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내 신경을 쓰고 있는 일들 중 하나가 잘 해결되었다.  오늘 새벽에 바로 업데이트가 왔는데, 참 잘 됐다고 생각하면서, 남은 일들에 대한 좋은 전조로 해석하기로 했다.  


변호사라는 직업은 온갖 감정과 개인적인 감상을 배제하고 오로지 윤리와 법에 입각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이 지배하는 것을 이상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막상 일을 해보면, 각각의 고객이나 케이스에 대하여 완전히 emotion을 제거하는 것은 어렵다.  개인적인 변호사로서의 책임소재의 문제는 아니지만, 케이스가 잘 풀리는 것은 어떤 한 사람과 그의 가족의 삶에 있어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거나 골치아픈 일을 해결하는 의미 또는 그 이상 커다란 임팩트가 있기 때문에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더디게 진전이 되는 경우 나 또한 굉장한 정신적인 피곤함을 느끼곤 한다.  


최악의 경우 당연히 변호사는 결과를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렇게 일을 추진하지도 않고, 계약하지도 않기 때문에 나의 경우 책임은 없다.  하지만, 결과가 안 좋게 나오면, 최대한 대안을 마련하여 궁극적으로는 일을 해결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마무리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단순히 고객을 위하는 마음 뿐 아니라, 끝까지 최선을 다해 결과적으로는 고객이 원하는 것을 얻게 하는 것이 돈을 버는 것 이상 큰 기쁨으로 다가오는 것을 종종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에 더더욱, 성격상 일이 안 풀려 좋지 못한 결과로 관계가 끝나면 아주 오랫동안 그 사실 자체가 나를 괴롭게 만들기 때문인데, 이래저래 좀 cool~하다면 cool하게, 아니면 아주 냉정한 계산으로 털어버리지 못하는 천품의 결함이 있다고도 말 할 수 있겠다.


on-going한 업무를 진행하는 것도 이제는 일상이고, 여기에 사무실이 잘 굴러가기 시작한 이래 지난 2년동안 쌓인 관리업무의 양도 무시할 수 없기에 이렇게 늘 계획대로 스케줄이 전개되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하루를 빼앗기곤 한다.  그렇게 밀린 업무는 고스란히 주말이 저녁 시간대로 옮겨지는데, 지금은 어떻게든 주중에, 설사 매일 늦은 퇴근이라도, 일을 정리하여 주말에는 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주말에 자꾸 해결하다 보니까, 주중에도 주말에도 쉬는 건지, 일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시간을 보낼 때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일할 땐 일, 놀 땐 놀아야 한다.


그간 작은 성공에 살짝 교만해졌던 것 같기도 하고, 조금 방만하게 행정적인 부분을 처리한 것 같기도 하다.  이번의 어려움은 그런 나를 다시 초심으로 돌리려는 좋은 nudging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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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6-05-01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쿡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나라 법조 시스템은 정말 무전유죄 유전무죄를 양산하는 거 같습니다. 전관 예우로 사람들을 연줄로 선별하여 법을 해석하는 게 아니라 사건에 법을 짜맞추어 입맞대로 양형을 하는게 정말 기도 안 찹니다. 학문적 체계만 그럴듯하지 법을 운용하고 법을 해석하는 게 너무 기득권 위주로 이루어지는 거 같아 되게 씁쓸합니다~

transient-guest 2016-05-02 00:23   좋아요 0 | URL
미국도 문제가 많지만, 한국만큼 말도 안되는 경우는 아니라고 봅니다. 전체적인 시스템의 운용도 그렇고, 법철학이나 사회적인 인식도 그래요. 저는 한국의 문제는 단지 법조계에 그치지 않고 시민의식 전반에 걸친 거라고 봅니다.
 

지난 번에 사이러스 (혹은 키루스)님의 글을 읽고 쓰다 말다 하면서 오늘까지 보관했던 글을 정리했습니다.


