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her, 스파이크 존즈, 2014

 


(영화의 내용과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인상적인 영화들이 그러듯이 영화 <그녀her>의 시작은 여러가지 면에서 의미심장하다. 영화가 시작되면 주인공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의 얼굴이 정면으로 화면가득 클로즈업 된다. 그는 누군가에게 애정을 담은 메시지를 전하는 중인데, 잠시 뒤에 관객은 한 가지의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은 사실상 그가 전하는 메시지가 아니라는 점. 그는 누군가에게 전하는 편지를 음성으로 '대신하여' 작성하는 중이고, 이것은 그의 직업이기도 하다는 점을 공간 구성과 카메라 워킹을 통해 관객들은 알게 된다(이 공간의 구성은 한편으로 꽤나 인상적인데, 이 공간은 현대사회의 어떤 풍경을 요약하여 보여준다. 공간은 투명한 파티션으로 구획되어 있고, 편지를 작성하는 대리인들은 각자의 공간에서 누군가의 가장 내밀한 메시지들을 대리하고 있다. 누군가들의 사생활들은 그렇게 공개되면서, 동시에 공개되지 않는다. 마치 그들의 공간을 가로막는 투명한 파티션처럼). 즉 그가 작성하는 이 편지는 일반적인 편지와 다르게 특수하다. 그가 작성하는 편지들은 누군가에게 꼭 맞도록 맞춰진 어떤 결과물들이다. 그는 (약간의 진심을 담기는 하지만) 고객이 제공한 몇 가지의 정보들을 가지고 받는 사람이 만족할만한 편지를 만들어낸다. 즉 이 상황에서 테오도르라는 주체의 자리는 없다. 그는 그저 고객의 니즈(needs)에 맞춘 대상물일 뿐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에 일종의 대리로서의 대상물은 그 하나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형식상으로 보면 이 첫 장면의 숏은 상당히 특이하다. 화면상에서 우리는 주인공 테오도르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는데,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즉 우리 관객의 위치는 그가 바라보는 컴퓨터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관객은 명백히 하나의 대상이 되어 이 영화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그가 마주 대하는 컴퓨터의 위치, 혹은 그가 사랑하는 사만다(스칼렛 요한슨)의 위치이다. 영화의 중후반부까지 관객은 한 가지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카메라는 결코 테오도르의 시점숏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즉 일반적인 영화와는 달리 우리는 이 영화에서 중후반부에 이르기까지 주인공의 눈으로 세상을 볼 기회를 얻지 못한다(영화의 중후반부까지 도시의 유려한 혹은 메마른 풍경을 잡는 숏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테오도르의 시점숏이라기 보다는 버드아이 뷰 같은 것에 가깝다). 대신에 카메라는 테오도르의 주변에서 그를 비추고, 그와의 거리는 심리적 친밀도에 따라 적절히 조절된다. 즉 그가 OS 사만다와 대화를 나눌 때에는 카메라는 실제의 사만다라는 육체가 존재한다면, 그녀가 위치할 것 같은 위치에 머문다. 혹은 그가 사만다와 섹스 아닌 섹스를 할 때 카메라는 보다 그에게 훨씬 바싹 다가붙어서 사만다의 육체의 위치에 가 있다(주인공의 시점숏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는데, 테오도르가 영화 상에서 실제의 육체를 가진 누군가와 대화할 때 카메라는 옆으로 빠지거나 혹은 그의 등 뒤에서 상대방을 잡는다(오버 더 숄더 숏). 즉 카메라는 그의 뒤통수와 상대방을 같이 잡는데, 이 때 우리는 그가 된 것이 아니라, 그의 등 뒤에 빠져서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는 것이다).  

