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1) 새 달력, 그 열두 장의 의미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활에 필요한 그 어떤 물품도 돈을 지불해야만 얻을 수 있다. 만약 시간도 돈으로 살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남편이 출근시 아내에게, “여보, 회사일이 바빠 오늘 야근을 해야 하니 세 시간만 살 수 있는 돈을 줘. 그러면 야근하지 않고 일찍 퇴근할 수 있어.”라고 말할지 모른다. 고등학생인 아들은 등교시 어머니에게, “엄마, 오늘도 시험공부를 하느라고 밤을 새야 할 것 같은데, 네 시간을 살 수 있도록 돈을 주세요. 다른 친구들도 시간을 다 사 놓았단 말이에요.”라고 말할지 모른다. 이럴 경우, 가난한 부모들은 자식에게 시간을 사 줄 수 없는 것을 가장 속상하게 생각하겠다. 이런 세상에 살지 않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시간은 금이다’라는 말이 있다. 한때 돈으로 뭐든 살 수 있다면 ‘시간’을 사고 싶은 적이 있었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라도록 바쁜 때였다. 정말 시간이 금이었다.


어제 2010년의 새 달력이 내 손 안에 들어왔다. 그 달력 속 열두 장의 365일이라는 시간이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공평하게 주어지는 자본금과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 자본금을 어떻게 써서 어떤 결과를 얻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각자 자신의 몫이다.



시간은 인간의 삶의 좌표를 바꿔 놓는 힘이 있다. 훗날 어떤 이는 보람과 만족으로 살게 만들고, 어떤 이는 후회와 탄식으로 살게 만드는 것, 그것은 ‘시간’이다. 새 달력을 보며 그 열두 장의 의미를 이렇게 풀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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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파란여우님의 "출간기념회"

파란여우님, 책 출판을 축하드립니다. 전 28일자 조선일보 북스면에 실린 것을 보고 알았습니다. 닉네임을 보니 제가 들어온 적이 있는 블로그여서 반갑더군요. 앞으로 좋은 소식 많이 있길 바랍니다. 저도 같은 블로거로서 파란여우님이 블로거의 파워를 보여 주시길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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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잎새 외 하서명작선 23
0. 헨리 지음, 이가형 옮김 / (주)하서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마지막 잎새’를 읽고 - 마음가짐의 신비한 힘


“창 밖을 좀 볼래. 벽 위에 남아 있는 마지막 담쟁이 나뭇잎새를 좀 봐. 바람이 불어도 펄럭이거나 움직이지 않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아, 저게 바로 버만씨가 남긴 걸작품이지. 마지막 잎새가 떨어진 그날 밤 버만씨가 저기에다 저걸 그린 거야.”


이것은 <마지막 잎새>의 마지막 글이다. 독자가 예상 못한 극적 결말의 소설 기법이 감동과 재미를 주며 소설은 끝난다.


예술가촌의 삼층 벽돌건물의 꼭대기에 존시와 수는 그들의 아틀리에를 갖고 있다. 그런데 존시는 심한 폐렴에 걸려 환자가 되고 만다. 창 밖으로 보이는, 담쟁이 덩굴에 붙어 있는 나뭇잎을 세고 있었던 그녀는 담쟁이 잎이 모두 다 떨어지면 자신도 죽을 것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존시는 수에게, 담쟁이 나뭇잎이 사흘 전에는 거의 백 장이나 되었는데 이제 남은 것은 다섯 장뿐이라고 하면서 “마지막 잎새마저 떨어지면 나도 가게 될 거야.”라며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채찍질하듯 매서운 빗발과 격렬하게 몰아치는 바람이 밤새도록 계속되었는데도 여전히 벽돌담 위에 담쟁이 나뭇잎새 하나가 또렷이 남아 있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일층에 살고 있는 화가인 버만 노인이 벽에 그린 그림이었다. 이 노인은 수로부터 존시가 삶을 포기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녀를 가여운 아가씨라 여기며, 어떠한 바람에도 떨어지지 않을 ‘마지막 잎새’를 그린 것이다. 이 그림 덕분에 존시는 “내가 얼마나 나쁜 애였나를 보여 주려고 무언가가 저 마지막 잎새를 저기에 남아 있게 한 것 같아”하고는 살기로 마음먹고 병을 이겨 낸다. 하지만 휘몰아치는 비바람을 맞으며 밤새도록 벽에 잎새를 그리느라 노인은 급성 폐렴에 걸려 죽는다.


