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최근작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이상하게 마음을 건드리던 장면은 이제 아버지가 된 료타(후쿠야마 마사하루)가 실수를 저지른 간호사의 집에 찾아가 그녀의 새아들을 만난 후 자신의 새어머니에게 전화를 거는 장면이었다. 료타가 예전 자신의 모습들에 사과하려 하자 새어머니는 말한다. 그저 시시한 얘기나 하자고. 누가 가발을 썼다던가, 누가 성형을 했다거나 하는 그런 이야기. 그러나 사실 그런 해도 되는, 혹은 안해도 되는 그런 이야기가 아마도 더 어려운 법이다. 왜냐하면, 그 이면에 작동하고 있는 것은 '긴 시간'이기 때문이다. 즉 그런 이야기들은 두 사람이 오랜 시간을 공유했을 때에만 자연스럽게 할 수 있으며, 공유한 시간이 없는 사람들은 결국 꼭 필요한, 그렇기 때문에 무거운 이야기밖에 하지 못한다. 그래서 료타도 결국은 시시한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내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아직도 시간이 많이 모자라다.

 

 

돌이켜보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거의 모든 영화에서 늘 시간의 존재를 깨닫게 만들었고, 긴 시간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장편 극영화 데뷔작 <환상의 빛>에서 잡아내고 있는 것은 언뜻 남편의 죽음이라는 과거의 한 순간에 갇혀 있는 유미코(에스미 마키코)의 모습이지만, 그녀는 그럼에도 계속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노력하며, 남아 있는 느린 시간을 조금씩 견뎌내고 있다. <원더풀 라이프>에서는 흥미로운 질문을 한다. 가장 행복했던 기억만 남겨놓을 수 있다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러나 그 질문 이면에 숨겨져 있는 것은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결국 우리는 지나온 모든 것을 돌이켜봐야 한다는 것이다. 좋았던 것과 나빴던 것, 그 모든 시간을 돌아보아야 우리는 결국 무엇인가를 선택할(혹은 선택하지 않을) 수 있다. <아무도 모른다>에서는 아이들이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지만, 대신 우리 우리 관객들은 안다. 그리고 고레에다 감독은 그들이 버텨내는 시간들을 우리도 같이 지켜보며 버텨내도록 만든다. <걸어도 걸어도>는 일견 짧은 시간 동안에 일어나는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이전의 오랜 시간이다. 좋은 기억들과 안좋은 기억들, 그 모든 것의 총체로서 오랜 시간이 그들의 하루에 스며들어 있다. 그러므로 이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어떤 질문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를 여러 편 보아온 사람이라면 사실 이 질문의 답이 정해져 있음을 알며, 료타가 결국 어떤 선택을 하게 될 지도 알고 있다. 어떠한 것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시시한 질문을 하는 관계 같은 것들은 어떤 방법을 써도 결코 짧은 시간에 만들어질 수 없다.
 
바꿔 말하면, 고레에다 감독은 시간을 보여주는 데에 능숙하다.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들은 이상하게도 한정된 시간 속에서 긴 시간을 느끼게 한다. 사실 모든 영화감독들은 시간을 다루는 기술자이며, 시간을 다루는 기술자가 되어야 하지만, 그런 면에서 고레에다 감독은 특출나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도 감독이 친절하게 자막을 넣기는 하지만, 그런 자막 없이도 우리는 그들이 긴 시간을 지나오고 있음을 안다. 혹은 보여주지 않은 그 사이에 어떤 시간들이 압축되어 있는지를 짐작하거나 혹은 알게 된다. 무릇 좋은 영화 감독이란 보여주지 않은 것 사이에 최대한 많은 것을 관객들에게 상상하도록 만드는 감독이다. 그것은 짧은 숏과 숏의 연결에서도 그렇고, 혹은 씬과 씬 사이의 연결에서도 그렇다. 영화라는 것은 앉아서 보는 이들을 끊임없이 참여하도록 요청하는 매체이고, 앉아서 보는 이들이 참여하지 않으면 연결되지 않는 예술이다(어쩌면 영화라는 것의 어떤 근본적인 속성도 여기에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 즉 조금 더 세밀하게 들어가면 우리는 사실 매 순간 정지화면을 보고 있으며, 그 정지화면을 움직이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뇌이다. 즉 우리의 뇌는 매 순간 그들의 움직임에 참여하고 있다). 반면 스스로 죽어 있기를 원하는 관객에게 영화는 때로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음으로서 화답하며, 그들을 기꺼이 죽여준다. 영화와 관객의 이상한 거래.

 

 

다시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로 돌아온다면, 그의 2011년도 작품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영화의 원제는 '기적'이다. 도대체 왜 앞에 재미도 없는 이런 사족을 붙이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이 사족은 내용상으로 볼 때 어떤 의미에서는 영화의 어떤 부분을 훼손시키는 것이기도 하다)에는 조금 이상한 연결이 있다. 아이들이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애타는 마음으로 지나가는 열차를 바라볼 때 장면은 끊어지고, 별 의미가 없어보이는 숏들이 나열된다. 지나온 길에 보았던 가족의 모습, 할아버지의 가루칸 떡, 할머니의 훌라춤 손 동작, 선생님의 자전거 벨, 남아있는 과자부스러기, 자판기 밑에 있던 동전, 마음 좋은 노부부가 사주었던 저녁밥, 오는 길에 맡았던 코스모스의 향기, 그리고 형과 동생의 좋았던 한 때들....결국 이 기적의 순간에 작동하는 것, 혹은 아이들에게 돌아보게 만드는 것은 시간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그들이 어떤 소원을 빌기 위해서는 지나온 많은 시간들 중의 수많은 소원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해야만 한다는 것이고, 조금 다르게 말하자면, 결국 기적이란 긴 시간 속에서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이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 서로 만나 이렇게 열차의 교차를 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의 작동이며, 기적의 혼합이다(예를 들어 자판기 아래에 떨어진 동전이 없었더라면, 혹은 아이들이 마음씨 좋은 노부부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들은 열차의 교차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혹은 아이들이 빈 소원들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못한다고 해도, 그 순간 그들은 이미 작은 기적들을 만났다. 떨어져 있던 형제들은 만났고, 강아지는 살아 돌아오지 않았지만, 소년은 무엇인가를 떠나보낸다는 것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알게 되었으며, 여배우가 되려는 소녀는 마음을 굳게 먹을 수 있었으며, 노부부는 한때나마 마음의 위안을 조금이라도 찾을 수 있었다. 즉 아이들은 그 이후로 예전과 다른 무엇이 되었다. 그렇게 아이들은 매순간 예전과 다른 무엇이 점점 되어간다. 그것이 바로 아이들의 성장이며, 이 시간이 만들어낸 성장이야말로 어떠한 의미에서는 또다른 기적이다. 그리고 그것이 매순간 일어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기적이자, 기적이 아니다.
 
아마도 영화 속에서 그것의 반대편에 있는 것들이 가루칸 떡이나 화산재와 같은 것일 것이다. 씹어도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는 가루칸 떡을 형 코이치는 오래 씹으며, 중독성이 있는 맛이라 평가한다. 결국 그 단맛을 만들어내는 것, 혹은 아무런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 가루칸 떡을 맛보는 자기자신이다. 과학적으로 말하자면 맛이란 결국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지각하는 것이고, 그 맛에는 예전의 경험이 작용하여, 그 맛을 인식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다시 과학을 집어치우고 말하자면, 가루칸 떡에서 코이치가 맛을 느끼는 것은 그 떡에 할아버지의 어떤 전통에 대한 고집과 정성과 자신에 대한 애정이 들어가 있음을 이미 알기 때문이다. 즉 오랜 시간의 무엇인가가 그 가루칸 떡에는 농축되어 있고, 그 맛을 느끼거나 혹은 느끼지 못하거나 하는 것은 순간을 살고 있는 자신의 몫이다. 혹 지금 느끼지 못한다고 해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언젠가는 그 맛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아마도 화산재도 비슷한 무엇인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필이면 화산재가 계속 나오고 있는 왜 이런 곳에 사는지 이해를 못하겠다고 코이치는 불평하지만, 할아버지는 그것이 산이 살아있다는 증거이며, 갑자기 분출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즉 화산재라는 것이 분명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불편을 주기는 하지만, 그것은 결국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의 문제라고 고레에다 감독은 말한다. 산이 살아있다는 증거, 그래도 완전히 피해를 주지는 않는 상태라고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단지 재가 묻어나는 불편함만을 주는 것이라고 받아들이는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쌓이지 않게 하는 것이고, 삶이란 아마도 어쩌면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라고 고레에다 감독은 묻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아마도 삶이란 어떤 문제들, 어떤 불편함들이 화산재처럼 계속 쌓일 수밖에 없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영화 속 코이치 가족도 결코 그렇게 좋은 상황은 아니다. 아니 좋은 상황이라기 보다는 상당히 문제가 있는 가정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이들은 조금씩 나아가려고 애쓴다. 그것은 기적을 보러가려는 아이들의 여행이고, 가루칸 떡을 만드는 할아버지의 마음이고, 훌라춤을 추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손짓이다. 즉 그것은 화산재가 쌓이지 않게 매일 열심히 치우는 것과 동일하다. 화산재는 어찌되었건 피할 수 없는 것이고, 화산재가 완전히 사라지는 기적이란 결국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적 이전에 생각해야 하는 것이 시간이며, 화산재를 치우며 시간을 버텨내는 것이 결국은 기적을 행하는 것이라는 것, 그러다보면 지금은 모를지라도 언젠가는 가루칸 떡의 맛도 알게 되겠지요. 그것이 아마도 기적에 대한 고레에다 감독의 어떤 태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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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4-06-27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의 패배를 보면서 많이 아쉬웠지만,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 '기적적인 승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종 기적만을 말하는 사람들은 기적의 이면에 시간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아마도 어쩌면 이루어질 수도 있었을 그 기적적인 승리가 앞으로 4년의 시간에 크게 도움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시간을 지우고 싶은 사람들이 늘 기적을 이야기한다.

