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사 - 한 권으로 읽는 영화 100년 Film Story 총서 1
정종화 지음 / 한국영상자료원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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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암흑속의 모색 1980년대 한국영화(1980~1989) 중 일부 - 1. 제작 자유화 그리고 할리우드 지배 저지투쟁. 1980년대는 우리 영화를 '방화'로 부르던 시대였다. 영화인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영화계와 그 영화를 냉소하고 자조하면서,언론들은 외국영화에 주도권을 내주고 언제나 주변부에 머물렀던 한국영화를 꼬집으며 그렇게 불렀다. 관객들 역시 외화에 비해 재미없고 만듦새가 뒤떨어지는 우리 영화를 방화라 부르며 불신과 멸시를 담았다. 항상 성우들의 후시녹음 목소리가 입혀지는 그 영화에 말이다. 방화는 '변방의 영화'라는 뜻으로,일제시기 '대동아연방'이라는 말에서 비롯된 지칭이다. 그러고 보면 1919년 이후 6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한국영화는 방화라는 명칭으로 불렀다. 그렇지만 1980년대의 한국영화를 호명하던 방화는 우리 영화의 초라한 모습을 상징하는 좀 더 자기비하적인 표현이었다.-190쪽

1980년대 초반 한국영화를 수식한 유행어는 사상 최악의 불황이었다. 한국영화의 침체기로 일컫는 1970년대에 이어 1980년대 역시 불황과 침체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 기나긴 통로를 빠져나오는 고통의 시기는 1990년대 후반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준비하는 과정이기도 했다.1980년대는 우리 영화가'방화'라는 이름을 벗고 한국영화로 탈바꿈하는 쇄신의 시기였다.-190쪽

1979년 유신정권이 무너졌지만 신군부가 통제정책을 이어받았고 사전,사후 이중의 검열로 영화들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1980년대 초반 신군부의 영화정책은 단지 20여 개 영화사만 한국영화를 제작하고 외국영화를 수입하도록 한 1973년 제4차 개정영화법의 연속선상에 있었다. 국산영화의 제작권은 연초에 각 영화업자에 의무제작편수를 배정하고 제작능력에 따라 추가 배정하는 방식이었다.-190쪽

한편 외국영화의 수입권은 우수영화 선정작,대종상 그리고 국제영화제 수상작을 만든 영화사에 배정되었다. 1985년 영화법이 다섯번째로 개정되었다. 제5차 개정영화법의 핵심은 영화사의 등록방식을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전환한 것이다. 예탁금 납부라는 단서 조항이 있었지만 기재나 촬영소 같은 과거의 허가 요건 없이 누구나 영화사 등록을 하고 영화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또한 영화제작업자로 등록하지 않고도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독립영화제작제도 역시 도입했다. 제작,수입,수출을 독점하던 과거 20개사의 허가 받은 영화업자가 아닌,그간 영화제작의 문호에서 차단당했던 감독,시나리오 작가,배우,프로듀서 등 영화인이 제작의 주류를 형성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191쪽

제작 자유화로 인한 활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곧이어 미국영화의 시장개방 압력이 닥쳤기 때문이다.1986년 12월 31일 공포된 제6차 영화개정법으로 외국영화사의 국내 영화업이 허용되었으며,1988년 다국적 영화배급사인 UIP를 시작으로 미국의 20세기폭스사가 국내에 현지 법인을 설립하여 영화시장에 진출했다.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의 직접배급은 한국영화산업의 배급구조를 크게 변화시켰다. 기존의 영화배급구조는 제작사나 수입사가 서울을 제외한 다른 지역의 흥행권을 흥행업자에게 넘기면 흥행업자는 다시 지방의 영화관들과 상영 계약을 맺는 간접배급 형태였다. UIP는 서울,지방 가릴 것 없이 영화관과 직접 계약을 맺는 방식으로 새로운 유통 질서를 시도했다.-191쪽

올림픽 기간 중인 1988년 9월 24일 추석 프로그램로 UIP 직배 1호 <위험한 정사>(1987)가 개봉하자,영화계는 한국영화의 존립 기반이 무너졌다며 격렬히 저항했다.대부분의 영화사는 여(191)전히 한국영화 제작에 공을 들이기보다 외화 흥행 수익에 더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988년 9월 19일 영화인협회 감독분과위원회 철야농성으로 시작한 영화인들이 신영극장과 코리아극장에서 점거농성을 하며 더욱 격양되었다. 1989년 3월에는 정진우 감독이 운영하는 씨네하우스에서 UIP 직배 영화 <007리빙 데이라이트>를 개봉했다. 5월 씨네하우스 극장에 뱀 자루가 발견되었고,8월에는 방화마저 일어나는 등 직배 반대투쟁은 극에 달했고 정지영 감독 등이 구속되기도 했다.-191,192쪽

그로부터 7년 후인 1996년,UIP 직배를 둘러싼 일련의 사태 이면에는 직배 영화 배급권을 둘러싼 극장주들 간의 암투가 작용했음이 뒤늦게 밝혀졌다. 서울극장의 곽정환 사장이 복합관 공사를 진행하던 중 씨네하우스가 먼저 직배망에 가담하자 방화사건을 배후 조종했던 것이다. 직배 반대운동의 막후에서 비밀리에 UIP와 영화 수급 계약을 맺었던 그는 1990년 12월 UIP의 <사랑과 영혼>을 서울극장에 내걸었고,이어 워너브라더스,20세기폭스,월트디즈니 등 직배 3사의 배급 대행을 맡으며 미국 직배사가 한국시장을 장악하는 데 결정적인 발판 구실을 했다.-192쪽

2.1980년대 대표 장르 일부 / 1970년대는 멜로드라마의 하위 장르인 호스티스 영화가 주류였다면 1980년대에는 섹스,스크린,스포츠로 국민을 환각시키는 전두환 군사정권의 '3S정책'과 맞물려 성애영화,즉 에로티시즘 영화가 넘쳐났다.1982년 넉 달 동안의 장기상영으로 31만 관객을 동원한 <애마부인>은 남성 중심의 왜곡된 성적 판타지로 관음증을 충족시키는 데 주력한 1980년대 에로영화의 상징으로,이른바 부인 시리즈의 원조가 되었다. 한 여대생의 성적 탐험을 그린 <무릎과 무릎 사이>,에로영화의 전통적인 대상을 성매매 여성을 다룬 <매춘> 등이 이어지며 성적 스펙터클의 표현 수위는 한층 더 진보해졌다.-193쪽

에로영화들은 현대극뿐만 아니라 시대극과도 결합했다. 양반집안 씨받이 여성들의 수난을 다룬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자녀목>,<씨받이> 등과 가난 때문에 몸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여성들을 다룬 <뽕>,<땡볕>,<감자>등이 그 대표작이다. 이른바 '토속에로'장르는 <피막>,<여인잔혹사 물레야물레야>,<씨받이>처럼 해외영화제의 주목과 수상을 끌어내기도 했고,<뽕>,<어우동>처럼 '상품성'을 인정받기도 했다.<산딸기>,<변강쇠> 처럼 토속에로들은 대부분 시리즈의 양산을 흥행 방편으로 삼았다.-193쪽