어제 사이러스님의 글을 읽고나서, 밤새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오늘까지도 '헌책방'과 '중고책방'에 대하여, 그리고 서점에서 책을 파는 것 외에도 다양한 먹거리를 제공하거나 복합문화공간을 꾀하는 것, 그러니까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지금의 중소규모서점들이 지향하게 된 모습에 대한 고찰...까지는 아니고.  그냥 생각이 많았던 것 같다.  서점에 대한 책, 책에 대한 책을 읽으면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같은 서점에 대한 것들고 꽤 많이 있기에 주로는 긍정적인 눈으로 '헌책방'의 '중고서점'화 내지는 업종다양화를 바라본 것 같다. 


그런데, 실상 좀더 행간을 짚어보면 이와 같은 '헌책방'의 '중고서점'화, 혹은 서점의 '탈서점'화나 복합문화공간지향성은 훨씬 더 불편한 진실을 감추고 있는 것 같다.  사이러스 (혹은 키루스)님의 글을 읽으면 몇 가지로 이들이 압축되는데 다음의 내용으로 정리해보았다.


1. '헌책방'의 '중고서점'화 혹은 지향성:


헌책방이란 말 대시 중고서점이란 말을 쓰는 것으 politically correct하다는 취지의 의견을 몇 번인가 책이나 블로그에서 접하고 호의적으로 반응을 했었다.   헌책방이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낡고 오래된 듯한, 아니 무엇보다 '헌책'이라는 표현보다는 같은 말이라도 '중고'책이라는 표현이 더 나은 것이라는 의견이 골자인데, 일견 말이 되는 듯 했다.  사실, 깊이 생각해보았다기 보다는 그저 조금이라도 사랑하는 책과 이를 취급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접이 가장 기본적인 단어의 취사선택에서라도 개선한다는 마음이 강했던 것 같다.  


그런데, 실상 보면 '헌책방'이라는 표현이 그리 나쁘다고 볼 수만은 없는 것이 '중고'나 '헌'책이나 결국은 비슷한 의미인데, 굳이 '중고서점'이라는 표현을 좀더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으로 인정해야만 할 논리적인 스탠다드가 없다는 점에서 이는 결국 일종의 말장난에 다름 아닌 것이난 생각도 든다.  굳이 헌책방이 중고서점으로 바뀌어 불려야 하는가는 결국 결론을 내리지는 못할 것 같은데, 헌 책 보다는 중고 책이 더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현실적으로 소규모 영세업자의 영역의 헌책방을 중고서점으로 바꾸어 부름에 따라 보다 대형화되고 조직화된 자본의 시장침투가 용이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봤다.


2.  '중고서점'이 쓰고 있는 '헌책방'의 탈:


앞서 말했지만, 헌책방에서 오는 어감도 그렇고, 아무래도 헌책방은 소상공인의 영역이고, 보다 더 가벼운 주머니의 사람들이 좀더 좋은 가격에 책을 구하기 위해 second hand로 거래되는 책, 남이 보다 넘긴 책들을 찾는 공간이다.  규모에 있어서나 고객층에 있어서나 전통적으로 헌책방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다 낮은 곳에 위치만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고 frequented되는 공간이라고 생각되고 마켓 자체도 그런 태생적 feature가 있다고 보았다.  어떠한 경우라도 이것이 차별이나 다른 형태로 헌책방 업계를 얕잡아 볼 수 이유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실상이 그렇지 않았었나 하는 생각이다.  지금은 출판과 유통이 모두 변한 책 마켓의 특성상 좀더 다른 의미, 다른 구조, 또는 다른 사용자들과 업계와 섞인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전통적으로는 일종의 틈새마켓이었을 것 같다. 


