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일터가 될 곳에 다녀왔다. 그래도 이 블로그는 꾸준하게. 달라지지 않도록.  

'매섭게' 읽고, '끈질기게' 쓰는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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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8-05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얼그레이님의 손을 거쳐 나올 책들이 기대되는군요^^

얼그레이효과 2011-08-06 05:42   좋아요 0 | URL
후와님 고맙습니다.^^ 아직 이 바닥 신입이라 어리버리모드 작동중입니다.ㅋ

2011-08-06 09: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08 09: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 2011-08-06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축하드려요 기대되는걸요. :)

얼그레이효과 2011-08-08 09:08   좋아요 0 | URL
잘 부탁드립니다!

2011-08-12 15: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13 2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하철에서 테리 이글턴의 《이론 이후》를 읽다가 의미를 좀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을 발견했다. 그 대목은 아래와 같다. 

인간과 다른 동물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다고 주장해온 인본주의자들은 양자를 비교할라치면 질색하곤 했다. 오늘날에는 문화주의자들이 이런 비교에 불쾌해한다. 인간의 본성이나 본질 같은 개념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문화주의자들은 인본주의자들과는 다르다. 그러나 한편에는 언어와 문화를, 다른 한편에는 잔인하고 말 못하는 자연을 놓은 채 양자를 날카롭게 구분하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인본주의자들과 같다. 혹은 그렇지 않다면 문화주의자들은 시종일관 문화를 통해서 자연을 개척해야 한다고, 자연의 물질성을 분해해 의미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본주의자들과문화주의자들의 반대편에는 이른바 자연주의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인간성의 자연적 측면을 강조하며 인간과 다른 동물의 연속성을 보려고 한다.  

사실상 도덕은 자연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물질적인 것과 의미 있는 것을 이어준다. 요컨대 우리의 물질적 자연[본성]은 우리의 도덕적 육체속에서 의미나 가치와 융합된다. 문화주의자들과 자연주의자들은 서로 상반된 목적 때문에 이 수렴 과정을 간과한다. 인간과 다른 동물의 연속성을 무시시하거나 과대평가하는 식으로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문화주의자들이 옳다. 그들의 주장처럼, 언어를 습득한다는 것은 감각 세계를 포함해 우리의 세계 전체를 변모시키는 비약적인 발전이다

인용한 구절이 길지만, 요약하자면 이렇다. 테리 이글턴은 《이론 이후》를 통해 '문화 이론'의 형성과 역사를 그려내고 있다. 그는 특히 문화연구의 오류 몇 가지를 책 속에서 지적한다.  인용한 구절은 그 중 문화연구가 취약하다고 주장한 '도덕'의 문제를 논하는  6장 도덕에 나온다. 내가 여기서 읽고 갸우뚱한 대목은 '문화주의자'라고 번역된 대목이다. 원문에 어떻게 표기되었는지 모르겠으나, 문화연구에서 '문화주의'라는 개념이 꽤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글턴이 설명하는 '문화주의자'와 '자연주의자'의 대립 관계는 좀 엄밀하게 설명될 필요가 있다. 

더 뚜렷하게 말해보자면, 이글턴의 216쪽 내용은 '문화주의'와 '문화주의자'가 다르다는 것을 설명해줘야 한다이 대목이 정확하게 전달되려면 가령 이런 식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이글턴이 여기서 말한 '문화주의자'는 첫째, '문화주의'를 따르는 자인가? 둘째, 아니면 '문화'의 엘리트적인 개념을 신봉했던 리비스나 매튜 아놀드 같은 사람들을 따르는 '문화'+ '주의자'인가?  

첫째, '문화주의'Culturalism를 따르는 자,라면 이 책은 '문화주의'의 개념을 설명해주고, 이글턴은 여기서 이런 의미로 '기존의 '문화주의' 개념과는 다른 무엇을 설명하는 것 같다,고 해주는 것이 좋은 역자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럼 과연 '문화주의'가 무엇이길래? 문화주의는 쉽게 말해서 '문화연구'의 형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일종의 '정치적 기획'이라고 줄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레이먼드 윌리엄스가 '삶의 총체적 방식'이라고 정의내렸던 '문화'. 문화는 더 이상 우리 세계의 주변부가 아니며, 무엇보다 경제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지향점이었다. 이 지향점은 나중에 '구조주의'를 받아들이는 스튜어트 홀 같은 사람을 통해 두 개로 분리된다.  