나는 이 작품을 여러 번 읽었다. 그런데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달랐다. 처음 이 작품을 읽었을 땐 버만 노인의 아름다운 이웃사랑에 주목하였다. 그 다음에 읽었을 땐 마음을 담은 작은 정성이 생명을 구할 수 있는 큰 선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그런데 최근에 읽었을 땐 존시를 통해서 본, 삶과 죽음을 좌우하는 ‘마음가짐의 신비한 힘’에 주목하게 되었다.


만약 노인의 그림이 없었다면 그래서 그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고 말았다면 존시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그녀는 자신의 마음가짐대로 죽었을 것이다. 마음가짐의 힘은 이렇게 신비롭다. 작품 속 의사는, “그 아가씬 살아날 가망성이 거의 없어요. 희망이라고는 열에 하나밖에 안 된단 말이오.” 그러고 나서 “그 실낱 같은 희망도 본인이 살고 싶다는 의지를 보일 때만 기대할 수 있어요. 사람들이 그렇듯이 장의사 쪽에 줄을 설 생각만 해선 어떤 약을 처방해도 소용없지.”라고 말한다. 소설에서가 아닌 현실에서도 의사들은 암에 걸린 환자의 보호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많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환자의 의지입니다. 병을 이겨 내겠다는 의지가 병을 낫게 합니다.”라고.


마음가짐의 힘이 얼마나 신비한 것인지 잘 알 수 있는, 이야기(구미래 엮음, <행복의 문을 여는 이야기> 중에서)를 하나 알고 있다.


부잣집의 한 노파가 매일 지성으로 절을 찾아 부처님께 불공을 드렸다. “제 나이가 다 찼으니 언제라도 데려가십시오. 나무아미타불.” 이 광경을 매일 지켜보던 동자승이 짓궂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날도 노파는 불공을 드리고 마지막 끝맺음을 하였다. “제 나이가 다 찼으니 언제라도 데려가십시오. 나무아미타불.” 그때 부처님 뒤에 숨어 있던 동자승이 목소리를 가다듬어 위엄 있게 말했다. “그렇게 소원이니. 내 오늘 데려가마.” 이 말을 들은 노파는 그 자리에서 그만 죽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 내가 마음의 영역에 신비한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학창시절이었다. 중학교 체육시간에 ‘철봉 매달리기’라는 것을 하였다. 철봉에 턱걸이한 자세로 최대한 오랫동안 매달리는 운동이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철봉에 오래 매달려 있으려고 노력해도 되지 않았다. 삼십 초 동안 매달려 있어야 만점을 받는 것이었는데 겨우 몇 초 동안 매달리고는 몸이 곧 땅으로 떨어지곤 하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것으로 시험을 보는 날엔 만점을 받았던 것이다. 그 당시 내가 삼십 초 동안이나 철봉에 매달려 있었다는 건 기적 같은 일이었다. 점수를 잘 받아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강하게 작용했던 결과다. 아마 철봉 밑에 사람을 해치려고 으르렁거리는 짐승들이 있다면 인간은 초인의 힘을 발휘하리라.



“돈을 벌기 위해 노동이 일상 생활이 되어 버린 내 인생은 지겹다.”라고 말하는 사람과, “노동 자체에서 행복하고, 노동의 결실에서 행복하고, 그리고 노동한 뒤의 휴식에서 또 한번 행복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렇듯 똑같은 조건에서도 각기 다른 얼굴로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마음가짐의 차이일 것이다.


