컷, 아미르 나데리, 2011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이 들어있음)

 

 

아미르 나데리의 <컷>은 사실 줄거리가 크게 의미가 없어 보이는 영화다. 예술과 오락이 결합된 영화만들기를 꿈꾸지만, 자신의 영화를 실패하고, 불법 상영회로 꿈을 근근히 이어가던 슈지(니시지마 히데토시)가 자신의 영화 제작비 때문에 야쿠자에게 빌린 돈을 갚지 못해 죽은 형을 대신하여 오로지 맞는 것으로 남은 빚을 갚아나간다는 내용의 이 영화는 사실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이다. 감독 아미르 나데리는 이야기의 핍진성 따위는 별 개의치 않는듯, 오로지 메타포와 직접적 메시지로 서사의 빈 구멍을 메워나간다. <씨네 21>에 보면, 이 영화를 본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가 이 영화의 메타포를 간파하여 말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데, 기요시에 따르면, 슈지가 매를 맞는 행위 자체는 감독의 영화 만들기의 비유이며, 그에게 장소와 돈벌 기회를 제공하는 조폭 중간 보스는 프로듀서, 옆에서 그의 맞는 행위를 돕는, 슈지가 오즈 영화들의 아버지와 같다고 말한 노인은 촬영감독, 그의 매맞기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요코(토키와 다카코)는 영화의 여주인공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사실 일종의 비유적 메시지가 이 영화에는 가득한데, 구로사와 기요시의 비유를 조금 더 연장하여 살펴보면, 슈지가 돈을 손에 가득 쥔 남자들의 펀치를 받는 장면들은, 영화 제작에 끊임없이 가해지는 폭력적인 자본의 계속적인 간섭과 요구들로 볼 수 있다(이것이 한편으로 조폭들의 폭력으로 보여지는 것이 흥미롭다. 사실 어떻게보면 가장 자본주의적인 것이 조폭이며- 조폭들은 왜 명품수트를 입는가 -, 그런 조폭이야 말로 오로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부산물들이기 때문이다). 감독 슈지는 그런 자본들의 요구에 맞서서 계속 자신의 영화, 즉 육체를 지탱시키고, 자신의 세계를 지켜나갈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예술적 자의식을 끊임없이 되새기는 것이다. 즉 이 영화에서라면 이는 슈지가 맞으면서 계속 되뇌이는 자신이 상영회에서 상영한 영화 고전들의 목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흥미로운 것은 또 한편으로 이는 결국 환영(幻影)으로 이 세상을 버티게 해 줄 동력을 제공한다는 영화의 근본적 가치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그러므로 맞는 행위 자체가 슈지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슈지를 힘들게 하는 것은 맞아서 귀가 들리지 않는 것이다. 소리 없이 어떻게 환영을 지속할 것인가). 그러나 슈지에게는 지금 여기에서, 그 펀치를 맞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눈앞에서 이어지는 펀치라는 것은 자본의 끊임없는 투입을 감독에게 계속 처절하게 인식시키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적어도 자본의 펀치를 계속 인식하는 것이고, 최소한 그것에 굴복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슈지는 돈을 거저 받는 것이 아니다. 그 대신에 강력한 펀치 앞에 자신의 육체를 맞서서 기꺼이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슈지는 호의로 돈을 빌려주겠다는 조폭 중간보스의 제의를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 자본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며, 그 자본에 완전히 종속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슈지에게는 멍들고 망가진 육체가 필요했다. 멍들고 망가진 육체라는 것은 자본의 힘에 망가지고 상처난 부분이 어디인지를 명확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만약 그 자본을 아무 댓가 없이 받아들인다면, 자신의 머리 속의 망가진 부분을 어떻게 볼 것인가? 또한 동시에 슈지에게는 '이 장소에서' 맞는 것 또한 중요한데, 그것은 그의 영화를 믿고 아무런 간섭없이 제작비를 대준 형이 죽어간 장소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자신의 영화를 기꺼이 지지해준 관객들에 대한 보답이며, 그 사라져간 최후의 관객에게 어떻게든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곳에서 자신의 육체를 어떻게든 지속시켜 나가는 것, 그것이 슈지가 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거의 전부였다. 

