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54호 - 2008.봄
문학동네 편집부 엮음 / 문학동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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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최근 본 국내 문화이론 중 가장 탁월하다고 생각되는 김홍중, 심보선 선생의 '87년 이후 스노비즘의 계보학' 중 일부를 옮겨 본다. / 지난 이십여 년 동안 한국사회에서 발생한 문화변동의 지배적 경향을 우리는 '탈진정성 체제(post-authencity regime)'의 부상이라 명명한다. 그것이 체제인 한, 시기적 구분에 있어 연대기적 절단은 큰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삶의 일반적인 감각, 문화적 실천의 주된 패턴들의 변화, 새로운 감수성의 부상과 낡은 감수성의 퇴조, 징후들의 발생, 그들에 대한 해석들의 발생, 주체 형성과정의 새로운 경향 등의 무수한 차원들을 모두 포괄하고 있는 문화적 지층에 새겨진 일종의 단절의 감각이다. -367쪽

진정성이란 인간이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삶의 준거를 찾고자 하는, 매우 근대적인 삶의 태도이다. 진정성의 에토스 속에서 주체는 자신의 정체성과 자기 삶의 궁극적 의미를 외재적 도덕률과 권위, 기계적 척도로부터 구하지 않는다. 그는 외부의 지침을 의심하면서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인다. -367쪽

진정성 에토스는 이처럼 내면성-문화-공동체의 세 가지 상보적이고 갈등적인 요소의 개념적 성좌로 정의할 수 있다. 내면은 문화를 매개로 공동체를 품고 있으며, 공동체는 다시 문화를 매개로 내면성 속에서 구현된다. 중요한 것은 이 매개의 고리를 구성하는 문화의 역할과 내용이다. -368쪽

원래 진정성의 기획은 무엇보다도 '자아의 기획'이다. 공동체는 성찰적 주체가 선택하고 개입하고 풀어내야 하는 하나의 수수께끼로서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민족주의적 문화의 프로젝트에서 이같은 자아의 기투(engagement)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공동체는 자아의 외부에 실체로서, 물신으로서 선험적으로 '현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유신정권과 이를 계승한 80년대 전두환 정권의 민족주의적 진정성 프로젝트는 비록 그것이 민족의 웅비나 민족문화의 창달에 대한 진정한 지향을 연기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기만에 불과했다.더구나 이들의 기획은 진정성의 또다른 주요한 원리/를 위반하고 있었다. 즉, 거기에는 민족 구성원의 내부의 '평등한 존엄'이라는 윤리적 원칙이 결여되어 있었다. 경제적 부와 사회적 위신의 불균등한 분배는 평등한 존엄의 원칙을 허상으로 만든다. -371~372쪽

스놉의 에토스, 즉 스노비즘(snobbism)은 진정성의 참된 안티테제이다. 타자를 짓밟으면서 영예롭고자 하는 자, 인정받기를 갈구하지만 자신은 결코 타자를 인정하지 않은 스놉은, 진정성의 인간의 변증법적 대당으로서, 진정성의 구조를 '형식적으로' 공유한다. 환언하면 스놉에게도 내면성-문화-공동체의 삼각형이 존재하며, 스놉 역시 세계와 불화한다. 그는 세계 속의 자신의 위치에 대해 강력한 불만을 갖고 있으며, 자신이 진정으로 속할 곳은 다른 자리, 다른 공동체라고 믿는다. 스놉은 개성을 가꾼다는 명분하에 자신의 내면성에 집착한다. 강박적으로 문화적 기호들을 축적하고, 이 과정에 지나친, 엄밀하게 말하자면 과시적인 엄숙함과 의미를 부여한다. 스놉은 교양인보다 더 교양인처럼 보인다.그러나 그의 교양은 그를 성숙시키는 대신 그의 과시적 차원으로 활용될 뿐이다. -372쪽