2014-06-27 1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6-28 1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14-06-29 0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이 흘러서 나아지면 좋을 텐데, 저는 그런 게 별로 없습니다 아니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조금입니다 사람은 앞으로 한두발 나아가면 어느 때는 뒤로 한발 물러나기도 한다고 하더군요(어쩌면 저는 뒤로 물러나는 게 세발인지도)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늘 앞으로 가기만 하면 안 좋을지도 모르죠

아이들을 보면 시간이 흘렀구나 하는 걸 바로 느낄 수 있죠 시간이 흐름과 함께 커나가는 것도 신기하고, 누구나 그런 때가 있었는데 어느 순간 멈추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보이는 것일 뿐이기는 하군요 보이지 않는 것은 바뀌어갈 텐데... 시간이 흘러서 이루어진 것을 그저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라고만 할 수 없겠죠 시간을 쌓아가는 것도 기적이겠죠 그게 바로 어떤 시간을 버텨내서 기적을 행하는 것이군요

기적은 순간마다 일어나는 것이기도 하고 시간이 쌓여서 만들어지기도 하는 거죠 그것을 느끼느냐 느끼지 못하느냐에 따라 사는 게 달라지겠습니다

저는 축구 못 봤는데 그렇게 됐군요(듣기는 했어요) 언젠가부터 월드컵에 우리나라가 나가고 있는데, 그것만도 대단한 거 아닌가 싶습니다 월드컵이나 올림픽에서 제대로 힘을 못 쓰는 게(많이 본 건 아닌데 그런 느낌이 듭니다) 안타깝기는 하지만... 다음에 잘할지도 모르죠 경기를 즐겁게 봐야 하는데 이기지 않으면 안 좋게 보니... 이렇게 말해도, 저도 우리나라가 이기면 좋아하고 지면 아쉬워해요 요즘은 잘 안 보는군요


희선

맥거핀 2014-07-01 23:56   좋아요 0 | URL
애들보면 깜짝 놀랄 때가 많아요. 저는 조카들을 가끔 보는데, 애들이 볼 때마다 엄청 달라져 있어요. 신체적인 면에서도 그렇고 말하는 거나 행동하는 것도 그렇구요. 참..처음에는 어떻게보면 거의 인간(?)같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한 생명체가 성장한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저는 사실 기적이란 조금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계를 뛰어넘은 무엇인가가 이루어진다는 것...좀 다른 얘기겠지만, 예전에 일본문화에 대해 누군가가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최근 일본에는 말 그대로 '무엇인가 일어나기를' 그러니까 예를 들어 전쟁같은 것들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젊은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더군요. 그러니까 어차피 지금의 정체되어 있는 사회가 숨막힐 정도로 싫고, 자신도 그런 체제에서는 윗계층으로 갈 확률도 별로 없기 때문에 무엇인가 일어나기를 바라는 거죠.

글쎄요..저는 한국사회도 그런 식으로 조금씩 가고 있고(예를 들어 한탕주의 같은 것), 그런 것에는 여전히 겁을 먹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저는 보수주의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아무튼 저는 그런 혁명적인 무엇을 바라기보다는 여전히 그것을 조금은 무서워하는 쪽입니다. 물론 이 영화가 그런 것을 말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여전히 기적적인 무엇인가를 믿기 보다는 시간의 힘을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이번 월드컵은 시간대도 안좋고 해서 거의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한국 경기들은 그래도 챙겨봤습니다. 아쉽더군요. 우리 능력이 거기까지밖에 안되어서 어쩔 수 없다면 이해합니다만, 더 나아질 수 있는 부분들이 꽤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아쉬웠습니다. 물론 희선님 말대로 올림픽이나 월드컵에 나가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기는 합니다만..말은 이렇게 하지만 저도 사실 여전히 스포츠에서 잘 즐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임 졌을 때 열을 가라앉히는 게 힘들어요. 이번에는 열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다른 방법을 써봤습니다. 제가 최근 올린 글의 날짜와 시간들을 보시면..
 

 

 

 

 

 

 

 

 

 

 

그녀her, 스파이크 존즈, 2014

 


(영화의 내용과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인상적인 영화들이 그러듯이 영화 <그녀her>의 시작은 여러가지 면에서 의미심장하다. 영화가 시작되면 주인공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의 얼굴이 정면으로 화면가득 클로즈업 된다. 그는 누군가에게 애정을 담은 메시지를 전하는 중인데, 잠시 뒤에 관객은 한 가지의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은 사실상 그가 전하는 메시지가 아니라는 점. 그는 누군가에게 전하는 편지를 음성으로 '대신하여' 작성하는 중이고, 이것은 그의 직업이기도 하다는 점을 공간 구성과 카메라 워킹을 통해 관객들은 알게 된다(이 공간의 구성은 한편으로 꽤나 인상적인데, 이 공간은 현대사회의 어떤 풍경을 요약하여 보여준다. 공간은 투명한 파티션으로 구획되어 있고, 편지를 작성하는 대리인들은 각자의 공간에서 누군가의 가장 내밀한 메시지들을 대리하고 있다. 누군가들의 사생활들은 그렇게 공개되면서, 동시에 공개되지 않는다. 마치 그들의 공간을 가로막는 투명한 파티션처럼). 즉 그가 작성하는 이 편지는 일반적인 편지와 다르게 특수하다. 그가 작성하는 편지들은 누군가에게 꼭 맞도록 맞춰진 어떤 결과물들이다. 그는 (약간의 진심을 담기는 하지만) 고객이 제공한 몇 가지의 정보들을 가지고 받는 사람이 만족할만한 편지를 만들어낸다. 즉 이 상황에서 테오도르라는 주체의 자리는 없다. 그는 그저 고객의 니즈(needs)에 맞춘 대상물일 뿐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에 일종의 대리로서의 대상물은 그 하나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형식상으로 보면 이 첫 장면의 숏은 상당히 특이하다. 화면상에서 우리는 주인공 테오도르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는데,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즉 우리 관객의 위치는 그가 바라보는 컴퓨터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관객은 명백히 하나의 대상이 되어 이 영화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그가 마주 대하는 컴퓨터의 위치, 혹은 그가 사랑하는 사만다(스칼렛 요한슨)의 위치이다. 영화의 중후반부까지 관객은 한 가지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카메라는 결코 테오도르의 시점숏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즉 일반적인 영화와는 달리 우리는 이 영화에서 중후반부에 이르기까지 주인공의 눈으로 세상을 볼 기회를 얻지 못한다(영화의 중후반부까지 도시의 유려한 혹은 메마른 풍경을 잡는 숏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테오도르의 시점숏이라기 보다는 버드아이 뷰 같은 것에 가깝다). 대신에 카메라는 테오도르의 주변에서 그를 비추고, 그와의 거리는 심리적 친밀도에 따라 적절히 조절된다. 즉 그가 OS 사만다와 대화를 나눌 때에는 카메라는 실제의 사만다라는 육체가 존재한다면, 그녀가 위치할 것 같은 위치에 머문다. 혹은 그가 사만다와 섹스 아닌 섹스를 할 때 카메라는 보다 그에게 훨씬 바싹 다가붙어서 사만다의 육체의 위치에 가 있다(주인공의 시점숏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는데, 테오도르가 영화 상에서 실제의 육체를 가진 누군가와 대화할 때 카메라는 옆으로 빠지거나 혹은 그의 등 뒤에서 상대방을 잡는다(오버 더 숄더 숏). 즉 카메라는 그의 뒤통수와 상대방을 같이 잡는데, 이 때 우리는 그가 된 것이 아니라, 그의 등 뒤에 빠져서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는 것이다).  

카메라를 통해서 영화의 중후반까지 우리는 사만다의 육체를 대신한다. 다시 말해서 대리로서의 대상물은 테오도르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OS 사만다이며(그 OS 사만다는 그의 전처 캐서린(루니 마라)을 대신하는 대상으로서 그에게 작동한다. 또한 그 OS가 기능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분명히 사용자(테오도르)에 맞추어 진화한다고 자신을 설명했다. 고객에게 맞추어 편지를 쓰는 테오도르와 고객에게 맞추어 진화하는 OS 사만다), 카메라를 통해서 그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 자신이다. 즉 목소리와 정신은 영화 속에서 사만다가 담당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눈은 카메라가, 즉 우리 자신의 실제의 눈이라는 육체가 대신한다. 그러므로 어쩌면 당신(이라는 육체)은 이 영화를 통해서 주인공 테오도르와 연애를 하고 있는 것이다(그 영화를 본 당신이 혹 남자라고 꺼림칙해 할 필요는 없다. 영화 속에서 대사로 설명되듯이 테오도르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가진 거의 중성적인 캐릭터니까. 물론 사만다도 초기 선택에 따라 얼마든지 남자가 되거나 여자가 될 수 있다).

