들어도 웃어라. 절대자도 웃는 사람을 좋아한다 .
8. 들어온 떡만 먹으려 말라. 떡이 없으면 나가서 떡을 만들라.

 

9. 기도하고 행동하라. 기도와 행동은 앞 바퀴와 뒷 바퀴다.
10. 자신의 영혼을 위해 투자하라. 투명한 영혼은 천년 앞을 내다본다.

 

11. 마음의 무게를 가볍게 하라. 마음이 무거우면 세상이 무겁다.
12. 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돈 앞에서 진실하라.

 

13. 씨돈은 쓰지 말고 아껴 둬라. 씨돈은 새끼를 치는 종자돈이다.
14. 샘물은 퍼 낼수록 맑은 물이 솟아 난다. 아낌없이 베풀어라.

 

15. 헌 돈은 새 돈으로 바꿔 사용하라. 새 돈은 충성심을 보여준다.
16. 적극적인 언어를 사용하라. 부정적인 언어는 복 나가는 언어다.

 

17. 깨진 독에 물 붓지 말라. 새는 구멍을 막은 다음 물을 부어라.
18. 요행의 유혹에 넘어 가지 말라. 요행은 불행의 안내자다.

 

19. 검약에 앞장 서라. 약중에 제일 좋은 보약은 검약이다.
20. 자신감을 높여라. 기가 살아야 운이 산다.

 

21. 장사꾼이 되지 말라. 경영자가 되면 보이는 것이 다르다.
22. 서두르지 말라. 급히 먹은 밥에 체하기 마련이다.

 

23. 세상에 우연은 없다. 한번 맺은 인연을 소중히 하라.
24. 돈 많은 사람을 부러워 말라. 그가 사는 법을 배우도록 하라.

 

25. 본전 생각을 하지 말라. 손해가 이익을 끌고 온다.
26. 돈을 내 맘대로 쓰지 말라. 돈에게 물어 보고 사용하라.

 

27. 느낌을 소중히 하라. 느낌은 신의 목소리다.
28. 돈을 애인처럼 사랑하라. 사랑은 기적을 보여준다.

 

29. 기회는 눈 깜박하는 사이에 지나 간다. 순발력을 키워라.
30. 말이 씨앗이다. 좋은 종자를 골라서 심어라. 

 

31. 작은 것 탐내다가 큰 것을 잃는다. 무엇이 큰 것인가를 판단하라.
32. 돌다리만 두드리지 말라. 그 사이에 남들은 결승점에 가 있다.

 

33. 돈의 노예로 살지 말라. 돈의 주인으로 기쁘게 살아 가라.
34. 절망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라. 희망만이 희망을 싹 틔운다.

 

35. 기쁨 넘치는 노래를 불러라. 그 소리를 듣고 사방팔방에서 몰려든다.
36. 지갑은 돈이 사는 아파트다. 나의 돈을 좋은 아파트에 입주시켜라.

 

37. 불경기에도 돈은 살아서 숨쉰다. 돈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38. 값진 곳에 돈을 써라. 돈도 신이 나면 떼지어 몰려온다.

 

39. 돈 벌려고 애쓰지 말라. 돈을 사랑하기 위해 애를 써라.
40. 인색하지 말라. 인색한 사람에게는 돈도 야박하게 대한다.

 

41. 더운 밥 찬밥 가리지 말라. 뱃속에 들어가면 찬밥도 더운 밥된다.
42. 좋은 만남이 좋은 운을 만든다. 좋은 인연을 소중히 하라.

 

43. 효도하고 또 효도하라. 그래야 하늘과 조상이 협조한다.
44. 돈을 편하게 하라. 아무데나 구겨 넣으면 돈도 비명을 지른다.

 

45. 느낌을 소중히 하라. 느낌은 하늘의 목소리다.
46. 한발만 앞서라. 모든 승부는 한 발자욱 차이다.

 

47. 돈은 보물이다. 조심조심 다루어라.
48. 있을 때는 겸손하라. 그러나 없을 때는 당당하라.

 

49. 부지런하라. 부지런은 절반의 복을 보장한다.
50. 돈은 돈을 좋아한다. 생기는 즉시 은행에 입금시켜라.

 

51. 돈은 잠자는 사이에도 쉬지 않고 새끼친다. 기뻐하라.
52. 티끌 모아 태산이 된다. 작은 돈에도 감사하라.

 

53. 돈을 값진 곳에 써라. 돈도 자신의 명예를 소중히 안다.
54. 돈에 낙서하지 말라. 당신의 얼굴에 문신하면 어떻겠나를 생각하라.

 

55. 찢어진 돈은 때워서 사용하라. 돈도 치료해 준 사람에게 감사한다.
56. 여자와 개와 돈은 같다. 쫓아 가면 도망가고 기다리면 쫓아온다.

 

57. 돈과 대화를 나눠라. 돈의 말에 귀를 기울여라.
58. 안달하지 말라. 돈은 안달하는 사람을 증오한다.

 

59. 마음이 가난하면 가난을 못 벗는다. 마음에 풍요를 심어라.
60. 돈이 가는 길이 따로 있다. 그 길목을 지키며 미소를 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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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억원대 부자들은 전문가의 상담과 조언에 늘 관심을 기울이며 ‘감(感)’보다는 ‘이론’을 존중한다. 부자라고 다 부자가 아니다. 수천억원을 가진 큰 부자도 있고 10억원대의 작은 부자도 있다. 우리가 10억원대 부자에게 주목하는 이유는 경제적인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최소한도의 부자이면서 정신적으로도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단계에 있는 부자이기 때문이다. 10억원대 부자들에게서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이러한 공통점에서 우리는 만년서민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단초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뚜렷한 목표의식이 있다

왜 내가 부자가 되어야 하는가? 진정한 부자란 어떤 사람인가? 내 삶의 철학에서 부(富)가 차지하는 비중은 또 어떠한가? 나는 어떤 부자가 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 부는 어떻게 이루어야 하는가? 10억원을 모은 부자들은 이러한 일련의 질문에 모두 대답할 수 있는 주관이 있었다. 이런 주관은 자신감으로 이어지고 삶 자체를 긍정적으로 보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실제로 막연하게 부자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것보다 나는 언제까지 얼마를 만들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훨씬 더 실현 가능성이 높아진다.

건설회사 자재부장으로 근무하던 이 사장은 경제적인 자유를 좀더 빨리 얻기 위해서 자영업을 선택한 경우다. 이사장은 고용불안으로 언제 회사를 그만두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렇다면 창업을 서두르자’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그래서 선택한 업종이 평소에 관심을 갖고 있던 자동차정비업이다. 그렇게 시작한 사업은 직장생활보다 두세 배나 큰 고난의 연속이었다. 사실 직장생활이야 적당히 게으름을 피워도 꼬박꼬박 월급이 나오지만 자신의 사업을 하게 되면서 지속적인 마케팅과 직원관리, 고객관리를 모두 직접 하다 보니 몸이 3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직장에 다닐 때는 그렇게 많던 아침잠이 자기사업을 하면서 싹 사라졌다. 아침 7시에 출근해서 밤 11시에 퇴근하는 고된 생활이 전혀 고되게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어떻게 하면 빨리 이 사업을 안정시킬 것인가 하는 데에만 모든 생각이 모아졌다.