'공윤'과 검열 파문/ 1980년대 영화계는 특정 집단의 압력과 경직된 검열 정책으로 인해 영화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기 일쑤였다. 1981년 <도시로 간 처녀>가 운전기사와 버스 안내양의 인권을 유린했다는 운수노조와 한국노총의 시위로 상영이 갑작스레 중단되었고,1984년 전국 비구니들의 단체 행동으로 임권택 감독의 <비구니>제작이 중단되기도 했다. 1986년에는 <중광의 허튼 소리>를 둘러싼 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윤)와 영화계의 마찰이 극에 달했다. 심의에서 열 군데나 가위질을 당한 김수용 감독은 은퇴를 선언했고,표현의 자유라는 해묵은 논쟁이 되풀이되었다.-196쪽

1985년 1월부터 영화 검열 업무가 문공부에서 공윤으로 이관되며 검열이라는 명칭을 심의로 바꾸었지만,화면 삭제,화면 단축,대사 삭제 등의 표시로 불온 사상,반사회적,공안질서 저해라는 낙인을 찍는 국가의 통제는 여전했다. 심의를 통해 배창호의 <꼬방동네 사람들>은 더 멜로드라마적인 구성으로,<어둠의 자식들 2>가 원제인 이장호의 <바보선언>은 블랙코미디라는 궤도 수정으로 리얼리즘 화법을 탈색시켰다. 시시콜콜한 것까지 따지다 보니 <애마愛馬부인>이 <애마愛麻부인>으로 <영웅만들기>가 <영웅연가>로 바뀌었다. 1987년 6월 1일 결국 시나리오 사전 심의제도가 폐지되었지만 대폭적인 소재 개방이라기보다 외설적 내용에 대한 '가위질'이 줄어들었음을 의미했다.1988년 공윤의 심의를 마친 한국영화 84편 중 35편이 이른바 '벗기는 영화'일 정도로 에로티시즘 영화가 판을 쳤다. 외설물에는 관대하고 사회적 발언에는 가혹한 것이 공윤의 검열 기조였다.-196쪽

3.영화문화의 변화 / 1980년대는 극장 중심의 전통적인 상영문화에 변화를 가져온 시기이다.1980년 12월 컬러TV가 등장해서 각 가정에 빠른 속도로 보급되었고,VTR의 보급은 비디오 시장이라는 새로운 수의 창구를 마련하였다. 영화매체는 더 이상 극장에서 상영하는 프린트로 한정되지 않았다. TV프로그램 중에서 특히 외화 프로그램이 가장 높은 시청률을 보였고,비디오 매체 역시 인기가 높았던 외화의 극장 흥행을 잠식했다. 1986년 여덟 기구에 한 대꼴로 보급되었던 비디오는 1960년대의 TV수상기처럼 우리 생활 깊숙이 파고든 신매체였다.-197쪽

비디오 판권을 제작자들이 인식하기 시작한 거슨 1980년대 중반이다.비디오 시장이 영화 관객을 일부 빼앗아감으로써 영화시장을 축소시키는 요인도 되었지만 제작자본의 새로운 공급원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제작사의 입장에서는 극장흥행에서 실패한 영화나 심지어 극장에서 개봉하지 못한 영화로부터 수익을 기대할수 있었기 때문에 비디오 시장은 영화제작을 활성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1987년을 전후로 한국영화의 비디오 판권료가 급등하기 시작했다. 강수연의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을 계기로 <씨받이>가 불티나게 팔리면서 <뽕>,<어우동>,<변강쇠>,<내시>등의 작품들이 처음으로 5,000개 이상 팔렸다. 이즈음 방화가 장사가 된다는 통념 아래 시나리오 단계에서도 비디오 판권이 팔리기 시작했다.비디오 매체의 출현은 한국영화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7쪽

반면 극장가는 계속되는 불황으로 대작영화의 리바이벌,심야극장 개관 등 다양한 흥행방식을 모색하였다. 할리우드 영화산업이(197)TV의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펼쳤던 전략이 와이드 화면과 공포영화였던 것처럼,컬러TV에 빼앗기는 관객을 붙들기 위해 대형영화의 리바이벌 상영과 <망령의 곡>,<월녀의 한>,<귀화산장> 등 괴기영화 제작 붐이 일었다. <닥터 지바고>가 75일의 롱런과 함께 3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고,<벤허>같은 70MM영화가 다시 상영되었다. 1982년 3월 13일 밤 11시 30분 스카라극장에서 <엄마 결혼식>시사회가 열리며 심야상영이 처음 시도되었고,이어 <애마부인>의 심야상영은 젊은 연인들로 대만원을 이루었다.-197,199쪽

1980년대 영화문화에서 가장 큰 변화는 1981년 공연법 개정으로 인한 소극장의 등장이다.300석 미만의 소규모 극장이 자유롭게 설립되자 그동안 개봉관,재개봉관,3~4번관 순으로 영화를 관람하던 추세에서 시설이 좋은 개봉관과 집 주변의 신축 소극장으로 영화관람문화가 재편되었다.1986년2~3개관짜리 복합상영관의 등장 역시 극장가의 지형 변화를 초래했다.제작자유화와 수입 개방으로 쏟아지는 물량을 소화해낼 많은 극장이 필요해지자 대형극장들은 덩치를 현실에 맞개 축소하고 스크린 수를 늘리는 쪽으로 실리를 추구했다.-199쪽

4.영화운동과 독립영화 중 일부 / 저예산,기동성,간편한 조작법,대량복제 가능 등의 장점을 지닌 비디오카메라는 1980년대 영화운동의 판도를 바꾸었다.특히 외국인에 의해 촬영된 광주민주화항쟁 비디오가 상영되면서 비디오가 영화운동의 무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독립영화 다큐멘터리의 원형으로 평가받는 김동원 감독의 <상계동 올림픽>은 민중의 삶 속에 들어가 영화의 사회적 기능을 실천한 의미 있는 성과를 이뤘다.-202쪽

시네필 문화의 생성 :1980년대 비제도권 영화운동이 독립영화로 이어졌다면,외국 문화원의 영화클럽을 중심으로 시네필 문화는 제작과 비평 양쪽에서 1990년대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자양분이 되었다. 1977년 프랑스문화원을 거점으로 한 시네클럽과 1978년 독일문화원의 동서영화연구회를 통해 전양준,정성일,강한섭,김홍준 등 이른바 문화원세대가 형성되었다.1983년 여름방학부터 서구 고전 영화제를 개최한 서강대 커뮤니케이션 센터도 시네필들의 메카가 되었다.박찬욱이 영화광으로 살며 감독이 되기로 결심한 것도 바로 이곳을 통해서다.-203쪽

1989년 장산곶매의 <오!꿈의 나라>로 민중운동 도구로써의 영화의 기능이 정점에 달하자 시네필 문화는 위축되었다.이후 시네필 문화는 비디오테크가 보급되면서 1992년 문화학교 서울을 비롯한 사설 시네마테크를 통해 다시 명맥을 이었다.2002년 한국 시네마테크협의회의 서울아트시네마가 아트선재센터에 안착하며 시네필문화는 다시 만개했다.-203쪽

4장 다시 르네상스,한국영화(1990~1999): 제작자유화 물결을 타고 1980년대 후반 영화판에 들어온 고학력의 젊은 기획자들은 비디오 판권 형식으로 대기업 투자를 이끌어내며,영화산업 판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1990년대 초 대기업이 영화산업에 진출하게 된 맥락은 이렇다. 1980년대 중반부터 삼성,대우 등의 가전회사는 비디오 프로그램 확보를 위해 일정 부분 영화산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직배 이후 홈비디오 시장마저 할리우드 직배사가 장악하자,대기업들은 비디오 판권 확보에 다급해져 직접 영화제작에 뛰어든 것이다.(212)(중략)1995년과 1996년 흥행 순위 톱 텐 작품 대부분이 대기업의 전체 혹은 부분 투자 작품일 정도로,대기업 자본은 한국영화산업의 가장 중요한 자금원이 되었다. 지방배급업자의 자금에 전적으로 의지했던 충무로 제작 시스템은 비디오와 케이블TV 판권을 매개로 대기업과 결합했다. -212,213쪽