그런데, 서점업계와 유통구조가 인터넷을 만나고, 이후 다시 책읽는 인구가 점차 줄어드는 시대가 되어 전체적인 책시장 자체의 규모가 줄어들고, 마진의 pie가 줄어든 지금 슬그머니 이 영세시장에까지 영역을 확장하는 자본세력이 들어오면서 이들이 '중고서점'이라는 말로 '헌책방' 마켓에 들어온 것 같다.  이 역시 별 생각이 없이 그냥 깨끗한 헌책방이 생겨서 좋다는 정도로만 봤는데, 실상을 놓고 보면 이들이 파는 건 '헌책'이 아닌 말 그대로 '중고'새책인 듯 싶다.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깨끗한 책을 덜 주고 사는 것으로 생각되겠지만, 헌책방에서 유통되는 건 이런 새 '중고'책보다는 새책시장과는 다른 별개의 마켓으로써, 사라지는 것들을 모아들이고 이를 되파는 등 보다 더 산발적이고 비조직화된, 서점마다 각각의 캐릭터와 주력분야 및 주인의 전문성을 갖춘 헌책방과 중고서점과는 먼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헌책방의 경우, 특히 오래 영업해온 서점은 주인의 전문성이나 종류의 특화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나아가서 기업형 편의점의 잠식도 모자라서 포화상태에 이른 소상공마켓이 한때 그랬던 것처럼, 하나의 서점운영은 한 가정이 중산층 수준의 삶, 설사 그보다 못하더라도 최소한 남에게 손 벌리고 기본임금과 격무에 시달리지 않고서도 도시근교의 삶을 보장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중고서점'의 경우, 오너는 모두 회사로, 구성원은 모두 시급알바로 기본적인 책의 전문성보다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자사의 재고를 recycle하는 수준 (조금 비약이 심하지만)이 아닌가 싶다.  책의 종류도 무엇도 모두 구조화되어 회사의 필요와 상품성에 의해 결정되는, 하지만 '헌책방'의 추억과 보다 더 현대적으로 자본적인 예쁜 장식이 이 현실을 포장하여, 우리 모두를 둔감하게 하는 것 같다.  책을 읽는 이라면 어느 정도의 깨인 마음과 머리를 갖고 있다고 자부하는데, 그런 이들까지도 이런 facade의 본질을 비판적으로 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3. 탈서점화, 또는 복합공간화

이건 조금 어렵다.  대형서점까지도 사라져가는 시대에 작은 개인서점이나 헌책방을 꾸려가려면 정말 많은 꼼수와 차별화가 필요한 건 현실이다.  그런데, 그런 것이 마치 헌책방이나 개인서점이 가야할 미래의 길이라고만 보는 건, 그 칭찬일색의 평가만큼이나 불편하고 진실과는 거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의 각종 안전망이나 시스템 수준의 보호가 사라진 현대의 헬조선에서 무엇이 과연 옳고 그른가를 논하는 것, 특히 먹고사는 문제를 기본으로 놓고 이야기 하는 경우, 무척 어려운 일이다.  정답은 없다고 결론이 나오면서도, 무엇인가 불편하고, 안타깝고, 가슴이 아픈 건 어쩔 수가 없다.  나의 의견이 전부도 아니고 다 맞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오늘부터, 아니 사실 이 글을 쓰던 그 날부터의 결심이지만, 나는 오늘부터 중고서점이라는 말을 쓰지 않을 것이다.  그 용어에서 오는 negative한 또는 positive한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이 말을 쓰고 싶지 않은 것이다.  헌책방은 헌책방으로 부르는 건 내 자유이거니와, 이게 지금의 나에겐 최선의 저항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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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4-12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전에 `헌책방` 대신에 `책방`으로 쓴 적이 있었어요. `헌책방` 용어에 사람의 손때가 묻은 책을 부정적으로 보는 듯한 뉘앙스가 느껴졌거든요. 그러다가 다시 예전 용어를 쓰고 있어요. 그러면 저는 `알라딘 중고서점`을 `알라딘 서점`으로 써야겠습니다.

transient-guest 2016-04-13 00:59   좋아요 0 | URL
ㅎㅎ 그때 쓰신 글을 보고 마구 쓰다가, 도통 결말이 나지 않았는데, 어제 다행스럽게도 조금 정리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꼭 헌책방과 알라딘 중고를 구분지어 쓸 것입니다.
 

바쁜 것도 있고, 책을 읽는 속도도 좀 떨어지고, 무엇보다 그냥 서재활동의 재미가 떨어지고 있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고, 주기적으로 글도 쓰고, 다른 분들의 서재를 돌아다니면서 구경하고 그랬었는데, 이제는 좀처럼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내 개인만 놓고 보았을 때, 이것은 북플이 큰 이유가 아닌가 싶다.  분명 북플을 런칭하여 좀더 넓은 서재활동의 지평을 여는 등, 마케팅 차원에서는 알라딘의 저변확대가 꽤 성공한 것 같다.  