이사장이 제일 먼저 착안한 아이디어는 ‘ROTC 마케팅’이었다. ROTC 24기였던 이사장은 체육대회를 개최하고 크고 작은 각종 모임을 주관하는 등 특유의 친화력으로 안산에 사는 ROTC 선후배들을 모두 고객으로 확보했다. ROTC 선배의 도움으로 삼성화재 애니카서비스를 지원하는 정비업체로 등록된 이후 매출액이 부쩍 늘었다. 사업을 시작한 지 5년 만에 이사장의 자산은 10억원을 돌파하였다. 불안감 속에서도 직장생활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었다면 만져보기 어려운 돈이었다.

이사장은 일찍부터 회사의 정리해고 방침에 위기를 느끼고 자신의 사업을 창업한 경우다. 남들이 모두 정리해고를 당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그는 과감하게 출사표를 던졌고 지금은 이미 사업의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이렇게 된 원인은 나름대로의 스케줄에 따른 뚜렷한 목표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장점은 항상 멀리 내다보고 일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창업을 꿈꾸는 대다수 직장인은 공상이나 망상에만 파묻혀 창업을 ‘꿈’으로만 간직하는 데 그치는 데 비해 이사장은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과감성과 추진력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돈이 무서운 줄 안다

자수성가하여 부자가 된 사람 중에는 혹독한 가난을 이겨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그들은 돈의 무서움을 뼛속 깊이 알고 있다. 이렇게 젊어서부터 고생을 하다보니 돈에 대한 감각이 보통사람보다 더 빨리 트이고 일단 손에 들어온 돈을 함부로 쓰는 일도 없었다. 10억을 모은 부자들은, 남들이 구두쇠라고 손가락질하더라도 ‘돈의 무서움을 모르는 숙맥들이 하는 얘기’라며 간단히 넘길 줄 아는 사람들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곤 ‘그것 두 쪽밖에 없다’는 임사장은 돈의 무서움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4년 내내 장학생으로 대학을 졸업한 임사장은 학비 걱정은 면했으나 기거할 집도 없었고 책을 사 본다는 것조차 사치스럽게 여길 정도였다. 가난한 고학생으로 보증금 10만원에 월세 3만원짜리 쪽방을 얻어 생활하면서 겨울에는 연탄을 때지 못해 냉방에서 자야만 했다. 그러다가 어렵게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서 3년 5개월을 장교로 근무하면서 돈을 모았다. 당시 초급장교인 소위 봉급은 15만6000원, 중위 봉급은 17만8000원이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인천에 16평 아파트를 장만했다.

임사장이 처음 취직해 받은 봉급은 32만원. 그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회사의 주택자금대출을 끼고 산 24평 아파트의 중도금이 모자라 새벽에 신문배달을 하고 출근했던 그는 아파트에 입주하고 나서 굵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돈을 모았다. 이렇게 해서 임사장은 32평 아파트로 넓혀간 뒤에야 비로소 장롱과 TV를 구입했다. 그는 현재 전망 좋은 43평 아파트에 거주하면서도 여전히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박봉으로 시작된 임사장의 자산은 이런 검소한 생활과 아파트 투자로 10억원을 넘길 수 있었다.


티끌이 모이면 태산이 된다

부자들은 처음에 목돈을 만드는 것이 제일 힘들다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한다. 10억원대의 부자들도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이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힘들게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투자에 나서고, 돈을 불려 나가서 끝내는 10억원이 넘는 부자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조그마한 돈이라도 아끼기 위해서 아이디어를 짜내는 것도 10억원대 부자들의 몫이었다.

지금은 여유로운 중년을 보내고 있는 이회장은 아이들이 어릴 때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이회장은 어린이날을 맞아 다른 데도 아닌 가까운 대학을 찾은 것이다. 놀이공원에 가서 줄만 서다가 그냥 돌아오는 것보다는 잔디밭이 있는 근처의 대학교에 가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 지금에야 대학 구내에서도 주차비를 받지만 당시에는 주차비도 받지 않았고 입장료는 당연히 없었다.

이회장의 집은 수유동이어서 어린이날만 되면 아이들과 함께 가까운 고려대학에 갔다. 자기네 가족만 가면 재미없으니까 친구들 가족과 같이 가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친구들과 같이 모인 것도 이회장의 아이디어였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그늘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아이들은 자기네들끼리 뛰어다니며 정신이 없었다. 수돗가에서 아이들은 물장난을 하며 즐겁게 논다. 원래 어른들은 불장난을 좋아하고 아이들은 물장난을 좋아하는 법이다. 아이들이 지쳐서 헐떡거릴 때까지 마음껏 놀게 내버려두고 나중에 재미있었냐고 물어보니 아이들의 반응은 ‘최고’라는 것이었다. 내년에 또 오자고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회장은 놀이공원에 가는 경비의 10분의 1만을 쓰고도 아이들로부터는 ‘최고 아빠’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었다. 부자답지 않다고? 티끌을 모으지 못하면 태산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부자들은 없다. 기발한 아이디어로 지출을 줄인 덕택에 이회장은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만 9억원에 달한다.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부자들은 늘 돈에 대해서 연구하고 공부하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돈에 대해서 늘 공부하다보니 투자에서의 성공률이 일반인보다 월등히 높다. 좋은 투자처에 대한 안목은 철저한 공부에서 비롯된다고 부자들은 한결같이 지적한다.

필자 역시 학창시절에 공부 잘했던 친구들이 큰 부자가 된 경우를 본 적이 별로 없다. ‘왜 그럴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더니 그 친구들은 하나같이 사회에 나와서는 공부와 담을 쌓고 있었다. 이들은 좋은 대학을 나오고 성적이 좋다보니 좋은 회사에 취직하기도 쉽다. 그리고 입사한 후에도 힘든 영업부서보다는 상대적으로 일하기 쉬운 본사의 지원부서에서 볼펜만 굴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그럭저럭 생활하다가 때가 되면 은퇴하는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정말 재미없고 따분한 ‘범생이’ 생활인데다 인생의 참된 멋을 모르고 일생을 보내는 사람들이다. 솔직히 이런 사람들은 부자의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고 그저 중산층에 안주하는 데서 끝나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영어는 서툴지만 ‘돈공부’는 확실하게


부부간 금실이 좋다는 것도 부자들의 공통점이다.
예비부부라면 결혼을 서두르는 것도 재테크의 지름길.
여기에 비하면 학창시절에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사회에 나와서는 성공한 친구들을 여럿 보았다. 이런 친구들은 비록 영어단어 외우는 것에는 서툴고 수학공식 암기하는 것을 힘들어했지만 사회에 나와서 하는 ‘돈 공부’에는 모두 우등생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학교에서 하는 공부에 만족하고 안주하는 사람은 그저 평범한 소시민이 되어버린 반면 비록 학교에서 배움이 부족했더라도 사회에서 ‘돈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은 성공한 것이다.