5.영화청년의 시대 : 1970년대 후반 프랑스,독일 문화원의 영화 모임을 통해 출현한 영화광 출신들이 이른바 '문화원세대'라면,1990년대 중반에 등장한 열혈 영화마니아들은 시네마테크세대라 부를 수 있다. 외국의 문화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작가영화,예술영화 감상 공간은 영화공간 1895,씨앙씨에,문화학교 서울등 복사판 비디오를 상영하는 소규모 비디오테크 공간으로 이어졌고,이를 통해 성장한 영화청년들은 말로만 듣던 고전영화를 직접 스크린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시네마테크로 결집했다.-228쪽

영화청년들의 속에는 늘 영화잡지가 들려 있었다.1995년 5월,한겨레의 저널리즘 감각으로 영화광 문화를 증폭시킨 최초의 영화전문 주간지 씨네21과 이보다는 좀 더 마니아층을 겨냥한 월간지 키노가 창간되었고 12월에는 할리우드 기사와 사진을 직송받는 라이선스 영화잡지 프리미어가 이어졌다. 영화전문지를 통해 영화문화는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했고,영화비평 담론은 일상화되었다.문화학교서울,민예총아카데미,한겨레문화센터 등의 대중 영화강좌 역시 영화청년들의 갈증을 풀어주며, 영화비평의 대중화에 물꼬를 텄다.-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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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조원의 육체산업 - AV 시장을 해부하다
이노우에 세쓰코 지음, 임경화 옮김 / 씨네21북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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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에 일어난 '비디오윤리협회 사건'은 AV업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비디오윤리협회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2006년,성인용DVD의 자주 심사 기관으로 35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비디오윤리협회는 음모 노출에 관한 심사 기준을 대폭 완화했다.그 결과 몇몇 작품의 내용이 음란물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제작사 두 곳과 심사를 담당했던 책임자들이 음란물 배포 방조 혐의로 경시청에 체포되는(2007년 8월 23일 적발)일이 발생했다.-13쪽

이 사건을 계기로 유식자회의(대표 :시미즈 히데오 아오야마가쿠인 대학교 명예교수 겸 변호사)가 결성되고,2008년 6월에는 사미즈히데오를 최고고문으로 추대한 일본영상윤리심사기구(도쿄도 지요다쿠)가 발족했다. 이 비디오윤리협회 사건을 둘러싼 재팜은 2009년 봄부터 진행중이다. 비디오윤리협회 사건은 AV 작품의 내용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 책에도 밝혔듯이, 이전까지 성인 비디오의 내용이 점점 과격해지는 영향이 있었는데, 사건 이후 표현 수위가 조금 낮아진 듯한 느낌이다.-14쪽

영화계도 1960년대 후반부터 TV에 밀려 관객 수가 감소하고 포르노 영화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1968년에는 포르노 영화 1호라 할 수 있는 <여체의 신비>(구 서독)가 상영되었고,연이어 <여자의 환희>,<완전한 결혼>(스웨덴) 등이 상영되는 등 일본내에서도 포르노 영화 제작 붐이 일었다.그리고 전국의 영화관이 7대 1의 비율로 성인 영화관으로 전환했다.(중략)이 닛카쓰 로망 포르노 재판을 놓고 많은 지식인들이 격론을 벌였으며 1978년 6월의 1심 재판에서는(24)'성기 노출과 성행위로 간주되는 묘사의 허용 기준은 시대의 변화와 사회 통념에 의거한다'는 기준 아래 위의 4편 영화는 대담하고 노골적인 묘사는 있으나 음란하다거나 지나치게 선정적이지 않으므로 사회 총념상 음란물로 간주할 수는 없다고 하여 전원이 무죄판결을 받았다. 검찰은 판결에 불복하여 도쿄 고등법원에 항소했지만 1980년 기각되어 이 영화들은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24,25쪽

이 닛카쓰 로망 포르노 영화 재판 사건은 이후 성적 표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전시체제라는 이유로 문학, 영화, 음악 등에서 성에 대한 표현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전후에 스트립이나 <카스토리>잡지 같은 성적 내용을 담은 것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하지만 전후의 혼란기의 궁핍한 경제 사정으로 국민들은 민생고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인 데다가 당시만 해도 성적인 도덕관념도 살아 있었기 때문에 노골적인 성적 묘사는 음란물 단속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 전쟁과 베트남전쟁에 따른 군수 특수로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민생고도 해결되자 사(25) 람들은 그동안 억눌렸던 성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25쪽

닛카쓰는 로망 포르노 영화 재판 말고도 또 하나의 포르노 재판이 걸려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닛카쓰 포르노 비디오 재판이다.(중략)당시 일본 영화는 침체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닛카쓰가 로망포르노로 노선을 바꾸었듯이 다른 영화사들도 포르노 비디오 영상 산업으로 노선을 변경했다. 닛카쓰는 당시 최대의 비디오 점유율을 자랑했던 도에이에 맞서 닛카쓰 오리지널 포르노로 승부를 하려던 차에 기소를 당했다.(26)(중략)닛카쓰 로망 포르노 영화 재판에 가려 언론에 별로 보도되지도 않은 이 포르노 비디오 재판이 남긴 것은 무엇일까.영화와 관련해서는 닛카쓰가 사운을 걸고 재판에 나섰기 때문에 무죄판결을 얻어냈으나,비디오는 포르노비디오라는 음성적 이미지 때문에 재판에 졌다는 의견이 있다.또 한편에서는 영화처럼 심사 기관이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결과야 어떻든 이 닛카쓰 포르노비디오 재판으로 사람들은 포르노 비디오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26,27쪽

특히 1970년대 초반에는 일명 러브 호텔 등 모텔 업계의 경쟁이 치열해서 고객 유치 수단으로 흑백tv를 컬러 tv로 바꾸고 비디오 플레이어를 tv에 연결하여 포르노 비디오를 틀어주는 모텔이 급증했는데,이를 계기로 사양길에 접어들던 영화사들은 영업용 포르노 비디오를 제작해 회사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말하자면 포르노 비디오 산업은 영업용 비디오 플레이어의 보급과(27)함께 발전한 셈이며 비디오 플레이어 역시 tv 보급과 무관하지 않다.-27,28쪽

1968년 5월에 JVC와 소니가 비디오테이프 레코더를 출시했고,이듬해인 1969년 1월에는 후지산케이그룹이 비디오 소프트 산업에 진출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매스컴은 1969년을 '비디오 원년'이라고 명명했다. 그해 컬러TV가 가전제품 생산액의 34%를 차지하며 수위에 올랐다.그런 본격적으로 가정용 플레이어가 시판된 것은 1977년 8월이었다. 그 사이에 1975년 소니가 가정용 베타 방식의 VTR을 내놓았으며 1976년에는 JVC가 VHS방식의 VTR을 발매했다. -28쪽

