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최근작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이상하게 마음을 건드리던 장면은 이제 아버지가 된 료타(후쿠야마 마사하루)가 실수를 저지른 간호사의 집에 찾아가 그녀의 새아들을 만난 후 자신의 새어머니에게 전화를 거는 장면이었다. 료타가 예전 자신의 모습들에 사과하려 하자 새어머니는 말한다. 그저 시시한 얘기나 하자고. 누가 가발을 썼다던가, 누가 성형을 했다거나 하는 그런 이야기. 그러나 사실 그런 해도 되는, 혹은 안해도 되는 그런 이야기가 아마도 더 어려운 법이다. 왜냐하면, 그 이면에 작동하고 있는 것은 '긴 시간'이기 때문이다. 즉 그런 이야기들은 두 사람이 오랜 시간을 공유했을 때에만 자연스럽게 할 수 있으며, 공유한 시간이 없는 사람들은 결국 꼭 필요한, 그렇기 때문에 무거운 이야기밖에 하지 못한다. 그래서 료타도 결국은 시시한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내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아직도 시간이 많이 모자라다.

 

 

돌이켜보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거의 모든 영화에서 늘 시간의 존재를 깨닫게 만들었고, 긴 시간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장편 극영화 데뷔작 <환상의 빛>에서 잡아내고 있는 것은 언뜻 남편의 죽음이라는 과거의 한 순간에 갇혀 있는 유미코(에스미 마키코)의 모습이지만, 그녀는 그럼에도 계속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노력하며, 남아 있는 느린 시간을 조금씩 견뎌내고 있다. <원더풀 라이프>에서는 흥미로운 질문을 한다. 가장 행복했던 기억만 남겨놓을 수 있다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러나 그 질문 이면에 숨겨져 있는 것은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결국 우리는 지나온 모든 것을 돌이켜봐야 한다는 것이다. 좋았던 것과 나빴던 것, 그 모든 시간을 돌아보아야 우리는 결국 무엇인가를 선택할(혹은 선택하지 않을) 수 있다. <아무도 모른다>에서는 아이들이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지만, 대신 우리 우리 관객들은 안다. 그리고 고레에다 감독은 그들이 버텨내는 시간들을 우리도 같이 지켜보며 버텨내도록 만든다. <걸어도 걸어도>는 일견 짧은 시간 동안에 일어나는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이전의 오랜 시간이다. 좋은 기억들과 안좋은 기억들, 그 모든 것의 총체로서 오랜 시간이 그들의 하루에 스며들어 있다. 그러므로 이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어떤 질문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를 여러 편 보아온 사람이라면 사실 이 질문의 답이 정해져 있음을 알며, 료타가 결국 어떤 선택을 하게 될 지도 알고 있다. 어떠한 것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시시한 질문을 하는 관계 같은 것들은 어떤 방법을 써도 결코 짧은 시간에 만들어질 수 없다.
 
바꿔 말하면, 고레에다 감독은 시간을 보여주는 데에 능숙하다.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들은 이상하게도 한정된 시간 속에서 긴 시간을 느끼게 한다. 사실 모든 영화감독들은 시간을 다루는 기술자이며, 시간을 다루는 기술자가 되어야 하지만, 그런 면에서 고레에다 감독은 특출나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도 감독이 친절하게 자막을 넣기는 하지만, 그런 자막 없이도 우리는 그들이 긴 시간을 지나오고 있음을 안다. 혹은 보여주지 않은 그 사이에 어떤 시간들이 압축되어 있는지를 짐작하거나 혹은 알게 된다. 무릇 좋은 영화 감독이란 보여주지 않은 것 사이에 최대한 많은 것을 관객들에게 상상하도록 만드는 감독이다. 그것은 짧은 숏과 숏의 연결에서도 그렇고, 혹은 씬과 씬 사이의 연결에서도 그렇다. 영화라는 것은 앉아서 보는 이들을 끊임없이 참여하도록 요청하는 매체이고, 앉아서 보는 이들이 참여하지 않으면 연결되지 않는 예술이다(어쩌면 영화라는 것의 어떤 근본적인 속성도 여기에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 즉 조금 더 세밀하게 들어가면 우리는 사실 매 순간 정지화면을 보고 있으며, 그 정지화면을 움직이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뇌이다. 즉 우리의 뇌는 매 순간 그들의 움직임에 참여하고 있다). 반면 스스로 죽어 있기를 원하는 관객에게 영화는 때로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음으로서 화답하며, 그들을 기꺼이 죽여준다. 영화와 관객의 이상한 거래.

