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실로 짠 그녀의 숄은 저녁 때면 마치 바람 없는 날의 깃발처럼
베로치카의 어깨에 시무룩하게 걸쳐져 있었으며,
낮에는 현관의 남자용 장화 옆이나,
늙은 고양이가 내키는 대로 퍼져 자는
식당의 궤짝 위에 구겨진 채로 놓여 있었다.
이 치마의 주름과 숄에서는 한없는 느긋함과 가정의 평화,
그리고 안온함이 배어나왔다.
아그뇨프가 베라의 단추 하나하나, 주름 하나하나에서
따뜻하고 편안하고 단순한 무언가를 읽을 수 있었던 까닭은
아마도 그녀가 마음에 들어서였을 것이다.
그것은 진실되지 않거나 아름다움에 둔감한 차가운 여자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선량하고 시적인 그 무엇이었다.(94쪽)

 

 

 

그러한 그녀가 막상 사랑을 고백하자 그는 반기기보다 난처해한다. 

 

 

 

무엇보다도 난처한 것은 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는 상황이었다. 대놓고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용기는 없었고, 그렇다고 <네.>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자신의 마음속을 아무리 헤집어보아도 사랑의 불씨 비슷한 것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105쪽)

 

 

 

그 이유를 말하자면 이런 것이라고 체호프는 쓴다.

 

 

 

그는 솔직하게 시인했다. 그것은 영리한 인간들이 종종 과시하는 그런 이성적인 냉담함도, 자아도취적인 바보의 냉담함도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영혼의 무기력, 아름다움을 깊이 지각하지 못하는 무능력일 뿐이며 또한 빵 한 조각을 얻기 위한 지저분한 싸움과 독신의 하숙방 생활, 그리고 교육이라는 미명 아래 얻어진 조로증에 다름 아닌 것이다.(109쪽)

 

 

 

- 안톤 체호프, <체호프 단편선> 중 ‘베로치카’에서.

 

 

 

 

 

 

 

 

 

 

 

 

 

 

 

 

 

 

 

 

 

 

(첫 문단은 한 편의 시를 읽는 것 같아서 책과 다르게 내 마음대로 줄 바꾸기를 해서 옮겼다. 체호프의 문장을 함께 감상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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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혹은저녁에☔ 2017-03-19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놓고 방치 상태인데 읽어봐야 겠네요

페크(pek0501) 2017-03-20 13:54   좋아요 1 | URL
반갑습니다. 님처럼 저도 그런 댓글을 쓴 적이 여러 번 입니다.
사 놓기만 하고 읽지 않은 책이 있는데 누군가가 그 책에 대한 관심을 갖게 만들어 주는 글을 올렸을 때이죠. 그럴 때 무척 반갑죠. 왜냐하면 내가 갖고 있는 책이라서 집에서 바로 들춰볼 수 있으니까요. 책을 사 놓으면 좋은 이유죠.

좋은 하루 되세요.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