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58호 - 2009.봄
문학동네 편집부 엮음 / 문학동네 / 2009년 2월
품절


서영채 : 역설의 생산, 문학성에 대한 성찰 중 몇 구절을 옮겨본다 / 실제적인 진리로 존재할 수는 없으며 개별 작품들에 대한 다양한 평가 속에서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어떤 양태나 텅 빈 중심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곧 문학성이라는 개념의 본래적인 속성이다. -296~297쪽

1990년대 이후로 한국에서 문학이 인문주의와 함께 다양한 위기의 담론의 대상이 되어 왔음은 물론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양상은, 정도의 차이나 시차는 있을지언정 다른 나라들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 자본주의라는 삶의 양식을 자신의 존재조건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우리 시대 문학과 예술의 본원적인 운명이기 때문이다. 문화산업 비판이나 이른바 예술 상업주의 비판이 어느 시대에나 끊이지 않았음이 자본주의 시대 예술의 운명을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지표일 것이다. 문학작품들이 판매가 부실할 때에도, 거꾸로 너무 많이 팔린다고 생각될 때에도, 사회적 영향력이 너무 적어졌다고 생각될 때에도, 반대로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있다고 생각될 때에도, 물론 그런 위기의 담론의 핵심부에 놓여 있는 것은 경제이고, 또한 그것의 심리적 표현인 주가지수의 그래프일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위기의 담론이 일상화되면 이제 담론의 위기가, 위기담론의 변증법이라 할 만한 양상으로 위기의 위기가 찾아온다. 기존의 모든 위기를 한순간에 정지시키고 새로운 위기의 지도를 제공해 주는 것으로서의 공황. -297쪽

고진이 근대문학의 요체로서 전제하고 있는 것은 문학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정치적 성격과 기능들이다. 이는 물론 단지 문학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그것답게 만드는 문제의 틀이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학생운동이나 정치적 저항 운동 같은 대항담론과 문학의 관계, 혹은 시대정신 속에서의 문학의 위상, 문학의 정치성 등이다. 그가 1980년대에 일본문학은 끝났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실제로 종언을 고한 것은 문학이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를 중심으로 구성되는 삶에 대한 저항담론의 현실성과 실제성이라는 말에 훨씬 가깝다. -299쪽

직접적이고 명시적으로 담론화될 수 없는 영역들, 끝없는 상징화와 그를 통해 부여되는 해석적 안정성에도 불구하고 메워지지 않는 어떤 원초적 결여의 자리와 같은 것, 그것은 우리 시대의 문학성에 대한 성찰이 자신의 파트너로서 동반해야 할 역설적인 대상일 것이다. 그래서 문학성을 사유하는 데서 느껴지는 불편함이란 흡사 이율배반에 관한 칸트의 논증처럼 무한성과 유한성 사이에서 스스로를 제한할 수밖에 없는 근대적 주체가 자신의 운명으로 감당할 수밖에 없는 역설의 공간을 바라보는 심정과도 흡사하게 느껴진다. -306쪽

말하자면 그것은 미메시스적 충동을 자기 동력으로 삼고 있는 문학성이라는 대상 자체가, 그것이 지니고 있는 초월론적인 속성이, 그것을 사유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부여할 수밖에 없는 정서적 반응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자신의 물질적 조건을 혁명화함으로써만 살아갈 수 있는 자본주의처럼, 문학성도 저신의 죽음을 지양으로 해서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마지막 불편함에 대해서는 다른 도리가 없어 보인다. -3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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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144호 - 2009.여름
창작과비평 편집부 엮음 / 창비 / 2009년 6월
품절


