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F.O., 공귀현, 2011.

 

한 여고생이 산에서 실종된다. 범인으로 지목된 것은 'UFO 출몰지'로 잘 알려진 그 산에 UFO를 보러 갔던 한 무리의 남고생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은 UFO에 납치되었다가 풀려났으며, 그 여고생의 실종 역시 외계인들의 소행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증거로 자신들의 가슴에 새겨진 이상한 표식을 내미는데...정도면 이야기로서는 흥미로운 시작이고, 뒷이야기가 상당히 궁금해지는 설정이다. 그런데 공귀현의 영화 <U.F.O.>는 이 흥미로운 설정을 제대로 살리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를 보고 평들을 찾아보니 대체로 호의적인 평들이 많은데, 글쎄...내 생각에는 고민이 조금 덜한 듯한, 왠지 만들다 만듯한 영화로 느껴진다.

호의적인 평들을 보면, 독특한 상상력, 장르의 다변화, (나름) 반전의 제시...등등이 그 이유로 제시되는 것 같다. 그런데, 일단 반전부터 생각해보면, 이 반전의 설득력은 상당히 약하다는 인상이다. 기본적으로 영화에서 반전을 다루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고, 감독의 치밀한 계산들이 필수적이다. 반전은 보통 다른 기본적인 이야기보다 훨씬 더한 강도의 설득력을 가질 필요가 있는데, 반전은 말 그대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관객들이 영화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이야기적 믿음을 뒤집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 반전은 그저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망쳐놓은 '뻘짓'밖에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반전이 제대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영화 중간에 계산된 치밀한 복선들을 깔아놓고, 그간 관객의 머리속에 쌓아놓은 이 치밀한 복선들 스스로가 마지막 후반부에 이르러 관객의 머리통을 알아서 때려내기를 기대해야만 한다(물론 이 복선들을 역이용할 수도 있다). 즉 반전영화에서 관객을 감탄하게 만드는 것은 반전된 내용 자체의 묵직함과 쾌감이 아니라, 그 반전을 만들기 위해 지금까지 관객 몰래 쌓아두었던 복선의 구조와 치밀함의 정도이다. 그러나 이 반전은 복선들이 앞에서 거의 제시되지 않은데다가, 그 자체로서의 설득력도 약하다. 즉 복선들이 충분치 않았다면, 반전 그 자체로서의 행동들에 대한 심리적 설득력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결정적인 행동들은 그 이유가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이 사건에서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동기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답할 수가 있을까. 그것이 이유라고 했을때, 바로 '그것'이 우리를 맥이 풀리게 만들지 않는가.

이 영화 <U.F.O.>는 한국의 많은 장르영화가 그렇듯, 사회적인 메시지를 그 안에 담아내고자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왜 한국의 장르영화들은 장르 그 자체에 철저히 충실하지 못하는가. 나쁘다는 힐난이 아니라, 순수한 궁금증이다). 예를 들어 외계인과 UFO라는 불확실한 것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과 매스컴들을 보여주는 연이은 컷들(이 영화의 시작은 방송에서 UFO에 대한 인터뷰를 하는 소년의 씬이다), 그리고 단적으로 영화의 시작과 함께 제시되는 비트겐슈타인의 메시지,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침묵해야만 한다." 영화가 이러한 것을 제시한다는 것은 관련하여 무엇인가 얘기를 하고 싶다는 것이다. 즉 메시지를 제시하고자 하면 그것을 영화의 전체 장르적 이야기와 유기적으로 혼합하여 전개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이러한 것은 단지 배경으로 그칠 뿐 풍자나 비판, 고찰에까지 가닿지 못한다. 즉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이 영화가 조금 더 나아지려면,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침묵해야만 한다."는 선언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단지 그것만을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것은 검은 배경에 흰 자막으로 그 메시지를 보여주는 자체가 더 효과적이다. 즉 이 메시지 이후의 영화는 선언 이상의 것, 예를 들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침묵하라고 하는데, 그 이유가 뭐지, 라는 데에까지는 적어도 나아가야 한다. 이 영화에서라면 그것은 UFO라는 불확실한 것을 믿고, 말했던 이(그리고 우리)들이 결국 무엇을 파괴시켰나라는 질문에 이 영화는 무엇이라고 답하고 있는가라는 질문. 그 질문에 무엇이라고 답할 것인가.  

또한 영화의 한 축에서 또 하나의 사회적 메시지로서 등장하는 것은 이 UFO에 등장하는 주인공 소년들의 배경이다. 자칭 '사대천왕'이라는 이들은 주인공의 형이 명쾌하게 이야기하였듯 네 명의 왕따일 뿐이다. 이 넷은 왜 왕따가 되었을까. 그와 관련하여 영화에서 강조하여 제시하는 것은 이 넷의 배경이다. 어렸을 때 UFO에 납치되었다고 주장하며, 모든 것을 UFO와 관련하여 사고하는 아이, 그리고 목사의 아들로,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하나님과 기독교로만 해석하려 드는 아이(기독교와 UFO를 동일선상에 놓는 것이 재미있다. 그와 관련하여 또하나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제대로 사고하는 것처럼 보여지는 주인공의 형이 합리적, 과학적 사고를 하려는 인물이라는 점.), 그들보다 한살이 많은, 뭔가 사고를 쳐서 이 학교로 오게 된 아이, 그리고 혼자 떡볶이를 사먹는 모범생 소년(이 소년이 그나마 정상으로 보이는 이유는 물론 이 배경들을 서술하는 화자가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들을 영화에서 보여주는 방식은 이들 행동의 특이성만을 강조하여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들이 왕따가 된 이유는 어떤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이들이 특이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행동을 단지 그들 개개인의 특이성으로만 소구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온당한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영화에서 또하나 주목할 것은 이 영화에는 (스쳐지나가는 인물 외에) 변변한 어른들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인공 모범생 소년만 미약한 보호자, 즉 그다지 어른으로 볼 수 없는 형이 등장할 뿐, 이 영화에는 그들의 행동을 컨트롤할 어른, 부모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부모들은 오로지 그들의 대화 속에서만 등장할 뿐, 그들 곁에는 당연히 있어야할 때 - 예를 들어 병원 - 마저 그 자신들 외에는 아무도 없다. 즉 이 영화는 또다른 <15소년 표류기>이다. 아들을 찾아다니는 아버지라는 액자를 영화에 굳이 덧씌웠던 <파수꾼>과도 연관지어볼 부분이 있다.) 그런 그들 넷은 뭉쳐서 한 팀이 되고, 이들은 산에서 또다른 왕따 소녀를 만난다. .... 그러므로 이 결말을 우리는 이러한 배경들과 관련하여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를 이 영화에 마음을 붙일 수 없게 만들어주는 것은 이 영화가 성장담의 형식을 가지고 있되, 성장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물론 가슴이 따듯해지는 이야기만이 성장담이 될 자격을 갖춘 것은 아니다. 성장은 헤세가 이야기한대로, 수레바퀴 밑에서 견뎌내는 것이고, 알이든 다른 무엇이든, 무엇인가를 깨뜨리면서, 부리에서 피를 흘리면서 만들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앞에서 이야기한 영화 <파수꾼>도 마저도 그것을 성장담으로 볼 수 있는 여지는 있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아이들은 결코 성장하지 못한다. 아니 성장이 아니라 다시 퇴화하여 버린다. 그들은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결국 마지막에 이르러 그들 주위에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단단한 벽을 만들어버리고 기꺼이 자신들의 모습을 가리는 가면을 뒤집어 썼다. 어쩌면 그것이 영화 속에서 어른들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가 아닐까. 즉 이 사회는 수많은 퇴화한 자들이 만들어낸 사회이며, 그 어느 곳에도 어른은 없다는 것. 그러한 사회에서 아이들은 성장의 방식보다도 늘 퇴화의 방식을 먼저 습득하게 된다. 퇴화한 자들이 가득찬 사회에서 모두의 우위에 서는 방법은 누구보다도 빨리 퇴화하는 것이니까. (그들이 UFO에 잡혀갔다온 증거가 무엇인가라는 점이 이와 관련된다. 즉 이 퇴화된 사회에서는 무엇이 증거가 되는가.) 그런 것을 젊은 감독이 만든 이 아이들만이 나오는 영화에서 봐야할까. 잘 모르겠다. (물론 이 마저도 그저 우리 사회의 충실한 반영이라고 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침묵해야만 하니까.)


덧.
하기는 방송사마다 세상에 이런 일이니, 진실 혹은 거짓이니, 그것이 알고 싶다니 하면서 괴담들을 양산하는 사회이다. 우리 사회에서 괴담들을 만들어내는 자들은 누구인가. 물론 당연히 그것이 만연되어 사람들의 눈과 귀를 현혹하는 사이에, 이득을 보는 자들일 것이다. 아이들은 단지 그 효과적인 방식을 보고 배울 뿐이다.

주인공 모범생 소년 역할로 나온 이주승이라는 배우는 어디서 본 적이 있다 싶었는데, CINDI에서 본 <간증>에 나왔던 배우. 그 영화에서는 도리어 광신적인 기독교 신자로 나왔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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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2-03-25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는 말씀 하신 주인공들이 모두 '미확인 비행 물체'처럼 보이네요. 어떤 것으로도 정의할 수 없으니까 이름을 만들고 주민번호를 만들고..면허증을 만들고... 왕따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이거 너무 부정적인가요?

맥거핀 2012-03-26 21:04   좋아요 0 | URL
댓글을 읽다보니까, 제가 영화에 제시된 UFO의 비유를 너무 간과했던 듯도 싶어요. 흔히 외계인이라고 하는 alien이라는 말이 '다른, 이질적인'이라는 어원에서 온 말이 아니겠습니까. 다름, 이질성이 강조된 영화속 주인공들의 모습은 또다른 의미의 alien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이 영화는 alien들이 alien을 찾아 헤매는 그런 영화가 되겠군요. 그런 의미에서 결말을 생각해보면 더욱 씁쓸해지는 영화가 될 수도 있겠네요. (결말을 자세히 설명하지 못하는 점이 안타깝군요.^^)

마녀고양이 2012-03-26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들어보지 못 한 영화가 참으로 많구나, 잠시 감탄하고...