무엇보다 '문화주의'는 계급적 권력에 관심이 많았다. 고로 권력을 가진 계급과 국가의 관계를 탐구하며, 이 관계로 인해 억압 당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위치, 그리고 그 위치 속에서 그들 스스로 만들어 내는 삶 속 저항의 목소리[일종의 저항 방식]에 관심이 많았다. 이러한 맥락 아래, 문화주의는 '그들의' 삶에 직접 들어가서 삶을 기록하고 관찰하는 '연구방법론'의 의미도 포괄한다.  

(나의 설명은 크리스 바커나, 요시미 순야, 프랜시스 뮬런 같은 문화연구자의 시선을 따랐다)

자, 이렇게 본다면 테리 이글턴이 주장하는 '문화주의자'와 '자연주의자'의 대립 속에서 '문화주의'+'자'란 도식이 있을 때, 뭔가 어색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주의'의 개념을 따른다면 이는 '문화주의'의 한계를 인식했던 문화연구자들이 내놓은 대안이었던 '구조주의'와 대립 혹은 상보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한다. 

이제 두번째 문제. 내가 보기에 이글턴이 말하고 싶었던 '문화주의자'란, '문화'의 의미 변화를 역사적으로 고찰하기 좋아했던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방식과 유사하다고 본다. 즉, 오늘날 우리의 삶 자체를 문화로 긍정할 수 있기 이전의 시대, 그 당시 '문화'가 갖는 어떤 우월성을 자신의 우월적 존재로 일치시키려 했던 사회. 그랬을 때, 이 사회를 주도했던 권력자 혹은 지식인들에게 '문화'는 일종의 질 높은 교양이자, 자신을 다른 존재와 구별짓는 '문명인'으로서의 징표였을 것이다. 고로 내가 보기에 물론 원어라는 것이 있지만, 한국어로 더 다가오는 이글턴의 구도는 '문화주의자' 대 '자연주의자'이기보다 '문명주의자' 대 '자연주의자'로 보인다. 그랬을 때 인간 본위의 사고로 인해 자연을 '구분'하려는 태도가 낳은 오류를 더 쉽게 독자들에게 인식시키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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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원 2012-05-27 0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역자입니다 ^^;; 본의 아니게 이해를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하네요. 일단 원래 표현은 "문화주의자"(culturalist[s]), "인문주의자"(humanist[s])입니다. 제가 번역할 때 사용한 하드커버판(Allen Lane, 2003) 156~157쪽의 내용이 문제네요. 제가 이해하기로 얼그레이효과님은 "문화주의자"와 "문화연구자"를 구분하고, 이글턴이 해당 부분에서 비판하는 "문화주의자"는 사실상 "문화+주의자"(리비스, 아놀드 등)=문명주의자 아니냐, 이렇게 보시는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역자로서 제 생각을 말씀드리면, 이글턴이 말하는 "문화주의자"는 "오늘날에는"(원어로는 these days)이라는 수식어가 함축하듯이 리비스나 아놀드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얼그레이효과님이 구분하는 바로 그 문화주의자가 맞습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이 책의 논의 구도에서 이글턴이 말하는 문화주의자는 곧 문화연구자입니다. 더 간단히 말해서 윌리엄스나 홀이나 크게 다를 바 없다고 보는 게 이글턴의 논의구도입니다. 그러니 보기에 따라서는 "싸잡아" 비판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 일단 이글턴의 논의구도가 그렇다는 겁니다.

그럼 이런 이글턴의 논의구도(더불어 표현법)가 정당하느냐......하는 문제가 남는데, 저도 문화이론을 전공하고 있지만, 이글턴이 좀 과하다는 생각은 드는데 사실 저도 뭐라 딱히 잘라 말하기가 좀...... 제가 해당 부분에 "좋은 역자"로서의 개입을 못/안 했던 건 제 자신이 이렇게 (아직도!) 결정을 못 내리고 있어서입니다. 긴 해제로 퉁칠려고 했는데 좀 부족했나 봅니다 ^^;;

그런데 바커, 순야, 뮬런 등이 "문화주의자"와 "문화연구자"(혹은 문화이론가)를 딱 구분하는 법을 제시했던가요? "문화주의[자]"라는 표현이 "문화" 만큼이나 다양한 용도로 쓰이는지라 저는 그 방법이 궁금하네요 ^^;;
 

조금 분절된 이야기지만, 지금 내 상태로는 이 정도 글쓰는 것도 다행이라 생각하기에 우선 남겨놓는 데 의의를 둔다.   