# 황정아 - 묻혀버린 질문 : '윤리'에 관한 비평과 외국이론 수용의 문제의 몇 구절을 적어둔다 - 어쨌든 이즈음의 비평을 들추다 보면 각종 이론들의 향연처럼 보일 때가 많다. 여전히 강력한 정신분석의 영향으로 분열적 주체와 상징계/의 결핍과 실재가 논의되는 사이에 한쪽에서는 사건, 진리, 절대적 타자, 벌거벗은 생명, 환대 같은 개념이 운위되고 또 어느새 '감각적인 것' 혹은 '정치적인 것' 하는 말들이 중심으로 진입하고 있다. 이런 복잡한 양상들이 보기보다 서로 더 깊이 연관되어 있으이란 추측도 해봄직한데, 그 유행의 흐름에서 한동안 우리 곁에 머무르는 뚜렷한 이론적 키워드가운데 하나가 '윤리'이다.-100~101쪽

'윤리'는 지난 몇년간 비평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주제였지만 사실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오랜, 익숙한 단어이기도 하다. 새삼 '국민윤리'까지 거슬러가지 않아도, 돌이켜보면 어떤 의미에선 윤리(라는 말)의 과잉을 겪었다고 할 만하다. 흔히 이념의 시대로 지칭되는 1980년대도 많은 이들에게는 윤리적 강박의 시대로 경험되었으며, 그런 측면에 대한 반발로 90년대 이래 또다른 유행어인 '욕망'은 윤리 과잉의 억압에 대한 저항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그에 대한 재반발인지 어떤지 더 따져볼 일이겠으나 최근의 비평담론에서 '윤리'는 때 로 '절대적'이라거나 '무조건적'이라거나 하는, 겉보기에 무시무시하게 억압적인 형용구들을 당당히 동반하면서 한층 강화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윤리'와 관련해서는 한때 유행했던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이라는 말을 쓰고 싶게 만드는 묘한 이중적 태도가 있는 듯하다. 한편에서는 여전히 윤리의 억압성에 대한 반발이 있고 다른 한편에선 유례없이 강력한 위상을 부여받은 윤리가 거론되는 것이다.-101쪽

실제로 어떤 암묵적 의도 혹은 어떤 '정치적 무의식'이 작용했는가를 떠나 윤리를 논한 비평들이 명시적으로 제시하는 배경이자 윤리가 시/급히 요청되고 실현되어야 할 근거로 거론되는 개념은 '타자'이다. 이때 '타자'는 대개 이방인 혹은 외국인이라는 구체적인 이름과 짝지어지며, '타자'가 어떤 성격이며 어떤 종류의 윤리를 요구하는가를 논하는 지점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론가가 바디우이다. -102쪽

윤리론을 적극 개진하는 비평에서 바디우를 언급하는 것은 당연하면서도 아이러니한 면이 있다. 그가 <윤리학>의 저자이기는 하지만 서문에서 공공연히 표명하듯이 이 책은 윤리가 중심무대로 등장하게 된 현재의 '윤리로의 회귀'현상을 비판하는 일을 한 축으로 삼기 때문이다. 바디우는 이 현상을 더이상 사회혁명을 희망하지 못하고 집단적 해방을 위한 새로운 정치용어를 모색하지 못하는 지식인들의 무능함과 일정하게 연관시키는데 , 그들의 무능함이 추상적이고 보수적이며 서구중심적인 자유주의 인권론과 그 근거인 보편적 인간 주체 같은 개념에 굴복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11-12면)-102쪽

그런데 바디우의 비판에서 또 하나의 주된 표적은 "일종의 윤리적 급진주의"(27면)인 레비나스의 타자 혹은 차이의 윤리이다. 그가 보건대 타자의 윤리란 타자의 윤리적 우선성에 기반하고 이는 다시 근본적이고 절대적인 타자성을 담보로 요구하는데, 그같은 절대적 타자성은 결국 종교에 다름아니다. 바디우는 타자와 차이의 윤리가 현실에서는 결국 '나처럼 되어라, 그러면 너의 차이를 존중하겠다'로 귀결된다고 지적한다(34면). 그는 이런 윤리 이데올로기들이 (인간이니 권리니 타자니 하는)추상적 범주에 기댈 뿐 어떤 적극적인 것에도 기반을 두지 못한 탓에 현존 질서를 추인하거나 심지어 무와 죽음을 열망하는 허무주의에 빠진다고 판단하면서, 윤리는 오로지 진리와 관련하여 존재할 수 있을 뿐이라 선언한다.(38면)-102쪽