좋은 영화 페이퍼라서,
제가 보지 못 한 관계로 무어라 공감할 수 없다는 점이 조금 안타까와집니다.
확실한 것은 보고싶게, 궁금하게 만드시는 재주가 있으시네요, 맥거핀님~ ^^

맥거핀 2012-03-26 21:09   좋아요 0 | URL
제 글의 목적은 거의 항상 '그 영화를 보게 만드는 것'이니 그런 말씀을 들으니 반갑네요.

사실 이 영화는 정식개봉도 안한 영화니까요.(이번에 씨네큐브에서 한국영화 신작을 미리보는 기획전을 하길래 보고 온 영화입니다.) 제 글들이 주로 영화를, 그리고 종종 덜 알려진 영화들이 대상이니 제가 생각해도 글을 읽다가 쉽게 공감들이 잘 안될 것 같아요(그러니 글을 읽어주는 분들이 늘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로서는 보시고자 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생겼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아이리시스 2012-03-28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리뷰는요, 언제나 항상, 영화와는 따로 존재하는 거예요, 맥거핀님!!

이 영화는 정말로 처음 들어보는데, 하나님, 기독교, UFO, 아.. 뭔가 신기하네요. 영화가. 요 앞 영화는 궁금하지만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는데 이건 보고 싶어지네요. 뭐 나중에..꼭........!!

맥거핀 2012-03-28 18:28   좋아요 0 | URL
네..저는 깠(?)지만 한번쯤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영화라고 생각이 됩니다. 아무래도 장편으로서는 첫 영화니까요. 발전가능성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신선하다는 측면에서는 꽤 점수를 줄 수 있어요.

근데 영화리뷰가 영화와 따로 존재한다는 게 무슨 얘기에요? 뭔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고..아리송..

아이리시스 2012-03-29 18:05   좋아요 0 | URL
그..뭐..그뜻 맞을걸요!!! 영상론 전공에 영화평론과정 있더라고요. 책리뷰나 시리뷰는 그런 거 없잖아요. 그래서 영화는 보여주는 예술이고, 영화를 글로 옮기는 건 글로 하는 예술인데, 둘은 완전 따로다, 이렇게 생각해버렸죠..

여기까지는 제 생각이고,
어느 평론가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저는 듣고 돌아서면 누군가의 말인지 까먹기 땜에 그건 기억이 안나요. 미안해요. 헛소리해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맥거핀 2012-03-29 22:39   좋아요 0 | URL
아니, 저도 잘 알 수가 없어서요. 일단 영화리뷰(평론)라는 게 다른 것보다 좀 특수한 양상을 가지고, 나름의 특유의 형식을 가질 수 밖에 없다고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시나 책이나 하는 것은 글을 글로서 이야기하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영화비평은 영상을 글로 풀어내야하니, 반드시 그 와중에 어떤 괴리가 생겨날 수밖에 없으니..(그래서 컷이니, 숏이니 하는 특유의 용어들이 필요한 것이겠구요.) 또한 뭐 이건 사운드나 이야기도 통합되어 있는 복잡한 거지요. 그러니 또 나름 전문적인 과정도 필요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모든 것이 그렇듯이 '배움'으로만 갖출 수 없는 게 이 영화비평의 세계에도 있기는 한 거 같구요.)
 

 

 

 

 

로맨스조, 이광국, 2011

 

300만 관객을 동원하여 스타감독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 이감독. 이감독은 새로운 시나리오 집필을 위해 프로듀서에게 떠밀리듯 허름한 시골 여관에 머무르게 되고, 심심풀이로 부른 다방 레지에게서 '로맨스 조'의 기묘한 러브스토리를 듣게 된다.

 

인기 여배우 우주현이 스스로 목숨을 끊던 날. 그녀가 출연한 마지막 영화의 조감독이었던 '로맨스 조'는 영화를 그만두기로 결심한다. 시골로 내려간 '로맨스 조'는 우연히 다방 레지와 마주치게 되고,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첫사랑 초희를 떠올린다.

 

이것은 영화 <로맨스조>의 포스터에 나와있는 짤막한 줄거리이다. 이 줄거리를 조금이라도 주의깊게 읽은 분들은 하나 약간 흥미로운 점을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첫번째 문단과 두번째 문단 사이의 어떤 것. 즉, 영화의 제목도 '로맨스 조'인 것으로 보아, 하고 싶은 이야기도 '로맨스 조'의 이야기인 듯한데, 굳이 앞의 액자 즉, '이감독이 다방 레지에게 이야기를 듣는다'라는 액자가 필요할까,라는 질문이다. (그것도 조금은 더 수상쩍게 만드는 것은 이 두 문장 사이의 어떤 유사한 점이다. 앞에 나오는 '이감독'과 뒤에 나오는 '로맨스조'라는 전직 조감독이 둘다 감독인 것으로 봐서 어떤 관계가 있지 않을까.) 물론 영화가 이것은 누군가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짐짓 의뭉스러운 태도를 취하는 것은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니다. 굳이 오랜 과거로 거슬러오르지 않더라도 최근의 작품인 손영성의 <약탈자들>은 오로지 이야기만으로만 이루어진 영화였으며, 이 영화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도(이 영화를 만든 이광국 감독은 홍상수 감독의 조감독이었다) 액자를 덧씌우거나 이야기 속에 이야기를 붙이는 것은 이미 시도되었다(<극장전>, <하하하> 등). 그러나 이 영화는 <약탈자들>이나 <하하하>의 이야기들과 같이 여러 사람의 이야기, 진술로만 이루어진 영화이면서도, 전자의 영화들처럼 같은 인물과 같은 사건을 보는, 인물들 사이의 기억의 혼재, 그 반복과 차이와 미로에 대한 탐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극중인물인 다방 레지(신동미)의 표현처럼) '새로운 서사전략'을 구축하고 있다. 그것은 이것이 이야기이되, 고정적인 소실점이 없는 이야기라는 점, 이 이야기들은 연결되기는 하지만, 뭔가 기묘한 형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 이야기들은 시간의 축이나 인물들의 연결점을 미세하게 어그러뜨리고 있으며, 다중적으로 이야기들을 연결짓고 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영화를 볼 때 기대게 되는 본질적인 고정선이 묘하게 뒤집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며, 기대하지 않았던 새로운 서사가 생겨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즉 이 영화의 흥미는 이야기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구조화하는 방식의 새로움에서 생겨나며, 감독이 보아 주기를 바라는 것은 이야기의 내용보다도, 그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 자체와 그 방식인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영화의 결말과도 연결되는데, 여타의 이런 류의 영화들과 달리 이 영화의 결말은 보다 직접적이고, 직설적이다. 사실 이 결말은 어떻게보면 사족이라고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극중 로맨스조(김영필)는 한번도 이야기밖으로 나아간 적, 즉 인물들의 이야기가 아닌 다른 형태로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결국 그 이야기 속의 인물임을 강조하여 보여주는 이 결말은 과잉된 친절인 것처럼도 보이고, 불필요한 이야기인 것처럼도 보인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두 번째 질문이 필요하다. 이 결말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지금까지의 내용을 다시 잘 요약하여 관객들에게 전달하려는 목적도 있겠지만, 그를 이야기 속 그 자리로 다시 돌려보내는 데에 더 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닐까. 즉 그 내용이 아니라, 그 전달하는 방식을 보려주려고 했던 첫번째 질문의 의도와 같은 형태로, '이야기 속의 인물'이라는 그 내용이 아니라 그 끝을 내는 방식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 목적은 아니었을까.

 

 

그것은 두 가지와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하나는 굳이 그 끝을 내어 보여주는 것은 그의 시작을 떠올리게 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모든 것이 끝이 있다는 것은 그 시작이 있다는 이야기도 되니까. 그 이야기들의 시작, 기원에 있는 것.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영화 속 모든 이야기들은 불쑥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듣고자하는 자의 간청으로 시작된다는 점이다. 영화 속 모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그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들려줄 것을 요청하였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시작한다. 즉 모든 이야기들은 누군가 듣고자 하는 간절한 바램으로 시작된다. 그들은 왜 이야기를 요청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의 존재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위에 이야기하였듯이 영화 속 모든 이야기들은 묘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의 이야기의 존재가 다른 이야기의 논거가 된다. 즉 그물망처럼 연결된 이 이야기들 중 어느 하나라도 존재하지 않으면, 전체 이야기에는 큰 구멍이 생기고, 다른 이야기들도 그 존재근거가 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동시에 이야기의 존재근거가 사라지는 것은 그 이야기를 하는 자신이 사라지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된다. (그러므로 마지막 로맨스조의 이야기를 전하는 다방 레지가 순간적으로 프레임에서 증발한 것처럼 보이는 컷은 의미심장하다. 로맨스조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버리면, 그녀 역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야 하니까.) 그러므로 동시에 이야기의 기원을 찾는 것은 곧 나의 존재의 기원을 찾는 것이 되기도 하며, 역으로 이야기를 망가뜨리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망가뜨리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초희(이채은)는 자신의 이야기를 어린 로맨스조(이다윗)가 한 것을 보았을 때 자신의 존재를 희미하게 떠올리며, 웃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가 파괴되지 않고 조금은 남아있는 것을 보았으니까.)

 

두번째는 결국 처음의 질문과도 연관되는데,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 사실 우리가 어떤 영화를 놓고 '이야기로만 이루어진 영화'라고 하는 것은 결국 내용보다는 그 방식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이야기로 이루어지지 않은 영화가 있던가. 문제는 그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하는가, 어떠한 방식으로 만들어내는가,이다. 로맨스조가 영화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없다고 한탄하는 것은, 이야기 자체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내야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는 단순히 매개체로만 보였던 다방 레지에게도 전화 씬을 부여하며, 그녀에게도 자신의 이야기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이야기를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풀어내는 것, 그것은 예를 들어 영화 속 초희를 그토록 괴롭혔던 소문들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소문들이 단지 무가치한 소문이고, 그것이 때로 파괴적인 속성을 가지는 것은, 그 내용이 사실이고 아니고서를 떠나서, 그것이 만들어지고, 전달되고, 유통되는 방식에 있다. 영화가 이야기를 무신경한 방법, 잘못된 방식으로 풀어낼 때, 때로 영화는 뜬소문보다 훨씬 더한 공격무기가 되고, 사람들의 정신을 망가뜨린다.