“바다보다 더 장대한 것은 하늘, 하늘보다 더 장대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말한 V. 위고의 말이 생각난다. 한 생명의 얻고 잃음의 큰 문제도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고 할 때, 마음가짐의 신비한 힘의 영향을 받지 않을 일이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잎새를 보며 자신의 마음가짐에 따라 죽음과 삶을 오갔던 존시의 모습에서 우리의 마음가짐에 따라 천국에서 살 수도 있고, 지옥에서 살 수도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위안이 되지 않을까. 인생의 행복과 불행이 우리의 재산에 따라 혹은 사회적 지위에 따라 좌우되기보다 마음가짐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더 낫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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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칠근 2009-11-22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돌지 않는 풍차... 그림이 시원합니다.

페크pek0501 2009-11-22 16:2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예전엔 며칠에 한 번씩 배경사진을 바꾸곤 했는데, 이보다 더 좋은 게 없어 그냥 풍차 있는 풍경으로 고정하게 됐어요. 이 그림, 정말 맘에 들어요.
 


<생활칼럼>


그냥 지나친 적은 없는가


며칠 전(10월 5일) 일간 신문에 한 아파트에서 홀로 살아온 81세의 노인이 숨져 있는 것을 그의 딸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는 기사가 났다. 딸은 직장 때문에 어머니와 떨어져 살다가 추석을 맞아 뵈러 와서 노모의 시신을 보게 된 것이다. 경찰은 시신의 부패 정도로 보아 2개월 전에 숨진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하였다.


이와 비슷한 사건은 그동안 많이 있어 왔다. 혼자 사는 ‘기러기 아빠’가 죽은 지 한참 지나서야 사람들에게 발견된 적도 있다. 이런 일들의 원인을 여러 측면에서 볼 수 있지만, 건조하고 삭막한 현시대 삶의 한 단면을 보는 듯싶다.


프란츠 카프카 저, <유형지에서>라는 소설이 있다. 유형지로 새로 부임한 신임 사령관의 초대로 탐험가가 유형지에 오게 된다. 사령관이 탐험가를 초대를 한 것은 이곳에서 집행되는 사형방식이 너무 비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에게 자문을 얻어 이곳의 처형제도를 개혁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이 탐험가에겐 그만한 영향력이 있었다.


이곳에 끌려온 죄수는 야간 보초를 서다가 잠이 들었다는 것과 이를 상관에게 들켰는데도 사과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불공평하게도 죄수에게는 어떠한 변명을 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고 단지 판사인 장교의 독단적인 판결로 사형이 집행된다. 장교는 이 사형 집행에 찬성하는 사람인데, 여기서 사형 집행이란 뾰족한 바늘이 죄수의 등에 죄명을 새기는 그런 기계 속에서 죄수가 죽어가는 것. 그것도 12시간 동안이나 고통스런 고문을 받다가 죄수가 죽게 되면 그를 구덩이 속으로 처넣는 것이다.


탐험가는 이곳 유형지의 비인간적인 제도와 비인간성에 대해 마음속으로는 반대하면서도 그것에 대해 침묵한다. 자신은 유형지의 주민이 아니므로 나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 옳은지 판단할 줄 알면서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고 방관자적 입장을 취한다. 남의 일이라며 관심을 갖지 않는 이런 탐험가의 모습은, 홀로 사는 사람이 싸늘한 주검이 되어서 부패될 때까지 몰랐던, 이웃에 무관심한 우리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초라한 오두막에 가난한 부부가 살았다. 남편은 성실한 어부이지만 다섯 명의 자식들이 먹을 빵조차 넉넉하지 못한 가정형편이었다. 어느 날 “고기는 한 마리도 못 잡았소.”하며 돌아온 남편에게 아내는 “우리 이웃 여자가 죽었어요.”하고 말한다. 죽은 여자는 과부였고 역시 가난하였다. 이어서 아내는 어젯밤에 죽은 것 같고 어린 두 아이를 남겼다고 덧붙인다. 아내는 직접 그 과부의 집에 가서 그녀의 시체를 보았던 것이다. 과부가 죽었다는 말에 남편은 “저런! 저런!” 그러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우리에게 아이가 다섯인데, 그렇다면 일곱이 되겠군. 저녁은 가끔 먹게 되겠군. 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참! 낭패로군!”하고 말한다.


