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her, 스파이크 존즈, 2014

 


(영화의 내용과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인상적인 영화들이 그러듯이 영화 <그녀her>의 시작은 여러가지 면에서 의미심장하다. 영화가 시작되면 주인공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의 얼굴이 정면으로 화면가득 클로즈업 된다. 그는 누군가에게 애정을 담은 메시지를 전하는 중인데, 잠시 뒤에 관객은 한 가지의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은 사실상 그가 전하는 메시지가 아니라는 점. 그는 누군가에게 전하는 편지를 음성으로 '대신하여' 작성하는 중이고, 이것은 그의 직업이기도 하다는 점을 공간 구성과 카메라 워킹을 통해 관객들은 알게 된다(이 공간의 구성은 한편으로 꽤나 인상적인데, 이 공간은 현대사회의 어떤 풍경을 요약하여 보여준다. 공간은 투명한 파티션으로 구획되어 있고, 편지를 작성하는 대리인들은 각자의 공간에서 누군가의 가장 내밀한 메시지들을 대리하고 있다. 누군가들의 사생활들은 그렇게 공개되면서, 동시에 공개되지 않는다. 마치 그들의 공간을 가로막는 투명한 파티션처럼). 즉 그가 작성하는 이 편지는 일반적인 편지와 다르게 특수하다. 그가 작성하는 편지들은 누군가에게 꼭 맞도록 맞춰진 어떤 결과물들이다. 그는 (약간의 진심을 담기는 하지만) 고객이 제공한 몇 가지의 정보들을 가지고 받는 사람이 만족할만한 편지를 만들어낸다. 즉 이 상황에서 테오도르라는 주체의 자리는 없다. 그는 그저 고객의 니즈(needs)에 맞춘 대상물일 뿐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에 일종의 대리로서의 대상물은 그 하나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형식상으로 보면 이 첫 장면의 숏은 상당히 특이하다. 화면상에서 우리는 주인공 테오도르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는데,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즉 우리 관객의 위치는 그가 바라보는 컴퓨터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관객은 명백히 하나의 대상이 되어 이 영화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그가 마주 대하는 컴퓨터의 위치, 혹은 그가 사랑하는 사만다(스칼렛 요한슨)의 위치이다. 영화의 중후반부까지 관객은 한 가지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카메라는 결코 테오도르의 시점숏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즉 일반적인 영화와는 달리 우리는 이 영화에서 중후반부에 이르기까지 주인공의 눈으로 세상을 볼 기회를 얻지 못한다(영화의 중후반부까지 도시의 유려한 혹은 메마른 풍경을 잡는 숏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테오도르의 시점숏이라기 보다는 버드아이 뷰 같은 것에 가깝다). 대신에 카메라는 테오도르의 주변에서 그를 비추고, 그와의 거리는 심리적 친밀도에 따라 적절히 조절된다. 즉 그가 OS 사만다와 대화를 나눌 때에는 카메라는 실제의 사만다라는 육체가 존재한다면, 그녀가 위치할 것 같은 위치에 머문다. 혹은 그가 사만다와 섹스 아닌 섹스를 할 때 카메라는 보다 그에게 훨씬 바싹 다가붙어서 사만다의 육체의 위치에 가 있다(주인공의 시점숏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는데, 테오도르가 영화 상에서 실제의 육체를 가진 누군가와 대화할 때 카메라는 옆으로 빠지거나 혹은 그의 등 뒤에서 상대방을 잡는다(오버 더 숄더 숏). 즉 카메라는 그의 뒤통수와 상대방을 같이 잡는데, 이 때 우리는 그가 된 것이 아니라, 그의 등 뒤에 빠져서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는 것이다).  

카메라를 통해서 영화의 중후반까지 우리는 사만다의 육체를 대신한다. 다시 말해서 대리로서의 대상물은 테오도르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OS 사만다이며(그 OS 사만다는 그의 전처 캐서린(루니 마라)을 대신하는 대상으로서 그에게 작동한다. 또한 그 OS가 기능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분명히 사용자(테오도르)에 맞추어 진화한다고 자신을 설명했다. 고객에게 맞추어 편지를 쓰는 테오도르와 고객에게 맞추어 진화하는 OS 사만다), 카메라를 통해서 그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 자신이다. 즉 목소리와 정신은 영화 속에서 사만다가 담당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눈은 카메라가, 즉 우리 자신의 실제의 눈이라는 육체가 대신한다. 그러므로 어쩌면 당신(이라는 육체)은 이 영화를 통해서 주인공 테오도르와 연애를 하고 있는 것이다(그 영화를 본 당신이 혹 남자라고 꺼림칙해 할 필요는 없다. 영화 속에서 대사로 설명되듯이 테오도르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가진 거의 중성적인 캐릭터니까. 물론 사만다도 초기 선택에 따라 얼마든지 남자가 되거나 여자가 될 수 있다).

또 한편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스크린을 가득 채운 테오도르의 얼굴을 마주하는 이 첫 장면은 관객에게 어떤 비현실적인 느낌, 혹은 비관습적인 느낌, 혹은 어떤 부자연스러움을 제공해준다는 사실이다. 사실 기법상으로 볼 때도 영화의 시작부터 주인공의 얼굴을 화면가득(턱과 머리를 자를 정도로) 잡는 것은 이례적이며, 만약 이것이 실제라면 이러한 경우는 흔치 않다. 물론 흔치 않다고 했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라면 이는 어떠한 경우일까. 실제라면 예를 들어 상대방과 사랑하는 사이일 경우 가능할 것이다. 상대방의 입냄새가 느껴질 정도로 아주 가까이에서 얼굴을 붙이고 대화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라면) 이례적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이라면 상대방의 눈에 붙은 작은 눈곱이나 입냄새 따위가 대수랴. 왜냐하면 사랑은 영화 속에 나오듯이 살짝 맛이 가는 것, 혹은 제정신이 아닌 것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영화 속에서 테오도르의 어떤 묘한 부자연스러움이나 혹은 이상한 행동들(혼자 뱅글뱅글 돈다거나, 춤을 추듯이 길을 걸어가는 것 등)은 그것이 단지 OS와의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은 아니며(모든 사랑에 빠진 자들은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런 것과 이 비관습적인 숏은 사실 동일선상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당신도 사랑에 빠져보라는 권유일 수도 있다.

 

 

사실 이 영화 <her>는 비슷한 메시지를 새로운 방식으로 하기 때문에 주목받는 영화다. OS라는 부분이 상당히 크기 때문에 그것을 완전히 배제하고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불공평하겠지만(물론 기계와 인간이라는 이 영화의 다른 중심축 역시 중요하지만 이 영화에서 기계와 인간의 구별은 사실상 무의미하거나 그 구분 이상의 무엇이다. 적어도 연애의 문제에서 기계가 인간의 자리에 위치할 수 있음을 이 영화는 증명해보였다. 예를 들어 가장 큰 걸림돌인 육체의 문제도 이 영화는 극복하고 있는데, 실제로 인간들의 어떤 행위에서도 육체의 문제는 극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부에 나온 폰으로 하는 것과 비슷한 장면을 넣은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사실 사만다의 자리에 실제 육체를 가진 인간을 위치시킨다면 이 영화에서 전하는 이야기 자체는 그다지 새롭지 않다. 즉 이 이야기는 실제의 많은 연애들이 그러듯이 사랑에 빠져 정신줄을 놓고 살다가, 다시 제정신이 돌아오는 이야기다. 영화 속에서라면 사만다의 경우에는 진화의 끝에 이른 주체의 각성이고, 테오도르의 경우에는 그 연애가 주는 비현실성과 어떤 부재에 대해 깨닫는 또다른 의미에서의 주체의 각성이다. 테오도르의 실제에 대한 대리물이자 대상물로서 그에 맞춰 진화하는 대상에 불과하였던(즉 이동진씨가 지적하였듯이 she가 아니라 her에 불과하였던) 사만다는 어떤 계기들을 거쳐 자기자신을 지각하는 주체가 되어 스스로가 주도하는 사랑을 해나가며, 이는 자신의 대상으로서의 위치에만 머무르기를 바랐던 테오도르의 욕망과 충돌을 일으킨다(자신을 지각하는 기계라는 고전 주제의 반복). 테오도르의 경우에는 이자벨라와의 만남을 통해 그들이 단지 어떤 연기들, 혹은 허상의 감정들을 쌓아가던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대상이 아닌 주체로서 나서고자 한다. 여기에서 주체들의 각성이란 있어보이는 말을 그냥 다른 안 유식한 말로 바꾸면 제정신이 돌아오는 것, 혹은 정신을 차리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 속에는 그것의 몇 가지 증거들이 등장한다. 그것은 사만다의 업그레이드, 혹은 부재이며, 테오도르가 책을 출판하고, 캐서린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며, 기법상으로는 이제서야 비로소 테오도르의 시점숏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의 대리인으로서 철저한 대상화의 결과물(편지)만 써내던 테오도르는 이제 그것을 책으로 출판한다(여기서 한편으로 흥미로운 것은 그의 전처 캐서린이 책을 써낸 인물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이미 주체로서 우뚝 선 그녀는 그녀의 모든 것을 맞추어 돌봐주던 테오도르가 필요없으며, 아마 그런 이유에서도 그를 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 편지들에는 결코 그의 이름은 없었지만, 이제 책 표지 위에는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도 사만다도 이제 누군가의 대상이 되어 서로에게 맞춰주는 어떤 가짜 연애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제 제정신이 돌아왔으니까.

그런데...제정신이 돌아왔으니 그럼 해피엔딩이 되어야 할 텐데, 이게 그럴 수 없으니 어쩌나. 문제는 적어도 사랑에 있어서는 그 주체의 각성, 아니 제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거의 아무도 반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게 어쩌면 연애의 딜레마가 아닐까. 문제는 우리가 연애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배울 때는 그 연애가 끝나고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라는 사실이다. 연애감정에 너무 빠져서 했던 여러 미친 짓들, 상대를 즐겁게 했던, 또는 아프게 했던 소리들. 문제는 그것의 의미들을 깨닫는 것은 그 당시가 아니라, 그 모든 연애들이 끝났을 때이다. 그 때 이렇게 할 것을, 혹은 저렇게 할 것을, 아니면 이런 소리는 하지 말 것을...돌이켜 볼 수 있을 때는 이미 다 끝난 이후이고, 중요한 것은 이미 그 때에는 그는 혹은 그녀는 내 곁에 없다는 사실이다. 왜 항상 진짜 연애 잘 할 수 있을 것 같을 때에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는 걸까. 