 

즉 이야기를 한다는 그 자체와 그 이야기를 적절한 방식, 적합한 방식으로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는 것, 이 두 가지의 질문을 하고 있는 영화는 그것이 영화의 본질에 가닿으려는 질문들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있다. 이야기가 빈곤해지는 것은 이야기 자체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 이야기들을 마치 소문들이 소비되는 것처럼 낭비하여 소비하려고만 드는 것에 이유가 있다. 영화는 어떠한 이야기를 할 것인가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어떠한 방식으로 할 것인가(동시에 어떻게 끝맺을 것인가)의 문제를 계속 고민하여야 하며, 노력해야만 한다는 점을 이 영화는 다시 상기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이야기의 내용 자체로서는 사실 빈곤하다고까지 볼 수 있는 이 이야기에 손을 내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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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03-19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월이 아카데미의 달이었다면, 3월은 좋은 한국영화들의 달인가..

아이리시스 2012-03-19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떠한 이야기를 할 것인가 보다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는 이제 실력의 차이이기도 한데 말이에요. 그걸 빼면 대체 영화에 뭐가 남을까요. 시나리오 쓸 때부터, 촬영에 나가 동선을 맞추는 모든 과정에서 영화는 어쩔 수 없는 공동작업인 것 같아요. 소설은 그게 사실이 아니라도 작가가 그냥 이상하구나, 하고 말면 되는데 영화는 나쁠 수록 이상하게 소문과 파급효과가 커져요. 그리고 영화가 나쁘면 관객들은 보상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하려는 말이 이게 아니라,

다방 레지가 로맨스조랑 마주치는 건 액자 속인거죠? 자꾸 느낌상 이감독이 다방 레지에게 로맨스조의 사랑 이야기를 듣고 나서 다시 로맨스조가 레지랑 만나면 어떨까 싶어가지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맥거핀 2012-03-20 00:24   좋아요 0 | URL
제가 이 글 쓰고 몇 개 리뷰를 읽다왔는데, 재밌는 것은 리뷰들마다 이 줄거리를 이야기하는 게 조금씩 미묘하게 다르네요. 그니까..이 줄거리를 뭐라고 해야하나..에고. 그니까 로맨스조가 레지랑 만나기는 하는데, 어떻게 보면 만나는 것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고 해야하나..(이게 뭔 소린가 싶죠..? 영화를 보세요!)

그죠. 맞는 얘기죠. 근데 아직도 많은 영화들이 그냥 신선한 소재, 혹은 이정도 이야기면 뭐 그냥 죽 지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근데 2시간 동안 인간을 집중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고, 아주 치밀한 계산이 필요한 작업이잖아요. 이야기하는 방식이 무신경한 영화는 보다가 슬슬 짜증이 나요. 근데 아직도 그런 영화들이 대세인 것을 보면, 역시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영화는 그저 시간을, 혹은 다른 무엇인가를 소비하게 하는 도구구나 싶어요. 즉 2시간 영화를 보는 거나, 2시간 자극적인 인터넷 기사들을 클릭질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같아진다는 거죠. 영화관에 겨우 돈과 팝콘과 자극과 무신경을 소비하러 가는 것인가...관객들이 그것을 치열하게 묻지 않는 이상 그런 영화들은 계속 양산될테고, 점점 나빠질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꽃도둑 2012-03-20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상수 감독밑에 있던 조감독의 영화라니...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 또한 닮아 있을 것 같아요...액자형식부터...같은 영화를 보고도 이해와 해석이 분분하니..이를 어쩐다지요?
영화도 파편~ 영화평도 파편화를 이루니..성공한 셈인가요?.,..ㅎㅎ

맥거핀 2012-03-21 22:35   좋아요 0 | URL
감독 인터뷰를 좀 보니까, 에셔의 손 그림에서 힌트를 얻으셨다고 하더라구요. 이야기가 이야기를 그리고, 다시 그 이야기가 돌아서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는 특이한 영화입니다. 스토리 구조에 관심있으시면 한번쯤 볼만한 영화라고 생각이 됩니다. 뭐 그럼에도 아주 판타지로 가버리지 않는 것 또한 인상적이구요.

2012-03-23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는 리뷰네요.

- 이야기의 끝은 시작을 보게 한다.
- 이야기는 듣고자 하는 간청으로 시작된다.
- 한 이야기의 존재 근거는 다른 이야기이다. (이야기끼리 그 존재들을 떠받친다.)
- 이야기의 기원을 찾는 것은 나의 존재의 기원을 찾는 것이고, 이야기를 망가뜨리는 것은 나의 존재를 망가뜨리는 것이다.
- 이야기가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못한다.(예를 들어 영화 속에서 매개체로만 보이던 다방 레지도 자신의 이야기가 있음을 영화는 슬쩍 보여준다.)
- 소문은 이야기의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무신경한, 잘못된 방식이 문제이다.

이런 것들이 흥미로워요. 좋은 생각거리, 고맙습니다.^^

맥거핀 2012-03-23 21:34   좋아요 0 | URL
글 꼼꼼하게 읽어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들을 가르는 기준이 매우 많겠지만, 저는 그 중의 하나가 컷(씬)들이 얼마나 의미있게 쓰이고 있는가, 즉 의미없이 버려지는 컷들이 얼마가 되는가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즉 각 컷들이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활용되고 있으면 있을수록 좋은 영화에 가까워지는 거겠죠(그런 의미에서 의미 없는 컷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은 에코의 말대로 포르노에 가까워지는 것일 것이구요). 그런데 이 영화는 각 컷들이 각각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전체적으로 최종의 메시지로 잘 달려가고 있다는 인상이었어요. 좋은 영화였다고 생각이 됩니다.

2012-03-23 23:01   좋아요 0 | URL
아, 이 댓글도 좋아요. 또 한 수 배웁니다. ㅎㅎ
 

 

 

 

러브 픽션, 전계수, 2012

 

 

 

(영화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일부 들어있음)

 

 

<러브 픽션>은 확실히 흥미로운 구석이 있는 영화다. 일단 먼저 간단하게만 그 이유를 말하자면, 이 영화가 그간 한국의 전형적인 로코물, 연애물들이 보여줬던 공식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남녀의 만남 과정에서 웃음을 이끌어내고, 마지막에는 두 주인공의 숨겨진 사연이 드러나면서, 감동 혹은 따듯한 이해로 마무리되었던 그 공식을 이 영화는 따르지않기로 마음을 먹은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의 프로듀서가, 이 영화가 애초의 제작사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새로 영화사('삼거리 픽처스')를 설립해 나왔다고 하던데, 그 까닭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아주 신선하다고는 말하기 힘들지만, 몇 가지 서사적 실험들을 이 영화는 행하고 있다. 그러나 물론 그 실험들이 순조롭게 효과적으로 진행되었는가라고 물으면 조금은 갸웃거려지는 측면은 있다. '공식'을 따르지 않고, 새로운 실험을 하겠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부담이 따르는 것이고, 면밀하고도 조심하게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공식에 따른 쉬운 풀이를 하지 않겠다는 것은, 조금은 돌아가되 그 과정에서 무언가 흥미로운 것을 이끌어내겠다는 이야기도 된다. 이 영화는 그 무언가를 이끌어냈을까.

 

눈에 보이는 실험은 이 영화가 구주월(하정우)의 시점으로 내내 전개되는 이야기이지만, 그 자아를 여러 갈래로 분열시키고 있다는 점. 그것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그의 이야기를 주로 들어주는 분리된 자아(이병준)가 자꾸만 등장한다는 점이다. 구주월이 뭔가 의문에 빠지거나, 생각을 하고자했을 때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는 이 분리된 자아는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수퍼에고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이 둘의 대화의 형태(하정우와 이병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주로 이야기를 하는 쪽은 자아(하정우)이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쪽은 수퍼에고(이병준)이며, 수퍼에고는 아주 지극히 이성적이고, 온당한 해결책(그러므로 사실은 그렇게 큰 의미가 없고, 따를 수도 없는 해결책)을 제시해준다. 그것의 반대편에서 또하나 제시되는 것은 구주월이 만들어낸 이야기속의 인물들인데, 구주월의 소설들에 나타나는 이 등장인물들- 팜므파탈, 액모부인 등에 등장하는 마형사 같은 인물- 의 행동과 모습들은 구주월의 내면의 욕망, 그러니까 다시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자면, 그의 이드의 한 단편을 드러내보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영화에서 구주월이란 인물의 욕망과 초자아와 그리고 그의 입으로 제시되는(영화에 깔리는 구주월의 내레이션) 자아를 한꺼번에 보고 있는 셈인데, 이는 무엇을 위한 것일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심리학 같은 학문에서는 필연적으로 인간을 유형화하게 된다. 즉, 100만명의 인간을 그래, 뭐 100만명에게는 100만개의 정신이 있겠지, 하고 놔둔다면 이러한 학문은 성립할 수 없다. 그렇게해서는 우리는 영원히 타인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인간을 몇 가지의 한정된 유형으로 나누고, 그에 걸맞는 이름을 붙이게 된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객관화한다는 말이다. 즉 어떤 유형의 성격들이 공통된 어떠한 이름을 갖기 위해서는 공유하는 속성들이 있어야 하고, 그것에는 객관화된 동의, 객관화된 공감이 필수적이다. 이 객관화한다는 것의 의미, 이 의미를 영화 속 어떤 것들과 연관지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구주월을 분리시켜 보도록 하는 것은, 그를 객관화하여 바라보게 하려는 시도의 하나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두 남녀주인공의 직업도 심상치 않은데, 여주인공 희진(공효진)의 직업은 영화수입 담당자, 남주인공 구주월은 소설가이다. 영화수입 담당자에게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능력은 이야기의 객관화 능력이다. 즉 수많은 영화들 중에서 어떤 이야기가 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인가를 객관화된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소설가는 어떨까. 소설가야말로 가장 주관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아닌가. 그러나 구주월이 영화 내내 소설을 제대로 써내지못해 골머리를 앓던 소설가라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왜 소설을 쓰지 못하는가. 그가 자꾸 자신의 소설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려 하기 때문이다. 아..이건 좀 아닌데, 이건 좀 밋밋하고, 이건 지나친 설정이고..그리고 그렇게 하는 순간 소설가는 무간지옥에 빠져 아무 것도 쓰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이 두 사람이 연애를 한다는 것. 그것이 문제란 것은 자신의 연애는 객관화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연애에 대해 코치하는 책들을 신뢰하지 못하는데, 그것은 거기에 쓰인 이야기들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다. 그 이야기들은 읽어보면, 정말 그럴 것 같고, 정말 맞는 말씀이고, 구구절절이 공감이 간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야기들을 내 연애에 도저히 적용시킬 수가 없으니, 그 책들을 어찌 신뢰할 수 있으랴. 그것을 적용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내 연애를 객관적으로 봐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인의 연애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날카로운 해결책과 관점을 짚어낼 수 있다. 그것은 물론 자신의 연애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날카로운 관점들은 대체로 늘 공감을 얻지 못한다. 객관화될 수 없는 자신의 연애에 대해서는 누구나 객관적인 관점과 해결책보다는, 철저히 자신의 입장에 동조하는 공감만을 원하기 때문이다.) 구주월은 그래서 괴롭다. 그는 계속 욕망과 자아와 초자아로 분열되는, 주위의 객관화된 시선을 상당히 중시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가 희진의 과거에 그토록 분노하는 것은 그것이 자신만이 아는 '겨털'이 아니라 누구나 아는 '스쿨버스'이기 때문이다. 그는 희진의 부끄러운 이야기에 얼마나 주위의 시선을 살폈던가.)