돈 공부는 경제신문 읽기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신문을 읽다가 중요하다 싶은 것은 스크랩을 해놓는다. 필자가 만난 사람 중에는 스크랩하는 종이가 아까워서 두꺼운 전화번호부를 스크랩북으로 쓰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놓은 스크랩북을 시간날 때마다 들춰본다. 이런 관심으로 재테크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쌓게 되고 이렇게 쌓은 정보와 지식은 재테크의 훌륭한 무기가 된다.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는다

기회는 수줍은 처녀같이 왔다가 날쌘 토끼처럼 사라진다고 한다. 그래서 언제 어느 때 기회가 나에게 올지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한다. 이런 준비를 해놓지 않으면 기회가 지나갔을 때 ‘아차!’ 하기도 하고 아예 기회가 왔었는지도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도 있다. 이런 기회는 적절한 곳에 적절한 투자를 함으로써 잡을 수 있다.

현재 주유소만 4군데를 경영하는 50억원대 부자 기사장은 IMF 사태 때 주유소를 매입해 큰돈을 벌었다. 지금은 주유소의 거리제한 철폐로 수익성이 많이 떨어졌다지만 당시는 ‘주유소 거리제한’이라는 규정이 있어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 대접을 받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IMF 직후의 고금리와 외상매출을 견디지 못한 주인들은 주유소를 매물로 내놓을 수밖에 없었고 기사장은 이것을 사들여 큰 수익을 올렸다. 더군다나 기사장이 주유소를 매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현금확보에 나선 S정유, K에너지 등에서 덤핑기름이 나왔다. IMF 와중에서 ℓ당 700원대였던 휘발유 값은 1300원대로 올랐는데 휘발유를 반값에 공급받으니 얼마나 큰수익이 났겠는가?

모두들 IMF 관리체제를 힘겹게 겪고 있었지만 이때가 기사장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기였던 것이다. 부동산투자와 주유소투자로 부자의 길에 들어 선 기사장의 ‘10억 노하우’는 ‘기회는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미리미리 준비한다

10억을 굴리는 부자들에게 ‘즉흥적’이라는 단어는 없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 전에 미리 준비한다. 준비가 덜 되었다면 행동으로 옮기지도 않는다. 생명보험사 출신인 최부장은 IMF 직후 현대증권 주식을 2800원에 사서 4만9000원에 팔아 이것만으로 10억원을 벌어들였다.

10억원대 부자가 된 그는 정년퇴임 후 자연을 벗삼아 사는 인생을 꿈꾸어왔다. 최부장은 본인이 꿈꾸는 전원생활을 즐기기 위해 주로 겨울부터 초봄까지 땅을 보러 다닌다. 여름에는 나뭇잎이 시야를 가려서 제대로 판단을 할 수가 없고 가을에는 단풍과 낙엽으로 인해 땅을 고르는 데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하지만 겨울이나 초봄에는 눈이 먼저 녹는 곳, 찬바람이 불지 않는 곳, 따뜻한 양지 등을 쉽게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최부장은 이때를 이용하여 전원주택이나 휴양지 터를 물색하러 다닌다.

지난번에 눈여겨보았던 집터는 평지보다 약간 언덕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집터 옆으로 도랑이 흐르고 있다는 점이 더욱 마음에 들었는데 혹시 장마 때 물이 불어나서 집까지 침범할지 몰라 지난 장마 때 직접 가보기도 했다고 한다. 10억원의 자산을 지렛대로 또 다른 행복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에는 펜션 쪽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다. 단순한 전원주택에서 벗어나 펜션을 겸용하려는 이유는 콘도에 비해서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획일적으로 지어진 콘도에서는 콘크리트 벽이 그대로 드러나지만 최부장은 통나무로 전원주택을 지을 예정이어서 마치 숲속의 오두막집 같은 분위기를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다. 또한 여름에는 별자리 관측, 눈덮인 겨울에는 눈조각전(展) 같은 이벤트도 개최해서 펜션을 찾는 사람들에게 추억을 만들어줄 생각이다. 콘도처럼 슈퍼마켓도 없고 노래방도 없지만 진한 감동을 주면 단골 손님을 확보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으로 확신한다. 최부장은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고 젊은이들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돈을 번다는 기분보다는 타인의 문화생활에 기여함으로써 그 사람의 삶의 질을 높여준다는 자부심으로 펜션을 운영하려고 한다.


섣불리 차를 사지 않는다

10억원대 부자들은 저축하는 동안 저축에 걸림돌이 되는 모든 것을 터부시하고 미루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저축하는 동안에는 절대로 차를 사지 않는다. 안정적인 위치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차에 눈을 돌린다.

자동차를 산다는 것은 얼마의 돈을 주고 자동차를 산다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자동차를 구매함으로써 각종 세금에 노출될 뿐만 아니라 자동차를 유지하기 위한 각종 비용 또한 엄청나다. 엔진오일도 갈아줘야 하고 미션오일도 갈아줘야 한다. 가끔씩 점화 플러그도 교체해야 할 것이고 겨울이 되면 부동액도 넣어야 한다. 이렇게 나가는 돈은 목돈을 모으는 데 적지 않은 장애요소가 된다. 또한 보험료는 어떠한가? 초보운전자의 보험료는 100만원이 넘는 것이 예사다.

꼭 차를 사야 할 절박한 사정이 있다면 연식 변경기간을 활용하는 편이었다. 11월 말 정도가 되면 각 자동차회사에서는 자동차 가격을 할인해주는 이벤트를 실시한다. 자동차회사에서 이런 이벤트를 벌이는 이유는 중고자동차 가격이 연식으로 매겨지기 때문이다. 즉 2002년식일 경우에는 1월이나 12월이나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대부분 한 달을 더 기다려 2003년식을 사려고 하다 보니까 2002년식을 좀 싸게 주는 것이다. 중간에 중고차시장에서 차를 판다면 약간의 손해가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폐차할 때까지 타고 다닌다는 생각이라면 연식이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다.

자동차 관리도 스스로
10억원을 모은 부자들 중에는 아예 중고차를 구입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대신 괜히 싸게만 사려고 하다가 결함이 있는 차를 고르는 실수를 범할 수도 있기 때문에 중고차만큼은 제값을 주고 제대로 된 것을 사는 편이었다. 이렇게 차를 산 후에는 폐차할 때까지 타겠다는 마음으로 차를 관리하고 있다. 그래서 간단한 자동차 관리는 손수 하는 편이다. 조금 수고스럽더라도 세차를 직접하는 경우도 많다. 세차장에 맡기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10억 부자’ 치고는 ‘좀스럽다’는 이야기를 들을 법도 하지만 오히려 그러니까 10억원을 모았을 것이라며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다.


배우자와 금실이 좋다

대부분의 부자는 부부관계가 원만한 편이다. 아무래도 경제적으로 안정되니까 서로에게 불만도 적은 것 같다. 하지만 돈을 모으는 과정에서 서로 도움을 주지 못하고 이해를 못하는 경우는 위험하다. 여자는 남자가 ‘쩨쩨하다’고 비난할 것이고 남자는 여자가 살림도 제대로 못한다고 힐난할 것이다. 결국은 가정불화의 틈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결혼을 한 사람이라면 아내에게 혹은 남편에게 먼저 이해를 구해야 한다. 손뼉도 부딪쳐야 소리가 나는 법인데 가족의 도움 없이 10억원을 만들기는 지난한 일이다. 남편은 열심히 돈을 만들 궁리를 하는데 아내는 한 달에 서너 번씩 미장원에 간다든지, 혹은 아내는 알뜰살뜰 사는데 남편은 고급 술집에서 양주나 마시고 있다면 10억원을 벌기는커녕 가정불화의 불씨만 만들 것이 뻔하다.