 

 

 

 

  

 

 

 

 

 

 

# 1. 잠깐 딴 이야기  

《이것이 문화비평이다》(2011)(이하 '문화비평')는 《무례한 복음》(2009)(이하 '복음')과 비교해서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물론 이택광은 '복음' 이전에도 왕성하게 자기 주장을 몇몇 단행본으로 해 왔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를 메인스트림으로 올려 놓은 책은 '복음'부터였다고 생각한다. '복음'과 '문화비평'에는 다리 하나가 있다. 그것은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가이드》(2010)(이하 '인문좌파')이다. 이택광의 글에 등장하는 반복적인 개념들. 왜 이 사람은 이 개념을, 이 이론을 자주 쓸까,라고 질문을 던지는 사람에게 '인문좌파'는 제목처럼 '가이드'가 되어주는 안내서라고 할 수 있다.   

# 2. 왜 벌써 베스트 앨범이 나왔지?

먼저 책을 다 읽고 난 후 소감. 짧게 말해서 난 '문화비평'에서 별 매력을 못 느꼈다. 아마 이 글은 왜 내가 매력을 느끼지 못했는가,를 이택광 개인의 잘못이 아닌 이택광이라는 사람을 둘러싼 학문의 구조와 연결지어 생각해보는 소소한(?)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도를 왜 했는가,를 더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보다 조금 더 '엇박자'를 취한 내 결언을 드러내자면, '문화비평'은 뭔가 피로감을 주는 책이었다. 그리고 뭔가 '자기반복적'이었다. 비유를 들자면 이랬다. 아직 베스트 앨범을 낼 가수가 아닌데, 벌써 베스트 앨범이 나왔네?라는 생각을 들게 하는. (앨범이 대략 3집 정도 나왔는데, 그 다음 앨범이 베스트 앨범으로 나왔을 때 뭐야,이거?하는 그 순간 말이다) 

좋게 포장하자면, 이것은 그만큼 이택광 본인의 의지가 '일관된 형태'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나쁘게 직언하자면, 이것은 그가 보여준 다채롭고 새로운 시선이 과연 '발전하는 세계관'으로 이어졌는가,라는 의문을 주는 계기일 것이다.   

 

# 3. 문화연구는 '문화비평'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이택광이 문화연구를 통해 '문화비평'의 중요성을 강조했을 때, 그가 '복음'의 서문을 통해 이야기한 사실처럼 '문화연구자'가 저널리즘적 글쓰기를 했던 시도는 많이 죽어있는 상태였다.(2000년대 초반부터였지?) 현실을 신속하게 사유하는 문화연구자는 광장의 언어 대신 학계의 언어를 정식화하는 데 더 큰 힘을 쏟게 되었다. 덕분에 많은 이론들이 학계를 채우고, 논의도 풍성해졌다. 그러나, 그럴수록 문화연구자들은 '잉여'가 되어 갔다. 현장의 급속한 변화에 놀래며 이러한 놀람을 해석하고 싶은 젊은 연구자들이 날마다 늘어나고 있지만, '문화연구'라는 제도적 과정은 이 젊은 연구자들의 목을 조르는 딜레마로 작용했다. '이론적 배경'의 엄밀성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러한 '이론적 배경'의 엄밀성이  '그럴듯한 논문'을 위해 필요한 도구로 전락하면서, 문화연구가 활용하는 이론은 '당연한 결론'을 위한 제사물로 헌납되었다. 그래서 문화연구자들이 다루는 '논문'은 점점 경직되어 갔으며, 그러한 경직된 논문은 그 논문이 다루는 주제의 신선도가 더 높을수록 진하게 드러났다.   