 

 

그러나 일단 그 메타포를 무조건 긍정하기 전에 그 메타포로 만들어지는, 그리고 이 영화에서 전제로 하고 있는 몇 가지의 질문들을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그것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다. 슈지의 말대로 예전의 많은 영화들은 오락과 예술이 결합되었던 것임에 비해, 오늘의 많은 영화들은 오로지 폭력적인 자본이 투입된 오락영화들일 뿐인가. 그리고 이와 연관된 질문으로 오늘의 많은 영화들이 단지 오락영화일 뿐이라면, 이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폭력적인 자본의 책임인가, 아니면 그 영화들을 기꺼이 보아준 수많은 관객들의 책임인가. 혹은, 그 와중에서 진정한 영화라는 것은 죽어가고 있는 것인가. 예를 들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많은 곳에서는 오늘도 몇몇 논쟁들이 고스란히 반복된다. 어떤 사람들은 소위 거대자본이 투자된 영화들, 그 거대한 스펙타클을 영화관에서 관람하는 것이 왜 나쁜가, 이것에 재미를 느끼는 것이 무엇이 잘못인가, 그리고 재미없는 어떤 영화들을 '재미없다'고 말하는 것이 왜 나쁜가를 묻고 있다. 이의 반대편에서 다른 사람들은 그 거대한 스펙타클이 사실 당신 안의 어떤 세계를 조금씩 망가뜨리고 있으며, 그 사람들이 '재미없다'고 말하는 그 영화들이 어떠한 부분에서 가치가 있는지, 그리고 도리어 그 영화들에 어떠한 재미가 있는지를 말하고 있다. 물론 이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예전부터 계속 반복되어 오던 문제들이며, 여전히 마땅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슈지는 이 영화에서 예전에는 오락과 예술이 결합된 영화들이 많았고, 현재는 오락과 예술이 분리되어 있다는 뉘앙스로 이야기를 하지만, 과거의 영화들도 오락과 예술은 거의 하나가 된 적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 일례로, 슈지가, 아니 감독 아미르 나데리가 밝히는 최고의 영화들의 목록을 살펴보아도, 당대에는 '재미없고 지루하다'는 이유로 관객의 외면을 받았지만, 후일에 재평가된 영화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 재평가에 크게 기여를 하여 새로운 영화의 흐름을 이끌어낸 사람들이 바로 지금도 어딘가에서 욕을 먹고 있는 영화비평가들이다.) 예전의 많은 시기에도 오락영화는 오락영화일 뿐이었고, 예술영화는 예술영화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대중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까. 예술적으로 가치가 인정되는 영화들이 당대에 많은 관객들의 외면을 받는다는 것은 대중들의 감식안이 떨어진다는 반증일까.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바꿔보면, 단지 오락물로서만의 가치를 지닌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관객들이 그런 영화들을 좋아하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관객들이 그런 영화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영화들이 많이 양산이 되는 것일까. 자본의 입장에서도 소위 '예술적' 영화들이 관객의 사랑을 더 많이 받는다면, 그런 영화를 만들지 않을 도리가 없지 않은가. 물론 이 부분에서 관객들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모든 것이 다 그렇듯이, 영화에서도 자본은 점점 거대해지고 있으며, 영화의 거의 전부에 자본의 논리가 적용되고 있다. 자본의 큰 간섭 없이 만들어진 작은 영화들은 관객에게 전달될 수 있는 루트 자체가 대자본으로 공습하는 영화들과 비교가 되지 않으며, 많은 대중영화들의 시작에 감독이나 주연배우들의 이름보다 투자사의 이름이 먼저 오르는 것은 일종의 관례가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부분에서 관객에게 완전한 '무혐의'를 부여하는 것 또한 어렵다고 본다. 다시 이 영화 <컷>으로 돌아와 이야기를 한다면 슈지에게 펀치를 날린 책임을 물을 수는 없으나, 그 펀치 세례를 그대로 방조한 책임을 조금은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영화라는 것이 죽어가고 있다면, 그 살인의 방조, 혹은 자살의 방조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도 있지 않을까. ('죽어가고 있다면'이라는 가정인 것은, 영화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먼저 '그 영화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부터 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은 이 리뷰의 범위를 넘을 뿐 아니라, 내 깜냥의 범위도 넘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 펀치 자체를 아예 멈추게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까도 말했지만, 영화에는 자본의 펀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펀치라는 행위의 형태도 그렇지만, 그 펀치 자체로도 그렇다. 