결혼을 하지 않은 경우라면 배우자가 될 사람에게 협조를 구해 결혼을 서두르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미혼남녀가 돈을 모으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데이트 비용이다. 얼마전 1회 데이트 비용이 7만2000원이라는 조사결과가 나온 적이 있었다(커피 두 잔 7000원+영화표 두 장 1만2000원+저녁식사비 1만6000원+호프집 500cc 맥주 두잔, 안주 2만5000원+노래방 1만2000원=7만2000원). 이렇게 한 달 평균 10번을 만난다고 하면 매달 72만원의 적금을 부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분위기 때문에 호텔의 스카이라운지에서 고급 와인을 마시면 그만큼 ‘10억’은 점점 멀어지게 된다.

어차피 해야 할 결혼이라면 빨리 하는 것이 재테크의 한 방편이 될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결혼을 한 다음에는 부부가 똘똘 뭉쳐 ‘10억 만들기’의 행로에 나서야 한다. 재테크에 있어 먼저 시작하는 것만큼 유리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투자는 반드시 여유자금으로

필자는 15년 간 증권회사에 근무하면서 빚내서 투자하는 사람치고 부자가 된 경우는 단 한명도 보지 못했다. 흔히 주식투자를 해서 수익을 내어 이 돈으로 집을 사려고 한다. 하지만 부자들은 집을 먼저 사고 그 다음에 주식투자에 나선다. 투자라고 하는 것은 최대의 수익을 얻기 위해 리스크를 떠안고 하는 행위다. 따라서 투자의 초점은 리스크를 어떻게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최대한의 수익을 올릴 수 있느냐에 맞추어져야 한다. 첫 번째 주안점이 리스크이고 그 다음이 수익이다. 부자들은 모두 이렇게 투자한다. 하지만 부자가 되지 못한 일반인은 수익이 첫 번째고 리스크 관리는 안중에도 없다. 이런 식으로 투자해서는 성공하기 힘들다.

경기도청에 다니는 이계장은 요즘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이계장은 2002년 봄 주가지수가 800포인트를 넘어서는 활황장세를 보이자 1000만원을 대출받아 주식에 투자했다. 주당 5만5000원에 매수한 안철수연구소 주식은 한때 6만원을 넘기도 했지만 지금은 1만7000원 근처에서 맴돌고 있다.

70%의 손실률도 손실률이지만 매달 나가는 이자 때문에 속이 쓰리지 않을 수 없다. ‘매달 내는 이자로 적금을 들면 만기 때 목돈을 만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면 이중으로 손해보는 것만 같아 더더욱 속이 쓰리다. 주식에 손을 대기 시작할 때는 잠깐 들어갔다가 수익을 챙겨서 후닥닥 빠져나올 심산이었는데 어찌어찌 하다보니 단단히 코가 꿰인 것이다.
투자는 종잣돈으로 하라는 말을 흘려들은 것이 화근이었다.


자녀교육에 엄격하다

부자들의 공통된 근심거리는 자녀에 관한 것이다. 애써서 자식을 길러놓았는데 행여 엉뚱한 길로 갈까봐 노심초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자들은 아이들에게 어릴 때부터 바른 경제교육을 시키기 위해 노력중이다. 벤처회사를 설립하여 10억원대 자산가가 된 구우정보통신 이사장의 자녀 경제교육은 독특하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우리집’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이다. 그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얘기한다고 한다.

“어째서 이 집이 ‘우리집’이냐? 이 집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집’이다. 이 집 살 때 너희들이 돈을 보탠 것이 있느냐? 없지? 그런데 어떻게 ‘우리집’이 될 수 있느냐? 꼭 명심해라. 이 집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집’이다.”

“우리집이 아니라 부모님 집”
이렇게 얘기하면 냉정한 사람같이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는 무척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이렇게 자녀들을 모질게 대하는 것은 행여 부모에게 의지하는 나약한 아이들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자녀교육의 키워드는 ‘자생력’이다.

사실 이사장은 호남의 명문가 출신이고 그의 형제들도 모두 우리 사회에서 이른바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그런 그가 굳이 자녀에게 자생력을 강조하는 이유는 ‘부자병’에 걸린 젊은이들을 간혹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녀들에게 아버지의 돈과 자식의 돈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늘 강조하고 있다. 자녀들에게 주는 용돈의 수준도 또래 아이들보다 약간 낮게 정하고 있다. 또한 자신의 유산을 나중에 자녀들에게 물려줄지언정 지금은 그와 같은 이야기를 절대로 입밖에 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자신의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시킬 것이기 때문에 너희들 인생은 너희들이 알아서 개척해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다. 엄격한 자녀 교육은 부자가 되는 또 하나의 필요조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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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견디는 힘이 더 멀리 뛰게 한다.

참을성이 적은 사람은 그만큼 인생에 있어서 약하다. 한 줄기의 샘이 굳은 땅을 헤치고 솟아 나오듯
참고 견디는 힘이 마침내 광명을 얻게 한다. 하나의 어려운 일을 참고 극복하면, 강한 힘의 소유자가
된다. 고난과 장애물은 언제나 새로운 힘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고난과 장애물 앞에서 결코 낙심하지
말자. 오히려 그것을 딛고 일어서서 더 멀리 바라보자. 그것을 발판으로 하여 더 멀리 뛰자. ‐러셀

가수 김흥국 씨는 무명 10년 만에 ‘호랑나비’로 일약 유명인이 된 케이스이다. 무명 10년은 그의 말
마따나 가진 건 몸 밖에 없으니 그저 몸으로 때워야 했던 시절들이었고 남몰래 눈물도 많이 훔쳤다.
어릴 때 그는 축구를 좋아했지만 축구화를 살 수 없을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다고 한다. 유명해진 이
후 남들보다 축구 홍보에 앞장 서고 월드컵 때도 대대적인 활약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굉장
히 낙천적인 소유자인 그는 어떤 고난과 장애물이 와도 참고 견디는 힘을 길렀고 그것을 통해 딛고 일
어서고자 노력했다. 이런 원동력이 주위에 어려운 분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했다. 비록 가
진 것을 없지만 나누려고 했다. 그가 크고 작은 선행을 베푼 것도 바로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
문이다.

‘호랑나비’가 뜬 이유는 아마도 그의 천성대로 상식을 깨는 춤과 꾸밈 없이 노래를 불러 편안했기
때문이다. 특유의 허스키한 웃음이 들어간 노래는 원래 의도된 것이 아니라 기분이 좋아 그냥 낄낄거
린 것이 녹음되었는데, 콧수염이 그 모습의 일부이듯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도 성공적인 요인이 된 것
이다. 그의 얼굴은 항상 웃는 얼굴이다. 오랫동안 억지로라도 웃는 표정으로 살다 보니 얼굴 근육이
그대로 굳어버렸다는 김흥국 씨는 결코 낙심을 모르는 사람이다.