그게 이상한 게 아니라, 원래 그래요. 그러니까 딜레마고, 그러니까 있을 때 잘하셔..라고 결론을 내리고 싶지만, 다시 정신차리고 조금 무게 잡고 말하자면, 이 마지막에 감도는 쓸쓸함에는 결국 그런 것들이 담겨 있다. 대상이 아닌 주체가 되었는데, 테오도르는 그리고 우리는 왜 이리 쓸쓸한 걸까. 그래서 나는 스파이크 존즈가 마지막에 테오도르의 시점숏을 제공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래도 그의 배려가 고마웠다. 카메라는 한껏 뒤로 물러나 새벽 어스름의 풍경과 쓸쓸하게 나란히 앉은, 그러나 말 없이 테오도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에이미(에이미 아담스)의 모습을 담는다. 우리는 여전히 등 뒤에서 그들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테오도르나 에이미가 아마도 같은 것을 반복할 것을 알지만, 이 불안정해 보이는 결말에 나는 이상하게 안도한다. 같은 것의 반복에 지긋지긋해 하지만, 우리는 때로 그런 것에 위로받는다.

 

 

덧.
개인적으로는 스파이크 존즈의 최고작은 여전히 Fatboy Slim의 뮤비 'Praise You'라고 생각한다. 일종의 페이크 다큐인 이 뮤비는 이 자체가 하나의 농담인데, 그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농담을 좋아한다. 어쩌면 이 영화 <her>도 일종의 농담인지도 모르겠다(American Funest Video의 한 장면처럼 만들어진 이 뮤비에서 감독 본인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정말 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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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4-06-18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폰섹스'라는 말이 본문에 있어서 계속 음란하다고 글이 안 올라가더니 '폰으로 하는'으로 바꾸니까 되네...그 둘의 차이가 뭔지?

네오 2014-06-18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그냥 글을 읽고 퍼뜩 떠오른 생각인데요,,존즈야말로 진정한 현대의 세익스피어 아닐까요? 아 그 사랑의 본질을 누구보다도 열심히 찾아간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찰리 카우프만과 작업하지 않아도 좋은 작품을 내니 좋더군요,,그가 imhere부터 뭔가 펠리니를 섞은 알렌이 돼가는것 같더군요,,her도 뭔가 ,애니홀 같구요,,그리고 시저는 죽어야 한다를 봤는데,,저한텐 엄청 좋은 영화였습니다,,그 줄리어스 시저를 책을 읽지 않았음에도 아주 대사들이 재미있더라고요,,사실,,여기의 글을 읽고 나서도 이게 무슨 영화일까라고 생각했는데,,보고 나니,,좋다라고요,,Fatboy Slim의 뮤비 'Praise You'가 페이크인가요? 전 리얼인줄 알았는데요,,제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뮤비는 BEASTIE BOYS - SABOTAGE 입니다.

맥거핀 2014-06-20 00:38   좋아요 0 | URL
아..그래요? 애니홀 같다는 생각은 못해봤는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물론 이 영화도 어떤 의미에는 참으로 귀여운 영화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시저는 죽어야 한다, 이 영화를 조금 뒤늦게 보셨군요. 네 저도 그 영화가 좋았습니다. 영화라는 것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라고 할까요. 물론 저도 '줄리어스 시저'(라는 희곡)을 책으로 본 적은 없습니다만..

생각해보니 페이크라고 부르기도 좀 그렇군요. 어찌되었건 그 사람들을 데리고 실제로 찍은 것은 사실이니까요. 아무튼 저는 스파이크 존즈의 그 어떤 재기발랄함이 늘 좋습니다. 비스티 보이즈는 정말 오랜만에 듣는 이름입니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요새 뭐하나 싶네요.

아무튼 오랜만에 네오님 덧글을 보니 반갑네요.^^

넙치 2014-06-19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인데, 역시나 글이 살아있어요!
맥거핀님 글 읽으니 제가 영화를 보긴 했나, 하게 되네요.ㅜㅡ

맥거핀 2014-06-20 00:41   좋아요 0 | URL
넙치님 오랜만입니다. 조금 더 성실히 쓰기는 해야 하는데..
넙치님이야말로 항상 많은 영화를 정밀하게 섭렵하시고 늘 좋은 글을 남기시지 않습니까..^^

드팀전 2014-06-19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영화를 대단히 오이디푸스적으로 봤습니다.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상상계가 상징계로 봉합되기 위한 필수 과정같은 것. 테오도르의 사만다에 대한 의존은 일종의 상상계 속의 남성판타지 같은 것에 가까와 보였습니다. 모든 걸 다 들어주고 해결해주는 어머니같은 존재지요. 단 섹스의 문제 하나 남아있습니다. 테오도르의 거세공포가 기묘한 방식으로 해소되고 난 이후, 제대로된 연애가 시작됩니다. 오이디푸스적 섹스는 좌절되어야만 하는게 당연하구요. 그리고 이후 나타나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전화상으로 들리는 그 철학자겠지요- 그는 사만다가 그녀의 사랑을 독차지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비로소 테오도르는 상징질서로 봉합됩니다. 마지막 베란다씬은 지극히 헐리우드적으로 그 과정에 대해 관객에게 안도감을 줍니다. ... 저도 영화를 좋게 봤습니다, 하지만 주로 이 영화와 '사랑'의 본질 같은것을 병치시키는 방식에 모종의 궁정기사식 낭만성이 배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맥거핀님에 대한 이야기는 아닙닏.) 주변에서 이 영화에 대해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주류적 반응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맥거핀 2014-06-20 00:55   좋아요 0 | URL
네..솔직히 그런 생각은 못해봤습니다만, 덧글을 보고 생각해보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아무튼 상상계의 세계에서 주체가 설 자리는 없으니까요. 상징계의 질서로 편입되는 과정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아무튼 주체적 각성은 테오도르나 사만다나 양편 모두에서 동시에 일어나니까요. 근데 아무튼 저는 마지막에 이르러 안도하기는 했지만, 어떤 모종의 불안함이 남아있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비슷한 것을 반복하지 않을까..즉 상징계에 머무르지 못하고 다시 무엇인가가 그들을 미끄러지게 할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 철학자 얘기 하셔서 생각났는데, 저는 과문하여 그 철학자가 가상의 인물인 줄 알았습니다만, 나중에 찾아보니 실제로 계시던 분이더군요(조금 말이 이상하네요). 저는 이상하게도 사르트르를 연상했습니다.-_-

뭐 아무래도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영화이니 사랑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반응들이 안 나올 수는 없겠죠. 물론 너무 한쪽으로만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저도 별로 재미는 없습니다만..

희선 2014-06-19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에 쓸 수 없는 말이 있다니 처음 알았습니다 본문은 못 써도 댓글은 쓸 수 있군요 그런데 음란해서 안 된다는 말이 나옵니까 이 영화가 나올 때쯤 라디오에서 이야기 들었어요(이 영화 이야기는 그런대로 잘 들었는데 그 뒤부터는 제대로 들은 게 없군요 아쉽게도... 지난해에도 영화는 못 봐도, 못 봐도 가 아니고 안 봐도군요 그 방송이라도 잘 들어보자고 했는데... 그때도 조금밖에 못 들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영화전문방송 같은데 그건 아니예요) 남자여서 OS 목소리를 여자 목소리로 했다고 했는데, 만약 저라면 남자 목소리가 아니고 여자 목소리로 할 것 같아요 친구처럼... 여자는 같은 여자라도 그렇게 이상하게 여기지 않기도 하니까요

이 영화 이야기 들었을 때 맥거핀 님은 이 영화 보고 어떻게 쓸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역시 남다르군요 영화를 보여주는 식에 그런 뜻이 있다니 재미있기도 하네요 영화는 아닐지라도 다른 거 볼 때 조금 잘 보도록 해야겠습니다 지금은 이래도 실제 볼 때는 다 잊어버릴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다른 걸로 쓸쓸함이 느껴질 것 같습니다 그래 결국 그렇게 되는 거지, 하는(저는 여전히 꿈을 더 좋아해서)... 어떤 관계든 그때 잘해도 지나고 나면 아쉽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쉬움을 덜 느끼도록 하는 게 좋을 테죠 그런 게 어떤 건지 잘 모르겠지만... 사람은 그런 일을 되풀이하면서 살아가는 거군요


희선

맥거핀 2014-06-20 01:04   좋아요 0 | URL
저도 갑자기 음란 어쩌구 하며 글이 등록이 안된다고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제 글이 음란한 걸 이 양반들이 어떻게 알았지? 하구요. 아..아무튼 그래서 글을 덕분에 꼼꼼이 다시 읽기는 했습니다. 도대체 어디가 걸릴까 하구요. 혹시나 하고 그 부분을 바꿔보니 글이 다시 제대로 올라가더군요.

근데 아무튼 조금 웃겼습니다. 그런 표현을 쓰거나 안 쓰거나 한다고 해서 음란해지거나 안 음란해지는 것은 아닌데 말이죠. 예를 들어 영화에 성기가 등장한다고 무조건 음란한 영화라고 판정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 게 등장해도 아주 건조할 수도 있고, 그런 것 없이도 아주 음란할 수도 있죠.

아무튼 음란 타령은 여기까지 하구요. 희선님 덧글을 보다 보니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자는 여자 목소리로 하는 경우들도 꽤 있겠지만, 아마도 남자라면 남자 목소리로 설정하는 경우는 거의 극소수이지 않을까 하고..왠지 그것이 아마도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무튼 근데 이 영화에서는 그런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별로 의미는 없습니다. 테오도르는 남성이지만, 상당히 여성적이기도 한 캐릭터라서요.

그 마지막 장면은 참으로 쓸쓸합니다. 그들 둘이 모두 헤어지고 난 이후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게 결국 현대인들의 어떤 풍경을 보여주는 듯 하다는 생각도 들어서요. 우리는 누군가가 생기면 혼자가 되기를 바라고, 외로워지면 다시 누군가가 생기기를 바라는 존재들, 그것을 시계추처럼 반복하여야만 하는 존재들로 운명지워진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말씀하신대로 그런 것을 알면서도 반복에 스스로를 내맡길 수 밖에 없는 거겠지요.