스노비즘을 구성하는 삼각형은 서로가 서로에게 닫혀 있다. 내면에 공동체의 목소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공동체는 오직 무자비한 인정투쟁의 공간일 뿐, 주체의 윤리적 지평과 융합되어 있지 못하다. 스놉의 세계는 가능성과 타자성으로 충만한, 그리고 그곳을 주파하면서 스스로의 참된 자아를 모색하는 여행의 공간이 아니라, 그 자신이 계산하여 하나씩 쓰러뜨려 점령해야 하는 일종의 작전공간이다. 더 나아가 세속적 지위상승에 대한 맹목적 열망은 초월적 가치에 대한 윤리적 고려의 가능성을 경색시킨다. 진정성의 기획이 결코 현실화될 수 없는 이상의 불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면, 스놉의 기획은 그와 반대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천박한 낙관주의에 기초한다. 그에게 불가능은 없다. 다만 비교와 질시와 질투의 고된 노동이 있을 뿐이다. -372쪽

현실의 야만성은 대학생들에게 헤겔이 말하는 '비천한 의식'을 불러일으켰으며, 그것은 운동으로의 투신, 위악, 주관주의, 소시민적 삶으로의 자발적 투항 등 다양한 양태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대학사회 그 어디에도 스노비즘의 천박성은 발붙일 수 없었다. 부르주아적 취향, 성공담, 소영웅주의, 과시소비 등은 터부시되었다. 그러나 진정성이 있는 곳에는 스노비즘이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면, 이 시기 스노비즘은 진정성의 문화가 발휘하는 압도적 헤게모니 속에서 소멸한 것이 아니라 단지 억압되었으리라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억압된 것은 반드시 회귀한다. 그리고 이 억압된 것과의 대화가 부재한 도덕적 엄격성의 문화는 억압된 것의 회기 윞에서 너무나 허무하게 붕괴한다. -374쪽

스노비즘은 거대서사의 체계, 즉 대타자의 소멸이 남긴 의미론적 폐허를 재구성함으로써 아직 매장하지 못한 그 대타자를 문화적 작위를 통해 추모하는 일종의 상징적 애도의 한 형식이다. 이 점에서 탈진정성 체제의 스놉은 진정성 체제의 정치적 스놉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진정성 체제의 스놉은 살아 있는 실제적인 권력과 힘의 원천에 귀속되거나 그것들을 표상하는 상징의 점유를 통해 '확실한' 인정을 받고자 했다. 반면 탈진정성 체제의 스놉은, 그런 실제적 힘으로부터 절연된 가상의 형식화된 문화의 파편들을 수집하고, 배열하고, 파괴하고, 재배치하는 유희적 활동을 통해, 사라진 대타자로부터 '허무한' 인정을 받고자 노력한다.-376쪽

이념의 시대, 운동의 시대, 민주화의 시대가 끝난 후 우리에게 열린 것은 이러한 문화적 스노비즘의 시대, 즉 애도의 시대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부상한 것이 바로 '취향'이라는 감각적 실체였다. 역사의 썰물이 빠져나간 거대한 무의미한 공간 속에서 포스트 386세대는 취향의 형성과 조련을 통하여 자신의 내면을 구성하려 하였다. 이 세대에게 '자기답게 산다'는 것은 취향을 가진다는 것이었고 취향은 또한 영예로운 것으로 여겨졌다. 이때 그들이 고민하는 그 취향이란, 사회가 요구하는 표준적인 인간상과 자신의 개성 사이에 얼마나 큰 괴리가 존재하는지를 타인들에게 호소하기 위한 상징들을 획득하는 도구로 기능하였다. 이렇게 자기애적으로 확장되고 부유해진 자아의 존재론적 빈곤을 채울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 바로 문화적 스노비즘과 이를 물질적으로 지원했던 소비문화산업이었던 것이다. -376쪽