 

그랬던 그는 결국 그 주관에 투항한다. 단적으로 그가 처음에 희진에게 보낸 편지와 마지막에 보낸 편지를 비교해보자. 처음에 개그적인 패러디로만 점철된 그의 편지(당연히 모든 패러디는 객관적인 공감 지점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나중에 자신의 안부와 주위 친구들의 안부를 전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평범한(그러니 아주 주관적인) 편지가 된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이 마지막이 결국 구주월의 일종의 환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의 친구들과 상담센터에서 만난 사람들과 옛친구(수녀 등등)가 모두 어우러지는 이 마지막은 실제로 가능한가. 글쎄. 이것은 아무래도 환상의 삼거리극장으로 보인다. 그리고 물론 환상은 자신의 주관성의 극대, 즉 자신만의 세계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는 이 마지막이 좀 아쉬워 보이는데, 이 영화의 지속적인 유머는 자신의 연애라는 주관과 그 주관을 거스르려는 객관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계속적으로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그 유머들을 끝까지 밀어붙였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어차피 이 영화는 똘끼로 밀어붙이는 영화, 이른바 병신같지만 귀여워 류의 영화가 아닌가. 조금 더 이상하고 우스꽝스러운 결말을 기대했는데, 너무 온건한 결말인 감이 없잖아 있다(뭐 상업영화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일지도...).

 

추가해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지적하고 싶다. 그것은 이 영화가 구주월의 분리된 자아를 그려내면서도 그 분리된 것들 사이에 최소한의 연결고리도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 특히 구주월이 쓰는 소설 속 이야기들은 본편의 이야기와 거의 잘 붙지 않는다. 즉 이 이야기 속의 이야기들은 무슨 기능을 하는가를 자꾸 되묻게 만든다는 점. 영화 속 등장하는 판타지는 전체 이야기에 교훈을 주거나, 아니면 아예 반대로 비틀거나, 그 자체로 아주 재미있거나 해야 하는데, 그도저도 아니다 보니, 이 부분들이 지루하게 느껴지며 구주월의 욕망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보이지도 못했다.

 

 

덧.

하정우와 공효진의 연기는 무난한 편인데, 자꾸만 다른 영화들의 이미지가 겹쳐보이기는 한다. 하정우의 느물거리는 연기는 <비스티보이스>와 <멋진 하루>가 겹쳐보이며, 공효진의 쿨한 모습은 <행복>과 <가족의 탄생>이 오버랩된다. 하긴 공효진의 경우는 남성캐릭터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 이야기에서 어쩔 수 없어 보이기도 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쿨한 캐릭터야 말로 '이상화된 그녀'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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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2 2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12 2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13 2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14 15: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2-03-12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런 한국영화에 특히 더 흥미가 없는데, 맥거핀님의 프로이트 식으로는 좀 흥미로워요. 우리는 타인을 영원히 100% 이해할 수 없는 걸까요?

근데 저기 지진희 앉아있는 거 보고 깜짝 놀랐네요. 나온다는 정보가 없었어서ㅋㅋㅋ

맥거핀 2012-03-13 00:03   좋아요 0 | URL
제 자신도 거의 이해를 못하는데, 타인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ㅋ 사람이 그렇게 이해가 잘되는 동물이면 심리학은 벌써 망했을거고, 프로이트 아저씨는 종로에서 토정비결이나 보시는 걸로 노년을 소일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지진희 씨는 구주월의 형으로 살짝 나옵니다. 그러고보니 하정우 캐릭터를 지진희한테 시켰어도 나쁘지는 않았을듯.

2012-03-21 2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21 2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23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로서도 흥미롭지만, 아쉬운 건 제가 이 영화를 못 보고 글을 읽는다는 점...
영화를 보고 나서 이 글을 읽으면, 영화 본 사람의 공감과 이견이 있어서 좋을 텐데 말입니다.
언젠가 영화를 볼 수 있겠지요.. 영화관에선 영원히 못 보겠지만.
그나저나 케이블 티비에서 이 영화 소개를 거의 영화 다 보여줄 태세로 자세히 해주는 걸 조금 보긴 봤어요. 재밌던데요.. 삽입곡 뮤직비디오도 좋고~ㅎㅎ

맥거핀 2012-03-23 21:37   좋아요 0 | URL
아..이 영화에 나오는 음악들 괜찮아요.특히 말씀하신 뮤직비디오가 아주 인상적이지요. 시골 생활이 나름 좋기도 한데, 문화 생활을 저해하는 결정적인 단점이 있네요. 그래도 영화에서 못보시는 것들을 거기서 볼 수가 있으니 좋으시지 않겠냐고 말하면 위로가 되실려나요..??
 

요 며칠 <극장전>의 마지막 대사가 나를 사로잡고 있다. "이제 생각을 해야겠다. 생각을 더 해야 해. 생각만이 나를 살릴 수 있어. 죽지 않게 오래살 수 있도록...." 마지막, '죽지 않게 오래살 수 있도록...'이라는 말이 웃기기는 한다. 물론 이 말의 방점은 '오래산다'가 아니라, '죽지 않게'에 찍혀있다. 죽지 않은 상태에서, 산다는 것. 매일매일 죽어있는 어떤 상태가 아니라, 살아있음을 만끽하면서 산다는 것. 그것은 생각으로 가능할까.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그 대우 명제, 즉 '죽어 있는 자들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참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 말들은 이렇게 바꿀 수도 있다. "이제 책을 읽어야겠다. 책을 더 읽어야만 해. 책읽기만이 나를 살릴 수 있어. 죽지 않게 오래살 수 있도록..." 이미 쌓아놓은 책이 너무 많아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결의를 다지는 의미로 집에 오는 길에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러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 움베르트 에코의 <젊은 소설가의 고백>, 백가흠의 소설집 <조대리의 트렁크>를 샀다. 요즘 그나마 남는 시간들을 <한겨레21>과 <씨네21> 및 인터넷 기사들을 정독한다고 거의 써버리고 있는데(이 넘의 정부는 너무 많은 것을 알아야만 하게끔 한다. 평화로운 강정은 애초 우리모두 알 이유도, 알 필요도 없는 그저 가만히 두면 되는 곳이었다), 책 읽기에 그 시간들을 돌려서 써야겠다.

 

덧.

요 며칠 사이에 옆에 즐겨찾기 등록의 숫자가 3명이나 줄었다. 옛 여인은 새로운 여인과의 만남으로 잊으면 되고, 꿀꿀한 영화에 대한 기억은 이어서 본 다른 영화에 대한 기억으로 덮으면 된다. 마찬가지로, 한 명이 줄은 기억은, 또 다른 한 명이 줄은 기억으로 덮으면...된다. 다만, 단지 나는 그 이유가 궁금할 뿐인데, 누군지 몰라도(몰라야) 좋으니, 즐겨찾기 목록에서 제거할 때, 익명으로 그 이유를 반드시 남겨야만 가능하도록 만들어지면 좋지 않을까, 진지한 뻘생각을 해본다. 글들을 더 이상 보지 않는 이러저러한 이유를 글쓴이도 알게 되면 좋지 않을까. 그래야 뭔가 더 나아질 여지가 있을텐데. 레알 잡담에 어울리는 허접한 덧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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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2-03-08 0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켁~ 이건 뭐죠~ 지금 저도 백가흠 읽고 있는데요 ㅋㅋ 이런 이런 ㅋㅋ 그런데 중고서점 종로에 있는거 말씀하시는거죠? 거기 책상태좋나요? 제가 중고품질에 대해선 거의 불신에 찬 태도를 지니고 있어서요 ㅋㅋ 만약 좋다면 대량매입 가능합니다 ㅋㅋ

아!!!!!!! 즐겨찾기 삭제 그 3명중에 한명이 전데요 여기 손손요!!(자랑은 아니지만) 저는 그냥 깔끔하게 서재운용할려고 즐겨찾기 삭제한건데(기존의 있던건 다 삭제했어요 그리고 즐겨찾기 하신분들이 계속해서 베스트 글 되니 할필요 없겠더라고요) 그냥 님글은 계속해서 알라딘글에 등록되니 거기서 보면 충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서요~ 또 이런 가슴아픈 사연을 듣게 되네요~ 흐음~ 그러면 그냥 등록하고 갈께요^^ 물론 맥거핀님의 글이 나빠서 그런건 절대로 아닙니다~

저는 요새 가만히 책상에 앉아있으니 영화보다는 문학작품을 더 읽게 되던데요 ㅋㅋ 그래서 그런지 아무래도 영화에 대한 글에 남다른 글을 쓰시는 맥거핀님 글을 더 많이 볼꺼 같네요 ㅎㅎ

아~ 그리고 강정 그 다큐멘타리를 아직 보지 않아서 코멘트 못남기고 있는데 ㅋ

더불어 아무래도 올해 가장 좋았던 영화로 버넷 밀러<머니볼>과 미켈란젤로 프라마르티스의<네번>이 아직도 저의 머릿속을 계속해서 헤매고 있네요~ 그래서 한번 머니볼에 대해서 더 얘기하고 싶네요~

맥거핀 2012-03-09 15:19   좋아요 0 | URL
하하하..억 예상치못한 배신입니다. 역시 추궁하니 자백(?)이 나오네요. 자진납세 감사합니다.^^ 근데 정말 궁금한 건 '누가'보다 '왜'에요. 저는 궁금한게 많은 인간이라..

