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체계
장 보드리야르 지음, 배영달 옮김 / 백의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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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차적 체계:수집 중. 모든 사물은 소유, 즉 이 열정적인 추상화와 같다. 거기에서는 단 하나의 사물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언제나 일련의 사물들, 극단적인 경우에는 사물의 실현된 계획인 완전한 일련의 사물들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물의 소유는,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늘 매우 만족시키는 동시에 매우 실망시킨다. 즉 모든 일련의 사물들은 소유를 연장시키고 불안하게 한다.-135쪽

사물의 특수성, 즉 사물의 교환가치는 사회적,문화적 영역에 속한다. 그와 반대로 사물의 완전한 특이성은 내가 그것을 소유하는데서 비롯된다.-141쪽

퇴행적 방식 끝에,사물에 대한 정열은 순수한 질투 속에서 완성된다. 따라서 소유는 사물이 다른 것들에 비해 가질 수 있는 가치로,그리고 다른 것들에게서 사물을 빼앗는 것으로 가장 깊이 만족한다. -152쪽

일련의 것 속에서의 차이는,실제의 흥미를 대신하는 형식적 흥미를 유발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구매 동기에서 작용하는 것은 연상에 의한 순전한 구속이다. (중략)거꾸로,수집의 방향을 상실한 수집가는 가까스로 수집을 해나간다. 그는 그에게 실제의 흥미를 표현하는 책의 제목을 보고서 책을 사지는 않을 것이다.-161쪽

수집가가 자기 자신의 명백한 담론을 재구성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이 사회적 담론-사회적 담론의 규칙들은 그에게서 벗어난다-속에서 소외되고 사라져버림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는 자신이 열린 객관적 불연속을 닫힌 주관적 불연속으로 무조건적으로 옮겨 놓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때 그가 사용하는 언어 자체는 일반적인 가치 전부를 상실한다. 따라서 사물들에 의한 총계는 늘 고독을 나타낸다. 그것은 의사소통을 무시하는 것이고 의사소통도 그것을 무시하는 것이다. -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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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 이데아총서 9
발터 벤야민 지음 / 민음사 / 199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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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재 공개 - 수집에 관한 한 강연 중 . 나는 여러분들에게 어떤 수집가가 그의 장서에 대해 갖는 관계,그러니까 어떤 수집의 내용보다는 수집하는 일 자체가 어떠한가를 한 번 보여주고 싶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수집하는 일을 책을 구입하는 여러(30)가지 종류의 방법이라는 문제와 결부시켜 고찰한다면 그것은 전혀 자의적인 것이 될 터인데,왜냐하면 수집하는 일을 책을 구입하는 이런저런 방법이라는 식으로 파악하는 것은,자신이 소유한 장서를 바라볼 때 밀려드는 모든 수집가에 공통된 기옥의 밀물을 막아버리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30,31쪽

시대,지역,손재주,전 소유주-사물의 이러한 배경들은 서로 합쳐져서 수집가에게는 하나의 마력적 백과사전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마력적 백과사전의 핵심이 바로 수집가가 소유하는(31) 대상물의 운명이다.-31,32쪽

여러분들은 아마 책을 읽지 않는 것이 어떻게 수집가의 특성이 될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33쪽

내가 부르는 값으로는 그 책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것이 너무나도 뻔했기 때문에 나는 아예 값을 부르지 않았다. 나는 애써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러자 내가 기대해 마지 않았던 일이 일어났다. 아무도 그 책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값도 부르지 않은 채 옆으로 밀쳐졌다. 나는 며칠 동안의 시간적 여유를 두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였고,그래서 일주일이 경과한 어느날 그 책을 고서점에서 다시 발견할 수 있었다. 이 경우는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음으로 해서 책을 구입할 수 있었던 경우라고 할 수 있다.-37쪽

다시 말해 이러한 수집가에 있어서는 사물이 그의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바로 그 사물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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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0-05-02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터 벤야민까지 참조하시나요? 아아, 충분히 그렇겠네요.^^ 벤야민에 대해 아는 건 없지만, 아렌트의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에서 나왔던 벤야민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문지에서 나왔던 책인데, 제법 오래된 책이라 서고 깊숙한 곳에 있을 거예요. 시간이 나시면 한 번 집어들어보세요. 자살과 연관지어 읽으면 미묘한 울림이 있더군요.