즉 영화에는 자본이 필요하다. 이제 이 영화의 끝으로 가보자. 영화의 마지막 슈지는 결국 모든 빚을 갚지만, 다시 그 조폭에게 돈을 빌린다. 그리고 그것으로 새 영화를 찍는다. 자 이것은 희망적인 결말인가? 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는 자에게 희망이라는 것을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는 다른 어떤 예술 못지 않게, 아니 어쩌면 다른 모든 예술들보다 훨씬 자본이 필요하며, 자본과 밀착하게 결합된 예술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18세기 중엽 산업혁명으로부터 탄력을 받아, 19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무르익기 시작하였고, 영화 역시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이를 때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즉 영화의 시작은 자본주의의 시작과 거의 그 궤를 같이 하였다. 이러한 시기의 겹침은 물론 우연이 아니다. 필름은 예나 지금이나 자본을 상당히 잡아먹는 물건이다. 디지털이면 달라질까. 그대신 이제는 3D라는 자본을 먹는 괴물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또한 동시에 영화는 초창기부터 그 자본의 펀치들을 같이 맞아온 대중들과 밀접하게 결합하여 있었다. 영화가 '그들만의 예술'이었던 적은 없었다. 영화는 한번 만들어지면, 반복하여 상영이 가능했고, 대량으로 전파가 가능했다. 즉 클래식 음악이나 미술이나, 연극(물론 '글'은 말할 것도 없고)이 특정 조건을 갖춘 사람들만이 즐길 수 있는 예술이었다면, 영화가 그런 예술의 지위를 누린 적은 없었다. 그러므로 마지막 슈지에게 가해지는 100대의 펀치와 크로스되어 제시되는 아미르 나데리가 관객들에게 가하는 100대의 펀치(100개의 영화 리스트)를 맞으면서, 나는 조금 불편해졌다. 이는 일종의 '인정 투쟁'처럼도 보였기 때문이다. 왜 다른 예술들과 다르게 영화에서 만은 이런 '리스트'가 횡행하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대중과 밀접하게 결합하여 자라난 영화가 어떻게든 그 대중들을 밀어내려는 몸부림같은 것은 아닐까. 나는 뭔가 이렇게 다른 영화를 보아왔다는 몸부림. 자신만의 새로운 리스트를 만들어 다른 사람들과 구분하려는, 대중들과 자신들의 사이에 방벽을 치려는 무의식적 자의식. 영화가 영화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이 되려는 몸부림은 혹시 아닐까. (차라리 영화의 역사나 혹은 감독들의 계보를 나열했다면 다르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왜 BEST 100인가. 왜 BEST 100의 형식이어야 했나라는 물음.) 그 마지막의 장면들에서 나눔과 연대, 동지적 의식보다는, (요즘의 많은 리스트들의 제시에서 느껴지듯), 경쟁과 구분의 뉘앙스가 더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미르 나데리의 영화 <컷>은 끝까지 오만하게까지 느껴지는 결기(혹은 허세)로 밀어붙이는 영화다. 이야기의 방법적인 측면에서도 그렇고(버스터 키튼의 무성영화가 제시된 후, 갑자기 순간 무성(無聲)이 되어 무대밖과 안을 넘나드는 장면을 그대로 재현해보인다거나, 혹은 구로사와 아키라나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를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흑백으로 전환되는 것 등), 이야기의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그렇다. 씨네필이 아니라면 씨네필이 아닌 사람들을 거의 아무 생각 없는 자들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영화가 불편할 것이고, 씨네필이라면 씨네필로서의 자의식을 과잉하여 드러내보이는 이 영화가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아미르 나데리는 그런 것에 별로 개의치 않는 듯 하다. 그저 영화는 마지막에 외칠 뿐이다. 컷! 자 이제 마지막 질문을 할 때가 되었다. 컷, 잘라낸다는 것. 잘라내고 싶은 것은 자본인가, 대중인가. 그 둘 중 어느 것도 잘라낼 수 없다면, 영화에서 잘라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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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2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대 한 대 얻어맞는 주인공이 그런 '리스트'를 읊었다면 좀 불편해졌을 것도 같아요. 아무래도 영화광 특유의 '구분과 우월감'의 문화가 실제 영화광의 세계에 있으니까요. -이건 정말 많은 영화들이 접근성이 무지하게 떨어져서 그런 것 같아요. 저도 사실은 리스트의 영화를 다 보고 싶었는데 많이 보지 못했다는...
그나저나 주인공이 육체성과 고통으로 정직하게 자신의 자리를 매기고 싶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허리케인 죠"가 생각나요.^^ (-아아 저도 좀 오타쿠였어요.ㅎ)

