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좋았던 영화 10편 (무순)

 

 
설국열차, 봉준호

후쿠시마의 잔해 제거를 위해 노숙인들이 헐값에 투입되었다는 세밑의 기사를 보고 내가 떠올린 것은 설국열차에서 그 시스템을 돌리기 위해 바닥에 들어가 있던 어린아이였다. 그것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윌포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는 셈이다. 봉준호가 직관적으로 보여준 이 세계는 이미 실현되었고, 이때 봉준호는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은 도대체 어느칸에 들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마스터, 폴 토마스 앤더슨

폴 토마스 앤더슨은 집단의 서사를 개인의 서사로 능숙하게 압축시킨 다음, 그들의 근심과 두려움을 보는 것을 통해 결국 우리 각자의 비어있는 과거와 마주하게 만든다.

 

 
카운슬러, 리들리 스콧

리들리 스콧과 코맥 맥카시는 관객의 퇴로를 완전히 끊어놓고 극단으로 몰아붙인 다음,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차가운 성찰을 요구한다. 올해 최고의 공포물. 리들리 스콧의 의외의 간결한 연출이 인상적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이야기가 늘 흥미로운 것은 그가 한편으로 리듬의 조절에 매우 능숙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적절한 포인트를 잃지 않으면서도, 종종 멈춰서서 관객을 차분히 성찰하도록 내버려둔다. 모든 것에는 시간이 필요함을 그는 알고 있다.

 


시저는 죽어야 한다, 타비아니 형제

타비아니 형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세 가지 층위의 이야기를 동시에 진행한다. 고대 로마와 그것을 연기하는 재소자들의 과거와 그들이 보여주는 현재의 무대. 그리고 그 세 가지의 이야기는 하나의 소실점으로 모아지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낳는다. 죽어야 하는 우리의 '시저'는 누구인가.

 


스토커, 박찬욱

단 한 숏도 의미없이 지나치지 않는다. 박찬욱은 늘 보는 이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고, 이번에도 그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고 있다. 한 세계를 마감하고, 기꺼이 새로운 세계를 여는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홍상수

홍상수의 명계(冥界)는 더욱 깊어지고, 넓어졌다. 홍상수의 줌은 누군가를 가까이 당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지워버리기 위해 사용되는 것 같다. 그 명계에서 해원을 보고 있는 우리들은 어디에 서 있을까.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아쉬가르 파라디

집요한 도덕극이자 말(言)이 만들어내는 환영들의 향연. 전작의 장점들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새롭게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는 이 영화를 지지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쉬가르 파라디는 '말의 스릴러'라는 거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고 있는 것 같다.

 


블러드 브라더, 스티브 후버

진짜 기적이 있는지 늘 의심하는 나와 같은 자들은, 진짜 기적을 만났을 때는 어쩔 수 없이 한없이 부끄러워질 수밖에 없다. EIDF에서 만난 단연 올해의 다큐.

 


일대종사, 왕가위

모든 것이 쇠락해가고 있을 때에도 그들은 자신을 잃지 않으며, 한껏 자신만만한 포즈로 기념사진을 찍는다. 결국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최소한도의 위엄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이들에게 왕가위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경의를 보낸다.
 



2013년 보았어야 할 영화 10편 (무순)
(언젠가 보기 위해 기록해둔다.)

 

 

테이크 쉘터, 제프 니콜스

잠 못 드는 밤, 장건재

사랑에 빠진 것처럼,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풍경, 장률

링컨, 스티븐 스필버그

제로 다크 서티, 캐서린 비글로우

가족의 나라, 양영희

필름 소셜리즘, 장 뤽 고다르

비념, 임흥순

코스모폴리스, 데이빗 크로넨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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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3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일대종사, 풍경,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언급된 것 중 보았어야 한다고 (특히) 생각하는 영화 3편이에요. 아 아쉽다!
2. 영화에 대한 짧은 설명들이 모두 고개 끄덕이게 하는...
맥거핀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맥거핀 2014-01-03 20:35   좋아요 0 | URL
아..거의 실시간으로 댓글을 봤네요. 고맙습니다. 이렇게 들러서 인사해주시고..섬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즐거운 한 해 되시기를 바랍니다!

풍경은 저도 아직 못봤지만(사람이 너무 없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마음이 안 좋았어요), 일대종사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강추할 수 있습니다.^^ 아..아직 개봉하고 있는 영화중에서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이 영화도 참 좋아요.

2014-01-03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요즘 시간이 너무 없어서 알면서도 그 영화 못 보고 있어요.ㅠㅜ 심지어 동네 극장에서 하는 월터..도 못 보고 있는!! 이대로 출국 2월초 귀국하면 봤어야 할 영화에 월터와 아델이 떠억하니 오르겠죠. 넘흐 보고 싶었던 이무지치의 사계마저도 1월에 내한 공연!!!!!!!! 뭡니까. 이탈리아 음악가들이 왜!!!!! 난 너희 나라에 지금 갈 건데! 진짜 저주받은 타이밍요...ㅠㅜㅜㅜ /아 풍경....ㅠㅠ 장률 감독 GV도 기회 있었는데 못 가보고...

맥거핀 2014-01-03 21:07   좋아요 0 | URL
아..저 사실은 월터..도 봤어요,라고 염장을 지르려고 했는데, 이건 뭐 염장을 지르는 것은 아무래도 섬님인듯..이태리요? 저는 이 팍팍한 서울에 갇혀서 TV속에서 그네 언니 얼굴이나 보고 있는데..