또 한편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스크린을 가득 채운 테오도르의 얼굴을 마주하는 이 첫 장면은 관객에게 어떤 비현실적인 느낌, 혹은 비관습적인 느낌, 혹은 어떤 부자연스러움을 제공해준다는 사실이다. 사실 기법상으로 볼 때도 영화의 시작부터 주인공의 얼굴을 화면가득(턱과 머리를 자를 정도로) 잡는 것은 이례적이며, 만약 이것이 실제라면 이러한 경우는 흔치 않다. 물론 흔치 않다고 했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라면 이는 어떠한 경우일까. 실제라면 예를 들어 상대방과 사랑하는 사이일 경우 가능할 것이다. 상대방의 입냄새가 느껴질 정도로 아주 가까이에서 얼굴을 붙이고 대화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라면) 이례적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이라면 상대방의 눈에 붙은 작은 눈곱이나 입냄새 따위가 대수랴. 왜냐하면 사랑은 영화 속에 나오듯이 살짝 맛이 가는 것, 혹은 제정신이 아닌 것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영화 속에서 테오도르의 어떤 묘한 부자연스러움이나 혹은 이상한 행동들(혼자 뱅글뱅글 돈다거나, 춤을 추듯이 길을 걸어가는 것 등)은 그것이 단지 OS와의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은 아니며(모든 사랑에 빠진 자들은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런 것과 이 비관습적인 숏은 사실 동일선상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당신도 사랑에 빠져보라는 권유일 수도 있다.

 

 

사실 이 영화 <her>는 비슷한 메시지를 새로운 방식으로 하기 때문에 주목받는 영화다. OS라는 부분이 상당히 크기 때문에 그것을 완전히 배제하고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불공평하겠지만(물론 기계와 인간이라는 이 영화의 다른 중심축 역시 중요하지만 이 영화에서 기계와 인간의 구별은 사실상 무의미하거나 그 구분 이상의 무엇이다. 적어도 연애의 문제에서 기계가 인간의 자리에 위치할 수 있음을 이 영화는 증명해보였다. 예를 들어 가장 큰 걸림돌인 육체의 문제도 이 영화는 극복하고 있는데, 실제로 인간들의 어떤 행위에서도 육체의 문제는 극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부에 나온 폰으로 하는 것과 비슷한 장면을 넣은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사실 사만다의 자리에 실제 육체를 가진 인간을 위치시킨다면 이 영화에서 전하는 이야기 자체는 그다지 새롭지 않다. 즉 이 이야기는 실제의 많은 연애들이 그러듯이 사랑에 빠져 정신줄을 놓고 살다가, 다시 제정신이 돌아오는 이야기다. 영화 속에서라면 사만다의 경우에는 진화의 끝에 이른 주체의 각성이고, 테오도르의 경우에는 그 연애가 주는 비현실성과 어떤 부재에 대해 깨닫는 또다른 의미에서의 주체의 각성이다. 테오도르의 실제에 대한 대리물이자 대상물로서 그에 맞춰 진화하는 대상에 불과하였던(즉 이동진씨가 지적하였듯이 she가 아니라 her에 불과하였던) 사만다는 어떤 계기들을 거쳐 자기자신을 지각하는 주체가 되어 스스로가 주도하는 사랑을 해나가며, 이는 자신의 대상으로서의 위치에만 머무르기를 바랐던 테오도르의 욕망과 충돌을 일으킨다(자신을 지각하는 기계라는 고전 주제의 반복). 테오도르의 경우에는 이자벨라와의 만남을 통해 그들이 단지 어떤 연기들, 혹은 허상의 감정들을 쌓아가던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대상이 아닌 주체로서 나서고자 한다. 여기에서 주체들의 각성이란 있어보이는 말을 그냥 다른 안 유식한 말로 바꾸면 제정신이 돌아오는 것, 혹은 정신을 차리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 속에는 그것의 몇 가지 증거들이 등장한다. 그것은 사만다의 업그레이드, 혹은 부재이며, 테오도르가 책을 출판하고, 캐서린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며, 기법상으로는 이제서야 비로소 테오도르의 시점숏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의 대리인으로서 철저한 대상화의 결과물(편지)만 써내던 테오도르는 이제 그것을 책으로 출판한다(여기서 한편으로 흥미로운 것은 그의 전처 캐서린이 책을 써낸 인물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이미 주체로서 우뚝 선 그녀는 그녀의 모든 것을 맞추어 돌봐주던 테오도르가 필요없으며, 아마 그런 이유에서도 그를 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 편지들에는 결코 그의 이름은 없었지만, 이제 책 표지 위에는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도 사만다도 이제 누군가의 대상이 되어 서로에게 맞춰주는 어떤 가짜 연애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제 제정신이 돌아왔으니까.

그런데...제정신이 돌아왔으니 그럼 해피엔딩이 되어야 할 텐데, 이게 그럴 수 없으니 어쩌나. 문제는 적어도 사랑에 있어서는 그 주체의 각성, 아니 제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거의 아무도 반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게 어쩌면 연애의 딜레마가 아닐까. 문제는 우리가 연애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배울 때는 그 연애가 끝나고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라는 사실이다. 연애감정에 너무 빠져서 했던 여러 미친 짓들, 상대를 즐겁게 했던, 또는 아프게 했던 소리들. 문제는 그것의 의미들을 깨닫는 것은 그 당시가 아니라, 그 모든 연애들이 끝났을 때이다. 그 때 이렇게 할 것을, 혹은 저렇게 할 것을, 아니면 이런 소리는 하지 말 것을...돌이켜 볼 수 있을 때는 이미 다 끝난 이후이고, 중요한 것은 이미 그 때에는 그는 혹은 그녀는 내 곁에 없다는 사실이다. 왜 항상 진짜 연애 잘 할 수 있을 것 같을 때에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는 걸까. 

그게 이상한 게 아니라, 원래 그래요. 그러니까 딜레마고, 그러니까 있을 때 잘하셔..라고 결론을 내리고 싶지만, 다시 정신차리고 조금 무게 잡고 말하자면, 이 마지막에 감도는 쓸쓸함에는 결국 그런 것들이 담겨 있다. 대상이 아닌 주체가 되었는데, 테오도르는 그리고 우리는 왜 이리 쓸쓸한 걸까. 그래서 나는 스파이크 존즈가 마지막에 테오도르의 시점숏을 제공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래도 그의 배려가 고마웠다. 카메라는 한껏 뒤로 물러나 새벽 어스름의 풍경과 쓸쓸하게 나란히 앉은, 그러나 말 없이 테오도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에이미(에이미 아담스)의 모습을 담는다. 우리는 여전히 등 뒤에서 그들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테오도르나 에이미가 아마도 같은 것을 반복할 것을 알지만, 이 불안정해 보이는 결말에 나는 이상하게 안도한다. 같은 것의 반복에 지긋지긋해 하지만, 우리는 때로 그런 것에 위로받는다.

 

 

덧.
개인적으로는 스파이크 존즈의 최고작은 여전히 Fatboy Slim의 뮤비 'Praise You'라고 생각한다. 일종의 페이크 다큐인 이 뮤비는 이 자체가 하나의 농담인데, 그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농담을 좋아한다. 어쩌면 이 영화 <her>도 일종의 농담인지도 모르겠다(American Funest Video의 한 장면처럼 만들어진 이 뮤비에서 감독 본인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정말 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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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4-06-18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폰섹스'라는 말이 본문에 있어서 계속 음란하다고 글이 안 올라가더니 '폰으로 하는'으로 바꾸니까 되네...그 둘의 차이가 뭔지?

네오 2014-06-18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그냥 글을 읽고 퍼뜩 떠오른 생각인데요,,존즈야말로 진정한 현대의 세익스피어 아닐까요? 아 그 사랑의 본질을 누구보다도 열심히 찾아간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찰리 카우프만과 작업하지 않아도 좋은 작품을 내니 좋더군요,,그가 imhere부터 뭔가 펠리니를 섞은 알렌이 돼가는것 같더군요,,her도 뭔가 ,애니홀 같구요,,그리고 시저는 죽어야 한다를 봤는데,,저한텐 엄청 좋은 영화였습니다,,그 줄리어스 시저를 책을 읽지 않았음에도 아주 대사들이 재미있더라고요,,사실,,여기의 글을 읽고 나서도 이게 무슨 영화일까라고 생각했는데,,보고 나니,,좋다라고요,,Fatboy Slim의 뮤비 'Praise You'가 페이크인가요? 전 리얼인줄 알았는데요,,제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뮤비는 BEASTIE BOYS - SABOTAGE 입니다.

맥거핀 2014-06-20 00:38   좋아요 0 | URL
아..그래요? 애니홀 같다는 생각은 못해봤는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물론 이 영화도 어떤 의미에는 참으로 귀여운 영화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시저는 죽어야 한다, 이 영화를 조금 뒤늦게 보셨군요. 네 저도 그 영화가 좋았습니다. 영화라는 것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라고 할까요. 물론 저도 '줄리어스 시저'(라는 희곡)을 책으로 본 적은 없습니다만..

생각해보니 페이크라고 부르기도 좀 그렇군요. 어찌되었건 그 사람들을 데리고 실제로 찍은 것은 사실이니까요. 아무튼 저는 스파이크 존즈의 그 어떤 재기발랄함이 늘 좋습니다. 비스티 보이즈는 정말 오랜만에 듣는 이름입니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요새 뭐하나 싶네요.