맥거핀 2012-03-02 23:35   좋아요 0 | URL
마지막에는 주인공이 읊는 수준이 아니라 별개의 자막과 컷으로 아예 리스트가 제시되니까요. 영화관에서 다른 영화들의 목록을 제시하는 영화를 보는 것은 흥미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사실 왜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리스트를 좋아하나 의문을 가지고 있어요. (제가 영화에만 관심이 있어서 그런가요? 예를 들어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소설 BEST 100 리스트를 만들어 서로 비교해보고 그러나요..?) 위에 좀 끄적거리기는 했지만, 그게 해답은 아닌 것 같고,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는 그저 리스트를 볼 때에 위압감과 부러움, 그리고 폄하(여우의 신포도)를 왔다갔다하는 것 같아요.

네오 2012-03-03 00:05   좋아요 0 | URL
리스트선택은 저에게는 100으로 환산해서 허세 90, 습관 8, 관심2 로 구성되어져 있어요~ 사실 그렇죠~ 많이본것 뽑내기같은거 하고 싶지 않나요???? 저는 많이 그런데요 ㅎㅎ

문학 베스트 100을 선택하라는 시험지가 있으면 대단히 구미가 댕기네요~ 영화보다는 이쪽이 더 상대방에 대한 교양을 알수 있을거 같아요~ 왜 타자에 대한 교양을 제가 따지냐 고요 라고 불평하시면 할말이 없습니다만 ㅠㅠ

그런데 밑의 페이퍼도 있지만 정말 영화를 새로운 방식으로 보시네요 보리스 바르넷은 저는 누구지 모르고 있다가 작년 서울아트시네마회고전때 알았습니다 그녀는 그 유명한 세느좌안이야기라는 소리를 듣고 아직 "나는 멀었다'라며 극장문을 나오던 아픈 추억이 있네요~

맥거핀 2012-03-03 13:29   좋아요 0 | URL
원래 영화 좋아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다 어느 정도는 허세가 있지 않나요..? 안본거도 아는 척하면서 이야기하는 경우들도 있고..정도가 심하지 않다면야 어느 정도는 '익스큐즈'해야 그래도 얘기가 됩니다.^^

문학 BEST 100 같은 거 하자고 하면 저는 절대 안해요. 말씀하신대로 제 교양이 드러나기 때문에..하하 (근데 영화 좋아하는 사람들만 이렇게 리스트에 집착하는 거 맞죠?)

아..그리고 세느좌안이야기라는 소리를 듣고 "나는 멀었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네오 2012-03-03 23:58   좋아요 0 | URL
헉!! 뜨끔했네요!! 제 얘기하시는거 같아서 ㅎㅎ 맥거핀님도 리스트 꼽고싶은 욕망이 꿈틀거리잖아요 ㅎㅎ 아마도 정성일 영향도있을걸요~

바네사가 알랭레네 또는 크리스 마르께가 속하는 센느 좌파란것을 몰랐다말이죠~ 누벨바그사람들이랑 반대되는 대착점에 있는 사람들이지요!! 뭐 맥거핀님이 영화적 교양이 월등하시니ㅋ 이런 설명 필요하겠습니까만은 ㅎㅎ

아~ 키노 재창간 소식이 들리던군요 같이 손잡고 들어갈볼까요 ㅎㅎ

맥거핀 2012-03-04 12:07   좋아요 0 | URL
아..아네스 바르다 얘기하시는가 보군요. 작년에 저도 회고전 가고 싶었는데, 이러다저러다 보니 가지를 못했네요(뭐 늘 그렇지만.;).

확실히 우리나라에서는 이 리스트 놀이의 유행에 정성일 씨의 영향이 좀 있는듯 합니다만, 외국애들도 열심히 하는 걸 보면 꼭 우리만 그런거 같지는 않고..(뭐 정성일 씨도 외국에서 하는 것을 보고 영향을 받았겠지만..)

이번에 정성일 씨가 트위터에서 말한 키노 재창간설로 마음이 싱숭생숭한 영화팬들이 좀 있죠.ㅋ 저도 왜 다시 정성일인가,라는 의문은 조금 있지만, 그간 키노 폐간 후 여러 행보들을 보고 생각해봐야 하는 거겠죠. 그간 영화비평을 이야기하는 다른 매체들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키노만큼의 위치에 오르지도 못했고, 그만한 담론들을 이끌어내지도 못한 것은 사실이니, 정성일의 귀환이 어쩔 수 없어 보이는 측면도 있어요. 그러니 왜 키노인가를 묻기 이전에, 그간 우린 뭐했나..를 먼저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는 느낌이구요. 다만, 키노의 전성기 때와는 다르게 지금은 소위 SNS의 시대, 새로운 유형의 잡지들이 나오는 시기이니 어떤 형태로의 키노인가, 얼마나 새로운 키노가 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뭐 어떻게보면 정성일씨의 주도로 키노의 재창간이 논의된다면, 그것 자체가 약간은 슬픈 일이기도 하겠구요..)