하지만, 이제 슬슬 북플 자체의 기능도 그렇고,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알람도 그렇고, 서재에 가봐도 별 내용이 없는, 북플을 통해 맺어진 '친구'관계도 그렇고, 모두 심드렁한 것이다.  봄이 와서 몸과 마음이 늘어진 것 같지는 않고 (사실 그럴 여유도 없다), 내가 좀 지친 탓은 있지만, 어쨌든, 나에게 있어 북플은 득보다는 실이 더 많은 venue가 아닌가 한다.  


일단 전화기에서 북플 앱을 지웠다.  나는 가능하면 PC를 통해 서재에 들어와서 예전에 했던 것처럼 그렇게 조금씩 다른 분들의 글을 읽고, 행여나 댓글이 달렸을까 하며 설레어하는 맘을 다시 느끼고자 한다.  


같은 취지에서, 원래 서재친구를 맺고, 관심을 갖고 방문하여 교류하던 분들의 서재를 즐겨찾는 서재에 제대로 리스팅 될 수 있도록 북플을 정리할 생각이다.  혹시라도 나의 이런 결정 때문에 조금은 서운한 분들이 생긴다면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하지만, 서재는, 그리고 서재를 통해 맺은 관계와 내 글쓰기는 '북플'이라는 마케팅 플랫폼보다 나에겐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일년에 알라딘을 통해 사들이는 책을 생각할 때, 난 알라딘이 나에게 '북플'을 통해 얻은 마케팅 효과를 훨씬 상회하는 이득을 주었기 때문에, '북플 따위'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다.


게으름이나 의욕저하를 '북플'에 blame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건 두고 보면 알겠지...

어쨌든 난 '북플'을 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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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4-06 0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 ㅡ일까요...활기가 쏙 빠져 저역시 이전 같지 않아요...뭔가 크게 잃은 기분 이랄까 ㅡㅎㅎㅎ 저의 의욕저하를 북플에 blame 하는 걸까요?^^;;

transient-guest 2016-04-06 11:53   좋아요 1 | URL
뭔가 거품이 빠지고 있는 느낌도 나네요. 여전히 북플로 많이 들어오는 것 같은데, 그냥 재미가 좀 없네요...일종의 불감증 같아요.

[그장소] 2016-04-06 12:00   좋아요 0 | URL
불감증이란 얘기 공감가요 ㅡ그럴수도있겠다는 ㅡ^^;

무해한모리군 2016-04-06 0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메신저나 북플 모두 알람기능을 꺼두고 사용합니다. 밖에서 글쓸때만 씁니다 ㅎ 안스마트한 인간이라

transient-guest 2016-04-06 11:53   좋아요 1 | URL
저는 폰으로 문자하는 걸 싫어해서 거의 쓰는 기능이 없긴 해요..ㅎ 그저 알람이 뜨면 그러려니 했는데, 일단 북플은 사용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다락방 2016-04-06 08: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여전히 피씨로 서재에 들어와서 글을 써요. 위에 휘모리님처럼, 밖에서 혹여 갑자기 글을 쓸 일이 있을 때는 북플을 사용하고, 알람기능은 죄다 꺼두었지요. 저도 한 때 북플을 지웠었어요. 아하하하. 이 글 읽고나니 다시 지울까 싶기도 한데, 밖에서 글을 쓸 땐 유용하기도 하거든요. 음.. 밖에서 글 쓸 일이 얼마 없긴 하지만....

북플이 생기고나서 확실히 글 읽는 재미가 좀 떨어지긴 한 것 같아요. 북플 생기기 전에는 최신 서재글 올라온 거 다 봤는데, 이젠 다 못보겠더라고요. 그래서 저 역시 피씨로 들어와서 늘 가던 분들에게만 가게 되는 것 같아요. 음, 저는 제가 SNS 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도 했어요.

transient-guest 2016-04-06 11:55   좋아요 1 | URL
저도 페북이나 트위터 안 해요..ㅎㅎ 너무 까발기는 느낌이고, 실시간으로 뭐 하는거 다 보여주는 것도 귀찮고 해서요.. 북플이 유용하긴 한데, 뭔가 좀더 소중한 걸 빼앗기는 느낌입니다. 쓸데없는 것도 너무 많아요..글이 올라오는 것도 아니고 누가 뭐 읽고 있다, 읽고 싶어한다, 평가했다..별 몇 점...이런 거 은근히 피곤하네요..