카메라를 통해서 영화의 중후반까지 우리는 사만다의 육체를 대신한다. 다시 말해서 대리로서의 대상물은 테오도르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OS 사만다이며(그 OS 사만다는 그의 전처 캐서린(루니 마라)을 대신하는 대상으로서 그에게 작동한다. 또한 그 OS가 기능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분명히 사용자(테오도르)에 맞추어 진화한다고 자신을 설명했다. 고객에게 맞추어 편지를 쓰는 테오도르와 고객에게 맞추어 진화하는 OS 사만다), 카메라를 통해서 그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 자신이다. 즉 목소리와 정신은 영화 속에서 사만다가 담당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눈은 카메라가, 즉 우리 자신의 실제의 눈이라는 육체가 대신한다. 그러므로 어쩌면 당신(이라는 육체)은 이 영화를 통해서 주인공 테오도르와 연애를 하고 있는 것이다(그 영화를 본 당신이 혹 남자라고 꺼림칙해 할 필요는 없다. 영화 속에서 대사로 설명되듯이 테오도르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가진 거의 중성적인 캐릭터니까. 물론 사만다도 초기 선택에 따라 얼마든지 남자가 되거나 여자가 될 수 있다).

또 한편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스크린을 가득 채운 테오도르의 얼굴을 마주하는 이 첫 장면은 관객에게 어떤 비현실적인 느낌, 혹은 비관습적인 느낌, 혹은 어떤 부자연스러움을 제공해준다는 사실이다. 사실 기법상으로 볼 때도 영화의 시작부터 주인공의 얼굴을 화면가득(턱과 머리를 자를 정도로) 잡는 것은 이례적이며, 만약 이것이 실제라면 이러한 경우는 흔치 않다. 물론 흔치 않다고 했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라면 이는 어떠한 경우일까. 실제라면 예를 들어 상대방과 사랑하는 사이일 경우 가능할 것이다. 상대방의 입냄새가 느껴질 정도로 아주 가까이에서 얼굴을 붙이고 대화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라면) 이례적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이라면 상대방의 눈에 붙은 작은 눈곱이나 입냄새 따위가 대수랴. 왜냐하면 사랑은 영화 속에 나오듯이 살짝 맛이 가는 것, 혹은 제정신이 아닌 것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영화 속에서 테오도르의 어떤 묘한 부자연스러움이나 혹은 이상한 행동들(혼자 뱅글뱅글 돈다거나, 춤을 추듯이 길을 걸어가는 것 등)은 그것이 단지 OS와의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은 아니며(모든 사랑에 빠진 자들은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런 것과 이 비관습적인 숏은 사실 동일선상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당신도 사랑에 빠져보라는 권유일 수도 있다.

 

 

사실 이 영화 <her>는 비슷한 메시지를 새로운 방식으로 하기 때문에 주목받는 영화다. OS라는 부분이 상당히 크기 때문에 그것을 완전히 배제하고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불공평하겠지만(물론 기계와 인간이라는 이 영화의 다른 중심축 역시 중요하지만 이 영화에서 기계와 인간의 구별은 사실상 무의미하거나 그 구분 이상의 무엇이다. 적어도 연애의 문제에서 기계가 인간의 자리에 위치할 수 있음을 이 영화는 증명해보였다. 예를 들어 가장 큰 걸림돌인 육체의 문제도 이 영화는 극복하고 있는데, 실제로 인간들의 어떤 행위에서도 육체의 문제는 극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부에 나온 폰으로 하는 것과 비슷한 장면을 넣은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사실 사만다의 자리에 실제 육체를 가진 인간을 위치시킨다면 이 영화에서 전하는 이야기 자체는 그다지 새롭지 않다. 즉 이 이야기는 실제의 많은 연애들이 그러듯이 사랑에 빠져 정신줄을 놓고 살다가, 다시 제정신이 돌아오는 이야기다. 영화 속에서라면 사만다의 경우에는 진화의 끝에 이른 주체의 각성이고, 테오도르의 경우에는 그 연애가 주는 비현실성과 어떤 부재에 대해 깨닫는 또다른 의미에서의 주체의 각성이다. 테오도르의 실제에 대한 대리물이자 대상물로서 그에 맞춰 진화하는 대상에 불과하였던(즉 이동진씨가 지적하였듯이 she가 아니라 her에 불과하였던) 사만다는 어떤 계기들을 거쳐 자기자신을 지각하는 주체가 되어 스스로가 주도하는 사랑을 해나가며, 이는 자신의 대상으로서의 위치에만 머무르기를 바랐던 테오도르의 욕망과 충돌을 일으킨다(자신을 지각하는 기계라는 고전 주제의 반복). 테오도르의 경우에는 이자벨라와의 만남을 통해 그들이 단지 어떤 연기들, 혹은 허상의 감정들을 쌓아가던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대상이 아닌 주체로서 나서고자 한다. 여기에서 주체들의 각성이란 있어보이는 말을 그냥 다른 안 유식한 말로 바꾸면 제정신이 돌아오는 것, 혹은 정신을 차리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 속에는 그것의 몇 가지 증거들이 등장한다. 그것은 사만다의 업그레이드, 혹은 부재이며, 테오도르가 책을 출판하고, 캐서린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며, 기법상으로는 이제서야 비로소 테오도르의 시점숏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의 대리인으로서 철저한 대상화의 결과물(편지)만 써내던 테오도르는 이제 그것을 책으로 출판한다(여기서 한편으로 흥미로운 것은 그의 전처 캐서린이 책을 써낸 인물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이미 주체로서 우뚝 선 그녀는 그녀의 모든 것을 맞추어 돌봐주던 테오도르가 필요없으며, 아마 그런 이유에서도 그를 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 편지들에는 결코 그의 이름은 없었지만, 이제 책 표지 위에는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도 사만다도 이제 누군가의 대상이 되어 서로에게 맞춰주는 어떤 가짜 연애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제 제정신이 돌아왔으니까.