이진 2012-03-03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으, 이것이 바로 맥거핀님의 위엄이었던 것인가요.
샤이닝님께서 제게 맥거핀님의 글을 읽어보라 강추하셨던 이유가 있었군요.
일단 일본인이라는 데서 마음이 동하였고 자극적인 내용에 마음이 끌리는군요.
스크린샷에 완전 마음이 반하였습니다 ^_^꺄붕~

아, 그건그렇고 글 너무 멋진걸요~

맥거핀 2012-03-03 13:33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소이진님. 좋은 말씀 감사하구요. 그간 스쳐가면서 글 봤었는데, 이렇게 인사나누네요. 이 영화는 이란 감독 영화지만, 일본에서 일본배우들과 촬영했고, 일본색(?)이라는 게 약간은 있어요. 감독이 일본영화들에 대한 상당한 경외를 보여주기도 하구요.

저 스샷에 있는 주인공 나름 멋있어요. 복근도 아주 좋구요. 복근이 저 정도는 있어야 저렇게 맞아도 저렇게 계속 버티겠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물론 그렇다고 해도 말이 안되긴 하지만요.;) 그간 다른 영화들에 조연으로 꽤 나왔다고 하는데, 처음으로 관심이 생겼어요.

아이리시스 2012-03-03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 이제 LIST 100을 읊어주세요^^ 신기한 영화다..(혼잣말)

포스트가 멋있어요. 예전에 기타노 다케시 영화삘이네요!!! 내용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예전에 저 일본영화 중에 폭력적인 것들 좀 좋아했어요. 하하.

Shining 2012-03-03 19:59   좋아요 0 | URL
후훗, 저도 아이리시스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리스트 100은 과연 무엇인가요?+_+

저도 기타노 타케시 좋아해요, 미이케 다카시 영화 보면서 뒷목 잡았던 적은 있지만요_-

맥거핀 2012-03-03 23:43   좋아요 0 | URL
댓글들을 보고, 이거 분명히 리스트를 다 정리한 분이 있을 거 같아서 찾아보니 진짜 있네요.+.+ (무려 3번을 보시고 정리했다합니다..이 영화 3번보기 쉽지 않은데..)

카페에 있는 글이라, 링크시켜도 못 보실 것 같고, 그 중에 베스트 10만 말씀드릴께요. (영화 상에는 '무순'이라고 제시되지만, 뒤에 나오는 영화들을 베스트 10으로 봐야할 듯 싶어요. 따로 사진이 나오기도 하고..)

10 <스페이스 오딧세이> 스탠리 큐브릭
9 <만춘> 오즈 야스지로
8 <수색자> 존 포드
7 <선라이즈> F.W.무르나우
6 <거미의 성> 구로사와 아키라
5 <달세계여행> 조르주 멜리어스
4 <라탈랑트> 장 비고
3 <우게츠 이야기> 미조구치 겐지
2 <8과 1/2> 페데리코 펠리니
1 <시민 케인> 오손 웰즈
(각 영화에 대한 설명은, 제 서재에 들러주시는 네오님께 패스~)

저는 몇 가지 영화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리스트를 보니 새롭네요. 한국영화로는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이 100위 안에 있구요. 말씀하신 기타노 다케시 감독 영화도 있네요. <하나비>

근데 미이케 다카시 영화는 진짜 보기 힘들어요.-_- 그래도 끝까지 열심히 봤어요.-_-

네오 2012-03-08 06:01   좋아요 0 | URL
앗!! 뭐예요 ㅎㅎ 리스트10 다본영화라서 이 영화들에대해서 쓰고 싶어지잖아요~ 지금 obs에서 스탠리 큐브릭 음악서재를 봤는데 스탠리 큐브릭에 대한 모든영화에 대한 평을 쓰고 싶더라고요~ 오홋 정말 위대한 예술가라고 영화카피라이터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더군요 ㅎㅎ 갑자기 불끈 베스트10 영화쓰고 싶어지는 밤이군요^^

맥거핀 2012-03-04 12:11   좋아요 0 | URL
제 예상대로 네오님은 당연히 다 보셨을 줄 알았어요. 아..저는 어떠냐구요. 묻지 마세요. 다 보진 못했다..정도로만 (여전히 허세를 담아) 말해두죠..; (그러니 위에도 썼지만 설명이 필요하신 분은 네오님께..)

아..그리고 제목을 쓰다보니 위에 하나 수정사항이 있네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입니다. '2001'이라고 하니 왠지 SF느낌이 안나네요.

아이리시스 2012-03-07 19:38   좋아요 0 | URL
오, 네오님, 맥거핀님. 저걸 다 보는 끈기는 어디서 오는 겁니까. 어떻게하면 생기는 겁니까. 솔직히 저런 리스트 치고 재미는 별로 없..( '')

저는 링크해주세요. 100개 중에 몇 개 봤는지 자가진단 하게요, 맥거핀님. 부탁해요. 저는 혼자 못 찾겠어요. 어딨어요, 대체!

