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법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다.
미국에서 변호사로 일하지만, 지금도 종종, 그리고 과거엔 더 많이 한국의 판사, 검사, 변호사들을 접해본 경험이 있다.
일로서도 만나고, 사회적 관계나 친목 모임에서도 접해왔다.
그들의 세계를 외부인의 관점이 아니라, 직업적 동료로서 오랜 시간 지켜보며 경험한 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한국의 법조인 다수는 법조인이라기보다는 법기술자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상담을 하다 보면 고객들 중 한국사람들이 많이, 그리고 특히 이 계통의 인간들의 경우 법을 지켜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묻지 않는다. 대신, 어떻게 법을 이용해서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는지만 묻는다. 법조문과 조건을 기술적으로 따져서 사실상 불법적이거나 부정한 방법을 법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다.
물론 현실에서 모든 법률 문제는 일정 부분 gray area를 수반하고,
적법한 유권해석을 통해 방법을 제시하는 것은 변호사의 직업적 숙명이다.
나 역시 그런 기술적 접근을 피하지 않는다. 누군들 완벽하겠는가.
하지만 한국 법조인들을 만나면서 내가 느낀 건 그들이 생각하는 법기술은 그런 상식적인 수준을 넘어선다는 점이다.
합법과 불법 사이의 경계가 아니라, 불법을 정당화하거나 법망을 회피하려는 시도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수준이다.
실제로, 과거 여러 차례 업무과정에서 그런 경험을 했는데 한국의 법조인이 미국법을 만만하게 보고 개수작질을 부리다가 아작난 것을 본 적이 있다 (진짜 상담 많이 해줌). 그와 대화를 하고 나면 법을 practice한다는 사람이 타국의 법에 대한 respect가 전혀 없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는데 문제는 그 개인이 아니라, 그와 비슷한 인식으로 법을 접근하는 일반인들이 많고 한국의 법조인들은 그 top에 있다는 사실이다.
조희대 대법관의 14세 여중생 임신 사건 무죄 판결은 법기술자의 시대가 만들어낸 대표적인 사례가 아닌가 싶다.
피해자의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로 특수강간범을 무죄로 만들었다. 2023년에 대법확정이 되었으니 법이 미비하던 옛날얘기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2025년, 같은 법기술자가 이재명 대표에 대한 사법살인과도 같은 판결을 내렸다.
고등법원이 명백하게 증거 문제와 수사의 하자를 지적하며 무죄를 선고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조희대와 그 패거리는 단 9일 만에 6만 페이지 기록을 검토했다며 이를 뒤집었다.
과거에는 “기속력 법리”를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고, 이번에는 같은 법리를 외면했다.
법기술자는 법리를 필요할 때만 선택적으로 사용한다.
선택적 기소, 자료 흘리기, 증거 조작, 언론 플레이 — 모두 일상화된 전략이 됐다.
상식적인 준법의식은 사라졌고, 법기술만 남았다.그리고 그 법기술은 판-검사라는 법비집단의 힘을 지탱하는 방법이 된 것이다.
나는 사람마다 선과 악이 섞여 있다고 생각해왔다.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어디에나 일정 비율로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한국 법조계에서는 나쁜 사람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음을 이번에 더욱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남을 돕고 원칙을 지키려는 법조인들은 소수에 불과하며, 대다수는 기회주의자이거나 아예 부패한 법기술자들이다. 그리고 중간지대의 사람들은 힘 있는 쪽으로 끊임없이 기울며 책임을 회피한다.
이번 한덕수 전 총리와 최상목의 사례가 그 절정을 보여준다.
이미 사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직권이 정지되는 자정 직전, 최상목의 사표를 수리했다.
최상목이 탄핵표결 중에 던진 사표였음에도 그리고 한덕수는 이미 총리직에서 사실상 물러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행한 짓꺼리는 대한민국 헌정 질서를 파괴하는, 12.3 쿠데타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진 행위가 아닌가.
화가 나서 여전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같은 소리를 다른 말로 하는 것 같은 이 상태가 오늘의 내 정신상태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