처음에는 소니의 베타방식이 우위를 차지하는 듯 했으나 이후 사용하기(28) 편한 JVC의 VHS방식이 높은 점유율을 차지하게 되었다.비디오 플레이어가 본격적으로 발매되자 가전업체들은 비디오 플레이어에 포르노 비디오를 끼워 파는 판매전략을 세웠다. 소비자층으 도시 거주 독신 남성으로 잡고 포르노 비디오를 덤으로 주면서 비디오 플레이어를 팔기 시작한 것이다.비디오가 보급되던 1980년대는 거품경제가 한창이던 때로 서양식 욕실이 딸린 원룸의 수요가 늘면서 비디오 플레이어의 수요도 늘었다.-28,29쪽

한편 1977년에는 아베다 사건을 소재로 한, 일/불 합작 영화인 <감각의 제국>의 시나리오와 스틸 사진을 한데 묶어 출간한 동명의 단행본을 둘러싸고 저자인 오기마 나기사 감독과 산이치쇼보 출판사 사장이 음란물판매죄로 기소되지만, 현 사회의 통념에 비춰볼 때 음란물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하여 1982년 6월 무죄판결을 받았다.1970년대와 1980년대는 성적 표현에 대한 사회적 통념이 크게 달라진 시기이기도 하다.-29쪽

비디오 플레이어 판매를 위한 가전업체들의 요청에 따라 포르노 비디오산업은 수많은 수요자를 확보하게 된다.그전까지만 해도 영업용 포르노 비디오를 제작하여 모텔에 판매하던 영화사들과 자신이 추구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메이저 영화사를 뛰쳐나온 이들이 만든 독립 영화사들은 영화배우를 기용하기 위해 이야기가 있는 제품을 제작했다.-29쪽

닛카쓰 포르노 비디오 재판 사건을 꼐기로 1977년에 업자들이 자주적으로 설립한 심사 기관인 일본비디오윤리협회가 발족했고,1996년에는 1990년대 후반에 등장한 셀이라는 판매용 비디오 중심의 미디어윤리협회가 탄생했다.그리고 오늘날에는 업체 간의 자주적인 규제 아래 연간 약 1만2000편에서 1만8000여 편을 제작하고 있는 실정이다.-30쪽

포르노 비디오에서 성인 비디오로 옮겨간 시기는 언제쯤일까.그것은 포르노 영화의 종언과 깊은 관계가 있다.드라마(극영화)안에 성행위 장면이 삽입되는 형태의 포르노 영화는 섹스 장면에 스토리를 부여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중략)수많은 감독들이 포르노 영화라는 이름 아래 사회를 향해 메시지(31)를 전했다. 그런데 닛카쓰의 로망 포르노 영화가 막을 내리기 2,3년 전부터 포르노 영화에는 더 이상 사회저긴 메시지가 담기지 않았으며,섹스 자체를 직접 영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변질되어갔다. 포르노 영화를 뒤에서 지원사격하는 형태로 제작되던 포르노비디오도 같은 노선을 걷게 되면서 성인비디오라고 하는,드라마적인 요소를 배제한,즉물적인 섹스를 표현하는 영상으로 대체된 것이 1980년대 중반부터다.-31,32쪽

섹스에 대한 묘사도 도가 지나치면 폭력이 개입된 성행위가 되고 만다.더구나 드라마적인 요소가 배제된 성인 비디오와 폭력은 물감이 물에 풀리듯이 쉽게 융합되었다.그리고 이런 폭력성 강한,그것도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이나 강간 등 여성을 힘으로 정복함으로써 자신의 남성을 발기시키는 내용의 성인 비디오가 인기를 끌었다. -33쪽

이런 경향은 1980년대부터 시작된 공업화에 따른 도시 인구 집중과 가족 형태의 변화로 자녀 양육 방식,특히 남자아이의 양육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경제성장과 더불어 핵가족이라는 가족 형태가 선을 보이면서 형성된 남녀의 성별에 따른 역할 분담이 그 대표라고 할 수 있다. 그전까지만 해도 자녀 양육은 조부모와 함께 사는 대가족이나 혈연이나 지연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는데,핵가족화하면서부터 아무 연고도 없는 도시 근교에 사는 어머니가 혼자 가사와 육아를 맡아온 것이다. 게다가 자녀는 하나 아니면 둘이고,아버지라는 존재는 잠을 자기 위해 밤늦게야 귀가해 잠깐 집에 머물 뿐이다. 또 지방으로 전근(33)이라도 가게 되면 아버지 홀로 떠나는 것이 당연시된 사회 분위기에서 아들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지나친 애정을 받으며 자라는 환경에 놓였다.-33,34쪽

잘 가꾸어진 잔디 정원이 있고,레이스 커튼이 하는 거리는 단독주택에 살면서 엄마가 직접 간식을 준비해놓고 아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바람직한 주부의 모습인 양 매스컴에서는 떠들어대고,그런 분위기에서 많은 주부들은 자식 교육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현대판 맹모라는 야유까지 받으며 자녀 양육에 헌신했다. 다 자식을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실은 어머니 자신의 자아실현을 위해 자녀들은 학원에 가야 하고,미래 또한 이미 다 정해져 있었다. 그런 자녀들은 어머니의 애정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며, 어머니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키워갔고,그 부정적 이미지는 모든 여성에게 확대되어 남존여비 사상이나 여성을 멸시하는 사고를 갖게 되었다.(중략)1960년대에 태어난 남자아이들이 청춘기를 맞이한 것은 1980년대였다. 어쩌면 그들은 어머니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인 비디오를 찾았는지도 모른다.-34쪽

저예산에 따른 단기 결전형 제작 방식은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져왔다.제작만 하면 무조건 팔리는(43)거품경제 시대의 현상,아무 거라도 일단 만들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시대 상황의 후유증,업체 난립에 따른 경쟁 등이 맞물려 저예산으로 적당히 만든 작품이 대량으로 생산된 것이다.(44)1970년대는 모텔들의 고객 유치 경쟁에,1980년대는 가전업체들의 비디오 플레이어 판매 경쟁에 이용되며 성장해온 AV산업이 21세기인 오늘날에는 휴대 전화나 컴퓨터 같은 통신기기의 수요 증대 전략에 다시 이용되고 있다.-43,44,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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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성의 거래
비비아나 A. 젤라이저 지음,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소 옮김 / 에코리브르 / 2008년 6월
절판


분리된 영역과 적대적인 세계 중 일부 - 사회 비평가와 학자는 세 그룹으로 나뉘어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왔다.가장 대다수인 첫 번째 그룹은 오랫동안 "분리된 영역과 적대적인 세계"라는 견해를 제시해왔다. 경제 활동과 친밀한 관계를 위해 구별된 이 두 영역은 서로 접촉할 때 불가피하게 무질서와 혼란을 초래한다. 두 번째 좀 더 작은 그룹은 "별것 아니다"라고 답해왔다. 두 모순적인 원칙은 결코 서로 충돌하지 않고, 경제적 활동과 친밀함의 혼합은 단지 정상적인 시장 활동에 대한 또 다른 견해, 또는 문화적 표현의 한 형태, 또는 권력의 행사일 뿐이라는 것이다. 내사 속해 있는 훨씬 더 작은 세번째 그룹은 처음 두 입장이 모두 잘못된 것이며 친밀함과 경제활동을 혼합하는 사람들은 "연관된 삶"을 구성하고 협상하는 데 적극적으로 관여한다고 답해왔다.-41쪽