맥거핀 2012-03-08 00:10   좋아요 0 | URL
네이버 스폰지하우스 카페에 '으갸갹'님의 글이에요. 저는 가입되어 있는 상태라 바로 볼 수 있는데, 외부에서 바로 열람이 가능한지 모르겠네요.^^
http://cafe.naver.com/spongehouse/26714

저도 솔직히 본 영화 찾는게 더 빨라요. 안본거, 못본게 훨씬 더 많네요.

아이리시스 2012-03-08 01:4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맥거핀님. 저는 네이버에 더 많이 접속하니 카페가입하면 돼서 괜찮아요. 등급제한만 없다면 했었는데 없거나 이미 제가 가입해뒀거나 했나 봐요. 오호라, 그런데 영어목록으로 -_-;;

저 한 번 더 절망했어요ㅋㅋㅋ

맥거핀님이 왜 10개만 가져왔는지도 알겠어요. 제목 처음 들어보는 것도 엄청나요. 그런데 구할 수 있다면 차례로 보고싶은 리스트이긴 하네요ㅋㅋㅋ

맥거핀 2012-03-08 01:48   좋아요 0 | URL
네..나머지 영화들의 한국어 제목을 찾아내기가 너무 귀찮아서..^^;; 근데 갑자기 궁금해지는데, 나데리 감독은 이 100편 다 보기는 했을까요..? (했겠죠..그랬겠지..그랬을거야..)

네오 2012-03-08 06:09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맥거핀님 지금 예술가의혼이 담긴 열정을 무시합니까? "나데리 감독은 이 100편 다 보기는 했을까요..?" 질문은 불경스럽네요 ㅋㅋㅋㅋㅋㅋ

아이리시스님 재미없는 영화보기는 혼자서 하기에는 정말 따분한 일입니다~ 그래서 영화모임이 필요한 법입니다 ㅋㅋㅋ 저는 명작을 볼때마다 항상 졸죠 ㅋㅋㅋㅋ 그런데 다봤다고 치고 이야기를 하죠 ㅋㅋㅋㅋ

영화보기는 전적으로 시간을 버티는 예술이라 그게 가능하면 누구나 할수 있겠죠?????

맥거핀 2012-03-09 15:26   좋아요 0 | URL
많은 감독들이 사실은 자기 영화 외에 다른 영화들은 보지 않는다는 공공연한 비밀을 설마 모르셔서 하는 얘깁니까? ㅋㅋ (그리고 명작은 중간에 자야 제맛..자서 중간에 모르는 부분은 어떡하냐구요? 그건 자신의 상상력가득한 꿈으로 채워넣으면 됩니다. 그래서 명작.)

아이리시스 2012-03-10 00:27   좋아요 0 | URL
진짜 지겨우면 만드는 사람도 있는데 가만 앉아서 보지도 못하면 사람도 아니다, 이러면서 막 본 적도 있는데, 저는 예전에는 영화 만드는 분들이나 영화광들은 저런 걸 봐도 전혀 하나도 졸지 않고 '재밌게' 보는 줄 알았어요.

그게 아니구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맥거핀 2012-03-11 02:28   좋아요 0 | URL
예전에 모 고전영화 보러갔었는데, 영화와의 사투에 도저히 이기지못하고, 잠깐 자다가 깨어 주위를 둘러보니 그나마 몇 명 없던 관객들도 거의 자고 있어서, 상영기사님께 왠지 미안해서 참고 버티며 보려 했으나, 또 잠들어서 결국 대절멸을 맞이했던 투쟁의 역사가 불현듯 생각이 납니다.-_-

네오 2012-03-12 14:36   좋아요 0 | URL
맥거핀님 전멸한 영화가 어떤 영화인데요??????

맥거핀 2012-03-12 20:46   좋아요 0 | URL
잉마르 베리만 영화였는데, 제목이 기억이 안나네요. <산딸기>는 아니었고..영화 내용도 기억도 못하는데, 제목만 기억해봐야.ㅋ