 

 이런 맥락에서 이택광이 문화연구 안에서 강조하는 '문화비평'이라는 시도는 내가 보기엔 90년대 문화연구의 복권으로 더 강하게 다가왔다. 서동진, 노염화, 김수기, 강내희, 조한혜정, 이재현, 정윤수, 이윤호, 신현준, 김창남 등등 현실에 대한 색다른 해석과 신속한 사유를 제시하는 문화연구자들의 언어는 1990년대 대중문화의 급속한 변화에 놀라며, 그 놀람의 이면을 들쑤시고 다녔던 글쓰기의 시대를 대변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만들어진 '동인'들. 문화를 통해 공유점을 만들어가며 비평집단이 형성되고, 그 비평집단의 모토는 경쟁하듯 표출되었다. 이런 가운데 어느덧 일상은 '공부할 수 있는' 주제가 되었고, 무엇보다 일상의 테이블에서 '재미있게 갖고 놀 수 있는 문화적 안주거리'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택광이 문화연구 안에서 문화비평을 주장하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절단과 파격을 주창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그의 주장이 뭔가 새롭게 느껴질 정도의 착각을 느끼게 하는 데,  학계의 몽매함도 있었음을 나는 주장하고 싶다. '문화연구'라는 판은 이리저리 다른 학과에 스며들어 있지만 그래도 어떤 제도적 힘을 갖고 '문화연구'를 주창하는 몇몇 학과들이 있다. 예를 들어 한국언론학회를 통해 움직이는 문화연구자들이다. 이들은 '미디어 /문화연구'라는 명칭을 통해 문화연구자의 '양육과 성장'을 나름 시켜주고 있는 제도권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집단은 앞에 붙은 '미디어'에 많은 제약을 받고 있다. 그래서 늘 문화연구를 '언론학'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사고해야 한다는 남모를 압박을 받는다. 여기서 좀 편하게, 넓직하게 자유로이 문화연구를 공부하는 곳이 중앙대 문화연구학과나 연세대 문화학 협동과정 등이 있다. 어느 집단이 더 이론이 강하다, 현장기술이 강하다, 분류할 수 없지만 앞에서 언급한 언론학에서 나타난 '미디어/문화연구'의 경직됨보다는 조금 더 학문적 분위기가 자유스럽다고 할까? 그런 게 있다. 

근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화연구라는 제도권 안에서 이택광이 문화비평이라는 시도를 한다는 것 자체가 전혀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늘 그는 '라깡 전도사'로 소비되거나, 문화연구의 사회학적 사고에 치우친 사람들에게 '정신분석학적 사유', '정치철학적 사유'를 들이대는 '화성인' 문화연구자로 인식되고 있는 듯하다. 사람들이 그가 라깡 전도사로서 문화연구를 라깡의 시선으로 해석하는 것의 깊이를 따지는 만큼이나, 이택광이 논문 이외의 글쓰기라는 채널을 통해 갖는 '시도'. 그 시도의 의의를 오늘날 문화연구자들이 함께 이야기해봐야 하지 않겠냐는 점. 이것의 공론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택광의 시도를 공론화함으로써 나는 문화연구자들이 현실에 대해 기계적인 이론의 대입과 반면 현실을 통해 이론을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현실에 개입하는 것이 얼마나 다른가를 이야기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문화연구자들은 '관성적'으로 기계적으로 이론을 찾고 그것을 논문이라는 양식으로 맞추기에 급급하다. 고로 늘 현실에서 이미 많은 담론은 생산되었는데, 반 박자 수준이 아니라, 두 박자 정도 늦게 열을 올리는 것이 오늘날 문화연구자들의 현실이다. 더 우스꽝스러운 것은 이런 현실이 곧 '학문적 깊이'를 위해 필요한 침착하고 차분한 연구자의 태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과연 그럴까? 그들이 내놓은 결과물은 결국 당연한 말들의 정리안 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정리안으로 희번덕거리며 자족하는 문화연구자들의 테이블에 그들이 연구하는 대중이란 없다. 오직 기계적으로 끼워 맞춘 이론의 그늘에 가려진 '구성된' 대중만이 있을 뿐이다. 