Q. 김흥국 씨를 생각하면 가수에서부터 축구, 불교, 해병대 등 많은 것이 떠오릅니다. 처음 연예인
이 된 계기는?

A. 어렸을 때부터 모든 것에 호기심이 많았던 저는,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부터 음악에 좀 더 많은 관
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서라벌고등학교 재학시절, 밴드부에 가입하게 되었죠. 엄격한 선
배들의 군기를 참아가면서 음악의 묘미를 제대로 느끼게 되었고, 내가 앞으로 쭈욱 해나갈 수 있는
일, 진정으로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이 음악이구나… 하는걸 깨닫게 됐습니다. 하지만 사회
에 나가 전문적으로 음악을 하다 보니 힘든 점도 참 많더군요.

B급 그룹의 일원으로 서러움을 맛보기도 했고, 작곡가 사무실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며 눈치만 보던 시
절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10여년간의 무명생활을 지내던 어느날, 열심히 노래를 부르며 다니던 끝에
제 노래가 빛을 발하게 되었고 그렇게 인기가수라는 힘든 대열에 낄 수가 있게 되었죠. 오죽하면 ‘무
명가수 무명가수’해서 제 이름의 호가 혹시 '무명'이 아닐까 할 정도로 기나긴 무명생활의 끝에 찾아
온 기회였습니다.

Q.유명연예인으로 각종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는데, 가장 큰 비결은?

A. 편안함과 솔직함, 이것이 제게 있어 가장 큰 무기이자 장점입니다. 사실 연예인으로 살아가다 보
면, 카메라 앞에서, 관객 앞에서 자신을 속이고, 포장하고, 돋보이려 노력하고자 하는 충동이 일어나
곤 합니다. 하지만 그건 그저 연기일 뿐, 제 진짜 모습은 아니죠. 방송국과 각 가정의 라디오 및 TV까
지는 거리가 아주 멀지만 마이크를 타고, 브라운관을 타고, 또 제 목소리를 타고서 진실은 통하는 법
입니다. 저도 고생을 했던 사람이고, 평범한 소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저 마음을 통할 수 있는, 그러
면서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좋은 친구이자 형제, 혹은 동네 아저씨처럼 마음을 다할 뿐이죠. 아, 저 사
람도 우리랑 똑같은, 아니 어쩔 땐 나보다도 더 부족한 면도 있는 내 주위의 이웃일 뿐이구나… 하는
동질감이, ‘김흥국’이란 인간에 대한 호감도를 더 높여주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Q.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해줄 말이 있다면?

A. “쥐구멍에도 해뜰날있다”는 말이 있죠. 하지만 그 쥐구멍도 문이 닫혀있으면 아무리 해가 떠도
그 빛은 들어오지 않습니다. 노력 없이 기다리기만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죠. 가끔 보면, 제대로 된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언젠간 풀리겠지… 하는 안이한 마음으로, 주위
에 잘되는 사람들을 보면 운이 좋아 저러겠지… 하는 질투심만 키운 채 하루하루 시간을 버리는 사람
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 좋은 기회가 찾아온다고 해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축구할 때도 보
세요. 자신의 포지션에서 가만히 서 있는다고, 게임이 풀립니까? 공을 쫓아 이리저리 뛰어다녀야만 볼
을 잡을 수 있고, 그래야만 슛을 날릴 수 있는 겁니다. 앉아만 있기엔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
다. 좀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서 열심히 뛰는 것! 그것만이 좀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지름길일 것입니
다.


김흥국 씨의 퍼스널 브랜드 전략 3가지

1. 솔직하게 접근하라.

김흥국 씨의 가장 큰 무기는 솔직함이다. 자신을 속이고, 포장하지 않고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
고 노력했다. 가끔 그것이 지나친 애드립으로 주위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평범한 이
웃 같은 이미지를 확보하는데 그의 천성대로 꾸밈 없이 솔직하게 접근한 것이 브랜드 전략에 주효했
다.

2.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라.

김흥국 씨는 자신이 좋아하는 축구를 위해 뛰었다. 자연스레 축구사랑모임 회장, 월드컵문화시민예술
단 단장, 한.일 월드컵축구대회 안전홍보위원 등 축구에 관련된 직함을 여러 개를 갖게 되었고 축구
에 대한 사랑으로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으며 널리 자신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3.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를 확보하라.

김흥국 씨는 콧수염, 너털웃음 등 자신의 트레이드마크(trademark)를 확보하여 동네 이웃집 아저씨 같
은 이미지를 굳건히 하였다. 1989년 각종 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한 '호랑나비'로 일약 ‘10대 가수’
에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다. TV 프로그램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 나와 결혼 상대자 소개와 태어날 아
이의 이름을 ‘번칠이’로 짓고 임신과 출산의 과정을 공개해 더욱 인기를 높였고, 유행어 '아~응애
에요'로 히트를 쳤다.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를 확실히 대중에게 포지셔닝 하여 그의 방송생명력을 길
게 연장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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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 트레이시는 그리 넉넉하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선량한 시민이었으나 안정된 직업이 없었다. ‘그럴 여유가 없어’라고 말하는 것이 집안의 주제가처럼 여겨질 정도였고, 언제나 부족하게 지내야 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가정 형편 때문에, 졸업할 즈음 학교를 떠나야 했던 것이다.

그의 첫 번째 직업은 조그만 호텔의 접시 닦이였다. 그 뒤엔 주차장에서 세차하는 일을 했으며, 밤늦게 건물 바닥을 닦는 청소부로 일하기도 했다.
제재소에서 통나무를 쌓는 일, 벌목꾼, 주유소 점원, 화물선 잡역부 등 온갖 허드레 직업을 전전했다.

집이 없어서 겨울엔 자동차에서 잠을 잤고, 여름철엔 노숙을 했다. 학력이 보잘것없어 자신의 미래가 암울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육상 경기에서 한 바퀴 이상 처지면, 맨 앞에서 달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당시에 그의 기분이 그랬다. 남보다 너무나 뒤쳐져 있어서 오히려 자신이 첫 번째인 것처럼 보일 때가 종종 있었다.

본의 아니게 이 일 저 일을 하면서,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에 늘 전전긍긍했다. 그는 상사들이 난데없이 나무라는 통에 주눅이 들기 일쑤였고, 스스로를 장기판의 졸(卒)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 인생을 바꾼 질문 하나 >

브라이언 트레이시는 어느 날 자신을 돌아보았다.

이 직업 저 직업을 전전하면서 늘 돈 걱정을 하면서 살고 있고, 자기가 한 노력이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스스로에 대해 실망하고, 앞날에 대해 희망을 잃은 채 조용히 살고 있었다.

반면에 주위에는 성공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이렇게 살고 있는데 저 사람들은 성공적인 삶을 사는가?’

그는 이 질문에 대해 답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실천했다.