아무튼 오랜만에 네오님 덧글을 보니 반갑네요.^^

넙치 2014-06-19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인데, 역시나 글이 살아있어요!
맥거핀님 글 읽으니 제가 영화를 보긴 했나, 하게 되네요.ㅜㅡ

맥거핀 2014-06-20 00:41   좋아요 0 | URL
넙치님 오랜만입니다. 조금 더 성실히 쓰기는 해야 하는데..
넙치님이야말로 항상 많은 영화를 정밀하게 섭렵하시고 늘 좋은 글을 남기시지 않습니까..^^

드팀전 2014-06-19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영화를 대단히 오이디푸스적으로 봤습니다.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상상계가 상징계로 봉합되기 위한 필수 과정같은 것. 테오도르의 사만다에 대한 의존은 일종의 상상계 속의 남성판타지 같은 것에 가까와 보였습니다. 모든 걸 다 들어주고 해결해주는 어머니같은 존재지요. 단 섹스의 문제 하나 남아있습니다. 테오도르의 거세공포가 기묘한 방식으로 해소되고 난 이후, 제대로된 연애가 시작됩니다. 오이디푸스적 섹스는 좌절되어야만 하는게 당연하구요. 그리고 이후 나타나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전화상으로 들리는 그 철학자겠지요- 그는 사만다가 그녀의 사랑을 독차지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비로소 테오도르는 상징질서로 봉합됩니다. 마지막 베란다씬은 지극히 헐리우드적으로 그 과정에 대해 관객에게 안도감을 줍니다. ... 저도 영화를 좋게 봤습니다, 하지만 주로 이 영화와 '사랑'의 본질 같은것을 병치시키는 방식에 모종의 궁정기사식 낭만성이 배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맥거핀님에 대한 이야기는 아닙닏.) 주변에서 이 영화에 대해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주류적 반응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맥거핀 2014-06-20 00:55   좋아요 0 | URL
네..솔직히 그런 생각은 못해봤습니다만, 덧글을 보고 생각해보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아무튼 상상계의 세계에서 주체가 설 자리는 없으니까요. 상징계의 질서로 편입되는 과정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아무튼 주체적 각성은 테오도르나 사만다나 양편 모두에서 동시에 일어나니까요. 근데 아무튼 저는 마지막에 이르러 안도하기는 했지만, 어떤 모종의 불안함이 남아있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비슷한 것을 반복하지 않을까..즉 상징계에 머무르지 못하고 다시 무엇인가가 그들을 미끄러지게 할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 철학자 얘기 하셔서 생각났는데, 저는 과문하여 그 철학자가 가상의 인물인 줄 알았습니다만, 나중에 찾아보니 실제로 계시던 분이더군요(조금 말이 이상하네요). 저는 이상하게도 사르트르를 연상했습니다.-_-

뭐 아무래도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영화이니 사랑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반응들이 안 나올 수는 없겠죠. 물론 너무 한쪽으로만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저도 별로 재미는 없습니다만..

희선 2014-06-19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에 쓸 수 없는 말이 있다니 처음 알았습니다 본문은 못 써도 댓글은 쓸 수 있군요 그런데 음란해서 안 된다는 말이 나옵니까 이 영화가 나올 때쯤 라디오에서 이야기 들었어요(이 영화 이야기는 그런대로 잘 들었는데 그 뒤부터는 제대로 들은 게 없군요 아쉽게도... 지난해에도 영화는 못 봐도, 못 봐도 가 아니고 안 봐도군요 그 방송이라도 잘 들어보자고 했는데... 그때도 조금밖에 못 들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영화전문방송 같은데 그건 아니예요) 남자여서 OS 목소리를 여자 목소리로 했다고 했는데, 만약 저라면 남자 목소리가 아니고 여자 목소리로 할 것 같아요 친구처럼... 여자는 같은 여자라도 그렇게 이상하게 여기지 않기도 하니까요

이 영화 이야기 들었을 때 맥거핀 님은 이 영화 보고 어떻게 쓸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역시 남다르군요 영화를 보여주는 식에 그런 뜻이 있다니 재미있기도 하네요 영화는 아닐지라도 다른 거 볼 때 조금 잘 보도록 해야겠습니다 지금은 이래도 실제 볼 때는 다 잊어버릴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다른 걸로 쓸쓸함이 느껴질 것 같습니다 그래 결국 그렇게 되는 거지, 하는(저는 여전히 꿈을 더 좋아해서)... 어떤 관계든 그때 잘해도 지나고 나면 아쉽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쉬움을 덜 느끼도록 하는 게 좋을 테죠 그런 게 어떤 건지 잘 모르겠지만... 사람은 그런 일을 되풀이하면서 살아가는 거군요


희선

맥거핀 2014-06-20 01:04   좋아요 0 | URL
저도 갑자기 음란 어쩌구 하며 글이 등록이 안된다고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제 글이 음란한 걸 이 양반들이 어떻게 알았지? 하구요. 아..아무튼 그래서 글을 덕분에 꼼꼼이 다시 읽기는 했습니다. 도대체 어디가 걸릴까 하구요. 혹시나 하고 그 부분을 바꿔보니 글이 다시 제대로 올라가더군요.

근데 아무튼 조금 웃겼습니다. 그런 표현을 쓰거나 안 쓰거나 한다고 해서 음란해지거나 안 음란해지는 것은 아닌데 말이죠. 예를 들어 영화에 성기가 등장한다고 무조건 음란한 영화라고 판정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 게 등장해도 아주 건조할 수도 있고, 그런 것 없이도 아주 음란할 수도 있죠.

아무튼 음란 타령은 여기까지 하구요. 희선님 덧글을 보다 보니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자는 여자 목소리로 하는 경우들도 꽤 있겠지만, 아마도 남자라면 남자 목소리로 설정하는 경우는 거의 극소수이지 않을까 하고..왠지 그것이 아마도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무튼 근데 이 영화에서는 그런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별로 의미는 없습니다. 테오도르는 남성이지만, 상당히 여성적이기도 한 캐릭터라서요.

그 마지막 장면은 참으로 쓸쓸합니다. 그들 둘이 모두 헤어지고 난 이후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게 결국 현대인들의 어떤 풍경을 보여주는 듯 하다는 생각도 들어서요. 우리는 누군가가 생기면 혼자가 되기를 바라고, 외로워지면 다시 누군가가 생기기를 바라는 존재들, 그것을 시계추처럼 반복하여야만 하는 존재들로 운명지워진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말씀하신대로 그런 것을 알면서도 반복에 스스로를 내맡길 수 밖에 없는 거겠지요.

2014-06-21 2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6-27 1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웨스 앤더슨, 2014

 

 

(영화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웨스 앤더슨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여러모로 약간은 이상한 영화다. 일단 그 구조면에서 볼 때 이 영화는 삼중의 액자를 가지고 있다. 영화가 시작하면 어느 흉상 밑에 앉아서 한 소설을 읽고 있는 소녀가 등장하는데, 이 소녀가 읽는 소설의 제목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며, 이 소설을 쓴 작가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인 바로 그 흉상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이어서 두 번째 액자, 즉 그 작가 본인이 등장하는데, 그는 의미심장한 화두를 던진다. 그리고 이어서 세 번째 액자로 들어가 그 작가의 젊은 시절로 돌아가는데, 그는 이 소설의 배경이기도 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그 호텔의 주인을 만나 그가 호텔을 소유하게 된 어떤 기이한 긴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그 기이하고도 긴 이야기가 이 소설의 내용이자, 동시에 이 영화의 내용이기도 하다. 영화가 마무리 될 때도 마찬가지인데, 영화는 다시 액자를 거꾸로 밟기 시작한다. 즉 이 기이하고도 긴 이야기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무슈 구스타브(랄프 파인즈)'의 이야기가 끝나면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호텔의 주인장과 그것을 듣고 있는 젊은 작가의 모습이 보인 다음, 다시 이제는 나이가 든 작가의 모습이 보이고, 최종적으로는 다시 흉상으로 돌아와 이제 소설을 다 읽고 소설을 덮는 소녀의 모습과 함께 영화가 끝난다.

 

이것은 사실 조금 이상하다. 왜냐하면 이 삼중의 액자와 영화 속의 본편은 언뜻 아무런 상관이 없어보이기 때문이다. 즉 일반적인 영화에서는 무슈 구스타브와 로비보이 제로(토니 레볼로리)가 바로 등장한다 해도, 이야기의 진행과 마침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니 약간의 액자가 필요하다고 해도, 그 바로 위의 액자, 즉 호텔의 주인장이 작가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액자만 넣어도 될 것이다. 도리어 이 삼중의 액자는 영화의 초반 몰입을 어지럽게 만드는 측면이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런데 왜 웨스 앤더슨은 굳이 이 삼중의 액자를 계획하고 실행했을까. 이것은 군더더기일까, 아닐까. 군더더기가 아니라면 이것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것이 나의 어떤 물음이다.

 

두 번째 액자에서 나이든 작가가 던지는 화두는 조금은 의미심장하다. 작가는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즉 무엇인가를 '창조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작가가 하는 일은 주의깊게 주변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의 하나의 일례로서 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보여준다. 즉 그의 말을 그대로 믿자면, 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라는 소설, 혹은 영화는 그가 '창작한 것'이 아니라, 나이든 호텔 주인장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그대로 옮긴 것에 불과하다. 즉 이 모험이 가득한 기이하고도 긴 이야기는 어떤 허구의 산물이 아니라, 경험의 산물이다. 그런데 사실 영화 속에서 경험의 산물인 이 이야기는 상당히 이상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이야기는 1927년의 주브로스카 공화국이라는 가상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야기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들은 2차 세계대전 기간의 유럽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것은 갑자기 일어나는 외국의 침공이나, 이어지는 다른 나라의 침공, 혹은 내전, 혹은 열차나 호텔에서 등장하는 군인들의 복식이나 그들이 사용하는 마크(이 군인들이 사용하는 번개 모양의 마크는 나치 친위대의 마크를 거의 그대로 따온 것이다) 같은 것들이 불러오는 이미지들인데, 그런 것들은 예를 들어 '부다페스트'라는 실제의 지명에 대한 어떤 역사적인 이야기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즉 영화는 짐짓 1927년의 주브로스카라는 가상의 공간이라는 모양새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 실제의 지명 '부다페스트'는 이미 제목에서부터 떡하니 박혀 있고, 그것은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독일과 소련을 가까이에 둔 이 나라의 운명을 돌이켜 보도록 한다(헝가리는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침공을 하기도 하고 침공을 받기도 하고, 추축국에 가담하기도 하고, 연합국에 가담하기도 하는 등 어지러운 행보를 보였다). 
 
