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 비평 144호 - 2009.여름
창작과비평 편집부 엮음 / 창비 / 2009년 6월
품절


# 황정아 - 묻혀버린 질문 : '윤리'에 관한 비평과 외국이론 수용의 문제의 몇 구절을 적어둔다 - 어쨌든 이즈음의 비평을 들추다 보면 각종 이론들의 향연처럼 보일 때가 많다. 여전히 강력한 정신분석의 영향으로 분열적 주체와 상징계/의 결핍과 실재가 논의되는 사이에 한쪽에서는 사건, 진리, 절대적 타자, 벌거벗은 생명, 환대 같은 개념이 운위되고 또 어느새 '감각적인 것' 혹은 '정치적인 것' 하는 말들이 중심으로 진입하고 있다. 이런 복잡한 양상들이 보기보다 서로 더 깊이 연관되어 있으이란 추측도 해봄직한데, 그 유행의 흐름에서 한동안 우리 곁에 머무르는 뚜렷한 이론적 키워드가운데 하나가 '윤리'이다.-100~101쪽

'윤리'는 지난 몇년간 비평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주제였지만 사실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오랜, 익숙한 단어이기도 하다. 새삼 '국민윤리'까지 거슬러가지 않아도, 돌이켜보면 어떤 의미에선 윤리(라는 말)의 과잉을 겪었다고 할 만하다. 흔히 이념의 시대로 지칭되는 1980년대도 많은 이들에게는 윤리적 강박의 시대로 경험되었으며, 그런 측면에 대한 반발로 90년대 이래 또다른 유행어인 '욕망'은 윤리 과잉의 억압에 대한 저항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그에 대한 재반발인지 어떤지 더 따져볼 일이겠으나 최근의 비평담론에서 '윤리'는 때 로 '절대적'이라거나 '무조건적'이라거나 하는, 겉보기에 무시무시하게 억압적인 형용구들을 당당히 동반하면서 한층 강화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윤리'와 관련해서는 한때 유행했던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이라는 말을 쓰고 싶게 만드는 묘한 이중적 태도가 있는 듯하다. 한편에서는 여전히 윤리의 억압성에 대한 반발이 있고 다른 한편에선 유례없이 강력한 위상을 부여받은 윤리가 거론되는 것이다.-101쪽

실제로 어떤 암묵적 의도 혹은 어떤 '정치적 무의식'이 작용했는가를 떠나 윤리를 논한 비평들이 명시적으로 제시하는 배경이자 윤리가 시/급히 요청되고 실현되어야 할 근거로 거론되는 개념은 '타자'이다. 이때 '타자'는 대개 이방인 혹은 외국인이라는 구체적인 이름과 짝지어지며, '타자'가 어떤 성격이며 어떤 종류의 윤리를 요구하는가를 논하는 지점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론가가 바디우이다. -102쪽

윤리론을 적극 개진하는 비평에서 바디우를 언급하는 것은 당연하면서도 아이러니한 면이 있다. 그가 <윤리학>의 저자이기는 하지만 서문에서 공공연히 표명하듯이 이 책은 윤리가 중심무대로 등장하게 된 현재의 '윤리로의 회귀'현상을 비판하는 일을 한 축으로 삼기 때문이다. 바디우는 이 현상을 더이상 사회혁명을 희망하지 못하고 집단적 해방을 위한 새로운 정치용어를 모색하지 못하는 지식인들의 무능함과 일정하게 연관시키는데 , 그들의 무능함이 추상적이고 보수적이며 서구중심적인 자유주의 인권론과 그 근거인 보편적 인간 주체 같은 개념에 굴복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11-12면)-102쪽

그런데 바디우의 비판에서 또 하나의 주된 표적은 "일종의 윤리적 급진주의"(27면)인 레비나스의 타자 혹은 차이의 윤리이다. 그가 보건대 타자의 윤리란 타자의 윤리적 우선성에 기반하고 이는 다시 근본적이고 절대적인 타자성을 담보로 요구하는데, 그같은 절대적 타자성은 결국 종교에 다름아니다. 바디우는 타자와 차이의 윤리가 현실에서는 결국 '나처럼 되어라, 그러면 너의 차이를 존중하겠다'로 귀결된다고 지적한다(34면). 그는 이런 윤리 이데올로기들이 (인간이니 권리니 타자니 하는)추상적 범주에 기댈 뿐 어떤 적극적인 것에도 기반을 두지 못한 탓에 현존 질서를 추인하거나 심지어 무와 죽음을 열망하는 허무주의에 빠진다고 판단하면서, 윤리는 오로지 진리와 관련하여 존재할 수 있을 뿐이라 선언한다.(38면)-102쪽

바디우의 인용이 어디서 출발하든 상당히 무리한 경로를 거쳐 결국 '차이(에 대한 인정)'과 '타자(에 대한 환대)'로 이어지는 것을 볼 때 우리의 비평담론이 이런 단어들에 대해 어떤 '정치적 정답'의 특권을 부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솟는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는 보편성, (혹은 보편성까지 용인한다 치더라도 그에 동반되는) 동일성과 평등은 곧 전체주의적 억압에 이른다는 또다른 '정치적 정답'을 염두에 둔 것일까. 정작 바디우 자신은 바로 이런 식의 통념에 저항하며 말 많고 탈 많은 보편주의를 과감히 주장했다는 점에서 또다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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