2014-06-21 2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6-27 1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웨스 앤더슨, 2014

 

 

(영화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웨스 앤더슨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여러모로 약간은 이상한 영화다. 일단 그 구조면에서 볼 때 이 영화는 삼중의 액자를 가지고 있다. 영화가 시작하면 어느 흉상 밑에 앉아서 한 소설을 읽고 있는 소녀가 등장하는데, 이 소녀가 읽는 소설의 제목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며, 이 소설을 쓴 작가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인 바로 그 흉상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이어서 두 번째 액자, 즉 그 작가 본인이 등장하는데, 그는 의미심장한 화두를 던진다. 그리고 이어서 세 번째 액자로 들어가 그 작가의 젊은 시절로 돌아가는데, 그는 이 소설의 배경이기도 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그 호텔의 주인을 만나 그가 호텔을 소유하게 된 어떤 기이한 긴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그 기이하고도 긴 이야기가 이 소설의 내용이자, 동시에 이 영화의 내용이기도 하다. 영화가 마무리 될 때도 마찬가지인데, 영화는 다시 액자를 거꾸로 밟기 시작한다. 즉 이 기이하고도 긴 이야기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무슈 구스타브(랄프 파인즈)'의 이야기가 끝나면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호텔의 주인장과 그것을 듣고 있는 젊은 작가의 모습이 보인 다음, 다시 이제는 나이가 든 작가의 모습이 보이고, 최종적으로는 다시 흉상으로 돌아와 이제 소설을 다 읽고 소설을 덮는 소녀의 모습과 함께 영화가 끝난다.

 

이것은 사실 조금 이상하다. 왜냐하면 이 삼중의 액자와 영화 속의 본편은 언뜻 아무런 상관이 없어보이기 때문이다. 즉 일반적인 영화에서는 무슈 구스타브와 로비보이 제로(토니 레볼로리)가 바로 등장한다 해도, 이야기의 진행과 마침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니 약간의 액자가 필요하다고 해도, 그 바로 위의 액자, 즉 호텔의 주인장이 작가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액자만 넣어도 될 것이다. 도리어 이 삼중의 액자는 영화의 초반 몰입을 어지럽게 만드는 측면이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런데 왜 웨스 앤더슨은 굳이 이 삼중의 액자를 계획하고 실행했을까. 이것은 군더더기일까, 아닐까. 군더더기가 아니라면 이것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것이 나의 어떤 물음이다.

 

두 번째 액자에서 나이든 작가가 던지는 화두는 조금은 의미심장하다. 작가는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즉 무엇인가를 '창조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작가가 하는 일은 주의깊게 주변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의 하나의 일례로서 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보여준다. 즉 그의 말을 그대로 믿자면, 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라는 소설, 혹은 영화는 그가 '창작한 것'이 아니라, 나이든 호텔 주인장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그대로 옮긴 것에 불과하다. 즉 이 모험이 가득한 기이하고도 긴 이야기는 어떤 허구의 산물이 아니라, 경험의 산물이다. 그런데 사실 영화 속에서 경험의 산물인 이 이야기는 상당히 이상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이야기는 1927년의 주브로스카 공화국이라는 가상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야기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들은 2차 세계대전 기간의 유럽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것은 갑자기 일어나는 외국의 침공이나, 이어지는 다른 나라의 침공, 혹은 내전, 혹은 열차나 호텔에서 등장하는 군인들의 복식이나 그들이 사용하는 마크(이 군인들이 사용하는 번개 모양의 마크는 나치 친위대의 마크를 거의 그대로 따온 것이다) 같은 것들이 불러오는 이미지들인데, 그런 것들은 예를 들어 '부다페스트'라는 실제의 지명에 대한 어떤 역사적인 이야기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즉 영화는 짐짓 1927년의 주브로스카라는 가상의 공간이라는 모양새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 실제의 지명 '부다페스트'는 이미 제목에서부터 떡하니 박혀 있고, 그것은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독일과 소련을 가까이에 둔 이 나라의 운명을 돌이켜 보도록 한다(헝가리는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침공을 하기도 하고 침공을 받기도 하고, 추축국에 가담하기도 하고, 연합국에 가담하기도 하는 등 어지러운 행보를 보였다). 
 
즉 허구의 산물이 아닌, 경험의 산물이란 다른 이름으로 말하자면 역사이다. 역사는 수많은 경험들의 집합체이고, 수많은 작은 사건들의 조합이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무슈 구스타브의 기이한 생애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유럽 역사의 어떤 단면이며, 허구의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역사에 많은 내용을 빚지고 있다. 그것을 어쩌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겠는데, 예를 들어 소설과 역사의 관계 같은 것 말이다. 많은 면에서 소설은 지금까지 역사가 처리하지 못하는 부분들을 감당해왔다. 역사가 년도와 인원들로 가득한 거대한 사건들을 기록하는 사이, 소설은 그 숫자들이 다 이야기해주지 못하는 개인의 세계를 묵묵히 기록해왔다. 그러고보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지난 일들을 역사가 아닌 소설이나 영화와 같은 이야기 속에서 배워왔던가.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혹은 역사가 단 한 줄로 지나가 버린 수많은 사람들을 소설가들은 어떻게 끄집어내어 되살려냈던가.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이 영화에서 삼중의 액자, 즉 소설과 작가라는 이 액자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즉 이 영화의 액자를 그대로 따른다면, 가장 위대한 작가는 위대한 관찰자이며, 동시에 위대한 역사가이기도 하다(웨스 앤더슨은 이 영화의 이야기가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생애에서 여러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밝혔는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2차 세계대전 속에서 큰 영향을 받은 삶을 살아간 작가이면서, 동시에 한 개인의 생애사를 기록하는 전기작가로도 유명하기도 하다. 즉 그 자신이 소설가이면서 역사가였고 역사의 산 증인이었다).

 

다시 말해서 소설은 누군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이면서,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실제의 혹은 가상의 누군가의 삶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며, 동시에 그 누군가의 세계와 그것을 읽는 누군가의 세계를 연결시킨다(즉 가장 바깥의 액자에 있던 소녀와 무슈 구스타브는 전혀 연결될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들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라는 소설 혹은 영화를 통해 연결된다). 즉 그들은 이 이야기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공감을 나눈다. 영화를 보는 우리들도 이 이야기를 통해 무슈 구스타브가 여러 약점을 지닌 사람이기는 했지만, 그대로 미워할 수 없는 아니, 좋은 사람이었다고 믿게 된다. 그것을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이 영화는 결국 전혀 연관되지 않았던 사람들이 연계하여 힘을 얻는 이야기이다. 무슈 구스타브는 평생을 호텔에서만 지낸 외로운 사람처럼 보이지만(그가 혼자 밥을 먹는 풍경을 보라), 그가 결국 위기를 돌파하는 것은 이상한 연대들, 즉 감옥에서의 연대라거나, 호텔 컨시어지들의 비밀의 결사체를 통해서였다. 그리고 그 결과 그와 단 한 가지의 공통점도 없어 보였던 로비보이 제로와 그는 강력한 유대관계를 가지게 된다.

 

이들의 반대편에 있던 것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가족이라는 피의 결사체이다. 마담 D.(틸다 스윈튼)가 죽자, 그의 유산을 받기 위해 몰려든 평소에는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던 가족들, 그의 망나니 아들 드미트리(에이드리언 브로디)와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세 자매. 물론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유럽의 피의 역사에서 말 그대로 피가 야기했던 무시무시한 결과물들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1차 세계대전을 촉발했던 피로 뭉쳐진 가족들의 집합인 제국주의자들의 충돌과 그것에 방아쇠를 당겼던 황태자 부부의 암살, 혹은 히틀러의 광기어린 피의 집착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것까지 나아가는 것은 너무 과장인 것 같고, 단지 그 반대편에 놓인 것들만 말하자. 그것은 무슈 구스타브와 로비보이 제로의 서정시를 통해 이루어지는 교감이고, 아가사와 제로의 시를 통한, 혹은 책을 통한 연결이다(아가사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소녀였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여러 겹의 액자를 통해 그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에게까지 이어진다. 우리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란 소설을 펴든 순간, 우리가 그 넓고넓은 호텔에서 외롭고 좁은 컨시어지의 방 한 가운데에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 소설 속의 인물들과 연결되는 것이다. 바로 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라는 예술품을 매개로 하여 말이다.

 

즉 이 영화에서 이 액자들은 단지 겉멋 든 영화의 사족들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은 말과 글의 힘이며, 말과 글의 어떤 가능성이다. 그것을 웨스 앤더슨은 극단적으로 이렇게 보여주기도 하는데, 그것은 가장 극적인 이야기들을 보여주지 않고 끝내는 것이다. 즉 영화는 극적인 이야기들을 눈앞에서 보여주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즉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말로 설명되는 것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며, 그것은 그 내용들이 비(非)극적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이상하게도 가장 극적일 수 있는 이야기들을 그저 말로 끝내버린다. 즉 주인공을 비통하게 만드는 무슈 구스타브의 죽음이나 아가사의 죽음에 대한 부분을 카메라는 끝내 비추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주인공의 독백, 그리고 주인공의 그것을 회고하는 반응숏으로 끝날 뿐이다. 그것은 그런 부분을 끝내 전시하지 않겠다는 말과 글에 대한 강조이자 영화적 결단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이 영화를 영화가 아닌 다른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여러모로 이상한 영화다.

 

 

 
덧.
이 영화가 여러모로 영화가 아닌 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그 구조나 이야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이 영화의 형식상에 가득한 어떤 비영화적인 요소들, 혹은 과잉이나 강박 때문인데, 이 영화는 묘하게도 영화이면서 영화가 아닌 것처럼 보이기 위해 애쓴다. 예를 들어 그것은 삼중의 액자나 영화를 장의 형식으로 분절시키는 것도 그러하지만, 몇몇 특정의 장면들 예를 들어 그림판을 활용한다거나 미니어처를 이용한다거나 하는 장면도 그러한데, 보통의 영화들과 다른 점은 보통의 영화들은 그림판이나 미니어처를 활용한다고 해도 그것을 최대한 그것이 아닌 것처럼,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 애쓰는 반면에, 이 영화는 도리어 그런 것의 활용을 일부러 보란듯이 드러낸다는 점이다. 또한 구도의 활용이나 카메라 이동에 대해서도 거의 같은 것을 반복하고 있는데, 이 영화는 거의 어떤 화면이든 대칭의 구도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며, 카메라의 이동도 수직, 수평 이동을 주로 활용하고 있다(다만 단조로움을 없애기 위해 가끔 익스트림 클로즈업 같은, 다른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없는 시도를 여러 활용하는데, 이것은 또 한편으로 이 영화를 더 영화가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하기도 한다).