얼그레이효과 2010-05-02 14:54   좋아요 0 | URL
오. 좋은 추천 고맙습니다.^^
 
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 - 사회학 이야기 지식전람회 31
노명우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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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보학적 탐색의 목표는 미디어의 역사를 '단절'을 중시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계보학은 발전의 연속성 대신 역사에서 발견되는 단절과 불연속에 주목한다. 역사 일반처럼 미디어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단절과 불연속을 찾아낼 수 있다. 하지만 미디어의 역사는 매우 특이하다. 미디어의 역사에서 발견되는 단절은 근절적 계승이 아니라,병렬적 동시성의 특성을 지닌다.책이라는 미디어와 텔레비전이라는 미디어 사이에는 분명 단절이 있지만,책 이후에 등장한 텔레비전이라는 미디어가 사회를 지배해도 이전의 미디어인 책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이렇듯 미디어의 역사에는 중요한 단절이 기록되어 있지만,단절 이후 모든 시기의 미디어는 동시에 공존한다. -46쪽

미디어의 계보학을 파악하기 위해 나는 두 가지 갠며을 구별하고자 한다. 미디어는 분명 도구의 성격을 지닌다.도구의 성격을 지니는 미디어를 지칭할 때 나는 '도구-미디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한다. 도구-미디어는 특정 미디어가 도구적 성격만을 지니고 있으며 문화적 형식을 갖추지 못했음을 의미한다.인류의 역사에서 무수히 많은 미디어가 출현했지만,모든 도구-미디어가 살아남지는 못했다.-47쪽

도구-미디어가 문화적 형식을 획득하면 한 시대를 특징짓는 중요 기준이 된다. 이렇게 단순 도구-미디어에서 벗어나 문화적 형식을 획득한 미디어를 '환경-미디어'라 부른다. 도구-미디어는 개별 인간이 개인적 선호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지만, 환경-미디어는 마치 공기처럼 개별 인간이 선택할 수 없다. 만약 공기라는 환경을 인간이 거부하면 생명체로 살아갈 수 없듯,환경-미디어화된 도구-미디어는 개인이 적응하지 않으면 도태되도록 만드는 힘ㅇ늘 지녔다. 환경-미디어는 에피스테메적 미디어이기도 하다. 환경-미디어는 단순한 기술적 불연속뿐만 아니라 인식론적 단절 또한 불러일으킨다.-48쪽

텔레비전과 영화의 결정적 차이는 텔레비전은 방송이라는 제도를 통해 현실화된다는 점이다 영화는 영화관이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 들어와 있는 관객들만을 대상으로 하지만, 텔레비전은 말 그대로 방사된다. 영화는 영사기가 쏘는 빛을 인식할 수 있는 어두운 특정 공간 안에서만 유효하지만,텔레비전의 유효거리는 무한하다. 방송이라는 시스템과 결합한 텔레비전은 '양'이라는 개념을 일상화한다.-97쪽

파노폴리 : 파노폴리는 선물세트처럼 개별 상품이지만 특정한 맥락을 형성하는 상품의 집합체를 의미한다. 만약 우리가 파노폴리를 구성하는 하나의 상품을 단품으로 구매하게 되면, 그 상품과 파노폴리라는 맥락 위에 놓인 또 다른 상품을 구입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겨나기도 한다.-1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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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문과에서는 무얼 하는가

가끔 연구실 울타리를 벗어나, 직장인이 된 학부시절 친구들을 만나거나, 혹은 술에 취해 택시 아저씨와 예상하지 않았던 친밀한 사담을 나눌 때, 나오는 초반부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oo야, 너 지금 전공이 뭐라고?", "학교는? 그럼 전공은?" 그럼 나는 머릿속에 조금 계산을 해야 한다. 내 전공명을 미리 밝히자면, "영상커뮤니케이션"이다. 좀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 그럼 뭐 영화 이런거 공부하나?"이렇게 묻는다. 하지만, 대부분 "그게 뭐 공부하는 곳이오?"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나는 이런 경우를 여러번 학습했으니, 다음에 그런 상황이 또 생기면, 나름의 대처를 해야겠다고 머리를 굴린다. (친척들이나 부모님 친구분들에게는 혹은 처음 만난 사람에게는)"그냥, 신방과라고 할까?", 아니면 (공부에 관심있는 친구들에게는) "문화연구한다고 해?" 뭐 이정도로 대답을 준비해놓는 것이다.   