기호의 소비를 통해 세계와의 불화를 상상적으로 전유하는 문화적 스노비즘은 90년대 이후 전개된 학생운동, 여성운동, 성적소수자운동에도 그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 운동들은 주변화되었던 정체성의 존엄과 그에 대한 인정을 요구함으로써 사회적 소통과 연대의 확장이라는 진정성 기획의 지향을 계승했다. 그러나 이들은 80년대의 운동과는 달리 정당성의 위광을 쉽게 확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들은 자신에게 부과되는 스노비즘의 혐의와 싸워야 했다. 환언하면, 이들은 '차이'라는 기표를 특권화하여 사회와의 불화를 조장한다는 분리주의의 혐의를 받았던 것이다. 이 문제는 정체성 서사가 누구나 권리주장을 할 수 있는 공공재가 되어버리면 정체성운동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377쪽

문화적 스노비즘과 정체성-정치는 분명히 다른 종류의 기획이다. 전자는 문화를 소비하고 후자는 문화를 생산한다. 이들은 둘 다 문화를 통해 '자기다움'을 추구하지만, 전자는 배타적인 명예를 인정받고자 하고 후자는 평등한 존엄을 인정받고자 한다. 그런데 문제는 공동체와의 관계맺음이 이들 모두에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전자는 취향의 소비를 통해 명예를 독점함으로써 공동체를 소외시키고, 후자는 평등한 주체로서의 존엄을 인정받지 못해 공동체로부터 소외당한다. 그러나, 아니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숙명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특별한 존재로서 부각시킬 수밖에 없다. 과정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들은 "표시를 낸다. 고로 존재한다." 이러한 존재양식은 2000년대 들어 아주 일반적인 것으로 자리잡는다.-378쪽

추와의 변증법적 대립이 없는, 자신의 부정성을 상실한 역겨운 아름다움, 이것이 바로 키치이다. 병따개의 기능을 유지한 채 그 위에 기도하는 마리아를 새겨넣는 것이 전형적인 키치의 수법이다. 키치적 태도의 배후에는 모든 상징적 활동의 위계와 구별을 쓸모없는 것으로 소거해버리고 그들을 무차별적으로 혼합하는 산업주의의 에토스가 존재한다. 왜냐하면 문화에 대한 산업주의의 관심은 기껏해야 낭비적인 아니무스를 생산적 에너지로 용도변경시키는 데 있을 뿐, 아니마 즉 내면성의 표현으로서의 미 따위에는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380쪽

토털 키치란, 만인이 소비하는 취향의 일람표 속에 문화 전체를 몰아넣음으로써 결국 만인을 스놉으로 만드는 사회 경제적 상황의 미학적 스펙터클이다. (중략)아직 명확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분명한 것은 소멸한 대타자를 애도하던 '문화적 스놉'은 점차로 퇴거하고, IMF 이후의 변모된 사회현실을 배경으로 하여 몇 가지의 새로운 범주로 스놉이 분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380쪽

첫째, 신자유주의적 경제논리의 절대적 우위 속에서 90년대의 문화적스/노비즘에 내재해 있던 상징적 사치와 과시소비의 경향을 생산성과 합리성의 요구에 복종시키는 '합리적 스놉'들이 등장하였다. 합리적 스놉은 대중화된 소비문화의 산물이다. 문화적 스노비즘의 과잉욕망은 이제 합리성에 의해 다스려지고 생산적인 것처럼 보이는 채널로 흘러간다. 우리 시대의 문화적 생활이 이러한 합리적 스노비즘에 얼마나 깊숙이 침윤되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라이프스타일'이라 불리는 새로운 명예의 표식이다. -380~381쪽