그 첫 번째 관점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오래되고 영향력 있는 하나의 전통은 분리된 영역과 적대적인 세계의 존재를 주장한다. 이러한 설명에 따르면, 친밀한 사회적 관계와 경제적 거리 사이에 뚜렷한 구분이 존재한다.우리는 한편으론 감정과 결속의 영역을,다른 한편으로는 계산과 능률의 영역을 발견한다.각각은 그 자체로 원칙에 따라 다소 자동적으로 그리고 잘 작동한다. 그러나 그 두 영역은 서로 적대적인 채로 남아 있다. 그것들 간의 접촉은 도덕적 타락을 초래한다.-41쪽

돌봄 관계 중 일부 - 돌봄 서비스의 가족 집중화 현상이 가족이라는 산만하고 감성적이고 비상업적 세계와 가족 밖의 전문적이고 비인격적이고 상업적인 세계의 재화 그리고 서비스 사이의 명확한 구분에 대한 가설을 강화시키는 것은 분명하다.-232쪽

현대 미국의 학생들은 가족을 단지 소비 영역으로만 생각해왔으며, 기본적으로 소비를 가족의 사회적 지위를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해왔다. 그러나 가족 자산의 관리와 이전에 수반되는 경제 활동의 풍족함에만 주의를 기울인다면,가족의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 정밀한 조사를 할 수 없을 것이다.비평가들은 소비를 가족의 도덕적 근간에 영향을 미쳐 잠재적으로 붕괴시키는,다소 가치 없고 경솔한 경제 활동의 차원으로 간주하였다.이러한 문제는 물론 때로 정당화되기도 하지만, 가족의 가장 중요한 상호 작용에서 소비의 두드러진 관련성과 필요성을 획득하지는 못하였다.-298쪽

대규모 구매 중 - 미국인은 비단 주택뿐 아니라 화려하고 낭비적인 소비로 인해 비난을 받는다. 특히 자동차,전자제품,가전제품,가구 같은 내구성 소비재에 흔히 집착한다. 이러한 과소비를 개탄할지라도, 이러한 아이템을 취득하고 사용하는 것은 소비가 가족의 사회적 관계를 어떻게 활성화하고 형성하는지 그리고 가족 구성원 간의 협상과 어떻게 관련되고 외부인에게 가족의 사회적 위치를 어떻게 드러내는지 깔끔하게 보여준다. -304쪽

보다 일반적으로 아이들은 가족 생산에서 어떤 부분을 수행하고 있는가? 소비에서 나타난 것을 제외하고, 가족이 그 경제적 기능을 잃어왔다는 일반적인 생각은 또 다른 오해,즉 아이들이 가족 경제에 더 이상 기여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함축한다. 게다가 아이들이 수행하는 가사일은 아동의 특성이나 기술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되지,진지하게 그 부모를 돕는다고 인식되지 않는다. (중략)그러나 가족 생산은 단지 어른만의 일도 아니고,단순히 교육 장치도 아니다.아이들의 기여를 자세히 관찰해보면,전체 가족에 대한 그들의 상당한 경제적 관계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여기서-3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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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일상생활 - 사랑, 결혼, 그리고 페미니즘 현대의 지성 119
크리스토퍼 래쉬 지음, 엘리자베스 래쉬 퀸 엮음, 오정화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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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쉬가 묘사해놓은 현대의 초상에서 보여지는 대부분의 현대의 삶은, 모든 활동 영역이 엄격한 검열 과정을 거쳐야 하며, 과학과 합리성이 인간의 경험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게 하고, 훈련된 전문가들만이 인간 존재의 일상적인 행위들을 지도해줄 수 있다는 전제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러한 합리화 원칙에 의해 재구조화된 생활은 권력을 확장하기 위한 법인형 자본주의와 현대 자(12)유국가주의의 물결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것은 관료 구조와 온정주의적 윤리를 수단으로 이룩해낸 것이었다. 국가를 대신해 활동하는 서비스 직업은 개인적인 공간으로 침투해 들어와,일상의 문제들을 다루는 데 있어 습관과 관습 대신 비교적인 기술을 쓰도록 하는 데 일조하였고, 민주주의와는 상치되게 지식층들에게 의존하는 상황을 불러들이게 되었다.-12,13쪽

감시와 조사 궁극적으로 외부 전문가들에 의한 조작에 모든 생활이 종속됨에 따라 인간 경험의 풍부한 국면을 보여주는 일상생활,특히 래쉬에게는 민주주의 시민의 목표이자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일상생활은 강등되어졌다. -13쪽

래쉬는 20세기에는 사실상 낭만적 사랑에 대한 반감 현상이 나타났으며,이는 정열적 사랑과 결혼이 공존한다는 생각의 소멸을 의미하고,다시 에로스를 위험한 존재로서 두려워하는 것으로 회귀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우리 시대는 정열적인 끌림에 기초하여 평생을 함께 보내야 하는 관계보다는 안전하면서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 있다고 구속적 요구로부터 자유로운 우정에 더 의지하고 있다.장식적으로 표현된 성욕보다는 사실에 입각한,감정이 절제된 이해심을 더 원하는 세대인 것이다.성욕에 관한 과학적인 해석과는 달리 성욕에 관한 문학적,예술적 묘사는 종종 신비스러움과 충동이 행복하고 견고한 결혼의 기반임을 인정한다.-16쪽

19세기 중엽에는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을 비롯한 여러 페미니스트들이 편의상 여성과 남성이 근본적으로 지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가정성 예찬을 믿는 사람들(많은 역사가들에게는 반동으로 몰렸다)은 상류 사회 풍습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판을 증가시켜 좀더 자유로운 여성성의 개념을 창조하였다. 여성은 결과적으로 도덕적 질서의 필연적 수호자들로 여겨졌으며,모성의 영향력은 가정의 안팎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의 치유책으로 여겨지게 되었다.-18쪽

19세기 가정의 이상화는 가부장적 관계를 재생산한 것이 아니라 그 대신에,래쉬가 논쟁하는 바,여성에게는 여전히 똑같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신부성주의neopaternalism를 만들어내는 데 일조하였다.많은 여성들은 권위를 주장하는 방법으로서 가정성 예찬을 기꺼이 받아들였다.그 과정에서 그들은 가족 문제에 대한 조언을 남발하는 이들과 의사들을 종종 그들의 편으로 받아들였다.아이러니컬하게도 여성들이 이렇게 소위 전문가라는 이들을 수용한 것은 전문가와 치료적 사고방식에는 헤게모니의 발판을 마련해주고,여성들 자신의 권위는 상실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18,19쪽

역설적으로 래쉬의 해석에서는 가족의 사생활 중심주의로의 경향이 가족에 대한 완전한 침입을 수반하게 되어 자유적인 민족국가를 뒷받침해주는 치유 정신의 승리를 불러왔다.개인주의에 있어서는 필수적인 가족의 사생활 중심주의는 과다한 감정적 요구를 가족 구성원 간의 관계에 위치시켰고 이러한 긴장감을 완화시키기 위해 치료를 위한 조직이 개입하였다.노골적인 힘의 과시가 아닌 감시와 잠입을 통해 자신의 힘을 지탱하였던 자유 국가는 이러한 가정의 위기로부터 이득을 보았다.이렇게 '비강합적,비권위적이고 교묘히 농간을 부리는 지배'는 원래는 가부장적 지배를 없애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행동의 효과에 대해 신뢰할 수 없도록 만듦으로써 새로운 국(24)가 권위를 형성하였다. 외부 전문가들의 침입,전문 인력들에 의한 개인 생활과 가족 생활에 대한 책임 인수,그리고 삶에 대한 거시적 합리화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자기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차원을 넘어서 더 숭고한 목적에 공헌함으로써 얻게 되는 의지와 자존감을 잃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24,25쪽