그런데 아내는 과부의 시체가 있는 그 집에서 나올 때 무엇을 가지고 나왔었다. 무엇을 훔친 것이다. 그것을 남편에게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몰라서 가슴이 뛰고 걱정이 되었다. 그것을 모르는 남편은 그 애들이 죽은 사람 곁에서 무서워하고 있을 거라며 그 애들을 데려다 키우자고 말한다. 그런 남편에게 그녀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커튼을 젖히며 답한다. “자, 그 애들이 여기 있어요!” 그녀가 훔친 것은 바로 고아가 된 아이들이었다. 아내도 그 가여운 애들을 키울 생각으로 이미 자기네 집에 데려다 놓은 것이다. 이것은 빅토르 위고 저, <가난한 사람들>이란 작품이다.


타인에 대한 가장 큰 죄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불의에 대해 저항할 생각은 하지 않고 담담하게 보아 넘기는 무관심. 또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이웃의 불행에 관심이 없는 무관심. 이런 무관심은 사회를 해치는 ‘악’이 아닐까.


어느 집에 화재가 발생한 것을 보고도 귀찮다는 이유로 그냥 지나친 적은 없는가,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집 잃고 울고 있는 어린애’를 보고도 바쁘다는 이유로 그냥 지나친 적은 없는가, 이웃에서 불길하고 수상한 울음소리를 듣고도 남의 일이라는 이유로 그냥 지나친 적은 없는가, 나는 나에게 물어 보았다.


내가 인정 메마른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나는 가해자일 수도, 피해자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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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과 관련한 책들


프란츠 카프카 저, <유형지에서>

빅토르 위고 저, <가난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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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의 구절>


                        왜 안경 쓴 신부는 없을까



요즘 안경 쓴 여자가 예뻐 보인다는 김용건 씨


며칠 전, 한 일간지 사이트(chosun.com)에서 ‘안경 쓴 여자’에 대한 글을 보았다. 탤런트 김용건 씨가 쓴 글이었다. 그는 안경 쓴 남자는 멋있는데, 안경 쓴 여자는 별로더라, 하는 얘기를 사람들로부터 종종 들었다면서 자신도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요즘은 안경 쓴 똑똑한 여자들이 예뻐 보인다는 것이다. 여성들이 듣는 앞에서 ‘똑똑한 여자는 싫다’라고 말하는 남자들이 답답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흔히 드라마 속에서 똑똑하고 못생긴 여자의 배역에 안경을 쓰게 하는 경우가 많다. 여자주인공이 미모의 여자임을 나타낼 땐 절대 안경을 씌우지 않는다. 이것은 은연중에 사회적으로 유능하고 똑똑한 여자는 얼굴이 못생겼음을 나타내고, 안경은 그런 전달을 위한 소품임을 보여 준다. 그러면서 안경이 주는 이미지를 시청자들에게 세뇌시킨다.


내가 안경에 대한 시각을 교정한 것은 순전히 딸 덕분이었다. 딸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시력이 나빠 안경을 쓰게 되었는데, 난 그 일에 무척 속상해 했다. 그런데 만약 안경을 쓰게 된 게 딸이 아니라 아들이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가정해 보니 그건 속상할 것 같지 않았다. 여기서 난 충격을 받았다. 나 역시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 또한 남자는 안경을 써도 괜찮고 여자는 안경을 쓰면 약점이 된다는 사회통념에 물들어 있었던 셈이다. 남자는 외모보다 경제적 능력을, 여자는 능력보다는 외모를 중시하는 사회인습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말이다.


웨딩드레스 입고 안경 쓴 신부는 없다


안경은 학구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하는데, 우리 사회는 학자적인 남성을 선호하는 반면에 학자적인 이미지의, 안경 쓴 여성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결혼식장에서의 신랑과 신부의 모습은 이를 증명한다. 안경 쓴 신랑은 흔히 볼 수 있는데 안경 쓴 신부는 찾아보기 어렵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안경을 썼다면 아마 화젯거리가 될 게 분명하다. 딸아이의 안경 건으로 내가 속상했던 것도 ‘여자’가 안경을 써서 어떡하나 하는 것이었다. 먼훗날 결혼적령기의 딸이 안경으로 인해 약점이 있는 신붓감이 될까봐서 염려했던 것.