둘째, 신자유주의가 강제하는 삶의 스노비즘을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단순한 태도를 버리고 스노비즘을 공인함으로써 오히려 스노비즘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비판적 스놉'이 형성된다. 단적으로 말하면, 이들은 현대의 반항적인 예술가들, 환멸을 신앙하는 미학주의자들, 유토피아를 믿지/ 않는 인문주의자들이다. 비판적 스놉은 탈진정성 체제의 핵심을 간파하며, "모두가 스놉"이라고 일갈한다. 그에 의하면 스놉은 스놉이 아닌 척하는 역-스놉인 것이다. 비판적 스놉은 자신을 스놉이라 말함으로써, 자의식과 자기 성찰의 시점을 확보한다. 이 시점은 역-스놉과 같은 도덕적 엄격주의의 의식으로는 결코 획득할 수 없는 해체적 파괴력을 갖는다. 이들의 미학적 전략은 그리하여 고급예술이나 아방가르드가 아닌 '비판적 키치'이다. 이는, 키치를 진정하지 못한 예술이라 폄하하지 않는다. 비판적 키치는 키치를 과장되게 활용하거나 의도적으로 나쁜 취향을 전경화함으로써 키치 고유의 비성찰성을 성찰성으로 전화시킨다. 이를 통해 비판적 키치는 키치의 천박성과 즉물성뿐 아니라 소위 아방가르드 예술의 고답적인 오만함까지 해체한다. -381~382쪽

셋째, 신자유주의가 가져오는 경제적 궁핍화와 삶의 질의 피폐화로부터 '룸펜 스놉'이 형성된다. 신자유주의 경제의 효과는 이중적이다. 그것은 경제적으로는 승자독식의 무한경쟁 속에서 모든 이를 속박시키는 동시에 포스트포디즘의 유연한 산업체계를 동반함으로써 문화적으로는 '자기답게 사는' 다양한 탈주의 길을 열어준다. 이 무한경쟁체제에서 패배자인 대다수 다중은 사회적 안전망으로부터 배제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정보사회, 혹은 비물질노동사회로부터 제공되는 상징적 재료를 통해 새로운 감각과 감성을 창출하고 소통시킨다.-3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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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58호 - 2009.봄
문학동네 편집부 엮음 / 문학동네 / 2009년 2월
품절


서영채 : 역설의 생산, 문학성에 대한 성찰 중 몇 구절을 옮겨본다 / 실제적인 진리로 존재할 수는 없으며 개별 작품들에 대한 다양한 평가 속에서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어떤 양태나 텅 빈 중심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곧 문학성이라는 개념의 본래적인 속성이다. -296~297쪽

1990년대 이후로 한국에서 문학이 인문주의와 함께 다양한 위기의 담론의 대상이 되어 왔음은 물론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양상은, 정도의 차이나 시차는 있을지언정 다른 나라들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 자본주의라는 삶의 양식을 자신의 존재조건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우리 시대 문학과 예술의 본원적인 운명이기 때문이다. 문화산업 비판이나 이른바 예술 상업주의 비판이 어느 시대에나 끊이지 않았음이 자본주의 시대 예술의 운명을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지표일 것이다. 문학작품들이 판매가 부실할 때에도, 거꾸로 너무 많이 팔린다고 생각될 때에도, 사회적 영향력이 너무 적어졌다고 생각될 때에도, 반대로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있다고 생각될 때에도, 물론 그런 위기의 담론의 핵심부에 놓여 있는 것은 경제이고, 또한 그것의 심리적 표현인 주가지수의 그래프일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위기의 담론이 일상화되면 이제 담론의 위기가, 위기담론의 변증법이라 할 만한 양상으로 위기의 위기가 찾아온다. 기존의 모든 위기를 한순간에 정지시키고 새로운 위기의 지도를 제공해 주는 것으로서의 공황. -297쪽

고진이 근대문학의 요체로서 전제하고 있는 것은 문학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정치적 성격과 기능들이다. 이는 물론 단지 문학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그것답게 만드는 문제의 틀이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학생운동이나 정치적 저항 운동 같은 대항담론과 문학의 관계, 혹은 시대정신 속에서의 문학의 위상, 문학의 정치성 등이다. 그가 1980년대에 일본문학은 끝났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실제로 종언을 고한 것은 문학이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를 중심으로 구성되는 삶에 대한 저항담론의 현실성과 실제성이라는 말에 훨씬 가깝다. -299쪽