네..종로점 맞구요.(신촌은 좀 멀어서...) 책의 물리적상태를 말씀하시는 거죠? 뭐 복불복이긴한데, 제가 산 3권의 책은 모두 거의 새책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책입니다. 거의 출판사에서 바로 가져나온 새책같은 책들이 꽤 있어요. 근데 아직도 인문쪽은 많이 부족한 느낌이고, 소설쪽은 그래도 읽어볼만한 책들이 꽤 있는 것 같아요. 입구에 바로 들어가면 오늘 들어온 책들이 있는데, 거기에 건질만한 것들이 주로 꽤 있구요. 안으로 들어갈수록 별로 없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오늘 들어온 책 중에서 안팔린 것들이 안으로 들어갈테니..)

프람마티노 <네 번> 진짜 좋나요? 이거에 대한 극찬을 몇 개 봐서, 영화에 대해 궁금중이 좀 있어요. 염소와 노인 이야기가 뭐그리 별게 있을까..싶었는데요. 극장에서 보고 싶은데, 상영정보 캐취하시거든 알려주시면 감사~! <머니볼>에 대한 글도 빨리 쓰시고...

아이리시스 2012-03-09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대로 있어요, 즐찾ㅋㅋㅋ

맥거핀 2012-03-09 15:21   좋아요 0 | URL
배신하면 제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ㅋㅋ

카스피 2012-03-09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즐찾이 줄어들면 왜 줄어들었을까? 제 글이 마음에 안드셨나 하고 머리를 쥐어짭니다용^^;;;

맥거핀 2012-03-09 15:23   좋아요 0 | URL
그렇죠? 저만 그런거 아니죠? 저만 소심한 거 아니죠? 다들 그러시죠? (^-^;)

2012-03-10 0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11 0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드득 2012-03-11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만이 날 구할 수 있어'란 대사는 저 역시 MB 정권 내내 모토처럼 여기고 산 말이었는데 반갑네요. 정말 MB는 많은 공부를 하게 했죠. 집권 초기부터 운하의 효용성, 리먼 브라더스, 디도스, 천안함, 민영화, 의료 보험, 표현의 자유 등등... 공부해야 할 것도 많고 잊지말아야 할 것도 참 많은 정권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고 보니 투표란 스트레스를 줄이는일도 되겠지만 내가 좀 더 편하기 위한 일이기도 하군요. 강정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번엔 정말 제대로 투표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맥거핀 2012-03-12 13:02   좋아요 0 | URL
우리 가카는 사실 탄핵을 당했어도 몇 번을 당했어야 했지 않겠나는 생각이 듭니다. 말씀하신 디도스나 무리한 민영화, 부활되는 검열 등도 그렇고, 측근들의 잦은 비리나 내곡동 비리, 다이아몬드 광산 사건,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간인 불법사찰 이거 하나로도 게임 끝이죠. (뭐 비교하기도 그렇지만, 노무현 전대통령이 측근비리와 낮은 경제성장 -지금 가카의 경제성장률은 얼마죠?- 으로 탄핵된 것에 비하면 말입니다.)

뭐 근데 저는 관대한(-_-) 사람이라, 왠만하면 가카 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근데 대운하니 해군기지니, 핵발전소니 하면서 이 나라의 산천을 망가뜨리는 것만은 못 봐주겠네요. 그건 가카로 끝나는 게 아니니까..가카야 본인이 생각하시는 할 일 하시고 가시면 그뿐입니다만, 그 망가진 산천은 어떻게 돌아오나요? 말씀하신대로 투표만이 살길입니다만, 솔직히 요즘 민주당이나 진보당 쪽의 행태를 보면 그다지 투표에 희망이 안 생기네요.

2012-03-23 2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23 2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23 2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24 17: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24 2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컷, 아미르 나데리, 2011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이 들어있음)

 

 

아미르 나데리의 <컷>은 사실 줄거리가 크게 의미가 없어 보이는 영화다. 예술과 오락이 결합된 영화만들기를 꿈꾸지만, 자신의 영화를 실패하고, 불법 상영회로 꿈을 근근히 이어가던 슈지(니시지마 히데토시)가 자신의 영화 제작비 때문에 야쿠자에게 빌린 돈을 갚지 못해 죽은 형을 대신하여 오로지 맞는 것으로 남은 빚을 갚아나간다는 내용의 이 영화는 사실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이다. 감독 아미르 나데리는 이야기의 핍진성 따위는 별 개의치 않는듯, 오로지 메타포와 직접적 메시지로 서사의 빈 구멍을 메워나간다. <씨네 21>에 보면, 이 영화를 본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가 이 영화의 메타포를 간파하여 말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데, 기요시에 따르면, 슈지가 매를 맞는 행위 자체는 감독의 영화 만들기의 비유이며, 그에게 장소와 돈벌 기회를 제공하는 조폭 중간 보스는 프로듀서, 옆에서 그의 맞는 행위를 돕는, 슈지가 오즈 영화들의 아버지와 같다고 말한 노인은 촬영감독, 그의 매맞기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요코(토키와 다카코)는 영화의 여주인공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사실 일종의 비유적 메시지가 이 영화에는 가득한데, 구로사와 기요시의 비유를 조금 더 연장하여 살펴보면, 슈지가 돈을 손에 가득 쥔 남자들의 펀치를 받는 장면들은, 영화 제작에 끊임없이 가해지는 폭력적인 자본의 계속적인 간섭과 요구들로 볼 수 있다(이것이 한편으로 조폭들의 폭력으로 보여지는 것이 흥미롭다. 사실 어떻게보면 가장 자본주의적인 것이 조폭이며- 조폭들은 왜 명품수트를 입는가 -, 그런 조폭이야 말로 오로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부산물들이기 때문이다). 감독 슈지는 그런 자본들의 요구에 맞서서 계속 자신의 영화, 즉 육체를 지탱시키고, 자신의 세계를 지켜나갈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예술적 자의식을 끊임없이 되새기는 것이다. 즉 이 영화에서라면 이는 슈지가 맞으면서 계속 되뇌이는 자신이 상영회에서 상영한 영화 고전들의 목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흥미로운 것은 또 한편으로 이는 결국 환영(幻影)으로 이 세상을 버티게 해 줄 동력을 제공한다는 영화의 근본적 가치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그러므로 맞는 행위 자체가 슈지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슈지를 힘들게 하는 것은 맞아서 귀가 들리지 않는 것이다. 소리 없이 어떻게 환영을 지속할 것인가). 그러나 슈지에게는 지금 여기에서, 그 펀치를 맞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눈앞에서 이어지는 펀치라는 것은 자본의 끊임없는 투입을 감독에게 계속 처절하게 인식시키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적어도 자본의 펀치를 계속 인식하는 것이고, 최소한 그것에 굴복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슈지는 돈을 거저 받는 것이 아니다. 그 대신에 강력한 펀치 앞에 자신의 육체를 맞서서 기꺼이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슈지는 호의로 돈을 빌려주겠다는 조폭 중간보스의 제의를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 자본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며, 그 자본에 완전히 종속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슈지에게는 멍들고 망가진 육체가 필요했다. 멍들고 망가진 육체라는 것은 자본의 힘에 망가지고 상처난 부분이 어디인지를 명확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만약 그 자본을 아무 댓가 없이 받아들인다면, 자신의 머리 속의 망가진 부분을 어떻게 볼 것인가? 또한 동시에 슈지에게는 '이 장소에서' 맞는 것 또한 중요한데, 그것은 그의 영화를 믿고 아무런 간섭없이 제작비를 대준 형이 죽어간 장소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자신의 영화를 기꺼이 지지해준 관객들에 대한 보답이며, 그 사라져간 최후의 관객에게 어떻게든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곳에서 자신의 육체를 어떻게든 지속시켜 나가는 것, 그것이 슈지가 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거의 전부였다. 

 

 