 

 

다시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로 돌아온다면, 그의 2011년도 작품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영화의 원제는 '기적'이다. 도대체 왜 앞에 재미도 없는 이런 사족을 붙이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이 사족은 내용상으로 볼 때 어떤 의미에서는 영화의 어떤 부분을 훼손시키는 것이기도 하다)에는 조금 이상한 연결이 있다. 아이들이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애타는 마음으로 지나가는 열차를 바라볼 때 장면은 끊어지고, 별 의미가 없어보이는 숏들이 나열된다. 지나온 길에 보았던 가족의 모습, 할아버지의 가루칸 떡, 할머니의 훌라춤 손 동작, 선생님의 자전거 벨, 남아있는 과자부스러기, 자판기 밑에 있던 동전, 마음 좋은 노부부가 사주었던 저녁밥, 오는 길에 맡았던 코스모스의 향기, 그리고 형과 동생의 좋았던 한 때들....결국 이 기적의 순간에 작동하는 것, 혹은 아이들에게 돌아보게 만드는 것은 시간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그들이 어떤 소원을 빌기 위해서는 지나온 많은 시간들 중의 수많은 소원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해야만 한다는 것이고, 조금 다르게 말하자면, 결국 기적이란 긴 시간 속에서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이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 서로 만나 이렇게 열차의 교차를 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의 작동이며, 기적의 혼합이다(예를 들어 자판기 아래에 떨어진 동전이 없었더라면, 혹은 아이들이 마음씨 좋은 노부부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들은 열차의 교차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혹은 아이들이 빈 소원들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못한다고 해도, 그 순간 그들은 이미 작은 기적들을 만났다. 떨어져 있던 형제들은 만났고, 강아지는 살아 돌아오지 않았지만, 소년은 무엇인가를 떠나보낸다는 것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알게 되었으며, 여배우가 되려는 소녀는 마음을 굳게 먹을 수 있었으며, 노부부는 한때나마 마음의 위안을 조금이라도 찾을 수 있었다. 즉 아이들은 그 이후로 예전과 다른 무엇이 되었다. 그렇게 아이들은 매순간 예전과 다른 무엇이 점점 되어간다. 그것이 바로 아이들의 성장이며, 이 시간이 만들어낸 성장이야말로 어떠한 의미에서는 또다른 기적이다. 그리고 그것이 매순간 일어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기적이자, 기적이 아니다.
 
아마도 영화 속에서 그것의 반대편에 있는 것들이 가루칸 떡이나 화산재와 같은 것일 것이다. 씹어도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는 가루칸 떡을 형 코이치는 오래 씹으며, 중독성이 있는 맛이라 평가한다. 결국 그 단맛을 만들어내는 것, 혹은 아무런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 가루칸 떡을 맛보는 자기자신이다. 과학적으로 말하자면 맛이란 결국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지각하는 것이고, 그 맛에는 예전의 경험이 작용하여, 그 맛을 인식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다시 과학을 집어치우고 말하자면, 가루칸 떡에서 코이치가 맛을 느끼는 것은 그 떡에 할아버지의 어떤 전통에 대한 고집과 정성과 자신에 대한 애정이 들어가 있음을 이미 알기 때문이다. 즉 오랜 시간의 무엇인가가 그 가루칸 떡에는 농축되어 있고, 그 맛을 느끼거나 혹은 느끼지 못하거나 하는 것은 순간을 살고 있는 자신의 몫이다. 혹 지금 느끼지 못한다고 해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언젠가는 그 맛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아마도 화산재도 비슷한 무엇인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필이면 화산재가 계속 나오고 있는 왜 이런 곳에 사는지 이해를 못하겠다고 코이치는 불평하지만, 할아버지는 그것이 산이 살아있다는 증거이며, 갑자기 분출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즉 화산재라는 것이 분명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불편을 주기는 하지만, 그것은 결국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의 문제라고 고레에다 감독은 말한다. 산이 살아있다는 증거, 그래도 완전히 피해를 주지는 않는 상태라고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단지 재가 묻어나는 불편함만을 주는 것이라고 받아들이는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쌓이지 않게 하는 것이고, 삶이란 아마도 어쩌면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라고 고레에다 감독은 묻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아마도 삶이란 어떤 문제들, 어떤 불편함들이 화산재처럼 계속 쌓일 수밖에 없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영화 속 코이치 가족도 결코 그렇게 좋은 상황은 아니다. 아니 좋은 상황이라기 보다는 상당히 문제가 있는 가정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이들은 조금씩 나아가려고 애쓴다. 그것은 기적을 보러가려는 아이들의 여행이고, 가루칸 떡을 만드는 할아버지의 마음이고, 훌라춤을 추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손짓이다. 즉 그것은 화산재가 쌓이지 않게 매일 열심히 치우는 것과 동일하다. 화산재는 어찌되었건 피할 수 없는 것이고, 화산재가 완전히 사라지는 기적이란 결국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적 이전에 생각해야 하는 것이 시간이며, 화산재를 치우며 시간을 버텨내는 것이 결국은 기적을 행하는 것이라는 것, 그러다보면 지금은 모를지라도 언젠가는 가루칸 떡의 맛도 알게 되겠지요. 그것이 아마도 기적에 대한 고레에다 감독의 어떤 태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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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4-06-27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의 패배를 보면서 많이 아쉬웠지만,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 '기적적인 승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종 기적만을 말하는 사람들은 기적의 이면에 시간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아마도 어쩌면 이루어질 수도 있었을 그 기적적인 승리가 앞으로 4년의 시간에 크게 도움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시간을 지우고 싶은 사람들이 늘 기적을 이야기한다.