즉 허구의 산물이 아닌, 경험의 산물이란 다른 이름으로 말하자면 역사이다. 역사는 수많은 경험들의 집합체이고, 수많은 작은 사건들의 조합이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무슈 구스타브의 기이한 생애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유럽 역사의 어떤 단면이며, 허구의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역사에 많은 내용을 빚지고 있다. 그것을 어쩌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겠는데, 예를 들어 소설과 역사의 관계 같은 것 말이다. 많은 면에서 소설은 지금까지 역사가 처리하지 못하는 부분들을 감당해왔다. 역사가 년도와 인원들로 가득한 거대한 사건들을 기록하는 사이, 소설은 그 숫자들이 다 이야기해주지 못하는 개인의 세계를 묵묵히 기록해왔다. 그러고보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지난 일들을 역사가 아닌 소설이나 영화와 같은 이야기 속에서 배워왔던가.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혹은 역사가 단 한 줄로 지나가 버린 수많은 사람들을 소설가들은 어떻게 끄집어내어 되살려냈던가.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이 영화에서 삼중의 액자, 즉 소설과 작가라는 이 액자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즉 이 영화의 액자를 그대로 따른다면, 가장 위대한 작가는 위대한 관찰자이며, 동시에 위대한 역사가이기도 하다(웨스 앤더슨은 이 영화의 이야기가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생애에서 여러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밝혔는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2차 세계대전 속에서 큰 영향을 받은 삶을 살아간 작가이면서, 동시에 한 개인의 생애사를 기록하는 전기작가로도 유명하기도 하다. 즉 그 자신이 소설가이면서 역사가였고 역사의 산 증인이었다).

 

다시 말해서 소설은 누군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이면서,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실제의 혹은 가상의 누군가의 삶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며, 동시에 그 누군가의 세계와 그것을 읽는 누군가의 세계를 연결시킨다(즉 가장 바깥의 액자에 있던 소녀와 무슈 구스타브는 전혀 연결될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들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라는 소설 혹은 영화를 통해 연결된다). 즉 그들은 이 이야기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공감을 나눈다. 영화를 보는 우리들도 이 이야기를 통해 무슈 구스타브가 여러 약점을 지닌 사람이기는 했지만, 그대로 미워할 수 없는 아니, 좋은 사람이었다고 믿게 된다. 그것을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이 영화는 결국 전혀 연관되지 않았던 사람들이 연계하여 힘을 얻는 이야기이다. 무슈 구스타브는 평생을 호텔에서만 지낸 외로운 사람처럼 보이지만(그가 혼자 밥을 먹는 풍경을 보라), 그가 결국 위기를 돌파하는 것은 이상한 연대들, 즉 감옥에서의 연대라거나, 호텔 컨시어지들의 비밀의 결사체를 통해서였다. 그리고 그 결과 그와 단 한 가지의 공통점도 없어 보였던 로비보이 제로와 그는 강력한 유대관계를 가지게 된다.

 

이들의 반대편에 있던 것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가족이라는 피의 결사체이다. 마담 D.(틸다 스윈튼)가 죽자, 그의 유산을 받기 위해 몰려든 평소에는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던 가족들, 그의 망나니 아들 드미트리(에이드리언 브로디)와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세 자매. 물론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유럽의 피의 역사에서 말 그대로 피가 야기했던 무시무시한 결과물들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1차 세계대전을 촉발했던 피로 뭉쳐진 가족들의 집합인 제국주의자들의 충돌과 그것에 방아쇠를 당겼던 황태자 부부의 암살, 혹은 히틀러의 광기어린 피의 집착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것까지 나아가는 것은 너무 과장인 것 같고, 단지 그 반대편에 놓인 것들만 말하자. 그것은 무슈 구스타브와 로비보이 제로의 서정시를 통해 이루어지는 교감이고, 아가사와 제로의 시를 통한, 혹은 책을 통한 연결이다(아가사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소녀였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여러 겹의 액자를 통해 그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에게까지 이어진다. 우리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란 소설을 펴든 순간, 우리가 그 넓고넓은 호텔에서 외롭고 좁은 컨시어지의 방 한 가운데에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 소설 속의 인물들과 연결되는 것이다. 바로 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라는 예술품을 매개로 하여 말이다.

 

즉 이 영화에서 이 액자들은 단지 겉멋 든 영화의 사족들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은 말과 글의 힘이며, 말과 글의 어떤 가능성이다. 그것을 웨스 앤더슨은 극단적으로 이렇게 보여주기도 하는데, 그것은 가장 극적인 이야기들을 보여주지 않고 끝내는 것이다. 즉 영화는 극적인 이야기들을 눈앞에서 보여주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즉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말로 설명되는 것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며, 그것은 그 내용들이 비(非)극적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이상하게도 가장 극적일 수 있는 이야기들을 그저 말로 끝내버린다. 즉 주인공을 비통하게 만드는 무슈 구스타브의 죽음이나 아가사의 죽음에 대한 부분을 카메라는 끝내 비추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주인공의 독백, 그리고 주인공의 그것을 회고하는 반응숏으로 끝날 뿐이다. 그것은 그런 부분을 끝내 전시하지 않겠다는 말과 글에 대한 강조이자 영화적 결단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이 영화를 영화가 아닌 다른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여러모로 이상한 영화다.

 

 

 
덧.
이 영화가 여러모로 영화가 아닌 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그 구조나 이야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이 영화의 형식상에 가득한 어떤 비영화적인 요소들, 혹은 과잉이나 강박 때문인데, 이 영화는 묘하게도 영화이면서 영화가 아닌 것처럼 보이기 위해 애쓴다. 예를 들어 그것은 삼중의 액자나 영화를 장의 형식으로 분절시키는 것도 그러하지만, 몇몇 특정의 장면들 예를 들어 그림판을 활용한다거나 미니어처를 이용한다거나 하는 장면도 그러한데, 보통의 영화들과 다른 점은 보통의 영화들은 그림판이나 미니어처를 활용한다고 해도 그것을 최대한 그것이 아닌 것처럼,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 애쓰는 반면에, 이 영화는 도리어 그런 것의 활용을 일부러 보란듯이 드러낸다는 점이다. 또한 구도의 활용이나 카메라 이동에 대해서도 거의 같은 것을 반복하고 있는데, 이 영화는 거의 어떤 화면이든 대칭의 구도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며, 카메라의 이동도 수직, 수평 이동을 주로 활용하고 있다(다만 단조로움을 없애기 위해 가끔 익스트림 클로즈업 같은, 다른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없는 시도를 여러 활용하는데, 이것은 또 한편으로 이 영화를 더 영화가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하기도 한다).

 

문제는 그것이 때로 지나쳐 일종의 강박처럼 보인다는 점인데, 대칭, 동일한 것에 대한 집착은 때로 위험할 수 있다(영화 시작부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내외부의 모습이나 하다못해 영화포스터만 봐도 그 대칭성에 대한 집착이 엿보인다). 나치의 복장에 대한 집착이나 친위대 마크, 하켄 크로이츠의 대칭을 이야기하는 것은 지나치겠지만(사실 대체로 국기나 마크가 거의 대칭이기는 하다), 이 정도는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 속에 등장하는 가상의 미술품인 <사과를 든 소년>이 명작이 될 수 있는 것은 한편으로 그림 속 주인공이 정면을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약간 측면으로 틀고 사과를 한 손에 든 비대칭 때문일 터이다. 지나친 대칭은 보는 이를 때로 압박하며 부담스럽게 한다. 영화로 보았을 때에도 같은 구도의 반복은 결국에는 보는 이를 지치게 만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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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4-04-11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가 50만을 넘는 '대박'을 기록하고 있다는 뉴스를 보았다. 영화의 만듦새도 만듦새지만 그것에는 대진운도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이제 캡틴 아메..같은 것은 그만 나왔으면 좋겠다.

넙치 2014-04-12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영화가 아주 좋은데 왜 좋은지 모르겠어서 두 번이나 봤어요. 그리고도 어떻게 정리할까..생각만하다가 정리 좀 하려고 알라딘 로그인 했는데 맥거핀님 리뷰가 너무 좋아서 뭘 쓰려는 의지가 사라지네요.ㅠㅜ

맥거핀 2014-04-14 15:09   좋아요 0 | URL
어이쿠..이미 좋은 리뷰를 쓰셨던데요. 두번이나 보셨군요. 저는 요새 영화 한 번 보는 것도 어려운데..이 영화는 충분히 두 번 볼 영화라고 봐요. 영화의 내용상으로도로, 그리고 전체적인 형식적인 면에서도 충분히 되새겨볼만한 영화죠.

희선 2014-04-13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중의 액자를 쓴 것은 왜일까를 생각하다니, 저라면 그냥 그런가보다 할 텐데...^^ 영화속 사람들과 그것을 보는 사람도 이어져 있다고 하니, 이 영화를 보는 사람도 영화에 있어야 하는 것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영화를 보는 사람을 보고 있을지도...^^ 아가사라는 이름에서는 애거서 크리스티가 생각납니다(예전에는 아가사라고도 했던 것 같은데...) 본래 영화에는 보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만, 이 영화는 보는 사람을 더 거기에 끌어들이는 듯하군요

말과 글의 힘이라고 하니, 보는 것이 더 실감날 수 있지만 말을 듣고 글을 읽는 게 더 상상하기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중요한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겠죠(갑자기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생각나는군요^^) 한 사람 한 사람은 역사라는 커다란 흐름과 함께 흘러가는군요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작가(감독)가 그런 것을 보여주는군요

이어지지 않는 말을 늘어놓은 듯합니다^^


희선

맥거핀 2014-04-14 15:15   좋아요 0 | URL
아..맞아요. 예전에는 아가사 크리스티라고 했었죠. 예전에 아가사 크리스티 소설들 많이 읽었었는데...그러고보면 이 영화의 내용에서 아가사가 사건해결(?)에 큰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저도 영화를 참 좋아하기는 합니다만, 영화가 소설을 절대 이길 수 없는 부분들이 있어요. 우리가 상상으로 만들어내는 아우라를 영화가 실제로 만들어낼 때 그 아우라들이 많이 깨지잖아요.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들을 볼 때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는 까닭도 어찌보면 당연하겠지요. 예를 들어 자신의 상상이 만들어낸 그 완벽한 주인공을 실제의 배우가 어떻게 커버할 수 있겠습니까. 다 어느 정도는 익스큐즈,하고 보는 거죠.