그런데...제정신이 돌아왔으니 그럼 해피엔딩이 되어야 할 텐데, 이게 그럴 수 없으니 어쩌나. 문제는 적어도 사랑에 있어서는 그 주체의 각성, 아니 제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거의 아무도 반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게 어쩌면 연애의 딜레마가 아닐까. 문제는 우리가 연애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배울 때는 그 연애가 끝나고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라는 사실이다. 연애감정에 너무 빠져서 했던 여러 미친 짓들, 상대를 즐겁게 했던, 또는 아프게 했던 소리들. 문제는 그것의 의미들을 깨닫는 것은 그 당시가 아니라, 그 모든 연애들이 끝났을 때이다. 그 때 이렇게 할 것을, 혹은 저렇게 할 것을, 아니면 이런 소리는 하지 말 것을...돌이켜 볼 수 있을 때는 이미 다 끝난 이후이고, 중요한 것은 이미 그 때에는 그는 혹은 그녀는 내 곁에 없다는 사실이다. 왜 항상 진짜 연애 잘 할 수 있을 것 같을 때에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는 걸까. 

그게 이상한 게 아니라, 원래 그래요. 그러니까 딜레마고, 그러니까 있을 때 잘하셔..라고 결론을 내리고 싶지만, 다시 정신차리고 조금 무게 잡고 말하자면, 이 마지막에 감도는 쓸쓸함에는 결국 그런 것들이 담겨 있다. 대상이 아닌 주체가 되었는데, 테오도르는 그리고 우리는 왜 이리 쓸쓸한 걸까. 그래서 나는 스파이크 존즈가 마지막에 테오도르의 시점숏을 제공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래도 그의 배려가 고마웠다. 카메라는 한껏 뒤로 물러나 새벽 어스름의 풍경과 쓸쓸하게 나란히 앉은, 그러나 말 없이 테오도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에이미(에이미 아담스)의 모습을 담는다. 우리는 여전히 등 뒤에서 그들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테오도르나 에이미가 아마도 같은 것을 반복할 것을 알지만, 이 불안정해 보이는 결말에 나는 이상하게 안도한다. 같은 것의 반복에 지긋지긋해 하지만, 우리는 때로 그런 것에 위로받는다.

 

 

덧.
개인적으로는 스파이크 존즈의 최고작은 여전히 Fatboy Slim의 뮤비 'Praise You'라고 생각한다. 일종의 페이크 다큐인 이 뮤비는 이 자체가 하나의 농담인데, 그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농담을 좋아한다. 어쩌면 이 영화 <her>도 일종의 농담인지도 모르겠다(American Funest Video의 한 장면처럼 만들어진 이 뮤비에서 감독 본인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정말 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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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4-06-18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폰섹스'라는 말이 본문에 있어서 계속 음란하다고 글이 안 올라가더니 '폰으로 하는'으로 바꾸니까 되네...그 둘의 차이가 뭔지?