"예, 신문방송학 전공입니다.."이정도로 포장해서 얼버무리면, 이내 돌아오는 대답은 "언론고시 준비해야지?" 라든지, 좀 세세하게 뭘 안다고 표시하시는 분은, "조선일보 들어가. 거기 페이 두둑해"정도 같은 친근한(?) 멘트를 쳐 주신다. 내가 세세하게 알려주는 경우, 조금 피곤하거나, 아니면 어색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나도 모르게 세세하게 설명해주다가 목에 힘이 들어가고, 남은 전혀 관심없는 전문용어로 나도 모르게 브리핑을 하니 말이다.  (친구들은 벌써 고개 숙인 채 안주 먹거나, 지들끼리 딴 이야기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나만의 것은 아니다. 나와 같이 공부하는 동료 연구자들도 똑같이 겪고, 그런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웃거나 진부한 농담들을 늘어 놓는다. (하지만, 가끔은 진지한 것 같은 농담) "에이..그러고보면 결국 기술 배우는 게 최고야,최고"(대부분 인문사회과학 한다는 친구들의 진부한 넋두리) "그냥 학교 앞에서 포장마차 하나 차릴까"(이럴 땐, 구질구질하게 '석사박사' 같은 꼭 먹물 티를 내는 간판을 구상하는 친구가 있다) 그러나 웃든, 농담을 늘어놓든 그것이 끝나고 난 후의 분위기는 우울한 어색함이다. 결국 한 숨으로 귀결되는 게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원망하던 논문을 손에 부여 잡고 기계적으로 연두색 형광펜으로 줄을 좍좍 긋는다.  

그러나, 몇 주 전부터 드문드문 듣고 있는 중앙대 사태를 생각해보면서, 나는 밥상에 반찬은 별로 없지만, 너보다 더 불쌍한 사람들이 있단 걸 명심하라는 기도를 하는 엄마와 그 기도를 듣는 아들의 식사 장면 같은 기분을 요즘 늘 느끼고 산다.(하지만, 동정을 넘어서, 우리는 진정한 연대의 의지를 보여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그리고 오늘 알라디너 로쟈님의 블로그에 들어가 업데이트된 기사를 보며 착잡함을 감출 수 없었다. 

어찌 보면, '전공을 밝히다/전공을 갖고 있다'는 것은 단순히 그 전공의 '쓸모 /기능'보다 더 중요한 걸 우리가 이미 선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그 전공과 연계된 내 삶의 방식 그리고 의미이다. 지금 정리대상에 포함된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공부하는 어문학부 학생들은, 우리 사회가 만들어놓은 '쓸모-경계선'에서는 하나의 '명함-기능'으로 치부될 지 모르지만, 그것보다 우리가 더 깊게 바라봐야 할 것은, 그 안에서 그 나름대로의 삶을 꾸려나가고 있는 이들에 대한 생존의 권리다.  

여기서 생존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와 가까이 하는 시한부적 학문 연구의 삶이 아니라, 얼마든지 스스로의 학문을 선택하고, 그 선택에 보람을 느끼며, 그 선택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누려왔던 지적 양분을 우리 사회와 공유할 수 있는 사유와 행동의 공간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우리는 삭발을 감행하고, 고가다리에 올라가 울부짖으며, 극단적인 몸부림도 마다하지 않는 친구들의 삶을 단순히 '명함-기능'으로 치부할 수 없다. 그들이 추구하는 기능이라면, 자신의 삶을 사람답게 살고 싶은 기능. 내가 와서 우연이든,필연이든 나도 모르게 젖어버린 학문의 내음을 마음껏 맡을 기능인 것이다. 

외부의 시선에서는, "이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올지 모르겠다. (지금의 대학 문화, 그리고 취업이라는 현실의 장벽 등등)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결국 쓸모와 기능을 물어보고, 대충 듣고선 "아. 그런 곳이구만.."한다. (결국 이런 인식이 이 사태를 불러 일으켰다. 어쩌면 오랫동안 누적된 사회적 '문제')  

하지만,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지금 당신이 정리하려고 마음 먹은 그 물건은 그렇게(이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질문한 당신이 누구인가를 묻는 더 중요한 쓸모를 가졌다고.  