그리고 결국 그 의문은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브라이언 트레이시는 오늘날 남부 캘리포니아에 멋진 저택을 짓고 가족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브라이언 트레이시 인터내셔널 사를 설립해 미국과 캐나다를 비롯한 10여 개국에서 비즈니스를 훌륭히 이끌고 있다.

매년 여러 나라에서 50만 명 가량을 대상으로 세미나와 워크숍을 열고 있으며, IBM이나 맥도널드 더글러스 같은 큰 회사와 함께 일해 왔다.

그는 현재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동기부여가이자, 비즈니스 분야의 컨설턴트이며,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서른이 넘어서야 다시 공부를 시작하여 무역학 학사와 MBA 학위를 취득했다. 철학, 경제, 역사, 경영 분야에서 오랫동안 수많은 책과 논문을 섭렵하면서 폭넓은 지식을 쌓아 왔다.

놀랄 만큼 해박한 지식과, 세상을 꿰뚫어보는 지혜로 성공, 리더십, 자기 개발, 경영, 세일즈, 전략 기획, 목표 수립, 시간 경영, 창조성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고 있다.

그가 집필한 저서들은 31개국 18개 언어로 출간되었으며, 우리 나라에도 다섯 권이 출간된 바 있다.

그 가운데 <절대 변하지 않는 8가지 성공원칙>은 비즈니스에 적용할 성공 법칙이 가득한 책이며, <세일즈 슈퍼스타>는 판매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보아야 할 명저이다.
<내 인생을 바꾼 스무 살 여행>은 특히 젊은이들에게 큰 도움을 줄 만한 좋은 책이다.


< 자연은 농담을 모른다. >

그가 진지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발견한 최초의 돌파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과의 법칙’이었다.

당시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올림푸스 산에 있는 신들이 인간의 운명을 마음대로 주무른다고 믿었을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선보였다.

모든 현상은 이유가 있어서 발생하며, 단지 우리가 그 이유를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법칙에 의하면 모든 성취, 부, 행복, 번영, 성공은 특정한 원인과 행동으로 인해 벌어지는 직접적 혹은 간접적 결과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뿌린 대로 거두리라’와 불경에 나오는 ‘인과응보’가 같은 뜻이다.

따라서 원하는 결과를 명확히 규정하고, 그 원인을 만들어 갈 수 있다면, 능히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더 쉬운 방법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룬 사람들을 연구하고, 그들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들이 성취한 것과 동일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생각은 원인이고, 조건은 결과이다.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처한 조건이 달라진다는 얘기이다.

브라이언 트레이시는 다음과 같은 괴테의 말을 인용하길 좋아한다.

“자연은 농담을 모른다. 자연은 늘 진실하고 엄격하고 옳으므로 오류나 착오는 언제나 인간의 몫이다. 자연은 자연의 이치를 알지 못하는 자를 경멸하고, 오로지 타당하고 순수하고 진실한 자만을 받아들이며, 그들에게 자연의 비밀을 보여준다.”


< "당신들은 사하라에서 죽을 것이다." >

원주민들조차 극구 말렸던 죽음의 여행. 하지만 목표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목숨을 건 도전 앞에 불가능은 없었다.

브라이언 트레이시가 스무 살 때 2만7000킬로미터에 이르는 대장정을 마친 후 얻게 된 성공 원칙 일곱 가지.

브라이언 트레이시와 친구들은 불과 300달러씩을 내어 긴 여행에 나섰다.

그들은 자동차로 북아메리카를 서쪽 끝에서 동쪽 끝으로 횡단했고,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런던에 도착했다.

자전거를 타고 프랑스와 스페인을 관통했으며, 다시 자동차로 아프리카를 종단하며 죽음의 사하라 사막을 넘었다.

2만7000킬로미터가 넘는 대장정이었고, 그 목표를 이루는 데 12개월이나 걸렸다.

그들은 이 여행을 통해, 어떠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해내려고 한다면 반드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감동 어린 진실을 만나게 된다.

또 너와 내가 따로 없을 정도로 하나가 되어 서로 의지하고 돕고 격려하는 동료애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는 그 이야기를 <내 인생을 바꾼 스무살 여행>이라는 책에 담았는데, 문학적으로 매우 뛰어날 뿐만 아니라, 여행을 통해 배우는 진한 성공철학을 담아내고 있다.

이 책에서 브라이언 트레이시는 “누구에게나 건너야 할 사하라 사막이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성공의 열쇠는 하나에 집중하는 힘이다. 삶의 과정에서 당신의 모든 것 - 정신과 육체 - 을 쏟아 부어야 할 결정적인 시점이 있게 마련이다.
무엇인가를 이루고 싶다면, 사명감을 갖고 그것에 온 힘을 쏟아라. 일단 시작하면, 그 목표를 향해서 시간과 정력을 전력으로 투자하라.
한 순간도 긴장을 풀지 말라. 목표에 이를 때까지 계속해서 밀어붙여라. 완전히 성취할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라. 이것이 당신에게 주어진 시험이다.”


사하라 사막을 종단하며 그가 얻은 교훈은,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성공 원칙이다.

1. 어떤 일에서나 성공의 문을 열어주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첫 걸음을 떼는 것이다.

2만7000킬로미터라는 엄청난 거리를 가야 하는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첫 걸음을 떼었을 때였다. 만약 첫 걸음을 떼지 않았더라면 그 이후의 여행이 어찌 가능할 수 있었겠는가!


2. 목표를 향해 첫 걸음을 떼었다면, 그 이후로 실패의 가능성은 조금도 생각하지 말라.

인내력은 당신 자신에 대한 믿음, 또한 당신의 궁극적 가능성에 대한 믿음에 정비례한다.

인내력은 성공에 절대적인 것이며, 특정한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다. 또한 누구나 스스로의 내면 깊은 곳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마음의 결정이다.


3. ‘한 번에 하나씩!’이란 원칙대로 충실히 산다면,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목표도 성취해낼 수 있다.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지금, 바로 이 순간이다. 이 순간에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미래 전체가 결정된다. 당신이 매일, 아니 매 순간을 충실하게 산다면, 당신의 미래는 저절로 열릴 것이다.


4. 반대하는 사람을 멀리하라.

당신은 실패할 것이고, 당신은 소중한 시간과 돈을 낭비할 것이고, 사하라 사막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부정적인 사람들을 경계하라.

반대의 목소리에 굴복한다면, 당신은 어떤 일도 이루어낼 수 없다. 긍정적이고 낙천적이며 꿈을 가진 사람들과 가까이 하라.


5. 성공의 사다리를 끝까지 오르고 싶다면, 어려움과 난관을 결코 피해 갈 수 없는 소중한 통과의례로 받아들여라.

난관이나 역경에는 그에 합당한, 아니 그 이상의 기회와 결실을 안겨주는 씨앗이 담겨 있는 법이다.

아프리카 여행은 문제의 연속이었고, 수많은 실수를 해야 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을 통해 배우지 못했다면 틀림없이 사하라 사막에서 죽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어떤 일을 성취했다면, 그 과정을 곰곰이 돌이켜 보라. 성취는 수많은 난관을 이겨내고 그것에서 얻은 교훈으로 빚어낸 결실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6. 목표를 분명히 설정하라. 그리고 그 성취 과정에서는 유연하게 대처하라.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새로운 것을 과감하게 시도하라. 항상 열린 가슴으로 물 흐르듯이 유연하게 대처하라.

