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아버지가 재작년 여름에 돌아가셨으니 벌써 두 해가 바뀌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2주일 가까이 병원에서 폐암으로 고통스러워하시다가 돌아가셨다.
그녀는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해서 임종하기 직전까지 아버지를 간호하며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들은 병원에서 보낸 그 시간들이 없었다면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것들 중 하나가 ‘임종하기 직전에 왜 고통이 필요한가?’에 대한 것이다.
지금도 그녀의 어머니는 말씀하시곤 한다. 아버지가 병석에서 꽤 힘들어 해서 (떠나지 말라고) 붙잡을 수도 없었다고. 그녀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게 허전하다가도 병석에서 힘들어 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면 ‘잘 돌아가셨다.’고 생각하신단다. 그녀 역시 그렇게 생각하며 위안을 받는다. 지금까지 아버지가 병석에서 괴로워하고 있다고 가정하면 끔찍하다. 이처럼 고통이 있음으로써 오히려 유가족이 슬픔을 조금 덜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임종하기 직전의 고통이 필요한 게 아닐까 그녀는 생각했다.
고통이 필요한 이유는 또 있다. 만약 점점 죽음을 향해 가는 환자가 고통을 하나도 느끼지 않는다면 그 환자는 죽기 싫을 것이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떨 것이다. 이 세상을 하직하는 것이 아쉬워 몸부림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몸이 아파서 괴로워하다 보면 ‘그만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삶을 포기하게 될 터. 그래서 임종하기 직전의 고통이 필요한 게 아닐까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므로 환자의 육체적 고통은 죽게 될 환자와 남게 될 가족의 정신적 고통을 덜기 위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낼 수 있다.
병석에 누워 있는 아버지를 보며 그녀는 이런 생각도 했다. 만약 내가 죽음을 앞두고 고통받는 환자라면 하늘을 향해 이런 기도를 하게 될 것 같다고. “제발 고통 없이 죽게 해 주세요.”라고. 그런데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으려면 사는 동안 죄를 짓지 않고 살아야 할 것 같다고. 죄 많은 사람의 기도는 이뤄지지도 않을뿐더러 기도할 자격도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누구나 고통 앞에선 두려움이 생겨 어쩔 수 없이 나약해지고 겸허해지는 인간의 모습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고통이 없다면 인간은 죄로 인해 받게 되는 벌조차 두려워하지 않게 되리라. 고통이 필요한 이유다.
임종하기 직전에 왜 고통이 필요한가? 이에 대한 답을 이렇게 정리해 봤다.
첫째, 유가족의 슬픔을 덜기 위해 환자의 고통이 필요하다.
둘째, 환자가 삶을 포기하는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해 환자의 고통이 필요하다.
셋째, 죄로 인한 벌을 두려워하게 하기 위해 환자의 고통이 필요하다. (고통 속에서 죽어 가는 환자를 봐야 죄를 짓고 않고 살려고 노력할 테니까.)
이게 맞는지 맞지 않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여기까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