2014-06-27 1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6-28 1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14-06-29 0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이 흘러서 나아지면 좋을 텐데, 저는 그런 게 별로 없습니다 아니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조금입니다 사람은 앞으로 한두발 나아가면 어느 때는 뒤로 한발 물러나기도 한다고 하더군요(어쩌면 저는 뒤로 물러나는 게 세발인지도)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늘 앞으로 가기만 하면 안 좋을지도 모르죠

아이들을 보면 시간이 흘렀구나 하는 걸 바로 느낄 수 있죠 시간이 흐름과 함께 커나가는 것도 신기하고, 누구나 그런 때가 있었는데 어느 순간 멈추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보이는 것일 뿐이기는 하군요 보이지 않는 것은 바뀌어갈 텐데... 시간이 흘러서 이루어진 것을 그저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라고만 할 수 없겠죠 시간을 쌓아가는 것도 기적이겠죠 그게 바로 어떤 시간을 버텨내서 기적을 행하는 것이군요

기적은 순간마다 일어나는 것이기도 하고 시간이 쌓여서 만들어지기도 하는 거죠 그것을 느끼느냐 느끼지 못하느냐에 따라 사는 게 달라지겠습니다

저는 축구 못 봤는데 그렇게 됐군요(듣기는 했어요) 언젠가부터 월드컵에 우리나라가 나가고 있는데, 그것만도 대단한 거 아닌가 싶습니다 월드컵이나 올림픽에서 제대로 힘을 못 쓰는 게(많이 본 건 아닌데 그런 느낌이 듭니다) 안타깝기는 하지만... 다음에 잘할지도 모르죠 경기를 즐겁게 봐야 하는데 이기지 않으면 안 좋게 보니... 이렇게 말해도, 저도 우리나라가 이기면 좋아하고 지면 아쉬워해요 요즘은 잘 안 보는군요


희선

맥거핀 2014-07-01 23:56   좋아요 0 | URL
애들보면 깜짝 놀랄 때가 많아요. 저는 조카들을 가끔 보는데, 애들이 볼 때마다 엄청 달라져 있어요. 신체적인 면에서도 그렇고 말하는 거나 행동하는 것도 그렇구요. 참..처음에는 어떻게보면 거의 인간(?)같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한 생명체가 성장한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저는 사실 기적이란 조금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계를 뛰어넘은 무엇인가가 이루어진다는 것...좀 다른 얘기겠지만, 예전에 일본문화에 대해 누군가가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최근 일본에는 말 그대로 '무엇인가 일어나기를' 그러니까 예를 들어 전쟁같은 것들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젊은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더군요. 그러니까 어차피 지금의 정체되어 있는 사회가 숨막힐 정도로 싫고, 자신도 그런 체제에서는 윗계층으로 갈 확률도 별로 없기 때문에 무엇인가 일어나기를 바라는 거죠.

글쎄요..저는 한국사회도 그런 식으로 조금씩 가고 있고(예를 들어 한탕주의 같은 것), 그런 것에는 여전히 겁을 먹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저는 보수주의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아무튼 저는 그런 혁명적인 무엇을 바라기보다는 여전히 그것을 조금은 무서워하는 쪽입니다. 물론 이 영화가 그런 것을 말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여전히 기적적인 무엇인가를 믿기 보다는 시간의 힘을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이번 월드컵은 시간대도 안좋고 해서 거의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한국 경기들은 그래도 챙겨봤습니다. 아쉽더군요. 우리 능력이 거기까지밖에 안되어서 어쩔 수 없다면 이해합니다만, 더 나아질 수 있는 부분들이 꽤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아쉬웠습니다. 물론 희선님 말대로 올림픽이나 월드컵에 나가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기는 합니다만..말은 이렇게 하지만 저도 사실 여전히 스포츠에서 잘 즐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임 졌을 때 열을 가라앉히는 게 힘들어요. 이번에는 열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다른 방법을 써봤습니다. 제가 최근 올린 글의 날짜와 시간들을 보시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