그러나 일단 그 메타포를 무조건 긍정하기 전에 그 메타포로 만들어지는, 그리고 이 영화에서 전제로 하고 있는 몇 가지의 질문들을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그것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다. 슈지의 말대로 예전의 많은 영화들은 오락과 예술이 결합되었던 것임에 비해, 오늘의 많은 영화들은 오로지 폭력적인 자본이 투입된 오락영화들일 뿐인가. 그리고 이와 연관된 질문으로 오늘의 많은 영화들이 단지 오락영화일 뿐이라면, 이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폭력적인 자본의 책임인가, 아니면 그 영화들을 기꺼이 보아준 수많은 관객들의 책임인가. 혹은, 그 와중에서 진정한 영화라는 것은 죽어가고 있는 것인가. 예를 들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많은 곳에서는 오늘도 몇몇 논쟁들이 고스란히 반복된다. 어떤 사람들은 소위 거대자본이 투자된 영화들, 그 거대한 스펙타클을 영화관에서 관람하는 것이 왜 나쁜가, 이것에 재미를 느끼는 것이 무엇이 잘못인가, 그리고 재미없는 어떤 영화들을 '재미없다'고 말하는 것이 왜 나쁜가를 묻고 있다. 이의 반대편에서 다른 사람들은 그 거대한 스펙타클이 사실 당신 안의 어떤 세계를 조금씩 망가뜨리고 있으며, 그 사람들이 '재미없다'고 말하는 그 영화들이 어떠한 부분에서 가치가 있는지, 그리고 도리어 그 영화들에 어떠한 재미가 있는지를 말하고 있다. 물론 이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예전부터 계속 반복되어 오던 문제들이며, 여전히 마땅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슈지는 이 영화에서 예전에는 오락과 예술이 결합된 영화들이 많았고, 현재는 오락과 예술이 분리되어 있다는 뉘앙스로 이야기를 하지만, 과거의 영화들도 오락과 예술은 거의 하나가 된 적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 일례로, 슈지가, 아니 감독 아미르 나데리가 밝히는 최고의 영화들의 목록을 살펴보아도, 당대에는 '재미없고 지루하다'는 이유로 관객의 외면을 받았지만, 후일에 재평가된 영화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 재평가에 크게 기여를 하여 새로운 영화의 흐름을 이끌어낸 사람들이 바로 지금도 어딘가에서 욕을 먹고 있는 영화비평가들이다.) 예전의 많은 시기에도 오락영화는 오락영화일 뿐이었고, 예술영화는 예술영화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대중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까. 예술적으로 가치가 인정되는 영화들이 당대에 많은 관객들의 외면을 받는다는 것은 대중들의 감식안이 떨어진다는 반증일까.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바꿔보면, 단지 오락물로서만의 가치를 지닌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관객들이 그런 영화들을 좋아하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관객들이 그런 영화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영화들이 많이 양산이 되는 것일까. 자본의 입장에서도 소위 '예술적' 영화들이 관객의 사랑을 더 많이 받는다면, 그런 영화를 만들지 않을 도리가 없지 않은가. 물론 이 부분에서 관객들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모든 것이 다 그렇듯이, 영화에서도 자본은 점점 거대해지고 있으며, 영화의 거의 전부에 자본의 논리가 적용되고 있다. 자본의 큰 간섭 없이 만들어진 작은 영화들은 관객에게 전달될 수 있는 루트 자체가 대자본으로 공습하는 영화들과 비교가 되지 않으며, 많은 대중영화들의 시작에 감독이나 주연배우들의 이름보다 투자사의 이름이 먼저 오르는 것은 일종의 관례가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부분에서 관객에게 완전한 '무혐의'를 부여하는 것 또한 어렵다고 본다. 다시 이 영화 <컷>으로 돌아와 이야기를 한다면 슈지에게 펀치를 날린 책임을 물을 수는 없으나, 그 펀치 세례를 그대로 방조한 책임을 조금은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영화라는 것이 죽어가고 있다면, 그 살인의 방조, 혹은 자살의 방조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도 있지 않을까. ('죽어가고 있다면'이라는 가정인 것은, 영화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먼저 '그 영화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부터 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은 이 리뷰의 범위를 넘을 뿐 아니라, 내 깜냥의 범위도 넘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 펀치 자체를 아예 멈추게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까도 말했지만, 영화에는 자본의 펀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펀치라는 행위의 형태도 그렇지만, 그 펀치 자체로도 그렇다. 즉 영화에는 자본이 필요하다. 이제 이 영화의 끝으로 가보자. 영화의 마지막 슈지는 결국 모든 빚을 갚지만, 다시 그 조폭에게 돈을 빌린다. 그리고 그것으로 새 영화를 찍는다. 자 이것은 희망적인 결말인가? 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는 자에게 희망이라는 것을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는 다른 어떤 예술 못지 않게, 아니 어쩌면 다른 모든 예술들보다 훨씬 자본이 필요하며, 자본과 밀착하게 결합된 예술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18세기 중엽 산업혁명으로부터 탄력을 받아, 19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무르익기 시작하였고, 영화 역시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이를 때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즉 영화의 시작은 자본주의의 시작과 거의 그 궤를 같이 하였다. 이러한 시기의 겹침은 물론 우연이 아니다. 필름은 예나 지금이나 자본을 상당히 잡아먹는 물건이다. 디지털이면 달라질까. 그대신 이제는 3D라는 자본을 먹는 괴물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또한 동시에 영화는 초창기부터 그 자본의 펀치들을 같이 맞아온 대중들과 밀접하게 결합하여 있었다. 영화가 '그들만의 예술'이었던 적은 없었다. 영화는 한번 만들어지면, 반복하여 상영이 가능했고, 대량으로 전파가 가능했다. 즉 클래식 음악이나 미술이나, 연극(물론 '글'은 말할 것도 없고)이 특정 조건을 갖춘 사람들만이 즐길 수 있는 예술이었다면, 영화가 그런 예술의 지위를 누린 적은 없었다. 그러므로 마지막 슈지에게 가해지는 100대의 펀치와 크로스되어 제시되는 아미르 나데리가 관객들에게 가하는 100대의 펀치(100개의 영화 리스트)를 맞으면서, 나는 조금 불편해졌다. 이는 일종의 '인정 투쟁'처럼도 보였기 때문이다. 왜 다른 예술들과 다르게 영화에서 만은 이런 '리스트'가 횡행하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대중과 밀접하게 결합하여 자라난 영화가 어떻게든 그 대중들을 밀어내려는 몸부림같은 것은 아닐까. 나는 뭔가 이렇게 다른 영화를 보아왔다는 몸부림. 자신만의 새로운 리스트를 만들어 다른 사람들과 구분하려는, 대중들과 자신들의 사이에 방벽을 치려는 무의식적 자의식. 영화가 영화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이 되려는 몸부림은 혹시 아닐까. (차라리 영화의 역사나 혹은 감독들의 계보를 나열했다면 다르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왜 BEST 100인가. 왜 BEST 100의 형식이어야 했나라는 물음.) 그 마지막의 장면들에서 나눔과 연대, 동지적 의식보다는, (요즘의 많은 리스트들의 제시에서 느껴지듯), 경쟁과 구분의 뉘앙스가 더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미르 나데리의 영화 <컷>은 끝까지 오만하게까지 느껴지는 결기(혹은 허세)로 밀어붙이는 영화다. 이야기의 방법적인 측면에서도 그렇고(버스터 키튼의 무성영화가 제시된 후, 갑자기 순간 무성(無聲)이 되어 무대밖과 안을 넘나드는 장면을 그대로 재현해보인다거나, 혹은 구로사와 아키라나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를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흑백으로 전환되는 것 등), 이야기의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그렇다. 씨네필이 아니라면 씨네필이 아닌 사람들을 거의 아무 생각 없는 자들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영화가 불편할 것이고, 씨네필이라면 씨네필로서의 자의식을 과잉하여 드러내보이는 이 영화가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아미르 나데리는 그런 것에 별로 개의치 않는 듯 하다. 그저 영화는 마지막에 외칠 뿐이다. 컷! 자 이제 마지막 질문을 할 때가 되었다. 컷, 잘라낸다는 것. 잘라내고 싶은 것은 자본인가, 대중인가. 그 둘 중 어느 것도 잘라낼 수 없다면, 영화에서 잘라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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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2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대 한 대 얻어맞는 주인공이 그런 '리스트'를 읊었다면 좀 불편해졌을 것도 같아요. 아무래도 영화광 특유의 '구분과 우월감'의 문화가 실제 영화광의 세계에 있으니까요. -이건 정말 많은 영화들이 접근성이 무지하게 떨어져서 그런 것 같아요. 저도 사실은 리스트의 영화를 다 보고 싶었는데 많이 보지 못했다는...
그나저나 주인공이 육체성과 고통으로 정직하게 자신의 자리를 매기고 싶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허리케인 죠"가 생각나요.^^ (-아아 저도 좀 오타쿠였어요.ㅎ)

맥거핀 2012-03-02 23:35   좋아요 0 | URL
마지막에는 주인공이 읊는 수준이 아니라 별개의 자막과 컷으로 아예 리스트가 제시되니까요. 영화관에서 다른 영화들의 목록을 제시하는 영화를 보는 것은 흥미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사실 왜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리스트를 좋아하나 의문을 가지고 있어요. (제가 영화에만 관심이 있어서 그런가요? 예를 들어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소설 BEST 100 리스트를 만들어 서로 비교해보고 그러나요..?) 위에 좀 끄적거리기는 했지만, 그게 해답은 아닌 것 같고,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는 그저 리스트를 볼 때에 위압감과 부러움, 그리고 폄하(여우의 신포도)를 왔다갔다하는 것 같아요.

네오 2012-03-03 00:05   좋아요 0 | URL
리스트선택은 저에게는 100으로 환산해서 허세 90, 습관 8, 관심2 로 구성되어져 있어요~ 사실 그렇죠~ 많이본것 뽑내기같은거 하고 싶지 않나요???? 저는 많이 그런데요 ㅎㅎ

문학 베스트 100을 선택하라는 시험지가 있으면 대단히 구미가 댕기네요~ 영화보다는 이쪽이 더 상대방에 대한 교양을 알수 있을거 같아요~ 왜 타자에 대한 교양을 제가 따지냐 고요 라고 불평하시면 할말이 없습니다만 ㅠㅠ

그런데 밑의 페이퍼도 있지만 정말 영화를 새로운 방식으로 보시네요 보리스 바르넷은 저는 누구지 모르고 있다가 작년 서울아트시네마회고전때 알았습니다 그녀는 그 유명한 세느좌안이야기라는 소리를 듣고 아직 "나는 멀었다'라며 극장문을 나오던 아픈 추억이 있네요~

맥거핀 2012-03-03 13:29   좋아요 0 | URL
원래 영화 좋아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다 어느 정도는 허세가 있지 않나요..? 안본거도 아는 척하면서 이야기하는 경우들도 있고..정도가 심하지 않다면야 어느 정도는 '익스큐즈'해야 그래도 얘기가 됩니다.^^

문학 BEST 100 같은 거 하자고 하면 저는 절대 안해요. 말씀하신대로 제 교양이 드러나기 때문에..하하 (근데 영화 좋아하는 사람들만 이렇게 리스트에 집착하는 거 맞죠?)