직접적이고 명시적으로 담론화될 수 없는 영역들, 끝없는 상징화와 그를 통해 부여되는 해석적 안정성에도 불구하고 메워지지 않는 어떤 원초적 결여의 자리와 같은 것, 그것은 우리 시대의 문학성에 대한 성찰이 자신의 파트너로서 동반해야 할 역설적인 대상일 것이다. 그래서 문학성을 사유하는 데서 느껴지는 불편함이란 흡사 이율배반에 관한 칸트의 논증처럼 무한성과 유한성 사이에서 스스로를 제한할 수밖에 없는 근대적 주체가 자신의 운명으로 감당할 수밖에 없는 역설의 공간을 바라보는 심정과도 흡사하게 느껴진다. -306쪽

말하자면 그것은 미메시스적 충동을 자기 동력으로 삼고 있는 문학성이라는 대상 자체가, 그것이 지니고 있는 초월론적인 속성이, 그것을 사유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부여할 수밖에 없는 정서적 반응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자신의 물질적 조건을 혁명화함으로써만 살아갈 수 있는 자본주의처럼, 문학성도 저신의 죽음을 지양으로 해서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마지막 불편함에 대해서는 다른 도리가 없어 보인다. -3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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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144호 - 2009.여름
창작과비평 편집부 엮음 / 창비 / 2009년 6월
품절


# 황정아 - 묻혀버린 질문 : '윤리'에 관한 비평과 외국이론 수용의 문제의 몇 구절을 적어둔다 - 어쨌든 이즈음의 비평을 들추다 보면 각종 이론들의 향연처럼 보일 때가 많다. 여전히 강력한 정신분석의 영향으로 분열적 주체와 상징계/의 결핍과 실재가 논의되는 사이에 한쪽에서는 사건, 진리, 절대적 타자, 벌거벗은 생명, 환대 같은 개념이 운위되고 또 어느새 '감각적인 것' 혹은 '정치적인 것' 하는 말들이 중심으로 진입하고 있다. 이런 복잡한 양상들이 보기보다 서로 더 깊이 연관되어 있으이란 추측도 해봄직한데, 그 유행의 흐름에서 한동안 우리 곁에 머무르는 뚜렷한 이론적 키워드가운데 하나가 '윤리'이다.-100~101쪽

'윤리'는 지난 몇년간 비평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주제였지만 사실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오랜, 익숙한 단어이기도 하다. 새삼 '국민윤리'까지 거슬러가지 않아도, 돌이켜보면 어떤 의미에선 윤리(라는 말)의 과잉을 겪었다고 할 만하다. 흔히 이념의 시대로 지칭되는 1980년대도 많은 이들에게는 윤리적 강박의 시대로 경험되었으며, 그런 측면에 대한 반발로 90년대 이래 또다른 유행어인 '욕망'은 윤리 과잉의 억압에 대한 저항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그에 대한 재반발인지 어떤지 더 따져볼 일이겠으나 최근의 비평담론에서 '윤리'는 때 로 '절대적'이라거나 '무조건적'이라거나 하는, 겉보기에 무시무시하게 억압적인 형용구들을 당당히 동반하면서 한층 강화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윤리'와 관련해서는 한때 유행했던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이라는 말을 쓰고 싶게 만드는 묘한 이중적 태도가 있는 듯하다. 한편에서는 여전히 윤리의 억압성에 대한 반발이 있고 다른 한편에선 유례없이 강력한 위상을 부여받은 윤리가 거론되는 것이다.-101쪽

실제로 어떤 암묵적 의도 혹은 어떤 '정치적 무의식'이 작용했는가를 떠나 윤리를 논한 비평들이 명시적으로 제시하는 배경이자 윤리가 시/급히 요청되고 실현되어야 할 근거로 거론되는 개념은 '타자'이다. 이때 '타자'는 대개 이방인 혹은 외국인이라는 구체적인 이름과 짝지어지며, '타자'가 어떤 성격이며 어떤 종류의 윤리를 요구하는가를 논하는 지점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론가가 바디우이다. -102쪽