ICE-9 2012-03-04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재 대중들이 빠른 편집, 시각의 과잉을 더 편애하는 것은 의식적인 면 못지 않게 신체적인 길들임도 분명 한 몫 할 것 같아요. 시각의 과잉이 장차 '무사유'를 뜻하는 뇌의 죽음을 불러올 것이다라고 들뢰즈도 말했다지만 대중의 체험이 이미 롱 쇼트를 기반으로 하는 긴 호흡과 오즈나 후 샤오시엔 혹은 타르코프스키의 명상적 시선을 더 이상 신체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저는 의식적 차원과 신체적 차원이 모두 지금과 같은 대중의 편애를 만든 것이 아닌가 합니다.(비평의 기피 또한 비슷한 맥락이 아닌가 싶구요) 물론 산업이 될 수 밖에 없는 영화인 이상 자본의 영향력 또한 무시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장 뤽 고다르는 비디오에서 자본에서 해방된 영화의 대안을 보기도 했지요. 하지만 말씀하신대로 정말 대단한 영화들은 작가들이 온전히 자본에서 자유로워졌을 때가 아니라 오히려 자본과 싸우면서 그렇게 변증법적 투쟁 가운데 나왔던 것 같습니다. 스튜디오와 싸우면서 만들어낸 30~40년대 헐리우드 영화들에 까이에 뒤 시네마의 키드들이 '작가주의'라는 라벨까지 붙이면서 열광했던 것 처럼 말이죠. 말하자면 사람은 한계를 직면한 가운데 더 진화하는 존재랄까요? 대표적인 것이 고다르의 '경멸' 같은 것이겠죠. 가장 많은 자본을 들였던(웬 뜬금없는 소리를^ ^;) 뭐, 그런 이유로 나데리의 이 영화가 참 보고 싶어지네요.(계속 두서없는 소리를 하고 있네요^ ^;) 그런데 베스트 10이 너무도 흔한 리스트라 조금 실망이에요. 미이케 다케시의 '이치 더 킬러' 같은 게 있었으면 오, 이 사람 뭔가 더 새롭구나 하면서 더 빠졌을 것 같은데^ ^

맥거핀 2012-03-04 12:27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확실히 그런 측면에서 생각해 볼 필요도 있긴 한 것 같습니다. 그게 나쁘다 좋다를 떠나서 지금의 사람들은 과거의 사람들과 영화를 보면서 영화를 습득하는 방식, 꼭 영화가 아니더라도 정보 자체를 조직하고 습득하는 방식이 예전과는 달라졌을테니까요. 근데 또 그런 측면에서 보면 지금 시대에는 지금에 맞는 영화문법이 무엇인가의 문제를 계속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은 듭니다. 그보다 훨씬 빠른 것들에 길들여진 현재의 대중에게 예를 들어 말씀하신 타르코프스키나 차이밍량, 벨라 타르 등이 먹히지 않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겠지요.

영화가 손상되지 않는 범위에서 새로운 방식의 문법, 새로운 실험들이 점점 필요하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그것이 예를 들어 <트랜스포머>의 엄청난 숏트 수가 돨 수도 있고(트랜스포머의 이야기는 의미가 없지만, 그것은 또 한편으로 거대한 영화적 실험이라고 볼수도 있을 것이구요), 다른 어떤 것이 될 수도 있겠죠. 즉 그것이 영화의 시작부터 같이해온 롱테이크,롱숏의 회귀라는 건 어떻게 보면 게을러 보이기도 하구요. 대중에 무조건 맞추라는 얘기가 아니라, 새로운 방식의 대중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더 어떻게 먼저 치고들어갈 것이냐의 문제가 계속 고민되어야 하지 않나 봅니다. (따라서 비평적인 측면에서도 과거에 대한 회고와 찬양보다는, 현재의 실험들에 주목하는 비평들이 더 개인적으로는 흥미가 가는 것이 사실이구요.)

물론 이러한 실험에는 필연적으로 자본의 투입이 필요할 수밖에 없고, 새로운 자본이 투입될 때 영화가 새로운 진보를 획득했던 것은 또 사실이라고 보여지구요. 사람들은 과거의 고전들이 지루한 옛날 영화라고만 생각하지, 때로는 당대의 가장 많은 자본이 투입된 당대의 거대한 블록버스터, 혹은 거대한 실험이었다는 사실을 종종 잊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이 말들이 거대한 자본만이 영화의 새로운 실험들을 촉진한다는 식으로 읽히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혁신이 돈에서 나오는 것만은 아니죠. 다만, 어느 정도의 자본과의 결합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도 쓸데없는 이야기 많이 했네요.^^; 제 생각에도 오손 웰즈가 1위로 뽑히고, 페데리코 펠리니나 존 포드, 무르나우 등이 등장하는 이 리스트는 확실히 식상하죠. (뭐 그나마 특기할 점이라고는 일본 감독이 3명이라는 점 정도?) 근데 '미이케 다카시'는 상당한 파격인데요..? 하하. 감독으로서는 나름 안전한 선택을 하기는 한 것 같습니다만, 안전한 선택은 늘 심심하죠.^^