아..그리고 세느좌안이야기라는 소리를 듣고 "나는 멀었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네오 2012-03-03 23:58   좋아요 0 | URL
헉!! 뜨끔했네요!! 제 얘기하시는거 같아서 ㅎㅎ 맥거핀님도 리스트 꼽고싶은 욕망이 꿈틀거리잖아요 ㅎㅎ 아마도 정성일 영향도있을걸요~

바네사가 알랭레네 또는 크리스 마르께가 속하는 센느 좌파란것을 몰랐다말이죠~ 누벨바그사람들이랑 반대되는 대착점에 있는 사람들이지요!! 뭐 맥거핀님이 영화적 교양이 월등하시니ㅋ 이런 설명 필요하겠습니까만은 ㅎㅎ

아~ 키노 재창간 소식이 들리던군요 같이 손잡고 들어갈볼까요 ㅎㅎ

맥거핀 2012-03-04 12:07   좋아요 0 | URL
아..아네스 바르다 얘기하시는가 보군요. 작년에 저도 회고전 가고 싶었는데, 이러다저러다 보니 가지를 못했네요(뭐 늘 그렇지만.;).

확실히 우리나라에서는 이 리스트 놀이의 유행에 정성일 씨의 영향이 좀 있는듯 합니다만, 외국애들도 열심히 하는 걸 보면 꼭 우리만 그런거 같지는 않고..(뭐 정성일 씨도 외국에서 하는 것을 보고 영향을 받았겠지만..)

이번에 정성일 씨가 트위터에서 말한 키노 재창간설로 마음이 싱숭생숭한 영화팬들이 좀 있죠.ㅋ 저도 왜 다시 정성일인가,라는 의문은 조금 있지만, 그간 키노 폐간 후 여러 행보들을 보고 생각해봐야 하는 거겠죠. 그간 영화비평을 이야기하는 다른 매체들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키노만큼의 위치에 오르지도 못했고, 그만한 담론들을 이끌어내지도 못한 것은 사실이니, 정성일의 귀환이 어쩔 수 없어 보이는 측면도 있어요. 그러니 왜 키노인가를 묻기 이전에, 그간 우린 뭐했나..를 먼저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는 느낌이구요. 다만, 키노의 전성기 때와는 다르게 지금은 소위 SNS의 시대, 새로운 유형의 잡지들이 나오는 시기이니 어떤 형태로의 키노인가, 얼마나 새로운 키노가 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뭐 어떻게보면 정성일씨의 주도로 키노의 재창간이 논의된다면, 그것 자체가 약간은 슬픈 일이기도 하겠구요..)

이진 2012-03-03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으, 이것이 바로 맥거핀님의 위엄이었던 것인가요.
샤이닝님께서 제게 맥거핀님의 글을 읽어보라 강추하셨던 이유가 있었군요.
일단 일본인이라는 데서 마음이 동하였고 자극적인 내용에 마음이 끌리는군요.
스크린샷에 완전 마음이 반하였습니다 ^_^꺄붕~

아, 그건그렇고 글 너무 멋진걸요~

맥거핀 2012-03-03 13:33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소이진님. 좋은 말씀 감사하구요. 그간 스쳐가면서 글 봤었는데, 이렇게 인사나누네요. 이 영화는 이란 감독 영화지만, 일본에서 일본배우들과 촬영했고, 일본색(?)이라는 게 약간은 있어요. 감독이 일본영화들에 대한 상당한 경외를 보여주기도 하구요.

저 스샷에 있는 주인공 나름 멋있어요. 복근도 아주 좋구요. 복근이 저 정도는 있어야 저렇게 맞아도 저렇게 계속 버티겠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물론 그렇다고 해도 말이 안되긴 하지만요.;) 그간 다른 영화들에 조연으로 꽤 나왔다고 하는데, 처음으로 관심이 생겼어요.

아이리시스 2012-03-03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 이제 LIST 100을 읊어주세요^^ 신기한 영화다..(혼잣말)

포스트가 멋있어요. 예전에 기타노 다케시 영화삘이네요!!! 내용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예전에 저 일본영화 중에 폭력적인 것들 좀 좋아했어요. 하하.

Shining 2012-03-03 19:59   좋아요 0 | URL
후훗, 저도 아이리시스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리스트 100은 과연 무엇인가요?+_+

저도 기타노 타케시 좋아해요, 미이케 다카시 영화 보면서 뒷목 잡았던 적은 있지만요_-

맥거핀 2012-03-03 23:43   좋아요 0 | URL
댓글들을 보고, 이거 분명히 리스트를 다 정리한 분이 있을 거 같아서 찾아보니 진짜 있네요.+.+ (무려 3번을 보시고 정리했다합니다..이 영화 3번보기 쉽지 않은데..)

카페에 있는 글이라, 링크시켜도 못 보실 것 같고, 그 중에 베스트 10만 말씀드릴께요. (영화 상에는 '무순'이라고 제시되지만, 뒤에 나오는 영화들을 베스트 10으로 봐야할 듯 싶어요. 따로 사진이 나오기도 하고..)

10 <스페이스 오딧세이> 스탠리 큐브릭
9 <만춘> 오즈 야스지로
8 <수색자> 존 포드
7 <선라이즈> F.W.무르나우
6 <거미의 성> 구로사와 아키라
5 <달세계여행> 조르주 멜리어스
4 <라탈랑트> 장 비고
3 <우게츠 이야기> 미조구치 겐지
2 <8과 1/2> 페데리코 펠리니
1 <시민 케인> 오손 웰즈
(각 영화에 대한 설명은, 제 서재에 들러주시는 네오님께 패스~)

저는 몇 가지 영화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리스트를 보니 새롭네요. 한국영화로는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이 100위 안에 있구요. 말씀하신 기타노 다케시 감독 영화도 있네요. <하나비>

근데 미이케 다카시 영화는 진짜 보기 힘들어요.-_- 그래도 끝까지 열심히 봤어요.-_-

네오 2012-03-08 06:01   좋아요 0 | URL
앗!! 뭐예요 ㅎㅎ 리스트10 다본영화라서 이 영화들에대해서 쓰고 싶어지잖아요~ 지금 obs에서 스탠리 큐브릭 음악서재를 봤는데 스탠리 큐브릭에 대한 모든영화에 대한 평을 쓰고 싶더라고요~ 오홋 정말 위대한 예술가라고 영화카피라이터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더군요 ㅎㅎ 갑자기 불끈 베스트10 영화쓰고 싶어지는 밤이군요^^

맥거핀 2012-03-04 12:11   좋아요 0 | URL
제 예상대로 네오님은 당연히 다 보셨을 줄 알았어요. 아..저는 어떠냐구요. 묻지 마세요. 다 보진 못했다..정도로만 (여전히 허세를 담아) 말해두죠..; (그러니 위에도 썼지만 설명이 필요하신 분은 네오님께..)

아..그리고 제목을 쓰다보니 위에 하나 수정사항이 있네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입니다. '2001'이라고 하니 왠지 SF느낌이 안나네요.

아이리시스 2012-03-07 19:38   좋아요 0 | URL
오, 네오님, 맥거핀님. 저걸 다 보는 끈기는 어디서 오는 겁니까. 어떻게하면 생기는 겁니까. 솔직히 저런 리스트 치고 재미는 별로 없..( '')

저는 링크해주세요. 100개 중에 몇 개 봤는지 자가진단 하게요, 맥거핀님. 부탁해요. 저는 혼자 못 찾겠어요. 어딨어요, 대체!

맥거핀 2012-03-08 00:10   좋아요 0 | URL
네이버 스폰지하우스 카페에 '으갸갹'님의 글이에요. 저는 가입되어 있는 상태라 바로 볼 수 있는데, 외부에서 바로 열람이 가능한지 모르겠네요.^^
http://cafe.naver.com/spongehouse/26714

저도 솔직히 본 영화 찾는게 더 빨라요. 안본거, 못본게 훨씬 더 많네요.

아이리시스 2012-03-08 01:4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맥거핀님. 저는 네이버에 더 많이 접속하니 카페가입하면 돼서 괜찮아요. 등급제한만 없다면 했었는데 없거나 이미 제가 가입해뒀거나 했나 봐요. 오호라, 그런데 영어목록으로 -_-;;

저 한 번 더 절망했어요ㅋㅋㅋ

맥거핀님이 왜 10개만 가져왔는지도 알겠어요. 제목 처음 들어보는 것도 엄청나요. 그런데 구할 수 있다면 차례로 보고싶은 리스트이긴 하네요ㅋㅋㅋ

맥거핀 2012-03-08 01:48   좋아요 0 | URL
네..나머지 영화들의 한국어 제목을 찾아내기가 너무 귀찮아서..^^;; 근데 갑자기 궁금해지는데, 나데리 감독은 이 100편 다 보기는 했을까요..? (했겠죠..그랬겠지..그랬을거야..)

네오 2012-03-08 06:09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맥거핀님 지금 예술가의혼이 담긴 열정을 무시합니까? "나데리 감독은 이 100편 다 보기는 했을까요..?" 질문은 불경스럽네요 ㅋㅋㅋㅋㅋㅋ

아이리시스님 재미없는 영화보기는 혼자서 하기에는 정말 따분한 일입니다~ 그래서 영화모임이 필요한 법입니다 ㅋㅋㅋ 저는 명작을 볼때마다 항상 졸죠 ㅋㅋㅋㅋ 그런데 다봤다고 치고 이야기를 하죠 ㅋㅋㅋㅋ

영화보기는 전적으로 시간을 버티는 예술이라 그게 가능하면 누구나 할수 있겠죠?????

맥거핀 2012-03-09 15:26   좋아요 0 | URL
많은 감독들이 사실은 자기 영화 외에 다른 영화들은 보지 않는다는 공공연한 비밀을 설마 모르셔서 하는 얘깁니까? ㅋㅋ (그리고 명작은 중간에 자야 제맛..자서 중간에 모르는 부분은 어떡하냐구요? 그건 자신의 상상력가득한 꿈으로 채워넣으면 됩니다. 그래서 명작.)

아이리시스 2012-03-10 00:27   좋아요 0 | URL
진짜 지겨우면 만드는 사람도 있는데 가만 앉아서 보지도 못하면 사람도 아니다, 이러면서 막 본 적도 있는데, 저는 예전에는 영화 만드는 분들이나 영화광들은 저런 걸 봐도 전혀 하나도 졸지 않고 '재밌게' 보는 줄 알았어요.