[그장소] 2016-04-06 12:04   좋아요 0 | URL
다락방 님이나 이전 서재를 계속하시던 분들은 아무래도 그 루트가 익숙할 걸테죠..저는 서재나..북플이나 하나인줄 알았는데 ㅡ나눠어져있어서 한참 해멨고...지금은 둘다 벅찬게 사실 ㅡ서재만 있을때도 교류는 잘 못했거든요 ㅡ북플 최장점은 즉흥적으로 쓸수있다는거...단점은 역시 교류적 문제 같단 생각 ㅡ이쪽도 잘 안뵈긴 같은 ㅡ의미로 ..쌍방향 같은데 아니기도한 ...서재와 통합되는게 좋을것도 같고 ㅡ어려울것도 같고...ㅎㅎ

알케 2016-04-06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북플 이후로..

러다이트 운동이라도 할까 싶네요

transient-guest 2016-04-06 14:33   좋아요 0 | URL
정말로 러다이트 운동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네요.ㅎ 좀 무리하게 확장한 경향이 없지는 않지요...

cyrus 2016-04-07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t-guest님이 북플을 지운다고 해서 이웃들에게 사과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t-guest님이 북플 시스템이 지겨워서 지우는 것이 잘못된 일이 아니니까요. 그 행동이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 일도 아니죠. 이웃이 내가 쓴 글을 보는지 안 보는지, 북플에서 뭐하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어요. 어떤 이웃의 글이 정말 좋아서 계속 보고 싶은 마음에 친구를 신청하는 분이 많지만, 친구 수를 늘리려는 목적으로 하는 사람도 있어요. 저는 지속적으로 교류 관계를 이어하기가 힘든 이웃이 있으면 친구 관계를 해제합니다. 도배 글을 올리거나 ‘책을 읽고 싶어합니다.’, ‘책을 읽었습니다’만 많이 올리는 이웃은 부담스럽습니다. 그런 회원이 친구 신청하면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 분들 때문에 정작 좋은 글을 볼 수가 없으니까요.

transient-guest 2016-04-08 02:16   좋아요 0 | URL
그래서 북플로 맺어진 관계를 조금 정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처럼 원래의 관계가 다 밀려나고 쓸데없는 관계만 늘어가는 것 같아서요. 일단 조금 두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민주당의 공천심사를 놓고 말이 많다.  진보언론은 평가하고 분석한 토대로, 조중동은 그저 개판을 벌이자는 심정으로, 그렇게 다양한 매체에서 의견이 나오고 있다.  


김종인은 본디 책략가라고 해야 한다.  야권을 거론할 때 항상 아쉽던 이 '책사'라는 자리에 결국 이 사람을 데려다 놓았고, 상당히 재미를 보기는 했다.  보수성향의 인물이기 때문에 민주당의 진보성향의 의원들로서는 조금 부담스럽고, 이번 공천 컷오프를 보면 그 전에 확보한 시스템 공천과는 거리가 먼 선택으로 욕도 많이 먹고 있지만, 형국을 주도하고, 국면을 갑자기 전환시키는 솜씨는 보통이 아니다.  


다만, 그 역시 사람이니까, 자신의 성향에 따라, 그리고 필요에 따라 맺은 관계에서 초연할 수는 없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은 억울하게 피해를 보았고, 어떤 이들은 자격을 뛰어넘는 이득을 보았다.  


이 모든 것은 총선에서 개헌저지선을 지키기 위한 포석이라는 점에는 의문이 없다.  다만, 그 과정에서 옥석을 구분하지 못하는 건 문제가 있는데, 아쉽게도 이런 모습이 진보성향의 관점으로 볼 때 요즘 종종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안철수처럼 판이 다 깨져도, 무엇도 없이 광야에서 죽겠다는 심정으로 완주하겠다는 생각보다는 훨씬 나은 모습이다.  


하지만, 진보라는 입장에서 더불어 민주당이 가고자하는 곳은 좌파중도보다는 중도우익에 가까운 듯 하고 이런 부분은 걱정을 하는 부분 일정비, 당연한 수순이라는 마음이 일정비로 내 판단이 갈라진다.  