 

# 4. 이택광의 글도 뭔가 지쳐 보인다 

그러나 이런 문화연구의 안타까운 현실과 대조되는 이택광의 문화비평에 대한 열정이 뭔가 지루하고 피곤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 일까. 나는 여기서 이택광의 문화비평이 갖는 시도를 둘러싼 뜨거운 피드백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본다. 그는 다양한 사건이 담긴 그만의 '신화들'(바르트가 쓴)을 쓰고 있지만, 그리고 어느 정도 이러한 시도들이 환영을 받고 있지만 그럴수록 그의 열정적 외침이 '무궁무진'의 세계이기보다는 지나친 메아리로 들려온다. '쾌락의 평등주의', '중간계급' 등등 그가 늘 강조하는 한국 사회를 꼬집는 어떤 개념이 자주 나타남에서 오는 피로감 수준을 벗어나, 이것은 어쩌면 90년대 참 다양한 문화연구자들이 참여하여 만들어냈던 '문화비평'의 판에, 이택광 혼자 분투하고 있는데서 오는 피로감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이 피로감을 덜어내기 위해 문화연구라는 학문에 그리고 이 세계를 뭔가 다르게 해석하고 싶은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이 책에 스며든 다양한 사회적 현실에 대한 해석 a에 대한 반론이자 반응일 것이다. 이미 이러한 반론과 반응은 이택광의 블로그에서, 그리고 그 블로그를 즐겨 찾는 사람들이 시도하고 있는 일이다. 정작 '문화연구'를 한다는 사람들, 자신이 '힙'하다고 자랑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런 시도에 가장 둔감한 점은 학문 사회의 암울함을 보여주는 단면일 것이다. 지금 문화연구자들이야말로 '논문중심주의'를 벗어나 다른 채널로 더 대중에게 다가가야 할 때가 아닌가!

 

(덧붙임) 책의 짜임새로 보자면, 개인적으로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가이드》가 제일 낫고, 그다음 《무례한 복음》, 이번 책 《이것이 문화비평이다》가 제일 실망스러웠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나는 자음과 모음이 시도하는 '하이브리드 총서'라는 기획도 좀 의문을 갖게 되었다) 

편집부와 저자의 쿵짝이 뭔가 안 맞는다는 느낌이 읽는 내내 들었던 것은 왜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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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슴츠레 2011-07-26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포스트를 읽으니 격하게 말하자면 광인들 속에서 스스로가 미친 건 줄 알았다가 아 그래도 정상이 이게 맞긴 맞았구나 하는 느낌을 받는군요. 이론이라는 종교가 논문에서 딱딱하게 굳고 웹에서는 되도 않은 입장들을 정당화(결국 타인에게는 안 되고 자기 집단에만)하는 상황 속에서 짧기만 핵심만 담은 단상 공감하고 갑니다. 저 역시 한 때 이론의 자식으로서요.

얼그레이효과 2011-07-27 05:43   좋아요 0 | URL
게슴츠레님, 오랜만입니다. 정신없이 써서, 글이 좀 그렇죠? ㅜ.ㅜ 좀 더 가지런한 글로 또 한 번 생각나누자구요~

2011-09-02 0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4 08: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기획한 '앎과 삶'시리즈 2권. "20대, 오늘 한국 사회의 최전선"에 부족하지만 제 글 한 꼭지 담았습니다.  서점에서 들춰보시다가 목차에 '김신식'이 보이면, 씨익 한 번 웃어주시면 쿨럭. (다른 알라디너의 글도 보이네요. 기웃기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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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22 0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5 06: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11-07-22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축하해요. ^^ 근데 이거 아직 검색이 안 돼요.

얼그레이효과 2011-07-25 06:13   좋아요 0 | URL
이제 좀 뜨는 것 같아요! 좋은 한 주 되세요! 고맙습니다~

윈터 2011-07-24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잘 읽어보겠습니다. ^^

얼그레이효과 2011-07-25 06:14   좋아요 0 | URL
분량이 얼마 안 되어 서점에서 2분 안에 다 읽으실 겁니다. 크크.
 


 

  

 

 

 

 

 

 

평소 가방에 잔뜩 무엇을 넣고 다닌다. 그리고 그것을 꺼내길 좋아한다. 역도 선수도 아닌데, 나의 무게를 실험하며, 5kg 더! 하는 마음으로 무엇을 넣는다. 그런데, 왜 이렇게 넣고 다니는가? 제대로 물은 적이 없다. 스스로에게. 이 물음은 조금은 무겁게 바뀌었다. 나에게 가방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나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방’이란 무엇일까.