윤리론을 적극 개진하는 비평에서 바디우를 언급하는 것은 당연하면서도 아이러니한 면이 있다. 그가 <윤리학>의 저자이기는 하지만 서문에서 공공연히 표명하듯이 이 책은 윤리가 중심무대로 등장하게 된 현재의 '윤리로의 회귀'현상을 비판하는 일을 한 축으로 삼기 때문이다. 바디우는 이 현상을 더이상 사회혁명을 희망하지 못하고 집단적 해방을 위한 새로운 정치용어를 모색하지 못하는 지식인들의 무능함과 일정하게 연관시키는데 , 그들의 무능함이 추상적이고 보수적이며 서구중심적인 자유주의 인권론과 그 근거인 보편적 인간 주체 같은 개념에 굴복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11-12면)-102쪽

그런데 바디우의 비판에서 또 하나의 주된 표적은 "일종의 윤리적 급진주의"(27면)인 레비나스의 타자 혹은 차이의 윤리이다. 그가 보건대 타자의 윤리란 타자의 윤리적 우선성에 기반하고 이는 다시 근본적이고 절대적인 타자성을 담보로 요구하는데, 그같은 절대적 타자성은 결국 종교에 다름아니다. 바디우는 타자와 차이의 윤리가 현실에서는 결국 '나처럼 되어라, 그러면 너의 차이를 존중하겠다'로 귀결된다고 지적한다(34면). 그는 이런 윤리 이데올로기들이 (인간이니 권리니 타자니 하는)추상적 범주에 기댈 뿐 어떤 적극적인 것에도 기반을 두지 못한 탓에 현존 질서를 추인하거나 심지어 무와 죽음을 열망하는 허무주의에 빠진다고 판단하면서, 윤리는 오로지 진리와 관련하여 존재할 수 있을 뿐이라 선언한다.(38면)-102쪽

바디우의 인용이 어디서 출발하든 상당히 무리한 경로를 거쳐 결국 '차이(에 대한 인정)'과 '타자(에 대한 환대)'로 이어지는 것을 볼 때 우리의 비평담론이 이런 단어들에 대해 어떤 '정치적 정답'의 특권을 부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솟는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는 보편성, (혹은 보편성까지 용인한다 치더라도 그에 동반되는) 동일성과 평등은 곧 전체주의적 억압에 이른다는 또다른 '정치적 정답'을 염두에 둔 것일까. 정작 바디우 자신은 바로 이런 식의 통념에 저항하며 말 많고 탈 많은 보편주의를 과감히 주장했다는 점에서 또다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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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교육의 파시즘 - 노예도덕을 넘어서 ㅣ 프런티어21 1
김상봉 지음 / 길(도서출판) / 2005년 10월
품절


현재 시행되고 있는 도덕교육의 내용과 체제는 1980년대 초 전두환 정권이 만든 작품이다. 그 이전까지 도덕교육은 도덕철학과 반공도덕의 어정쩡한 조합으로서 교육내용이나 교사 양성체계에서 배타적으로 정해진 틀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전두환 정권은 체제유지를 위해 도덕교육의 성격과 목표를 보다 분명히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1981년 서울대에 국민윤리교육과를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전국 각 대학에 국민윤리교육과를 신설하였다. 그리고 오로지 이 신설학과에 도덕 교사 양성과 교과과정의 연구 개발 그리고 도덕 교과서의 집필 등 도덕교과 운영에 관한 모든 권한을 독/ 점적으로 부여하였다. -11~!2쪽

현실을 언제나 책이라는 너울을 통해서만 바라볼 뿐, 현실의 문제를 그 자체로서 인식할 능력을 잃어버린 많은 학자들이, 내가 교육의 이념으로 자유를 말하면 책에서 읽은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대립을 떠올리면서 왜 공동체주의가 아니라 하필 자유주의냐고 되묻는다. 우리는 아래에서 자유를 도덕교육은 물론 교육 전체의 이념으로서 반복해서 제시하게 될 것이므로, 예상되는 질문에 대해 미리 대답을 해두려 한다. 즉 우리가 말하는 자유의 이념은 공동체에 대한 대립 개념이 아니라 노예상태에 대한 대립개념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한편에서는 자유를 말하면서도 동시에 서로주체성을 말하는 것이다. -62쪽