한국의 정치판이 합리적이려면 현재 더-민이 보여주는 모습이 보수로, 그 외 정의당, 녹색당 및 과거 친노계열 및 민주당의 진보성향의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진보정당으로 대략 양당체제를 갖추고, 여기에 극진보나 극수구세력이 일정 부분 포진하면서 서서히 사라져가야할 것이다.  현재 새누리당 의원들의 대다수가 난지도에 묻어버려도 전혀 아깝지 않을 밥도둑, 쌀주머니, 술병이자 똥푸대 같은 수준의 정치인들이기 때문에, 특히 이들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완전히 매장되어야 옳다.


결론적으로 공천 컷오프에 포함된 정청래, 강기정, 강동원 등 아까운 분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명분을 찾아 살려내야  하는 것이다.  다른 분들은 몰라도 정청래 의원의 경우 컷오프는 그 무슨 이유로도 합리화할 수 없는 오로지 당리당략과 정략에 의한 것인데, 덕분에 국민의당의 내분은 거의 한 시간 단위로 격화되고 있는 것을 본다.  어떤 형태로든 연대의 길을 가야하고, 그 과정에서의 한 수를 둔 것이라면, 그리고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김종인의 다음 수는 아깝게 컷오프된 사람들을 적절하게 살려내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의 반사효과도 무시할 수 없는데, 판을 후끈 달아오르게 하고, 반전의 묘미를 주는 등 다양한 이득을 누릴 수도 있겠다.  


이걸 모두 지금 계산한 상태이고, 이에 따라 여기까지 간다면 그는 분명 일급책사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내가 보는 그는 약 85-88 사이의 (삼국지 데이터 측정으로...) 중급책사이상은 아니다.  한 지방의 군벌로써 터전을 잡고 지키는 정도의 역량이 대충 85-88이고, 92-95사이면 함께 전세를 도모할 만하고, 97-99면 전국통일이 가능한 책사의 수치라고 본다.  김종인이 과연 90대 이상의 책략을 보여줄 수 있을지, 그의 정치력도 이에 못지 않게 궁금해진다.  


현재로써는 아쉬운 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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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6-03-13 2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쉬운 점을 넘어 돌아오는 총선은 야당이 필패할 듯합니다. 전 야당아 여당이나 정치인들은 매우 불신하기 때문에 도찐개찐이라 생각하지만 현재 야당의 행보는 정말 답답의 극치입니다. 여당이 저렇게 죽 쑤고 있는데, 야당은 더 개차반이니..

transient-guest 2016-03-14 02:36   좋아요 0 | URL
정치는 더 나은 것 보다는 덜 나쁜 것을 선택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덜 나쁜 것이 이걸 믿고 이상한 짓을 하고 있네요. 김종인씨의 정략적인 부분 외에도 현재의 당권을 잡은 사람들의 횡포가 대단하다는 생각입니다. 추하기 짝이 없네요. 총선에서 여당이 개헌선을 넘기면, 한국에서 나오고 싶은 분들이 더 많아지겠네요.
 

성매매혐의로 대법원까지 가서 무죄환송으로 나온 모 배우가 있다.  좋은게 좋은거니까, 아니면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린 문제니까, 역시 뭐 다 좋다.  그런데, 법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이 아나 있는데, 이 사건에 관련하여 성매매 알선혐의로 재판을 받고 형을 살고 나온 사람이 있다는 점이다.  모 배우의 매니저였다고 하는데, 오늘 기사를 보니 이 자는 또 같은 짓을 해서 검찰수사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이 자의 형사건과 모 배우의 무죄건이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이유를 보자.


1.  이 자가 형을 살게 된 근거는 모 배우의 성매매를 알선했다는 혐의다.  

2.  고로 이 자의 죄는 모 배우의 행위가 단순한 애정행각이나 다른 것이 아닌 '성매매'라는데 근거한다.  성매매가 없으면 이를 알선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3. 그런데, 이 자는 성매매알선으로 처벌을 받았고, 모 배우의 행위는 '성매매'가 아니라는 판결이 난 것이다.