당신이 처한 환경이 전해주는 피드백을 기꺼이 인정하면서 궤도를 수정하라. 성공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핵심적인 가치가 이것이다. 그들은 탄력적이고, 융통성이 있는 사람들이다.


7. 누구도 혼자만의 힘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독불장군은 없다. 독립을 주장하는 젊은이는 인생의 깊은 의미를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각자 300달러로 2만7000킬로미터가 넘는 대장정을 하면서 여러 사람으로부터 따뜻한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도전은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삶에서 함께 웃음과 사랑과 눈물을 나누는 사람들은 소중한 보물과도 같은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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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은 준비된 자만이 누리는 특권”>


복(福)이란 엄밀하게 말하자면 주관적 개념이다.

그러나 누구나 부러워할 만큼 큰 돈을 벌었거나 힘든 일을 성취해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면 성공했거나 복 받은 사람이라고 쳐준다.

당사자도 내놓고 자랑하지는 않지만 내심으로는 행복해 한다.

‘운(運)이 좋았다’는 대체로 성공한 이들이 다소 겸양의 표현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보통사람 입장에서 보면 노력 부족 탓으로 돌리기보다는 ‘운이 없어서’라고 자위하기도 한다.

운이든 복이든 성공 CEO로는 삼성그룹의 창업자인 이병철 전 회장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생애를 통털어 하늘이 낳은 큰 부자 소리를 듣기에 충분했다.

상징적으로 ‘돈병철’이란 세인의 부러운 탄식을 듣기도 했다. 호암은 중요 사업구상 때마다 일본에서 보내곤 했다.

삼성재팬에서 이십수년 그의 수발을 들었던 정준명 사장에게 보여준 호암의 사람을 사로잡는 일화다.

격려 차원에서 ‘백지수표’를 당시 정 과장에게 준 것이다.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신뢰와 존경으로 승화됐다.

사람 경영에 뛰어난 그는 ‘사람복’이 많았다. 그것이 ‘돈복’으로 이어졌다. 그런 그에게도 안 되는 게 있었다.


< ‘무에서 유’를 창조한 행운아들 >

자식 농사와 골프점수, 그리고 자동차사업 진출이 그것이다. 뒤집어 얘기하면 그 세가지 빼고는 모두 만족스럽게 이뤘다는 말이 아닌가.

그의 ‘1등주의’와 ‘사업보국’이라는 경영철학과 투지, 그리고 노력으로 그는 모든 것을 달성했다.


현대그룹의 창업자인 고 정주영 전 회장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공 CEO다.

큰 부(富)를 이뤘을 뿐만 아니라 남북분단의 상징인 삼팔선 육로를 통해 우람한 소 1,000여 마리를 끌고 다닌 한국의 거인이었다.

그는 강원도 산골짜기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10여세 때 가출해 ‘시련은 있어도 절망이 없는’ 인생드라마를 일궜다.

그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했다. 그는 조선소 건립을 위한 자금을 꾸기 위해 런던에 갔다.

거북선이 있는 한국화폐를 보여주며 한국의 몇백년 된 조선산업 역사를 역설했다.

행운이 왔다. 아마 거북선보다 그의 기업가 정신에 감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와 같이 행운의 여신인 티케(Tyche)는 끊임없이 도전하는 그들 편이었다.

그리스 신화의 티케는 로마신화의 포르투나(Fortuna)와 동일시되는 신이다. 영어에서 행운을 뜻하는 ‘포춘’(fortune)의 어원이기도 하다. 티케는 손에 마술 뿔을 갖고 있다.

티케가 돌아다니는 길에서 마주친 사람은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 여신이 풍요의 뿔을 뒤집어서 선물을 듬뿍 쏟아줬기 때문이다.

역시 부지런하게 돌아다니는 사람이 티케를 만날 확률을 높일 수 있다.

‘작은 부자는 사람이 낳지만 큰 부자는 하늘이 낳는다’는 속담도 있지만 행운을 내 편으로 하려면 근면은 기본이 아닌가 싶다.

한국 건설 사상 최초의 해외공사는 태국의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이었다.

태국 정부가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의 차관을 도입해 1965년 9월30일 국제경쟁 입찰에 부쳤다.

현대건설은 서독·일본·프랑스 등 16개국 29개사와 경쟁한 끝에 공사를 따냈다.

66년 1월7일 착공에 들어갔지만 공사는 계획대로 진척되지 않았다. 아무런 경험 축적도 없이 의욕만 갖고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 기회는 슬그머니 찾아온다. >

장비 부족·경험 부족·기술 부족으로 현장 내부에서 여러 가지로 갈등이 고조되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말단 경리담당 이명박 사원은 밀린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갑자기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한국에서 온 인부들이 군용 단검을 들고 난동을 부린 것이었다. 폭도들은 사무실 금고를 목표로 삼은 듯했다.

이명박 사원은 금고와 경리장부를 지키기로 결심했다.

드디어 사무실 문이 ‘쾅’ 하고 열렸다. 폭도들은 15명 정도였다. 술 냄새가 확 풍겼다.

그들 중 한명이 들고 있던 단도를 갑자기 이명박 사원 책상 위 금고 옆에다 내리꽂았다.

“야, 좋은 말로 할 때 금고 열쇠 내놔!” “못 내놓겠다.”

벽으로 뒷걸음질친 이명박 사원 목의 왼쪽으로 칼이 날아와 꽂혔다. 앞이 캄캄했다.

‘이러다가 죽는구나’ 싶었다. 그러나 열쇠를 내줄 수는 없었다. 회사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명감 같은 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단지 굴복당하기 싫은 본능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금고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야, 뭉개버려!” 옆구리와 등, 엉덩이, 온 몸에서 불이 났다.

그럴수록 있는 힘을 다해 금고를 끌어안았다. 그때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금고 사건이야말로 이명박 사원에게는 행운의 출발점이었다.

금고 사건으로 이명박 사원은 일개 대리에서 현장 소장으로 발탁되며 정주영 회장의 두터운 신임을 얻을 수 있었고,
고속 승진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연도 큰 운이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처럼 큰 행운은 없다.

프랑스의 독립투사 드골 사령관과 프랑스의 문화를 짊어진 작가 앙드레 말로의 만남이 그렇다.

그들은 동지이며 친구이며 프랑스의 자존심으로 국가 경영을 함께했다.

농민 마오쩌둥(毛澤東)과 지식인 저운라이(周恩來)의 만남 또한 그렇다.

저운라이는 당 서열과 학식을 포기하고 미련 없이 주인공 자리를 마오쩌둥에게 내주고 나라건설 공동지도자로 활약했다.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과 한신혁 부회장도 40년 지기로 알려지고 있다. 김 회장에게 있어 한 부회장은 드골의 앙드레 말로이며 마오쩌둥의 저운라이였다.

김 회장은 대학생 때부터 아버지 김진만 회장을 도와 1960년대 미륭건설 창업에 동참했다.