가정 예찬을 껴안은 여성들과,의사들과 동맹을 맺은 많은 여성들은 일시적으로는 가족에서의 그들의 위치에 힘을 얻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외부인들에게 새로운 힘을 이양하는 꼴이 되었다.후기 참정권론자들이 진보파의 공평무사한 과학적 전문 지식에 대한 무한한 신봉과 개혁파들의 섹슈얼리티 제어를 지지했던 것은,모든 인간 행동을 과학적 관찰과 통제에 종속시키려는 거시적 노력의 일환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다.-25쪽

이와 같이 구시대의 전통인 가부장제가 자유주의 국가라는 새로운 헤게모니에 의해 대체되는 것이 대국적인 그림이다.래쉬에게는 이 두 가지 견해 모두 탐탁치 않게 여겨졌지만 분명한 것은 래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은 세상을 이해하는 데 과학만이 유일한 방법이 되지 않는 그런 삶이라는 것이다.(하버마스가 말하듯)"삶에 있어 식민화는"존재하지 않는다. 가정은 가부장적이(25)지 않으며 과도하게 사유화되거나 전문가들에 의해 침해받지 않은 곳이다.대신 그것은 밖을 내다보고 구성원의 감성적 필요만이 아닌 그 이상을 성취해주며 개인적이지도 정치적이지도 않고 공동체적으로 인간적인 삶을 형성하는 자발성과 관습의 통합체인 일상생활의 기초를 만들어낸다. 즉 평등성 또는 민주주의라는 의미 있는 개념의 기초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 이상 책머리에 중 일부-25쪽

18세기 여성주의자들은 처음으로 남성성과 여성성이 교육에 의해 변화 가능한 사회적 관습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반면,여성에 관한 논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인간이 성 역할에 맞춰서 성장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그들에게는 현재 여성의 모습-여자들이 그렇게 되도록 운명지어진 모습-이외에 여자들이 어떤 존재일 수 있는지 또는 어떤 존재가 되야 하는지는 상상도 못 했던 문제였다. 그들은 미덕을 자신의 지위에 걸맞은 행동으로 정의하였는데 이 지위에는 사회적 계급과 젠더도 포함되(38)어 있었다.여성성의 장단점에 대해 토의했던 이들은 태생적으로 한 성이 다른 한 성보다 더 우월하게 만들어졌는지 아닌지의 추상적 문제는 상관하지 않았다.그러한 질문은 중세 또는 초기 근대적 사고에서는 전적으로 무의미하게 여겨졌을 것이다.-38,39쪽

17~18세기에 출현하기 시작한 가정생활에 대한 새로운 개념에 이미 내재되어 있었던 현대 페미니즘은 결혼과 남녀 평등을 화해시키려 노력하였다. 세속적인 견해에서 보자면 이것은 유토피아적인 시도였다. 결혼에 대한 비판론은 수도원 생활에 대한 가톨릭의 비판론과 닮아 있다.그것은 그 제도가 공격을 받아도 변하지 않을 것임을 전제로 한 것이다.부패하고 음탕한 수도승들을 다른 개신교도들처럼 신랄하게 비난하면서도 수도원 생활이라는 제도 자체에 대해서는 의문시하지 않는 에라스무스와 라블레 같은 작가들처럼,결혼의 비판자들-종종 똑같은 작가들이었다-도 결혼이 항상 사랑하는 이들의 결합이기보다는 혈통과 재산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임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였다.-57쪽

결혼뿐만 아니라 낭만적 사랑 자체도 인기가 없어졌다.첫눈에 빠진 사랑은 결혼을 위한 든든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고 우리는 듣고 또 들어왔다.같은 취미와 취향,서로 타협하려는 마음,그리고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이런 것들이 사랑이 식었을 때 더 오래갈 것이다.연인들은 서로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그들 중 하나가 상대방을 벗어나게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해야만 한다. 정절이나 영구불변,영원한 애정을 기대하는 것은 실망을(70)자초하는 것이다.우리에게는 동성간의 우정이든 이성간의 유형이든,우정이 사랑보다 바라는 것이 적고 덜 강렬하기 때문에 더 믿을 만해 보인다.우정은 성과(오늘날 적어도 안전한 성과)쉽게 공존하지만,예술과 사상에 의해 성적 충동을 장식한 것인 에로스와는 공존하지 않는다.우리는 우리의 성적 충동이 장식되지 않은 것을 좋아하며,삶의 현실 가운데 자기 자리에 안전하게 놓여 있는 것을 좋아한다.-70,71쪽

성의 즐거움조차 이제는 에이즈에 의해 그늘이 졌다.성욕이 인간의 삶에 있어서 위험하고 어둡고 예측 불가능한 것이라는 인식-그것이 장식되어 있는 형태에 있어서는 더욱더 그러한데-이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우리에게 돌아왔다.그렇게 혼란을 일으키는 어떤 것이 지속적인 관계로 이끌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에로스가 문명화시키는 영향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차치하고,에로스가 안정시키는 영향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엄청난 신비화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71쪽

중매 결혼이 사랑에 기초한 결혼에 자리를 내주면서,결혼의 근대화가 젊은이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증가시켜주었다고 일반적으로 가정된다. 만약 그렇다면,영국과 대부분의 서구 유럽에서 '근대화'의 시작은 16세기로 연대가 추정되어야만 한다. 그 이후부터 그리고 아마도 훨씬 이전부터,영국에서 결혼은 상당히 늦은 나이에 이루어졌고,게다가 한 번도 결혼하지 않은 이들의 비율은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보다 훨씬 더 높았다.이 두 사실은 결혼이 거의 예외 없이 중매되고 따라서 이른 나이에 결혼이 보(96)편적인 경우에서보다 개인의 자유로운 동의에 훨씬 더 많이 의지했음을 보여준다.-96,97쪽

그러나 바로 이 자유는 결혼의 근대적 개념이 모양을 갖추기 시작한 바로 그 시기에 점점 더 많은 공격 아래 놓이게 되었다.초기 단계에 근대화는 물론 강요된 결혼에 대한 공격의 형태를 띠었지만,또한 부모 동의의 중요성,신중함과 주의의 필요성-그리고 또한 주목되어야 하는 것은,결혼 결합의 분해 불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강조의 형태를 띠기도 했다.특히 이는 결혼 예약과 비밀 결혼에 대한 오랜 투쟁의 형태를 띠었는데,이는 부르주아 개혁가들에게는 개인적 도덕의 새로운 기준과 노동 훈육의 새로운 양식을 부과하고 옛 관습에 완고하게 집착하는 대중에게 근검의 미덕과 즉각적 만족의 거부 및 식견을 주입하려는 일반적 캠페인의 한 부분이었다.-97쪽

세상은 개혁의 필요성을 절규했고,여성의 가정적 재능은 결코 이들이 중요한 일을 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요인이 될 수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그것은 가정적인 미덕에 사회 전반에 대한 봉사라는 의무를 부여했다.어떠한 경우에도 가족은 외적인 영향력-알코올 중독,매매춘,투자광,부를 향한 광란의 아귀다춤-으로부터 완전히 보호받을 수 없었다.이러한 악이 가족에게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에 의식 있는 주부라면 자신의 영역을 보호하기 위해 악에 대항하는 공적 운동에 참여해야만 한다는 논의가 가능했다.일찍이 1820년대와 30년대에 여성들은 가족 생활에 위해가 되는 요소를 없애려는 도덕적 개혁 모임을 조직하기 시작했다.-114쪽