바디우의 인용이 어디서 출발하든 상당히 무리한 경로를 거쳐 결국 '차이(에 대한 인정)'과 '타자(에 대한 환대)'로 이어지는 것을 볼 때 우리의 비평담론이 이런 단어들에 대해 어떤 '정치적 정답'의 특권을 부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솟는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는 보편성, (혹은 보편성까지 용인한다 치더라도 그에 동반되는) 동일성과 평등은 곧 전체주의적 억압에 이른다는 또다른 '정치적 정답'을 염두에 둔 것일까. 정작 바디우 자신은 바로 이런 식의 통념에 저항하며 말 많고 탈 많은 보편주의를 과감히 주장했다는 점에서 또다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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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교육의 파시즘 - 노예도덕을 넘어서 프런티어21 1
김상봉 지음 / 길(도서출판) / 2005년 10월
품절


현재 시행되고 있는 도덕교육의 내용과 체제는 1980년대 초 전두환 정권이 만든 작품이다. 그 이전까지 도덕교육은 도덕철학과 반공도덕의 어정쩡한 조합으로서 교육내용이나 교사 양성체계에서 배타적으로 정해진 틀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전두환 정권은 체제유지를 위해 도덕교육의 성격과 목표를 보다 분명히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1981년 서울대에 국민윤리교육과를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전국 각 대학에 국민윤리교육과를 신설하였다. 그리고 오로지 이 신설학과에 도덕 교사 양성과 교과과정의 연구 개발 그리고 도덕 교과서의 집필 등 도덕교과 운영에 관한 모든 권한을 독/ 점적으로 부여하였다. -11~!2쪽

현실을 언제나 책이라는 너울을 통해서만 바라볼 뿐, 현실의 문제를 그 자체로서 인식할 능력을 잃어버린 많은 학자들이, 내가 교육의 이념으로 자유를 말하면 책에서 읽은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대립을 떠올리면서 왜 공동체주의가 아니라 하필 자유주의냐고 되묻는다. 우리는 아래에서 자유를 도덕교육은 물론 교육 전체의 이념으로서 반복해서 제시하게 될 것이므로, 예상되는 질문에 대해 미리 대답을 해두려 한다. 즉 우리가 말하는 자유의 이념은 공동체에 대한 대립 개념이 아니라 노예상태에 대한 대립개념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한편에서는 자유를 말하면서도 동시에 서로주체성을 말하는 것이다. -62쪽

도덕교과의 존재이유는 참된 도덕적 능력의 함양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교육에 있는 것이다.그것은 한 편에서는 도덕의 이름을 내걸고 인성 교육이라는 탈을 쓰고 있지만 이는 도덕이라는 이름을 빌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1/4 의 지분을 할애한 것일 뿐, 실질적으로는 도덕교육과는 직접적 연관성이 없는 영역들이 도덕교과의 주된 핵심 영역을 차지하는 것이다. -91쪽

많은 사람들이 칸트의 윤리학에서 법칙주의자의 모습을 읽어낸다. 더러는 칸트가 말하는 법칙의 무조건적인 신성함과 위엄에 대해 공감을 표하기도 하고 더러는 같은 사태에서 율법주의자의 모습을 발견하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윤리학의 역사에서 칸트가 이룩한 공적은 법칙의 위엄을 주장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법칙의 위엄을 오로지 주체의 자유로운 입법의 능력에 정초시켰다는 데에 있다.-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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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군중 고전으로 미래를 읽는다 33
데이빗 리즈먼 지음 / 홍신문화사 / 1994년 7월
구판절판