저는 영화 같은 건 안봐도 좋으니..(;;) 어디나 좀 갔으면 싶은데,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고 어디 갈 일이 없어요. 매일매일 술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이 마음 속의 공허함을 여행으로 채우고 싶어요(라고 하지만, 사실 술도 좋..).

2014-01-03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댓글 안 달려고 했는데 우껴서.. 그네 언니야 트윗 탐라 조정하듯이 인생에서 편집해 주시고, 사실 술이 좋다고 괄호 속에다 부끄럽게 고백하셨으니 행복 인증이네요. 알콜은 어디서나 손닿는 곳에 있어주시니.. 일상 속 찰랑이는 행복...후후후 근데 이건 어떻슴까? 전 이딸리아에서 싸고 맛있는 와인, 좋은 친구로 날밤을 보낼 거라는... (월터, 그래도 제게 염장입니다.ㅋ 휴~)

맥거핀 2014-01-05 14:40   좋아요 0 | URL
어제 저도 조촐한 신년회가 있어서 와인 마셨어요. 이탈리아에서 마시는 와인 정도는 안되겠지만, 뭐 그래도 많이 먹었으니..질보다 양으로다가..(정신승리중. ㅋ)

근데 월터씨는 좀 별로였어요. 그거 아시죠? 남들 다 웃을 때, 하나도 안 웃겨서 소외되는 기분..개인적으로는 왜 우리나라에서 평들이 좋은지 잘 모르겠다는..외국에서는 평이 별로 안 좋았다고 하던데.

아무튼 이탈리아 잘 다녀오세요. 맛있는 것도 많이 드시고..!!

가연 2014-01-03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제가 본 영화가 하나도 없... ㅋㅋㅋ 정말 삭막한 작년을 보낸 것 같네요

맥거핀 2014-01-05 14:40   좋아요 0 | URL
아이고. 제가 다 안타깝네요. 뭐 그런데 가연님은 그 이상으로 좋은 책 많이 보시니까.^^

Shining 2014-01-05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를 뒤늦게 봤어요. 덕분에 제 페이퍼에선 언급도 안 된;; 개인적으로는 (물론 전작을 다 본 건 아니지만) <걸어도 걸어도>가 최고작일줄 알았는데. 영화 정말 좋았어요. 한 컷도 낭비하지 않은 철저함과(편집에 무척 공을 들이는 감독이라죠) 그러나 넘치는 서정과 설정숏도.

새해 잘 보내셨나요? 저는 구정을 찾을 거에요, 그래서 아직 나이를 먹지 않은 거라 믿고 그래서 인사도 안 하는 겁니다.....라고 하고 싶은데; 실은 연말연시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이제야 들어오네요. 인사가 늦었어요. 건강하고 건강한 한 해 보내세요^^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올해도 좋은 글 많이 써주세요 :) 올해도 잘 부탁드립니다(웃음).

맥거핀 2014-01-06 18:43   좋아요 0 | URL
영화에서 시간을 담아내는 것이 참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일인데,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는 그 시간이라는 것의 무게를 관객에게 인식하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역시 믿고 보는 고레에다 감독 영화입니다.

사실 위의 BEST10은 마지막에 두 개의 좋은 영화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보았기 때문에 나온 글입니다. 그 두 개의 영화를 연말에 못 만났으면 리스트 같은 것은 안 썼을 거예요.ㅋ

저도 연말에 이웃분들에게 다 인사를 쓸까, 아니면 다 하지 말까 하다가 후자를 택했습니다. 사람이 게을러서 그렇죠. 뭐. 그래서 이렇게 인사를 받으니 참 민망하네요. 저야말로 Shining님의 좋은 글을 잘 읽고 있으니, 부탁드린다는 말씀을 해야겠군요. 어디 도망가지 마세요.하하.

아..새해 복도 많이 받으시구요!!!

희선 2014-01-23 0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 님, 반갑습니다 처음으로 말(글말)을 하는군요 지난 한해 동안도 여전히 영화가 만들어졌군요 저는 영화는 한편도 못 봤습니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극장이 있는데 한번도 안 가봤습니다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학교와 집이 가까운 사람이 학교에 더 자주 늦기도 하잖아요 꿈 이야기가 나오는 책에 영화는 낮에 꾸는 꿈이라고 하는 말이 나오더군요(저는 깨어있을 때 꾸는 꿈이라고 썼는데) 이것은 영화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영화는 보는 것(듣기)이니까 더 생생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희선

맥거핀 2014-01-24 02:40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희선님. 그렇군요. 영화를 안 보셨군요. 사실 제 서재의 상당수의 글들이 영화에 대한 글들이라서 별로 재미가 없으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뭐 그래서 한편으로 여러 다른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제 서재에서 영화란 맥거핀입니다(그러기를 바랍니다). 영화를 놓고 늘 그것과 어쩌면 관계가 없을지 모를 다른 얘기를 하고 싶은 게 제 희망입니다만, 솔직히 아직 그럴 깜냥이 안됩니다. 그거야말로 어쩌면 대가들의 말하기 방식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뭐 아무튼 저는 그럴 능력이 턱없이 안됩니다.^^

영화관에 있다가 나오면 한바탕 꿈을 꾸고 나온 것 같은 영화들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 영화를 만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요. 운이 나쁘면 가끔 진짜 꿈을 꾸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