그럼에도 영화가 저는 또 말과 글이 하지못한 많은 부분을 해냈다고 생각하구요. 개인적으로도 돌이켜보면 참 많은 것을 영화에서 배운 것 같기도 합니다. 역사라는 부분에서 봐도 말이죠.

저도 조금 엉뚱한 얘기를 했네요.

Shining 2014-04-13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를 봤습니다. 아직도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레이프 파인즈의 연기만큼은 흥미롭던데요. 제가 본 상영관에서는 화면비가 바뀔 때 조정을 하지 못해 일부 장면에서 자막이 짤리거나 몽땅한 비율로 바뀌던데 맥거핀님이 보신 상영관은 어땠을지 궁금하네요 :) 보통의 기존 영화관에선 flat과 scope 둘 밖에 맞추지 못하니 어쩔 수 없없을테지 하면서도 그걸 알면서도 이렇게 만든 웨스 앤더슨은 (어쩌면) 자신이 영어권 감독이니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생각까지 들더군요. 회전목마나 고전적인 인형 그림이그려진 틴케이스에 담긴 고급 수제 쿠키. 그의 영화는 제겐 그런 느낌이에요.

덧) 맞아요, 저는 L시네마에서 봤는데 개봉하는 것도 신기했는데 지금껏 상영하고 있는데 좀 놀랐어요. 그런데 미국 대장님이 별로신가요? 저도 영 관심도 없고 잘 모르는데 주변 사람들은 꽤 재밌다고 하던데요. 평도 좋구요(웃음).

맥거핀 2014-04-14 15:24   좋아요 0 | URL
저는 사실 그 화면비에 대해 정확하게 눈치채지 못했어요. 어..뭔가 살짝 이상한데, 라고 느끼기는 했는데, 자세한 건 나중에 다른 리뷰들을 보고 알았죠. 뭐 한편으로는 웨스 앤더슨이 고전영화의 어떤 느낌을 전체적으로 많이 살려내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현대의 영화에서 볼 수 없는 그런 구도나 장면들을 많이 집어넣었던 것이고, 일부러 엉성한 느낌의 장면들을 삽입하기도 했겠죠.

그러니까 제가 영화가 아닌 듯한 느낌,을 받은 건 그만큼 현대영화에 길들여졌다,라는 의미도 되겠죠. 아무튼 그래서 이동진씨던가요..평에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향수던가...그런 내용을 썼던데, 저는 솔직히 약간 갸웃했습니다. 그런 것을 향수라고 불러도 될까..하는 생각이 약간은 들었어요. 회전목마는 저도 경험해보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만..^^

제가 워낙 히어로물을 안좋아하는 것도 있고..사실 좀 지겹지 않나요? 뭐 맨날 그렇게 새로운 악당들이 나오고, 또 왜 그렇게 맨날 결국 히어로들이 이기는지..저에게 영화의 전권을 준다면, 저는 각종 히어로물에 나왔던 악당들이 결국 연합하여 이기는 걸로 끝내겠습니다.;; 저는 이번에 어벤저스 촬영한다고 난리떤 것도 왜 그런건지 모르겠어요. 국내영화는 촬영도 못하게 하면서...새빛둥둥섬이 파괴된다는 것은 마음에 들었습니다만..

Shining 2014-04-15 23:12   좋아요 0 | URL
우연히 맥스무비 매거진을 봤는데(산 건 아니고 카페에 비치되어 있더군요) 웨스 앤더슨 특집이 있더라구요. 오오, 재밌게 읽었어요. 혹시 이미 읽으셨을지도 모르겠지만 꽤 흥미로운 기사였어요. 그의 영화를 많이 본 것도 아니고, 위에도 말했듯이 당최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를 잘 모르겠더라구요. 프로필 부분에 좋아하는 것, 이라고 해놓고 키덜트가 있길래 빵터졌어요. 로알드 달의 영향도 받았다고 하고.

쿡쿡. 악당들이 이겨버리면, 그 다음에 우려먹을(!) 이야기가 없어서 아닐까요? 다음에 두고보자, 크윽.. 해야 또 시리즈가 나와서 돈을 벌잖아요.......킥킥.

2014-04-18 0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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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평가단을 하면서 늘 느끼게 되는 것은 어떤 책이든지 기대치와 다른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이 신간평가단은 책을 스스로 고르고, 어떤 책을 받아서 읽게될 지 미리 알게 된다는 점에서 보통의 독서와도 유사한 점이 있다. 즉 책을 읽기 전에 어떤 기대, 혹은 단정을 은연중에 가지게 된다. 그런데 막상 책을 받아서 읽고나면 그런 기대와 단정이 바스라지는 경우가 많다. 어떤 책은 매우 좋을 것 같았으나 기대에 못 미치고, 어떤 책은 별로 흥미를 가졌던 주제도 아니고, 식상한 내용일 듯 싶었으나 예상외로 매우 좋았던 경우도 있다.

 

이런 예상한 무엇인가가 바스러질 때의 즐거움은 다른 곳에서도 온다. 개인적으로 신간평가단을 하면서 빼놓지 않고 꼭 하는 일 중의 하나는 같은 책을 읽고 있는 다른 평가단 분들의 글을 읽는 것이다. 물론 여기 알라딘의 모든 책들은 대체로 리뷰가 있고, 마음만 먹으면 찾아서 읽을 수도 있으나, 평가단의 경우처럼 같은 책을 거의 같은 시기에 읽는 경우가 그렇게 흔치만은 않고, 또 평가단 분들은 대체로 일정 정도 이상의 독서이력을 지니신 분들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래서 인문 분야의 평가단 분들이 올리는 글들은 (거의 의무적인 마음을 가지고) 빼놓지 않고 읽는 편인데, 읽을 때면 상당수의 글에서 새로운 지점을 발견하고는 한다. 같은 책을 같은 시기에 읽고도 역시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는 기본적인 부분에서도 그러하지만, 많은 그 글들에서 내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지점을 발견하기도 하고, 새로운 사유의 흔적을 발견하기도 하며, 같은 이야기라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는 것을 보며 감탄하기도 한다. 즉 이는 기존의 어떤 (나의) 고정된 사유가 바스러지는 것이기도 하고, 즐거움이기도 하며, 또 배울 점이기도 하고, 자극이기도 하다. 

 

그래서 꼭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그간 나름 고민하며 좋은 글들을 쓰기 위해 노력하셨을 다른 평가단 분들께 고맙다는 말씀, 앞으로도 건필하시라는 말씀드리고 싶다. 그리고 또한 좋은 책을 선정하시기 위해 노력하셨을 평가단 담당자님께도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어떤 분께서 쓰셨듯이 나에게는 (비록 약간의 고민을 주는) 즐거움이지만, 누군가에는 일이었을 터. 성실히 일을 수행해주신 그 누군가에게 고맙다는 말씀 드리고 싶다.

 

 

* 이번 평가단에서 좋았던 책 5권

 

마지막의 고민을 주는 즐거움이다.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나름의 객관적인(?) 수치를 따르기로 했다. 내가 이번 평가단 도서 중에서 별 5개를 준 것은 다음의 세 권이다.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지그문트 바우만

 

바우만의 이 짤막한 글은 경고이자, 호소이며, 선언이다. 그리고 동시에 어느 노학자의 필사적인 시도이기도 하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예언했던 그리스 신화의 예언자 테레시아스는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가 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다가올 파국을 볼 수 있는 혜안을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작금의 우리들은 눈앞에 있는 것에 정신이 팔려 다가올 파국을 결코 보지 못한다.

 

 

 

명작순례 / 유홍준

 

책을 읽으면 잠시 다른 세상이 보이는 책이다. 복잡한 세상을 벗어나 조용한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들어선 느낌이랄까. 유홍준 교수는 친절한 안내자가 되어 그냥 무심히 지나가는 발걸음을 멈춰 세워 예술품들을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게 만든다. 책의 깔끔한 만듦새도 인상적이다.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 류신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보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서울 시내를 배경으로 산책자 고유의 리듬으로 전개되는 일종의 로드 무비. 그가 제시하는 공간에서의 사유도 인상적이지만, 그가 소개하는 수많은 다른 작품들의 조각들, 그러니까 일종의 결정적 씬(scene)들이 독자를 멈칫거리게 한다. 영화 감상의 기본은 공감이며, 공감을 낳지 못하는 영화는 결코 보는 이를 매료시킬 수 없다. 아마도 이 멈칫거림은 산책자 구보에게, 혹은 언젠가 그 앞에서 구보와 같이 맴돌았을 나 자신에게 보내는 공감과 응원의 흔적일 것이다.