 

문제는 그것이 때로 지나쳐 일종의 강박처럼 보인다는 점인데, 대칭, 동일한 것에 대한 집착은 때로 위험할 수 있다(영화 시작부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내외부의 모습이나 하다못해 영화포스터만 봐도 그 대칭성에 대한 집착이 엿보인다). 나치의 복장에 대한 집착이나 친위대 마크, 하켄 크로이츠의 대칭을 이야기하는 것은 지나치겠지만(사실 대체로 국기나 마크가 거의 대칭이기는 하다), 이 정도는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 속에 등장하는 가상의 미술품인 <사과를 든 소년>이 명작이 될 수 있는 것은 한편으로 그림 속 주인공이 정면을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약간 측면으로 틀고 사과를 한 손에 든 비대칭 때문일 터이다. 지나친 대칭은 보는 이를 때로 압박하며 부담스럽게 한다. 영화로 보았을 때에도 같은 구도의 반복은 결국에는 보는 이를 지치게 만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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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4-04-11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가 50만을 넘는 '대박'을 기록하고 있다는 뉴스를 보았다. 영화의 만듦새도 만듦새지만 그것에는 대진운도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이제 캡틴 아메..같은 것은 그만 나왔으면 좋겠다.

넙치 2014-04-12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영화가 아주 좋은데 왜 좋은지 모르겠어서 두 번이나 봤어요. 그리고도 어떻게 정리할까..생각만하다가 정리 좀 하려고 알라딘 로그인 했는데 맥거핀님 리뷰가 너무 좋아서 뭘 쓰려는 의지가 사라지네요.ㅠㅜ

맥거핀 2014-04-14 15:09   좋아요 0 | URL
어이쿠..이미 좋은 리뷰를 쓰셨던데요. 두번이나 보셨군요. 저는 요새 영화 한 번 보는 것도 어려운데..이 영화는 충분히 두 번 볼 영화라고 봐요. 영화의 내용상으로도로, 그리고 전체적인 형식적인 면에서도 충분히 되새겨볼만한 영화죠.

희선 2014-04-13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중의 액자를 쓴 것은 왜일까를 생각하다니, 저라면 그냥 그런가보다 할 텐데...^^ 영화속 사람들과 그것을 보는 사람도 이어져 있다고 하니, 이 영화를 보는 사람도 영화에 있어야 하는 것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영화를 보는 사람을 보고 있을지도...^^ 아가사라는 이름에서는 애거서 크리스티가 생각납니다(예전에는 아가사라고도 했던 것 같은데...) 본래 영화에는 보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만, 이 영화는 보는 사람을 더 거기에 끌어들이는 듯하군요

말과 글의 힘이라고 하니, 보는 것이 더 실감날 수 있지만 말을 듣고 글을 읽는 게 더 상상하기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중요한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겠죠(갑자기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생각나는군요^^) 한 사람 한 사람은 역사라는 커다란 흐름과 함께 흘러가는군요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작가(감독)가 그런 것을 보여주는군요

이어지지 않는 말을 늘어놓은 듯합니다^^


희선

맥거핀 2014-04-14 15:15   좋아요 0 | URL
아..맞아요. 예전에는 아가사 크리스티라고 했었죠. 예전에 아가사 크리스티 소설들 많이 읽었었는데...그러고보면 이 영화의 내용에서 아가사가 사건해결(?)에 큰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저도 영화를 참 좋아하기는 합니다만, 영화가 소설을 절대 이길 수 없는 부분들이 있어요. 우리가 상상으로 만들어내는 아우라를 영화가 실제로 만들어낼 때 그 아우라들이 많이 깨지잖아요.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들을 볼 때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는 까닭도 어찌보면 당연하겠지요. 예를 들어 자신의 상상이 만들어낸 그 완벽한 주인공을 실제의 배우가 어떻게 커버할 수 있겠습니까. 다 어느 정도는 익스큐즈,하고 보는 거죠.

그럼에도 영화가 저는 또 말과 글이 하지못한 많은 부분을 해냈다고 생각하구요. 개인적으로도 돌이켜보면 참 많은 것을 영화에서 배운 것 같기도 합니다. 역사라는 부분에서 봐도 말이죠.

저도 조금 엉뚱한 얘기를 했네요.

Shining 2014-04-13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를 봤습니다. 아직도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레이프 파인즈의 연기만큼은 흥미롭던데요. 제가 본 상영관에서는 화면비가 바뀔 때 조정을 하지 못해 일부 장면에서 자막이 짤리거나 몽땅한 비율로 바뀌던데 맥거핀님이 보신 상영관은 어땠을지 궁금하네요 :) 보통의 기존 영화관에선 flat과 scope 둘 밖에 맞추지 못하니 어쩔 수 없없을테지 하면서도 그걸 알면서도 이렇게 만든 웨스 앤더슨은 (어쩌면) 자신이 영어권 감독이니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생각까지 들더군요. 회전목마나 고전적인 인형 그림이그려진 틴케이스에 담긴 고급 수제 쿠키. 그의 영화는 제겐 그런 느낌이에요.

덧) 맞아요, 저는 L시네마에서 봤는데 개봉하는 것도 신기했는데 지금껏 상영하고 있는데 좀 놀랐어요. 그런데 미국 대장님이 별로신가요? 저도 영 관심도 없고 잘 모르는데 주변 사람들은 꽤 재밌다고 하던데요. 평도 좋구요(웃음).

맥거핀 2014-04-14 15:24   좋아요 0 | URL
저는 사실 그 화면비에 대해 정확하게 눈치채지 못했어요. 어..뭔가 살짝 이상한데, 라고 느끼기는 했는데, 자세한 건 나중에 다른 리뷰들을 보고 알았죠. 뭐 한편으로는 웨스 앤더슨이 고전영화의 어떤 느낌을 전체적으로 많이 살려내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현대의 영화에서 볼 수 없는 그런 구도나 장면들을 많이 집어넣었던 것이고, 일부러 엉성한 느낌의 장면들을 삽입하기도 했겠죠.

그러니까 제가 영화가 아닌 듯한 느낌,을 받은 건 그만큼 현대영화에 길들여졌다,라는 의미도 되겠죠. 아무튼 그래서 이동진씨던가요..평에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향수던가...그런 내용을 썼던데, 저는 솔직히 약간 갸웃했습니다. 그런 것을 향수라고 불러도 될까..하는 생각이 약간은 들었어요. 회전목마는 저도 경험해보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만..^^

제가 워낙 히어로물을 안좋아하는 것도 있고..사실 좀 지겹지 않나요? 뭐 맨날 그렇게 새로운 악당들이 나오고, 또 왜 그렇게 맨날 결국 히어로들이 이기는지..저에게 영화의 전권을 준다면, 저는 각종 히어로물에 나왔던 악당들이 결국 연합하여 이기는 걸로 끝내겠습니다.;; 저는 이번에 어벤저스 촬영한다고 난리떤 것도 왜 그런건지 모르겠어요. 국내영화는 촬영도 못하게 하면서...새빛둥둥섬이 파괴된다는 것은 마음에 들었습니다만..

Shining 2014-04-15 23:12   좋아요 0 | URL
우연히 맥스무비 매거진을 봤는데(산 건 아니고 카페에 비치되어 있더군요) 웨스 앤더슨 특집이 있더라구요. 오오, 재밌게 읽었어요. 혹시 이미 읽으셨을지도 모르겠지만 꽤 흥미로운 기사였어요. 그의 영화를 많이 본 것도 아니고, 위에도 말했듯이 당최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를 잘 모르겠더라구요. 프로필 부분에 좋아하는 것, 이라고 해놓고 키덜트가 있길래 빵터졌어요. 로알드 달의 영향도 받았다고 하고.

쿡쿡. 악당들이 이겨버리면, 그 다음에 우려먹을(!) 이야기가 없어서 아닐까요? 다음에 두고보자, 크윽.. 해야 또 시리즈가 나와서 돈을 벌잖아요.......킥킥.

2014-04-18 0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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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평가단을 하면서 늘 느끼게 되는 것은 어떤 책이든지 기대치와 다른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이 신간평가단은 책을 스스로 고르고, 어떤 책을 받아서 읽게될 지 미리 알게 된다는 점에서 보통의 독서와도 유사한 점이 있다. 즉 책을 읽기 전에 어떤 기대, 혹은 단정을 은연중에 가지게 된다. 그런데 막상 책을 받아서 읽고나면 그런 기대와 단정이 바스라지는 경우가 많다. 어떤 책은 매우 좋을 것 같았으나 기대에 못 미치고, 어떤 책은 별로 흥미를 가졌던 주제도 아니고, 식상한 내용일 듯 싶었으나 예상외로 매우 좋았던 경우도 있다.

 

이런 예상한 무엇인가가 바스러질 때의 즐거움은 다른 곳에서도 온다. 개인적으로 신간평가단을 하면서 빼놓지 않고 꼭 하는 일 중의 하나는 같은 책을 읽고 있는 다른 평가단 분들의 글을 읽는 것이다. 물론 여기 알라딘의 모든 책들은 대체로 리뷰가 있고, 마음만 먹으면 찾아서 읽을 수도 있으나, 평가단의 경우처럼 같은 책을 거의 같은 시기에 읽는 경우가 그렇게 흔치만은 않고, 또 평가단 분들은 대체로 일정 정도 이상의 독서이력을 지니신 분들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래서 인문 분야의 평가단 분들이 올리는 글들은 (거의 의무적인 마음을 가지고) 빼놓지 않고 읽는 편인데, 읽을 때면 상당수의 글에서 새로운 지점을 발견하고는 한다. 같은 책을 같은 시기에 읽고도 역시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는 기본적인 부분에서도 그러하지만, 많은 그 글들에서 내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지점을 발견하기도 하고, 새로운 사유의 흔적을 발견하기도 하며, 같은 이야기라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는 것을 보며 감탄하기도 한다. 즉 이는 기존의 어떤 (나의) 고정된 사유가 바스러지는 것이기도 하고, 즐거움이기도 하며, 또 배울 점이기도 하고, 자극이기도 하다. 