마녀고양이 2012-03-05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들이 워낙 제가 모르는 분야의 전문적인 이야기로 채워져있어
어찌 댓글을 달아야하나, 잠시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머 그런거 신경쓰는 사람이겠습니까.... ㅋㅋ. 영화가 어떤 이에게는 생애 전부지만, 어떤 이에게는 지나가는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하나의 대상일 뿐이겠죠. 저는 가끔, 영화 감독이든 소설가이든, 나는 이렇게 썼고 나는 내 자유대로 썼으니 알아서 판단하라고 하면서, 그러면서 인정을 못 받는 것에 대해 분노를 터뜨리는 듯한 느낌에 대해 일반적 관객으로써 부담감을 느낍니다.

물론 자본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부분들이 그다지 좋지도 않습니다만....

자본에 의해서,,, 그것은 여기 알라딘 서재를 운영하면서
알라딘을 바라보며 느끼는 모순과 혼란도 비슷합니다. 세상 거의 대부분이 그렇게 채워지는군요. 그래도.... 맥거핀님, 3월의 봄비 내리는 월요일, 즐거운 한주되시기 바랍니다. ^^

맥거핀 2012-03-06 12:22   좋아요 0 | URL
뭐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 하면 되죠.^^ 하기는 어떤 측면에서 보면, 이 영화도 감독의 분노가 가득 담겨져 있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너무 직접적인 메시지만을 반복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구요.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창작자의 입장에서 이해해 볼 수 없는 것도 아니구요. 저만해도, 리뷰 한개 쓰더라도 사람들의 반응이 꽤 신경이 쓰이는데, 한편의 영화, 소설이라면 훨씬 더하겠고, 사람들의 반응이 없을 때는 화가 나는 것도 당연하겠지요.

말씀하신대로 다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영화를 보고, 온도차가 있으니까요. 각자 자신의 역할이 있는 것이고..일반관객은 일반관객의 입장에서 읽히는 것이 있을 것이고, 평론가들은 평론가들 입장에서 읽히는 것이 있겠죠. 평론가들은 그러한 영화를 보는 훈련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이 대중들과 영화보는 눈이 같다면, 그들의 존재이유 자체가 없죠. 가끔 평론가들은 이상한 영화만 좋아한다고 불평을 터뜨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그럼 저는 궁금해요. 대중들의 감식안과 동일한 감식안을 가진 평론가가 존재이유가 있는가..말이죠. 평론가들이나 영화감독들이 대중을 무시해서도, 훈계해서도 안되겠습니다만, 그들이 일종의 선구자적 역할을 맡는 것에 거부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요.^^ (하기는 요즘에는 소위 일반대중들 중에서도 거의 준평론가들이 많아서 그 경계가 점점 엷어지고 있기는 합니다만, 영화도 다른 모든 분야와 같이 전문가와 일반의 구분은 여전히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봅니다.)

어...쓰다보니 댓글이 괜히 길어졌네요. 마녀고양이 님에게 인사나 전하려고 했는데, 괜히 쓸데없는 말이 길었네요. 진짜 봄이 오나봐요. 비가 오는데, 썰렁한 기운보다는 뭔가 봄내음 같은 게 오네요. 이 비가 그치면 꽃샘추위가 한 두번은 올 거고, 그거 끝나면 진짜 짧은 봄이 오겠지요? 마녀고양이님도 좋은 한주 되세요.~^_^

꽃도둑 2012-03-06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에서 잘라낼 수 있는 건 필름이에요, 필름,
더 이상 바라지 않아요...^^(이거 나혼자만 대답했어!)

저도 마고님처럼 위에 있는 분들이 무슨 소리들을 하시는 건지...
영화하고 담쌓고 사는, 일종의 '묻지마 병'의 증세겠죠?.,..
하지만 자극만 없으면 자각증세 또한 없으니...크~ 사는 데 아무 문제가 없긴 한데..
맥거핀 님이 있는 세계가 조금 부러운 건 왜 그렇죠?...

맥거핀 2012-03-07 14:40   좋아요 0 | URL
아..그쵸. +.+ 필름..잘못 찍으면 잘라낼 수 있는 영화처럼, 이 세상의 일들도 잘못 진행되면 잘라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뻘 생각을 해봅니다.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보는가, 혹은 무엇을 볼 수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보고자 하는가, 무엇을 보려고 애쓰는가, 라는 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것은 소위 '수준'같은 것과 전혀 상관이 없으니까요.(물론 그것을 일괄적으로 나눌 수도 없고..) 누구나 자신의 세계 안에서 생각을 해보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