새로 나타난 행정과 전문직 엘리트들은 비록 부분적으로나마 자본주의 최악의 오용을 완하하였다고는 하지만,그만큼 특화된 훈련과 전문성에 대한 파괴적인 숭배에 의존하였다.점점 더 정교해지는 사회 봉사 체계-복지 국가의 기반-를 통해 시장을 제어하고자 하는 노력은 자멸적인 것이었다.그것은 일상의 신뢰(122)능력을 침식했고 가족을 관료의 침입에 노출시켰다. 여성이 남성과 다르다는 믿음에 대한 광범위한 천착은 가사와 관련된 어떠한 행동이든,심지어 가장 내밀한 문제에 대해서조차도 점차 전문적인 조력을 존중하여 결정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많은 여성들은 그들의 권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가족 밖의 전문가들과 연대하였다.-122,123쪽

노동 세계와 가정 생활의 극단적인 분리를 전제로 하는 현대의 가정은 19세기의 창조물이다.가내 수공업의 쇠락과 급여 노동의 발달은 가족을,점차 비인격적인 시장 체제에 지배당하는 공적 세계로부터 떨어진 사적인 휴식처로 인식하게 하는 것을 가능하게-혹은 필요하게-만들었다.비정한 세상에 존재하는 안식처로서의 가족상은 미국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산업적 질서에 의해 야기된 양가적인 감정을 다스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128쪽

사회적 가사 social housekeeping의 시대-130쪽

청소년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도록 요구받게 된 것은 상당히 최근에 일어난 새로운 일이며,근대 민족 국가의 발생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정규 교육은 청소년기를 연장해주며,동시에 성인 세계와의 감독되지 않고 교육학적으로 중재되지 않은 접촉을 가로막는다.다행히도,학교들은 결코 완전히 자기 충족적이지는 않다.세상의 지식을 열망하는 청소년들은 주로 허가받지 않은 독서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교육학적 감독을 어떻게든 피해 다니고 어른들의 방식에 대한 대리 경험을 얻는다.-168쪽

9장 치료국가에서의 생활 / 국가별로 존재하는 사소한 차이를 제외하고는 가족 형태는 서구 전역에 걸쳐 나타난 유사한 패턴을 따라 발달해왔다.19세기에 이르면 젊은이들은 부모의 직접적 관여를 최소화한 채 결혼할 권리를 획득했다.결혼은 두 가계의 결합이라기보다는 두 개인의 결합이 되었다.또한 아동의 취약성과 순수함을 새로이 강조함으로써 육아,특히 아이의 발달에 어머니가 끼치는 영향에 대한 관심을 증가시켰다.아이들 각자에게 이제는 그들이 당연히 누릴 수 있다고 생각되기 시작한 권익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부모들은 자녀의 수를 의도적으로 제한하게 되었다.대가족은 개인적이고 사적이며 부부(199)중심적인 가족 형태에 자리를 내어주었다.(성별에 따른 영역이라는 원칙에 의해 합리화된)가정성 예찬과 성별에 따른 역할의 엄격한 분업은 여성을 일터로부터 배제시켰지만 가족 자체에는 여자들이 더 큰 통제권을 가지도록 만들었다.생산 기능을 잃어버린 가족은 이제 자녀 양육과 감정 위안이라는 측면에서 특화되었고,시장이라는 비인간적 원칙을 중심으로 조직된 세계에서 필요성이 커진 피난처를 제공하게 되었다.-199,200쪽

가정성 예찬은 여성을 가정 내에만 예속시키기도 했지만 동시에 가족뿐 아니라 가족의 이해에 관계된 모든 사항에 대한 도덕적 결정권자로 위치시키기도 했던 것이다.-201쪽

가족 생활의 감정적 측면이 강화되면서(데글러와 다른 많은 학자들은 이 새로이 등장한 친밀함에 너무나도 감탄하면서 큰 주의를 기울였다)가족간의 협동이 증대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내와 남편,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이 커지는 결과를 낳았다.이러한 갈등은 부모 자식 간의 성적 매력,그리고 이것이 훗날 성인 남녀간의 관계에 초래하게 되는 복잡한 문제들을 그대로 드러나도록 만들었다.-207쪽

성적,사회적 통제에 대한 예방 과학 preventive science-208쪽

푸코에 의하면 19세기의 성에 대한 태도를 특징짓는 것은 침묵이 아니라 다변이었다.즉 감정을 담화로 번역해냈던 것이다.성욕에 대한 지각을 억압하기는커녕,의학 전문가들은 사람들이 풍부한 묘사로 성에 대해 충분히 말하도록 장려했다.-210쪽

참고 - 치료 국가는 필립 리에프philip rieff,니콜라스 키트리nicholas kittrie 등이 호칭함. -211쪽

부르주아의 가정성에 대한 예찬은,한편으로는 귀족주의적 방탕함에 반대하고,다른 한편으로는 대중적 부도덕에 대해 반대하는 것을 통해 스스로 정의하였다.-214쪽

돈젤로는 제휴 체계의 파괴가 빈민의 가정화와 동시에 일어났음을 밝혔다.19세기 초,의사와 공무원들은 빈민간의 불규칙적인 결합,사생,근친상간,그리고 다른 여러 형태의 성적 부도덕이 이들을 만성적 비도덕화의 상태에 두고 근면한 노동자가 되는 길을 막아서 결국 공적인 자선에 의존하도록 만든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가정화를 위한 규칙적 습관들을 장려함으로써,개혁가들은 이들을 근엄하고 자립적인 사람들로 만들기를 희망했다.여기서 다시 한 번,이들은 남편에게 맞서서 주부들을 조종하려 했고,여자들을 가정 내 도덕의 중재자로 만들려 했다.돈젤로의 공식에 의하면,이들은 가족들의 정부를 가족을 통한 정부로 대체한 것이다.-215쪽

이러한 개혁은 세대간의 자율적인 결속을 허용하는 대중적 영토를 침식해 들어갔다.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는 학교,사회 운(215)동 단체,그리고 청소년 법원 들에 의해 수행되는 국가의 감독 하에 놓이게 되었다.감독 기관은 데글러가 지적한 바와 같이 가족 구성원 간에 불신을 조장하는 동시에 아동과 법원간의 적대적 관계를 불식하고,이로써 가족의 권리가 법을 강제하는 도구에 얼마나 협력하느냐에 달려 있게 되는 상황을 만들어냈다.-215,216쪽

청소년 법원은 처벌을 예방으로 대체했으며,판결을 감시로 대체했다.법원에서는 청소년의 범죄를 건강하지 못한 가정 환경의 징후로 다루었고,이는 '인간 관계를 다루는 기술자들'이 가족의 도덕성을 심문하고 필요하다면 아이를 집으로부터 격리시키고,가족들에게 새로운 사회적 위생의 원칙에 순응할 것을 요구하는 것을 정당화시켜주었다.-216쪽

가족은 이론상으로는 언제나 정당하지만,실제로는 언제나 의심받고 있다.-218쪽

현재 상황에 대한 나의 인식은 여기에서부터 돈젤로의 생각과 갈라지기 시작한다. 그는 프(220)로이트와 케인즈를 자유주의 질서의 위대한 안정자로 보았다.프로이트와 후견적 기관을 너무 가까이 일치시켰다는 점을 제쳐두더라도,돈젤로는 케인즈와 정신의학적 조정법 양쪽 모두에 존재하는 불안정성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케인즈 식의 경제학은 자유 자본주의의 만성적 문제 중 일부는 통제가 가능하도록 했지만,우리가 오늘날 너무도 명백히 본 바와 같이 장기적 해결책은 제시하지 못했다.치료학적 방식의 사회 통제에 대해서도 같은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220,221쪽