 

그래서 꼭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그간 나름 고민하며 좋은 글들을 쓰기 위해 노력하셨을 다른 평가단 분들께 고맙다는 말씀, 앞으로도 건필하시라는 말씀드리고 싶다. 그리고 또한 좋은 책을 선정하시기 위해 노력하셨을 평가단 담당자님께도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어떤 분께서 쓰셨듯이 나에게는 (비록 약간의 고민을 주는) 즐거움이지만, 누군가에는 일이었을 터. 성실히 일을 수행해주신 그 누군가에게 고맙다는 말씀 드리고 싶다.

 

 

* 이번 평가단에서 좋았던 책 5권

 

마지막의 고민을 주는 즐거움이다.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나름의 객관적인(?) 수치를 따르기로 했다. 내가 이번 평가단 도서 중에서 별 5개를 준 것은 다음의 세 권이다.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지그문트 바우만

 

바우만의 이 짤막한 글은 경고이자, 호소이며, 선언이다. 그리고 동시에 어느 노학자의 필사적인 시도이기도 하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예언했던 그리스 신화의 예언자 테레시아스는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가 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다가올 파국을 볼 수 있는 혜안을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작금의 우리들은 눈앞에 있는 것에 정신이 팔려 다가올 파국을 결코 보지 못한다.

 

 

 

명작순례 / 유홍준

 

책을 읽으면 잠시 다른 세상이 보이는 책이다. 복잡한 세상을 벗어나 조용한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들어선 느낌이랄까. 유홍준 교수는 친절한 안내자가 되어 그냥 무심히 지나가는 발걸음을 멈춰 세워 예술품들을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게 만든다. 책의 깔끔한 만듦새도 인상적이다.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 류신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보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서울 시내를 배경으로 산책자 고유의 리듬으로 전개되는 일종의 로드 무비. 그가 제시하는 공간에서의 사유도 인상적이지만, 그가 소개하는 수많은 다른 작품들의 조각들, 그러니까 일종의 결정적 씬(scene)들이 독자를 멈칫거리게 한다. 영화 감상의 기본은 공감이며, 공감을 낳지 못하는 영화는 결코 보는 이를 매료시킬 수 없다. 아마도 이 멈칫거림은 산책자 구보에게, 혹은 언젠가 그 앞에서 구보와 같이 맴돌았을 나 자신에게 보내는 공감과 응원의 흔적일 것이다.

 

그 다음으로 별 4개를 받은 것은 총 6권인데, 팬심을 담아 과학과 관련된 책 2권을 고른다.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 로버트 트리버스

지구의 정복자 /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

 

위에서 ‘무엇인가가 바스러질 때의 즐거움’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사실 어쩌면 가장 큰 즐거움은 ‘기대했던 것이 기대한 것보다 더 좋았을 때에 주는 즐거움’이 아닐까. 류신의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이 친밀하지만 낯선 공간 서울을 어떻게 풀어냈을까 기대했었는데(그래서 추천도서 중 1권으로 선정하기도 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더 즐거운 산책이었고, 말 그대로 ‘읽는 즐거움’을 주는 책이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이번 평가단 활동 중에 가장 좋았던 도서로 선정하고 싶다.

 

 

덧.

휴..드디어 마지막 도서에 대한 리뷰를 썼구나..하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이 페이퍼를 써야하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다. 부랴부랴 써서 올린다. 아..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하자면, 이 ‘신간평가단’이라는 명칭을 바꿔보는 것은 어떨까. 조금 딱딱하기도 하고, ‘평가단’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뭘 평가하나...싶어서 참 민망하다. 이왕이면 우리말 이름으로 하나 새롭게 지어보는 것은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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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4-03-06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간평가단' 대신 어떤 이름이 좋을까요?
맥거핀님의 의견이 궁금하네요.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담아갑니다. ^^

맥거핀 2014-03-07 00:56   좋아요 0 | URL
하하..질문을 한 사람에게 다시 질문으로 받아치는 것은 반칙입니다.^^

그런데 저도 막상 생각해보니 마땅한 게 떠오르지는 않더군요.
한 번 생각해보고 생각나는 게 있으면 또 댓글을 달죠.^^
근데 '신간평가단'은 아무래도 좀 그렇지 않나요..? (나만 그런가...)

희선 2014-03-07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분들 글도 다 찾아보신다니 맥거핀 님은 부지런하시군요 같은 시기에 같은 책을 보기 때문이겠지만, 그래도... 자신과 다른 생각을 잘 받아들이시는군요 저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잘 못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아주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달랐을 때는 저런 생각도 할 수 있구나 하는 정도... 어떤 글(책)에서든 배울 점을 찾으려고 한다면 좋을 텐데요

가끔은 나는 왜 저런 생각을 못했을까 하는 때는 있군요 하지만 같은 책을 보고 쓴 글은 거의 안 보기도 합니다 친하게 지내는 분이 우연히 그 책을 보고 글을 쓴다면 모를까, 그래서 같은 책을 보는 때가 적어요 제가 더 늦게 보는 편입니다 그래서 책을 보고 나서 어떻게 쓰면 좋을까 할 때가 있습니다 쓸데없는 말을...^^


희선

맥거핀 2014-03-07 01:21   좋아요 0 | URL
하하..아뇨. 저 위의 글은 그래도 약간 포장을 한 거구요. 물론 위에 쓴대로 인문서평단 분들의 글들은 거의 보기는 하지만, 그렇게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때도 많아요. 어..저 의견은 조금 이상한데..하면서 반박할 거리를 찾아보거나 혹은 책을 다시 확인해보는 때도 있고, 혼자 툴툴거릴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또 그렇게 하면 그것도 결과적으로 다시 한번 책에 대해 생각해보는 거니까 뭐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근데 특히 이번 서평단 분들은 약간 고수 느낌(?) 나는 분들이 많아서 책에 대해서 몰랐던 부분을 많이 배우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소설 부분이나 영화와는 또 달라서 인문이나 사회과학, 자연과학 분야의 책들 같은 것은 어떨 때는 책 그 자체보다 그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다른 글들을 보며 더 많이 배우게 되는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뭐 어떻게 쓰면 좋을까..정해진 건 없으니까요.
다 각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편하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내에서요.^^

희선 2014-03-07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래는 위에만 쓰려고 했는데... 댓글저장을 누르니 바로 위에 맥거핀 님이 쓴 답글이 나타났습니다 언젠가도 그런 일이 한번 있었습니다 그때는 1분 차이였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말을 더해서 몇 분이나 차이가 나는군요^^


희선

맥거핀 2014-03-07 01:24   좋아요 0 | URL
희선님도 아무래도 야행성에 가까우신 것 같군요. 저도 요새는 거의 새벽에 알라딘에 오게 됩니다. 컴퓨터 앞에서 마음 편히 앉아있을 때가 요새는 새벽 외에는 잘 없네요. 예전에는 일 때문에라도 하루종일 컴퓨터 모니터를 보고 있는 때도 있었는데..뭐 그래서 '댓글 조우'를 하는 건 좋지만요.^^

아이리시스 2014-03-13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이제 끝난다, 그럼 이제 소설리뷰 많이 볼 수 있는 건가요? 신난다, 아싸~+_+ (뒤늦게와서 이러고 있다..) 저는 오늘부터 <미시시피 미시시피>를 읽을 거예요. 요즘은 독서가 쫌 뜸하기도하고 책못산지도 한참됐고, 아, 시간없어서 포인트 쌓이는거 오랜만입니다. 좋아요^-^(좋은거맞냐?)

2014-03-15 15: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17 2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18 17: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17 0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18 17: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19 0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20 15: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인을 체포하라]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시인을 체포하라 - 14인 사건을 통해 보는 18세기 파리의 의사소통망
로버트 단턴 지음, 김지혜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2월
평점 :
품절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40년 전인, 1749년 봄의 파리. 의학을 공부하던 프랑수아 보니라는 학생이 경찰이 고용한 첩자의 밀고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의 혐의는 왕(루이 15세)을 비난하는 시를 써서 여러 사람에게 읽어주었다는 것이었으며, 그는 시를 읽어준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자신이 지은 것이 아니며, 그도 누군가에게 전달받았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꼬리를 물고 이어져, 보니를 비롯한 총 14명이 왕을 비난하는 여러 편의 시를 짓고, 유포시킨 혐의로 연쇄적으로 체포되었고, 그들은 대부분 자신이 시를 가지고 있었고, 누군가에게 들려준 것은 사실이나 자신들이 시의 원저자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모두 법학생, 의학생, 철학과정 학생, 성직자, 법률서기 등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보기는 어려웠고, 프티 브르주아이지만 단지 약간의 학식을 가진 보통의 대중에 가까웠고, 경찰이 벌인 일련의 조사에서도 이들이 이 시의 원저자라고 밝혀낼 만한 핵심적인 근거를 찾아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대중들에게 본보기로서 일벌백계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 사건은 이후 이들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은 <시인을 체포하라>의 저자 로버트 단턴이 '14인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단턴은 당시의 경찰 기록 및 여러 문헌을 토대로 이 사건의 의미를 세심하게 추적하며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파리 경찰 당국 및 베르사유의 내부자들은 왜 (어떻게 보면 하찮은) 시를 추적하는 일에 그토록 열을 올렸을까? 왜 이 14인은 대중 속에서 끌려나와 일벌백계의 대상이 되었을까? 이 시들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유통되었을까? 이 시들은 대중 속에 어느 정도로 퍼져나갔으며, 그것은 어떠한 기능을 했을까? 당대의 대중들은 이 시들을 노래하며 어떤 생각을 가졌고, 그것은 그들의 향후의 행동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아마도 이 질문들은 다음의 질문으로 좁힐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사건은 '여론'이라는 것의 탄생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 사건으로 당대의 '여론'이라는 것의 실체를 살펴볼 수 있을까?

'여론'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저자의 논의를 따른다면, 여론에 관한 역사연구에는 두 가지 구분되는 입장이 있다. 하나는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입장으로 여론을 인식론과 권력의 문제로 이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의 입장으로 여론을 이성이 작동하는 공공성을 통한 합리적 결정 도출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이를 저자의 나중의 논의에 비추어 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는데, 하나는 철학적 형태의 여론으로 진실의 확산에 관심을 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형태의 여론으로 의사소통 회로를 통해 유통되는 메시지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p.149). 단턴의 논의는 이 두 가지 모두와 약간은 거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데, 이는 이론적인 논의보다는 경험적인 연구이며, 하나의 실제사건을 놓고 실제의 메시지의 형태와 그 유통방식, 그리고 그것에 대중들에 보이는 반응에 더 관심을 두는 것이며, 그것에서 도출되는 대중의 면모를 조심스레 살피는 것이다. 즉 이 사건에서 단턴이 보는 대중의 면모는 어떤 진실의 담지자이거나 합리적 이성이 작동하는 공공성이 작동하는 무엇도 아니다. 그보다는 더욱 복잡한 무엇, 새롭게 등장하게 된 실체를 가진 수많은 목소리를 가진 힘에 가깝다.