 

그 다음으로 별 4개를 받은 것은 총 6권인데, 팬심을 담아 과학과 관련된 책 2권을 고른다.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 로버트 트리버스

지구의 정복자 /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

 

위에서 ‘무엇인가가 바스러질 때의 즐거움’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사실 어쩌면 가장 큰 즐거움은 ‘기대했던 것이 기대한 것보다 더 좋았을 때에 주는 즐거움’이 아닐까. 류신의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이 친밀하지만 낯선 공간 서울을 어떻게 풀어냈을까 기대했었는데(그래서 추천도서 중 1권으로 선정하기도 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더 즐거운 산책이었고, 말 그대로 ‘읽는 즐거움’을 주는 책이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이번 평가단 활동 중에 가장 좋았던 도서로 선정하고 싶다.

 

 

덧.

휴..드디어 마지막 도서에 대한 리뷰를 썼구나..하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이 페이퍼를 써야하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다. 부랴부랴 써서 올린다. 아..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하자면, 이 ‘신간평가단’이라는 명칭을 바꿔보는 것은 어떨까. 조금 딱딱하기도 하고, ‘평가단’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뭘 평가하나...싶어서 참 민망하다. 이왕이면 우리말 이름으로 하나 새롭게 지어보는 것은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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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4-03-06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간평가단' 대신 어떤 이름이 좋을까요?
맥거핀님의 의견이 궁금하네요.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담아갑니다. ^^

맥거핀 2014-03-07 00:56   좋아요 0 | URL
하하..질문을 한 사람에게 다시 질문으로 받아치는 것은 반칙입니다.^^

그런데 저도 막상 생각해보니 마땅한 게 떠오르지는 않더군요.
한 번 생각해보고 생각나는 게 있으면 또 댓글을 달죠.^^
근데 '신간평가단'은 아무래도 좀 그렇지 않나요..? (나만 그런가...)

희선 2014-03-07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분들 글도 다 찾아보신다니 맥거핀 님은 부지런하시군요 같은 시기에 같은 책을 보기 때문이겠지만, 그래도... 자신과 다른 생각을 잘 받아들이시는군요 저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잘 못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아주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달랐을 때는 저런 생각도 할 수 있구나 하는 정도... 어떤 글(책)에서든 배울 점을 찾으려고 한다면 좋을 텐데요

가끔은 나는 왜 저런 생각을 못했을까 하는 때는 있군요 하지만 같은 책을 보고 쓴 글은 거의 안 보기도 합니다 친하게 지내는 분이 우연히 그 책을 보고 글을 쓴다면 모를까, 그래서 같은 책을 보는 때가 적어요 제가 더 늦게 보는 편입니다 그래서 책을 보고 나서 어떻게 쓰면 좋을까 할 때가 있습니다 쓸데없는 말을...^^


희선

맥거핀 2014-03-07 01:21   좋아요 0 | URL
하하..아뇨. 저 위의 글은 그래도 약간 포장을 한 거구요. 물론 위에 쓴대로 인문서평단 분들의 글들은 거의 보기는 하지만, 그렇게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때도 많아요. 어..저 의견은 조금 이상한데..하면서 반박할 거리를 찾아보거나 혹은 책을 다시 확인해보는 때도 있고, 혼자 툴툴거릴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또 그렇게 하면 그것도 결과적으로 다시 한번 책에 대해 생각해보는 거니까 뭐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근데 특히 이번 서평단 분들은 약간 고수 느낌(?) 나는 분들이 많아서 책에 대해서 몰랐던 부분을 많이 배우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소설 부분이나 영화와는 또 달라서 인문이나 사회과학, 자연과학 분야의 책들 같은 것은 어떨 때는 책 그 자체보다 그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다른 글들을 보며 더 많이 배우게 되는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뭐 어떻게 쓰면 좋을까..정해진 건 없으니까요.
다 각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편하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내에서요.^^

희선 2014-03-07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래는 위에만 쓰려고 했는데... 댓글저장을 누르니 바로 위에 맥거핀 님이 쓴 답글이 나타났습니다 언젠가도 그런 일이 한번 있었습니다 그때는 1분 차이였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말을 더해서 몇 분이나 차이가 나는군요^^


희선

맥거핀 2014-03-07 01:24   좋아요 0 | URL
희선님도 아무래도 야행성에 가까우신 것 같군요. 저도 요새는 거의 새벽에 알라딘에 오게 됩니다. 컴퓨터 앞에서 마음 편히 앉아있을 때가 요새는 새벽 외에는 잘 없네요. 예전에는 일 때문에라도 하루종일 컴퓨터 모니터를 보고 있는 때도 있었는데..뭐 그래서 '댓글 조우'를 하는 건 좋지만요.^^

아이리시스 2014-03-13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이제 끝난다, 그럼 이제 소설리뷰 많이 볼 수 있는 건가요? 신난다, 아싸~+_+ (뒤늦게와서 이러고 있다..) 저는 오늘부터 <미시시피 미시시피>를 읽을 거예요. 요즘은 독서가 쫌 뜸하기도하고 책못산지도 한참됐고, 아, 시간없어서 포인트 쌓이는거 오랜만입니다. 좋아요^-^(좋은거맞냐?)

2014-03-15 15: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17 2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18 17: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17 0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18 17: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19 0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20 15: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인을 체포하라]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시인을 체포하라 - 14인 사건을 통해 보는 18세기 파리의 의사소통망
로버트 단턴 지음, 김지혜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2월
평점 :
품절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40년 전인, 1749년 봄의 파리. 의학을 공부하던 프랑수아 보니라는 학생이 경찰이 고용한 첩자의 밀고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의 혐의는 왕(루이 15세)을 비난하는 시를 써서 여러 사람에게 읽어주었다는 것이었으며, 그는 시를 읽어준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자신이 지은 것이 아니며, 그도 누군가에게 전달받았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꼬리를 물고 이어져, 보니를 비롯한 총 14명이 왕을 비난하는 여러 편의 시를 짓고, 유포시킨 혐의로 연쇄적으로 체포되었고, 그들은 대부분 자신이 시를 가지고 있었고, 누군가에게 들려준 것은 사실이나 자신들이 시의 원저자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모두 법학생, 의학생, 철학과정 학생, 성직자, 법률서기 등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보기는 어려웠고, 프티 브르주아이지만 단지 약간의 학식을 가진 보통의 대중에 가까웠고, 경찰이 벌인 일련의 조사에서도 이들이 이 시의 원저자라고 밝혀낼 만한 핵심적인 근거를 찾아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대중들에게 본보기로서 일벌백계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 사건은 이후 이들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은 <시인을 체포하라>의 저자 로버트 단턴이 '14인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단턴은 당시의 경찰 기록 및 여러 문헌을 토대로 이 사건의 의미를 세심하게 추적하며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파리 경찰 당국 및 베르사유의 내부자들은 왜 (어떻게 보면 하찮은) 시를 추적하는 일에 그토록 열을 올렸을까? 왜 이 14인은 대중 속에서 끌려나와 일벌백계의 대상이 되었을까? 이 시들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유통되었을까? 이 시들은 대중 속에 어느 정도로 퍼져나갔으며, 그것은 어떠한 기능을 했을까? 당대의 대중들은 이 시들을 노래하며 어떤 생각을 가졌고, 그것은 그들의 향후의 행동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아마도 이 질문들은 다음의 질문으로 좁힐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사건은 '여론'이라는 것의 탄생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 사건으로 당대의 '여론'이라는 것의 실체를 살펴볼 수 있을까?

'여론'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저자의 논의를 따른다면, 여론에 관한 역사연구에는 두 가지 구분되는 입장이 있다. 하나는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입장으로 여론을 인식론과 권력의 문제로 이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의 입장으로 여론을 이성이 작동하는 공공성을 통한 합리적 결정 도출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이를 저자의 나중의 논의에 비추어 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는데, 하나는 철학적 형태의 여론으로 진실의 확산에 관심을 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형태의 여론으로 의사소통 회로를 통해 유통되는 메시지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p.149). 단턴의 논의는 이 두 가지 모두와 약간은 거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데, 이는 이론적인 논의보다는 경험적인 연구이며, 하나의 실제사건을 놓고 실제의 메시지의 형태와 그 유통방식, 그리고 그것에 대중들에 보이는 반응에 더 관심을 두는 것이며, 그것에서 도출되는 대중의 면모를 조심스레 살피는 것이다. 즉 이 사건에서 단턴이 보는 대중의 면모는 어떤 진실의 담지자이거나 합리적 이성이 작동하는 공공성이 작동하는 무엇도 아니다. 그보다는 더욱 복잡한 무엇, 새롭게 등장하게 된 실체를 가진 수많은 목소리를 가진 힘에 가깝다.