네오 2014-06-18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그냥 글을 읽고 퍼뜩 떠오른 생각인데요,,존즈야말로 진정한 현대의 세익스피어 아닐까요? 아 그 사랑의 본질을 누구보다도 열심히 찾아간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찰리 카우프만과 작업하지 않아도 좋은 작품을 내니 좋더군요,,그가 imhere부터 뭔가 펠리니를 섞은 알렌이 돼가는것 같더군요,,her도 뭔가 ,애니홀 같구요,,그리고 시저는 죽어야 한다를 봤는데,,저한텐 엄청 좋은 영화였습니다,,그 줄리어스 시저를 책을 읽지 않았음에도 아주 대사들이 재미있더라고요,,사실,,여기의 글을 읽고 나서도 이게 무슨 영화일까라고 생각했는데,,보고 나니,,좋다라고요,,Fatboy Slim의 뮤비 'Praise You'가 페이크인가요? 전 리얼인줄 알았는데요,,제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뮤비는 BEASTIE BOYS - SABOTAGE 입니다.

맥거핀 2014-06-20 00:38   좋아요 0 | URL
아..그래요? 애니홀 같다는 생각은 못해봤는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물론 이 영화도 어떤 의미에는 참으로 귀여운 영화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시저는 죽어야 한다, 이 영화를 조금 뒤늦게 보셨군요. 네 저도 그 영화가 좋았습니다. 영화라는 것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라고 할까요. 물론 저도 '줄리어스 시저'(라는 희곡)을 책으로 본 적은 없습니다만..

생각해보니 페이크라고 부르기도 좀 그렇군요. 어찌되었건 그 사람들을 데리고 실제로 찍은 것은 사실이니까요. 아무튼 저는 스파이크 존즈의 그 어떤 재기발랄함이 늘 좋습니다. 비스티 보이즈는 정말 오랜만에 듣는 이름입니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요새 뭐하나 싶네요.

아무튼 오랜만에 네오님 덧글을 보니 반갑네요.^^

넙치 2014-06-19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인데, 역시나 글이 살아있어요!
맥거핀님 글 읽으니 제가 영화를 보긴 했나, 하게 되네요.ㅜㅡ

맥거핀 2014-06-20 00:41   좋아요 0 | URL
넙치님 오랜만입니다. 조금 더 성실히 쓰기는 해야 하는데..
넙치님이야말로 항상 많은 영화를 정밀하게 섭렵하시고 늘 좋은 글을 남기시지 않습니까..^^

드팀전 2014-06-19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영화를 대단히 오이디푸스적으로 봤습니다.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상상계가 상징계로 봉합되기 위한 필수 과정같은 것. 테오도르의 사만다에 대한 의존은 일종의 상상계 속의 남성판타지 같은 것에 가까와 보였습니다. 모든 걸 다 들어주고 해결해주는 어머니같은 존재지요. 단 섹스의 문제 하나 남아있습니다. 테오도르의 거세공포가 기묘한 방식으로 해소되고 난 이후, 제대로된 연애가 시작됩니다. 오이디푸스적 섹스는 좌절되어야만 하는게 당연하구요. 그리고 이후 나타나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전화상으로 들리는 그 철학자겠지요- 그는 사만다가 그녀의 사랑을 독차지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비로소 테오도르는 상징질서로 봉합됩니다. 마지막 베란다씬은 지극히 헐리우드적으로 그 과정에 대해 관객에게 안도감을 줍니다. ... 저도 영화를 좋게 봤습니다, 하지만 주로 이 영화와 '사랑'의 본질 같은것을 병치시키는 방식에 모종의 궁정기사식 낭만성이 배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맥거핀님에 대한 이야기는 아닙닏.) 주변에서 이 영화에 대해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주류적 반응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맥거핀 2014-06-20 00:55   좋아요 0 | URL
네..솔직히 그런 생각은 못해봤습니다만, 덧글을 보고 생각해보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아무튼 상상계의 세계에서 주체가 설 자리는 없으니까요. 상징계의 질서로 편입되는 과정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아무튼 주체적 각성은 테오도르나 사만다나 양편 모두에서 동시에 일어나니까요. 근데 아무튼 저는 마지막에 이르러 안도하기는 했지만, 어떤 모종의 불안함이 남아있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비슷한 것을 반복하지 않을까..즉 상징계에 머무르지 못하고 다시 무엇인가가 그들을 미끄러지게 할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 철학자 얘기 하셔서 생각났는데, 저는 과문하여 그 철학자가 가상의 인물인 줄 알았습니다만, 나중에 찾아보니 실제로 계시던 분이더군요(조금 말이 이상하네요). 저는 이상하게도 사르트르를 연상했습니다.-_-

뭐 아무래도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영화이니 사랑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반응들이 안 나올 수는 없겠죠. 물론 너무 한쪽으로만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저도 별로 재미는 없습니다만..