도덕교과의 존재이유는 참된 도덕적 능력의 함양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교육에 있는 것이다.그것은 한 편에서는 도덕의 이름을 내걸고 인성 교육이라는 탈을 쓰고 있지만 이는 도덕이라는 이름을 빌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1/4 의 지분을 할애한 것일 뿐, 실질적으로는 도덕교육과는 직접적 연관성이 없는 영역들이 도덕교과의 주된 핵심 영역을 차지하는 것이다. -91쪽

많은 사람들이 칸트의 윤리학에서 법칙주의자의 모습을 읽어낸다. 더러는 칸트가 말하는 법칙의 무조건적인 신성함과 위엄에 대해 공감을 표하기도 하고 더러는 같은 사태에서 율법주의자의 모습을 발견하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윤리학의 역사에서 칸트가 이룩한 공적은 법칙의 위엄을 주장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법칙의 위엄을 오로지 주체의 자유로운 입법의 능력에 정초시켰다는 데에 있다.-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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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군중 ㅣ 고전으로 미래를 읽는다 33
데이빗 리즈먼 지음 / 홍신문화사 / 1994년 7월
구판절판


사회적 성격이란 항구적으로 사회적, 역사적으로 조건지어진 한 개인의 욕망과 만족의 구성이다. 다시 말해 한 개인이 외부의 세계와 타인들과 교섭하는 데 이용되는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55쪽

잠재적 고도성장의 사회가 그 안에 사는 전형적인 주민에게 심어주는 사회적 성격의 순응성은 그들의 전통 추종성에 의해 보장된다. 이런 사람을 필자는 '전통지향형'이러고 부르기로 한다. 그리고 그들이 사는 사회는 '전통지향에 의존하는 사회'라고 부르겠다. -61쪽

과도적 인구성장기의 사회가 그 안에 사는 전형적인 주민에게 심어주는 사회적 성격의 순응성은 유아기에 일련의 목표를 내재화하려는 경향에 의해 보장된다.이런 사람들을 필자는 '내부지향형'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리고 그들의 사회는 '내부지향에 의존하는 사회'라고 부르겠다. 끝으로, 초기적 인구감퇴의 사회가 그 전형적인 주민에게 심어주는 사회적 성격은 다른 사람들의 기대와 선택에 민감한 반응을 일으키는 경향에 의해 그 순응성이 보장된다.-61쪽

순응성을 확보함에 있어 전통지향성이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회에서는 일탈자가 거의 나타나지 않지만, 일단 그런 자가 나타나면 그를 제도화된 역할 속에 끌어들임으로써 사회의 사애적 안정을 유지한다. 그런 사회에서는 그 이후의 역사적 단계에서 개혁자나 반역자가 되었을 사람이 '샤먼'이나 마술사로 흡수되는 것이 보통이다.(그런 사람들의 소속은 물론 한계적이고 의혹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개인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역할을 하도록 이끌어지며, 그가 어느 정도 안주할 만한 귀속처를 제공받는 것이다. 가령 중세기 수도원의 질서 같은 것은 많은 성격학적 '돌연변이'들을 흡수했던 것으로 예거할 수 있다.-65쪽