그 신념을 안다면, 그들은 '쓸모의 경계'를 함부로 재단할 권리가 없다. 지난 김예슬 양의 이야기부터, 쭉 흘러오는 어떤 맥락들. 대학을 '버스정류장'으로 여기는 사람들에 대한 일침.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라는 수사 안에서 우리가 대학 안에 계속 남아 있다는 자괴감 대신, 대학이 우리를 계속 밖으로 몰아내려 한다는 생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남아있으면 죄인이 되는 곳. 그건 "논문 잘 되가요"라며 은근히 제 때에 졸업 못하고 있다는 사람들의 불안감을 견주는 상투적 인사가 횡행하는 대학원도 마찬가지다. 이게 우리의 현실. 묵과할 수 없고, 간과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그 현실이 주는 잡음들이 공부하고 싶다는 사람들의 의지를 꺾을 권리는 또한 없다. 중앙대 사태는 공부를 여전히 '여가'로 여기며, 공부를 삶 그 자체로 여기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이 주는 묵직한 시선이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난, 여전히 "대학원 다녀? 편하겠다.."라는 투로 "나도 대학원이나 가볼까.."하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아마 이런 시선에 대한 분노가 이번 중앙대 사태에도 겹쳐져 있다면, 나는 그 학생들의 무의식속에 쌓여진 분노를 충분히 지지하고 싶다. 그들은 여가를 즐기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그들은 삶을 살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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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iked-83 2010-05-02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친구 결혼식에 가서 전공이 "미디어 정치경제학"이라고 했다가 분위기를 망쳐놓고 왔는데, 오늘 이런 글을 보게 되네요. 처음 와보는 서재인데, 공감과 지지를..

얼그레이효과 2010-05-02 14:55   좋아요 0 | URL
'미디어 정치경제학'? 제가 학부 시절, 가장 약한 분야였는데ㅜ.ㅜ , 반갑습니다.^^ 건승하십시오!
 
위대한 영화 1 위대한 영화 1
로저 에버트 지음, 최보은.윤철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06년 12월
구판절판


<쇼생크 탈출>은 1994년 9월 토론토영화제에서 첫 시사회를 가졌고, 몇 주 후에 개봉되었다. 평론가들의 반응은 좋았지만 박스오피스에서는 실패하였다. 개봉 초기 벌어들인 1800만 달러의 흥행 수입은 제작비도 감당하지 못하였다. 작품상을 포함한 아카데미 7개 부문 후보에 오른 후에도 1000만 달러의 수입을 추가로 올렸을 뿐이다. -276쪽

흥행에 득이 될 만한 요소는 별로 없었다. 제목은 끔찍했고,여성들이 좋아하지 않는 '감옥 드라마'였으며, 액션 장면도 없었다. 연기력을 인정받는 배우들이 출연했지만, 그들은 스타가 아니었다. 게다가 러닝타임이 142분에 달하였다. <쇼생크탈출>은 관객들의 좋은 입 소문에 의지해야 하는 영화라는 것이 확실하였다. 실제로 극장에서 간판을 내렸을 때까지만 해도 흥행은 아주 조금씩이지만 지속적으로 나아지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계속 간판을 걸고 있었으면 이후 몇 달간은 스크린에 걸려 있었을 테지만, 대형 사고는 치지 못했을 것이다.-276쪽

대신 홈비디오 역사상 가장 주목할 사건이 터졌다. <쇼생크 탈출>은 비디오테이프와 DVD,tv 방영을 통해 대규모 관객을 만날 수 있었다. 이후 5년간 일종의 사회적 현상이 된 <쇼생크 탈출>은 베스트셀러인 동시에 비디오 대여점에서 가장 많이 대여된 영화가 되었다.<쇼생크 탈출>을 추앙하는 사람들은 이 영화를 자신들이 발견해낸 영화라 생각하였다.-276쪽

(중략)인기투표와 대여순위는 영화의 대중성을 반영한다. 그러나 <쇼생크 탈출>이 가치 있는 영화라고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떠들어대는 이유는 설명하지 못한다. <쇼생크 탈출>은 한 편의 영화수준을 뛰어 넘는, 영적인 경험과 비슷한(276)것이 아닌가 싶다.-276,2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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