쉽게 말해서 내가 총기소지죄로 처벌을 받았는데, 다른 재판에서는 내가 소지한 것이 총기가 아니라는 판결이 난 것과 같다.  이게 말이 되는가?


여러 가지 절차적인 문제, 정치적인 편향성, 권력추구 등 너무도 많은 문제가 대한민국 사법부 구석구석을 감싸고 있지만, 절차에 있어 판사에게 부여되는 권한이 너무도 막강하다는 것은 정말 큰 문제라고 본다.  지금처럼 판사가 법리적 해석과 적용, 그리고 사건사실의 판단을 함께 하는 것은 더구나 한국처럼 법조인이란 것이 사회경험이나 다른 것은 별로 없고, 그저 머리털 나고서 지금까지 4지선다형 문제만 열심히 풀어온 자들임을 볼 때 매우 큰 무리가 있다.   개인이 경험하는 사건사고, 이를 근거로 형성된 심리, 철학, 사고방식 등은 개개인에 있어 제한적이고 편차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배심원제를 채택한 나라에서도 이에 대한 비판이나 문제가 많이 부각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심원들에게 사건사실의 판단을 맡기는 것은 재판부에 모든 권한을 맡기는 것보다는 더 나은 제도라고 본다.  다른 나라들의 판사들이 바보라서 배심원제도를 도입한 것이 아니란 얘기다.


한국에서도 선택적으로 배심원제가 도입되고 있다고 한다.  내 생각에는 이를 더욱 확대하여 종국에는 모든 재판과정에서 판사는 법리를, 배심원단은 fact를 다루게 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나마 기울어진 판이 조금이라도 공정해질 것이다.  지금이 제도에서는 로비를 하든, 압력을 가하든, 권력으로 회유하든, 돈을 주든, 판사 하나면 잘 설득하면 뻔히 보이는 사실도 묻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사건사실에 유권해석을 적용하여 상황을 모두 조각조각 분리하고 취사선택하여 (1) 특정행위가 불법이다, (2) 하지만 A의 행위는 이 특정행위가 아니다, 또는 특정행위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3) 고로 A는 무죄다 라는 식을 판결을 특히 정치인이나 공직자들의 뇌물사건 또는 다른 비리사건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최소한 절차적으로는 이런 탓이 아닌가 싶다.  검찰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빼앗기 위해서는 이들의 비정치화와 함께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해야 하는데, 이에 못지 않게 판사들에게서 fact를 심판할 권한을 빼앗아서 시민들에게 주어야 한다.  


이런 얘기를 하면 늘 나오는 얘기가 있다.  검경수사기소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한국에서는 그렇게 하면 지방토호들과 경찰과 조폭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것이라고 검사들은 말하고, 판사들은 시민의식의 미성숙과 비전문성을 말한다.  그런데, 해먹기로 하면, 그 자리와 권력의 위중함에 있어 검사 한 명이 경찰 열 명이상으로 더 많이 해먹고, 더 많은 해악을 끼친다.  마찬가지로 판사들, 특히 지역사회의 향토세력과 결탁한 이들은 아마도 검사 열 명까지는 아니라도, 다섯 명 정도가 해먹는 수준과 강도로 법을 망치고 있을 수도 있다.  


직접선거를 이야기할 때 5공 시절, 꽤나 진보적이라는 식자들도 늘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일단 5천불 이상이 되면 그렇게 할 수 있고, 지금은 때가 아니란 소리를 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검경수사권 문제가 배심원제도문제를 그런 맥락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한 마디로 개소리만도 못한 것이다.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고, 배우고 고치고 익히는 과정이 있으며, 이를 통해 제도와 절차가 보완되며 자리를 잡는 것이다.  이제라도 배심원제도고 100% 도입되었으면 하고, 검경수사기소권 의 분리도 이뤄져야 한다.  검찰과 법원의 중립성과 탈권력지향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잠깐 기사를 읽다가 떠오른 생각을 두서 없이 정리해서 말이 될런지 모르겠다만, 속칭 '석궁테러'사건도 그랬고, 판사들이 함부로 재단하여 있는 fact를 걸러내거나 없는 fact를 끼워넣는 행태를 보는 것은 정말 괴롭다.  그만 괴롭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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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6-03-07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격하게 공감합니다!

transient-guest 2016-03-08 03:1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