 

어떤 "여론"인가? 그것은 이성의 목소리도 아니고, 모를레와 콩도르세가 채택한 철학의 개념과 멀게라도 닮은 어떤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회적 혼종물인 메르시에의 "대중이라는 분"의 독단적인 명령으로 이제 새로운 리바이어던(Leviathan)과 같다. (중략) 그러나 철학적 이상과 사회적 현실은 결코 일치한 적이 없다. 대중이라는 분은 철학자들이 여론에 관해 논문을 쓰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 대중을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여론조사자들의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말이다. 대중이 언제나 변함없이 동일했다는 뜻은 아니다. 18세기 파리에서 구체제 특유의 대중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이런저런 일들에 대해 의견을 내며 끼어들기 시작했다. 대중은 계몽사상가들이 상상해낸 추상이 아니었다. 대중을 담론적으로 구축하려는 계몽사상가들의 시도에는 터럭만큼의 관심도 없이, 계몽사상가들을 포함해 앞에 놓인 모든 것을 쓸어버린 대중은 거리에서 길어 올린 어떤 힘이었으며, 이미 14인 사건의 시기에도 분명하게 보였고 40년 후에는 멈출 수 없게 된 힘이었다. (p. 155~156)

 

즉 단턴의 논의는 보다 조심스럽다. 역사학자로서 그가 결국 말하는 것은 여론이라는 것의 어떤 거대한 맹아라기보다는 이 사건에서 드러난 초기적 정보사회에서의 대중들의 의사소통체계이며, 불확실한 가설보다는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무엇인가이다. 예를 들어 그는 재빨리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으로 달려가지 않는다. 즉 그는 이 '14인 사건'에서 드러난 대중들의 의사소통체계와 프랑스 대혁명을 단선적으로 연결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가 결론을 내리는 것은 (혁명이라는 것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해도) 18세기 중반의 파리는 시와 노래라는 하나의 효율적인 의사소통체계를 갖추고 있었고, 그것을 통해 대중들에게 어떤 사건과 그에 대해 나돌던 세간의 논평을 전했다는 것이다(즉 이 시와 노래들은 현재의 호외와 비슷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또한, 이는 정보를 전파하고 받아들이는 행위를 통해 대중들에게 일종의 공적 사건에의 개입이라는 공통된 의식을 갖추게 함으로써 '대중'을 형성하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심스러움은 한편으로 이 연구의 방법론이 가지는 한계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책 <시인을 체포하라>는 부록과 주석을 빼면 162페이지라는 그다지 길지 않은 분량이고, 그의 논의 방식과 서술 형태를 볼 때 대중서라기보다는 연구논문에 가깝다. 이 연구논문에서 단턴의 방법론은 방대하고도 다양한 사료에 대한 철저한 문헌연구라고 볼 수 있는데, 사실 이러한 주제에서 문헌연구의 한계는 명확하기 때문이다. 즉 예를 들어 문헌을 통해 당대에 실제로 유통되었던 시나, 그것으로 인해 벌어진 사건의 경과들을 추적하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할지 몰라도, 그것이 실제로 대중들에게 어느정도 퍼져있었는지(페이스북 '좋아요' 개수나 트위터 팔로워 수가 있는 것이 아니다), 혹은 대중들이 어느 정도 그것에 열광하였는지, 혹은 그들이 그것을 듣고 노래하며 어떠한 생각을 가졌는지 정확히 밝혀내기란 어렵다(그에 대한 기록이 있다고 해도 그 기록은 대체로 일반대중이 남긴 것이 아니었다). 하다못해 시와 노래라고 해도, 그것이 정확히 어떻게 불렸는지 알기란 어려운 것이다(악보로 곡조와 가사가 남아있다고 해도, 사실 그것을 어디에서 어떻게 - 음울하게, 혹은 활기차게, 혹은 비꼬듯이 - 불렀는지는 정확히 추론하기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역으로 이 책의 가치는 그 내용적인 부분보다도 그 방법론적인 시도라고 볼 수도 있는데, 단턴은 철저하게 문헌연구에 의존하면서도 그 문헌연구에 다양한 시도들을 가미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경찰기록, 일기, 샹송집, 재판기록, 벽보 등 다양한 문헌을 수집하는 소재적인 면에서, 또는 통계를 내거나, 노래의 변천과정을 추적하거나, 정치적이거나 문학적인 배경을 추론하거나 하는 등의 방법적인 면에서도 그러하지만, 당대의 노래를 실제로 녹음하여 그것을 독자들이 들어볼 수 있도록 배려한 것 등이 그러하다(그 외에도 옮긴이는 이 책 자체가 시집이나 노래책의 구조를 모방하고 있다고 하는데...글쎄?). 물론 이는 단턴의 논의대로, 아마도 당대에 실제로 불렸던 것과는 상당히 다를 수도 있겠지만, 이를 통해 단지 문자로서 시와 노래를 접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구어적 의사소통체계의 일부분을 맛볼 수 있게 해주며, 우리도 그로 인해 이 구어적 의사소통체계의 힘을 다른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게 한다.      

그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는 일부분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단턴의 논의를 따라 이 14인 사건에서 나타난 구어적 의사소통망과 40년 후의 프랑스 대혁명을 무리하게 연결짓지 않는다고 해도,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경찰과 베르사유의 내부자들이 이 '14인 사건' 등을 통해 관련자들에게 일벌백계를 가하는 등 이 시와 노래의 유통과 확산을 막기 위해 애썼지만, 결코 대중들의 입에서 이러한 노래가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의 원저자의 추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원본이나 사본을 없앤다고 해도, 그것의 여러 다양한 변형본들은 계속 대중들에게서 대중들에게로 전파되었다. 문자체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암기와 가창이라는 구어적 형태로서 말이다. 즉 아무리 애를 써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간 이야기와 노래들, 혹은 그 대중들의 비판적이고도 풍자적인 의식 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다. 즉 당시 18세기의 파리는 시와 노래가 지배하는 정보사회였으며, 이는 21세기의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이다(비록 인터넷과 트위터와 페이스북이라는 다른 것이 지배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3세기나 지났지만, 위정자들이 벌이는 행태는 비슷하다. 지난 정상회의 포스터를 둘러싼 사건, 혹은 국정원의 여론조작 사건에서 보듯, 위정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대중의 의사소통체계에 틈입하여, 그것을 조작하거나 부수려 한다. 그러나 대중의 머리와 의식이 남아있는 한, 그 입을 완전히 막아내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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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4-03-03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대나 소재는 좋은데 쉬이 읽히지가 않아서, [고양이 대학살]을 찔끔찔끔 몇개월째 읽고있는걸보면요, 그것보다 이게 더 논문같을 듯하네요. 예전엔 조금 언론, 정보, 대중 이런것들에 관심 있었는데 요새는 별로 없어요. 인문학이랑 다르게 사회과학도서에는 이상하게 별관심이 안생겨요. 희한한 글쓰기방법론인건 분명한듯해요. 그런데 단턴이 계속 단테로 읽히는건 제가 요즘 단테를 읽고 있어서...

잘은 모르지만 여기서도 구어,민담,마더구스이야기 같은 소재들이 보이네요. 암기와 가창..

맥거핀 2014-03-04 00:46   좋아요 0 | URL
<고양이 대학살>을 언제 읽었을까 생각해보니 아마도 그 책 대학 때 과제 때문에 읽었던 것 같아요. 그러고보니 이 책이 참 오래된 책이긴 한듯..아무튼 꽤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어서, 이 책도 조금 재미있으려니 기대했는데, 생각보다는 조금 더 딱딱한 책이었어요. 확실히 논문같은 느낌도 있구요. 근데 또 논문이라고 보기에는 또 특이한 면도 있어요.

아무튼 전체적으로는 나는 할 말만 하겠다, 뭐 그런 인상이랄까..지나친 추론과 섣부른 결론을 상당히 경계하는 듯 보였습니다.

근데..요새 단테는 왜 읽어요? 재미있어요?

아이리시스 2014-03-04 20:28   좋아요 0 | URL
표지보면 이책은 정말 유들유들하고 재미있어보여요. 기대했는데 맥거핀님 리뷰보면서 또 내 생각이랑 달랐구나 했어요. 그렇지만 소재나 주제, 방식면에서 저는 단턴이 괜찮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이런식의 글쓰기라니, 제가 시대사,문화사 좋아해서 그런것도 있고요. 나는 할 말만 하겠다, 좋네요.

그냥 단테 있길래.. 신곡은 어려워서.. 연암서가에서 나온 아우어바흐의 '단테'요. 신곡해석해주겠죠, 단테어떤사람인지 알려주겠죠, 책도 대여중이기때문에 저렴하죠, 여러모로 읽을수밖에 없었........^-^

맥거핀 2014-03-07 00:46   좋아요 0 | URL
저도 '신곡'을 실제로 읽었다기보다는 해설서로 주로 봤는데, '신곡'이 생각했던 것 보다도 훨씬 방대하며, 가치가 매우 큰 작품이더라구요. 아무튼 해설서들을 나름 꽤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근데 아우어바흐의 단테는 모르겠군요. 찾아보니 꽤 최근에 출판된 책인듯 합니다.

네..그래도 소재가 신선해서 기본적인 재미는 있었어요. 당대의 시와 노래들도 나름 재미있는 것들이 많았구요. 예나 지금이나 가장 재미있는 건 누군가를 까는(?) 내용인 것 같습니다.ㅋ

희선 2014-03-04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와 노래가 퍼졌다는 말을 보니, 이정명 소설 《별을 스치는 바람》이 떠올랐습니다 여기에는 감옥에서 책을 돌아가면서 읽는 모습이 나오지만,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겠죠 시와 노래를 사람들이 보고 듣고 생각한 일... 아니 어쩌면 이것은 어느 시대에나 있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조금 달라졌지만 사람 마음은 아주 달라지지 않았으니까요

대중의 힘은 예나 지금이나 큽니다 안 좋은 일을 하는 사람도 더러 있지만 올바른 생각을 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더 많겠죠 위에서 누르려고 해도 누워 있지만은 않을 겁니다 이 말을 하니 김수영 시 <풀>이 생각나는군요^^


희선

맥거핀 2014-03-07 00:53   좋아요 0 | URL
위정자들은 항상 대중들이 아무것도 모르기를 바라지만, 대중들은 과거에도 지금에도 알 건 어느정도 알죠. 다만 알아도 비겁해지거나, 혹은 눈을 감아버릴 때도 있는 것 뿐이죠. 물론 그건 저도 어느정도는 마찬가지겠구요. 어떨 때는 정말 몰라서 못하는 것도 있지만, 알아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확실히 위선적이죠.

그래도 결국 희선님 말대로 사람 마음은 결국 비슷해서 아마도 어떤 발전방향, 혹은 역사라는 것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중간에 어떻게, 얼마만큼 에둘러 가는가의 문제가 있는 것이겠죠. 이 책에서도 직접적으로 연결짓지는 않지만, 결국 이 시와 노래들과 프랑스 대혁명을 완전히 분리시킬 수 없는 것도 또한 사실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