그게 아니구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맥거핀 2012-03-11 02:28   좋아요 0 | URL
예전에 모 고전영화 보러갔었는데, 영화와의 사투에 도저히 이기지못하고, 잠깐 자다가 깨어 주위를 둘러보니 그나마 몇 명 없던 관객들도 거의 자고 있어서, 상영기사님께 왠지 미안해서 참고 버티며 보려 했으나, 또 잠들어서 결국 대절멸을 맞이했던 투쟁의 역사가 불현듯 생각이 납니다.-_-

네오 2012-03-12 14:36   좋아요 0 | URL
맥거핀님 전멸한 영화가 어떤 영화인데요??????

맥거핀 2012-03-12 20:46   좋아요 0 | URL
잉마르 베리만 영화였는데, 제목이 기억이 안나네요. <산딸기>는 아니었고..영화 내용도 기억도 못하는데, 제목만 기억해봐야.ㅋ

오드득 2012-03-04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재 대중들이 빠른 편집, 시각의 과잉을 더 편애하는 것은 의식적인 면 못지 않게 신체적인 길들임도 분명 한 몫 할 것 같아요. 시각의 과잉이 장차 '무사유'를 뜻하는 뇌의 죽음을 불러올 것이다라고 들뢰즈도 말했다지만 대중의 체험이 이미 롱 쇼트를 기반으로 하는 긴 호흡과 오즈나 후 샤오시엔 혹은 타르코프스키의 명상적 시선을 더 이상 신체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저는 의식적 차원과 신체적 차원이 모두 지금과 같은 대중의 편애를 만든 것이 아닌가 합니다.(비평의 기피 또한 비슷한 맥락이 아닌가 싶구요) 물론 산업이 될 수 밖에 없는 영화인 이상 자본의 영향력 또한 무시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장 뤽 고다르는 비디오에서 자본에서 해방된 영화의 대안을 보기도 했지요. 하지만 말씀하신대로 정말 대단한 영화들은 작가들이 온전히 자본에서 자유로워졌을 때가 아니라 오히려 자본과 싸우면서 그렇게 변증법적 투쟁 가운데 나왔던 것 같습니다. 스튜디오와 싸우면서 만들어낸 30~40년대 헐리우드 영화들에 까이에 뒤 시네마의 키드들이 '작가주의'라는 라벨까지 붙이면서 열광했던 것 처럼 말이죠. 말하자면 사람은 한계를 직면한 가운데 더 진화하는 존재랄까요? 대표적인 것이 고다르의 '경멸' 같은 것이겠죠. 가장 많은 자본을 들였던(웬 뜬금없는 소리를^ ^;) 뭐, 그런 이유로 나데리의 이 영화가 참 보고 싶어지네요.(계속 두서없는 소리를 하고 있네요^ ^;) 그런데 베스트 10이 너무도 흔한 리스트라 조금 실망이에요. 미이케 다케시의 '이치 더 킬러' 같은 게 있었으면 오, 이 사람 뭔가 더 새롭구나 하면서 더 빠졌을 것 같은데^ ^

맥거핀 2012-03-04 12:27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확실히 그런 측면에서 생각해 볼 필요도 있긴 한 것 같습니다. 그게 나쁘다 좋다를 떠나서 지금의 사람들은 과거의 사람들과 영화를 보면서 영화를 습득하는 방식, 꼭 영화가 아니더라도 정보 자체를 조직하고 습득하는 방식이 예전과는 달라졌을테니까요. 근데 또 그런 측면에서 보면 지금 시대에는 지금에 맞는 영화문법이 무엇인가의 문제를 계속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은 듭니다. 그보다 훨씬 빠른 것들에 길들여진 현재의 대중에게 예를 들어 말씀하신 타르코프스키나 차이밍량, 벨라 타르 등이 먹히지 않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겠지요.

영화가 손상되지 않는 범위에서 새로운 방식의 문법, 새로운 실험들이 점점 필요하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그것이 예를 들어 <트랜스포머>의 엄청난 숏트 수가 돨 수도 있고(트랜스포머의 이야기는 의미가 없지만, 그것은 또 한편으로 거대한 영화적 실험이라고 볼수도 있을 것이구요), 다른 어떤 것이 될 수도 있겠죠. 즉 그것이 영화의 시작부터 같이해온 롱테이크,롱숏의 회귀라는 건 어떻게 보면 게을러 보이기도 하구요. 대중에 무조건 맞추라는 얘기가 아니라, 새로운 방식의 대중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더 어떻게 먼저 치고들어갈 것이냐의 문제가 계속 고민되어야 하지 않나 봅니다. (따라서 비평적인 측면에서도 과거에 대한 회고와 찬양보다는, 현재의 실험들에 주목하는 비평들이 더 개인적으로는 흥미가 가는 것이 사실이구요.)

물론 이러한 실험에는 필연적으로 자본의 투입이 필요할 수밖에 없고, 새로운 자본이 투입될 때 영화가 새로운 진보를 획득했던 것은 또 사실이라고 보여지구요. 사람들은 과거의 고전들이 지루한 옛날 영화라고만 생각하지, 때로는 당대의 가장 많은 자본이 투입된 당대의 거대한 블록버스터, 혹은 거대한 실험이었다는 사실을 종종 잊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이 말들이 거대한 자본만이 영화의 새로운 실험들을 촉진한다는 식으로 읽히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혁신이 돈에서 나오는 것만은 아니죠. 다만, 어느 정도의 자본과의 결합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도 쓸데없는 이야기 많이 했네요.^^; 제 생각에도 오손 웰즈가 1위로 뽑히고, 페데리코 펠리니나 존 포드, 무르나우 등이 등장하는 이 리스트는 확실히 식상하죠. (뭐 그나마 특기할 점이라고는 일본 감독이 3명이라는 점 정도?) 근데 '미이케 다카시'는 상당한 파격인데요..? 하하. 감독으로서는 나름 안전한 선택을 하기는 한 것 같습니다만, 안전한 선택은 늘 심심하죠.^^

마녀고양이 2012-03-05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들이 워낙 제가 모르는 분야의 전문적인 이야기로 채워져있어
어찌 댓글을 달아야하나, 잠시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머 그런거 신경쓰는 사람이겠습니까.... ㅋㅋ. 영화가 어떤 이에게는 생애 전부지만, 어떤 이에게는 지나가는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하나의 대상일 뿐이겠죠. 저는 가끔, 영화 감독이든 소설가이든, 나는 이렇게 썼고 나는 내 자유대로 썼으니 알아서 판단하라고 하면서, 그러면서 인정을 못 받는 것에 대해 분노를 터뜨리는 듯한 느낌에 대해 일반적 관객으로써 부담감을 느낍니다.

물론 자본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부분들이 그다지 좋지도 않습니다만....

자본에 의해서,,, 그것은 여기 알라딘 서재를 운영하면서
알라딘을 바라보며 느끼는 모순과 혼란도 비슷합니다. 세상 거의 대부분이 그렇게 채워지는군요. 그래도.... 맥거핀님, 3월의 봄비 내리는 월요일, 즐거운 한주되시기 바랍니다. ^^

맥거핀 2012-03-06 12:22   좋아요 0 | URL
뭐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 하면 되죠.^^ 하기는 어떤 측면에서 보면, 이 영화도 감독의 분노가 가득 담겨져 있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너무 직접적인 메시지만을 반복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구요.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창작자의 입장에서 이해해 볼 수 없는 것도 아니구요. 저만해도, 리뷰 한개 쓰더라도 사람들의 반응이 꽤 신경이 쓰이는데, 한편의 영화, 소설이라면 훨씬 더하겠고, 사람들의 반응이 없을 때는 화가 나는 것도 당연하겠지요.

말씀하신대로 다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영화를 보고, 온도차가 있으니까요. 각자 자신의 역할이 있는 것이고..일반관객은 일반관객의 입장에서 읽히는 것이 있을 것이고, 평론가들은 평론가들 입장에서 읽히는 것이 있겠죠. 평론가들은 그러한 영화를 보는 훈련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이 대중들과 영화보는 눈이 같다면, 그들의 존재이유 자체가 없죠. 가끔 평론가들은 이상한 영화만 좋아한다고 불평을 터뜨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그럼 저는 궁금해요. 대중들의 감식안과 동일한 감식안을 가진 평론가가 존재이유가 있는가..말이죠. 평론가들이나 영화감독들이 대중을 무시해서도, 훈계해서도 안되겠습니다만, 그들이 일종의 선구자적 역할을 맡는 것에 거부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요.^^ (하기는 요즘에는 소위 일반대중들 중에서도 거의 준평론가들이 많아서 그 경계가 점점 엷어지고 있기는 합니다만, 영화도 다른 모든 분야와 같이 전문가와 일반의 구분은 여전히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봅니다.)

어...쓰다보니 댓글이 괜히 길어졌네요. 마녀고양이 님에게 인사나 전하려고 했는데, 괜히 쓸데없는 말이 길었네요. 진짜 봄이 오나봐요. 비가 오는데, 썰렁한 기운보다는 뭔가 봄내음 같은 게 오네요. 이 비가 그치면 꽃샘추위가 한 두번은 올 거고, 그거 끝나면 진짜 짧은 봄이 오겠지요? 마녀고양이님도 좋은 한주 되세요.~^_^

꽃도둑 2012-03-06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에서 잘라낼 수 있는 건 필름이에요, 필름,
더 이상 바라지 않아요...^^(이거 나혼자만 대답했어!)

저도 마고님처럼 위에 있는 분들이 무슨 소리들을 하시는 건지...
영화하고 담쌓고 사는, 일종의 '묻지마 병'의 증세겠죠?.,..
하지만 자극만 없으면 자각증세 또한 없으니...크~ 사는 데 아무 문제가 없긴 한데..
맥거핀 님이 있는 세계가 조금 부러운 건 왜 그렇죠?...

맥거핀 2012-03-07 14:40   좋아요 0 | URL
아..그쵸. +.+ 필름..잘못 찍으면 잘라낼 수 있는 영화처럼, 이 세상의 일들도 잘못 진행되면 잘라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뻘 생각을 해봅니다.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보는가, 혹은 무엇을 볼 수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보고자 하는가, 무엇을 보려고 애쓰는가, 라는 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것은 소위 '수준'같은 것과 전혀 상관이 없으니까요.(물론 그것을 일괄적으로 나눌 수도 없고..) 누구나 자신의 세계 안에서 생각을 해보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