사회적 성격이란 항구적으로 사회적, 역사적으로 조건지어진 한 개인의 욕망과 만족의 구성이다. 다시 말해 한 개인이 외부의 세계와 타인들과 교섭하는 데 이용되는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55쪽

잠재적 고도성장의 사회가 그 안에 사는 전형적인 주민에게 심어주는 사회적 성격의 순응성은 그들의 전통 추종성에 의해 보장된다. 이런 사람을 필자는 '전통지향형'이러고 부르기로 한다. 그리고 그들이 사는 사회는 '전통지향에 의존하는 사회'라고 부르겠다. -61쪽

과도적 인구성장기의 사회가 그 안에 사는 전형적인 주민에게 심어주는 사회적 성격의 순응성은 유아기에 일련의 목표를 내재화하려는 경향에 의해 보장된다.이런 사람들을 필자는 '내부지향형'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리고 그들의 사회는 '내부지향에 의존하는 사회'라고 부르겠다. 끝으로, 초기적 인구감퇴의 사회가 그 전형적인 주민에게 심어주는 사회적 성격은 다른 사람들의 기대와 선택에 민감한 반응을 일으키는 경향에 의해 그 순응성이 보장된다.-61쪽

순응성을 확보함에 있어 전통지향성이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회에서는 일탈자가 거의 나타나지 않지만, 일단 그런 자가 나타나면 그를 제도화된 역할 속에 끌어들임으로써 사회의 사애적 안정을 유지한다. 그런 사회에서는 그 이후의 역사적 단계에서 개혁자나 반역자가 되었을 사람이 '샤먼'이나 마술사로 흡수되는 것이 보통이다.(그런 사람들의 소속은 물론 한계적이고 의혹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개인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역할을 하도록 이끌어지며, 그가 어느 정도 안주할 만한 귀속처를 제공받는 것이다. 가령 중세기 수도원의 질서 같은 것은 많은 성격학적 '돌연변이'들을 흡수했던 것으로 예거할 수 있다.-65쪽

전통지향의 사회에서는 모든 관심이 외적인 형태상의 순응성에만 집중되어 있다. 다시 말해 행동규범은 세밀한 면에 이르기까지 정해져 있어도 그와 같은 규범에 들어맞기 위해 유달리 개성을 발휘할 필요는 없을 것이며, 설사 필요하다 하더라도 종교적 의식이나 예의범절의 형태로 객관화되어 있는 규범을 주의깊게 살펴 그에 따를 줄 아는 정도의 사회적 성격이면 충분한 것이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내부지향이 중요시되는 사회에서는 행동상/의 순응성이 약간은 관계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런 사회에서는 온갖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에 한 가지 규범만으로는 도저히 그 모든 사태를 미리 예상해서 대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개인의 주체적인 취사선택의 행위를 과거 잠재적 고도성장의 사회에서는 엄격하게 짜여진 사회조직을 통해 여과해냈으나, 과도적 성장 단계의 사회에서는 엄격하고도 고도로 개인주의화된 성격을 통해 여과해내게 되었다. 이러한 엄격성은 매우 복합적인 것이다. -69쪽

과도적 성장 단계의 사회가 직면한 최대의 문제점은 급속한 자본 축적을 가능케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자원을 공급하고 또 그것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조건을 확보하는 일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점증하는 인구를 부양하고, 새로이 도입된 생활양식이 수반하는 소비에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에 사회적 생산력은 갈수록 집중하게 마련이다. /과도적 성장 단계에 있어 내부지향형 인간은 자신의 생애를 자기가 지배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며, 자신의 자녀들도 하나의 독자적인 인생을 펼쳐 나가게 될 독립된 개인으로 간주한다. 아울러 농경생활을 청산한 데 이어 아동 노동이 사라짐에 따라 아이들은 더 이상 경제적인 자산으로는 취급되지 않았다. -72쪽