여자는 후천적으로 길들여진 여자로 존재


일찍이 보부아르는 <제2의 성>이란 저작에서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들여지는 것이다.”라고 설파하였다. 그녀는 남성이 씌운 ‘여자다움의 굴레’를 단호히 거부하며, ‘남녀 차이는 생물학적 차이가 아닌 사회적ㆍ문화적 영향의 결과’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미국의 흑인문제가 따지고 보면 백인문제이듯이, 여성문제도 실상은 남성문제”라는 그녀의 주장을 ‘안경 문제’에 대입해 보면, 안경 쓴 여성에 대한 부정적 시선은 결국 남성의 잘못된 인식이 만든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잘못된 인식에 의해 안경을 쓰는 여성이 안경 쓰지 않는 여성보다 좋지 못한 신붓감이라는 생각이, 사회적으로 또 후천적으로 만들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세상은 많이 변했다. 예전의 20대 여성들은 ‘시집만 잘 가면 된다’라는 말을 많이 듣고 살았지만 이젠 거기에다 ‘취업도 잘 해야 된다’라는 말이 추가된 지 오래다. 이젠 반반한 얼굴만이 여성의 경쟁력인 시대는 지났다. 남성들도 배우자감으로 여성을 볼 때 여성의 직업에도 큰 관심을 갖고 유능한 여성을 만나 맞벌이 부부로 살기를 희망하는 추세다. 여성에 대한 이상형이 바뀐 것이다. 그러니 여성을 보는 시각도 ‘똑똑한 여성이라 싫다’가 아니라 ‘똑똑한 여성이어서 좋다’로 바뀌어야 한다. 그렇다면 안경 쓴 여자에 대한 인식도 자연히 변해야 한다.



요즘 컴퓨터와 텔레비전으로 인해 시력이 나빠져 안경 쓴 학생들이 많다고 한다. 그 중의 반은 여학생들이다. 이들이 미래에 안경으로 이해 어떤 불이익을 받는다면 그건 불공평하고 불행한 일이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는 지금과 달랐으면 좋겠다. 안경 쓴 여자도 안경 쓴 남자처럼 학구적으로 보여 전혀 약점이 되지 않는 세상이 되기를, 그리하여 결혼식장에서 안경을 쓰고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를 흔히 볼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기대한다. 내가 너무 큰 걸 바라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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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2003년에 ‘안경 쓴 여자’라는 수필을 쓴 적이 있습니다. 위의 글 중 일부가 그 수필의 글과 중복되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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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과 관련한 책들의 구절


<1> 프랑스의 페미니즘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들여지는 것이다.”

“남녀 차이는 생물학적 차이가 아닌 사회적ㆍ문화적 영향의 결과에 불과하다.”

“미국의 흑인문제가 따지고 보면 백인문제이듯이, 여성문제도 실상은 남성문제이다.” - 시몬 드 보부아르 저, <제2의 성> 중에서 - 

 


 

 

 

 

 

 

 

<2> 영국의 페미니즘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자기만의 방과 돈이 필요합니다.”

“왜 남자들은 포도주를 마시고 여자들은 물을 마시는가? 무슨 이유로 남성은 그렇게 부유하고 여성은 그다지도 가난한가?”

“여덟 명의 아이를 길러낸 유모는 만 파운드를 번 변호사보다 세상에서 더 가치 없는 인물일까요?” - 버지니아 울프 저, <자기만의 방> 중에서 -  




 

 

 

 

 

 

 

<3> 미국의 페미니즘

“우리가 사는 사회는 여성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보다는 ‘왜 당신같이 좋은 여자가 결혼을 안했죠?’하고 묻는 데에 더 관심이 있다. 그래서 여성들은 신중한 태도로 살려고 하고 싶지 않게 되며, 또 그렇게 격려 받지도 못한다.”

“여자가 의식화되고 권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이 남성에게는 불리한 것이 아니다. 서로 인간이 되어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남편과 아이들과 가정에 대한 헌신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남성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나쁜 원칙과 싸운다.” - 베티 프리단 저, <여성의 신비>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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