 

어떤 "여론"인가? 그것은 이성의 목소리도 아니고, 모를레와 콩도르세가 채택한 철학의 개념과 멀게라도 닮은 어떤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회적 혼종물인 메르시에의 "대중이라는 분"의 독단적인 명령으로 이제 새로운 리바이어던(Leviathan)과 같다. (중략) 그러나 철학적 이상과 사회적 현실은 결코 일치한 적이 없다. 대중이라는 분은 철학자들이 여론에 관해 논문을 쓰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 대중을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여론조사자들의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말이다. 대중이 언제나 변함없이 동일했다는 뜻은 아니다. 18세기 파리에서 구체제 특유의 대중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이런저런 일들에 대해 의견을 내며 끼어들기 시작했다. 대중은 계몽사상가들이 상상해낸 추상이 아니었다. 대중을 담론적으로 구축하려는 계몽사상가들의 시도에는 터럭만큼의 관심도 없이, 계몽사상가들을 포함해 앞에 놓인 모든 것을 쓸어버린 대중은 거리에서 길어 올린 어떤 힘이었으며, 이미 14인 사건의 시기에도 분명하게 보였고 40년 후에는 멈출 수 없게 된 힘이었다. (p. 155~156)

 

즉 단턴의 논의는 보다 조심스럽다. 역사학자로서 그가 결국 말하는 것은 여론이라는 것의 어떤 거대한 맹아라기보다는 이 사건에서 드러난 초기적 정보사회에서의 대중들의 의사소통체계이며, 불확실한 가설보다는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무엇인가이다. 예를 들어 그는 재빨리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으로 달려가지 않는다. 즉 그는 이 '14인 사건'에서 드러난 대중들의 의사소통체계와 프랑스 대혁명을 단선적으로 연결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가 결론을 내리는 것은 (혁명이라는 것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해도) 18세기 중반의 파리는 시와 노래라는 하나의 효율적인 의사소통체계를 갖추고 있었고, 그것을 통해 대중들에게 어떤 사건과 그에 대해 나돌던 세간의 논평을 전했다는 것이다(즉 이 시와 노래들은 현재의 호외와 비슷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또한, 이는 정보를 전파하고 받아들이는 행위를 통해 대중들에게 일종의 공적 사건에의 개입이라는 공통된 의식을 갖추게 함으로써 '대중'을 형성하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심스러움은 한편으로 이 연구의 방법론이 가지는 한계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책 <시인을 체포하라>는 부록과 주석을 빼면 162페이지라는 그다지 길지 않은 분량이고, 그의 논의 방식과 서술 형태를 볼 때 대중서라기보다는 연구논문에 가깝다. 이 연구논문에서 단턴의 방법론은 방대하고도 다양한 사료에 대한 철저한 문헌연구라고 볼 수 있는데, 사실 이러한 주제에서 문헌연구의 한계는 명확하기 때문이다. 즉 예를 들어 문헌을 통해 당대에 실제로 유통되었던 시나, 그것으로 인해 벌어진 사건의 경과들을 추적하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할지 몰라도, 그것이 실제로 대중들에게 어느정도 퍼져있었는지(페이스북 '좋아요' 개수나 트위터 팔로워 수가 있는 것이 아니다), 혹은 대중들이 어느 정도 그것에 열광하였는지, 혹은 그들이 그것을 듣고 노래하며 어떠한 생각을 가졌는지 정확히 밝혀내기란 어렵다(그에 대한 기록이 있다고 해도 그 기록은 대체로 일반대중이 남긴 것이 아니었다). 하다못해 시와 노래라고 해도, 그것이 정확히 어떻게 불렸는지 알기란 어려운 것이다(악보로 곡조와 가사가 남아있다고 해도, 사실 그것을 어디에서 어떻게 - 음울하게, 혹은 활기차게, 혹은 비꼬듯이 - 불렀는지는 정확히 추론하기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역으로 이 책의 가치는 그 내용적인 부분보다도 그 방법론적인 시도라고 볼 수도 있는데, 단턴은 철저하게 문헌연구에 의존하면서도 그 문헌연구에 다양한 시도들을 가미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경찰기록, 일기, 샹송집, 재판기록, 벽보 등 다양한 문헌을 수집하는 소재적인 면에서, 또는 통계를 내거나, 노래의 변천과정을 추적하거나, 정치적이거나 문학적인 배경을 추론하거나 하는 등의 방법적인 면에서도 그러하지만, 당대의 노래를 실제로 녹음하여 그것을 독자들이 들어볼 수 있도록 배려한 것 등이 그러하다(그 외에도 옮긴이는 이 책 자체가 시집이나 노래책의 구조를 모방하고 있다고 하는데...글쎄?). 물론 이는 단턴의 논의대로, 아마도 당대에 실제로 불렸던 것과는 상당히 다를 수도 있겠지만, 이를 통해 단지 문자로서 시와 노래를 접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구어적 의사소통체계의 일부분을 맛볼 수 있게 해주며, 우리도 그로 인해 이 구어적 의사소통체계의 힘을 다른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게 한다.      

그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는 일부분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단턴의 논의를 따라 이 14인 사건에서 나타난 구어적 의사소통망과 40년 후의 프랑스 대혁명을 무리하게 연결짓지 않는다고 해도,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경찰과 베르사유의 내부자들이 이 '14인 사건' 등을 통해 관련자들에게 일벌백계를 가하는 등 이 시와 노래의 유통과 확산을 막기 위해 애썼지만, 결코 대중들의 입에서 이러한 노래가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의 원저자의 추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원본이나 사본을 없앤다고 해도, 그것의 여러 다양한 변형본들은 계속 대중들에게서 대중들에게로 전파되었다. 문자체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암기와 가창이라는 구어적 형태로서 말이다. 즉 아무리 애를 써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간 이야기와 노래들, 혹은 그 대중들의 비판적이고도 풍자적인 의식 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다. 즉 당시 18세기의 파리는 시와 노래가 지배하는 정보사회였으며, 이는 21세기의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이다(비록 인터넷과 트위터와 페이스북이라는 다른 것이 지배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3세기나 지났지만, 위정자들이 벌이는 행태는 비슷하다. 지난 정상회의 포스터를 둘러싼 사건, 혹은 국정원의 여론조작 사건에서 보듯, 위정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대중의 의사소통체계에 틈입하여, 그것을 조작하거나 부수려 한다. 그러나 대중의 머리와 의식이 남아있는 한, 그 입을 완전히 막아내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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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4-03-03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대나 소재는 좋은데 쉬이 읽히지가 않아서, [고양이 대학살]을 찔끔찔끔 몇개월째 읽고있는걸보면요, 그것보다 이게 더 논문같을 듯하네요. 예전엔 조금 언론, 정보, 대중 이런것들에 관심 있었는데 요새는 별로 없어요. 인문학이랑 다르게 사회과학도서에는 이상하게 별관심이 안생겨요. 희한한 글쓰기방법론인건 분명한듯해요. 그런데 단턴이 계속 단테로 읽히는건 제가 요즘 단테를 읽고 있어서...

잘은 모르지만 여기서도 구어,민담,마더구스이야기 같은 소재들이 보이네요. 암기와 가창..

맥거핀 2014-03-04 00:46   좋아요 0 | URL
<고양이 대학살>을 언제 읽었을까 생각해보니 아마도 그 책 대학 때 과제 때문에 읽었던 것 같아요. 그러고보니 이 책이 참 오래된 책이긴 한듯..아무튼 꽤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어서, 이 책도 조금 재미있으려니 기대했는데, 생각보다는 조금 더 딱딱한 책이었어요. 확실히 논문같은 느낌도 있구요. 근데 또 논문이라고 보기에는 또 특이한 면도 있어요.

아무튼 전체적으로는 나는 할 말만 하겠다, 뭐 그런 인상이랄까..지나친 추론과 섣부른 결론을 상당히 경계하는 듯 보였습니다.

근데..요새 단테는 왜 읽어요? 재미있어요?

아이리시스 2014-03-04 20:28   좋아요 0 | URL
표지보면 이책은 정말 유들유들하고 재미있어보여요. 기대했는데 맥거핀님 리뷰보면서 또 내 생각이랑 달랐구나 했어요. 그렇지만 소재나 주제, 방식면에서 저는 단턴이 괜찮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이런식의 글쓰기라니, 제가 시대사,문화사 좋아해서 그런것도 있고요. 나는 할 말만 하겠다, 좋네요.

그냥 단테 있길래.. 신곡은 어려워서.. 연암서가에서 나온 아우어바흐의 '단테'요. 신곡해석해주겠죠, 단테어떤사람인지 알려주겠죠, 책도 대여중이기때문에 저렴하죠, 여러모로 읽을수밖에 없었........^-^

맥거핀 2014-03-07 00:46   좋아요 0 | URL
저도 '신곡'을 실제로 읽었다기보다는 해설서로 주로 봤는데, '신곡'이 생각했던 것 보다도 훨씬 방대하며, 가치가 매우 큰 작품이더라구요. 아무튼 해설서들을 나름 꽤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근데 아우어바흐의 단테는 모르겠군요. 찾아보니 꽤 최근에 출판된 책인듯 합니다.

네..그래도 소재가 신선해서 기본적인 재미는 있었어요. 당대의 시와 노래들도 나름 재미있는 것들이 많았구요. 예나 지금이나 가장 재미있는 건 누군가를 까는(?) 내용인 것 같습니다.ㅋ

희선 2014-03-04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와 노래가 퍼졌다는 말을 보니, 이정명 소설 《별을 스치는 바람》이 떠올랐습니다 여기에는 감옥에서 책을 돌아가면서 읽는 모습이 나오지만,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겠죠 시와 노래를 사람들이 보고 듣고 생각한 일... 아니 어쩌면 이것은 어느 시대에나 있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조금 달라졌지만 사람 마음은 아주 달라지지 않았으니까요

대중의 힘은 예나 지금이나 큽니다 안 좋은 일을 하는 사람도 더러 있지만 올바른 생각을 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더 많겠죠 위에서 누르려고 해도 누워 있지만은 않을 겁니다 이 말을 하니 김수영 시 <풀>이 생각나는군요^^


희선

맥거핀 2014-03-07 00:53   좋아요 0 | URL
위정자들은 항상 대중들이 아무것도 모르기를 바라지만, 대중들은 과거에도 지금에도 알 건 어느정도 알죠. 다만 알아도 비겁해지거나, 혹은 눈을 감아버릴 때도 있는 것 뿐이죠. 물론 그건 저도 어느정도는 마찬가지겠구요. 어떨 때는 정말 몰라서 못하는 것도 있지만, 알아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확실히 위선적이죠.