연애편지를 주고 받는 것은 이미 구시대의 풍조가 되어버린 / 데 반해 진지한 정사에 관한 사생활을 공개하는 일 같은 것은 오히려 신식 유행이 되어버린 것이다. 12,3세만 되어도 아이들은 벌써 '데이트'를 시작하면서 비단 상품의 소비뿐 아니라 정서생활에 관한 취향까지도 철저히 사회화되어 남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어야 함을 배우는 세상이다. 예의가 사람들 사이에 장벽을 쌓아놓았다면 소비취향 사회화라는 새로운 경향은 사생활을 포기하게 하거나 또는 그것을 마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그리는 하느님처럼 알쏭달쏭한 것으로 만들었다. 이렇듯 동료집단의 배심원들 앞에서는 유죄판결을 모면할 특권이란 없는 것이다. (중략) 아이가 무엇을 하든지(연예든 웅변이든) 동료집단이 어김없이 곁에 서서 '매스 미디어'의 시청자들과 똑같은 품평들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는 이내 그러한 평가에 익숙해진 나머지 자신을 에디 더친이나 호로비츠와의 경쟁 속에서 의식하게 된다. -151~152쪽

동료집단은 그 자체가 소비의 주된 대상이/며 소비취향의 주요 경쟁상대이다. 동료집단끼리의 인물 평가야말로 끊임없는 '뒷공론'으로서 얽히고 설킨 채 사회의 저변에 흘러다닌다. 그래서 가장 좋은 친구니, 두번째로 좋은 친구니,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니 하는 따위의 서열이 정해진다. 사람이란 타인지향성을 띠어갈수록 점점 더 자신의 선호를 거침없이 분류해서 그것을 다른 사람의 선호와 비교하는 데에 능숙해진다. 실제로 타인지향적 아이들은 내부지향적인 지난날의 아이들에 비해 인기순위가 어떻게 정해져 있는가 하는 데 매우 민감하다. -158쪽

아이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자기가 접촉하고 있는 어른과 동료들에 대하여 비밀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교육받고 있다. 동시에 자기의 레저를 이용하는 데 있어서도 비밀을 가져서는 안된다. 이것은 타인지향형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그 이유는 타인지향형의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즐길 것인가에 앞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먼저 그 분위기를 중요시하며, 자기의 본능이나 긍지를 손상당하는 것보다는 타인들의 의식에서 자기가 제외되는 것을 더욱 두려워하고, 아주 은폐해버릴 수 없는 이상 어떤 잘못된 행위에 대해서도 관대하기 때문이다. -4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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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1 -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한국 현대사 산책 12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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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살이라는 만행을 저지른 전두환 세력은 박정희 18년 독재가 낳은 '사생아'였다. '프로야구'는 박정희 시절을 통해 '보릿고개'를 넘은 한국인들이 '경제동물'화되어 풍요의 길목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소비하게 된 '오락-여가 문화'를 상징한다. '경제동물'을 좀 고상하게 표현하자면 '중산층'이 되겠지만, 중산층에 편입되기를 열망하는 사람들까지 포함하는 넓은 개념으로 봐야할 것이다. 호남인만 한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인은 6.25의 처참한 기억에 대한 한풀이를 원했다. '경제'와 '풍요'로 한국의 정체성을 삼자는 한국인의 경제동물적 한풀이는 프로야구를 넘어서 서울올림픽으로 그 절정을 보여주었다.-13쪽

우리는 이미 1970년대사를 통해 박정희 18년 체제가 '정권안보'를 위해 부정부패의 전 사회적 창궐을 획책했거나 방임해 왔다는 걸 잘 살펴보았다. 전두환 체제 7년은 그러한 총체적 부패구조의 성숙기 또는 완성기였으며, 부정부패는 '정권안보'의 대들보로 우뚝 섰다. 5공이 내세운 '정의사회 구현'은 실제론 '부패사회 구현'이었으며, '정의'라는 말은 길거리 쓰레기보다 못한 대접을 받았다.-15쪽