희선 2014-06-19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에 쓸 수 없는 말이 있다니 처음 알았습니다 본문은 못 써도 댓글은 쓸 수 있군요 그런데 음란해서 안 된다는 말이 나옵니까 이 영화가 나올 때쯤 라디오에서 이야기 들었어요(이 영화 이야기는 그런대로 잘 들었는데 그 뒤부터는 제대로 들은 게 없군요 아쉽게도... 지난해에도 영화는 못 봐도, 못 봐도 가 아니고 안 봐도군요 그 방송이라도 잘 들어보자고 했는데... 그때도 조금밖에 못 들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영화전문방송 같은데 그건 아니예요) 남자여서 OS 목소리를 여자 목소리로 했다고 했는데, 만약 저라면 남자 목소리가 아니고 여자 목소리로 할 것 같아요 친구처럼... 여자는 같은 여자라도 그렇게 이상하게 여기지 않기도 하니까요

이 영화 이야기 들었을 때 맥거핀 님은 이 영화 보고 어떻게 쓸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역시 남다르군요 영화를 보여주는 식에 그런 뜻이 있다니 재미있기도 하네요 영화는 아닐지라도 다른 거 볼 때 조금 잘 보도록 해야겠습니다 지금은 이래도 실제 볼 때는 다 잊어버릴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다른 걸로 쓸쓸함이 느껴질 것 같습니다 그래 결국 그렇게 되는 거지, 하는(저는 여전히 꿈을 더 좋아해서)... 어떤 관계든 그때 잘해도 지나고 나면 아쉽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쉬움을 덜 느끼도록 하는 게 좋을 테죠 그런 게 어떤 건지 잘 모르겠지만... 사람은 그런 일을 되풀이하면서 살아가는 거군요


희선

맥거핀 2014-06-20 01:04   좋아요 0 | URL
저도 갑자기 음란 어쩌구 하며 글이 등록이 안된다고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제 글이 음란한 걸 이 양반들이 어떻게 알았지? 하구요. 아..아무튼 그래서 글을 덕분에 꼼꼼이 다시 읽기는 했습니다. 도대체 어디가 걸릴까 하구요. 혹시나 하고 그 부분을 바꿔보니 글이 다시 제대로 올라가더군요.

근데 아무튼 조금 웃겼습니다. 그런 표현을 쓰거나 안 쓰거나 한다고 해서 음란해지거나 안 음란해지는 것은 아닌데 말이죠. 예를 들어 영화에 성기가 등장한다고 무조건 음란한 영화라고 판정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 게 등장해도 아주 건조할 수도 있고, 그런 것 없이도 아주 음란할 수도 있죠.

아무튼 음란 타령은 여기까지 하구요. 희선님 덧글을 보다 보니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자는 여자 목소리로 하는 경우들도 꽤 있겠지만, 아마도 남자라면 남자 목소리로 설정하는 경우는 거의 극소수이지 않을까 하고..왠지 그것이 아마도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무튼 근데 이 영화에서는 그런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별로 의미는 없습니다. 테오도르는 남성이지만, 상당히 여성적이기도 한 캐릭터라서요.

그 마지막 장면은 참으로 쓸쓸합니다. 그들 둘이 모두 헤어지고 난 이후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게 결국 현대인들의 어떤 풍경을 보여주는 듯 하다는 생각도 들어서요. 우리는 누군가가 생기면 혼자가 되기를 바라고, 외로워지면 다시 누군가가 생기기를 바라는 존재들, 그것을 시계추처럼 반복하여야만 하는 존재들로 운명지워진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말씀하신대로 그런 것을 알면서도 반복에 스스로를 내맡길 수 밖에 없는 거겠지요.

2014-06-21 2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6-27 1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