이러한 통제는 사회적 의존 형태를 만들어내고,정치적 참여를 방해한다.그럼으로써 사회적 훈육이 지닌 문제 중 일부는 단순화할 수 있었겠지만,동시에 필요가 있을 때 정치 지도자들이 정책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동원하는 일도 점점 더 어려워지게 되었다.-221쪽

유권자들의 냉당함,대중의 무관심과 냉소주의,지도자들이 우리의 주의를 끌고자 하는 국가적 질병, 이 모두는 대중이 참여하는 옛 기제가 침식되고 시민이 전문 지식의 소비자로 전락하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수동적이고 의심에 가득 찬 비정치적인 유권자는 더 이상 국가적 단결이라는 명분으로 고무되지 않는다.이러한 유권자에게 희생을 부르짖는 지도자는 힘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공식적으로는 민주적으로 유지되는 사회에서,사람들은 오로지 그것을 만들어내는 데 관계한 정책을 지지하기 위해서만 희생을 감수할 것이다. 그러나 치료적 통제의 새로운 기제는 사람들이 정치적 생활에,혹은 자기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여타의 의사 결정에 활발하게 참려하는 것을 배제하는 경향이 있다.치료 국가의 지도자들은 이전에는 반항적이었던 군중을 어느 정도 진정시켰지만,이제는 자신감의 위기에 전면적으로 맞닥뜨리게 되었음을 알게 된다.-221쪽

가족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들은 돈젤로의 지도를 잘 따라 가족에 대한 국가적 정책을 공식적으로 찾는 일과 아무런 관계를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가족이 필요로 하는 것은 관료들을 그들의 자리에 가만있게 하는 관료들에 대한 정책이다.-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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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의 몫 - 모더니티총서 10
조르주 바타유 지음, 조한경 옮김 / 문학동네 / 2000년 12월
절판


소모의 개념 중 일부 / 유용하다라는 말의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토론은 인간의 사회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으로서 중요하다. 그러나 그 토론에선 토론의 주체가 누구이건 제기되는 의견들이 어떤 것들이건, 결국 근본적인 질문은 회피되고 토론 자체를 그르치게 되는 경우를 종종 확인할 수가 있다. 실제로 오늘날의 개념들은 얼마나 다양한지,인간들에게 유용한 것이 어떤 것인지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정확히 정의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사람들은 문제의 해결을 위해 유용성과 쾌락을 넘어서는,다시 말해 전혀 입증할 수도 없는 원칙들-예컨대 명예와 의무,신과 정신-을 찾아 도움을 청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특히 그 문제가 어려운 것임을 잘 반증(29)하는 한 예이다.그러나 명예와 의무가 금전적 이익을 위한 위선적 수단이라면, 신과 정신은 닫힌 체계를 인정하지 않는 몇몇 사람들이 지적 혼란을 숨기기 위해 사용하는 가면이 아니던가.-29,30쪽

전체적으로 볼 때 사회적 활동과 개인의 모든 노력이 가치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떤 것이건 간에 근본적으로 생산과 보존의 필요성으로 환원될 수 있어야 한다.예술에 관계된 것이든 허용된 방탕이나 도박에 관계된 것이든 쾌락은 오늘날의 지적 판도로 볼 때 부수적인 역할을 하는 오락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된다.-30쪽

인간의 행위가 생산과 보존이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철저히 환원될 수는 없지만 소비는 명확히 둘로 구분된다.첫째,소비는 일정한 사회의 개인들이 생명을 보존하고 생산활동을 지속시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으로서 표현될 수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생산활동에 필요한 기본적 조건으로서의 소비이다.둘째,또하나의 소비는 원시사회가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활동들로서 궁극적인 생산 목적 또는 생식 목적과는 상관없는 사치,장례,전쟁,종교 예식,기념물,도박,공연,예술 등에 바쳐지는 소비이다. 두번째 부분의 소비들은 생산의 중간 수단으로 이용되는 소비와는 다르기 때문에 순수한 비생산적 소비의 형태를 지칭하는 용어가 필요한데, 나는 그런 소비를 '소모'라고 부르겠다.-32쪽

인간이 아무리 비참한 지경에 이른다 해도, 생산을 목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보존에 대한 배려가 비생산적인 소모에 대한 배려를 장악할 만큼 인간의 불행이 사회보다 우세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일단 확보된 우월성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은 소비계급에 의해 행사되었으며,가난은 모든 사회적 활동으로부터 배척받았다.그래서 비참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권력의 권내에 진입하려면 피를 흘리는 혁명에 의한 파괴,다시 말해 한계를 모르는 사회적 소모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소모에 비하면 생산과 획득은 부차적인 것으로서, 생산과 획득의 부차적 특성은 교환이,양도된 물건들의 사치스러운 파괴로 다루어지던 원시 경제 속에서 가장 명백하게 나타난다.교환은 표면적으로는 획득의 과정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소모의 과정으로 제시된다.-36쪽

포틀래치는 어떤 흥정도 배제하며,일반적으로 경쟁자를 모욕하거나,경쟁자에게 도전하거나,또는 그 경쟁자를 복종시킬 목적으로 상당한 부를 공공연히 과시하면서 거저 주는 것으로 이루어진다.선물의 교환가치는 선물을 받은 자가 선물을 수락할 당시 발생한 의무,즉 후일 자기가 받은 것 이상으로 돌려주겠다고 한 약속을,도전에 응하는 방식으로 모욕을 떨치고 이행할 때 얻어진다.그러나 증여가 포틀래치의 유일한 형태는 아니다. 포틀래치는 상상을 초월하는 부의 파괴를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이 두번째 형태를 통해 포틀래치는 종교적 제의와 결합된다.-37쪽

부유한 사람이 권력을 얻으면 부는(38)획득으로 보인다. 그러나 손실의 능력이 다름아닌 권력이라면 부는 전적으로 상실의 방향을 향해야 한다. 영광, 명예가 권력과 한몸이 되는 것은 오로지 전적인 상실에 의해서이다.-38쪽

부와 함께 기능적 소비의 의무를 수락했던 근대 부르주아지-부를 소(41)유한 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지-는 의무를 거역함으로써 스스로 정한 원칙을 부정하고 만다.부르주아지는 오직 자신을 위해서 내부적으로만,다시 말해서 가능한 한 다른 계급의 눈에 띄지 않게 소비한다는 점에서 귀족과는 구분된다. 이 특별한 형태의 계급은 처음에는 그보다 더 강한 귀족 계급의 보호 아래에서 부를 발전시켜나갈 수밖에 없었다.제한적 소비라는 이 굴욕적인 개념들에,17세기 이후 소비가 발전시킨 합리적인 개념들이 화답한다. 단어의 통속적인 의미에서 볼 때 그리고 부르주아적 의미에서 볼 때 합리적인 개념들이란 엄밀히 경제적인 세계의 표현이라는 의미 외에 또다른 의미는 갖지 않는다. 소비에 대한 혐오감은 부르주아지의 존재 이유이자 합리화이다.소비에 대한 혐오감은 동시에 부르주아지의 끔찍스러운 위선의 원칙이기도 하다.부르주아지는 낭비를 봉건사회의 근본적인 도탄의 원인으로 보았다.-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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