세계에서 가장 빠른 부문멸 속도 차이를 보인 한국을 제쳐놓고 그런 말을 한다는 건 사치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한국에선 인위적이고 강압적인 속도 조절이 있었다. '경제'는 비행기를 탔다면 '정치'는 물리적 폭력의 힘으로 뒤로 가게끔 만든 기차를 탄 셈이었다.-17쪽

사회 부문별 속도 차이로 인해 생기는 문제를 길게 거론한 건 그게 1980년대의 주된 특성이었으며 그것이 딜레마라고 부를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냈다는 걸 제대로 인식하자는 뜻에서다. 1980년대의 한국에서 '중산층'의 체제친화적인 보수성에 심리적 면죄부로 작용한 건 바로 '86.88'로 대표되는 국가주의 담론이었다. -23쪽

한국인들에게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강박은 너무도 강렬했다. 먹고사는게 해결된 뒤에도 그 상처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배를 채운 포만감을 맛본 탓에 더욱 먹고사는 문제에 매달렸던 건지도 모른다. 물론 이는 부정부패와 마찬가지로 독재정권의 의도적인 정책의 산물이었다. 민중의 '상호불신과 살벌'은 독재정권의 정권안보에 매우 긴요한 것이었다. 살인적인 경쟁체제가 한국의 눈부신 경제 발전에 얼마나 기여하였으며 어떤 부작용을 남겼는가 하는 건 따로 따져볼 문제지만, 한국인의 일상적 삶에 만연한 사회진화론적 전투적 삶의 정도가 거의 병적 수준이었다는 건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중략) 3저 호황은 '6.25'의 기억을 갖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놀라운 물질의 축복을 선사했다. 온갖 화려한 가전제품에서부터 각종 스포츠 놀이 이벤트에 이르기까지 '단순히 먹고사는 일'을 넘어선 풍요를 만끽하게 하였다.-24~25쪽

신군부가 추진한 '음모와 공작'의 핵심은 여론조작이었다. -57쪽

1980년 11월 10일 문공부장관 이광표는 12월 1일부터 컬러TV 시험방송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12월 1일 이광표가 KBS 청사에서 컬러TV 방송 스위치를 누름으로써 한국에서의 컬러TV 방송시대가 개막되었다. /컬러수상기의 급속한 보급과 함께 방송의 영향력이 더욱 증대된 만큼 전두환정권은 TV를 박정권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정권홍보에 이용하였으며, 그 결과 '뚜뚜전 뉴스' 또는 '땡전 뉴스'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될 정도였다. -272~273쪽

70년대를 겪은 한국인들의 뇌리에는 '탄압하는 권력, 탄압받는 언론'이라는 고정관념이 자리잡고 있었다. 80년 들어 신군부가 언론장악을 위해 저지른 일련의 조치들도 국민의 눈에는 '탄압받는 언론'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물론 국민들은 언론이 신군부의 강압으로 보도를 자유롭게 할 수 없었다는 건 알고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인식이 곧 신군부와 언론의 유착관계에 대한 인식의 수준으로까지 나아간 건 아니었다. 설령 그것까지 알았다 해도 일상적 삶에서 매일 대하는 언론 매체를 통해 알게 모르게 누적된 메시지가 미칠 영향에 대해서까지 늘 경계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미국의 정치학자 버트램 그로스는 1982년에 낸 책에서 고전적 파시즘 체제가 보여주던 외양은 사라졌지만 날이 갈수록 심화되는 대기업의 지배와 정경유착 구조에 의해 개인의 자유와 민주적 권리가 억압받는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친근한 파시즘(Friendly fascism)'이라는 말을 썼다. 80년대의 한국에는 '부드러운 파시즘'이란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292쪽

언론이 사실상 5공 파시즘 체제의 일원으로 편입되어 여론조작을 왕성하게 전개하면서 최소한 국민의 '수동적 동의'를 얻어내기 위해 애를 썼기 때문에 5공 파시즘의 작동 방식이 비교적 부드러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292~2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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