그래서 김 회장은 1944년생이면서도 1.5세대 기업가로 호칭된다. 김 회장은 오늘날 한국의 10대 기업군 동부그룹을 일궈냈다.

이러한 역사 속에는 그의 오랜 동반자인 한 부회장이 함께하고 있다. 한 부회장은 그 흔한 매스컴에 얼굴 한번 내비치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낮고 조용한’ 리더십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늘 난국을 해결했다. 행운을 만들곤 했다. 사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경영의 귀재라고 불리는 GM의 잭 스미스 전 회장이 노자의 ‘무위자연’을 좌우명으로 삼은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이런 행운을 창조하는 만남은 어디 동부그룹의 김 회장과 한 부회장뿐이겠는가.

LG그룹의 구(具)씨 가문과 허(許)씨 가문의 동반자 관계가 그렇고, 최태섭 한국유리 전 회장과 이봉수 전 신일고등학교 재단이사장의 관계가 그렇다.


< 최고 연봉의 윤윤수 회장 >

윤윤수 휠라코리아 회장은 약 10년 전 당시 18억원이라는 깜짝 놀랄 만한 연봉을 받은 것으로 장안의 화제를 뿌렸다.

그런데 그 연봉 책정은 아주 사소한 실수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행운의 여신 티케의 장난인지 모르겠다.

윤 회장과 휠라비즈니스 파트너인 미국의 알티스가 휠라에서 손을 떼며 본의 아니게 큰 도움을 준 것이다.

휠라그룹 본사가 윤 회장을 휠라코리아 사장으로 앉히며 알티스에게 윤 회장의 가치가 얼마인지 물었다.

“그 사람은 휠라 에이전트를 하는 것만으로도 1년에 100만 달러 이상을 번다. 그것을 고려해서 대우를 해 줘야 할 것 같다."

사실 알티스는 윤 회장에 대해 잘 몰랐다. 윤 회장이 휠라비즈니스로 1년에 100만 달러 이상을 번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 돈을 알티스는 윤 회장이 모두 챙기는 줄 알았다. 그 돈이 회사를 운영하는 데 들어간 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 결과 150만 달러의 연봉이 결정됐다.

만약 본사가 윤 회장에게 직접 얼마나 받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면 결코 그렇게 엄청난 액수를 요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는 한국 대기업 사장 연봉이 10만 달러에도 미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어쨌든 윤 회장은 당당하게 최고의 연봉을 받은 뒤 세금을 내고도 느긋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래서 투명 경영을 통해 한국에서 글로벌 경영이란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은 한국 경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스타 CEO다. 대부분 기업 CEO들은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구조조정이라는 명분 아래 감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문 사장은 오히려 감원 대신 4조 2교대로 일자리를 나누면서 충분한 휴식과 평생학습으로 종업원 모두를
지식근로자로 양성하고 생산성을 배가시켰다.


< 국에 빠진 파리도 삼켜... >

그의 ‘새로운 패러다임 운동’은 고용 없는 성장시대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문 사장의 이러한 놀라운 경영 대안은
어느 날 갑자기 생성된 것이 아니다.

1980년대부터 그는 사장에 오를 경우에 대비해 미래학자 존나이스빗을 멘토로 메가트렌드를 연구하고 대비했던 것이다.

채수삼 서울신문 사장도 ‘욘사마’의 매력을 지닌 열정적인 농부형 CEO다. 현대상사 무역인 출신이지만 광고회사
금강기획 사장 시절 ‘채수삼 열풍’을 일으켰었다.

특수 스프링 메이커인 삼원정공은 연간 매출액이 200억원밖에 되지 않는 작은 기업이지만 50억원 상당의 순익을 내는 무서운 기업이다.

시테크와 초절약형 경영자로 알려진 양용식 사장의 일화 한토막이다.

가난하고 배운 것 없는 그는 당시 문학무 사장집이자 공장에서 먹고 자고 일했다. 종업원이라고는 사장과 양용식 사원
둘뿐이어서 그들은 늘 겸상을 했다.

어느 날 국에 죽은 파리가 있었다. 사장님과 사모님이 면구해할 것을 염려해 그는 국과 파리를 모두 꿀꺽 먹어 치워버렸다.

이렇게 절절하게 사는 양 사장에게 어찌 행운이 따르지 않겠는가. 시테크 경영강사로도 유명세를 타면서 회사도 알차게 키웠다.

가정적으로도 행운이 따라왔다. 아들 둘 모두가 최고 명문대학을 나와 유학을 마치고 당당하게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세상에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사람 있느냐’는 말이 있다. ‘맑은 물에서는 고기가 살지 못한다’는 속담도 있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현실에서는 흠이 없을 수 없다는 뜻이다. 박정희 정권 때 유한양행의 CEO인 유일한 박사는 정권에 아부하지 않았다.

아부는커녕 소집명령(?)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세무사찰이란 사형선고(?)가 떨어졌다.

당국의 날고 기는 십수명의 세무공무원이 덮쳤다. 그러나 아무리 뒤지고 까 봐도 먼지 하나 나지 않았다.

당시 최고 권력자가 “다시는 유한양행 근처에 얼씬거리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화가 복이 된 것이다. 유일한 박사는 모든 부를 사회에 환원한 공인형 CEO의 본보기로 귀감이 되고 있다.

라이프 스타일 스토어(Life-Style Store)를 표방하는 까사미아의 이현구 사장도 행운의 여신 티케와 한편이다.

그는 종업원 2~3명 시절부터 조회를 서는 등 기업으로서의 모양새를 지키며 사회적으로 어려운 이웃들을 도와 왔다.

특히 고객들에게 ‘행운’을 나눠주고 싶어한다. 그래서 중견기업으로 성장했고 까사미아 마니아 30만 고객을 확보한 기업이 됐다.


< 사회적 책임 다할 때 행운도 따라 >

그만큼 고객 사랑은 기업인으로서 최고의 미덕이다.

‘내 자식이 먹을 수 있는 과자’ 크라운산도 열풍을 일으킨 윤태현 전 크라운제과 회장은 위암으로 고생하며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과자를 시식했다.

그의 생전 공장에 불이 나는 어려움도 겪었다. 그러나 ‘불난 집이 잘 된다’는 속담처럼 크라운은 승승장구했다. 분발했기 때문이다.

최근 그의 후임자인 윤영달 사장은 화의라는 어려움을 등산 경영으로 극복했다.

답답해서 시작한 등산 경영으로 구성원들의 호연지기가 크게 신장됐다. 나아가서 해태제과를 인수하면서 업계 판도를
바꾸는 저력과 행운을 누리고 있다.

외환위기 때 구조조정으로 탈락한 임직원끼리 퇴직금을 합쳐 만든 오디티의 이일 사장과 IT 분야 설비제조업체인 미래
컴퍼니의 김종인 사장도 벤처업계의 행운아들이다.
한우물을 파면서 세계 최고의 기술력과 수요의 폭발이 가져온 행운들이다.

행운이란 끊임없는 도전과 근면, 그리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행동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닌가 싶다.

‘용장과 지장도 좋지만 최고봉은 행운을 몰고 오는 장수’라는 나폴레옹의 인사관은 음미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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