그래도 결국 희선님 말대로 사람 마음은 결국 비슷해서 아마도 어떤 발전방향, 혹은 역사라는 것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중간에 어떻게, 얼마만큼 에둘러 가는가의 문제가 있는 것이겠죠. 이 책에서도 직접적으로 연결짓지는 않지만, 결국 이 시와 노래들과 프랑스 대혁명을 완전히 분리시킬 수 없는 것도 또한 사실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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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 문학과 예술로 읽는 서울의 일상
류신 지음 / 민음사 / 2013년 12월
평점 :
품절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당신이 서울에 살고 있다면 한 가지의 실험을 제안하고 싶다. 아니, 아마도 이런 경험은 한번쯤 있을 확률이 높으므로 굳이 실제의 실험을 행하지 않고 사고실험으로 그쳐도 좋다. 그것은 최소한도의 교통비만을 가지고 집을 나가서 이 넓은 도시에서 홀로 하루라는 시간을 보내보는 것이다. 실제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가장 먼저 느끼게 되는 것은 이 넓은 도시에는 참으로 갈만한 곳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거리에는 수많은 건물과 상점과 공공기관과 종교시설과 영화관과 은행과 커피숍과 쇼핑몰들이 있지만, 우리를 반겨주는 곳은 그다지 많지가 않다. 기껏해야 도서관이나 대형서점이나 공원 정도일까. 그러나 도서관은 어서 이 도서관을 하루빨리 떠나고 싶은 수많은 무리 혹은 갈곳 없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로 인해 점령당한지 오래고, 대형서점은 점점 책을 읽을만한 공간들을 없애나가고 있으며, 공원마저도 긴 시간을 보내기에는 적당하지 않다(도심의 공원은 누구나를 위한 공간이라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공원은 누구나를 위한 공간이라고 이야기되지만, 그곳의 출입자격은 여러가지에 의해 암묵적으로 제한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당신이 양복을 차려입고 공원에 장시간 앉아있다면 딱딱한 나무로 된 벤치를 견뎌내는 것보다 누군가의 시선을 견뎌내는 일이 더욱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주머니에 현금을 가득 가지고 있다면 이야기가 꽤 다르다. 각종 다양한 상점에 들어가 이것저것 쇼핑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영화관이나 문화시설에서 좋은 예술작품을 감상할 수도 있으며, 은행에 들어가 VIP고객 대접을 받으며 장시간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커피숍에 들어가 오랜시간 차를 마시며 책을 읽을 수도 있으며, 이도저도 귀찮다면 호텔이나 모텔같은 숙박시설에 들어가 잠을 청할 수도 있다. 즉 이 드넓은 도시 서울의 많은 곳은 출입자격을 명시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규정한다. 아예 돈이 없다면 출입자체가 가능하지 않은 공간도 있고, 어떤 공간들은 출입은 할 수 있되, 어떤 어색함, 빨리 나가줄 것을 요구하는 암묵적인 분위기, 자괴감, 비우호적인 눈초리, 물리적인 불편함등을 견뎌내야만 한다(예를 들어 요즘의 상당수의 은행들은 출입구에 안내원을 세워놓고 번호표도 뽑아주고, 어떤 업무인지도 물어보고 하는데, 그것이 어떤 '서비스'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감시'나 '걸러내기'를 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은행의 편의시설은 그 은행에 돈을 많이 예치한 고객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것이 이 사회에 어울리는 사고방식일 터이다). 다시 말해서 이 출입자격은 누가 결정하는가. 그것은 자본이 결정한다.

 

아마도 그것이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저자 류신, 혹은 그의 분신인 직업과 아내를 갖지 않은 서른 일곱살 룸펜 구보가 서울 거리를 산책하기 위해 발터 벤야민과 소설가 구보씨를 끌고 들어온 이유일 것이다. 이 책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이 자본주의 사회의 잉여 구보가 하루동안 서울거리를 전전하는 이야기이다. 아니 이것을 이야기라도 불러도 좋을까. 작품에 대한 평론과 인문학적 단상과 창작된 소설과 저자의 실제경험이 혼재되어 있는 이 이야기 속에서 구보는 영등포에서 출발하여 경복궁, 서울광장, 롯데호텔, 세운상가, 홍대입구를 돌아 다시 서울의 강남으로 내려가 코엑스몰, 가로수길, 강남역을 거친다음 다시 자신의 본거지로 돌아간다. 즉 그가 돌아보는 곳은 소위 서울의 중심가들이다. 그리고 중심가라는 의미는 이 자본이 만들어내고 스스로 자라고 있는 도시 서울에서 가장 자본이 집약되고 있는 공간들이라는 의미도 된다. 아마도 그것이 발터 벤야민이 등장하는 이유이어야 할 것이며, 이 책이 그저 '서울 프로젝트'가 아니라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인 이유일 것이다.

 

아케이드(arcade)란 "원래 열주(列柱)로 지탱되는 아치형의 천장을 가진 구조물과 그것이 조성하는 개방된 통로"를 의미하는 말로서, 이 책에서는 "유리 지붕이 덮인 상점가를 위시해 유리 돔이 설치된 홀, 상점이 늘어선 지하도, 건물과 건물을 연결하는 지하 통로나 공중 가교, 투명한 차양이 설치된 노상 시설, 유리와 철골로 이루어진 건축물을 지칭하는 광의의 개념(p.11)"으로 사용됐다. 그리고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그의 생애 말년 13년 동안 19세기 초반 '세기의 수도'로 군림했던 프랑스 파리에 등장한 새로운 쇼핑 공간(아케이드)을 미시적으로 탐사함으로서 자본주의의 기원을 천착하려 했으며, 이를 '아케이드 프로젝트'라고 이름 붙였다(저자는 이 책에서 '파사주(passage)'라는 용어가 아케이드보다 더욱 적확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니 이 책은 발터 벤야민의 사상과 개념을 빌어 이 드넓은 도시 서울을 지배하고 있는 다양한 유형 무형의 쇼핑 공간(아케이드)에 서려 있는 자본주의의 면면을 살피고자 하는 시도다. 아니 역으로 말해서 자본이 출입자격을 결정하는 이 서울의 공간들에 기어이 출입자격을 얻기 위해 발터 벤야민을 과거로부터 소환해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필요해지는 것은 발터 벤야민 외에 저자와 사상적으로 동행한 또하나의 인물,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등장하는 1930년대 경성 거리를 하릴없이 산책하는 소설가 구보씨다. 그리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소설가 구보씨라는 인물이라기보다는 그가 벌이는 행위, 즉 '산책'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공간에서의 미덕은 그저 단 두 가지, 즉 그저 빠르게 스쳐지나가거나, 아니면 자본을 소비하며 머무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현재의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공간들은 자본이 없는 자들은 어서빨리 스쳐지나가도록 하고, 자본이 있는 자들은 그들을 이 공간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산책은 이 두 가지에 모두 반하는 행위다. 산책은 조용히, 천천히, 혹은 유유히 공간안으로 들어가 공간 속에서 어떤 사유를 수행한 후 다시 그곳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유유히 빠져나가는 것이다. 그 사유는 개인적인 사유일수도, 공간이 연상시키는 어떤 작품에 대한 사유일수도, 혹은 다른 인문학적 사유일수도 있다. 즉 1930년대 식민지 현실 속에서 생활에 편입되지 않고 문학과 공간을 사유하던 소설가 구보씨와 2010년대 자본주의 현실 속에서 자본과 유리되어 공간에서 문학과 사유를 곱씹는 룸펜 구보는 그런 의미에서 상당히 닮아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이 식민지 현실에, 혹은 자본주의적 현실에 나름의 저항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 완전한 저항이나 급진적인 저항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보다는 양가적인 감정에 가깝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사실 그들은, 그리고 그와 거의 마찬가지인 우리들은 이 현실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 현실의 단물들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즉 예를 들어 아이러니하게도 스마트폰의 정보지상주의, 어떤 인간관계의 단절, 사유의 정지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이 스마트폰을 누구보다도 오래 손에 쥐고 있는 자들이며, 그것을 완전히 손에서 내려놓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각종 고가의 물건들을 파는 유리로 만들어진 진열대가 가득한 지하의 아케이드를 돌아보는 다음의 사유는 어떤가. 아...우리는 그 아케이드에 가면 결국 우울하게 나오게 될 자신을 잘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아케이드로 발걸음을 돌리고마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혹은 어쩌면 산책이 그런 것이 아닐까. 즉 우리가 그 현실을 완전히 거부한다면 굳이 그것을 '돌아보러' 나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케이드는 도취의 공간이자 우울의 공간이다. 아케이드는 지상의 빡빡하고 누추한 현실을 잠시나마 망각시켜 주는 판타스마고리, 즉 요술 환등의 성전이지만, 갖고 싶은 상품을 향한 리비도가 이 상품을 결코 소유할 수 없다는 각성과 꼼짝없이 독대하면서 우울이 생성되는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다. 소설 속 여인은 갈구한다. "저걸 가질 수 있다면, 황실의 여인들이 선택할 만한 저걸 가질 수 있다면, 나도 항성처럼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 것만 같다.(정미경 <호텔 유로, 1203>)" 환상과 현실, 매혹과 각성이 진자처럼 오가는 곳이 아케이드인 것이다. 아케이드의 쇼윈도는 '거리'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투명한 유리 뒤에서 명품의 특권적 지위와 행인 사이의 '거리(距離)'를 유지시킨다. (p.101)