 

사람은 달릴 때, 정지와 멈춤을 인식한다. 그러나 ‘가방’도 생각해보면 비슷한 원리인 것 같다. 가방을 약간 의인화하자면, 가방은 늘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다. 좀 쓸쓸하게 말하자면,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물이다. 가방은 어디를 향하고자 할 때, 나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소소한 사물이자 필수적인 사물이다. 이러한 설렘은 주로 ‘채움’에서 나타난다. 가방에 무엇을 넣는다는 것은 내가 늘 안주하던 ‘이 곳’을 떠난다는 ‘탈주’의 시도다. ‘저 곳’이 내게 어떠한 희열을 줄 지 모르지만, 우리는 ‘떠난다’는 행위 자체에 일단 기대를 건다. 그것은 그만큼 ‘이 곳’이 갖는 일상의 공간. 그리고 그 공간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시간’이 늘 ‘탈주’와 나의 거리를 멀게 했다는 걸 반영하기도 한다.


‘가방’은 누군가를 떠나보낼 때 사용되기도 한다. 여기서 그 누군가는 ‘이 곳’을 떠나야 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곳’은 이승에서의 삶일 것이다. 누군가의 육신이 자신의 존재를 ‘저 곳’에 맡겨야 할 때, 가방은 ‘이 곳’에서의 육신을 정리하며, ‘저 곳’에서의 영혼을 빌어주는 매개적인 사물이다. (가방은 미디어가 되기에 충분하다) 이 매개 속에서 여전히 ‘채움’은 삶의 정지와 작동을 표시한다. 가방에 들어가는 고인의 유품은 누군가의 삶이 더 이상 이곳에서 나타나지 않는다는, 안타까움과 그리움의 표현이자, 그 표현은 곧 ‘향수의 장소’가 된다.


가방은 끊임없이 움직일 수도 있다. 가방은 정처 없이 떠도는 누군가의 귀한 친구가 된다. 서로 말은 없지만, 가방 속에 들어간 사물은 가방과 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연결 고리다. 가방과 나는 ‘채움’과 ‘비움’을 통해 정체성을 확인하고 공유한다.


영화 <인 디 에어>를 보면서, 다시 ‘가방’에 대해 생각해봤다. 우리는 정해진 목표, 정해진 규격, 그것의 편안함 혹은 일정함에 속해 있다는 표식으로 가방을 들고 다니며, 가방 속을 채울 것인가. 아니면, 우리는 늘 이 곳의 안정감을 균열내기 위한, 혹은 탈주하기 위한 수단으로 가방을 들고 다닐 것인가.


때론, 어디론가 떠난다는 것 자체가 속박이 되어버린 이 세상에서 가방의 채움과 비움이 주었던 ‘탈주’의 희열은 뭔가 뒤바뀐 것 같기도 하다. ‘가방’과 함께 할 수 있던 저 수많은 경험의 곳을 ‘가야한다’라는 압박으로 느낄 때, 가방과 함께 하는 ‘떠남’, 그 발걸음과 어깨의 짓누름은 무겁고 또 무겁기만 하다.


그러나 이러한 무거움보다 더한 ‘무서움’은 가방을 매거나 들고 가지 않는 사람에게 지워지는 무형의 가방들이다. 우리 삶엔 아직 꺼내지 않은 가방 속 물건이 많고, 굳이 꺼내지 않아도 될 가방 속 물건들도 많은 것 같다. 가방을 불태워버리자는 짐짓 ‘정치철학적’ 시각은 아직 섣부르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이 사유에서만) 일단 필요한 건 내가 지고 있는 이 가방을 쳐다볼 때다. 너무 원칙적이지만, 이 원칙을 지키기도 살기 어려운 세상이 아닐까. 휙휙 던져지는 가방, 그 피곤한 사람들의 세상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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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9 0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5 06: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19 1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5 06: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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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7-19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제가 늘 메고 다니는 가방을 다시 살펴보게 되는군요. 주로 교정지를 넣고 다니니 밥벌이와 직결된 가방인 셈인데, 그동안 홀대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ㅎㅎ 더위에 건강 잘 챙기세요, 얼그레이님^^

얼그레이효과 2011-07-25 06:16   좋아요 0 | URL
후와님의 가방 이야기도 궁금하네요^^ 후와님도 더운 여름 건강 조심하세요!

2011-07-19 22: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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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25 06: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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