전통지향의 사회에서는 모든 관심이 외적인 형태상의 순응성에만 집중되어 있다. 다시 말해 행동규범은 세밀한 면에 이르기까지 정해져 있어도 그와 같은 규범에 들어맞기 위해 유달리 개성을 발휘할 필요는 없을 것이며, 설사 필요하다 하더라도 종교적 의식이나 예의범절의 형태로 객관화되어 있는 규범을 주의깊게 살펴 그에 따를 줄 아는 정도의 사회적 성격이면 충분한 것이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내부지향이 중요시되는 사회에서는 행동상/의 순응성이 약간은 관계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런 사회에서는 온갖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에 한 가지 규범만으로는 도저히 그 모든 사태를 미리 예상해서 대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개인의 주체적인 취사선택의 행위를 과거 잠재적 고도성장의 사회에서는 엄격하게 짜여진 사회조직을 통해 여과해냈으나, 과도적 성장 단계의 사회에서는 엄격하고도 고도로 개인주의화된 성격을 통해 여과해내게 되었다. 이러한 엄격성은 매우 복합적인 것이다. -69쪽

과도적 성장 단계의 사회가 직면한 최대의 문제점은 급속한 자본 축적을 가능케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자원을 공급하고 또 그것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조건을 확보하는 일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점증하는 인구를 부양하고, 새로이 도입된 생활양식이 수반하는 소비에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에 사회적 생산력은 갈수록 집중하게 마련이다. /과도적 성장 단계에 있어 내부지향형 인간은 자신의 생애를 자기가 지배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며, 자신의 자녀들도 하나의 독자적인 인생을 펼쳐 나가게 될 독립된 개인으로 간주한다. 아울러 농경생활을 청산한 데 이어 아동 노동이 사라짐에 따라 아이들은 더 이상 경제적인 자산으로는 취급되지 않았다. -72쪽

연애편지를 주고 받는 것은 이미 구시대의 풍조가 되어버린 / 데 반해 진지한 정사에 관한 사생활을 공개하는 일 같은 것은 오히려 신식 유행이 되어버린 것이다. 12,3세만 되어도 아이들은 벌써 '데이트'를 시작하면서 비단 상품의 소비뿐 아니라 정서생활에 관한 취향까지도 철저히 사회화되어 남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어야 함을 배우는 세상이다. 예의가 사람들 사이에 장벽을 쌓아놓았다면 소비취향 사회화라는 새로운 경향은 사생활을 포기하게 하거나 또는 그것을 마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그리는 하느님처럼 알쏭달쏭한 것으로 만들었다. 이렇듯 동료집단의 배심원들 앞에서는 유죄판결을 모면할 특권이란 없는 것이다. (중략) 아이가 무엇을 하든지(연예든 웅변이든) 동료집단이 어김없이 곁에 서서 '매스 미디어'의 시청자들과 똑같은 품평들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는 이내 그러한 평가에 익숙해진 나머지 자신을 에디 더친이나 호로비츠와의 경쟁 속에서 의식하게 된다. -151~152쪽

동료집단은 그 자체가 소비의 주된 대상이/며 소비취향의 주요 경쟁상대이다. 동료집단끼리의 인물 평가야말로 끊임없는 '뒷공론'으로서 얽히고 설킨 채 사회의 저변에 흘러다닌다. 그래서 가장 좋은 친구니, 두번째로 좋은 친구니,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니 하는 따위의 서열이 정해진다. 사람이란 타인지향성을 띠어갈수록 점점 더 자신의 선호를 거침없이 분류해서 그것을 다른 사람의 선호와 비교하는 데에 능숙해진다. 실제로 타인지향적 아이들은 내부지향적인 지난날의 아이들에 비해 인기순위가 어떻게 정해져 있는가 하는 데 매우 민감하다. -158쪽

아이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자기가 접촉하고 있는 어른과 동료들에 대하여 비밀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교육받고 있다. 동시에 자기의 레저를 이용하는 데 있어서도 비밀을 가져서는 안된다. 이것은 타인지향형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그 이유는 타인지향형의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즐길 것인가에 앞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먼저 그 분위기를 중요시하며, 자기의 본능이나 긍지를 손상당하는 것보다는 타인들의 의식에서 자기가 제외되는 것을 더욱 두려워하고, 아주 은폐해버릴 수 없는 이상 어떤 잘못된 행위에 대해서도 관대하기 때문이다. -4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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