그러나 소설가가 혹은 저자가 이 양가적 감정에 휘둘리는 누군가, 즉 어쩌면 당신을 등장시킨 것은 그를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스스로가 진자처럼 오가면서 이 물신이 지배하는 도시 서울을 기꺼이 걸어가고 있는데 누구를 비판하겠는가. 발터 벤야민이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통해 보고자 하는 것도 그것만은 아니었다. "벤야민은 대도시와 그 속에 매몰된 소비 대중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도 결코 유토피아적 희망을 끈을 놓지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신화된 인간의 욕망이 정치적, 혁명적 실천의 에너지로 전화될 수 있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p.268)" 그리고 저자 역시도 홀로 긴 시간 서울 거리를 산책하고 돌아온 구보와 그를 기다리는 지친 노모에게 작은 위안을 선사한 다음, 어떤 희망들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끝낸다. 그것은 공간에 매몰되지 않고 그곳을 꿋꿋이 산책하고 있는 산책자 자신, 혹은 수많은 '나'들을 긍정하는 것이며, 1930년대의 소설가 구보씨와도 이어지는 것이기도 하며("구보는 좀더 빠른 걸음걸이로 은근히 비 내리는 거리를 집으로 향한다. 어쩌면 어머니가 이제 혼인 얘기를 꺼내더라도, 구보는 쉽게 어머니의 욕망을 물리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작가가 인용한 다음의 문장과도 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희망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 사실은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었는데 걸어다니는 사람이 많아지니 길이 생긴 것이다. (루쉰, <고향>)"

 


덧 1.
사유의 기본은 세심한 관찰이다. 이 책은 적절한 인용도 인상적이지만, 세심하고도 집요한 관찰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구보는 맥도날드에서 고객에게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이 보이지 않는 매뉴얼에 충실히 따랐다. 시장이 반찬인지, 생각보다 맛있었다. 그러나 서둘러 먹을 수 없었다. '패스트푸드'라지만 먹는 과정은 매끄럽지 못하고 지지부진했다. 빵 두 조각이 힘겹게 덮고 있는 고기 패티와 야채 더미를 손에 쥐고 먹는 일이란 여간 힘들고 번거로운 작업이 아니었다. 포장지에 압사당한 야채들이 기필코 틈을 비집고 탈출에 성공하기 일쑤였고, 소스는 노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구보는 포장지 안으로 햄버거를 요리조리 돌려가며 가능하면 토핑을 떨어뜨리지 않고 남김없이 모두 씹어 심키려는 자신의 허기와 맹목적인 식탐에 비애를 느꼈다. 햄버거는 거인 같았고 그걸 감당하기에 자신은 난쟁이 같았다. 구보는 자기가 햄버거를 먹는 것이 아니라 햄버거가 자신을 집어삼킨 것 같은 이상한 기분마저 들었다. 햄버거 속 토마토가 먹잇감을 보고 날름거리는 표독한 독사의 혀 같았다. (p.125)


덧 2.
혹시 어쩌면 누군가 한명쯤은 이 묘사를 보고 한 영화를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정성일의 <카페 느와르>는 거의 이와 비슷한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한다. 그리고 이 영화 역시도 어쩌면 한 남자의 서울 유랑기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다.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것 중의 하나는 주인공 영수(신하균)를 계속 감시하는 것처럼 따라다니는 서울타워이다. 아마도 구보가 드넓은 서울을 돌아보는 와중에도 이 서울타워는 상당부분 그와 함께 했을 것이다. 마지막에 노모에게 돌아가는 것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차이가 있다면 마지막에 이르러 구보는 서울타워에 오르는 반면에, 이 영화에서는 노모에게 돌아온 영수를 여전히 서울타워가 굽어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 영화 <카페 느와르>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비극 버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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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02-28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 첫 문단을 보고 서울에도 갈 만한 곳이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어디선가 서울을 한바퀴 도는 버스도 있다는 말을 본 적이 있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아주 적은 돈으로 도시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듯합니다 산에라도 올라가면 모를까^^

어딘가에 들어가는 데 자격이 필요하다니 조금 우울한 이야기네요 그래도 그런 것에 기죽지 않으면 좋을 텐데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은행,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디나 그런 것은 아니니 다행이기도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희망을 찾기를 바라고 이 글을 쓴 것 같군요 산책은 어디에서든 할 수 있고 생각하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본주의도 막을 수 없는 겁니다 하지만 어딘가에 들어가서 깊이 생각한 적은 별로 없군요 그냥 걸을 때나 이것저것 생각하지, 다음에는 어딘가에 들어가면 한번 잘 살펴보고 싶군요^^


희선

맥거핀 2014-03-03 17:52   좋아요 0 | URL
불성실한 서재에 늘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깍제깍와서 얘기도 나누고 그래야 하는데..많이 늦었네요.

저는 아주 가끔 위의 실험을 실제로 행해보고는 합니다. 뭐 의도할 때도 있고, 의도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된 경우도 있습니다만, 서울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계속 서울에서 살고 있고,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서울 거리를 걷는 걸 나름 즐깁니다.

위에 쓰지는 않았지만, (참 갈만한 데가 없다는 것과) 동시에 느끼는 것은 참 이곳은 빠르게 많은 것이 바뀌는 도시라는 점입니다. 그것도 참 이상하게도 늘 갈만한 곳이 제일 빨리 없어지고는 합니다. 예를 들어 예전에 명동 거리를 돌아다닐 때 사람이 너무 많아서 참 조용한 데가 필요하다 싶으면 가는데가 있었습니다. 명동의 중앙시네마인데, 참 이렇게 조용해도 되나 싶은 영화관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졌지요. 어쩌면 바로 그런 이유때문에 없어진게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꼭 영화관만은 아니고, 서울 거리는 이상하게도 조용한 꼴을 못 보는 듯 싶습니다. 여기 조용해서 참 좋네..하면 이상하게도 요란시끌벅적한 무엇인가가 어느 틈에 들어서 있고는 합니다. 참 왜들 그러나 싶을 정도죠. 그럼에도 아직도 참 좋은 몇몇 군데가 있어서 저는 여전히 서울이 (어느정도는) 좋고요. 앞으로도 가끔은 여전히 산책을 나갈 것 같습니다.

희선님 댓글을 읽다보니 왠지 여유가 조금은 생기는 것 같기도 하네요. 우리 기죽지 말고 살아야겠죠.^^

아이리시스 2014-03-03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2014-03-03 1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03 18: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4-03-03 18:42   좋아요 0 | URL
새로운 형식 실험 아니고, 맥거핀님, 하고 뭐 써야지 하다가 비밀로 해야될 부분있으니 비밀로 쓰자 하고 바꾼 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hining 2014-03-04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글은 언제나 좋지만 이 글 특히 좋네요. 제 마음에도 쏙 드는(응?) 글, 주제이기도 하고요.

요새 몸이 좀 둔해진 듯 싶어 걷는 양을 늘렸는데 걸을만한 길을 갖는 것도 실은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산책 코스가 있는데 한 시간 정도 유령처럼 걷다 오면 미세먼지는 있어도;; 마음은 좀 나아져요. 한 곳에서 오래 살게 되면 반드시 숨은 장소 몇몇은 찾을 수 있고 아직은 나 혼자 바람 쐴 곳이 있다는 것도 안도 될때가 있죠. 산책 코스에 앉아서 책을 읽게 되는 장소가 있는데 거의 앉는 사람도 없고 지나가는 사람도 별 없다보니 날씨가 좋을 땐 간식을 먹거나 헤드폰을 끼고 가만히 앉아있기도 하는데. 말은 안 되도 저는 그게 '제 자리'라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그런 곳들을 찾다보면 가끔 흡연하러 오시는 분과 조우하게 되는 뻘쭘한 상황이.....

맥거핀 2014-03-07 00:33   좋아요 0 | URL
요즘 Shining님 마음에 드는 글들이 늘어가고 있군요. 다행입니다.ㅋ

음..산책코스에 책을 읽을 만한 장소가 있나요? 그것 참 좋습니다. 요즘에는 조용히 책을 볼 수 있는 곳들이 점차 '희귀해진다'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말 그대로 마음 편히 앉아있을 만한 곳이 참으로 찾기 어렵습니다. 말 그대로 '공유지'라고 부를 수 있는 곳들이 점차 없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집 근처에 나름의 산책코스가 있기는 한데, 책을 읽을만한 장소는 없구요. 그저 거리가 그래도 보기 좋고 조용한 편이라서 가끔 나가고는 합니다. 그런데 요새는 참 공기가 너무 안좋아서 잘 안나가게 되는군요.

안 그래도 공기도 안 좋은데, 담배까지 피면...아무튼 흡연자들이 여러모로 민폐이기는 합니다.

감은빛 2014-03-06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의 글은 언제나 좋지만, 이 글은 특히 더 좋네요!
제가 하고픈 말씀을 요 위에 샤이닝님께서 하셔서 한번 더 따라 씁니다. ^^

저 대략 이십년 전쯤에 혼자 서울에 올라와서 여기저기 떠돌아 다녔던 적이 있었어요.
신천(여기서 선배한테 술을 얻어 먹었거든요.) -> 잠실 -> 신촌 -> 종로 -> 대학로 등등
혼자였고, 딱히 할 일이 없었고, 서울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냥 무작정 걸었어요. 이런 저런 생각들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돈이 없으면 머물 공간이 마땅히 없다는 것.
맥거핀님의 멋진 표현들을 읽으며 새삼 깨닫습니다,

맥거핀 2014-03-07 00:4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칭찬은 언제 들어도 늘 좋습니다.^^

저는 태어나기도 서울이고, 대학도 서울에서 다녔고, 일도 서울에서 했고..아무튼 거의 서울을 벗어나 본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서울 거리를 많이 안다고 자부했는데, 점점 또 시간이 흐르다보니 제가 잘 모르는 곳도 참 많더군요. 아무래도 서울에 살아도 늘 가는 곳만 가게 되는 경향이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튼 저자가 책에서 이야기한 장소들은 거의 다 그래도 아는 곳들이라 반가웠습니다.)

요즘에는 시간도 잘 없고, 체력도(...) 없어서 잘 못 그러지만 학교 다닐때는 참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니기는 했던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다 추억이고, 나쁜 기억보다는 좋은 기억이 많습니다. 같이 돌아다녔던 사람들도 생각나구요. 물론 그 때도 돈은 별로 없었지만요. 그래도 젊다는 패기로 그냥 그래도 즐겁게 다녔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실제로 그런건지, 아니면 제가 패기가 없어져서 그런건지 요새는 돈이 없으면 아예 가기가 겁난다고 해야할까요..그런 곳들이 너무 많이 생겨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